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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이광수 마의태자 [3]

by 역달1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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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 - 하였다.

그러나 주막마다 들어서 물어 볼 수 없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빨리 몰아 원회보다 먼저 아슬라성에 들어 갈 생각만 하였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주막에 들었다. 그러나 혹은 봄철 물이 넘치는 개천을 만나 길이 더디고, 혹은 비를 만나 촌가에 들어 가비를 긋노라고 지체 하였다.

주막에서는 가끔 같이 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행색을 수상히 여겨 수군거리 기도 하고 뻔뻔한 사내들은 말도 붙이어 보았으나 두 사람이 심히 당돌히 대답하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사흘 길을 가도록 원회는 만나지 못하고 행인 에게 물으면 혹은 어저께 그런 사람을 보았다 하고, 혹은 아침만절에 너는 고개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생각컨댄, 원회도 어서 공을 이루고 북원으로 돌아 와난 영을 손에 넣을 양으로 하루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아슬라로 가는 모양이다, 그러할진댄 이는 큰일이다. 만일 원회가 중로에서 지체를 아니하면 두 사람은 도저히 아슬라성에 앞서서 들어 갈 도리가 없고 그렇다하고 궁예의 목숨은 위태한 것이다. 그런데 난영‧운연도 몸이 피로하고 말도 잘 탈 줄 모르는 주인들을 실어 동이 닿고 다리를 절었다. 두 사람의 맘은 부쩍부쩍 조였다.

해는 저물었다. 난영과 운영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말에 싣고 원 회와 자취를 따라 십리 가다가 어떤 고개 턱 술막거리에 다다랐다. 흐르는 듯 마는 듯한 검은 냇물 위에는 새로 놓인 흙다리가 있고 냇가에는 아직 드문드문 아주 봄빛도 없는 버두나무가 서 있고 수십 집이나 되는 술막 거리는 초 어스름의 가물가물 한 안개 속에 잠겼다. 버드나무 밑 안개 속에서는 말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이 말을 몰아 다리를 건너려 할 때에 다릿목에 지키고 있던 군사가 붉은 상모 단 창을 들어 길을 가로 막고, 『 거 누구? 어디로 가는 사람이야?』 하고 묻는다.

운영이 얼른 말에서 내려 군사를 향하여 한번 읍하니 군사는 운영은 기가 막혀, 난영과 운영은 기가 막혀, 『 무슨 일로 죄없는 행인을 뒷짐을 지어 끌어 가오?』 하고 물으니, 군사들은 다만 혁편(革鞭)으로 후려 갈기며, 『 웬 잔소리냐? 네 죄를 네가 몰라?』

- 170 - 할 뿐이다.

난영과 운영 두 사람은 어떤 군막(軍幕)으로 끌려 들어 갔다. 군막 안에는 사오인 높은 군사가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끌려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일어난다. 그중의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상(舍上)인 듯한 군사 앞으로 두 사람을 끌어다가 무릎을 꿇리고 난영을 붙들어 온 군사가, 『 아까 원회 대사가 말한 자객이 아마 이놈들인가보오. 북원서 온다 하옵고 세달사에서 대장군마마를 모신 일이 있다는 것이 모두 수상하기로다 릿목에서 붙들어 왔소.』 하고 아뢴다.

『우리는 북원서 오는 사람이오. 일찍 태백산 세달사에서 공부할제 궁예 장군을 모신 일이 있기로 불원 천리하고 찾아 오는 길이요.』

하였다.

군사는 말하고 섰는 운영과 말 타고 앉았는 난영을 번갈아 보더니, 『 북원서 온다? 북원서 오면 원회라는 사람을 아오?』

하고 묻는다.

『아오. 원회가 우리보다 하루 앞서 북원을 떠났기로 우리도 그를 따라잡으려 하였으나 못 미쳤거니와, 원회 대사가 언제 이곳을 지났소?』

하고 운영은 가장 태연하게 물었다. 말 위에서 듣고 있는 난영의 맘은 더 조였다.

『원회 대사는 바로 저녁때 전에 이곳을 지냈으니 빨리 갔으면 인제 삼십 리 아슬라성에 거의 다 들어 갔겠소.』

하고 그 군사가 댓 걸음 뒤에 섰는 어떤 늙은 군사의 곁으로 가서 무슨 말을 소근거리더니 그 곁에 있던 여러 군사가 함께 내달아 난영의 말고삐를 빼앗아 쥐고, 『 내려라, 좀 물어 볼 말이 있다.』 하고 난영을 끌어 내린다.

그런 후에 한 군사는 난영과 운영이 타고 오던 말을 끌고 두 군사는 난영과 운영을 뒷짐을 지워서 버드나무 그늘 말소리 많이 나는 곳으로 끌고 들어 갔다.

수염 난 사상은 두 사람을 이윽히 보더니, 『 너희들은 여기서 오늘 밤을 내일 대군마을에 보하여 희보를 기다려서 떠나게 하겠다.』

하고 부드럽게 이른 뒤에 곁에 선 군사를 불러, 『 이 두 사수를 결박을랑 끄르고 내려 가두되 밤새도록 잘 파수 하여- 171 - 도망 하지 못하게 하고 원로에 시장할 터이니 분부한다.』 난영은 사상 앞에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 우리 길이 심히 급한 길이오니 우리를 곧 아슬라성으로 보내어 주시되, 만일 우리를 믿지 못하거든 군사 안동하여서라도 곧 아슬라성으로 가게 하여 주오.』 하였다.

그러나 난영의 말은 듣지 아니하고 수염 난 사상은 다른 방으로 들어 가버렸다. 여러 군사를 보고 무수히 애걸하여 쓸 데 없이 두 사람은 창든 군사를 보고 무수히 애걸하여 쓸 데 없이 두 사람은 창든 군사에게 끌려 옥으로 왔다. 옥이라야 민가의 곳간을 임시로 쓰는 것이라 문안에 들어가니 얼었다 녹은 흙 냄새만 코를 받치고 달빛 하나 바람 한점 들어 오지아니한 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 가 보니, 여기 저기 거칫거칫하는 것 이 아마 먼저 붙들려 온 죄인들인 모양이다.

갖다 주는 밥도 목에 넘어가지 아니하나 억지로 억지로 몇 숟가락을 먹 고상을 물리니 군사가 섬걱적 하나와 때묻은 이불 하나를 갖다가 집어던지며, 『 이 것은 너희들만 덮어! 다른 놈은 건드리지 말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판장문을 닫쳐 버린다. 그리고는 문밖으로 뚜벅뚜벅하고 파숫군이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어두워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숨소리로 보든지, 이따금 기침하는 소리로 보든지 육질인은 되는 모양이다. 모두 섬 거적을 깔고 앉았기 때문에 조금만 몸이 움직여도 부석부석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면 문밖에서 판장문을 쾅쾅 두드리며, 『 가만히 있어! 꿈지럭거리지 말어!』 하고 파수 보는 군사가 소리를 지르고 그래도 부시럭거리면 판장문 틈으로 창을 들여 보내어 홀 근 홀근 하면서, 『 더 꿈지럭거릴 테야? 모조리 창으로 쥐 잡듯할 테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난영과 운영 두 사람은 말도 못하고 서로 손만 마주 쥐고 틀었다. 밤은 깊어 간다.

원회가 만일 아슬라성에 들어 갔다 하면, 벌써 궁예를 만났을 것이다.

궁예를 만났으면 혹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혹은 술을 같이 먹다 가원 회의 독한 칼날에 궁예의 목숨은 벌써 끊어졌을지도 모를 것이다. 비록아 직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궁예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을- 172 - 것이다.

난영은 차라리 사상에게 모든 일을 실토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였다.

만일 사상이 궁예에게 충성이 있다하면 반드시 자기를 놓아 보낼 것 이 다난 영은 이 뜻을 운영에게 통하였다. 운영도 그 뜻에 찬성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일제히 판장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파수 하던군 사들이 깜짝 놀라, 『 이 놈 누구냐 우네일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 붙들려 온 두 사람들이요, 사상께 급히 할 말이 있으니 나를 좀내놓아 주시오.』

하고 악을 썼다.

그래도 군사들은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판장문을 발길로 차고 여자의 목소리로 목을 놓아울었다. 옥중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고 파수하는 군사들도 놀래어 사상에게 그 연유를 아뢰었다. 사상도 이상히 여겨 두 사람을 불러 오라 하였다.

난영과 운영은 다시 사상의 앞에 끌려 갔다.

난영은 사상이 묻기도 전에, 『 나는 남자가 아  여자요. 나는 북원 양길 장군의 딸 난영이요. 아까이 앞을 지나간 원회는 아버지 양길 장군의 명으로 독을 바른 칼을 품고 궁예 장군을 죽이려고 온 것이요. 나는 궁예의 목숨을 구하려고 규중 처녀의 몸으로 남복을 하고 불원 천리하고 원회를 따라 오던 기리요.

원회가 이미 아슬라성에 들어 갔으면 궁예 장군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으니 사상께 서도 궁예 장군께 충성이 있거든 곧 나를 놓아 아슬라성으로 가게 하시오!』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사상도 난영의 말을 듣고는 놀랐다. 원회가 칼을 품고 갔다 하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어니와, 양길의 딸이 궁예를 사리려고 온다는 것도 이상 한일이다.

난영‧운영의 행색이 수상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놀라운 소리를 듣고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난영과 운영의 단아하고도 충성된 태도를 볼때에는 그 말을 믿고도 싶었다.

『북원서 자객이 온다는 소문이 있더니, 그러면 원회가 그 자객인가.

제가 자객이니까 뒤를 따르는 사람을 꺼린 것인가.』

하고 사상은 곧 건장한 군사들을 불러 잘 달리는 말 네필에 안정을 지으라- 173 - 하고, 『 진실로 그러할진댄, 군사들을 안동해 보내는 터이니 이 길로 떠나오.

원회가 둥구내원에서 저녁을 먹었으면 거기서 약간 지체가 되었을 것이요.

 원회는 큰길로만 갔을 것이니, 작은 길로 가면 십리는 넘어 지를것이라, 군사에게 병부(兵符)를 주어 보내니 이것을 가지면 아무러 한밤중에라도 장군 마을에 들어 갈 수가 있으니 빨리가오.』 하였다.

난영과 운영은 고맙다는 치사도 할 새 없이 두 군사와 함께 말을 달렸다.

이월 보름 봄안개 끼인 달빛 길로 네말은 축축한 흙을 차면서 질풍같이아 슬 라성을 향하고 달렸다. 숙신간에 망우리 고개를 넘어 둥구 내 원에 다다르니 말 탄 사람 하나가 거기 들어 저녁을 시켜 먹고 해지게 아슬라 를향하여 떠났다고 한다.

난영과 운영은 피곤한 것도 잊어 버리고 군사를 따라 둥구 내 원에서부터는 오불꼬불 한 작은 길로 고개 넘어 벌을 건너 개 짖는 초락 앞을 지나, 나는듯이 달려 갔다. 이십리, 시오리, 십리 하고 아슬라성은 점점 가까와 지고 말들은 몸에서 피땀을 흘렸다. 아슬라성에 가까이 갈수록 길가에 통나무 불을 피워 놓고 창 든 군사와 말 탄 군사가, 『 거 누구?』 하고 묻는 데가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앞선 군사가 조그마한 기를 내어 두르며, 『 병부( 兵符) 야!』

하고 호기 있게 소리를 치면 군사들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마주 기를 두를 뿐이엇다. 이것을 보고 난영은 조금 안심하였다 —————원회는 병부가 없으므로 이 파수막을 지날 때마다 조금씩 지체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네 사람은 뒷고개라는 아슬라성 마지막 고개에 올라 섰다. 성 굽이 낮은 데로 불이 조롱한, 아슬라성이 들여다 보인다. 네 말은 굳게 닫힌 성문 밖에 섰다. 시커먼 성은 꿈틀꿈틀 끝이 없는 듯하였다. 성문밖에는 역시 말 탄 군사와 창 든 군사가 지키고 있다가, 『 거 누구?』 하고 외친다.

『병부야! 문 열어라!』

하고 앞선 군사가 기를 두르며 호기 있게 외쳤다.

『어딧 병부?』

하고 지키던 군사가 또 한번 외쳤다.

- 174 - 『 흙다릿 병부!』

하고 앞선 군사가 대답한다.

삐걱삐걱 요란한 소리가 나며 쇠투겁을 한 무서운 큰 성문이 열린다. 네 말은 다시 굽을 들어 돌 깔아 놓은 길로 투드럭투드럭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 갔다. 이윽고 잠든 거리를 지나 아슬라 대장군 마을에 다다랐다.

『병부야 병부야!』

소리를 치며 말 탄 채로 네 사람은 삼문 앞에 이르러 말을 내렸다. 삼 문안에서는 한가로이 거문고 소리와 노랫 소리가 울려 나온다. 아직 아무 일도 없나 하고 난영은 피곤한 몸을 사문 기둥에 기대고 합창 하며, 『 나무 미륵존불.』 하고 감사한 기도를 올렸다.

운영은 몸을 거두치지 못하고 난영이 기댄 기둥에 기대었다. 닷새 동안을 거의 밤낮으로 원로의 풍우에 시달린 두 처녀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눈 깜짝할 동안이 무서운 동안이다. 난영이 온 줄만 알면 원회는 곧 그 독약 바른 비수를 쓸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난영은 삼문을 여는 동안이 십년과 같이 길게 애를 태웠다.

이때에 궁예는 오래간만에 옛벗 원회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회는 북원을 떠날 때에 미륵당 앞에서 난영을 보고 은밀한 먼 길을 떠난다는 말을 한 것이 반드시 난영이 눈치를 채었을 것을 생각하고 만일 그렇다 하면, 반드시 하면 누구를 따라 보낼 것을 생각하였고 따라 보낸다하면 그것은 신훤이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중로에서 지체하지도 못 하고 연해 신훤이가 따르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뒤를 돌아 보며 주야로 달려오다가 그래도 미심하여 흙 다리 사상에게 자기 뒤에 오는 수상한 사람이 있거든 붙들어 두라는 부탁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는 아슬라성에 들어 오는 길로 곧 궁예를 찾았다.

궁예는 원회라 말을 듣고 삼문까지 나와 원회의 두 손을 붙들어 들였다.

원회의 말 못되게 피곤한 기색을 보고 궁예는, 『 웬일인가?』

하고 원회가 이처럼 급작스럽게 온 뜻을 물었다.

원회는 맘의 간지러움을 참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 친구를 위하는 의리가 아니고는 이 길은 오지 못할 길일쎄. 내가 목숨을 보전하여 여기까지 온 것만 다행일쎄.』 하고 양길이 궁예를 미워하여 죽일 뜻을 품은 것과, 자기가 떠나던 다음- 175 - 날에 궁예를 죽일 자객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을 자기가 어찌하여 알았다는말과, 자기도 궁예 때문에 양길의 의심을 받아 생명이 위태하였다는 말과, 많은 군사와 자객이 자기의 뒤를 따라 나섰다는 말을 한 뒤에, 원회는 가장 감개 무량한 듯이, 『 사람을 어찌 믿나? 친구를 어찌 믿나? 내가 이만큼 알려 주었으니 내일부터는 조심하되 친구를 조심하소.』 하고 유심하게 말끝을 맺는다.

궁예도 양길이 자기를 시기한다는 말과 또 하필 진헌에게서 비장( 裨將)이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고, 또 양길이 힘이 궁예를 당하지 못할 줄 알므로 자객을 보내리라는 소문도 전지 문지 들었던 터이라 옛 친구 원회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회의 말에 「 친구를 조심하소」하는 것이 이상하여, 『 친구를 조심하라니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원회는 말하기를 원치 안하는 듯이 눈을 감고 개를 기웃 거리 더니, 『 그만하면 알아 듣겠네그려.』

하고 괴로운 빛을 보인다.

『북원에 남아 있는 내 친구래야 자네가 떠나면 신훤 밖에, 설마신훤이야 나를 해하러 들겠다. 그런데 어째 오려면 신훤도 함께 오지를 아니하였나?』 하고 궁예는 의심 나는 듯이 묻는다.

원회는 속으로 웃으나 겉으로 찡그리며, 『 그 사람더러는 내가 떠난단 말도 못하였는걸……어찌하나 사람을 믿지 마소. 그만큼 말하면 알아 듣소.』 하고 입을ㄹ 다문다.

궁예는 얼굴에 근심 빛을 띄우며, 『 그러면 신훤이가 나를 죽이러 온단 말이야? 나도 못 믿겠네. 만 일 자네가 신훤이가 칼을 들고 나를 해하려 한다면 나는 가슴을 벌리고 주는 칼을 받으려네.』 하고 원회를 바라보았다. 원회는 낯이 간지럽고 눈이 부시어 얼굴 들 곳을 찾지 못하고 손으로 허리춤에 찌른 비수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 계집 일에야 친구가 다 무엇이요, 나라는 다 무엇인가. 친구인 대장부의 맘도 못 믿으려든 하물며 예쁜 젊고 정많은 계집의 맘을 어찌- 176 - 믿나?』 하고 은연히 신훤과 난영을 꼭 씹었다. 궁예는 더욱 맘이 괴로왔다.

궁예가 괴로와하는 양을 보고 원회는 다시 허리춤에 꽂은 비숫 자루를 만지며, 『 그러나 자객이 온다기로 하늘이 아는 자네를 감히 어찌하겠나? 또 북쪽으로 오는 사람은 모조리 붙들어 놓으라고 했으니까 아무 염려 없을것 일 쎄.』 하고 자기 앞에 놓은 굴을 들어 마시며, 『 자 —— 술이나 먹소. 나는 비록 초조한 이 꼴이 되었네마는, 자네는 명성이 천하에 융륭하니 낸들 아니 기쁘겠나, 자 마시게.』 하고 원회는 손수 궁예의 잔에 술을 따른다. 궁예도 마지 못하여 술을 드니 모시고 앉은 사네 영인(伶人)과 계집 영인(伶人)이 새로운 곡조를 아뢴다.

주객이 바뀌어 원회가 도리어 궁예에게 술을 권하여 궁예가 술 취하 기를 재촉하니 궁예도 한잔 두 잔 마시는 술에 적이 맘이 풀려 영인이 곡조를 아뢰는 대로 혹은 칭찬하고 혹은 무릎을 친다.

이때에 통인이 들어 와, 『 대장군 마마께 아뢰오. 시방 흙다리 사상에게서 병부 들어 왔소.』

하고 아뢴다. 아뢰던 곡조는 뚝 끊었다. 궁예는 손에 들었던 잔을 내려놓으며, 『 들라 하여라.』

하고 분부를 내린다.

원회는 무슨 일이 생겨서 마침 좋은 기회를 놓치지나 아니하는가 하고 맘에 근심되었으나 그런 빛을 낯색에 내지고 아니하고 태연히 취한 모양을 하고 앉았다.

얼마 아니하여 통인이 몸을 여매, 군사 두 사람이 문밖에서 허리를 굽히고 가죽에 싼 병부를 받들어 드린다.

궁예는 통인의 손에서 그 병부를 받아 안상에 놓고, 『 무슨 사고 있느냐 아뢰라.』

하고 분부하였다.

두 군사는 다시 허리를 굽히며, 『 여기 젊은 선비 두 사람이 왔사온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 사옵고, 대장군 마마께 현신으로 아뢴다 하옵니다.』 하고 두 군사가 좌우로 갈라 서서 길을 여니 청포( 靑袍)에 오 각 건( 五角巾)을 쓴 난영과 운영이 들어 와 궁예 앞에 합장하고 허리를- 177 - 굽힌다.

궁예는 고개를 끄떡였다. 사람의 인사를 받은 후에 두 사람을 바라보며, 『 보아 하니, 젊은신 두 분 선비신데 무슨 일로 이 깊은 밤에 나를 보시려 오?』 하고 공손히 물었다.

난영은 아직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볼 때에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곁에 원회가 가장 슬이 대취한 듯이 눈을 감고 앉았는 것을 볼 때에 억제 할 수 없는 미움을 깨달을뿐더러 아직도 원회가 마지막 기운으로 궁예를 해하지나 아니할까 하여 염려가 놓이지 아니하였다.

궁예는 원회의 품에 독이 묻은 칼이 품어 있는 줄도 모르고 손에는 옛 친구를 대하는 반가운 정 밖에 가진 것이 없어 맘을 턱 놓고 앉았다.

그러나 옛 벗에게 대한 두터운 정이 배반하는 벗의 독한 칼날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난영은 궁예의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나가며 넌짓 팔을 들어 노랫가락으로, 『 석남사 깊은 밤에는 헤쳐 찾던 사람아 슬라 머나먼 길어이하여 오다던고 독한 탈 품은 옛 벗을 삼가소서 함이라.』 하고 머리에 쓴 오각건을 벗어 버렸다. 그것은 난영이었다.

궁예는 깜짝 놀라 벽에 걸린 칼을 벗기기가 바쁘게 칼집을 빼어 던지었다. 삼척이나 되는 칼날은 촛불에 번쩍하였다.

지금까지 취한 체하고 있던 원회는 금시에 술이 다 깬 듯이 벌떡 일어나며 허리에 꽂았던 한 뼘 넘는 비수를 때어 들었다. 비수에서는 독한 자주 빛이 났다.

원회는 궁예를 향 하여, 『 장군! 그 칼로 난영을 쳐라. 난영이야말로 장군을 죽이러 온 양 갈의 자객이다.』

하였다.

궁예는 칼을 빼어 들었으나 누구를 칠지를 몰랐다. 옛 벗인 원회를 베랴, 사랑 하는 아름다운 난영을 베랴.

- 178 - 이 때에 운영이 두 팔을 버리고 원회의 앞을 막아 서며, 『 원 회의 칼은 독이 발린 칼, 장군마마의 목숨을 겨누는 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회는 한 팔로 운영을 떼밀고 비수를 궁예에게 던지었다. 칼날이 궁예의 가슴을 향하고 날아가는 길에 운영의 몸이 번뜻하더니 원회의 던진 칼 이 운영의 가슴에 꽂히었다.

원회는 자기가 던진 칼이 운영을 찌르고 만 것을 보고 허리에 찼던 환도를 빼어 들었다. 그러나 원회는 다리는 벌벌 떨리고 몸은 좌우로 흔들렸다.

궁예는 눈을 부릅떠 원회를 노려 보며, 『 이 놈 원회야! 또 무슨 면목이 있어 칼을 빼어 나를 겨누느니? 이 사람의 껍데기를 쓴 짐승놈아, 조금이라도 사람의 맘이 잇거든 네 손에 빼어 든 칼로 개만도 못한 네 모가지를 찍어라!』 하였다.

원회는 물 먹는 고기 모양으로 입만 넙쩍넙쩍하고 아무 말이 없더니전 신의 맥이 풀리는 듯이 칼 든 팔을 툭 떨어뜨린다. 칼이 싸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원회는 고개를 숙이고 두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 궁예야, 네 맘대로 해라.』 하고는 털썩 주저앉는다.

궁예의 코에서는 불길이 확확 뿜고 눈에서는 한 줄기 번개가 번쩍거렸다.

그 가슴은 폭풍을 받는 듯한 모양으로 불룩거리고 숨소리에 창이 떨리는 듯하고 그의 너슬너슬한 머리터럭은 오리오리 불길이 되어 마치 부동 명왕( 不動明王) 같았다.

궁예는 참을 대로 참을 수 없는 듯이 원회의 곁으로 달려 가서 칼을 높이 원 회의 머리 위에 들었다. 원회는 들은 칼을 보고 칼을 막으려는 듯이 두 팔을 머리 위에 들며, 『 죽여라.』 하고 떨리는 소리로 부른다.

궁예는 원회를 내려다보다가 한번 픽 웃고 들었던 칼을 내리더니 곁에 쓰러진 운영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 원회의 눈앞에 바싹 대며, 『 받아라, 한번 더 이 칼로 나를 죽여 보아라.』 하고 칼을 원회의 앞에 던지고 태연히 돌아 서서 제자리로 와 앉는다.

원회는 자기의 무릎 앞에 떨어진 피 묻은 칼을 본다. 그 자루는 자기가- 179 - 궁예를 대하여 술을 마시며 만작만작하던 자루다. 그런데 그 칼이 인제는 날카로운 끝을 자기에게 향하고 방바닥에 떨어져서 아직도 피에 배부르지못한 듯이 번쩍번쩍하고 있다.

원회가 칼을 들여다보고 앉았는 양을 보고 얼른 원회의 앞으로 달려 가 그 칼을 집어 들며, 『 살아서 돌아 가느니보다 죽어서 못 돌아 가는 것이 더욱 충신이라고 내가 미륵당 앞에서 말하였소. 당신도 소원대로 충신이 되는 것이 좋고나도 남편과 운영의 원수를 갚는 것이 좋으니 운영의 피는 원회 대사의 피로 씻어야만 하겠소.』 하고 비수를 넌짓 들어 끝을 원회의 가슴을 향하고 내려 박았다. 원 회는 흠칫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칼은 보기 좋게 원회의 젖가슴에 박혔다.

원회는 물에 빠진 사람 모양으로 두 손으로 허공을 잡아 당기다가 난영을 노려 보며 모로 쓰러졌다.

배 반 『 어디 메로 가노 쇠 두레로 가네 무엇 하러 가노 쇠두 레나 싯 내 벌에 대궐 역사 모르나.』

이러한 동요가 돌아 다닌 것은 임술(壬戌)년부터다. 각 청에서 목수· 미장이· 대장장이· 새김장이· 환장이는 말할 것도 없고 힘개나 쓸 장정들은 혹은 부역으로, 혹은 돈벌이로 쇠두레(鐵圓)로 모여 들었다.

궁예는 솔메(松岳)에서 왕이 되어 천하의 절반을 호령하게 되매, 솔멧서울을 너무 좁다 하여 대아손 왕건(王建)을 들어 백만호라도 능 히 용납하고도 남을 쇠두레에 새 서울을 세우기로 하고 스물 다섯 달에 우물 이 콸콸 솟는 싯내벌(楓川原)에 집채 같은 바위와 아름드리 재목을 실어들이고, 서울보다도 크고 좋고 당나라 장안보다도 크고 좋은 서울을 이룩 하기로 하였다.

대궐과 각 마을은 마할 것도 없거니와, 우물정자로 바둑판 모양으로 뚫린 팔백 팔 거리라는 골목에 모든 전방과 은장 방· 대장간· 주막 집· 술집 아울러 모두 훨썩훨썩 드높게 으리으리하게 지어 놓고 사방 십리 장안에- 180 - 초가집 한 채도 보이지 않게 만들고 한가운데 큰 절이 있어 큰 종을 달고 팔방에 작은 절 여덟이 있어 큰 절에서 큰 종을 칠 양이면, 작은 여덟 절에서 작은 여덟 종을 치되 장단 맞추어 고저 맞추어 울게 하고, 싯내( 楓川) 의 맑은 물을 서울로 끌어 들여 곳곳이 못을 만들고 못 속에는 연을 심고 못가게에는 각색 화초와 나무를 심어 여름이 되면 꽃 향기와 새소리가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와 같게 하였다.

을축년 사월 팔일 궁예왕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솔메(松岳) 옛 서울을 떠나 쇠두레 새 서울에 들어 올 때에는 그 위의의 엄숙함과 노부( 鹵簿) 의휘황 찬란함이 비길 곳이 없었다.

댓제(竹嶺) 이북은 모두 마진(摩震) 나라 임금 궁예대왕의 땅이다.

대동강가에 한참 설레던 홍의적(紅衣賊)·황의적(黃衣賊)도 궁예의 위엄에 눌려 항복을 하고 궁예에게 충성을 보이는 표로 홍의와 황의를 입은 채로 궁예왕이 새 서울로 오는 길을 닦았다.

궁예의 노부가 지나가는 길에 남녀 노소, 뭇 백성들은 미륵불의 환신이신 새 임금을 한번만 보아지라고 밥을 싸가지고 길가에 나와 엎드려 거동이지 나가기를 기다렸다. 십리에 닿은 일행의 이 끝이 저편에 번뜻 보일 때에, 백성들은 이마를 땅에 대고 염불하기를 시작하여 행렬의 저끝이 까맣게 지나간 뒤에야 고개를 쳐들어 멀리 바라보고 다시 합창하고 다시 예찬 하였다.

그래서 백성 중에 정말 왕의 위의를 본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저마다 왕을 보았다 하여 혹은 머리에 금관을 썼는데 거기서 서광이 발하여 눈이 부시더라 하고, 혹은 전신이 불길 속에 있어 둥그레 한 얼굴이 화경 같더라 하고, 혹은 눈을 감고 보면 빛나는 왕의 모양이 보여도 눈을 뜨고 보면 눈이 부시어 안 보였다고도 하였다.

『부처님이 우리 임금이 되시었다.』

하여 늙은 어른들은 수희(隨喜)의 눈물을 흘리며 수없이 왕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고 「나무아미타불 미륵존불」을 불렀다.

푸른 풀 푸른 나뭇잎 그 속에서 노래하는 새며 파랗게 맑은 하늘에 떠 도는 구름까지 어느 것이 태평 기상 아님이 없었다. 천년 옛 나라인 신라와 옛날 백제 땅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진헌의 후백제 따위는 어는 구석에 있는 둥 만둥하였다.

궁예왕이 싯내벌 새 서울에 들어 가는 날 ———을 축년 사월 초팔일은 이 세상에서는 전에 있어 본 이로 없고 다시 있을 것 같지도 아니한 큰 명절 이었다.

- 181 - 이 날에 하늘은 더욱 높고 더욱 맑고 쇠두레 넓은 벌에 부는 바람은 이상한 잎사귀를 나부끼어 궁예의 연 앞에 예배를 시키는 듯하였다.

싯내벌 새 서울에는 집집의 처마끝에 솔가지와 꽃을 꽂고 길에는 황금 가루 같은 황토를 깔고 옆 걸음에 하나씩 스무 걸음에 하나씩 큰 기를 세우고 가운데 큰 절과 팔방의 여덟 절에서 일시에 꿍, 뗑하고 고저 맞춰 쇠북을 울리고, 왕이 지나가는 길에는 묵묵히 착가사 장삼한 중들이 목탁과 쇠를 치며 길게 높게 범패(梵唄)를 부른다.

그러나 온 서울은 조용하여 강아지 새끼 하나 얼른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은 모두 새 옷을 입고 길가는 황토 위에 엎드려 새로 도읍 하시는 부처님이요 상감님을 맞았다.

궁예는 덩그렇게 높은 연 위에서 새로 이루언진 길 좌우에 부복한 백 성의 무리를 굽어 보며 맘에 흡족하여 웃었다. 그리고 목목이 둥들이 기다리고 잇다가 범패를 부르는 곳을 당할 때마다 잠깐 멈추고 합창하여 염불을 하고 그러한 뒤에 다시 연을 몰았다.

무든 것이 다 왕의 뜻에 흡족하였다.

『오, 어지간 하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이로부터는 신라와 후백제를 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그런 뒤에는 당나라를 들이쳐 당나라 황제로 하여금 싯내벌에 조공을 오개 하리라 ————오, 그러라.』 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뒤에 오는 이는 궁예 왕루 강양부인(康陽夫人) 난영이다. 황포 금관에 홍띠를 띤 난영은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 같고 이 세상 사람 같지는아니하게 아름답고 위엄이 있었다.

왕후는 묵묵히 홍일산을 받고 기다리고 잇다가 합창 예배하는 여승들을 볼 때마다 잠깐 고개를 숙인다.

그 뒤에 정광( 正匡)· 신훤( 申煊)· 원보( 元輔)· 원종( 元宗)· 대상( 大相)· 왕건( 王建), 이 모양으로 문무 백관이 각각 작품 따라 혹은 홍의, 혹은 자의, 혹은 청의 를 입고 홀을 들고 칼을 차고, 혹은 초헌을 타고 따라 온다.

『나무 미륵존불 』『 나무 미륵화신 마진대왕(摩震大王).』

하고, 수십명 수백명 백성들이 일시에 소리를 내어 부르는 곳도 있어.

이 모양으로 몇 굽이를 지나 다리를 건너 몇 대문을 지나 아홉 겹 구름 어리운 만세궁(萬世宮) 대궐로 들어 갔다.

모든 것이 다 궁예왕 뜻에 맞았다. 특별히 만세전(萬世殿) 기둥을 쇠로- 182 - 한 것이 맘에 흡족하여 왕건을 돌아보며, 『 쇠 기둥은 몇 천년이나 갈까?』 하고 물었다.

왕건은 허리를 굽혀 공손히, 『 좀만 안 나면 만년은 간다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궁예는 웃으며, 『 까마귀 머리가 세고 기둥에 좀이 나기까지 짐의 나라는 전 지 무궁( 傳之無窮) 하리라.』

하고 좌우를 돌아 보았다.

좌우에 모시었던 문무 백관들도 일제히 허리를 굽혀, 『 우리 임금 만세.』

하고 소리를 질러 송축하고 그 끝에 풍악이 일어나고 범패가 울려 오고 「 만세 만세」라 하고 군사들이 우렁찬 노래가 대궐 쇠 기둥을 흔드는듯 하였다.

그날 밤에 싯내벌은 온통 꽃밭이 되었다. 큰 집에는 큰 들을 달고, 작은 집에는 작은 등을 달고, 아홉 절의 크 쇠북 작은 쇠북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미륵불이 세상에 임하였으니 이로부터 세상은 만년 태평 하리라고 백성들은 기뻐 뛰었다.

궁예왕은 가양왕후 난영과 같이 가까운 사신들은 데리고 하늘에 닿은듯 한 만세루 위에 높이 앉아 만백성의 불바다 꽃바다 속에서 기뻐 뛰면 「 우리 임금 만세야」하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흥이 끝 엇빙 오르매, 왕은 왕후를 돌아 보며 한 노래를 부르기를 청하였다. 왕의 청혼을 무리치지 아니하고 난영은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

『쇠 기둥 좀 먹은들 구리 기둥 없소 리까 구리를 곳 믿어 도금 기둥이 있 사오니 금 기둥 억천만 세에 무량수를 하옵소서.』

왕후 난영의 노래는 이 기쁜 맘을 더욱 기쁘게 하였다. 왕도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 모신 신하들도 고개를 숙여 왕후의 노래를 칭찬하는 뜻을 표 하였다.

- 183 - 이 때에 사신들 중에서 원종이 나서며, 『 굴 모 마마께 오서 노래를 부르시오니 신도 한 노래를 부르려 하 오나 상감 마마 뜻에 어떠하시올는지?』 한다. 원종은 신홍이 죽은 뒤에 동서로 표박하다가 궁예애개로 왔다.

궁예는 원종이 애노로 더불어 신홍의 원수를 갚으려고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가는 패하여 몇 번이나 죽을 자리에 빠지있던 줄을 알므로 원 종이이를 높은 벼슬로써 맞아 들였다. 원종의 말을 듣고 궁예는 무릎을 치며, 『 좋은 말이요, 충신의 노래는 하늘도 감동하려든.』 하고 노래하기를 재촉하였다. 원조은 허연 수염을 바람에 흩날리며, 『 금 기둥 구리 기둥 모두 다 믿으리라, 좀 먹는 쇠 기둥은 믿기는 하 련마는 진실로 못 믿을 것 이 미움인가 하노라.』 하고 비장한 목소리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조용하였다. 왕도 얼굴에 흐린 빛이 돌고 왕후도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자리에 수참한 빛이 돌 때에 왕건이 일어나 허리엔 찬 칼을 쑥 빼어 들고, 『 못 믿을 마음 으 란이 칼로 버 히 리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죽사와도 임 배반하는 맘 으 란이 칼로써 버히리라.』 하였다. 왕건의 목소리는 큰 종소리와 같고 그 기상은 만좌를 내려 누를듯 하였다.

「이 칼로써 버히리라」할 때에 왕건의 두 눈에서는 번개가 번쩍하였다.

노래가 끝나매, 왕은 옥좌에사 일어나 왕건의 곁으로 가서 그 손을 잡으며, 『 왕건아! 너는 나라의 금 기둥이로다. 네 아비 이십년 전 나를 돕더니- 184 - 네 또한 나의 기둥이 되었구나.』 하고 경문대왕 국상 때에 왕륭이 자기를 위하여 싸우던 일을 다시금 생각하고 감격하여 왕건의 손을 만지고 등을 만지었다.

이로부터 궁예왕이 왕건을 믿는 맘은 더욱 깊어져 대소사를 물론 하고 어려운 일은 모두 왕건에게 맡기게 되고 왕건은 어느 때에나 임의로 궐내에 들어 오는 특전을 주었다.

원종과 신훤은 왕건이 비범한 인물인 겉으로는 궁예에게 충성을 다 하는듯 하여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품은 듯함을 알아 보고 몇 번 궁예왕에게 그러한 뜻을 비치었으나 궁예는 고개를 흔들어 두 사람의 마를 듣지아니하였다.

그날 밤이 지나간 후로 만사는 다 궁예의 뜻대로만 되는 듯하였다.

대재(竹嶺) 이북은 궁예의 판도에 들어 오고 당나라가 망하매, 우리나라( 鴨綠江) 이북의 국경에도 아무일이 없었고 해마다 우순 풍 조하여 오곡이 풍등하고 민간에는 아무 질고도 없으며, 마소와 닭과 돼지까지도 알은 낳는 대로 까고 새끼는 치는 대로 길렀다.

강마다 물이 철철 흐르고 산마다 들마 꽃에서는 향기가 나고 잎에서는 기름이 돌았다.

신라는 새재(鳥嶺) 앞에 쪼구리고 있어 겨우 명맥을 보전할 뿐이요 ㅡ 진헌은 곰나루(錦江) 이남에 박혀 감히 궁예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천하는다시 세 나라로 갈리어 한참 동안 사방에 일이 없었다.

궁예왕은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 水德萬歲)라고 치어 천하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임금이 되고, 또 자칭 미륵불의 화신이라 하여 금후 오만년 억조 창생을 교화할 부처님으로 자처하였다.

비록 곁에 신라와 후백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있으나 없으나 다름없이 생각하였고, 처음에는 아주 둘을 다 없애 버리고 천하를 통일 하려하였으나 신라 왕도 한 해에 몇 번씩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후백제왕 진헌도 겉으로는 궁예를 사형으로 대우하여 궁예의 맘을 거 스르지 않기를 힘썼다.

그러하기 때문에 궁예는 신라나 후백제가 배반하는 빛을 보이지 않는 동안 가만히 내버려 두되 수족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자기는 천자가 되어 신라와 후백제의 위에 군림(君臨)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만일 신라가 궁예에게 반항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인다든가 그렇지아니하더라도 그러한 소문만 들리더라도 궁예는 군사를 발하여 신라의- 185 - 변경에 침입하였다.

그러하면 신라는 겁이 나서 곧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빌었다.

실상 궁예는 신라를 밉게 생각하였다. 그는 궁예의 어머니를 막으려는 정채 글 썼다. 진성여왕이 양위를 하고 효공왕(孝恭王)이 들어 서자, 왕후의 아버지 되는 예겸(乂兼)이 권세를 잡아 치원이 세웠던 정책을 무너 뜨리 고 간교한 수단으로 혹은 진헌을 끌어 궁예를 막으려 하였다.

치원은 기울어진 나라를 회복하려던 뜻이 이뤄지지 못할 줄을 알고 가만히 몸을 빼어 해인사(海印寺)로 달아나 풍월로 벗을 삼아 세상에 대 한 모든 뜻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몸을 외로운 구름장에 비겨 고운(孤雲)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치원이 물러난 뒤에는 조정에는 권세에만 아침하고 음란한 쾌락만 좋아하는 신하들이 모였다. 나라야 흥하거나 망하거나 자서 제질에게 높은 벼슬이나 시키고, 어찌하여서든지 재물이나 모아서 제 실속만 차리려는 사람들 뿐이다.

궁예의 세력이 큰 듯한 때에는 궁예 편으로 망을 보내고, 그와 반대로 진헌의 편이 강성한 듯한 때에는 진헌에게로 끌려 다치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내 모 하나만 무사히 건너 가려고 눈이 빨개 덤비었다.

그러나 보니 자연 조정에는 궁예 편과 진헌 편이 잘리어 서로 물고 씹고 죽이고 죽고 한달에도 몇 번씩 정변이 일어났다. 이렇게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조저에서 궁예와 진헌에게 대한 태도가 변하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궁예는 몇 번 진헌과 싸왔다.

효공왕 십 사년에 진헌의 보병 사천과 궁예의 수군(水軍)과의 싸움 같은것은 그중의 큰 싸움이었다. 그러나 궁예와 진헌이 한번씩 싸울 때마다 신라의 강역(疆域)은 날로 줄어 들었다.

효공왕 팔년에는 패강도 십여 고을을 궁예에게 빼앗기고, 동 구년 팔월에는 대재 동북을 빼앗기고, 동 십 일년에는 진헌에게 일선군( 一善郡) 이남 십여 고을을 빼앗기고, 동 십 삼년에는 궁예의 수군에게 보배섬( 珍島)· 고 이섬( 皐夷島)을 빼앗기고, 이 모양으로 조정에 한번 정변이 있으면 반드시 혹은 궁예에게 혹은 진헌에게 다섯 고을 열 고을씩 빼앗겼다.

궁예는 처음에는 그 누이 되는 진성여왕과 치원에게 한 약속을 생각하고 신라를 보전하기로 힘을 썼다.

그래서 진헌도 감히 신라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 186 - 그러나 조정이 여러 번 궁예를 속이매, 궁예의 신라를 미워하는 맘은 다시 살아 나게 되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시중 효종(孝宗)은 진헌 패요, 일 길손 현승( 一吉飡玄昇) 은 궁예 패요, 상대등 김성은 효공왕의 국구(國舅) 되는 예 겸( 乂兼) 의 사위요, 왕과도 동서로 역시 진헌에 가까운, 요리로 가고 조리로 갔다 하는 패이었다.

궁예가 신라 대관들에게 인심을 잃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잇지마는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궁예가 충칙하기 때문이다, 혹 궁예의 뜻을 사려고 조정에서 궁예에게 대하여 좋지 못한 꾀를 한다는 비밀로 가지고 궁예에게로 가면 궁예는 말도 다 듣지 아니하고, 『 요, 반복 무쌍한 놈 같으니————그래 네 임금의 녹을 먹고 살아 온 놈 이은혜를 몰라 보고 도리어 배반을 하여! 신라 임금을 배반한 창자가 나를 또 배반하지 아니할까? 너 같은 놈이 있으면 일월이 무광하고 풍우가 불순 한 법이야 ———— 이 놈 내 버히라.』 하고 애걸 복걸하는 것도 듣지 아니하고 당장에 내 베었다.

궁예는 원회를 미워하는 모양으로, 모든 제 임금 배반 하는 놈을 미워하였다.

그는 살생(殺生)을 금하는 영을 내려 닭의 알도 다치지 못하게 하면서도 의리를 배반하는 사람은 사정 없이 죽였다.

『거미와 의리를 배반하는 놈은 죽여 씨를 없이 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다.』

이렇게 궁예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조정의 대관들은 궁예를 무서워하거나 미워하였다.

오직 일길손 현승은 궁예와 싸울 때에는 사정 없이 싸우면서도 조정에 돌아 와서는 신라의 친구가 되고 도움이 될 사람은 궁예인 것을 힘써주 장하였다.

『의리 없는 놈의 친구되기보다 의리 있는 놈의 원수되는 것이 안전하다.

의리 없는 친구는 언제 배반하여 나를 해칠는지를 몰라도, 의리 있는 원수는 내가 의리를 지키는 동안 내 의리를 알아 준다.』

하여 현승은 몇 번인지 수 모르게 親弓攘薽=궁예를 친하고 진헌을 물리 친다는 말) 설을 주장하여 의리 있는 궁예를 믿는 것이 의리 모르는진 헌을 믿느니 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승의 말을 듣는 이는 적고다만, 『 흥, 궁예 심복.』 - 187 - 하고 현승을 비웃고 시기하는 사람뿐이었다.

그리하는 동안에 어찌하다가 진헌의 맘을 사게 된 효종의 세력은 날로 높아져서 시중(侍中)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현승은 개밥에 도토리 모양으로 간 곳마다 배척을 받게 되었다.

오직 궁예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현승을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현승은 아슬라성에서 잠깐 한번 대한 이후로는 궁예를 마난 일도 없고 궁예에게 비밀히(다른 대관들 모양으로) 서신 왕복하여 본 일도 없다.

그는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충심으로 궁예와 친하여야 할 것을 주장 한 것이다. 현승과 같이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는 자로는 오직 대 신은영( 大臣殷影) 이 잇을 뿐이다.

이렇게 강직한 것으로 불의를 미워하는 것으로 조정에 미움을 받는 것을 이용하는 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진헌이요, 또 한 사람은 궁예의 앞에 대상(大相)의 높은 자리에 있는 왕건이다.

왕건은 신라 조정의 싫어하는 모든 것을 궁예에게 돌리고, 좋아하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재주가 있었다.

신라의 여러 고을을 칠 때에도 왕건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갔지마는 용하게 신라 조정의 신임을 샀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효공왕은 빈 그릇만 붙들고 앉아서 계집에 혹 하여 정사를 몰아 보비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어디서 낫 곳 모르는 요망한 계집을 들여 대궐 안에 음탕한 일이 그칠 날이 없으매, 대신 은양은 여러 번 간하다 못하여 그 계집을 잡아 죽여 버리고, 그러는 동안에 효공왕도 승하하고, 그 기회를 타서 효공왕의 국구이던 예겸은 자기의 아들 경훈(景〇)으로 왕위를 잇게하고 자기가 섭정 모양으로 모든 정권을 희롱하였다.

이렇게 되매, 국정은 더욱 어지러워지고 쓸 만한 사람은 다 물러가 사월에 서리가 온다, 사흘 동안이나 참폿물이 동해물과 서로 마 추치어 물결이 이백 척이나 일어서서 육지로 달려 들어와 전지를 씻어 나간다, 땅속의 겨울에 우룀을 한다, 태백성이 달을 범한다, 가지 각색 흉조가 있어 안심이 물 끊듯하였다.

신덕왕이 승하하시고 태자 승영이 역시 예겸의 손으로 옹립되어 왕이 되시니 이는 경명왕이시다.

경명와이 서매, 예겸은 팔십이 넘는 노인이언마는 아직도 정권을 내어놓지 아니하고 경명왕이 아우 예겸의 둘째 손자요, 아직 스무 살도 다 되지- 188 - 못한 위옹(魏鷹)으로 상대등을 삼고 오래 시중으로 있던 이손 효종( 孝宗) 이진 헌과 너무 가까운 것을 시기하여 그를 내어 쫓고 사위 되는 대아 손유 렴( 裕廉)이라는 숙맥으로 시중을 삼았다.

이리하여 신라의 조정은 예겸의 조정이 되어 버리고 일국 정사는 예 겸의 사랑에서 다 나오게 되었다. 예겸의 족속이면 났거나 못났거나 다 이 손이요, 급손이요, 아무리 병신이라도 대아손 하나는 얻어하였다.

장안 백성들은 예겸 집 개나 고양이까지도 이손이라고 부르고, 아 손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보고 참지 못한 사람이 셋이 있다. 하나는 현승이요, 하나는 왕의 첩을 잡아 죽이고 종적을 감추어 산속으로 돌아 다니는 은영(殷影)이요, 또 하나는 전 시중 효종의 손자 되는 충(忠)이다. (충은 장차 마의 태자가 될 사람이다.) 충은 아직 나이 이십도 못되건마는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항상 맘에 미분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가끔 그 조부와 다투었다. 어려 서부 터치원을 사모하여 그의 글을 즐겨 읽고 조부 효종이 진헌의 수족이 되어 나라를 파는 것을 분개하였다.

가끔 홀로 달밤에 후원에서 칼을 빼어 두르며, 『 조정의 간신들을 한칼로 버히 고서 기운 나라를 반석같이 하고지고 눌 다려 큰일 말하리 눈물 겨워 하노라.』 하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조부는 이미 늙었을뿐더러 썩은 맘 이 바로 서기 어렵고, 아버지는 부(傅)는 무무불가로 조부의 덕에 얻은 벼슬을 가지고 동풍이 불면 동으로, 서풍이 불면 서로 바람 따라 기울어지는 사람 이었다.

『이놈아, 이 어지러운 세상에 왜 가장 곧은 체하고 남에게 미움을 받을말을 하느냐? 대하 장강에 일목이 난지라 그저 남 살아 가는 대로 살아가도록 하여라.』 이 모양으로 비분 강개하는 아들 충을 훈계하였다.

부(傅)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글공부도 상당히 하고- 189 - 세상 물정을 멀겋게 알건마는,< 다 귀찮아, 다 귀찮아. 되는 대로 살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되는 효종도 아들 부를 옳게 여기고 손자 충을 집안 망할 놈이라고 책망하였다.

집에 자기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충은 이리 저리로 믿을 만 한 사람을 골라 보았다.

혹은 조부의 사람을 기회 있는 대로 두루 찾아 보았으나, 어디를 찾아가든지 배반이 낭자하고 풍악이 질탕할 뿐이요, 하나도 우국 개세하는 뜻을 품은 자는 없는 듯하였다.

그러한 자리를 당할 때마다 충은 국가가 위태하거늘 높은 벼슬을 가지고 음탕만 일 삼느냐고 꾸짖고, 『 세상이 다 흐리 기를나 홀로 맑단 말가세 상이 다 어린 적에 홀로 깸이 설운지고 묻노라 멱라수(沮羅水) 어드 메냐 충혼 따라 갈까나.』 하는 노래를 아니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충을, 『 철 없는 녀석.』

하고 비웃었다.

그러다가 경명왕이 들어 서고 젖내 나는 위옹이 상대등이 되고 숙맥 불변하는 유렴이 시중이 되어 예겸이 국정을 농락하게 되니 충은 더욱 비분 함을 마지 못하여 일길손 현승을 찾아 가, 『 죽을 때가 오지 아니하였소?』 하고 소리를 질렀다. 충의 의복은 남루하고 용모는 미친 사람과 같았다.

현승은 해괴한 충의 모양을 이윽히 보았다. 대개 충은 자기를 원 수로 아는 효종의 손자인 까닭이다.

충은 현승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 나는 전 시중 효종의 손자요. 내 조부와 대감과 원수인 줄도 아오.

그렇지만 나는 내 조부를 미워하고 대감을 존경하오. 대감은 일 점 충의 지심을 품은 줄을 아는 까닭이요. 천년 사직이 예겸의 손으로 기울어질- 190 - 때에 대감 한 분은 충의의 피를 흘릴 생각을 가지었으리라고 믿소. 그런데 아직도 가만히 계신 곳을 보니 대감도 썩지 아니하는가 하여 죽을 날이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말이요.』 하고 문을 닫치고 나가 버리고 말았다.

현승은 마침내 일어날 결심을 하였다. 경명왕 이년 이월 초하룻날 미명에 현승은 부하에 있는 군사 천명을 풀어 반으로 대궐을 엄습하고 반으로 예 겸의 집을 에워쌌다.

현승은 몸소 말에 올라 예겸의 집으로 달려들어 아직도 일어나지 아니 한 예 겸을 끌어 내어 목을 베고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예겸의 집에 잇던 식구를 모조리 도륙하여 버렸다. 그리고 의기 양양하게 말을 몰라 대궐로 향하여 오는 길에 현승의 탄 말이 무엇에 몰래었든지 다리에서 거꾸로 떨어지어 현승은 다리를 상한 채로 관군에게 붙들려 종로에 효수를 당하였다.

현승이 효수를 당한 날 밤에 어떤 노승 하나가 들어 와 현승의 머리를 안고 달아났다. 장안 백성들은 그것이 은영이라 하여 모두 울었다.

현승마저 죽으니 신라 조저에는 사람은 하나도 신라 조정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현승이 죽고 또 현승의 머리가 없어지매, 조정에서는 현승의 삼족을 멸하고 집터에 못을 파고 평소에 현승과 가까이하던 모든 사람을 모조리 잡라 죽이었다.

사흘 동안 현승으로 하여 죽은 사람이 이백 일흔 일곱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팔십이 넘은 노인도 잇고 젖먹이 이런것들고 있었다. 이 것 은신 홍( 信弘) 때보다 더욱 악착스럽고 백성들은 낯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할 이는 없었다.

이때에 서울에는 이상한 풍설이 돌았다. 그것은 궁예왕이 현승을 시켜서 모반을 하게 한 것이란 말이다, 이 풍설은 출처는 알 수 없으나 현승을 미워하는 패와 진헌 패에게 대단히 유리한 풍실이므로 풍설은 점점 참인듯이 되었다. 현승에게 동정하던 백성들도 이 말을 듣고는 현승을 의심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풍설이 돌게 한 근원이 왕건인 줄을 아는 이는 없었다. 왕건은 기회 있을 때마다 궁예는 서울을 도륙하려는 흉악한 맘을 품어 여러 번 군사를 움직이려 하였으나 자기가 옳지 못함을 말하여 중지시켰다는 말을 교묘하게 돌려 신라 조정에 자기의 인심을 사왔다.

이번 일길손 신홍이 모반을 한 것도 궁예가 시킨 것이라 함이 이런 데서- 191 - 나온 풍설이 분명하다.

게다가 궁예왕은 나이 많아 갈수록 정사에 뜻이 없을뿐더러 일찍 양길의 군사에게 머리를 철퇴로 맞은 것이 때때로 아파 정신이 혼미하여지어 그때에 말이 살에 맞아 거꾸러질 때에 상한 다리가 해마다 그때가 되면 아프던 것이 근년에 와서는 무시로 아파서 고통하는 날이 많으며 그 때문에 세상을 비관하여 중의 옷을 입고 불경을 외우고 염불이나 하기를 일삼 는다하며 심지어 궁예가 반은 미쳤다는 풍설까지 돌아 다녔다.

이렇게 궁예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돌아 갈수록 한층씩 더욱 명성이 높아지는 이는 왕건이다.

『궁예왕은 이름뿐이지 실상은 왕건이가 왕이라는 걸.』

하는 말이 장안에 돌아 다니매, 왕건이야말로 장차 크게 소리칠 인물인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진헌도 점점 육십이 가까와 옛날 예기가 줄고 주색과 풍류로 일을 삼으니 신라 조정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궁예보다도 진헌보다도 도리어 지금까지 성명도 없던 왕건이었다.

신라 서울에 돌아 다니는 말은 아주 터무니 없는 허전은 아니었다.

오십이 넘으면서부터 궁예는 양길의 군사에게 머리를 맞은 것이 빌 미가 되어 가끔 두통이 나고 정신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아 아무쪼록 높은 데 오르거나 말을 타기를 피하였고 그때에 상한 다리도 가끔 저리고 쑤시어 심히 괴로왔다.

명의라는 명의는 다 불러 보였으나 별로 신통한 효험도 없었다. 속에는 천하를 호령할 만하 패기가 있으나 몸이 점점 쇠약하여 감을 볼 때에 궁예는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더우기 궁예왕이 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왕후 난영이다. 난영도 나이 사십이 넘었건마는 그는 나이를 더욱 젊어가고 더욱 아름다와 가는듯 하였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뽀얗게 피어 오르는 백련화와 같이 아름다왔다.

얼굴과 몸에 어린 태가 빠질수록 도리어 더욱 아름다운 듯하였다. 두 귀 밑에 굵다란 센터럭이 희끗희끗하고 움쑥 들어 간 두 뺨에 칼로 그은 자국 같은 주름이 한번 잡힌 대로 아무리 펴려도 펴지지를 아니하고 게다가 병신 된 눈은 갈수록 더욱 쓱 들어 가고 살빛조차 꺼멓게 되어 가는 자기가 꽃 같은 난영을 바라볼 때에는 부끄러움과 질투와 슬픔이 섞어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낀다.

삼십세를 넘긴 사람이 드문 경문왕의 혈속으로 궁예왕은 뛰어나게 오래 산 셈이언마는 노쇠하기로는 오십 칠세에 칠십이 가까운 사람 같았다.

- 192 - 왕후가 다기를 보고 반기는 듯이 웃을 때에도 괴로왔고 시무룩한 때에도 괴로 왔다. 왕후를 대하는 것이 괴로왔다. 그러나 안 대하느니만큼 또 괴로 왔다.

『내가 왜 이렇게 늙노?』

하고 궁예왕은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에 가끔 탄식하였다.

왕은 쑤시는 다리를 끌고 시녀에게 부액을 받아 휑덩 그러한 대궐 안으로 거닐면서 아직 송진 냄새도 다 가시지 아니한 아름드리 기둥을 보고 아직도 싱싱한 쇠 기둥을 본다.

기둥에는 좀도 아니 나고 썩지도 아니하였건마는 자기의 몸은 나날이 좀이 먹어 가고 썩어 가는 것이 슬펐다.

봄철 꽃이 무르녹게 핀 때에 어원(御苑)으로 거닐면 꽃들의 아름다운 빛과 향기도 자기의 것은 아닌 듯하여 슬펐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보지 말리라 하여 왕은 안방에 가만히 숨는다.

그러나 몸을 따라 늙지 아니하는 마음은 젊은 때와 다름 없이 소리를 치고 날뛴다.

그러할 때에 궁예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는 마치 가두어 놓은 호랑이 소리와 같이 크나큰 대궐을 드르르 울린다. 이 소리 때문에 왕후와 시녀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 알므로, 『 응, 또 ———』 하고 씽끗 웃어 버린다.

지금도 깊은 밤 고요한 때에 궁예왕이 소리를 지르면 궐내에서 자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무서운 꿈을 꾸고 난 사람들 모양으로 찬땀을 흘린다.

궁예왕을 이렇게 갑자기 말 못되게 노쇠하게 한 데는 한 원인이 있다.

왕이 쉰 셋 되던 해에 왕의 병을 고치려고 모여 든 사람들 중에선 객( 仙客) 하나가 있었다.

이 선객은 조용히 왕을 보고, 『 천일 동안 매일 숫처녀를 보시면 모든 병이 물러가고 몸이 금강불괴( 金剛不壞) 가 되어 장생 불사하옵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이말을 듣고 왕은 그날부터 시작하여 매일 처녀 하나씩을 들여다가 같이 잤다. 아무리 왕의 위력이라도 날마다 숫처녀 하나씩을 들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언마는, 왕은 몸이 건강하여질 욕심으로 또 장생 불사 할- 193 - 욕심으로 하루도 거르지 안하고 처녀를 불러 들였다.

이리하여 가까스로 천일을 채우기는 채웠으나 병이 없어 지기는커녕 도리어 갑자기 더 늙어지고 말라서 서너 달 동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

처녀 천명 때문에 받은 해가 다만 왕의 몸이 약하여진 것뿐이 아니었다.

왕은 이 때문에 민간에게 원망을 듣게 되었고 정사는 돌아 보지 아니하여 모든 정권이 왕건의 손에만 돌아 가게 되었고 부처님이라는 위신이 떨어지게 되었고 구고에 돈이 마르고, 또 왕 밑에 있는 대관들도 궁예왕의 본을 받아 음란을 일삼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궁예왕에게 더욱 중대한 일이 그동안에 생겼다. 삼 년 동안이나 왕이 왕후를 돌아 보지 않는 동안에 왕후는 왕을 원망하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왕건에게 몸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왕이 처녀 천명을 잘아 들이는 동안에 왕후는 적막하고 애타는 회포를 오직 왕건을 향하여 말하였다. 왕건 밖에 무시로 궐내에 출입함을 허 한 남자는 없는 까닭이다.

왕후는 차차 밤에도 왕건을 청하여 들여 하소연을 하게 되고 늦도록 붙들게 되고 늦도록 붙들게 되고 마침내 한 가리에 자는 몸이 되었다.

한번 깨뜨린 정조는 다시 주워 모으지 못한다. 사흘에 한번이던 것 이 이틀에 한번이 되고 마침내 날마다 만나게 되고 마침내 초저녁에 한자리에 누워 해가 늦게야 서로 일어나는 몸이 되었다.

난영에게는 처음에는 슬픔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그러한 생각은 모두 없어지고 재봉춘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깨 달았다.

늙은 병신 남편에게서 받던 숨은 불만을 젊은 잘난 왕건에게서 만족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왕후 미안하오.』

하고 궁예왕이 며칠에 한번씩 난영에세 미안한 뜻을 표할 때에 처음엔 울며 원망하는 빛을 보였지마는 왕건에게서 전에 못 보던 쾌락을 맛보게 된 뒤에는, 『 내 걱정은 마시고 어서 병만 나세요.』 하고 가장 친절하게 왕께 대답하였다.

말로만 그러할뿐더러 난영은 몸소 사람을 시켜 처녀를 구하여 하루 도거 르지 않도록 힘을 썼다. 그리고 왕이 날로 쇠약하여 가는 것을 볼 때에 난 영은 내심으로 일종의 기쁨을 깨닫고,- 194 - 『 천명을 채우노라면 죽겠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왕은 예나 이제나 다름 없이 왕후를 믿고 사랑하고 그 때문에 잠시도 미안한 생각을 그친 적이 없었다.

왕후와 왕건과의 추한 관계는 세상에 소문이 아니 날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궐내에서 궁녀들 사이에 속삭이던 이야깃 거리가 되고 얼마 아니하 여서는 싯내벌 백성들의 이야깃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궁예왕의 귀에 들어 갈 리는 없었다.

만일 신훤(申煊)이 이때까지 살아 있었던들 반드시 궁예왕을 간 하여 천명 었 다.

왕후와 왕건과의 추한 관계는 세상에 소문이 아니 날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궐내에서 궁녀들 사이에 속삭이던 이야깃 거리가 되고 얼마 아니하 여서는 싯내벌 백성들의 이야깃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궁예왕의 귀에 들어 갈 리는 없었다.

만일 신훤(申煊)이 이때까지 살아 있었던 반드시 궁예왕을 간하여 천명 처녀라는 무서운 일도 아니하게 하였을 것이요, 왕후와 왕건과의 관계도 말하였을 것이지만는 신훤이 죽은 뒤에는 누가 궁예왕을 위하여 무서운말을 하랴.

의리도 은혜도 모르고 오직 세력만 따르는 인심은 인제 와 서는 궁예왕에게 충성을 보이는 것보다 왕건에게 충성을 보이는 것을 이롭게 생각하게 되지 안하였는가.

『궁예는 이름만 왕이지 정말 왕은 왕건.』

이라는 신라 서울에 돌아 다니는 소문이 결코 터무니 없는 헛소문을 아니다. 기쁨의 꽃은 아니 피고 떨어지는 일이 있지마는 슬픔의 꽃은 어느 틈에라도 한번은 피고야 만다.

모든 죄는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고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죄의 씨를 뿌린 자의 손으로 거두게 한다.

궁예왕은 침실에서 혼자 누워 자다가 무슨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린지 왕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가 없었다. 유월 초승 의비 오다 쉰 끝에 잠깐 나온 달이 왕의 창에 비치인다.

왕의 머리 속에는 달에 관련된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어려서 동 네 아이들과 같이 모래판에서 놀던 생각이며 세달사에서 밤에 몰래 빠져나오던 생각이며 북원 생각이며…….

왕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려 하였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여러 가지- 195 - 허수아비가 보였다.

그 허수아비 중에는 아름다운 왕후의 모양이 보인다. 난영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어떤 남자에게 안기어 아양을 부린다.

『응, 그럴 리가 있나?』

하고 왕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영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집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아슬라에 자기를 따르지 아니하였느냐?

그 후에 궁예가 난영의 아버지 양길과 싸울 때에 난영은 울면서, 『 내 마음은 몸과 함께 장군마마께 바치었소. 내 아버지를 쳐야 하겠거든 치시오. 나는 아버지가 싸와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아니하고 지 아버지가 이기는 것을 기뻐하겠소. 다만 나를 보아 아버지의 목숨은 끊지 말고 가고싶은 데로 돌려 보내 주시오.』 하지 아니하였느냐?

<생각하면 오륙년 내로 왕건과 너무 가깝기는 하였다.>

하고 생각한 때에 왕의 눈앞에 왕건은 동탕하고 씩씩한 풍채가 나 뜬다.

그리고 그 곁에 아주 초라한 모양으로 자기의 애꾸 모양이 나선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여름 새벽 바람에 터지려 하는 연꽃송이 같은 난영이가 나선다.

난영의 웃는 눈은 애꾸요, 주름 잡힌 자기의 얼굴을 지나 아직도 청춘의 기운이 넘치는 왕건에게로 쏠린다.

<응 그럴리가 있나?>

하고 왕은 손을 내어 둘러 앞에 오는 사특한 그림자를 쫓아 버린다. 그리고 또 잠이 들려 한다.

<그렇지마는 나는 늙고 병 들었다. 삼년 동안이나 난영을 돌아 보지아니하였다.>

하는 생각과 함께 난영은 궁예의 앞에 나와서 빈정대는 어조로,< 마마의 때는 지났소. 마마는 침침한 방구석에서 끙끙 앓는 소리나 하고 누웠을 때요. 나는 젊었소. 나는 젊은 사람을 따라 가오.> 하고 한 팔을 들어 왕건의 어깨를 걸고 슬슬 나가 버린다.

<응 그럴 리가 있나? 난영은 왕후요, 왕건은 신하가 아니냐? 천하 여자를 다 의심하기로 왕후를 의심하랴? 천하 사람을 다 의심하기로 왕건의 충성을 의 심하랴?> 하고 왕은 눈을 번쩍 뜬다. 창에 비친 달빛은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그물 그 믈 하였다가 다시 환하여진다.

<어, 인생은 괴로움이로구나!>

하고 궁예는 스스로 한탄한다. 일생에 지낸 일을 생각하면 낙이- 196 - 무엇이던 가?

<왕! 왕은 다 무엇인고?>

생각하면 왕이 된 뒤에 궁예는 낙을 본 것이 없었다. 도리어 세 달 사 에소 허와 함께 토끼 사냥 다닐 때가 컴컴한 일생에 사장 환한 날같이 보였다.

자기가 옥좌에 높이 앉고 문무 백관이 앞에 굴복한 것을 본들 그것이 무엇이 랴? 장난군이 아이놈들끼리 양지쪽에 모여 앉아서 흙장난하는 것만도 못 하지 아니하냐?

궁예는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때묻은 옷 입은 부부가 어린 것들을 데리고 웃고 살아 가는 양을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헛된 위엄을 뽐낸 일도 없고 반란( 叛亂)을 두려워할 일도 없다. 대문도 있거니와 방문까지 다 열어 놓고자 더라도 집 잃은 귀뚜라미 밖에 또는 뜻없는 달빛 밖에 누가 그들을 엿보랴? 사대문을 꽁꽁 닫고 겹겹이 창검 짚은 파수병을 세우더라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 왕의 처지보다 얼마나 편할까? 세갈사의 가난뱅이 중으로 이 집 저 집으로 재 올리러 불려 다니는 것이 도리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더구나 몸도 늙고 병 들었으니 아름다운 처첩은 다 무엇하며 금 은 과 보석으로 아로새긴 궁전과 용상은 다 무엇하며 나라는 다 무엇하리. 내 몸이 죽은 뒤면 그것은 다 누군지 모르는 남이 아닌가?

『쇠 기둥! 쇠 기둥!』

하고 왕은 혼자 웃고 한숨을 쉬었다.

어째 내가 죽기를 기다리야? 아직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잇더라도 내가 일생 정력을 다하여 모아 놓은 것, 이루어 놓은 갓을 벌써 남이 차지 하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궁예의 앞에는 다시 왕건과 왕후의 모양이 나타났다.

그러할 때에 왕은 늙기가 싫고 죽기가 싫었다. 왕은 큰 권력과 모든 집과 땅과 군사와 높은 이름과 이것을 다 내어 놓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름다운 난영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왕은 벌떡 일어났다.

<안 죽는다 ———안 늙는다 ——— 내속에는 아직도 넘치는 기운이 있다.

천하에 가장 높은 임금이 또는 큰일이 남았다.>

하고 왕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쇠약한 몸이라 머리는 핑핑 내어 두르는 듯하고 다리는 이리 저리로 헛 놓였다. 왕은 비씰비씰하다가 한편 벽에 몸을 기대었다.

왕의 몸이 벽에 기대는 때는 쿵하는 소리에 곁방에서 자던 시녀들이 담을- 197 - 깨어 문밖에 와서, 『 상감 마마 부르시어 계시오?』 하고 물었다.

『불을 켜라.』

하고 왕은 벽에 기댄 대로 소리치었다.

시녀들은 굵다란 촛불을 들고 들어 오다가 왕의 험상스럽게도 여윈 얼굴과 벽에 기대어 선 꼴을 보고 한걸음 물러섰다.

왕은 벽에서 몸을 떼더니 시녀들을 시켜 옷을 입히라 하여 시녀들이 열어놓은 문으로 비씰거리며 나간다.

시녀들이 놀라서 왕의 뒤를 따랐다. 왕은 허둥지둥 마루를 지나 복도를 건너 왕후의 침전으로 향한다. 왕은 시각이 바쁘게 난영을 보고 싶은 생각에 거의 미친 듯이 빨리 걸어 갔다. 촛불 든 두 시녀는 좌우로 갈라 서서 왕의 앞길을 비치었다.

내전 시녀들이 불빛을 보고 놀래어 뛰어 나와 왕의 앞길을 막는 것도 뿌리치고 왕은 왕후의 침실 문고리를 잡아 당기며, 『 마마, 마마.』 하고 불렀다. 그 부르는 소리가 어떻게도 다정하고 슬펐던지 곁에 섰던시 녀들은 몸에 소름이 끼치었다.

왕이 돌아 가시고 그 혼이 들어 오신 것이 아닌가 하고 시녀는 눈이 둥글하여 촛불에 비치인 광대뼈 내민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왕의 뺨에는 분명 눈물 흔적이 있었다.

왕후의 방안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

왕이 다시 문고리를 당기며, 『 마마, 마마.』

하고 불렀다. 시녀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다.

그래도 방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왕의 눈에서는 번쩍하고 번갯불이 났다. 왕의 몸은 한번 떨렸다.

시녀들은 숨도 못 쉬었다.

왕은 문고리를 힘껏 잡아 당기었다. 그 큰 문은 비걱 소리를 내며 돌 저 귀 아울러 떨어져 나왔다. 왕이 종잇장 하나 집어 던지듯이 떨어진 문을 마릇바닥에 집어 던질 때에 오지끈하고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문이 떨어져 나오자 불빛이 방안에 비치고 그 불빛에는 자리옷 바람으로 섰는 난영과 방안에 비치고 그 불빛에는 자리옷 바람으로 섰는 난영과- 198 - 왕건이 있었다.

왕은 「응!」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건은 몸을 돌이켜 앞문을 차고 뛰어 나가 버리고 난영은 뿌리를 찍힌 등신 모양으로 방바닥에 엎더지었다.

『아비를 배반하던 년이 마침내 지아비를 배반하는 구나.』

하고 왕은 허리에 찼던 칼을 빼어 들고 난영의 곁으로 뛰어 갔다.

난영은 두 손을 합창하여 머리 위에 들고, 『 나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오니 죽여 주오. 일생에 한 남편을 따라 이런 죄를 아니 지으려고 빌고 빌었건마는 전생의 업원으로 이리되었소.』 하고 다시 땅에 엎더지어 소리를 내어 운다.

궁예의 칼을 든 팔은 부르르 떨렸다. 분한 생각으로는 당장에 난영을 천만 조각으로 찍고 찍고 싶었다.

궁예의 원한 많은 칼날 밑에서 난영은 합창한 체로 그 칼날이 내려 와 자기의 죄 많은 머리를 떨어뜨리기를 이젠가 이젠가 하고 기다리었다.

난영은 궁예의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듣는다.

그 힘있는 숨소리, 그것은 난영이가 가장 사랑하던 것이다, 그 힘 있는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영은 힘있는 품에 안기는 기쁨과 안심을 깨달은 숨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그 힘있는 숨소리가 마치 자기를 한발로 덮치고 누르고 장차 시뻘건 입을 벌려서 한입에 자기를 잡아 삼키려는 아귀의 숨소리와 같이 진저리가 났다.

궁예는 칼을 칼집에 꽂고 궁녀를 불러, 『 곧 금군에 기별하여 이 야차(野叉)를 꽁꽁 묶어 내려 가두게 하 되 도망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게 잘 지키라 하여라, 임금을 속이고 남편을 배반한 대악인을 내일 아침 조회에 친히 국문하여 만민을 징계하리라.』 하고, 한번 더 난영을 노려 보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궁예의 무거운 발자취가 복도로 사라지자 궁녀들은 난영의 앞에 엎드려울었다.

『마마, 어찌하오리까?』

하고 어떤 궁녀는 난영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었다.

난영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이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엎드린 궁녀들과 불의의 쾌락을 희억하게 하는 금침이 어지러이 깔렸다. 그리고서 벽 병풍에는 왕건이 벗어 걸은 웃옷이 있다.

난영은 정색하고, 『 상감 마마께서 하라신 대로 왜 하지 아니하는냐? 나를 결박하라.』

- 199 - 하고 두 손을 합창한 대로 내어 밀었다. 문밖에 대령하였던 금군들은 홍줄을 들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난영의 팔을 묶었다. 궁녀들은 일제 히 난영의 앞에 엎드려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튿날 왕은 만세전 옥좌에 임어하시와 백관의 조회를 받았다. 그 자리에 왕건은 있지 아니하였다. 조회가 끝난 때에 왕은 왕후를 잡아 들이라 하였다.

백관들은 영문을 모르고 모두 놀랐다. 이윽고 왕후가 홍줄로 결박을 지어 금군 네 명에게 끌려 나왔다. 뒤에는 궁예의 두 어린 아들인 청광 보살( 靑光菩薩) 과 신광 보살(神光菩薩)이 울려 따른다.

왕후의 머리는 허틀어지고 옷은 꾸겨지고 얼굴은 종잇장같이 해쓱하였다.

푹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발을 옮기는 난영의 모양은 반쯤 꺽이어 바람에 흔들리는 흰 들국화와 같았다. 그래도 왕후가 앞으로 지나갈 때에 신하들 은고개를 숙이고 읍하였다. 왕후는 앞에 꿇려 앉히었다.

왕은 난영을 노려 보며, 『 너 임금을 속이고 지아비를 배반한 음란한 계집아 ——— 들으라 ——— 내 너를 어젯밤 당장에서 죽이지 안하고 더러운 목숨이 하루 볕을 더 보게 한 뜻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요, 네 죄를 천하 만민에게 밝히 알리어 징계를 삼으려 한 것이다. 이제 백관이 여기 모였으니 네 죄상을 일일이이 뢰어라.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은휘하는 일이 있으면 일후 두 가지 형벌을 주리라.』 하였다. 난영은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며, 『 임금을 속이고 지아비를 배반한 대죄인이 혀끝이 백인들 무슨 말씀을 사 뢰 리까. 죄많은 이 몸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쪼개어 주시옵소서.』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너 처음 아비를 버리고 집을 버리고 아슬라성에 나를 따를 때에는 무슨 생각으로 따랐고, 이제 나의 신하와 더러운 행실을 하여 나를 배반한 것은 무슨 뜻으로 하였는가? 숨김 없이 아뢰어라.』 하는 왕의 말에 난영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느껴 울 뿐이요 대답이 없다.

두세 번 재촉을 받은 뒤에 난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 맘이 변한 연유를 아뢰라 하시면 아뢰오리다. 안 들으시어도 좋을 걸 구태여 들으시고자 하시면 아뢰오리이다. 애초에 상감마마를 따르 옵 기는 마마께 오서 천하를 평정하옵기는 상감마마께서 마침내 한 범상한 사람이신 것을 안 연유이옵니다. 싯내발에 드옵신 뒤로 상감마마께옵서는 큰 뜻도 다 버리시 옵고 요망한 술객의 말을 믿으시와, 일천 처녀의 하늘에 사무치는- 200 - 원망을 사시옵고 죽으면 썩어질 한 몸을 위하시와 나라를 다스릴 도리를 잊어 버리시오니 옛날의 큰 뜻을 어디서 다시 보오리까.

천하를 평정하자던 큰일이 물거품이 되고 마오니, 일생에 마마를 따른것이 한홉기 그지 없사오며 꽃다운 정준이 장차 다 늙으려 하오니 인생의 행락을 하올 날도 오늘 내일뿐이라 다 스러진 옛 꿈을 돌아 보고 우느니보다 몇 달 안 남은 청춘의 행락이나 하여 보자 하는 생각 나옵고 또 뜻도 힘도 빠져 나간 매미 껍데기 같은 상감마마를 따르는 것보다 뜻도 크고 힘도 큰 젊은 영우의 품에나 안기리라 하는 생각이 나옵기는 죽을 죄일 줄 알면서도 왕건을 따른 것이로소이다.

큰힘이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는 이 죄를 지은 것도 전쟁의 숙연으로아 옵고, 마마께 목숨을 바쳤사오니 처분대로 하시옵소사. 누군들 이런 몸 되 기를 생각하였사오리까마는 굳고 굳은 무쇠 기둥에도 돔이 나고, 검고 검은 까마귀 머리도 백설같이 세려든 물로 된 사람의 맘이 아니 변키를 바라오리까.

아내의 맘도 변하려든 백성의 맘인들 믿사오리까. 상감마마를 생각하 거나 내 신세를 생각하오면, 눈물 밖에 흐르는 것이 없사오니 시각 바삐 이 쓰디 쓴 눈물에 뜬 목숨의 뿌리를 끊어 주시옵소서. 아아.』 하고 난영은 고개를 숙여 버린다.

왕은 노함을 이기지 못하여 발을 구르며, 『 네 이제 공교한 말로 네 죄를 꾸미고 감히 불측하고 흉악한 말을 하니극 히 가중하다, 내 네 더러운 살을 찢고 뼈를 바숴 머리 센 까마귀의 밥을 삼고 네 피로 좀먹는 쇠기둥을 바르리라 ———이 요망한 계집을 계하에 끌어 댓 돌 위에 놓고 칼로 사지를 끊고 배를 가르고 검은 창자를 끌어 내고 썩어진 오장을 집어 내고 철퇴로 살과 뼈를 이기라.

그리하고 곧 군사를 놓아 대역 부도 왕건을 잡아 들여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양으로 죽여 몸은 오작의 밥을 만들고 혼은 지옥의 유황 가마에 넣어 천겁 만겁에 지글지글 끓게 하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 난영을 끌고 들어 오던 금군 네명이 뛰어 나와 왕후를 번쩍 들어계하로 내리었다.

왕은 연해 대역부도 왕건을 목 따려는 돼지 모양으로 결박을 지어 즉각으로 잡아 들이라고 호령을 하나 백관들은 모두 몸을 벌벌 떨 뿐이요 아무도, 「 예 」 하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만세문 지키던 수문장(守門將)이 뛰어 들어와 옥좌 앞에- 201 - 엎드리며, 『 상감 마마, 왕건이 배반하여 군사를 몰아 만세문을 엄습하오며 힘을 다 하여 막사오나 중과 부적하와 막을 길이 없사옵니다.』 하고 아뢴다.

이 말에 왕은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 무 어랐다? 왕건이 배반하였다.』

하고 수문장을 본다.

『예, 백선 장군(百船將軍) 파진손(波珍飡) 오아건이 배반하였읍니다.』

하고 수문장은 고개를 들어 문밖을 바라보며, 『 저기 고함 소리 들리오니 만세문이 깨어진가 하옵니다.』

한다. 과연, 『 으아.』

하는 고함 소리가 은은히 울려 온다.

궁예는 으악하는 고함 소리가 만세문에서 울려 오는 것을 듣더니 옥좌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고 좌우에 늘어선 문무 백관을 바라보며, 『 왕건이 배반하였다. 내 자식같이 믿던 왕건이 내 아내를 빼앗고 또 이제 내 옥새(玉璽)를 빼앗으려고 배반하였다. 너희들도 왕건을 따르려거든 빨리 나아가 너희 새 왕을 맞고 ————나를 따르려거든 여기 머물러 내 이 자리에서 왕건을 만나 할 말이 있으리라 ———— 수문장아, 나가서 왕건더러 빨리 들라 하라!』 하고소리를 질렀다. 이 말을 하는 궁예의 입과 눈에서는 불길이 나오고 궁예의 소리에 울림인지 만세전 대들보가 쩡쩡 울었다. 이 소리에 전 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몸에 소름이 끼치고 등에 찬땀이 흘렀다.

수문장은 의외인 왕의 명령에 잠시 주저하다가 왕의 뜻이 서리 같은 것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 나가고 백관들도 감히 얼굴을 들어 왕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다만 마지막 하직으로 왕의 앞에 한번 읍하고 무서운데서 빠지어 나가는 겁 많은 무리 모양으로 슬슬 수문장의 뒤를 따라만 세전 앞문으로 구름같이 꾸역꾸역 밀려 나온다.

이때에 계하로서 두 늙은 무관이 칼을 빼어 들고 뛰어 올라와 백관의 앞을 막아 서며, 『 이 쥐 무리들아! 너희가 삼십년 임금의 녹을 먹고 이 임금을 섬겼거든 이제 역적 왕건이 불의의 군사로 외람히 범궐(犯闕)하는 것을 볼 때에 상감 마마를 저버리고 어디로 가는냐? 한걸음이라도 나가는 놈이 있으면 이 늙은이의 칼에 개 같은 목을 버히리라.』 - 202 - 하고 앞섰던 몇 사람을 함부로 찍어 섬돌 위에는 붉은 피가 흘렀다.

이 서품에 꾸역꾸역 몰려 나가던 무리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앞 이마를 무엇에 부딪친 사람 모양으로 물러서서 등신을 모양으로 우뚝 섰다.

이 두 늙은 장수는 누군고. 옛날 일긴손 신홍(信弘)의 막하게 잇다가신 홍이 패하여 죽으매, 혹은 초부로 산에 숨고 혹은 어부로 강가에 몸을 숨기고 혹은 농부로 풀속에 행색을 감추되 종시 주인 신홍에게 대한 의리를 변치 아니하고 기회만 있으면 의병을 일으켜 칠전 팔도하다가 마침내 궁예의 밑으로 돌아 왔던 원종과 애노다.

원종은 궁예왕이 처음 싯내벌에 오던 날 밤에 믿지 못할 것은 사람의 맘이라는 노래를 부른 까닭으로 왕건의 미움을 받아 모든 높은 벼슬을 빼앗기고 명색 없는 장수가 되고 애노도 또한 그러하였다.

왕은 이 광경을 보고 옥좌에서 일어나 계상으로 나와 여러 무리의 길을 막아선 원중과 애노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이 장수여! 충신의 깨끗한 칼에 개 같은 무리의 더러운 피를 바르지말고 개의 무리는 개에게 가게 하라.』

하고 여러 무리를 향하여 웃으며, 『 너희들 빨리 가 새 주인의 발을 핥으라. 그런 후에는 또 새 주인의 발을 핥으되, 대대 손손이 배반한 무리의 조상이 돼라.』 하고 또 한번 웃었다.

또 고함 소리가 울려 온다.

원종과 애노는 왕의 말대로 피 묻은 칼을 비껴 들고 좌우로 갈라 비 껴 서서 무리들이 지나갈 길을 내었다. 사모와 품대 찬란한 흉배를 붙이 고패 옥을 울리는 배관들은 흙을 받던 두 손을 가슴 위에 들먹거리며 피 묻은 칼 틈으로 정신 없이 지나가 엎어지며 자빠지며 저마다 앞을 다투어 만 세 전 동문으로 옷자락을 너풀거리며 달아 나고 전내에는 오직 궁예왕과 원종· 애노 두 장수와 계하에 엎어진 오아후와 왕후에게 매어 달려 우는 두 왕자뿐이다.

왕후를 죽이라는 명을 받았던 금군도 어느 틈에 새어 버리고 말았다.

오직 핏내 맡은 까마귀 한떼가 만세전 추녀 위에 앉아 고개를 끄 떡 거리며 까옥까옥 할 뿐이다.

밖에서는 여전 고함 소리가 나며 살이 서너 대 대궐마당에 날아 들어 와 박석 위에 소리를 내고 너푼너푼 떨어진다.

왕은 여름볕이 찌듯이 비치인 층층대로 내려 와 칼을 빼어 난영의 결박 지운 것을 끊고,- 203 - 『 난 영아, 너도 왕건에게로 가라!』 하고 외치었다.

그러나 난영은 여전히 땅에 이마를 대고 쓰러져 있고, 어린 두 왕자만 궁예의 두 소매에 매어 달려, 『 아바마마.』

『아바마마.』

하고 목을 놓아 운다.

궁예는 이윽히 두 왕자의 우는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두 왕자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아 쥐고, 『 오오, 너희들도 왕건의 자식이냐.』

하고 칼을 들어 내려 치려 하였다.

그때 난영이 벌떡 일어나 궁예의 칼 든 팔을 한손으로 잡고 몸으로 두 왕자를 가리며, 『 상감 마마 잠깐만 참으시와 내 말을 들으소서. 두 왕자는 분명하 상감 마마의 혈육이오니 죄많은 나를 죽이되 두 왕자는 건드리지 마옵소서.

내 말도 할 말이 많사오나 그것은 지금 아뢸 사이 없사오니 황천에서 뵈 올 때에 아뢰기로 하옵고 어서 상감마마의 손으로 이 목을 베시고 상감 마마는 아직 몸을 피하시와 후일을 도모하시옵소서.』 하고 운다. 궁예는 난영의 말을 비웃으며, 『 흥! 요망한 계집이 죽을 때까지도 거짓말을 하여 지아비를 속이려는 구나. 네가 왕건을 꾀여 배반하게 하여 놓고, 이제 도리어 착한 체하니 배난하는 소위보다 속이는 소위가 더욱 밉다.』 하고 난영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이 열리어 움직이려 할 때에 궁예의 칼은 벌써 난영의 허리를 끊고 또 한번 들어 칠 때에 우짖는 두 왕자의 목이 끊이어 궁예의 손에 매어 달린다.

원종과 애노는 달려달아 말리려 하였으나 그러할 새가 없었다.

『상감 마마! 왕후마마께서 「아니오!」하옵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하고 원종이 난영의 얼굴을 치어 드니 아직도 눈은 산사람과 같이 궁예를 바라보며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이 움직인다.

궁예는,

『흥, 죽은 뒤에도 속이는 입술을 움직이려는구나!』

하고 칼로 그 입을 치니 움직이던 입술이 떨어지며 끓는 듯 뜨거운 피가 궁예의 가슴에 튄다.

- 204 - 『 상감 마마! 국모마마께서는 반드시 하시려던 말씀이 있었사옵니다.

천지는 변하온들 왕후마마의 절개야 변하오리까?』

하고 왕후의 끊어진 몸을 한데 모아 놓고 원종은 자기의 갑옷을 벗어 덮었다.

궁예는 원종이 하는 양을 보더니 손에 들었던 두 왕자의 머리를 애노에게 주며, 『 이 것도 무엇으로 덮어나 주라.』

하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애노는 원종이 하던 모양으로 두 왕자의 몸과 마리를 붙이어 왕후의 좌우 곁에 안기어 자는 듯이 누이고 자기의 갑옷을 벗어 세 신체를 보이지 않도록 덮었다. 그러나 한량 없는 듯이 솟는 피는 갑옷 밑으로 박석 위로 흘러 나와 박석 틈바구니 흙 속으로 깊이 흘러 들어 갔다. 뜻없이 깊이깊이.

만세문이 열린 모양이다. 「우아!」하는 고함 소리가 더욱 가까와 지며 살이 더욱 많이 날아 들어 온다.

원종은 애노를 시켜 곧 마구에 가서 말 세필을 안장지으라 하고 왕의 곁으로 가서 급히 몸을 피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원종을 보며, 『 내게 무슨 후일이 있으랴? 나는 여기서 왕건을 만나기를 원하노라.

경들 두 사람의 충성은 후생에 갚을 날이 있으리라. 아직 나를 두 고가라.』

하고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원종은 그래도 정성으로 궁예더러 잠시 몸을 피하기를 권하였다 ————『 여기서 북으로 백리를 가면 삼방(三房)이란 삽협이 있사오니, 일 부당 관에 만부 막개한 요해지옵고 또 거기서 다시 사오십리를 가면 동해 바닷가로 일망 무제한 넓은 들이 있사온즉, 거기서 족히 힘을 길러 다시 천하를 회복하 올 것이니 왕건의 군사가 아직 뒷길을 끊기 전에 몸을 피하 심이 좋사오이다. 신과 애노————비록 늙고 재주 없사오니 충성으로 상감 마마의 은혜에 젖은 백성들인들 어찌 응함이 없사오리까? 보소서, 저 기 고함 소리 점점 가까이 들려 오니 일이 급하온지라 시각을 지체할 수 없나이다.』 하고 원종은 왕의 액하에 넣어 끌었다. 왕은 아니 끌리려고도 아니하고 원 종이 끄는 대로 끌려 만세전 뒷문으로 나왔다.

- 205 - 수 문장은 왕건에게 왕의 말을 전하였다.

『나는 여기서 왕건을 만나서 할 말이 있다.』

는 궁예왕의 말은 왕건의 가슴을 푹 찌르는 듯하였다. 아무리 의심이 많은 왕건이라도 홍술(弘述)·백옥(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네 사람의 꾀임이 없었던들 아마 이처럼 급전 직하로 배반하는 일은 없었을것이다.

이 네 시람은 후에 홍 유(洪儒)·배 현경(裵玄慶)·신 숭겸( 申崇謙)· 복지겸( 卜智謙) 이라 하여 왕건의 개국 공신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도 궁예의 신하가 아님이 아니었으나 대세가 궁예는 불리하고 그 뒤를 이을 이가 왕건인 것을 보매 얼른 왕건에게 붙어 큰 공을 자기의 손에 넣으려 한 것이다.

그 네 사람 중에 삼능산 즉, 신 숭겸은 특별히 궁예왕의 사랑을 받더니만큼 특별히 궁예에게 대하여 배반하기를 굳세게 왕건에게 권하였다.

왕건은 왕후의 방에서 왕의 눈에 발각된 날 밤에 집에 돌아 와 심히 괴로와 하였다. 그것을 보고 부인 유씨( 柳氏) 는, 『 대감 오늘밤은 왜 그렇게 괴로와하시오?』 하고 물었다.

왕건은 차마 왕후의 방에 들어 갔다가 왕에게 들켰단 말은 못하고, 『 명일은 왕이 나를 죽이려 하신다오.』

고만 하였다.

그때에 유씨 부인은 깜짝 놀라며, 『 대감이 무슨 죄를 지으시었기로?』

하고 물었다. 왕건은 고개를 숙이고, 『 왕은 미치사 왕후도 죽이려고 하시기로 내가 못한다 하였더니 왕은 내가 왕후를 사정 둔다 하여 크게 노하시었소.』 한다.

유씨 부인은 왕건이 자주 궐내에서 밤 깊도록 있는 것을 수상히 알았으나 그란 빛은 보이지도 아니하고, 『 그러면 어찌하시려오? 큰일을 할 때가 이때가 아니오? 아까도 홍술 장군이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와서 대감이 돌아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간 지 얼마 아니 되오. 각영문 군사들도 인제는 다 대감의 손에 있으니 이 때에 거사를 아니하고 누명을 쓰고 돌아 가시면 그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소, 대검이 이기면 누명은 왕에게로 갈 것이로되, 대감이 가만히 계시다 돌아가시면 누명을 쓸 사람이 대감 밖에 있소? 누명도 벗고 만승의 왕 될 일을- 206 - 이 때에 아니하면 언제 하오?』 하고 네 사람의 말을 전할겸 왕건을 권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마음을 내려 누르는 무거운 무엇을 제치어 버릴 수가 없어 고개는 더욱 수그러지었다. 지금까지도 내심으로 그러한 야심을 아니 가진것도 아니언마는 그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더구나 자기의 죄를 덮는 핑계 로그 일을 하려 할 때에는 괴로왔다.

『왕은 나의 임금이요, 나의 은인이로구료. 내가 지금 배반하면 신하로는 역적이요, 사람으로는 배은 망덕이로구료. 더구나 몸을 바치어 왕을 섬 기라시던 아버지의 유훈을 어찌하겠소?』 하고 주저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왕건의 아버지는 한주 도독 왕륭이다. 어린 궁예가 아버지 경문대왕의 영 결식에 참례하야 생전 처음겸 마지막으로 왕의 얼굴을 보려 할 때에 그 의기에 감격하여 단신으로 궁예를 도와 싸우던 왕륭이다. 왕륭은 그때에 솔메( 지금 송도)로 달아나 숨어 있으면서 항상 궁예가 큰소리 칠 날 잇기를 고대 하였다.

그 후 왕건이 나서 자라매, 누누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울 것과, 그리되 면 사방에서 사슴을 쫓는 자가 나타날 것과, 그러한 자들 중에 의리보다도 사욕을 채우려는 자가 많을 것을 말하고, 『 너는 의리를 위하여 죽는 졸병이 될지언정 사욕을 위하여 사는 영웅이 되지 말라! 내가 죽어 지하에 잇더라도 내 혼은 반드시 너를 따라 네 가하는 바를 보리라. 한걸음이라도 네가 의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줄 알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왕건은 아버지 앞에 읍하고 서서 눈에 눈물을 머 금고, 『 아버지 교훈대로 하로리다.』

하고 굳게 맹세를 하였다.

궁예가 처음 쇠두레에 도읍할 때에는 왕륭은 일종의 병석에 있었다. 그는 궁예가 도읍하고 왕이 되었단 말을 듣고 머리맡에 왕건을 불러 앉히고, 『 건아! 곧 떠나 쇠두레로 가서 너희 임금을 섬기라. 궁예와이야말로 내 임금 경문대왕의 아드님이시고 어려서부터 제왕의 기상이 있었더니라. 곧가서 왕께 뵈옵고 이십년 전 대궐안에서 뵈옵던 왕륭이 보내더라고 아뢰어라.』 하였다.

왕건은 아직도 이십세 밖에 안된 소년이다. 아버지가 곧 집을 떠나 라시는- 207 - 말에 눈물을 흘리며, 『 병석에 누우신 늙은 어버이를 떠나라 하시나이까?』 하였다.

왕륭은 지필을 들어, 『王事急王事急 (나라 일이 급하다. 나라 일이 급하다.)』

하는 여섯 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고, 『 어서 가거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건이 눈물을 뿌리고 나가려 할 때에 왕륭은 손을 들어 왕건을 불러, 『 한전 임금께 몸을 바치었거든 네 목숨이 죽도록 충성하여라. 왕륭으로 하여금 배반하는 아들을 두었다는 누명을 천추에 전하게 하는 불효 다가 되지 말아라.』 하고 어성을 높였다.

왕건은 다시 절하고 그대로 하기를 맹세하였다.

그러고 집을 떠나 궁예왕께 뵈올 때 왕은 옛일을 생각하고 아들과 같이 왕건을 맞았다.

왕건은 이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에 마음이 무거웠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탕 임금도 임금을 배반하였고, 무왕도 임금을 배반하지 아니하였소? 선 즉 군왕(成則君王)은 대장부의 일이 아니오?

무엇을 생각하시오? 어서 홍술 장군을 불러 시기를 놓치지 마시오.』

하였다.

이리하여 닭이 울 때에 홍술·백옥·삼능산·복사귀 네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왕건의 집으로 불려 왔다.

왕건은,

『오냐, 하자!』

하고 군사를 풀어 싯내벌을 손에 넣고 대궐을 엄습한 것이다. 그러나 수문장이, 『 나는 여기서 왕건을 만나 할 말이 있다.』

는 왕의 말을 전할 때에는 가슴에 칼이 꽂히는 듯하였다. 그래서 왕건은 다만 구사를 시켜 납함(呐喊)만 시켜 궁예가 도망하거나 자진( 自盡) 하기를 재촉 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궁예는 원종과 애노를 데리고 무사히 대궐을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궁예가 도망한 뒤로 곧 왕건은 만세전으로 들어 와 홍술과 백옥과 삼능산과 복사귀 네 사람의 인도로 세 번 사양한 후에 바로 아까 긍예왕이- 208 - 올라 앉앗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아까 원종과 애노에게 겨울 칠 뻔하고 혼비 백산하여 꾸역꾸역 밀려 나갔던 문무 백관들도 아까 섰던 자리에 읍하고 둘러 서서 새 임금의 은혜를 받으려 한다.

새로 왕이 되어 옥좌에 앉은 왕건은 백관을 불러 놓고 처음으로 윤언을 내리시었다.

『짐은 경등으로 더불어 전왕 궁예를 섬기었노라. 비록 전 왕 궁예 ———— 늙으매 법도를 잃어 황음(荒淫)과 포학을 일삼아 이미 천 명과 민심을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짐은 신자의 도리로 왕위의 마음을 둠이 없었고 오직 충성을 다하여 전왕이 회과 천선하기를 피눈물로 간하였노라.

짐이 혈루를 뿌려 통곡함이 어찌 주군(主君)만을 위함이리오. 실로 적자( 赤子) 와 같은 창생이 도탄에 든 것을 위함이러니라, 그러나 짐은 신자의 의리를 굳이 지켜 감히 전왕을 배반할 뜻을 품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왕은 잠깐 말을 그치고 제신을 돌아 보니 제신도 왕의 뜻을 알아 차려 일제 히 읍한 두 팔로 한번 들었다가 내린다. 「과연 폐하의 충성은 그러하시 여이다 」 하는 뜻이다, 왕은 그것을 보고 흡족하여 다시 말을 이어, 『 경들 중에는 짐이 탕무(湯武)의 일을 본받기를 누누이 말하는 이있었으나 짐은 탕무의 덕이 없을뿐더러 짐이 전왕에게 대한 충성과 은정은 매양 그 말을 막았노라.』 하고 또 한번 왕이 말을 끊고 군신을 돌아 보니 군신은 더욱 감격하는 듯이 읍한 팔을 한번 더 들었다가 놓는다.

왕은 흡족한 듯이 잠깐 고개를 끄덕이어 백관의 읍하는 뜻을 안다는 뜻을 표하고 한층 어성을 가다듬어, 『 그러나 경들은 저 계하를 보라.』 하니, 백관의 눈은 계하로 향한다. 거기는 원종과 애노의 갑옷에 덮인 세 신체가 놓였다. 왕은 명하여 그 덮은 것은 벗기라 하였다. 벗긴 밑에서는 피에 젖은 왕후와 두 왕자의 얼굴이 나온다.

근사들은 왕후의 두 동강 난 몸과 두 왕자의 떨어진 머리를 치어 들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피가 흐른다. 보는 사람들은 다 눈쌀을 찌푸렸다.

왕은 떨리는 음성으로, 『 이 곳에 무죄한 세 사람의 원통한 죽음이 있도다. 전왕은 천여 명 가량의 처녀를 음란하고 수없이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마침내 그 왕후와 왕자를 학살하였다. 그 죄를 짐이 비록 용서한들 만민이 어찌 용서하랴. 만민이 설사 안 돌아 보더라도 하늘이 어찌 무심하리오?

경들은 다시 제 계하를 보라!』

- 209 - 할 때에 만조 제신은 일제히 한번 더 왕후와 두 왕자의 참혹한 시체를 바라보고 또 일제히 눈쌀을 찌푸리고 또 일제히 읍 하여, 『 지당 하시외다.』 하는 뜻을 표하였다.

왕은 한층 음성을 낮추어, 『 경들 중에는 전왕을 죽이라 하는 이도 있었으나 짐은 군신의 정과 의에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왕에게 성명(性命)을 보전하여 도망할 틈을 주었노라.』 하고 왕은 다시 소리를 높여, 『 그러하나 짐은 차마 전왕의 자리에 앉지 못하여 세번 사양 하였으되, 경들이 굳이 권하니 민심은 천심이라 천명을 어찌 거역하리오? 짐이 비록 양덕( 凉德) 하나 민심과 천명을 좇거니와, 경들 중에 만일 전왕에 충성을 가지고 그 의리를 지키려 하는 이 있거든 나서 왼손을 들라. 짐이 그 충성을 다하기를 허하리라.』 하고 말을 끊고 제신을 둘러 본다.

왕의 이 말에 군신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려, 『 신은 전왕에게 대하여는 아무 정도 아무 의도 없사옵고 오직 금상 마마께 충성된 이몸을 바치나이다.』 하는 뜻을 표하였다.

이때에 장군 홍술(弘術)이 옥좌 앞으로 가서 엎디어 아뢰이되, 『 성상( 聖上) 마마께옵서 삼한을 통일하시와 도탄에 든 창생을 적자 와같이 애육하오실 성덕을 갖추시오매, 천명과 민심이 한결같이 폐하에게로 돌어 왔사오니 천명을 잃은 궁예는 이제 한 필부라 성은이 망극하시와 그 목숨을 보존케 하시옴을 감격하올지언정, 어찌 성상마마를 등지옵고 궁예를 따를 마음을 가진 이 있사오리까? 이 중에 한 삶도 없으리라 하나이다.』 한다. 홍술의 말이 끝나매, 엎드렸던 백관들은 일제히 한번 머리와 읍 한 팔을 들었다가 다기 엎드린다.

『과연 홍술이 아뢰인 말씀이 지당하오이다. 어찌 궁예를 따를 생각을 생심이나 하오리까? 신은 오직 폐하의 충성된 신하로소이다.』

하는 뜻이다.

왕은 자못 흡족하여 세 번 고개를 끄떡이었다.

이때에 게하로서 어떤 늙은 궁녀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채색 옷을 벗고 굵은 베로 내려 감고 손에 피투성이를 하여 가지고 계상으로 뛰어 오르며 『 왕건아, 네 감히 은혜를 배반하고 이제 도리어 우리 상감 마마에게- 210 - 누명을 씌우느냐? 내 이 눈으로 네가 어려서 네 아비의 말을 가지고 오던것을 보았고, 인자하오신 상감마마께오서 너를 혈육같이 애육하 심을 보았고, 인자하오신 상감마마께오서 너를 혈육같이 애육하심을 보았고, 또네가 어떻게 상감마마 환후 계신 것을 기회로 역심을 품고 왕후 마마를 위협하여 갖은 흉악 무도한 일을 하는 것을 보았거든, 이제 도리어 뻔 뻔하게 모근 허물을 인자하오신 상감마마께 돌리고 네 감히 높이 옥좌에 오른단 말이냐? 네 비록 사람의 눈을 속이더라도 능히 천지 신명을 속일 줄 믿느냐?』 하고 무서운 얼굴로 군신을 돌아 보며, 『 이 배은 망덕하는 역적의 씨들아, 내 너희에게 보일 것이 있노라.』

하고 춤에서 칼을 빼어 자기의 배를 갈라 손으로 장부를 꺼내어 멀리 왕건을 향하여 뿌리고 거꾸러진다.

모였던 신하들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중에도 내약한 신하는 「 나도 저와 같이 배를 가물까?」하는 생각까지 하였으나 「그것은 왜? 여간 아플라고?」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왕은 조금도 사색에 뱐함이 없어, 『 기특한 사람이로다. 충신의 예로 후히 장사하라.』

하시는 인자한 명을 내리시었다.

얼굴이 흙빛이 되어 이마에 찬땀이 흐르는 백관들은 일변으로 살 길을 얻고, 일변으로 왕의 말씀에 감격하여 또 한번 고개와 팔을 들었다 놓고, 그 중에 어떤 조판은, 『 진실로 성은이 여천하시오이다.』 하고 목 멘 소리로 하였다.

이리하야 태봉이라는 나라 이름이 변하여 고려(高麗)가 되고 궁예가 왕으로 앉았던 자리에는 왕건이 금과 황포로 뚜렷이 올라 앉게 되었다.

그것을 따라 유씨 부인은 고려 나라의 국모가 되었다.

싯내벌에는 날마다 큰 잔치가 벌어지고 밤마다 불놀이가 있고 왕건 왕의 만세를 비노라고 미륵불이 더욱 휘황하고 그 중들은 쉴 새없이 부리나케 빌었다. 백성들은 억지로라도 새 임금의 성덕이 하늘 같고 성은이 바다 같 음을 칭송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기다리던 태평국이 인제야 왔나?> 하고 또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에 궁예는 원종·애노 두 사람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달아났다.

궁예는 행색을 감추기 위하여 사냥군의 복색을 하고, 원종과 애노는- 211 - 사냥군을 따라 가는 모릿군 모양으로 때묻은 낡은 옷을 입었다. 세 사람은 아무쪼록 큰 길을 피하여 소로로 가되 낮에는 숲 속에 들아 쉬고 새벽과 황혼에 말을 몰았다.

혹 길에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 어디를 가오?』

하고 물으면, 『 사슴 사냥 갑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세 사람의 행색을 물끄러미 보고, 『 늙은이들이 뛰는 사슴 사냥이 당하오? 덩굴에 매어 달린 참외 사냥이나 하 오.』 하고 비웃고 지내갔다.

쇠두레 지경을 벗어나 도끼낭(斧壞) 지경에 잠가 머물러 하였으나, 궁예왕이 북으로 달아났다 하는 소문이 퍼지어 소먹이는 아이들도 세 사람이 지나가면 유심히 보고 김매는 농부들도 세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을 할 뿐더러 김매는 농부들도 세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을 할뿐더러, 왕건 이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궁예왕을 잡거나 해하려 할 것을 두려워 밤을 도와 두 끼낭 지경을 떠나 검불낭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한없이 달아났다.

검불낭에서부터 끝없이 북으로 달아난 나무 한 개없는 풀밭에 길조차 끊어졌다. 이제부터 인가도 없으니 풀꽃과 벌레 소리로 벗을 삼아 시름놓고 나가나, 가끔 말굽 소리에 놀래어 달아나는 토끼를 보고 궁예는 활 에손을 대었으나 쏘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토끼가 달아나 숨는 곳을 바라보았다.

석양을 등에 지고 가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풀밭 위에 움직일 때에 천지는 더욱 적막하고 들꽃은 더욱 붉었다. 이따금 하늘 한편 끝에 일어나는 구름에서 번개가 번쩍거리고 그것이 순식간에 소나기가 되어 길가는 가람의 웃을 적시었다.

나무가 없으니 낮에는 쪼이는 볕과 울려 뿐는 훈증한 기운에 숨을 쉴 수없이 덥고, 땅이 높으니 밤에는 늦은 가을같이 추웠다. 불을 피우려 하나 따르는 군사가 불을 볼 것이 두렵고 또 여름 풀판에 불 피울 나무도 찾을 길이  . 혹은 토끼를, 혹은 노루를 잡아 고기를 먹어 주린 것을  엇 다 채우고, 피를 빨아 목 마른 것을 눅이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무인지 경 풀밭을 헤매었다.

본시 중병을 앓고 나서 아직 회복도 되기 전에 참혹한 환난을 당하고 오륙 일 간이나 비를 맞고 바람에 씻기면서 고생한 까닭에 궁예왕은 더욱- 212 - 몸이 쇠약하여 빛 없는 얼굴에 움쑥 들어 간 눈 하나만 희미하게 번쩍 거리고 다리는 결코 쑤시고 정신은 가끔 아뜩아뜩하여 말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고, 말에서 떨어진 것이 더욱 몸을 쇠약하게 만들어 이제는 말 탈 수도 없고 걸어 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 해도 지기 전 에어 떤 바위 밑을 찾아 부드러운 풀 잎사귀로 푸근푸근하게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궁예를 뉘여 놓고 원종과 애노 두 사람은 말을 달려 사방으로 인가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간 곳마다 풀이요, 풀이 다하는 곳은 산이요, 인가는 만나지 못하고 이날에는 족마귀만한 토끼 하나도 얻어 보지못하였다.

해가 다 넘어가 황혼이 되고 먼 산머리에 타던 구름장까지 다 꺼멓게되고 높다란 하늘에 벌들이 반짝반짝할 때쯤하여 두 사람과 말은 기운이 진하여 궁예왕이 누워 있는 곳으로 돌아 왔다.

『상감마마 아무리 찾아도 인가는 보이지 아니하오나 간혹 풀이 높고 나뭇가지 꺽인 것이 보이니 하룻길만 더 가면 인가를 찾을 듯하옵니다.

오늘 밤을 굶어 지나면 밝는 새벽에야 설마 토끼나 노루를 만나지못하오리까?』

하고 두 사람은 풀잎에 싼 아직도 익지 아니한 딸기와 더덕 따위를 왕의 앞에 놓고 왕을 붙들어 일으킨다. 왕은 등을 바위에 기대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 이 은혜를 어느 때에 갚을꼬? 이 세상에서는 갚을 길이 없을 듯하니 내 생애에라도 깊으마.』 하고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도 눈물을 흘려 비감하여 하는 왕을 위로하고 딸기와 풀 뿌리로 요기를 한 후에 피곤한 몸을 풀 위에 뉘었다. 별은 말없이 빛만 내려 보내고 벌레들을 숨어서 소리만 울려 보내니 풀 위에 누운 한 임금과 두 신 하의 늙고 피곤한 몸이 잠을 이룰 길이 없다. 차다고 할 만한 서늘한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고 한번 지나간 뒤에는 바람도 오지 아니하고 소리 없는 비와 같은 이슬만 푹푹 매여 와 옷을 적신다.

유월 초승의 핏기 없는 달도 언제 넘어가는 줄 모르게 넘어 가 버리 고무인지 경의 밤은 더욱 깊어 가는데 왕의 애끊는 듯한 앓는 소리만 땅속에서 울어 나오는 소리와 같이 끊이락잇기락한다.

새벽이 될수록 더욱 추웠다. 궁예왕은 추위에 잠이 깨어 고개를 들어 곁에 누워 자는 원종과 애노를 보았다. 왕은 곁에 난영이 누워 자는 꿈을 꾸다가 깨인 것이다.

- 213 - < 난 영은 벌써 가 버렀다.>

하고 궁예왕은 눈앞에 난영과 두 왕자를 그려 보았다.

『아바마마!』

하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두 팔에 매어 달리던 어린 두 왕자가 보이고 다음에는 손에 대롱대롱 매어 달린 두 왕자의 눈물 흐르는 머리가 보인다.

<진시로 난영이 나를 배반하였을까 ————내가 잘못 본것이 아닐까? 잘 못 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슨 다른 깊은 연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 내 가무 죄한 난영을 죽인 것이 아닐까————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더 물어 볼 곳이 없다. 죽어서 혼이 있거든 황천에서나 서로 물어 보자.> 하고 궁예는 혼자 생각하되 하그리 슬픈 줄도 몰랐다. 왕건에게 대 한 미움과 원망도 옛날 일 같고 만승의 높은 자리를 버린 것도 시들하고 ———— 모든 것이 다 시들하고 그저 얼마 아니하면 자기는 죽어 버리려니, 죽어 버리면 만사가 끝나려니 하여 마치 흉악한 꿈을 꾸는 사람이어서 그 꿈에서 깨어 보려고 애를 쓰는 모양으로 어서 죽어 버리고싶은 생각뿐이었다.

동편이 훤하여지며 아침의 붉은 빛이 솟아 오른다. 궁예는 멍히 그 빛을 본다. 그 빛은 얼마나 궁예에게 힘과 기쁨을 주던 빛인가? 그러나 지 금은이 불그레한 아침 빛도 궁예에게는 시들하였다.

어느 풀숲, 어느 시냇가에 아침 빛을 받아 새로 꽃이 터지는지 가만가만 불어 오는 바람에 은근한 향기가 떠온다. 궁예는 무심코 쿵쿵 두어 번 맡아 보았으나, 그것도 시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바지런한 개미가 주름 잡힌 껍질만 남은 궁예의 목으로 발발 기어 뺨으로 이마로 돌아 다녀도 궁예왕은 그것을 떨어뜨리려고도 아니하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있는 것 처럼, 예날의 것처럼 희미하고 시들하였다.

원종과 애노도 훤한 빛에 놀래어 깨었다. 해는 벌써 그 어글어글 한 얼굴을 반이나 먼 산머리에 올려 밀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 방울들 이 일제 히 금빛같이 빛나고 한참 조용하던 벌레들도 어제보다도 소리를 높여울 기를 시작하고 기운 넘친 메뚜기들은 깁 같은 날개를 펄럭거리면서 길길이 뛰어 오른다.

두 사람은 아직도 왕이 자는 줄만 날고 소리 안 나게 가만히 일어나 활을 곤에 잡는다. 아침 요기할 양식을 얻으려 함이다. 무심한 말들을 풀에 배를 불리고 꼬리를 툭툭 치며 눈을 멀뚱멀뚱하고 주인들을 바라본다. 까치 두 마리가 아주 낮게 떠서 깍깍거리고 지나갈 때에 세사람의 눈은 일제 히- 214 -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침 까치는 반가운 까치라고.』

하고 원종이 말하면 애노는, 『 오늘은 인가를 만나려나. 상감마마께서 며칠은 편안히 쉬어야 하겠는데.』

하고 가만히 말한다.

마디마디 자기에게 재한 충성이 사무친 말을 궁예는 차마 듣고 잇을 수가 없었다. 자기를 배반한 원수보다도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두 사람이 더욱 괴로 왔다.

『이 사람들! 짐을 버리고 가라! 나는 이곳에 누워 잇는 것이 좋으니, 나를 버리고 싯내벌로 가서 왕건을 보고 내가 이곳에 누워 있더라고 이르라.』 하고, 아무리 두 사람이 일으키려 하여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원종과 애노는 궁예의 곁에 꿇어 앉아 울었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 로이처럼 슬픈 울음은 없는 듯하였다.

이때에 어떠한 사람 셋이 풀을 헤치고 동쪽으로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활을 메었으나 칼을 차지 아니 하였으니, 궁예를 따르는 군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 사람들은 세 사람이 잇는 곳을 향하여 오다가 셋 세 사람을 보고 우뚝 섰다.

원종은 손에 활도 칼도 들지 아니하고 「워이!」하고 외치며 세 사람 앞으로 마주 가서 지금 동행하던 사람이 병이 들어 촌보를 움직이지 못 하니어디 인가 잇는 곳을 가리켜 달라는 뜻을 표하였다.

원종의 말을 듣고 세 사람은 원종을 따라 궁예 있는 곳으로 왔다.

그중의 한 사람은 궁예의 머리를 손으로 짚어 보더니 등에 쥐었던 망태를 끌러 곰취 잎에 싼 밥을 꺼내어 궁예에게 주며, 『 위선 먹소. 그리고 우리 집으로 갑시다. 늙은이가 오죽하겠소?』 하고 곁에 선 젊은 두 사람더러, 『 예, 세째야 너는 가서 바가지에 물을 떠 오고, 둘째 너는 가서 막대기두 개하고 칡 한 사리만 걷어 오너라. 이 늙은이를 우리 집으로 떠 메어가야 하겠다.』 하고 일일이 분별하고 두 젊은 사람이 가졌던 밥도 내어 원종과 애노에게 준다.

나무 찍어 올 직무를 맡은 둘째라는 사람이 궁예의 말을 만지며, 『 그 말 좋다. 이것 좀 타고 갑시다.』

- 215 - 하고 대답도 기다리기 전에 슬쩍 올라 앉아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것을 보고 몇 걸음 가던 세째는 원종의 말을 붙들고, 『 나도 이거나 타고 가서 약물을 떠 와야.』 하고 달아나 버린다.

달아났던 젊은 사람들은, 「그말 잘 다는데 ———말 좋은데」하고 하나는 물을 떠 가지고 오고, 하나는 두어 발되는 자작나무 두 개와 잎사귀가 버불 너 불하는 칡을 걷어 가지고 와서 말에서 뛰어 내린다.

칡 걷어 온 사람은 허리에서 팔뚝 같은 칡뿌리를 빼어 칡 잎으로 흙을 씻어 버리고 낫으로 성둥성둥 여러 토막에 내어 한 토막을 궁예왕 앞에 쑥 내어 밀며, 『 아주버니 먹어봐요———아주 연하고 달고 물이 많다니.』 한다.

궁예는 손을 내밀어 그 칡 뿌리 토막을 받는다.

젊은 사람은 원종과 애노와 자기 형들에게 칡 한 토막씩 주고 그 중에 제일 큰놈을 자기가 가져 손으로 거기 묻은 흙을 툭툭 떨어 바리고 입에 덥 썩 물어 우쩍우쩍 씹어 가며 단물을 쭉쭉 빨아 꿀꺽꿀꺽 삼킨다. 그 사람이 먹는 모양을 보고 원종과 애노도 그 모양으로 먹어 보고 궁예도 그것을 이리저리 뒤져 보다가 그 모양으로 먹어 본다. 씹으면 씹을수록 시원하고 달크무레한 물이 나온다. 여섯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칡 뿌리를 씹는다. 세째는 가끔 칡뿌리 먹는 법을 궁예 아주버니에게 가르쳐 준다.

궁예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칡뿌리를 씹는다. 정신이 드는 듯하였다.

형님, 둘째, 세째라는 삼 형제는 자작나무와 칡으로 순식간에 맞 드래 를 만들었다. 그 위에 푸근한 풀을 깔고, 궁예를 번쩍 들어 누이고는 둘째와 세째가 앞뒤 채를 메고 벌써 터덜거리고 달아난다.

『그 아주버니 갖다 두고 너희들은 더덕골로 들어 오너라. 얼른 그 사슴이 빠져 나가기 전에.』

하고 궁예가 탔던 말을 집어 타고 서쪽으로 달아난다. 원종은 애노더러 왕을 잘 지키라고 귀속말로 하고 자기는 형의 행동을 알아 볼겸 형과 같이 가려 하여, 『 사냥을 가시거든 나도 같이 갑시다.』 하였다.

형은 여전히 말을 달리면서, 『 늙은이가 따라 오겠소? 갈 만하거든 갑시다.』

하고 웃는다.

- 216 - 원종은 형을 따라 서쪽으로 달아나고 애노는 둘째와 세째에게 들려 가는 왕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갔다.

둘째와 세째는 유쾌한 듯이 웃고 지껄이며 궁예를 들고 달아난다. 궁예 가탄 맞드래에 늘어진 칡 잎사귀 이슬이 햇빛에 번쩍거린다. 뒤를 따르는 애노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일마를 오니 풀판은 다하고 눈앞에는 깍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가 있고 그 밑에는 하연 산개천이 달려 가는 것이 보였다. 그 낭떠러지를 내려 가면서, 『 아주버니 꽉 붙들어요!』 한다. 천길 만길 되는 이 골짜구니 밑에는 햇빛도 잘 비치지 아니하고 오직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요란한 물소리뿐이었다. 물은 소리를 지르고 바위에 깨어져 하얀 물거품을 지우면서 원수 갚으러 가는 사람 모양으로 함부로 날뛴다.

풀이 우거진 개천가 비탈에는 칡 덩굴과 다래 덤불이 고목에 매어 달려 그 밑으로 지나갈 때에는 찬바람이 훅훅 불고 찬 이슬 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다람쥐가 사람 죽은 혼령 모양으로 알른알른 지나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앉아서 멍하게 내려다보기도 한다.

『요놈!』

하고 젊은이들이 소리를 지르면 쥐는 살짝 몸을 나무 위에 숨기고 대가리만이 리로 향하고 눈을 반짝거린다. 어떤 때에 날낸 도마뱀이 돌 위에 앉아서 볕을 쪼이다가 길을 잃고 요리 조리 헤매는 것을 세째가 얼른 맞드래 채를 놓고 그놈을 붙들어서 궁예의 곁에 놓는다.

궁예가 놀라는 빛을 보이면, 『 도마뱀은 물지 않아요!』

하고 껄껄 웃으며 그놈을 도로 잡아 소매 속에 집어 넣는다. 그러면 도마뱀은 세째의 목으로 기어 오르다가 거기도 더 갈 곳이 없으면 다시 등으로 기어 내린다.

『아이고 간지러!』

하고, 세째는 몸을 흔들고 웃는다.

애노는 궁예가 빙그레 웃는 양을 보았다. 애노도 웃었다. 궁예와 애노가 웃는 눈치를 보고 세째는 더욱 익살을 부린다.

『이 녀석아! 흔들지 말아.』

하고, 둘째가 뒤를 돌아 보며 소리를 지른다.

몇 물굽이 몇 비탈을 돌아 약간 골짜기가 넓어진 곳에 하늘에 닿은- 217 - 전나무 숲이 있고 그 숲속에 나무로 지붕을 이은 통나무 집이 있다.

집이 보이매, 둘째와 세째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뛰어 들어가며, 『 아버지 사냥 해 왔소!』

하고 소리를 지른다.

『무어 큼직한 것 잡혔니?』

하고 안으로서 노인의 소리가 나온다.

『하나만 잡아요, 셋이나 잡았다니.』

하고 세째가 킥킥 웃는다.

지팡이를 끌고 나오던 노인은, 『 어디? 어디?』

하다가 맞드래에 누운 궁예를 보고 놀라, 『 이 것 웬 사람이야?』

하고 우뚝 섰다.

방은 모두 둘 밖에 없다. 한 방에는 노인과 아들 삼형제와 딸 하나가 거처하고, 한 방에는 궁예와 원종 애노 셋이 거처 거처하였다.

이 집에 쉰지 사욀 만에 궁예는 적이 기운을 회복 하였다. 일어날 수고 잇고 나오던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원종·애노는 심히 기뻐하고 그 집사람들도 기뻐하였다. 세째는 궁예가 마당에 나와 다니는 것을 보고 웃으며, 『 아주버니 나와 다니는구료! 약 값 내오!』 하고 껑충 뛰었다. 아직 이 집 사람들은 이 늙은이가 왕인 줄은 모른다.

궁예는 가슴 속에 스러져 가는 기운과 뜻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깨 달았다. 권토 중래(捲土重來)의 형세도 싯내벌을 들이쳐 배반하는 왕건을 결박하여 발 아래 꿇리고 그 목 위에 칼을 높이 들고 호령하는 자기의 모양을 보았다.

『원종이 안 가려나!』

하고 궁예왕은 늙은 젓나무에 기대어 그 밑으로 소리치고, 여울 지며 흘러가는 물을 보고 길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원종은 왕의 초췌한 얼굴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 이삼일만 더 쉬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이 앞으로도 백여 리 무인 지경이 있 사오니 만일 중도에서 황후에 덧치시오면 어찌하오리까?』 하고 만류하였다.

왕은 팔을 들어 보고 다리를 옮겨 놓아 보며, 『 아니! 내 기운이 갈만하여. 또 왕건이 놈이 반드시 추병( 追兵)을- 218 - 보냈을 것이니 이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이 마땅치 못한 일이어!』 하고 부득부득 이곳을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궁예는 이사마일 내로 이 모양으로 떠나기를 재촉하였으나 원종과는 애노는 며칠만 더 쉬기를 빌어서 오늘 내일 하고 기다려 왔다. 그러나 궁예는 몸과 마음에 새 기운이 날수록 부득부득 졸랐다.

또 왕건이 놈이 소머리(牛首州)를 거치어 쇠재(鐵嶺)로 군사를 넘겨 앞길을 막고 보면, 진리 유곡이 될 것이니, 어서 바삐 떠나가자고 궁예는 두 사람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원종과 애노가 보기에 궁예왕은 아직 말을 타고 배길 것 같지아니하고, 또 걸어서는 십리도 갈까 싶지 안하기 때문에, 그러면 하루만 더 묵어 내일 조조에 떠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삼 형제는 오늘도 왕과 원종·애노의 말을 제 말처럼 내어 타고 사냥을 나갔다.

그 집을 빌어 자고 그 집 것을 얻어 먹는 신세로 말 타는 것을 막을 염치가 없다. 또 말 얻어 타는 맛에, 세 사람을 오래 머물러 두고 가라는말도 아니하는 것 같았다.

궁예는 일각이 삼추같이 어서 이 날이 다 지내고 새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방에 누워 있었다. 늙은 가슴에 젊은 불길은 일어났다. 권세의 욕심 ———— 그것은 만민의 위에 서서 만민을 다스리고 싶은 욕심이다. 하늘 밑에는 설지언정 사람 밑에는 서지 않겠다는 욕심이다. 궁예는 어려서 부터 일찍 남의 밑에 있어 본 일이 없었다. 그가 혹 기헌이나 양길의 밑에 들었던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높은 곳에 오르려는 한 계단에 지나지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삼국을 통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당나라 황제를 싯내벌 만세전 계하에 꿇리고도 만족치 못하여 미륵불이 되어 금후 억만년의 세계 중생을 다스리려 한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러할 수가 있다!』

하고 궁예는 하늘이 치어다보이는 지붕 밑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왕건에게 대한 원수! 그것은 서른 두 개 이빨을 다갈아 닳아지게 되더라도 왕건을 잡아 살을 짓이기고 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버리더라도 백천 아승지겁(阿僧祗劫)을 윤회 전생(輪廻轉生)하더라도 삼 천대천 세계(三千大天世界)가 모두 타서 부서져서 없어져 버리는 마지막 찰나까지 잊어 버리지 못할 원수다. 믿음을 배반한 원수————아내를 빼앗고 나라를 빼앗은 원수————궁예왕은 자다가도, 『 이 놈 왕건아, 』- 219 - 하고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왕건의 원수만 위하여서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 살고 살아서 왕건을 싯 내 벌에서 만나야 한다!』

하고 궁예왕은 이를 갈았다. 천하에 으뜸이 되어 만민을 다스리는 일을못 하더 리도, 이몸과 혼을 더욱 유황을 속에 백천만번 던지더라도, 몸과 혼이 타고 타서 바늘끝만 한 것만이 남더라도 이 원수는 갚고야 만다.

궁예왕은 벽상에 걸린 칼을 본다. 그 칼조차 왕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알아서 갑속에서 쩡쩡 우는 듯하였다.

궁예는 모든 원수를 용서하였다. 어머니의 원수도 용서하였고, 자기를 죽이려던 원뢰의 원수도 용서하였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원수를 다용서 하여도 왕건의 원수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왕건이 지금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자기가 길러 낸 신하들을 거느리고 왕의 영화를 누리고있는 것을 생각하면 금시에 몸을 날려 싯내벌로 가고 싶었다. 비록 가서 원수를 갚지는 못하여도 입에 가득 끊는 피를 왕건의 얼굴에 뿜고 소리 높이 웃어 주고라도 싶었다. 그러나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잠시의 분을 참는다. 궁예왕은 터지려는 분통을 끌어 안고 북으로 북으로 달아나서 새 힘을 길러야만 될 줄 안다.

『원종, 민심은 나를 떠나지 아니하였을까?』

하고 왕은 돌아 누우며 원종에게 묻는다.

『민심은 상감마마를 사모하옵니다. 이 땅의 초목 금수도 마마의 성은에 젖었거든 혼 있는 백성들이 어찌 성은을 잊사오리까? 민심이 천 심이오니 잠시 곤액을 과히 슬퍼 마옵소서.』 하고 아뢴다.

이 말에 왕은 다시 지붕 구멍으로 흘러 들어 오는 빛을 바라본다. 왕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돈다. 그러다가 왕의 얼굴은 다시 흐려진다.

마치 구름장이 해를 가리는 모양으로…….

왕의 마음에는 난영이의 아름다운 모양이 떠 나온 것이다. 자기의 병실에서 보던 난영, 치악산 석남사의 눈 쌓인 겨울 밤에 보던 난영, 아슬 라성 밤에 운영과 같이 있던난 영, 아슬라(阿瑟羅)로 북원으로 같이 다니던 난영, 싯내벌 만세궁예 강양왕후로 보던 난영이 차례차례로 혹은 웃음을 띄우고 혹은 수림을 띄우고 혹은 눈물을 머금고 알른알른 지나간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 만세전 뜰에서 허리를 끊기던 난영……아아, 난 영은 과연 나를 배반하였을까? 그렇게 아름다운 난영이———그렇게 진실하던난 영이, 그렇게 배반할 수가 있을까? 내가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한 것이- 220 - 아니었을까? 하고 궁예왕은 스스로 자기를 의심하였다. 그러할 때에 옛사랑의 기억이 새롭고 오늘날의 비참한 처지가 더욱 슬펐다.

『그러나 모든 것을 회복할 힘이 내 속에 있다!』

하고 궁예는 이십여 년 전 영동 칠백리를 무인 지경같이 스치어 내려가던 기운을 생각한다.

『내일은 해 뜨기 전에 떠나려 하노라. 큰일은 일각을 지체할 수 없도다.』

하였다. 원종은 뜻을 더 거역하기 어려워, 『 네, 해뜨기 잔에 말 안장 짓사오리다.』

하고 시원하게 대답은 하였으니 어쩐 일인지 앞이 깜깜해지는 듯 가슴이 막히는 듯하였다. 이러한 동안에 해는 석양이 되고 궁예왕이 싯내벌을 떠난지 보름째 되는 날도 거의 다하려 하여 앞 내의 물소리만 새삼스럽게 높고 천년 묵은 젓나무들은 바람을 맞아 우수수하고 울었다.

이때에 냇물을 낚시만 나갔던 애노가 들어 와서, 원종은 뜻을 더 거역하기 어려워, 지체할 수 없도다.

『마마, 오늘은 이렇게 큰 숭어 두 마리를 낚았읍니다.』

하고 아직도 살아서 펄떡거리는 고기를 버들가지에 꿴 대로 쳐들어 보인다.

궁예왕은 그것을 보고 흡족한 듯이 웃으며, 『 한 놈은 곧 삶아라! 한 놈은 아침 반찬을 하라!』

하고 기뻐 하였다.

애노가 손수 숭어의 창자는 빼고 마당에 앉아 마른 나뭇 가지로 불을 때고 잇을 때에 세째가 말을 달려 들어 오는 길로 가장 황망하게 미처 숨도 돌리지 못하고, 『 아주버니 우리 집에 상감님 있소?』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에 애노도 놀라 일어나고 방에 잇던 궁예와 원종도 놀라 고개를 문밖으로 내어 밀었다.

『 왜 ? 왜 ?』

하고 애노는 세째의 말 앞으로 와 선다. 세째는 그제야 말께서 뛰어내리며, 『 상감님 잇거든 어서 달아나요. 상감님 모가지를 가지려 온다는군 사들이 지금 도독골로 들어 갔는데 곧 이리로 올 것이요.』 하고 어는 것이 상감님인가 하고 찾는 듯이 세 사람을 돌아 본다. 마당 한편 구석에 낮잠을 자던 주인 노인도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세째는 숨울 돌려 이야기를 시작한다.

- 221 - 삼 형제가 사슴을 따라 가다가 자취를 잃어 버리고 두루 찾을 때에 서쪽으로서 말 탄 군사 한때가 달려 와서 앞서 사던 두 형을 붙들고, 『 너희들 궁예왕이 이리로 지나간 것을 보았느냐?』 하고 물을 때에 두 형은, 『 우리 왕 몰라요!』

하였더니, 그러면 늙은이 셋이 이리로 지나간 일이 없느냐? 없을 리가 없으니 반드시 너희들이 숨긴 모양이다. 우리는 궁예왕의 머리를 가지러 온 사람이니, 만일 너희가 궁예왕의 머리를 내어 놓으면 이어니와 그렇지아니하면 먼저 너희 두 놈의 목을 자르리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 우리 몰라요, 몰라요.』 하고 뻗대었다. 그런즉 군사들은, 『 이 놈들 모르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탄 말이 궁예왕의 말이 분명하거든 어서 찾아 놓아라.』

하고, 두 형을 잔뜩 결박을 지어 앞세우고 궁예왕 숨은 곳을 대라고 말 채찍으로 갈기는 것을 보았다. 그런 광경을 보고 나무 뒤에 숨어서 엿 듣던 세째는,< 이 것 큰일 났구나! 그러면 우리 집에 있는 아주버니 상감님이던가?> 하고 말 고삐를 채쳐 달려 오려 할 적에 큰 형의 목소리가, 『 그러면 도독골로 몰골로 차례차례 찾아 봅시다.』

하고 트게 외치었다. 이것은 세째더러 이 군사들이 도독골로 몰골로 다녀가는 동안에 어서 집에 가서 왕께 말하여 피신케 하라는 말인 줄 알고세 째는 군사들이 눈에 띄지 아니하도록 나무 숲으로 골짜기로 살살 기어내려 와 달려 온 것이다. 세째의 말이 끝나매, 궁예왕은 벌떡 일어나 밖에 걸린 칼을 빼어 들고 원종을 겨누며, 『 오! 이놈 너까지고 나를 배반하였구나. 나를 이곳에 머물게 하여 놓고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왕건에게 통하였구나. 오 원종아, 이놈 너도 나를나를 배반하였구나!』 하고 칼로 원종을 친다.

원종은 한팔로 왕의 칼을 막으며 몸을 비켜 서니 왕의 칼에 원종의 왼 편 팔이 떨어진다. 궁예가 다시 칼을 들어 원종을 치려 할 때에 애노가 뛰어들어와 왕의 칼든 팔을 붙들었다.

『애노야, 너도 원종과 같은 놈이다. 너도 나를 배반하고 원종과 하나가 되어 왕건에게 나를 팔았던 말이냐?』

- 222 - 하고 애노를 뿌리치려 한다.

『상감마마!』

하고 원종은 궁예를 노려 보며, 『 이몸이 육십 평생에 살아 온 것이 충성충 자, 집 가문이 비록 미천하나 대대로 충신의 가문 배반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쓰고 무슨 면목으로 지하의 조상을 대하리오. 아무리 충신을 모르는 어두운 임금이기로 가슴 속에 붉은내 마음을 보면 모르랴? 왕도 내 마음을 보라, 천지 신명도 보라!』 하고 칼을 들어 가슴을 우비니 붉은 피가 쏟아지어 나온다.

원종이 칼로 가슴을 우비고 엎더진 것을 보고 애노는 원종의 가슴에 박힌 칼을 빼어 들고, 『 오! 형아! 잘 죽었다. 죽을 때와 죽을 곳을 찾지 못하여 헤매던 몸 이 이제는 때와 곳을 찾았구나. 나기는 한날에 못하였어도 죽기는 한시에 하자던 너를 혼자 보내랴. 충성충 자로 맹세하고 육십 평생을 살아 오던윤종과 애노, 이루려던 나라 일은 못 이루아도 황천 길이 라도 같이 가자.』 하고 원종의 피 묻은 칼을 들어 힘껏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한 손으로 원종의 팔을 꼭 잡고 부르르 떨며 엎더지었다.

궁예왕은 물끄러미 원종과 애노 두 사람에게서 흐르고 있는 땅 위의 피를 보고 섰더니, 『 홍 피는 붉다 ———— 그러나 못 믿을 것은 사람의 마음.』 한다.

죽은 몸에도 앎이 있는지 왕의 이 말에 원종과 애노의 몸이 뒤 치어해 쓱하게 피 빠진 얼굴을 하늘로 향한다. 「하늘아, 나의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보라」하는 듯이 두 사람의 눈은 힘껏 뜨고 하늘을 바라본다.

이것을 보고 궁예는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때에 눈앞에는 원종의 떨어진 팔이 주먹을 불끈 쥐고 땅 위에 놓인 양이 보인다. 왕의 분노하였던 얼굴은 절망하는 얼굴로 변한다.

이때까지 가만히 외면하고 앉아서 광경만 보던 주인 노인이 지팡이를 끌고 궁예의 곁으로 와서, 『 선종아, 선종아 ———』 하고 두 번 부른다.

궁예왕은 자기의 중으로 있을 때 이름을 부른 것을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이키어 노인을 보았다. 노인을 보는 눈은 점점 커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떠서 노인을 바라보고는,- 223 - 『 스승님!』

하고 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야 자세히 보니 이 노인은 삼십여 년전에 태백산에서 보던 백의 국선이었다.

노인은 서서 궁예왕의 절을 받지 아니하고 왕에게 대한 예로 마주 절을 한 후에, 『 우리 다시 만나니 반갑지 아니한가? 그대 오늘날에 누군 줄 알았건마는 마음을 상할까 싶어 아는 체 아니하였노라. 내 그대에게 무어라고 하던고 ——— 계집을 삼가라 하지 아니하였던가? 큰 뜻에 좀이 먹었도다! 큰 뜻에 종이 먹었도다! 아까와라!』 하고 궁예왕의 등을 만진다.

궁예왕은 오래 꿇어 앉았다가 일어나며, 『 난 영은 진실로 제자를 배반하였으리이까?』

하고 난영의 말을 물었다.

노인은 판을 내어 두르며, 『 그것은 나의 알 바 아니다. 계집을 삼가라 하지 아니하였던가!』

하고 같은 말을 다시 할 때에 궁예왕은 동에 식은땀이 흘렀다.

왕은 다시, 『 진헌은 어찌되오리까?』

하고 물은즉, 노인은 아까 모양으로 팔을 두르며, 『 그것은 나의 알 바 아니어니와, 허욕을 삼가라 아니하였던가?』

한다. 궁예왕은 다시, 『 스승님! 저 무도하고 궁흉 극악한 왕건은 어찌되오리까?』

하고 무서운 말을 기다리는 듯이 백의 국선의 눈과 입술을 바라보았다.

백의 국선은 다시 궁예의 등을 만지며, 『 너무 분하여 말라! 인생 만사가 모두 다 한바탕 꿈이 아닌가? 왕건 이 삼국을 통일한다 하면, 그것이 그대에게 무엇이랴? 왕건이 잘 다스리는 임금 되기나 빌라.』 하고 껄껄 웃었다.

『왕건이! 궁흉 국악한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임금이 되어?』

하고 궁예왕은 떨며 멀리 싯내벌 있는 곳을 흘겨 보았다. 석양은 벌써 산 머리에 걸렸다.

궁예왕은 활을 메고 칼을 차고 말에 뛰어 올라 말머리를 북으로 돌리며, 『 왕건은 하늘이 비록 살려 둔들 나는 살려 두지 못하리라.』

하고 한 번 채찍을 들어 말을 달린다.

- 224 - 그러나 왕이 몇 걸음 나가지 못하여 말 발굽 소이 요란히 나며, 『 궁예왕은 닫지 말고 거기 머물어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왕이 놀라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 보니 말 탄 구산 한떼가 저 마다 번쩍 거리는 칼을 매어 들고 자기를 향하고 달려 온다. 그것을 보고 왕은 말머리를 돌려 마치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태연히 서 있다.

군사들은 왕의 앞 수십보나 되는 곳이 와서 일제히 말을 세우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전신에 석양 비낀 볕을 받고 마상에 뚜렷이 앉은 이는 보름 전까지 상감마마라고 부르던 궁예왕이 아니냐. 달려 온 군사를 거 느린 장수는 궁예왕의 금군을 거느려 궐내에서 이십년 동안 왕을 모시던 원 홍( 元弘) 이 아니냐. 그가 왕의 얼굴과 모습을 잘 안다는 까닭으로 왕건에게 뽑힘이 되어 왕을 잡는 명을 맡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냐. 왕의 머리만 가지고 오는 날이면 그는 개국 일등훈(開國一等勳)에 참례하게 될것이 아니냐. 이 원홍이야 말로 후일에 왕씨를 배반하던 최 충헌( 崔忠獻) 집의 조상이 아니냐. 그러나 원홍은 감히 궁예왕에게 대어 들지 못 하고 그만 말에서 떨어지어 땅위에 꿇어 엎디었다. 그것을 보고 다른 군사들도 말에서 내려 꿇어 엎디었다.

이윽고 원홍과 모든 군사들이 고개를 들어 바라볼 때에는 왕은 늙은 정나무 밑 바위 위에 가슴에 칼을 꽂고 이쪽을 노려 보고 서 있었다. 갑옷 자락으로 흘러 내리는 피가 석양에 번쩍거리고 주인을 잃은 말은 멀거니 다시 자기를 타보지 못할 주인을 바라보고 섰다.

군사들은 일제히 왕의 앞으로 가까이 가서 땅 위에 엎드려 울었다. 산이 울리도록 앞 내 여울 넘어가는 물 소리가 안 들리도록 울었다. 물과 하늘은 모두 핏빛이 되고 까마귀 까치들도 일제히 울었다.

원홍이 달려 가서 궁예왕의 가슴에 한 칼을 빼려 하였으나 빠지지아니하고 왕의 신체는 땅에 뿌리 박은 젓나무 모양으로 흔들어도 떠밀어도 까딱도 아니하었다 원 홍은 칼을 빼어 궁예왕의 목을 찍으려 하였으나 칼을 들었던 손은 내려오 직 아니하고 자기의 몸이 왕의 앞에 거꾸러지어 정신을 잃어 버렸다.

이것을 보고 군사들은 모두 무서워서, 『 왕이 가라 하옵기에 원홍을 따라 오기는 왔사와도 신은 아무 죄도 업나이다.』

하고 군사들은 왕의 신체를 향하여 무수히 합창하였다.

원홍은 다시 살아 났다. 이튿날 원홍은 군사들을 시켜 돌을 모아다가- 225 - 왕의 신체가 보이지 않도록 돌려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묻어 버렸다.

궁예왕은 가슴에 원한 많은 칼을 꽂은 채 지금까지 서 있다. 그 늙은 젓나무가 늙어 죽고 아들 젓나무가 다시 늙어 천년이 하루같이 왕의 무덤을 지키고 섰다. 그 젓나무는 원종의 넋일 것이요, 그 위에 저녁마다 떠 도는 구름은 애노의 넋일 것이다.

궁예왕이 죽고 왕건이 왕이 되어 국호를 고려라고 부르고 모든 장사를 일 신 하니 백성들은 또 한번 인제는 태평이 오는가 하고 기다리게 되고 잠시 동안 일이 없던 신라와 백제도 왕건이 장차 어떤 일을 하려는고 하고 두 런두런하게 되었다.

下 篇 의는 죽는다.

궁예왕이 죽고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된 소문은 벌써부터 서 울 에전 하였으나 정식으로 고려 왕 왕건의 사신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신라 조정에 이른 것은 왕건이 궁예를 내어 쫓은 뒤 약 일 개월, 궁예가 삼 방에서 죽은 뒤 약 반 개월 후이었다. 왕건도 궁예가 죽은 줄을 확실히안 뒤에야 비로소 천허가 내 것인 줄을 믿은 것이다.

고려 왕의 국시를 가진 사신이 서울에 오매, 신라 조정에서는 이 것을 받을까 아니 받을까 하여 여러 논난이 생겼다. 받지 말자고 주장하는 파이말은 이러하였다 ————『 첫째 왕건은 감히 원(元)을 칭하고 신라에 대하여 종주국의 예를 표하지 아니하고 외람되이 대등국(對等國)의 군주로 자처하였으니 받을 수 없고, 둘째 왕건은 그 군주를 시역(弑逆)하였으니 용납치 못할 불충의 죄인이라 비로 그 죄를 다툴지언정 그 국서와 사신을 받아 일국의 왕으로 인정하여 줄 수 없고, 세째 만일 왕건을 일국의 왕으로 인정하여 대등의 예를 준다 하면 진헌에게도 이것을 허하여야 할 것이니, 이리되면 선왕이 삼국을 통일한 본의를 잃고 다시 천하가 삼국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라.』 함이었다.

이 의견을 극력으로 주장하는 이는 시중 유렴(裕廉)이요, 상대등 위응도유렴의 의견을 옳이 여겼다. 위응이 유렴의 뜻을 옳이 여긴 데는 또 다른 연유가 있다. 그것은 왕건을 왕으로 허하는 것이 진헌을 노엽게 하여 반드시 무서운 후환이 잇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또 외응이 평소부터- 226 - 진헌의 편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손 김성(金成)과 그의 종제 되는 아손 김률(金律)은 유렴의 의견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 지금 국력이 피폐하여 영문에는 싸울 만한 군사가 없고, 창고에는  만한 재물이 없으니, 이때에 패기 만만한 왕건을 공연히 충동하여 변경에 근심이 되게 하는 것도 득책이 아니요, 또 지금까지 시작을 안보하여 온것은 궁예가 진헌이 쌍방에 대립하여 서로 감히 침범치 못한 까닭이니, 이제 만일 왕건을 노엽게 하여서 왕건으로 하여금 진헌과 통하게 하면, 이는 적으로 하여금 힘을 합하여 나를 치게 함과 다름이 없으니, 이 것은 가장 졸렬한 계책이다. 차라리 왕건을 달래어서 진헌을 막게 하는 것 이이이 제이(以夷制夷)의 묘책이 아닌가.』 함이었다.

두 편이 서로 논쟁하는 동안에 만조 백관은 대개 침묵하여 어느 편 바람이 이기는가를 바라보았다. 서뿔리 주둥이를 놀리다가 만일 다른 편이 이기는 날에는 자기가 설 곳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왕이 김성과 김률의 의견을 쓴다는 뜻을 표하매, 그제야 문무 제신은 과연 김성 이손의 말이 옳다고 찬성하는 뜻을 표하였다.

이때에 조부이신 효종(孝宗)의 공으로 서로 대내마(大柰麻)가 된 김충( 金忠) 이 나서서 비분 격렬한 어조로 왕께 아뢰었다. (김충은 후일의 마의태자다) 『 대내마 신 김충이 아뢰오. 신은 나이 어리고 배운 것이 없사오나, 이 제 조정에서 국가 대서를 의논하는 바를 보았건만 차마 잠잠할 수 없 사옵는지라 엎디어 한 말씀을 아뢰고자 하옵나이다.』 왕이 보니 그는 표표한 한 소년이라. 얼굴이 준수하고 눈이 빛나며 목소리가 맑음이 옥을 굴리는 듯하다. 왕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여말하라는 뜻을 표하였다. 조신들 중에 평소부터 김충이 과격한 언론을 즐겨하는 줄을 아는 이들은 이 철없는 것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고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칼날같이 날카롭고 살대같이 곧은 말이 두려워 고개가 움츠러듦을 깨달았다. 저마다 제 속에는 건드릴까봐 맘이 오마조마하는 부스럼이 있고 김충의 말은 반드시 사정 없이 그 부스럼을 푹푹 찌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충은 왕의 윤허하심을 받아, 『 지금의 국력이 피폐하와 재력과 병력이 족히 서로 진헌을 섬멸하고 북으로 왕건을 진정할 힘이 없사온 것은 과연 이손 김성의 아뢴 바와- 227 - 같 사옵고 왕건을 달래어서 진헌을 누르는 것이 어이 제이의 묘책인 것도 또한 김성 이손의 말과 같사오니, 하루 이틀의 구차한 편안을 도모 할진 댄 이만한 상책이 없을 것이오며, 또 시중 유렴이 아뢰는 바와 같이 왕건 이 외람 히 대등국으로 자처하는 죄와, 또 그 임금 궁예를 시역하는 죄를 나토아 사신을 베고 국서를 물리친다 하면, 왕건이 반드시 폐하를 원망하고진 헌과 상통할 염려가 있사온 즉 이는 두 도적을 모아 한 큰 도적을 이루는것이라. 구차한 일시의 편안을 위하여서는 이만한 하책이 없을 것인가 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아직일 없기를 위하여는 이손 김성의 책을 쓰 심이 마땅한가 하나이다.』 김충이 도도하게 여기까지 말을 하니, 왕이나 제신이 모두 무슨 말이 더 나오려는고 하고 김충을 바라보았다. 김충의 옥같이 흰 얼굴에는 흥훈이돌고 눈에서는 사람의 폐간을 꿰뚫는 듯하는 광채가 발하였다. 그 넓은대 화전( 大和殿) 은 먼지 하나 구는 소리도 들릴이만큼 고요하였다.

김충은 더욱 소리를 가다듬어, 『 그러하오나 신이 그윽히 생각하오니 나라를 다스리매, 모로미 천 년대계를 세우는 것이 선왕과 선성의 가르치심이라 하나이다. 예로부터 인과의 로써 치국 평천하의 근본을 삼았음을 들었사옵거니와, 일찍 불인과 불의를 용납하여 사직을 안보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사오니 이제 만 일 왕건을 용납할 진댄 또한 진헌을 용납함이요, 또한 이 후에도 수없이 일어날 난신 적자를 모두 용납하는 것이라, 비로소 하루 이틀의 편안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는 천년 종사의 기초를 무너뜨림과 다름이 없사오니 이일을 차마 한다 하오면 무슨 일은 차마 못하오리까.』 하고 김충의 목소리는 느끼는 듯 떨리는 듯 그 말 마디가 사람의 폐간을 푹푹 찌르는 듯하였다. 왕도 김충의 말에 점점 고개를 숙이고 김충을 비웃던 제신들도 감히 소개를 들지 못하였다.

김충은 복받쳐 오르는 가슴을 진정하여 더욱 간곡한 어조로, 『 천년 종사가 만일 불의를 용허하는 고식지계로 태산반석같이 편안할 수 있다 하면, 혹은 왕건이, 혹은 진헌이 군사를 끌고 거룩한 서울을 말 발굽 밑에 밟을 날이 멀지 아니하여 이를 것을 신이 눈에 보나이다. 폐하께옵서 일월 같으신 의와 추상과 같으신 위(威)로 진헌 적과 왕건 적에 임 하시오면 비록 두 도적의 마음을 화하시지 못하여 그 천하의 의인의 마음을 거두시려니와, 혹은 이 도적을 친하고 혹은 저 도적을 화하시지 못하여 그 천하의 의인이 마음을 거두시려니와, 혹은 이 도적을 친하고 록은 저 도적을 화하시면 오직 하늘과 백성의 뜻을 잃을뿐더러, 또한 두 도적의- 228 - 원망을 부르실 것이오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오리이까. 두 도적이 비록 강하고 무섭다 하오나 천명과 민심은 그보다도 더욱 두렵고 더욱 힘 있는것이라 의로써 천명과 민심을 거둠이 국가 만년의 대계인가 하오니, 복원 폐하는 역적 왕건의 사자를 베어 의 있는 곳을 천하에 보이시고, 또 백고나 유사에게 명하시와, 진헌과 오아건과 불의로써 서로 통하기를 금 하시고 널리 천하에 의인·지사를 모아 십년 생취, 십년 교훈의 지혜를 본 받아 일월 같은 대의의 왕사(王師)로 진헌·왕건 등 도적을 진멸하시고 천년 종사를 태산 반석위에 놓으심이 선명하옵신 폐하의 하오실 일인가 하나이다.』 하고 옥좌 앞을 물러나와 반열에 돌아 왔다.

왕도 아무 말이 없고, 제신들도 아무 말이 없다. 오직 시중 유렴이 고개를 들어 김충을 한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더욱 칠월 날에 만조 백관위 등과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러 떨어지었다.

그러나 김충의 충성된 말도 서지는 못하였다. 나이 많고 경험 있는 사람들은 의보다도 권모 술수(權謀術數)가 더 힘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서 왕은 마침내 김성의 말대러 고려 왕 왕건의 국서를 받고, 받을 뿐 아니라, 포학 무도한 궁예를 치고 왕이 된 것을 하례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김성이 상대등이 되어 국가의 정권을 가지게 되고 김성의 아들 김률은 아손으로 김성을 돕게 되어 신라 조정은 전혀 왕건의 편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까지 진헌의 편이던 사람들은 혹은 조정에서 물러나가고 혹은 절을 변하여 김성의 편이 되어 버렸다. 대내마 김충은 자기의 말이 서지 아니하고 역시 왕건을 이웃 나라의 왕으로 대우하는 것을 분개하여, 『 아아, 의는 죽었도다.』 하고 조정에서 물러나와 버렸다.

조정이 고려와 친한다는 소문이 나매, 진헌은 얼굴이 주톳 빛이 되었다.

「응 견디어 보아라」하고 진헌은 이를 갈았다. 서울 백성들도 반드시 진헌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줄을 알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백제 군사가 밀어 들어 올 것을 기다리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하늘에 살별이 뜬다는 둥 대궐 마당에서 귀신이 울었다는둥 밤이면 백제가 있는 서쪽 하늘로 서 살기가 비친다는둥, 진헌을 무서워하는 말이 민간에 돌아 갈 때에 일찍 진헌과 친하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이 핑계 저 핑계 저 죄목으로 붙들러가서 갇히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것이 두려워서 변복을 하고 살그머니 백 제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김성의 미움을 가장 많이 받는 전 시중 유렴이- 229 -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되매, 백성들 중에는 혹은 그가 김성의 자객의 손에 죽었다 하고 혹은 백제로 달아났다 하고 또 혹은 산으로 들어 가 중이 되었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말이 돌아 다닐 때에 서울에는 큰 흉조가 생겼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때문에 세운 천왕의 손에 들린 활 줄이 밤중에 통 하는 무서운 소리를 내고 저절로 끊어지고, 그 소리가 나자 법당 바깥 벽에 그린개가 소리 높이 짖었다. 그밖에도 사람들은 무수한 흉조를 전하였다.

조정에서는 더욱 백제를 배척하고 고려와 화친하자는 정책을 세워 고려 서울 송도(松都)와 신라 서울과 사이에는 빈빈히 사신이 내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경명왕 사년 동 시월에 마침내 후백제왕 진헌은 친히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순식간에 대야성(大耶城)을 함몰하고 진례성( 進禮城)으로 들어 와 바로 서울을 칠 기세를 보였다.

진헌은 신라에게 여러 번 속은 것이 분하였고, 더구나 신라 조정이 모두 왕건의 편이 되어 자기를 배척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 대하여는 일종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분하였다. 지금까지는 궁예를 두려워 감히 신라를 건드리지 못하였거니와, 이제 궁예가 이미 죽고 젖내 나는 왕건 이 궁예의 나라를 빼앗았으니 아직 오아건의 날개와 발톱이 자라기 전에 신라를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하리라 하는 것이 진헌의 맘이었다.

진헌의 군사가 물 밀듯 들어 오건마는 조정에서는 어찌할 도리를 알지못하였다. 군사들도 구태여 공도 없을 싸움을 싸와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될지도 알지 못할 진헌의 미움을 받을 까닭이 없이 몇 번 소리를 지르고 활을 쏘다가는 항기( 降旗) 를 들어 버렸다. 진헌이나 왕건의 눈에 벗어나는것이 두려운 일이지, 나라의 눈에 벗어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알았다.

조정에서는 하릴없이 고려에 청병을 보내기로 하여 가장 글잘하고 말잘 한다는 어손 김률을 송도로 보낼 제 많은 보물을 여러 수레에 실어 폐백으로 보내고, 날마다 김률이 고려 군사를 끌고 돌아 오 기 만고대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진헌을 달래어 아무쪼록 싸움을 오래 끌도록 하였다.

김률은 종자 백여 인과 폐백 수십 수레를 가지고 멀리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들어 갔다.

새로 쌓은 성과 성문은 하늘에 닿은 듯하고 백모래 길은 마치 옥을 깔아놓은 듯 빛나고 밝으며, 대도 상좌 우쪽에 새로 지어 놓은 집들에서는 아직도 송진의 향기가 나온다. 마침 겨울이라 송악의 무성한 솔밭은 흰- 230 - 눈을 이어 자주 안개를 보이고 그 밑에 지어 놓은 만월에 대궐은 금시에 날아 하늘로 올라 갈 듯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사신의 일행이 남대문을 들어 갈 때부터 만월대 대궐까지 기치와 창검 이별 곁듯하여 눈을 들어 보기가 어렵도록 으리으리하였다. 서울의 무너져가는 성과 구백년 풍우에 꺼멓게 썩은 대궐에는 비길 수사 없었다. 강토로 말하여도 고려는 신라의 삼갑절이나 되고, 군사는 몇 십갑절이나 되거니와 새로 일어나는 고려의 기운은 옛 나라 신라의 몇 천갑덜이나 되는 듯 하여 마치 조그마한 나라의 초라한 사신이 대국에 조공하어 들어 오는 듯 한 느낌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힘있고 컸다.

고려 왕 왕건은 신라 사신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사신 일행을 궐내에 머물게 하고 음식이나 거처를 왕이나 다름 없이 성대하고 정중하게 하였다.

더욱 김률 일행이 놀란 것은 왕의 위엄이 당당한 것이었다 높이 용상에 앉으매, 왕의 몸에서 빛을 발하여 온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누르고 비치는듯 하였다. 도저히 왕건의 위풍을 신라 왕에게 비길 수가 없다고 김률을 비롯하여 모든 사신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대우하고 말도 존경 하는말을 썼다.

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문무 백관이 모두 씩씩하고도 공손하고 화기가 있는 중에도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는 듯하였다. 왕을 비롯하여 백관 유사로 아침 일찌기 일어나 날이 늦도록 정사를 보고 또날마다 왕이 친히 나아가 군사를 조련하는 것을 살폈다. 해가 낮이 되어야 일어나서 정사들 보는 있고 아니 보는 날도 있는 신라와는 딴 판이요, 모두 시각이 바쁘게 근근자가 하는 양이 보였다. 어 통에 신라 사신들도 늦도록 자지도 못하고 또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고 늘지 못하였다. 그러 기가 부끄러웠다.

김률은 오는 대로 곧 국서를 왕께 드렸으나 왕은 사흘 동안 청병에 관 한 말은 하지 아니하고 다만 사신들을 위로하고 즐겁게만 하려 하였다. 김률이 조급해 하는 것도 왕은 짐짓 모르는 체하는 듯하였다.

나흘째 되던 날 김률은 왕의 앞에 나아가, 『 무도한 후백제 왕 진헌이 까닭 없이 군사를 몰아 대야성을 무 찌르고 이미 진례성에 들어 온 것을 본 지 벌써 보름이 넘사오니, 서울의 안위 가목 첩에 다렸사온즉, 북원대왕께서는 곧 군사를 보내시와 천년 종사를 안보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청하였다.

왕건은 웃으며,- 231 - 『 철기 삼천(鐵騎三千)이 벌써 한강을 건넜으니 염려 놓으라.』

하였다.

김률은 놀래었다. 지금까지 삼사일이나 두고 아무 말도 없을 것을 보고왕 건의 심사를 의심하여 마음이 자못 초조하던 김률은 이 말에 너무도 감격하여 왕건의 앞에 꿇어 엎디어 한참은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그때에 너무 감격한 서슬에 김률이 왕건에게 대하여 신라를 물을 때에 소국( 小國) 이라고까지 되었으나, 급한 때에 청병하여 온 공으로 그 허물은 감추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청병이 중하다고 하더라도 왕건의 앞에서 「 소국 」 이라고 자청한 것은 여간 큰 실태가 아니라 하여 두고두고 말썽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왕건의 마음을 흡족케 한 것은 여간이 아니었다. 다만 왕건은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듯이 현어 사색은 아니하였다.

왕건은 아무쪼록 신라 사신 일행을 오래 머물게 하고 여러 가지로 관대 도하며 새로 일어난 고려의 힘도 보였다. 사신 일행 중에는 김률이 너 무왕 건의 앞에 공손하여 신라의 위엄을 손상케 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이도 있건마는 대개는 왕건의 관대를 기쁘게 받았다. 더구나 밤마다 손님의 잠자리를 모시게 하는 북망이 미인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 차마 송도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봉명 사신으로 너무 오래 지체할 수도 없어 칠팔일을 묵어 송도를 떠났다. 떠날 때에도 왕건은 사신들에게 많은 물건을 주고 잠자리에 모시던 북방 미인들도 선물로 주었다. 김률 이하 모든 사신들은 감지 덕지하여 자기네 임금에게 하는 예로 왕건의 앞에 하직 하는 예를 하였다. 참다 못하여 일행 중에 가장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사관( 史官) 대내마 간직(間直)은 소리를 높여, 『 오, 고려의 충신들이여!』 하고 왕건에게는 절도 아니하고 뛰어 나왔다. 그러나 왕건은 그것을 책하 지도 아니하였다.

고려 군사 삼천 기가 구원병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진헌은 군사를 거두었다. 물론 지헌이 왕건의 삼천기를 두려워서 군사를 거둔 것은 아니다. 만일 왕건의 군사와 싸운다 하면 부질 없이 왕건과 적을 지을것이요, 왕건과 적을 지으면 신라와 고려가 하나가 되어 자기를 적으로 할것이니, 이것이 득책이 아닌 줄을 아는 까닭이다. 궁예는 비록 우직하여 자기와 합할 길이 없었다 하더라도, 왕건은 제 임금을 내어 쫓고 나라를 빼앗을 만한 사람이니 반드시 의리에 굳어 고집 불통하지 아니하고 무슨 변통이 있으리라고 진헌은 생각하였다.

- 232 - 진헌이 생각에도 될 수 있으면 신라와 합하여 자기가 신라의 종실을 붙드는 격으로 고려와 겨루는 것이 좋은 줄을 아나, 암침에 간에 붙고 저녁  염통에 붙어 요리 붙었다. 그뿐더러 왕건이 고려 왕이 된 뒤로 신라 조 정의 대세는 왕건에게로 기울어지어 여간해서 그것을 자기에게로 끌어 들일 수가 없을 듯하였다. 그리고 본즉, 이제 또 왕건의 코를 찔러 북배를 적을 받을 까닭은 없는 일이요, 차라리 왕건과 화친한 체하면서 서서히 신라 조정을 자기의 손에 집어 넣을 꾀를 씀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진헌은 고려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곧 군사를 거두고 도리어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어 새 서울이 이룬 것을 하례하고, 또 지리산 대 살( 竹節) 과 탐라(耽羅)의 준마(駿馬)를 예물로 보내었다.

왕건도 신라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삼천 철기를 구원병으로 보내기는하였을망정, 새로 나라를 세워 아직 힘이 충실하기도 전에 오래 뿌리가 박힌 진헌과 혼단을 일으키기는 원치 아니하였다. 그래서 진헌이 보낸 예물을 받은 회답으로 솔메의 인삼과 북원의 녹용과 평야의 미인을 답례로 보내고 또 간곡하게 글을 지어 보내되 진헌을 나이로나 나라를 세운 연대 로나 형이라 하여 형의 예를 불렀다.

고려 군사 삼천은 진헌이 물려갔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서울을 향하고 행군 하였다. 처음에는 군사를 급히 불렀으나 곰의나루에 이르러서부터는 하루에 이십리, 하루에 삼십리 구경 삼아 행군하고 큰 고을에서는 고려 군사를 맞노라고 소를 잡고 닭을 잡고 술과 떡을 몇 백석으로 하고 불시에 민간에 추렴까지 거두어 할 수 있는 좋은 대접을 하였다. 그러하는 동안에 고려 군사들은 지나는 곳 호총(戶總)과 인총(人總)까지 자세히 적간( 摘奸) 하였다. 창자 있는 도독이나 장군들은 이것을 밉게 생각 하였으나 어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고려 군사들은 신라 지경에 들어 와 날이 갈수록 점점 교만하여지고 방탕하여져서 연로(沿路)에 행패가 자심하였다. 그러나 청해 온 군사라 이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밖에는 없었다.

고려의 삼천 철기가 서울로 들어 오는 날에 서울 백만 백성들은 모두 나와서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모두 무서운 생각이 났다.

개국한 지 천년에 아직 한번도 다른 나라 군사가 밟아 보지 못한 서울에 삼천이나 되는 북쪽 군사가 의기 양양하게 들어 오는 것이 아무리 하여도 상서로운 일 같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늙은이들은, 『 응, 말세야.』 하고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다.

서울에 들어 온 고려 군사들은 제 땅 같이 백만 장안으로 행행 활보를- 233 - 하였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뿐더러 삼천명 군사와 삼 천 필 말을 먹이느라고 날마다 쌀이 백섬에 피가 백섬, 소가 백 마리, 술이 삼십 독으로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차라리 진헌에게다 고을 하나를 떼어 줄 것을>

하는 생각을 조정에서나 백성들이나 다 같이 하게 되었다. 하루바삐 고려 군사가 물러가기를 바라나 좀체로 물러가지는 아니하고 그렇다고 제발 빌고 청해 온 군사를 어서 가라고 물리칠 염체도 없어서 꿍꿍 앓을 뿐이었다.

봄이나 되면 가려니, 여름이나 지나만 가려니, 추풍이나 나면 가려니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고려 군사는 갈 생각을 아니하고 날마다 먹고 마시고는말을 달려 장안 대도상으로 시끄럽게 돌아 다녔다.

고려 군사가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은 물론 놀기가 좋아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은 신라의 사정도 염탐하고 혹은 신라의 벼슬아치들의 마음도 사고, 이번 기회에 신라에 뽑히지 아니할 세력을 심으려는 것 이 목적 이었다.

신라 대관들은 혹은 대낮에 위의를 갖추어, 혹은 밤에 은밀히 고려 영문에 출입하였다. 대관들이 출입을 하면 작은 벼슬아치들도 출입을 하게 되었다. 김률은 벼슬이 아소에 불과하건마는 고려 영문에 등을 대고 도리어 상대등 김성보다도 세력이 많았다. 또 제일 먼저 왕건과 통한 재암성 장군 선필( 載岩城將軍善弼) 같은 이는 임지인 재암성에는 잠깐 잠깐 다녀 올 뿐이요, 거의 일년 내내 서울에 있어서 고려 장군 홍술(弘述)의 충성 된 염탐군 이요, 심부름군이 되었다.

홍술이 「이 사람을」하고 천거하는 사람은 대개 벼슬에 붙었고 그와 반대로 「아무는」하고 눈쌀을 찌푸리면 그 사람은 곧 벼슬에서 떨어지었다. 이리하여 신라 조정은 홍술의 손에 쥐어 지내었다.

이 모양이 되니 변방에 있는 장군들은 다투어 왕건에게 돌아 가 붙었다.

강주 장군 윤웅(康州將軍閏雄)이 맨 처음으로 고려에 붙은 뒤로부터 오늘은 누구, 내일은 누구 하고 하나씩 둘씩 제가 지키던 고을을 끌고 왕건에게로 돌아 붙었다. 그러면 왕건은 그를 극히 우대하여 높은 벼슬과 많은 상과 미인을 주었다. 이것을 보고 나도 『 일 없으니 물러가라.』 할 용기가 없다. 그랬다가 만일 고려 군사가 성을 내면 당장에 큰일이 날줄을 아는 까닭이요, 둘째 조정에 있는 왕건의 패를 물리칠 길이 어렵다.

그들을 물리치려 다가는 도리어 왕이 물러나야 될는지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왕은 김충의 말을 옳게는 여기면서도 그대로 행하지는 못하고- 234 - 다른 계책을 써보려 하였다. 그것은 당나라에 의뢰하여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벌써 당나라는 망하고 후당(後唐)이라는 것이 생겼다.

당나라와는 오랫 동안 친한 의도 있었으므로 진헌이나 왕건보다도 신라와 인연이 깊건마는 후당이라 하면 이름은 당이라 하여도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뿐더러, 벌써 진헌과 왕건이 먼저 사신을 보내어 통 호한 뒤 였다. 「그래도」하고 왕은 창부 시랑 김악(倉部侍郞金岳)을 당으로 보냈다. 보낼 때에 왕은 은밀히 김악을 불러 진헌과 왕건의 흉악 무도 함을말하고 옛날의 의를 생각하고 신라를 돕기를 빈다는 뜻을 전하라고 신 신부 탁하였다. 창부 시랑 김악은 김충의 종형이었다.

김악이 당나라를 향하여 서울을 떠난 것은 경명왕 팔년 유월이었다. 왕은 김악을 당으로 보내고 그가 돌아오기만 고대하였다. 그리고 가끔 김충을 불러 말로 듣고 그 말대로 해보려고 힘도 써 보았으나 워낙 깊이 박힌 왕건의 세력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김악도 돌아 오기 전에 그해 팔월에 그만 승하하고 왕의 아우 위응(魏膺)이 즉위하여 경애왕이 되었다. 왕은 본래 진헌을 친하던 편이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를 빼앗기 기를 두려워 왕건의 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즉위하는 길로 곧 사신을 고려에 보내이 왕건과 대등의 예로 서로 호(好)를 통하고, 왕건도 사신과 폐백을 보내어 일변 경명왕을 조상하고 일변 경애왕이 보위에 오른것을 하례하였다.

이것을 본 진헌은 왕과 왕건에서 대하여 절치 부심하었다. 경애왕의 마음이 변한 것도 분하거니와, 왕건이 자기를 배반하는 경애왕과 한 편이 되는 것이 더욱 분하였다. 그뿐 아니라 진헌도 벌써 나이 육십이 되었으니 앞날이 멀지 아니할 것을 알고 일거에 고려와 신라를 멸하고 생전에 삼국을 통일 할 생각을 내었다. 진헌의 아들 되는 신검( 神劍)· 양검( 良劍)· 용검( 龍劍)· 금강( 金剛) 등도 발발한 예기에 아버지를 권하여 크게 싸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중에 네째 아들 금강 이 더욱 힘써 말하였다.

진헌은 마침내 군사를 움직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로 결심 하고 위선 삼천 병마를 몰아 질풍같이 고려의 조물성(曹物城)을 들이쳤다.

왕건도 군사를 내어 막으려 하였으나, 명장 금강(金剛)을 당할 수고 없어 곧 글을 보내어 진헌을 형이라고 부르고, 또 볼모로 왕건의 당게 되는 왕건을 진헌에게 바치고 또 신라 서울에 있는 삼천 철기를 불러 올 것과, 이로부터는 진헌과 미리 의논하지 아니하고는 다시 신라에 간섭 하지아니 하기를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 말대로 곧 서울에 있는 군사를 북한- 235 - 주로 물러오게 하였다.

왕건이 조물성 싸움에 패하여 진헌에게 항서(降書)를 써 바치었다는 말을 듣고, 또 고려 군사가 서울서 급히 물러가는 것을 보고 신라 조정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놀래었다. 진헌이 왕건보다도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김성·김률 등 왕건의 세력을 믿던 패는 물론이요, 짐짓 진헌을 버리고 왕건과 화친하려는 태도를 보이던 왕도 진실로 망치 소조 하였다.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도, 『 인제 진헌이 원수를 갚으러 들어 올껄.』 하고 밤에 개만 콩콩 짖어도 진헌이나 아닌가 하여 깜짝 깜짝 놀래게 되었다.

왕은 연하여 사신을 보내어 왕건을 움직이려 하였다.

『진헌은 반복 다사(反覆多詐)하여 불가 화친(不可和親)이라.』

하여 속히 치는 것이 좋은 뜻으로 누누이 말하였으나, 왕건은 다만 고개를 끄덕이고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 보낼 뿐이요, 신라의 말대로 가벼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왕건은 백성들이 오랜 난세에 싸움을 피하려 하였다. 그뿐더러 신라는 족 히 대적될 것도 없고 후백제사 아직은 강하나 진헌이 이미 늙고 또 그 아들들이 서로 아비 죽은 뒤에 임금 될 것을 다투는 줄을 알므로 진헌만 죽으면 후백제는 아들들끼리 싸와 불공 자파(不攻自破)할 줄을 안다.

그러하디 때문에 왕건은 아무쪼록 자증하여 일변 어진 정사로 민심을 수습하고 일변 군사를 길러 삼국 통일의 대준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진헌의 편으로 보면, 아직 왕건의 날개가 돋기 전에 때려 잡는 것 이 득책이 언 마는 네 아들(다른 아들은 다 어렸다) 이 사이가 좋지 못 하고 그 중에 맏아들 신검이 야심이 발발하여 항상 아비의 자리를 엿보는 눈치가 있으므로 진헌도 마음 놓고 왕건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주 물성에서 왕건이 항복하고 그 당제 왕신을 불모로 보낸 것을 기회로 하여 자기도 사위 진호(眞虎)를 고려에 불모로 보내어 아직 화평을 유지하면서 아들 신검( 身檢) 부터 먼저 처지하기로 한 것이다.

진헌과 왕건이 서로 볼모를 바꾸고 화친을 맺은 뒤로 부터는 신라 조정은 돌아 갈 바를 몰라 부질없이 서로 다투고 원망하기로 일을 삼았다.

그러는 동안에 고려에 가까운 고을들은 고려로 가 붙고, 후백제에 가까운 고을들은 진헌에게 가 붙고 신라의 강역은 날로 졸아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라는 반은 고려로 반은 후백제로 뜯겨 버리고 서울 하나만 댕 그렇게 남을 것 같다.

- 236 - 이러한 위태한 때를 당하여 조정에 아무 계책도 없고 다만 오늘 하루만 무사히 지나면 그만으로 알고 대관들은 제 집에 들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고려 계집을 희롱하기로 일을 삼았다. 그중에 가장 충성이 잇다는 시중 유렴까지도 병이라 칭하여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남교( 南郊) 별서( 別墅)에 들어 앉아 시를 읊고 거문고를 희롱하며 세상을 잊으려 하였다.

김충도,

『차마 짐승들의 무리에 섞일 수 없다.』

고 소리 치고 벼슬을 내어 던지고 전과 같이 허름한 옷을 입고 주자 청루로돌아 다니며 비분 강개한 소리를 하며 혹은 울고 혹은 꾸짖었다.

사랑은 섧다.

사월 팔일———이날에 만도 사녀는 관불회(灌佛會)에 참여할 양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절로 모여 들었다. 왕도 이날에 특별히 토함산( 吐含山) 불국사( 佛國寺)에 거동을 하신다 하여 진골(眞骨)의 귀족들은 왕의 거동을 따라 불국사로 모여 갔다.

삼천 간이라는 불국사에는 장막과 깃발이 날리고 천여명 대중은 찬란한가사 장삼으로 범패(梵唄) 소리 우렁차게 왕을 맞았다. 근래에 항상 비감이 많아진 왕은 대웅전 부처님 앞에 겸손한 죄인 모양으로 수없이 합창 배례를 하였다. 왕이 한번 합창하고 절할 때마다 천명 대중과 천명 남녀 귀족들은 왕을 따라 합창 배례하였다.

금빛이 찬란한 부처님 앞에는 촛불이 춤을 추고 만수향의 음침한 향기로운 연기가 구름 모양으로 가끔 부처님의 얼굴을 가리었다.

왕은 천년 종사에 명운을 한 몸에 지고 사람의 마음을 믿지 못할 것을 깨달음에 부처님의 힘이나 입어 나라를 보전할까 함이다. 동으로 만들어놓은 부처에 무슨 영혼이야 있으랴마는 왕은 마음으로 「 보국 안민( 輔國安民) 」을 염하고는 수없이 합창한다. 춤 추는 불전의 촛불 빛에 왕의 두 빰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번쩍거리었다. 향과 촛불을 맡은 노승 밖에 왕의 눈물을 본 사람이 없건 마는 법당 앞에 모인 수천 대중의 마음에는 자연히 비감한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김충도 있었다.

이날 종일 중들은 상감마마의 보조 무궁을 위하여 빌었다.

이날에 법당 앞 다보탑(多寶塔) 편에는 신녀(信女)들이 서고- 237 - 석가탑( 釋迦塔) 편에는 신남들이 섰다. 백만 장안에서도 아름다운 선관 선녀들만이 뽑히어 온 듯하여 눈빛같이 흰 비단 옷을 입고, 신남 신 녀들은 이 세상 티끌 묻은 사람들 같지는 아니하였다.

천년 영화에 발에 흙을 묻히어 보지 아니한 귀골들은 어디 내어 놓아도 우표하게 희고 날씬하였다.

발 하나 옮기는 것, 손 하나 옮기는 것, 웃는 것, 말하는 것 다 법도가 있고 아름다왔다. 더우기 여자들이 그러하였다. 몸에 입에 옷 머리 단장, 발에 신은 신발까지도 모두 값진 것이면서도 야하지 아니하고 나올 때에 입고 나오는 모양으로 모두 몸에 착들어 맞고 그 빛깔 그 모양 구김살하나 까지고 그 주인을 높게 귀하게 보이는 듯하였다.

절 마당에는 향기가 진동한다. 그것은 법당에서 흘러 나오는 만 수향의 영혼까지도 푹 가라앉히는 향내뿐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아름다운 젊은 살에서 나오는 향기였다. 깊은 궁전 곡에만 있던 귀인들 이 봄철의 향기를 받아 두 뺨이 발갛게 상기를 한 것뿐이 아니라, 꽃 피고 새지 저 귀는 무르녹은 봄바람에 가슴 속에 숨은 인생의 청춘이 버들 찾는 꾀꼬리 모양으로, 꽃 찾는 벌 나비 모양으로 상기가 되고, 하염없는 한숨을 쉬는 그러한 상기였다.

이런 때를 한번씩 다 지나본 얼굴에 주름 잡힌 늙은이들은 근심 되는 눈으로 젊은 아들과 딸들의 눈치가 가는 곳을 지킨다. 그러나 꼭꼭 봉 해놓은 항아리, 벽도 뚫고 스며 나갈 듯한 젊은이들의 사랑의 눈치를 무엇으로 막을랴. 젊은이들의 눈은 길 잃은 조그마한 새 모양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침내 앉을 곳을 찾는다. 앉을까 말까 그 옆으로 뱅뱅 돌다가 마침내 앉을 자리에 앉아서는 누가 그 나뭇 가지를 흔들기로 누가 돌팔매를 치거나 독한 활을 겨누기로 날아날 생각이너 하랴. 차라리 앉은자리에서 독한 살을 맞아 끓는 피로 앉았던 나뭇 가지를 물들이고 푸떡푸떡 죽어 떨어지기를 원한다.

사월 파일! 어떻게나 졸은 날인고, 어떻게 기다리는 이날에 부처님이 마야부인의 사랑의 품에서 나온 모양으로 신라의 아름다운 총각과 섹시들의 가슴에서도 귀여운 사랑이 움 도든 날이다. 봄과 부처님과 만수향과 젊음과 ——— 이 날은 사랑의 날이다.

우국의 열정이 넘치는 김충의 가슴 속에도 봄날의 사랑이 움 돋을 자리가있었다. 왕이 수없이 불전에 예배하는 양을 보고 눈물 흘리던 그 의 눈앞에는 역시 눈물에 젖은 어떤 처녀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봄 벌판 잡초 속에서 고개를 숙인 꽃 한 송이 모양으로 수없이 많은 처녀들 속애 그 처녀- 238 - 하나가 가장 빛났다.

<뉘 집 딸인고?>

하고 김충은 자주 그 처녀를 바라보았다. 그 처녀의 눈도 두어 번 김충의 눈과 마주치었으나 처녀는 심상하게 눈을 다른 데로 돌리고 말았다.

<석굴암(石窟庵) 석불과 같구나.>

하고 김충은 그 처녀를 비평하였다. 과연 그 처녀의 풍후한 두 뺨이라든지 우뚝 선 코라는든지 가늘한 눈이라든지 인자하고도 꼭 맺힌 얼굴 모양이며 천근 같이 무겁게 땅을 턱 내려 누르고 선 몸이라든지 그러면서도 탁한 기운은 한 점도 없고 맑고 영채 나는 기운이라든지 석굴암 석불은 보는듯 하였다. 그렇게 생각할 때 김충의 가슴은 한없이 설레였다.

이윽고 재를 파하는 종이 댕댕 울고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합창을 하며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그런 뒤에는 사암들은 탑을 싸고 돌기를 시작하였다. 신남들은 석가탑을 싸고 돌고, 신녀들은 다보탑을 싸고 돌았다. 둘씩 길게 줄을 지어 둥 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고 탑을 빙빙 돌았다. 김충도 남과같이 싸고 돌았다.

한바퀴가 다 돌아 간 때마다 김충은 신녀들은 줄에 가까이 올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김충은 고개를 들어 그 처녀를 찾았으나 혹은 저쪽 끝에 잇고 혹은 자기가 그 목을 돌아 가기 전에 그 처녀는 먼저 돌아 가 버렸다.

그러나 몇 번에 한번씩 두 사람은 공교하게 꼭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러할 때에는 김충과 처녀의 눈이 한번 마주치었으나 그것도 잠깐 동안이요, 서로 멀어지고 말았다.

열 번 스무 번이 지나간 뒤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지었다. 사람이 줄어지면 한 바퀴 도는 동안이 빨라지어 두 사람이 동시에 마주칠 때도 차차 늘었다.

팔십 번이나 돌았는가 김충은 손에 든 염주를 세기를 잊어 버렸다.

그러나 그 처녀가 돌아 갈 때까지 돌면 백 번이 차리라고 생각하고 돌았다.

처녀의 얼굴은 점점 상기하여 붉게 되었다. 김충도 상기가 되어 얼굴 이 후끈 거림을 깨달았다. 사월이지마는 오늘은 특별히 양기가 두텁고 더웠다.

바람은 한 점도 없고 나뭇잎 하나도 까딱하지 아니한다.

사람은 점점 줄어 간다. 김충은 처녀의 이마에 땀 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자기의 이마를 만지니 역시 땀이 맺히었다.

걸음 걸울 때마다 삭삭거리는 옷 소리, 짝짝 여자들이 끄는 신 소리, 가끔 들리는 벼슬 높은 이의 패옥 소리, 그 속에서도 김충은 그 처녀의 옷- 239 - 소리와 발자취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백이요.』

하고. 늙은 중이 목탁을 두드리며 소리를 높여 염불을 하고 무슨 주문을 외울 때에 돌던 사람들은 돌던 바퀴를 마자 채우고는 땀을 씻으며 물러난다. 그 처녀는 맨 나중 바퀴를 채우느라고 좀 빠르게 돌아 갈 때에 김충과 마주 만났다. 김충이 무심코 빙그레 웃는 것을 보고 그렸다.

「탑돌이」가 끝난 뒤에 점심을 먹었다.

왕은 먼저 환궁하시고 늙은이와 벼슬 높은 이들도 왕을 따라 돌아 가버리고 절에는 젊은 신남 신녀들만 남고 나 많은 이라고는 처녀들의 시 녀 뿐이었다. 혹은 나무 그늘에 앉아 손에 꽃을 들고 새 소리를 들으며 쉬 기도 하고, 혹은 이리 저리로 둘씩 셋씩 떼를 지어 가기도 하였다.

김충은 혼자 법당 뒤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 하고있었다.

이날은 젊은 남녀를 위하여 있는 날이다. 귀족의 자녀는 황룡사( 黃龍寺)· 사천왕사( 四天王寺)· 분황사( 芬皇寺)· 흥륜사( 興輪寺) 또는 불국사(佛國寺) 같은 큰 절로 모이고 그다음 가는 집 자녀들은 그다음 가는 절에 모여 부처님 앞에 복과 사랑을 빈다.

『사월 파일에 심은 것은 칠월 백중에 거두어라.』

이것은 개무덤의 오려와 잚은 남녀의 사랑이다. 사월 파일에 젊은 남녀가 사랑을 심었다가 칠월 백중에 다시 절에 모일 때에 오려 이삭 모양으로 거둔다는 뜻이다.

왕도 환어하시고 나 많은 이들도 왕을 따라 돌아 가건 마는 젊은 사람치고는 해지기 전에는 돌아 갈 길이가 없다. 만일 날이 밝으면 서 악에 비 낀 초생달과 함께 돌아 갈 것이요, 만일 날이 흐려 첫여름의 가랑비가 내리면 수없는 등불이 반짝거리며 촉촉히 옷을 적시어 가지고 집위, 시월상달, 정월 대보름은 계집애들이 밤에 늦게 들어 가도 부모의 책망을 면하는 날이다.

불국사 솔밭 사이에는 꽃 같은 사람들로 수를 놓았다. 호화로운 남자들은 수레에 숨겨 가지고 왔던 술을 내어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이 구석 저 구석 시냇굽이나 샘물 있는 곳에는 처녀들이 모여 손을 씻었다.

칡베 장삼 입은 젊은 중들은 일도 없으면서 젊은 사람들 사이로 염불을 외우며 왔다갔다하고 허리 꾸부러진 늙은 중들은, 『 또 무슨 일이나 아니 생기고 이날이 무사히 지났으면…… 』- 240 - 하고 우무러진 입술을 우물거린다.

대개 이런 날은 반드시 젊은 사람들 사이에 무슨 티각 태각이 나고야 마는 까닭이다.

서울에는 여러 백 집 대가가 있다. 그중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집도있지마는 서로 원수로 지내는 집이 더욱 많았다. 한 집이 세력을 잡아 다른 집을 누르면 그 집이 세력을 잡을 그때에는 저 집을 누른다. 이 모양으로 원수는 해가 가고 대가 갈릴수록 더욱 깊어지어 기회 있는 대로 서로 싸운다. 어찌어찌하다가 한 집이 아주 멸망을 하여 버리기 전에는 이 싸움은 끝날 날이 없다.

김성의 집과 김충의 집도 그러한 처지요, 유렴의 집과 김률의 집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손이 이러한 곳이 모였다가는 대수롭지 아니한 일이 빌미가 되어서는 큰 싸움이 벌어진다. 늘은 주 이근 심하는 것은 이러한 일이다.

김충은 아무쪼록 사람 많지 아니한 으슥한 곳을 택하여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우거진 소나뭇 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며 여기서 저기서 울려 오는 남자의 소리, 여자의 소리, 서로 부르는 소리, 흥에 겨워 노래하는 소리를 들리는 대로 듣고 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리잘 살아 백년도 못 사는 인생이라.』

이러한 구절도 들리고, 『 꽃아 어린 꽃아 오는 나비 막지 말아 춘 광이 덧 없으니고운 양자 매양하리.』

이런 구절도 들리고 심한 것은, 『 오늘 밤 삼경 울거든 부디 부디 잊지 말 고문 고리 벗겨 놓으오.』

하는 것도 있고, 어떤 작자는 술 취한 목을 길게 뽑아, 『處世岩大夢 (세상이 꿈 같으니) 胡烏勞其生 (애는 써서 무엇 하리) 所以終日酒 (그러므로 종일 취코) 頭然臥前楹 (앞 퇴에 누웠노라) 』- 241 - 하고 당나라에서 건너 온 이태백(李太白)의 시를 읊조리는 것도 돌린다.

김충은 이런 노래들을 듣고 잇다가 고개를 수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발앞으로 다람쥐 하나가 뛰어 지나간다.

『나리만님 여기 계시우?』

하고 두껍쇠가 김충의 옆으로 뛰어 온다. 두껍쇠는 김충의 집 종이다.

어려서부터 골을 내면 배가 불룩하기 때문에 두껍쇠라고 부르고 자기도 그 이름을 좋아한다.

두껍쇠는 김충의 서너 걸음 앞에 서서 심충의 수그린 낯을 들여다 보며, 『 또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우! 오늘같이 졸은 날 남과 같이 어여쁜 아가씨들이나 따라 다니며 노시지도 아니하고……두껍쇠놈도 이렇게 흥이나는데.』 하고 두 팔을 벌리며, 『 정 저 궁 어화 좋은지고 닐리리 닐리리.』

하고 얼씬얼씬 춤을 춘다.

김충도 픽 웃었다.

『너는 무엇이 그리 좋으냐?』

『그럼 안 좋아요?』

하고 두껍쇠는 노랫 가락으로, 『 시절은 봄이요 인생은 청춘이로구나, 봄은 몇 날이며 청춘은 몇 날이리, 고운 님 뫼 시 고 밤새 도록 놀리로구나.』 하고 길게 뽑고 나서, 『 어떠시오? 처년 만년 못 살 인생이, 한 세상 맘대로 놀다가 죽을 계시, 근심이고 걱정은 무슨 걱정이에요. 소인이 보니깐 아까 나리마님께서 매우 마음에 드는 어른이 있는가 싶으니, 그 양반이나 따라 가서 말을 붙 여보세요.』 하고 킥킥 웃는다. 김충은 두껍쇠의 떠버리는 말에 마음이 들뜨는듯 하였다. 그래 웃으며, 『 이 놈 어디서 그런 덕담은 다 얻어 배웠니? 허 그놈.』 하고 두껍쇠의 넓적한 얼굴을 본다. 얼른 보기에 어리석은 듯하지마는, 그 가느란 눈에 익살솨 슬기가 다 들어 있다. 또 두껍쇠가 하는 소리는 서울- 242 - 장안에 젊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하는소리다. 「인생이 몇 날이리, 부귀 영화도 다 믿을 수가 없다. 고운 님 뫼시고 밤새도록 취하고 놀자 」 하는 것은 백만 장안의 젊은 남녀가 말로 외우고 노래로 부르고 시로 짓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일 뿐 아니라, 모두 그렇게 생각도 하고 행하시도 한다. 좀 무슨 일을 해보려면 왕까지도 근래에도 「고운 님 뫼옵고 취하고 밤 새우는 일 」을 자주 하게 되어 대궐안에서는 잦은 닭이 울도록 풍악 소리가 울어 나왔다.

듣고 보면 김충의 생각에도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큰 집이 다 기울어지는 판에 바지랑대 하나로서 버티려면 될 것인가. 한번 가면 다시못 올 「인생의 청춘」을 「근심·걱정」으로 보낼 것은 무엇인가? 김충 이청 루 주시로 돌아 다니던 것도 그 근본을 캐어 보면, 이런 생각에서 나온것 일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려서 스승에게 드던 충의(忠義)의 교훈 이 김충의 마음에 깊이깊이 박혀 뽑으려도 뽑을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돌아 보라. 백만 장안에 어느 누가 충의를 생각하 는가. 지금 세상에 충의를 생각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충의를 생각하던 사람은 애매한 죄명을 쓰고 죽임을 받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조정에서 쫓겨 나고, 서울에도 발 붙일 곳을 못 찾 아산으로 바닷가로 세상을 피하여 달아나지 아니하는가. 그래도 시중 유렴 이군계의 일학(群鷄의 一鶴)으로 조정에 남아 있더니, 그조차 벼슬을 내어던지고 남산 저쪽 산골짜기 별장에 숨어 버리고 김충 자기도 미관 말적이나마 집어 던지고 나와서 청루 주사로 방황하니 이제 충의의 끈이 영영 끊어져 버렸다. 지금 불국사 송림 속에 모인 수백명 남녀도 모두 천년 대가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조리 고운 임 뫼옵고 밤새도록 취하고 놀려하거든 김충 혼자 충의 열사로 스스로 높은 체한들 무엇하랴? 이러한 생각이 김충의 마음에 지나간다.

김충은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 술이나 한잔 있었으면.』

하고 두껍쇠를 보았다. 한잔 먹고 취하여 실컷 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진것이다.

두껍쇠는 김충의 말을 듣고 어디로 뛰어 가더니 얼마만에 술병 하나를 들고 나무뿌리 돌뿌리를 함부로 차며 뛰어 온다.

『자 보아요 ————썩 좋은 술이요.』

하고 술병을 내어 김충을 준다.

- 243 - 『 웬 술이냐?』

『얻어 왔지요.』

『어디서————누구한테?』

『누구한테는 알아서 무엇하시오? 우리 댁 나리마님이 술이 잡숫고싶어서 침만 꿀떡꿀떡 삼키시니 한 병 내라고 그랬지요. 했더니 시원시원히주던걸요. 자, 한 병 잡숫고 잡수시다가 남거든 소인도 한 모금 주 시 옵고, 그리고 기운을 내시어서 그 아가씨한테나 찾아 가 보시요.』 하고 두껍쇠가 서둔다.

김충은 떡으로 한 병마개를 뺏었다. 병 속에서는 무르 녹은 송순 주향기가 나와 김충의 코를 찌른다. 김충은 그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인하여 병을 입에 물고 쌉살하고 달착지근한 전국 술을 꿀떡꿀떡 여남은 모금을 들이켰다.

두껍쇠는 먹고 싶은 듯이 침을 삼키고 섰다가 빙긋 웃으며, 『 어떠오?』

하고 묻는다.

『술 좋다.』

하고 김충은 병을 한번 흔들어 보고 또 댓 모금 더 마시더니, 또 한번 병을 흔들어 보고는 두껍쇠를 내어 주며, 『 아따 너 먹어라.』

하고 입을 씻는다.

『이걸 다 주시오?』

하고 두껍쇠는 술병을 받아 들며 손에 들었던 생강 한뿌리를 김충에게 주며, 『 안주요.』

한다.

김충이 생 껍데기를 벗기는 동안에 두껍쇠는 돌아 서서 고개를 잦히고 병엣 술을 들어 마신다. 마시고 나서 흔들어 보고는 또 마시고 쭉쭉 소리를 내고 둘이빤다.

『이놈 병까지 마실라.』

하고 김충이 웃으니, 『 이 병이 썩 오랜 병인데 술이 배어서 어리들 빨아도 술맛인걸요.』

하고 두껍쇠는 병 껍데기까지 핥고 나서, 『 한 병 더 얻어 와요?』

하고 빈병을 흔든다.

- 244 - 『 그만 먹을란다.』

하고 김충은 얼굴이 화끈하는 것을 깨닫는다. 아까 처녀를 볼 때에 화끈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김충은 술 기운이 도는 눈으로, 사방을 한번 돌려더니, 『 이 놈아.』

하고 두껍쇠를 부른다.

『왜 그러시우?』

『너 아까 그이가 어디 있는지 보았니?』

하고 김충은 그 처녀를 생각하고 물었다.

『그이랏게?』

하고 두껍쇠는 시치미를 뚝 뗀다.

『아까 나와 같이 마지막 바퀴를 돌던 이 말이다.』

하고 김충은 두껍쇠는 시치미를 뚝뗀다.

『아까 나와 같이 마지막 바퀴를 돌던 이 말인다.』

하고 김충은 두껍쇠를 노려 본다.

그제야 두껍쇠가 선웃음을 치며, 『 아, 그 아가씨 말씀이요?』

하고 공연히 껄껄대고 웃으며, 『 그럼 몰라요?————이 두꺼비가 몇 천년 묵은 두꺼빈데 그걸 몰라요?

벌써 나리마님 눈치가 심상치 않길래 벌써 소인이 뒤를 따라 가서 그 아가씨가 어느 댁 아가씨며 이름은 무엇이요, 나이는 몇 살이요, 죄다 알아 왔단 말이야요. 그러노라면 소인에게 좋은 일도 생긴단 말이야요.』 하고 벌써 입이 얼었다.

『네게도 좋은 일?』

하고 김충은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나리마님께 좋은 일을 하여 드리면 소인에게도 좋은 일이 생긴단 말씀이요. 그 유렴 시중댁 아가씨의 몸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하 거든 ——— 이름은 시월이요, 나이는 열 일곱——— 아주 소인에게는 선녀 란 말씀이요.』 하는 두껍쇠의 말은 점점 억눌해진다.

김충은 유렴 시중 댁 아가씨란 말에 놀랬다. 그러면 그 처녀가 유렴시중의 딸이던가?

『유렴 시중 댁 아가씨?』

하고 김충은 수줍은 듯이 몇 번 물었다.

- 245 - 『 예, 남교(南郊) 유렴 시중 댁 아가씨의 몸종이란 말씀이요———그 선냐 같은 우리 시월이가 시월이라고 이름은 나쁘지마는 두껍 쇠만이야 못 할라고요, 하하하하.』 하고, 두껍쇠는 점점 말이 굳어지며 상전의 일은 잊어 버리고 제 소리만 지절 댄다.

김충은 참다 못 하여, 『 이 놈아, 소리만 하느냐? 유렴 시중 댁 아가씨가 누구냐 말이다.』

그제야 두껍쇠가 정신을 차린 듯이 머리를 긁으며, 『 상감님 발등의 불보다 제 발등의 불을 먼저 끈다고, 소인은 소인의 말만 하였읍니다. 헤헤, 아차 무슨 말을 내가 하려다가 잊어 버렸나? 옳지 시월이가…… 』 하고, 또 시월이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머리를 긁으며, 『 아따 큰일 났는걸, 시월이가 고만 속에 가득 차서 입만 벌리면 시월이가 튀어 나옵니다. 어, 쾌씸한 두껍쇠 놈이로군. 하하 하하, 히히히 히…… 』 하고 한바탕 웃다가, 『 저, 저, 유렴 시중 댁 아가씨가 지금 나이 열 여덟살이신데 이름은 계영( 〇英) 아가씨라고요. 시월이 말이 아주 재주가 도저하시고 거문고를 잘 타신다나요? 시중마마께서 남교 정자로 나가신 담에는 일절 출입을 금 하시다가 오늘은 특별히 나오시게 한 것이라고요. 상감마마께서 남 교정자로 나가신 담에는 일절 출입을 금하시다가 오늘은 특별히 나오시게 한것이라고요. 상감마마나 뵈옵고 곧 돌어 오라고 하시었다고요. 그런데 장관 입니다. 저 김성 서불한 마맛댁 작은 나리마마, 또 김률 아손 댁 작 은사라 마마, 선필(善弼)장군 댁 나리마마, 아마 십여 명이나 계영아기 앞으로 왔다 갔다하고 어르는 판인데, 계영마마는 눈도 거들떠 보시지아니하겠지요. 어떻게 도고하기고 새침하신지 서릿가루가 팔팔 날리는 것 같아요. 계영아가씨 한번 눈만 들어 보시면 곧 말을 붙일 판인데 아무리 그 앞으로 잔기침을 하고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여기셔 여지요. 어디 나리만님 한번 가 얼러 보시오. 그리고 나리 마님께 오 서 계영 아가씨하고 백년 해로 하시게 되거든, 소인도 시월이 하고 백년토록 두 분 마마를 모시게 하여 주시오. 그렇게 되면 얼씨구나 좋을씨고 지 화지화 좋을 씨고.』 하고 말 끝에 춤을 추며 비틀거린다.

『사월 파일에 못 심은 씨는,- 246 - 칠월 백중에 거두기 망계라.』

하는 옛말과 같이 오늘 이 자리에서 계영아기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다시 만날 길이 망연할는지 모른다.

김충은 용기를 내어 옷깃을 바르고 두껍쇠더러 길을 인도하기를 명 한 뒤에, 『 이 놈, 오늘 술잔이나 취한 김에 또 그 공연한 트집을 잡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말썽을 만들지 말렸다.』 하고, 신신 당부하였다.

『예, 말썽을 만들 리가 있겠읍니까? 하지마는 어는 누구든지 나리 마님을 건드리는 놈만 있으면 이 두껍쇠놈의 몽둥이가 가만히 있지는아니 합니다 ——— 대가리에서 발뒤꿈치까지 잔채를 쳐 놓고야 맙지요.』 하고 끝이 주먹다시같이 뭉퉁한 몽동이를 한번 들이서 곁에 선 소나무를 갈기니 딱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면 나뭇 가지가 모두 흔들리고 마른 잎 이 우수수 떨어져 두 사람의 옷을 때린다. 새잎사귀 때문에 떨어지는 낡은 잎들이다.

눈에 뜨이는 얼굴들은 대개 슬기운을 띄었다. 인생의 향락에 취하여 있으면서도, 새로운 향락을 끝없이 바라는 사람들의 눈에는 말할 수 없이 음란한 빛을 띄웠다. 부드러운 흰 살, 거기에 착 달라 붙는 비단 옷, 향기로운 술, 마른 나뭇 가지에까지 물이 돌게 하는 첫여름 ————이라기보다는 늦은 봄바람, 이 속에 있는 젊은 남녀의 무리, 위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사삿집 종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태평과 오륙십년 어지러운 세상에 음탕한 세태(世態)에 물든 무리, 집에서 보는 것, 길에서 보는 것, 글로 보고 말로 듣는 것이 오직 음탕뿐인 속에 자라난 그들, 더구나 사월 팔일이라는 새 사랑 움 듣는 날————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이다. 더구나 천년 동안 흙을 만져 보지도 못 한 귀 골( 貴骨) 들 피에는 씻기고 씻긴 향락의 피가 흐르거든, 게다가 성당( 盛唐) 이래의 당나라의 향락 기풍을 받아 들였거든…… 젊은 남자들은 술이 반취하여 그래도 허리에 가느단 칼들은 차 고갈 짓( 之) 자 걸음으로 아가씨네 앉은 자리앞에 와서는 전에 아는 사람에게 대하는 모양으로 극히 공손하게 극히 은근 하게, 『 춘 부대 감 기체 안녕하시오?』 하고 인사를 붙인다. 이날에 이곳에 모인 사람치고는 대감 댁 사람 아닌이가 없는 때문이다.

그러면 여자는 몸을 일으켜 의아한 눈을 들어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247 - 만일 그 남자가 마음에 들거든 빙그레 웃고, 『 어느 댁 작은 사랑 어른이신지?』 하고 도리어 묻는다. 그러면 남자는 한걸음 여자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며, 『 나를 잊으시오?』

하고 이손이면 이손, 일길손이면 일길손,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직품대로 아무의 아들 아무의 손자 아무라고 이름을 말하고 혹은 아무 데 사는 아무라고 사는 지명까지 말한다.

그때에 여자가 만일 말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면, 『 그러시오니까. 규중에 있는 몸이 존성 대명(尊姓大命)을 듣자온 일 없 읍니다.』

하여 끊어 버리고, 만일 더 말이 하고 싶으면, 『 성화는 듣자온지 오래오며 이처럼 물어 주시니 황감 하오이다.』

하고 또 한번 웃는 모양을 보인다.

비록 처녀들이 오빠와 같이 왔더라도 그들은 소년들 틈에 섞이어 놀고 ㅡ 다만 누이가 누구와 수작을 하는가를 먼 곳에서 바라보는 법이다.

이렇게 말을 붙여 보고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아니하면 그대로 지나가서 또 다른 여자와 수작을 붙이고 만일 어떤 처녀가 심히 마음에 들면 두 번 세번 우연히 지나다가 생각이 난 것처럼 그 앞에 걸음을 멈추고는 한두 마디씩 이야기를 붙이고 받고 하며, 혹은 시(詩)로 주고 받기 도하 거니 와 대개는 당나라 시 한쪽을 남자가 읊으면, 여자도 그 대답될 만 한 것 한쪽을 부르는 일이 많다. 가령, 『 심림인 불지( 深林人不知) 』 하고 남자가 부르면 여자도, 『 명월래 상조( 明月來相助) 』 하고 대구를 하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 하면, 『 운 상상의 화상 용운( 雲霜常衣花想容) 』 하고 이백의 청평조사(淸平調詞)를 부르고, 그때에 만일이 짝되는 여자가 상당히 바림기가 있으면, 『 회향요 대궐하 봉( 會向瑤臺月下逢) 』으로 회답한다. 이러한 여자가 근년에는 한 파일에 하나씩은 있어서 온 장안의 이야깃 거리가 된다고 한다.

혹은 남자가 글귀로 못생긴 여자를 빈정대는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빈정대는 수도 잇다. 작년에는 어떤 남자가 얼굴 빛이 검은- 248 - 여자를 향 하여, 『 옥 안 불 급한아 색( 玉顔不及寒鴉色) 』을 불러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다고 한다.

계영아기에게 가장 많은 남자가 모여 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두껍 쇠의 말과 같이 계영은 여러 남자의 문안에 대하여, 『 누구 시온 지오?』 하는 한 마디로 다 물리쳐 버렸다.

『저도 계집이려든.』

하고 저 잘난 것을 자신하는 젊은 남자들은 「내야 설마」하는 생각으로나 도 나도 하고 와서 건드려 보았으나, 계영은 여전히 분도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고, 『 고루 하여 성화를 일이 없사옵니다.』 하고 칼로 베는 듯이 똑 따버렸다.

『세차다.』

『매운걸.』

하는 비평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아비가 고집 불통이니까 딸 역시 고집인걸.』

하여 제 망신은 가리려는 이도 있고, 『 아마 마음에 든 누가 있나보다.』

하여 자기의 까인 면목을 살려 내려는 이도 있다. 그러나 고집장이 유렴의 딸이기 때문에 고집장이라는 말이 가장 세력이 있는 듯하였다. 어쨌든 젊은 사람( 모두 한다 하는 집 자손들이다)들은 모두 하번씩 계영에게 대해서 다시는 근접할 생각을 못하고 다만 먼 곳에서 계영 있는 곳을 바라보고있을 뿐이다.

이때에 당대 서도요, 높기로는 임금 다음이나, 세력으로는 임금 웃길을가는 서불한 김성의 맏손자 김술(金述)이 나섰다. 김술이 가는 곳에 항상 수십명 젊은 사람들이 이름은 친구나 실상은 신하 격으로 따라 다녀, 그 말이면 아무도 거스르는 이가 없었다. 다투어 김술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 곁에 가까이 가서 김술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 한다. 그래서 마치 왕 벌가는 곳에 일군 벌들이 악을 쓰고 따르는 모양으로 김술이 잠깐 자리를 옮기면 모든 무리는 그 뒤를 따랐다.

『대감 한번 가 보시오.』

하고 한 사람이 김술을 충동니다. 김술 집 자손들은 나이 이십만 넘으면 급손( 級飡) 이요, 파진손(波珍飡)이다. 서불한 김성의 집에 가 알 지로만- 249 - 태어나도 대아손(大阿飡) 중아손(重阿飡) 을 떼어 놓은 당상이다.

『내 어디 가 볼까?』

하고 김손은 일어났다.

『마오. 가서 망신하면 무엇하오.』

하고 붙드는 이도 있었으나, 세상에 나온 뒤로 일찍 하고 싶은 일을 못 하여 본 일이 없는 김술은, 『 내 얼러보마 저도 사람이려든.』

하고 찬란한 급손(級飡)의 자주빛 관대에 패옥 소리도 낭랑와게 종자( 從者) 두 사람만 데리고 계영의 장막을 향하였다. 뒤에 남은 패들은 병에 남은 술을 기울이고 하회가 어찌되나 바라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였다.

김충이 계영의 장막에서 수십보나 되는 곳에 왔을 때에 김술은 바로 계영의 앞에 이르러 아낙네에게 하는 예로 먼저 읍하고, 『 춘 부대 감 기체 어떠하시오?』 하고 계영에게 말을 붙이었다.

계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대로 잠깐 몸을 일으켜, 『 자친 기운 안녕하십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하고는 눈도 들지 않고 가만히 섰다.

김술은 한걸음 계영에게로 가까이 다가 서서 계영의 아름다운몸을 훑어 보며, 『 나를 모르시오? 나는 급손 김술이요.』

하고 빙그레 웃는다.

『규중에 천한 몸이 고루 과문하여 성화흘 받든일이 없사옵니다.』

하고, 계영은 한번 눈을 들어 서리같이 싸늘하고 엄숙한 눈매로 김술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아버지를 항상 원수로 여기고 온갖 흉계를 다하여 몰아내려 하던 원수 김성의 손자 김술은 계영아기가 몰랐을 리가 없다.

김술은 계영이 자기를 모른다는 말에 화를 더럭 내며, 『 나를 혹 몰라 보아도 서불한 김성마마를 모를 리는 만무하니, 나 급손, 김술은 그 손자요.』 하고 계영을 노려 본다.

김술의 말에 계영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 서불한 김성은 이름으로 들은 법도 하거니와, 그댁이 본래 내 집과 알맞는 사이가 아니어든 내게 말씀하시는 것만 부질없는 일이요.』 하고 자리에 앉아 버린다.

이 말에 김술의 기름진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하며 눈초리가 위로 올라- 250 - 간다.

자기와 말 한 마디 하여 보는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는 알지언정, 이 하늘아래 자기더러 부질없는 말한다고 할 사람은 있을 것을 믿지 못하였다.

더구나,「서불한 김성의 이름으로 들은 법은 하거니와」하던 계영의 낯 빛과어 조가 말할 수 없이 자기를 멸시하는 듯하여 김술의 가슴 속은 벌컥 뒤집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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