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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이광수 마의태자 [5]

by 역달1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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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에 나무 그늘에서, 『 천하는 다 미치거늘 나 홀로 께었는가? 나 홀로 깨었거든 천하는 다미 치었는가? 성상이 나를 미쳤다 하니 미친 줄로 여길 것인가? 깨인 정신으로 차마 못 볼 세상이니, 차라리 미쳐서 보기 싫은 세상을 잊어버릴까?』 하고 슬슬 왕의 곁으로 나오는 것은 태자다.

왕은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 누구 뇨? 누구뇨? 설마 동궁은 아니려든.』

하며 어두운 빛에 태자를 바라본다.

왕은 한번 더 놀라며, 『 태자…… 태자?』

한다.

『아직 새 왕후께오서 아들을 아니 낳으시니 태자인가 하나이다.

그러하오니 태자 이미 미친 지 오래오니 태자 아닌가도 하나이다. 태자쯤 미친 것이야 큰일 될 것도 아니오나 하늘이나 미치지 아니하는가? 그것이 그것이 염려로소이다.』 하고, 태자는 별이 총총한 그믐 밤의 하늘을 바라보더니, 『 하늘이 분명히 미친 듯하여이다. 북진(北辰)이 자리를 떠나 남으로 달아나고 또 듣사온즉, 오늘 해가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저 북문 밖으로 들어 가더라 하오니, 하늘이 미친 것이 분명하오며, 하늘이 미쳤길래로 땅 위에 왕이 나라를 잊고 아비가 아들을 잊는 것인가 하 오며, 아무려나 세상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으로 결단이 날 듯하여이다.

큰일이로소이다.』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태자가 하늘을 바라보고 이상한 몸짓을 하며 횡설 수설하는 것을 보고왕은 적이 안심하는 모양으로 다시 위엄을 수습 하여, 『 동궁아, 뉘 앞에서 무슨 말을 하나나뇨?』 하고 꾸짖는 모양으로 소리를 높였다.

태자는 왕과 공주를 번갈아 보며, 『 미친 사람이 누구의 앞을 분별하리이까마는 생각컨댄, 고려 일등 공 신 낙랑 공주의 앞인가 하나이다. 보오니 머리에 금관을 쓰시고 몸에 용포를 입으시니 아마 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시와, 엤날에 입으시던 것을 한번 입어 보신 것이 아닌가 하나이다. 그러하옵길래 쓰시고, 입으신 것이 모두- 323 - 어울리지를 아니하여 남의 것을 얻어 입으신 듯하옵고, 또 백발 이성 성하시되 철없는 젊은 사람의 모양을 하시는가 하나이다.』 하고, 태자의 말이 그칠 줄을 모르니 왕이 참지 못하여 칼 자루에 손을 얹으며, 『 충아, 이것이 임금에게 하는 말이며 아비에게 하는 말이뇨? 아무리 미쳤다 하기로 충효의 길을 잊어 버렸나뇨?』 하고 어성을 높인다.

태자는 웃고 남산을 가리키며, 『 충효라 하시오니 천하에 충이 죽은 지 이미 백년이옵고, 효도 죽은 지 벌써 십년이라. 다시 무슨 충효 있사오리까? 지금의 충은 진헌이 힘 있을 제 진헌의 앞에 하리를 굽히고, 오아건이 힘있으면 왕건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낙랑 공주 자색이 아름다우면 공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것이라 하나이다. 폐하 홀로 충효를 겸하시오니 신자(臣子)들이 가질 충효는 남음 이 없다 하노이다.』 하였다.

왕은 칼을 빼어 둘러 메며, 『 불효 불충한 놈아, 그 입을 닫쳐라 칼로 네 혓줄기를 끊으리라. 하고 태자를 노려 보았다.』 태자는 태연히 손을 내밀어 왕의 칼날을 만지려 하며, 『 그 칼을 보여 주소서. 완악하고 죄많은 목숨은 잘 드는 칼이 아니고는 베어지지 아니한다 하오니 이 칼이 더 날카로울까 하나이다.』 하고, 자기의 허리에 찼던 칼을 떼어 왕에게 두 손으로 받들어 드리며 비장한 어조로, 『 아깝지 아니한 이 목숨 천년 사직이 망하여 버리고 거룩한 서울이 쑥밭이 되는 꼴을 보기 전에 폐하께서 낳으신 목숨이니 폐하께서 끊어주시 옵소서.』 하고 우후후 소리를 내어 울었다.

왕은 빼어 들었던 칼집에다 도로 꽂으며, 『 어지어 내 일이어! 이지어 내 일이어!』

하고 두 번 탄식하고 몸을 돌려 다리를 건너 간다.

태자는 칼을 두 손에 든 체로 물끄러미 비슬비슬 다리를 건너 가는 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었던 칼을 땅에 떨어뜨리니 사르릉하고 칼날이 칼집 속에서 운다.

공주는 얼른 땅에 떨어진 칼을 집어 손수 칼끈을 태자의 허리에 둘러- 324 - 채운다.

왕의 등불이 점점 떨어져 어느 모퉁이에 이르러 아니 보이게 된 때에 태자는 낙랑 공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 공주여 가라! 신라에 머물지 말고 고려로 가라! 하루 바삐 가라!』 하였다.

공주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씻으며, 『 동궁 마마! 가라 하시면 가리이다. 그러나 이몸은 공주도 귀치 아니하고 왕후도 귀치 아니하오니 동궁마마 곁에 있게 하여 주실 수는 없으리이까?』 하고 운다.

『공주의 뜻을 아노라. 그러나 공주도 내 뜻을 알라!』

하고는 걸음을 빨리 하여 어두운 상원(上苑)속으로 가 버린다.

공주는 두어 걸음 따라 가며, 『 동궁 마마! 동궁마마!』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고 얼마 있다가 슬픈 목소리로, 『 공주여 내 뜻을 알라!』

하는 한 마디가 어둠 속에 울려 왔다.

공주는,

『동궁마마! 동궁마마의 뜻은 아나이다.』

하고 길가 나무에 울며 쓰러진다.

마침내 왕건이 서울을 떠날 날이 왔다. 그날은 삼월에도 삼질날 제비들 이오는 날이었다.

왕건이 서울에 들어 올 때에는 단촐하게 오십기(五十騎)만 데리고 왔었으나 서울을 떠날 때에는 신라 삼보(新羅三寶) 중에 하나인 순금으로만 든 장륙 존상(丈六尊像)을 선두로 하고 대대로 내려 오는 옥좌( 玉座) 며진헌이 가져가고 남은 각색 보물이며 각색 장색이며 학자며 이러한 것을 백여 차를 실려 일행이 십리에 연하였고, 신라가 몇 날 남지 아니한 것을 지레 짐작하고 고려로 따라 가려는 대관과 부자들의 값가는 보화와 가장 집물도 백여 차나 되었다. 그 사람들은 위선 세간을 고려로 옮겨 두었다가 때가 오면 몸만 살짝 빠져 달아나자는 것이었다. 왕건은 그러한 사람들을 후 히 대접하여 고려에서 편안히 살 땅을 주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몸까지 따라 가기는 꺼리어 서울에 남아 있었다.

왕은 낙랑 공주를 서울에 두고 가기를 왕건에게 누누이 권하였으나 왕건은 공주가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다시 정식으로 통혼이 잇기를 바라는 뜻을 비치었다.

- 325 - 그리하고 왕건은 태자를 고려로 데려 가기를 꾀하였으나 되지 아니 할줄을 알고 유렴을 국사(國師)라는 명의로 고려로 데리고 가기를 왕께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왕건은 유렴의 인물을 존경하여 그의 계책을 받으려는 뜻도 있거니와, 신라 조정에 유렴을 남겨 두는 것은 호랑이를 들에 놓는 것되 같이 생각하였으므로 유렴 하나를 손에 넣는 것보다 큰일인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왕은 유렴을 쳐버리는 것이 옆구리를 겨누고 있는 칼을 쳐버리는 것같이 시원하게 여겼다. 유렴 한 사람만 없어지면, 누라왕의 귀를 거스르는 말을 하랴? 누가 왕의 하고자 하는 바를 거스르랴?

아니 간다는 태자를 억지로 고려로 보내기는 민심도 두렵거니와 유렴을 보내기는 가장 쉬운 일이다 ————그것은 유렴이 왕명이면 세 번 간하여 듣지아니하면 울고 좇는 유렴의 충성을 아는 까닭이다. 유럼은 여러 번 왕께 말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왕명을 좇아 고려로 가기로 하고 부인과 태자비 되는 외딸 계영아기와 영 이별을 하고 왕과 왕후에게도 금생에 다시 만나지 못할 뜻으로 영원한 하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태자를 보고, 『 신은 왕명으로 고려로 가나이다.』 할 때에 태자는 유렴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 좋은 나라로 가거든 왜 우나뇨?』

하였다.

유렴이 더욱 울며, 『 금생에는 다시 상감마마와 동궁마마께 뵈옵지 못하리이다.』

하는 것을 태자는 손을 내어 두르며, 『 나를 다시 볼 날이 없으려니와, 상감마마는 불원에 고려에서 서로 대 할 날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무슨 큰일이요? 신라를 다시 대할 날이 없을것을 설어하라.』 하였다.

유렴은 어색하여 다시 말은 못하고 다만 눈물 어린 늙은 눈으로 태자의 초췌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태자가 분명히 미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적이 안심하는 듯이, 『 동궁 마마 내내 천만 보중하옵소서.』 하고 물러 나왔다.

유렴은 신라의 관복을 다 벗어 집 사람을 주며, 『 내 고려에서 죽었다 하거든 이것을 묻어 나의 무덤을 삼으라. 내 죽어 혼이 잇거든 고려에 있는 몸을 버리고 신라에 둔 옷에나 와서 접하리라.』 - 326 - 하였다.

『진헌이 왔다 갈 제시중 하나 두고 가데 왕건이 다녀 갈 제시중 마자 가져가노.』

하고, 백성들은 시중의 수레가 서울거리로 마지막 지나갈 때에 수레를 붙들고 울었다.

유렴은 초졸한 선비의 북색으로 수레에 단정히 앉아 차마 눈을 들어 좌우를 돌아 보지 못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렴 시중이 운다.』

하고 백성들은 더욱 울었다.

웬일인지 유렴이 상대등이 된 뒤에도 백성들은 시중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더욱 정다왔던 까닭인가.

왕은 구무제(穴城)까지나 왕건을 전송하였다. 고려까지 따라라도 가고싶은 것을 그도 못하고 구무제에 머물러 왕건과 공주의 수레가 멀어 가는것을 바라보고 자못 창연하였다. 왕건을 따라, 고려로 가고 싶은 사람은 왕뿐이 아니었다. 대관들 중에도 몸은 신라에 남고 마음은 왕건의 수레바퀴를 따라 고려를 향하였다.

길가에는 백성들이 구경을 나왔다. 백성들까지도 왕의 거동 구경을 나온것보다 왕건의 거동 구경을 나온 셈이었다.

왕건이 다녀 간 뒤로 왕은 전사에 뜻이 없고 주야로 낙랑 공주만 생각 하였다. 노인이 색에 미친 꼴은 차마 못 보겠다고 사람들이 비웃을이만큼 심하였다. 그래서 왕은 한달에도 몇번씩 편지를 써서 고려로 보내고는 무슨 회답을 기다렸다.

고려에서는 세 번 편지에 한번 회답이 나왔다. 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도 나라 일에는 뜻이 없고 어찌하면 왕건의 뜻에 들까, 어찌 하면다만 한푼이라도 돈을 더 벌어 고려에 미리 보내어 집과 땅을 구하여 놀까 이러한 생각만 하고 있는 듯하였다.

<대하 장경(大廈將傾)에 나 혼자 그러면 별 수 있나.>

하고 저마다 제 실싸퀴(실속)나 하기를 도모하는 듯하였다.

강토는 다 없어지고 민심은 이만하고 조정에는 나라를 근심하는 이가하나도 없으니, 구고는 마르고 대궐 안에는 도적과 귀신들만 편안한 날이 없이 난동하였다.

그중에서 옛날 김 성·김 율의 세도를 한손에 잡은 이는 시랑(侍郞) 김- 327 - 봉 휴( 金封休) 였다. 왕건이 서울에 와 있는 동안에 여러 사람이 다투어 왕건의 마음에 들려 하였으나 그중에 가장 왕건의 신임을 받은 이는 아직 삼십이 넘을락말락한 김 봉휴였다.

김 봉휴는 일찍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명이 높고 재주가 과인하며 구변이 좋고 또 모략이 있는 사람이다.

왕건은 한번 보매, 그 사람을 알아 보았다. 알아 본다 함은, 첫째 그 의 재주와 구변이 능히 신라 조정을 휘두르고 또 그의 뜻이 능히 명리( 名利) 로 유혹 할 수 있음을 본 것이다.

김 봉휴는 본래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왕건이 다녀 간 후로 벼슬은 갑자기 사람에 오르고, 오는 곳 모르는 재물이 흥성하여 문객이 날마다 저자를 이루고 왕도 돈을 쓰려 할 때에는 김 봉휴에게 말하였다.

김 봉휴는 누구의 무슨 청이나 아니 듣는 것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에게는 재주도 끝이 없고 재물도 한량이 없는 듯하였다. 왕도 무슨 원하는 일이 잇을 때에 김 봉휴에게 말하면 반드시 그 일이 이루었다.

그러나 김 봉휴의 세도에는 뜻대로 안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김봉 휴 와 같이 당나라에 다녀 오고 가위 죽마 고우라 할 만한 시랑 김비( 金朏) 와 사빈경(司賓卿)이유(李儒)다. 김 비와 이 유는 유렴의 계통이다. 그들은 대의(大義)를 내세우고 옥으로 부서질지언정 질그릇으로 온 전하 기를 원하지 않는 김 봉휴 편으로 보면 고집 불통하는 무리들이었다.

수효가 많지는 아니하나 김 비‧이 유를 따르는 이도 있어 그들은 모두 태자의 편이 되었다.

그러나 태자는 이제 와서는 벌써 나라를 바로 잡을 뜻을 잃어 바리고 거짓 미친 것이 참 미친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 태자는 사람을 만나는대로 미친 사람 모양으로 풍자와 회학으로 일삼고 그렇지 아니하면 눈물을 흘렸다.

태자가 아직 태자 되기 전에 사귀던 무리들도 다 흩어지어 버렸다.

그러나 왕에게서 떨어진 백성의 마음은 그래도 태자에게 붙어 있어 태자 가미 복으로 거리로 나와 다닐 때에 백성들은 반가운 듯이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고, 『 동궁 마마 동궁마마.』 하였다.

그리고는 태자가 지나간 뒤에는, 『 아이 가엾으시어라.』

하고 늙은이들은 태자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 328 - 백성들도 태자에게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태자가 불쌍하였던것이다.

삼년의 세월은 이렁저렁 지내 버렸다. 왕의 마리에는 백발이 더 늘고 나라의 강토는 더욱 줄어 들었다.

왕이 늙고 나라가 줄도록 더욱 느는 것은 시랑 김 봉휴의 세력뿐이었다.

대궐이 갈수록 퇴락하는ㅍ대신에 김시랑의 집은 갈수록 커지고 화려하여지었다. 대소 관원은 김 봉휴의 뜻대로 내고 들었다.

인제는 신라의 사직을 들어 고려 왕에게 바칠 기운은 익었다. 하려고하면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할 듯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먼저 그 말이나 오 기만 고대하였다.

이 말을 먼저 내이지 못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 것은 왕건 이 서울을 다녀 간 뒤에 진헌이 일길찬(一吉粲) 상귀(相貴)를 보내어 바로 고려를 습격하여 예성강까지 올라 가 염백정(鹽白貞) 세 고을을 노략하고 저 산도( 猪山島)에 먹이는 말 삼백필을 빼아서 가고, 또 그해 시월에는 해군장( 海軍將) 상애(尙哀)를 보내어 고려의 대우도(大牛島)를 칠 때, 왕건이 대광(大匡) 만세(萬歲)를 보내어 막으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 하고 따 옥이 섬에 정배 보내었던 유금필(庾黔弼)을 다시 불러서 겨우 큰일을 면 하였다.

이 모양으로 진헌은 일변 해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가 평안한 날이 없을뿐더러, 또 일변 신라에 사람을 보내어 만일 고려와 더욱 가까이 하면 대군을 몰아 서울을 엄살할 뜻을 위협하였다.

이 때문에 신라 조정에서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세를 움직일 대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진헌이 아 불이( 阿弗鎭) 를 침범한 것이다. 아불이는 서울에서 서으로 백리도 못되는 요해저다.

신라는 크게 놀래어 고려에 구원을 청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왕건은 곧 유금필( 庾黔弼)을 정남 대장군(征南大將軍)을 삼아 군사 삼천을 주어아 불이로 보내었다.

그러나 유금필의 군사는 아불이 싸움에 거의 다 죽고 겨우 삼백인이 살아남았다.

금필은 살아 남은 군사를 끌고 때나루(槎灘)에 이르러 잠시 진 헌 의군 사를 피하였다. 밤에 금필은 살안 남은 군사들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달하였다.

『삼천 대둔을 거느리고 진헌을 치려 하다가 이제 싸움에 패하여 군사를- 329 - 잃었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돌아 가상 감 마마께 뵈오리오. 나는 단신으로 백제 군중에 들어가 신검(神劍)과 자웅을 결할 터이니, 너희들은 마음대로 각각 살 길을 도모하되 나를 따를 자는 나루 이쪽에 머물고 살아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라.』 하고 눈물을 흘렸다.

금필의 만에 군사들은 모두 울고 나루를 건느지 아니하는 자가 팔십 명이 남았다.

금필은 살아 돌아 가려고 배에 오른 자들을 향 하여, 『 너희 만일 무사히 고려에 돌아 가지든 우리 팔십명은 왕명을 받을 어때 나루에서 죽더라 하여라.』 하고 팔십명 장사를 거느리고 밤에 신검의 진을 엄습하였다.

신검의 진에서는 이날 싸움에 이긴 것을 기뻐하며 술을 마시고 늦도록 놀다가 깊이 잠이 들었던 길이나.

밤에 불의의 습격을 당하여 오천 대군은 산야로 흩어지어 버리고 백 제 통군( 百濟統軍) 신검도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이 싸움에 금필은 또다시 사십인의 장사를 잃어 버리고 나머지 사십명 군사를 끌고 서울로 들어 갔다.

서울에서는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상하가 물 끓듯하던 차에 불의에 금필이 피묻는 군사 사십인을 끌고 서울로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서 울 백성들은 죽은 귀신이 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왕은 계하에 내려 금필을 마자 그 손을 잡고 울며, 『 대 광( 大匡) 이 아니었으면 신라는 어육이 될 뻔하였도다. 상국( 上國) 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랴.』 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금필을 위로하였다.

신검(神劍)은 금필에게 패하여 잠시 몸을 피하였다가 금필에게 군사가 많지 아니함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금필이 돌아 오는 길을 기다려 이불이 원수를 갚으려 하여 자도(子道)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금필은 서울에서 돌아 올 때에 서울에 있던 고려 군사와 또 서울을 지키던 신라 군사 이천을 데리고 오다가 자도에서 신검의 복병을 만나 싸움을 싸운 끝에 신검의 군사를 깨뜨리고 백제 장수 일곱을 사로잡고 머리 천여 급을 베어 가지고 고려로 돌아 갔다.

신검이 두 번이나 금필에게 패하매,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백제에 돌아와 아비 진헌에게 오천 군사를 주면 고려의 원수 갚기를 청 하였으나, 진헌은 신검이 두 번이나 패한 연유로 신검의 말을 물리치고 또 금필의- 330 - 재주를 두려워하여 아직 고려와 화친을 하기를 꾀하였다.

신검은 이것이 다 아우 금강(金剛)이 늙은 아버지를 꾀어 자기를 물리치려 하는 꾀로만 여겼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평소에 아버지 진헌이 네째 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던 차에 이 일이 있음으로부터 금강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마침 왕건이 대병을 몰아 운주(運州)를 엄습하려 하였다. 이때에 신검은 한번 더 자기의 군사를 주어 고려 군사를 물리치고 송도까지 일거에 들어갈 것을 말하였으나, 진헌은 신검을 믿지 아니하고 금강에게 오천 군사를 주어 운주를 지키라 하였다.

금강은 오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에 이르러 아버지 뜻대로 왕건에게 글을 보내어, 『兩軍相鬪勢不俱全恐無知之卒多被殺宣結和親各保封境( 두 군사가 서로 싸우면 피차에 온전한 길이 없으니 점하신대 불쌍한 군졸만 많이 죽을것이라, 마땅히 서로 화친 맺어 각각 제 땅을 안보하자.)』 하는 뜻을 전하였다.

왕건도,

『男盡從戎婦猶在役 不忍勞苦瘡痍之民豈豫意哉(남자는 다 싸움에 나가고 부녀도 군사가 되어 노고를 참지 못하니, 이 백성을 괴롭게 함이 어찌 나의 뜻 이 랴.)』 하여 아무쪼록 싸우기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금필이 아뢰 기를, 『 이제 진헌이 화친을 원함은 진실로 화친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신검이 두 번 패하여 수천의 군사를 잃으니, 서서히 잃은 힘을 회복하려 함이오니 어찌 진헌의 괴휼한 말을 믿으시려 하나이까? 이제 진헌을 치지아니하면 장차 더 큰 후환이 잇을 것이오니, 금일의 형세 오직 싸움에 잇는지라 원컨댄 대왕은 신등이 적을 깨뜨림을 보소서.』 하고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왕은 금필의 충성과 재주를 믿고 막지 못하여 싸우기를 명하였다. 고려도 건국 이래로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못 높았을 때라, 왕건은 혹 각처로 순행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혹은 부세를 경감하여 민심을 사려 하였다. 만일 이번 금강(金剛)과 싸와 패한다 하면 왕건의 운명도 어찌 될지 몰랐을 것이다. 더구나 금강은 재주 있고 용력 있기로 천하가 두려워하는 장수요, 또 그 군중에는 풍운 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는- 331 - 술사( 術師) 종훈(宗訓)과, 살 맞은 자리와 칼 맞은 자리를 순식간에 고친다는 의사 훈겸(訓謙)과 백전 백승하여 한번도 싸움에 져 본 적이 없다는 용장 상달(尙達)·최필(崔弼)이 있으니, 왕건이 생각 하기에는 아무리 금필의 재주와 무용으로라도 백제 군사를 대적하기가 어려울듯 하였던 것이다.

금강은 왕건에게 사자를 보내고 회보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며, 밤이 깊도록 제장을 모아 술 먹고 놀다가 고려 군사가 백제 사자의 목을 베어 앞에 들고 물 밀 듯 들어 온다는 기별에 갑자기 당황하게 응 전하 였으나,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금강은 삼천군을 잃고 달아나고 상달·최필 등은 칼을 던지고 항복하고, 풍운 조화를 부린다는 종훈과 의사 훈겸은 어찌 할줄을 모르고 헤매다가 금필에게 사로잡혔다.

금강이 운주(運州)에서 패하였단 말을 듣고 진헌의 맏아들 신검은 진헌을 잡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군사를 보내어 길에 매복하였다가 패 하여 돌아 오는 금강을 잡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금강을 미워한 것은 신검뿐이 아니었다. 강주 도독(康州都督)으로 있는 양검( 良劍) 과 무주 도독(武州都督)으로 있는 용검( 龍劍) 도그 형 신검 과같이 아우 금강이 아비의 총애를 혼자 받아 장차 왕위를 이으러 하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다가 금강이 운주에서 패한 소문을 듣고, 신검의 뜻을 살핀 이찬( 伊粲)· 능환( 能奐) 은 양검·용검에게 사람을 보내어 진헌을 패할 뜻을 통하고 파진찬(波珍粲) 신덕(新德)과 영순(英順)과 같이 짜고 신검을 권하여 이일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에 진헌은 아직 어린 첩 고비(姑比)를 끼고 자리에 있어 자는데 문득 문밖에서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리므로 놀래어 깨니, 군사들이 무엄히 왕의 침소에 들어 와 일어나기를 재촉하고 그 뒤로 능환·신덕·영순 세 사람이 들어 와 읍하였다.

왕은 어이 없어, 『 어인 일고?』

하고 물은 즉 능환은, 『 상감 마마께 오서 늙으시오니 맏아드님 신검마마께오서 왕이 되시 옵기로 하례를 드리나이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진헌은 진노하여 칼을 들어 서안을 치며, 『 뉘 신검을 왕이라 하더뇨? 신검을 부르랴. 금강은 어디 있나뇨?』 - 332 - 하고 호령을 하였다.

능환은 다시 읍하고, 『 금강 아기는 금필에게 잡히어 죽었나이다.』

하였다.

금강이 죽었단 말과 신검이 왕이 되었단 말에 진헌은 가슴을 치 고통 곡 하였다. 그럴 때에 군사들이 달려들어 왕을 가마에 담아 금산사에가 두고 파달(巴達)에게 삼십명 장사를 주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파달은 주먹으로 바위를 바순다는 이름 있는 장사다.

진헌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말째 아들 능예(能乂)와 딸애복( 哀福) 과 첩 고비(姑比)를 데리고 수십일을 지내엇다.

진헌을 유페하여 금강을 죽인 신검은 백제 왕이 되어 극내의 모든 죄인을 대사하고, 『 대왕( 진헌) 이 신무(神武) 뛰어 나시고 영모(英謨) 고금에 으뜸 되시는 어른으로 쇠게(衰)를 만나서 스스로 경륜으로 맏으시고 삼한을 쫓으사, 백제를 회복하사 도탄을 확정하시니 백성이 평안히 모여 춤 추며 즐기고 먼데 무리 또한 따라 오는지라. 중흥의 공업이 거의 이룰러니, 생각을 그릇 하사 어린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실새 간신이 권세를 잡아 크신 임금을 진혜(晋惠)의 어둠에 이끌고 자비하신 아비를 헌공(獻公)의 혹함에 빠지시게 하여 대보(大寶)로써 완동(頑童)에게 주려 하시어늘, 다행히 상세 강충( 降衷) 하사 군자(君子) 허물을 고치사 맏아들로 하여금 이 나라를 맡아 다스리게 하시는지라. 돌아 보건댄, 내 진장지재(震張之才) 아니라 어찌 임군 지지( 臨君之智) 있으리오마는, 긍긍 율률(兢兢慄慄)하여 얼음과 못을 밟는 듯하여 불차(不次)의 은(恩)을 미루어서 유신(維新)의 정( 政)을 보이려 하노라.』 하고 하교(下敎)하였다.

그러나 장수들과 백성 중에는 신검이 아비 진헌을 폐하고 아우 금 가을 죽이고 또 금강의 처첩과 자녀까지 다 죽이고 대위(大位)를 찬탈한 것을 불평 히 여겨 은근히 금산사에 유폐된 진헌을 끌어 내려는 이도 있었다.

이러한 때를 타서 신검이 즉위한 지 한달 후 사월에 왕건은 금필로 도통 대장군( 道通大將軍)을 삼아 해군을 주어 예성강(禮成江)으로 내려 가수로 로 나주(羅州) 사십여 고을을 치게 하였다.

금필의 군사는 힘 안 들이고 나주에 들었다.

진헌은 고려 군사가 나주에 들었단 말을 듣고 가만히 사람을 금필에게 보내어 자기가 고려로 갈 뜻을 말하였다. 금필은 나주까지 오기를 진헌에게- 333 - 청 하였으나 진헌은 금산사를 빠져 날 도리가 없었다.

하루는 진헌이 파달(巴達)과 지키는 장사 삼십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굴을 먹었다. 밤이 깊도록 술을 먹어 파달과 삼십명 장사가 취하여 이리저리 쓰러진 틈을 타서 진헌은 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과 첩 고비( 姑比) 를 데리고 사능을 넘어 금산사를 빠져 민가에 들어 가 농부의 옷을 바꾸어 입고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길을 걸어 천신 만고로 나주성에 다다랐다.

금필은 눈물을 흘리며 진헌을 맞아 위로하고 왕으로서 대접하고 이 뜻을 왕건에게 장계하였다.

왕건은 곧 대광(大匡) 만세(萬歲)로 정사를 삼고 원보( 元甫)· 향예( 香乂)· 오담( 吳談)· 능선( 能宣)· 충질( 忠質) 등으로 하여금 병선(兵船) 삼십척을 거느리고 해로로 진헌을 맞아 송도에 이르 렀 다.

진헌이 송도에 들어 올 때에 왕건은 궐문 외에서 진헌을 맞았으나 진 헌 은왕의 앞에 엎 디어, 『 과인으로 하여금 대왕께 신이라 일컫게 하옵소서. 대왕의 성덕이 아닐질 댄, 실국 여생이 천하에 어디 지접할 곳이 있사오리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친히 진헌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 대왕은 과도히 설어 마소서.』

하고, 인하여 궐내에 불러 들여 그날 하루는 진헌을 왕으로 대접 하고진 헌이 재삼 칭신하기를 청하매, 진헌을 상보(尙父)라 부르고 벼슬을 백 관위에 있게 하고 남궁(南宮)을 주어 진헌의 지블 삼게 하고 양주( 楊州) 를 주어 식읍을 삼고 많은 금백(金帛)과 남종 사십과 여종 사십과 말 열 네필을 주고 이전에 진헌의 신하로 있다가 먼저 항복한 신강( 信康) 으 로아 관( 衙官)을 삼아 일변 진헌의 살림을 맡아 보게 하고 일변 진헌의 행동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가 나주 지경을 차지하고 또 진헌이 고려에 가 있다는 말은 신라 조정에 큰 동요를 주었다. 진헌이 고려에 간 뒤에 후백제에는 평안하 날이 없었다. 안으로 신검·양검·용검 삼 형제간에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밖으로는 고려 군사가 설렘을 따라 민심이 이산하였다.

왕건은 짐짓 서경(西京)에 순행하여 패수(涓水) 여러 고을을 돌고 다시 황 해주( 黃海州)에 순행하면서 가만히 금필로 하여금 신라의 연해주( 沿海州)에 군사를 나오게 하였다. 금필의 군사가 가는 곳에- 334 - 저항 하는 자가 없어 불과 일삭 내에 신라 연해주 삼십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 하였다. 항복하는 대로 그 도독과 장군을 송도로 불러 벼슬을 주 고집을 주어 후대하였다.

신라 조정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 봉휴는 속히 고려에 항복하여 후환을 면하기를 주정하고 이유( 李濡) 는 이를 반대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할 즈음에 시월에 이르러 금필의 군사가 아슬라에 들어 왔다는 장계가 왔다. 아슬라는 궁예가 웅거하였던 곳이다. 아슬라에서 서울은 지척이다. 이틀 안에 서울은 금필이 손에 들 것이다.

왕은 군사를 백관과 늙어 물러간 백관이 다 모여 날이 맞도록 의논 하였으나 결정을 못하던 차에, 고려 군사가 아슬라 성을 떠나 서울을 향하고 올라 온다는 기별이 왔다. 이것은 밤이었다. 조정에서는 창 황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모였던 대관 중에는 피난할 것을 근심하여 슬슬 빠져나가는 이조차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백성들은 대궐 문밖에 모였다.

금필의 군사는 서울을 향하고 부쩍부쩍 들어 왔다. 무엇하러 들어 온 단말은 없으나 밤이 되어도 행군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들어 올 때마다 궐내에 모인 백관들은 당황하였다. 그래도 아무도 먼저 항복하자는 말을 바로 내지는 못하였다.

이때에 고려에서 사신이 들어 왔다는 기별이 들어 왔다. 밤이 깊었건만 는 사신은 곧 궐내로 들어 오게 되었다.

그 사신은 예전 재암성 장군(載岩城將軍)이요, 지금 고려의 상보( 尙父)이던 선필(善弼)이었다.

고려 사신이 온단 말에 왕은 당황히 일어나 별실에 나가 김 봉휴와 다만세 사람이 만났다. 왕은 왕의 위엄도 잊어 버리고 계하에 뛰어 내려 선필의 손을 잡으며, 『 상국 상보 어찌 깊은 밤에 임하시나이꼬?』 하였다. 선필은 대국 사신다운 태도를 가지고 왕을 대하였다. 선필은 마치 신라 왕고 자기와 동등인 것같이 행동하였다. 왕은 마음에 선필이 옛날 신라의 신하이던 것을 잊어 버린 듯한 행동이 미웠으나 어찌할 수 없이다만 선필의 뜻을 거스르지 안하기를 힘썼다.

선필은 고려가 신라를 위하여 백제와 여러 번 싸운 뜻을 말하고, 만일 고려 왕의 호의가 아니었던들 서울은 벌써 진헌의 손에 무찔렀을 것을, 진헌이 비록 고려를 대항하였으나 고려 왕의 성덕으로 진헌을 후대 하여 상보를 삼아 벼슬이 백관 위에 있음을 말하고, 나중에 신라 왕께- 335 - 대하 여서는 진헌에게 한 것보다 더 후대를 줄 것을 말하고 비록 신라나라를 고려에 바치더라도 왕의 칭호를 변치 아니할 것을 말하고, 끝에 만일 이때를 넘기면 천라 백성이 평안하기를 위하여 부득이 금필의 군사가 서울에 들어 올 것이니, 그리되면 화단을 면치 못할 것을 말하고, 자기는고려 왕의 성의를 받자와 마지막으로 왕에게 취할 길을 가르친다는 뜻을 말하고, 『 대군이 지척에 임하였으니, 닭 울기 전에 결단하소서.』 하고 선필은 입을 다물었다.

본래 왕건은 유렴을 먼저 항복받아 유렴의 입으로 왕에게 항복을 권하고 신라의 백관에게 고려에 돌아 오기를 권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삼 년을 두고 유렴을 달래어도 보고 위협도 하여 보았으나, 유렴은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 왕 장군은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생각하라.』 하고 왕건을 꾸짖었다. 금 성 태수라 함은 물론 왕건의 아버지 왕륭( 王隆)을 가리킨 것이다.

유렴은 결코 왕건을 대왕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 왕장군 」 이라고 부르고 자기를 신이라고 칭하지 아니하고 「나」라고 불렀다. 그러할 때마다 좌우에서 유렴을 협박하였으나 왕건은, 『 두라 충신의 이름을 남기게 하라.』 하였다.

한번은 왕건이 선필을 보내어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혼자 고집 하더라도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요, 도리어 일신에만 해로울 것인즉, 차라리 지금에 왕건에게 항복하여 영화를 누리고 또 새 나라의 건국 원훈이 되기를 권하려하였다. 선필이 유렴을 둔 집에 이르러, 『 상보 왕 선필이 온다 하라.』 하고 통하였더니 유렴은, 『 상보 왕 선필이란 자를 내 안 일이 없노라.』

하고 집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선필은 하릴없이, 『 재 암 성 장군 선필이 온다 하라.』

하고 마침내 신라 벼슬을 말하였다. 왕 선필이라는 왕(王)성은 왕건에게 받은 성이다.

『재암성 장군 선필이라면 들라 하라.』

하여 선필을 불러 들였다.

선필은 들어 가는 길로 상대등에게 대한 예로 먼저 유렴에게 절하였다.

- 336 - 그러나 선필이 왕건의 시킨 뜻을 말할 때에 여러 말 없이, 『 이 놈을 몰아 내치라.』

하고 유렴이 호령을 하여 선필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러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선필이 유렴에게 「이놈 몰아 내치라」는 호령을 듣고 물러나온 후, 왕은유렴에게 대하여 절망하여 버리고 말았다. 살을 점점이 빼어 내고 뼈를 부 지르 더라고 유렴의 마음을 휘지 못할 줄을 안 까닭이다.

이에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금필로 하여금 일변 대군을 끌어 신라의 조금 남은 땅 마저 점령하게 하고, 일변 선필을 보내어 신라왕을 달래기로 한 것이다. 이라하여 불인 일병(不〇一兵)하고 신라 왕 이자 진하여 나라를 고려에 바치게 하려 함이 왕건의 뜻이다. 이리하여 선필 이온 것이다.

왕은 「왕이라 부르기를 허락한다」는 말에는 안심이 되나 그래도 나라를 들어서 남에게 내어 주고 만승의 지위에서 갑자기 떨어지어 왕건의 밑에 들리라 하면, 그래도 마음이 슬프기도 하고 신세가 스스로 가엾 기도 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진헌과 왕건에게 쪼들리고, 안으로는 아무 힘없 이나라를 맡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잊고 아름다운 낙랑공주와 즐거운 꿈을 맺을 일이 기쁘기도 하였다.

『낙랑 공주는 어떡하신고?』

하고 왕은 선필에게 물었다.

『공주는 불원에 성례하신다 하나이다.』

하고 선필도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왕도 다소 무안하여, 『 서울에 왔을 때는 공주 나를 따르더니?』

하고 성례란 말이 근심이 되어, 『 뉘 부마 되니이꼬?』

하고 물었다.

선필은 뜻 있는 듯이 웃고 대잡하지 아니하였다. 왕은 한편으로 안심도 되고 또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말을 돌려, 『 지금 백관이 모여 있으니 가서 의논하리다.』 하고 선필을 머물게 하고 정전으로 나왔다.

백관은 무슨 일이 있는고 하고, 왕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왕은 옥좌에 올라 앉으며,- 337 - 『 들으라, 짐은 나라를 받들어 고려 왕께 바치려 하노라.』

하고 말을 내리었다.

이 말에 백관은 벼락을 맞은 듯이 깜짝 놀랐다. 비록 평소에 고려에 붙기를 마음으로 원하는 자들까지도 왕의 이 말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관 중에는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고 오직 잠잠하였다.

이때에 태자가 어디선지 모르게 뛰어 나와 옥좌 앞에 섰다. 당돌히 왕을 바라보며, 『 폐하! 지금 내리신 말씀을 거두소서. 천년 사직은 폐하 한 사람의 것 이 나니 오니 망녕된 말씀을 거두소서. 나라의 흥망이 반드시 천명이 있을것이니, 충신·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죽기로써 지키다가 힘이다 하면 말지언정 어찌 일천년 사직을 들어 남에게 내어 주리이까?

못하리이다. 못하리이다.』

하고 피눈물을 뿌렸다.

태자가 옥좌 앞에 나서는 무서운 양을 보고, 또 태자가 하는 말을 듣 고왕은 겁이 나서, 『 태자는 참으라. 낸들 어찌 망국의 임금 되기를 바라오 마는 강장( 彊場) 은 날로 줄어 나라 형세 이러하니 온전하기를 바라지 못할지라.

이미 강할 줄을 모르고 또 약할 줄을 몰라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간뇌 도지( 肝腦塗地) 하게 함이 나의 차마 못할 바라. 』 하고 왕도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대궐 마당에서 고함하는 소리 들리매, 백관들은 놀라 고개를 돌리고 왕도 옥좌에서 일어나 떨었다.

태자만 홀로 태연히 백관을 돌아 보며, 『 천년 신라에 오직 한 충신이 나단말가?』

하였다.

이때에 금군 도독이 들어 와 왕의 앞에 나와, 『 어떤 놈이 몽둥이를 들고 궐내에 들어 와 수십 명 지키는 군사를 때려 죽이고 고려 상보를 범하나이다.』 하였다.

금군 도독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정전 정문으로 두껍쇠가 선필의 상투를 끌고 들어 와 옥좌 앞에 엎어 놓고 몽둥이를 들어, 『 이 놈 역적 선필아, 네 오늘 하늘이 무심치 안하신 줄을 안다. 내 몽둥이로 네 골을 바숴 천하 역심 품은 놈들에게 징계할 바라를 보이리라.』 - 338 - 하고, 몽둥이로 선필의 머리를 갈기니 요란한 소리가 나며 선필의 머리가 깨어지고 붉은 피가 전내에 흩어진다.

이 광경을 보고 왕은 실색하여 비틀거리며 옥좌 난간을 붙들고 쓰러지고 백관은 서로 밀치고 구석으로 들이 밀린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 몽둥이를 거두라!』

하고 두껍쇠에게 명하였다.

두껍쇠는 피 묻은 몽둥이를 둘러 메고 한번 백관을 돌아 보며, 『 누구든지 고려에 항복하려는 놈은 다 이몽동이로 때려 죽이리라.』 하고, 호통을 빼고는 왕과 태자께 절하고 우우하게 밖으로 나가 버린다.

두껍쇠는 김 충이 태자된 후로는 태자의 말구종으로 동궁예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대궐 밖에 나가 힘쓰고 날 파람 있는 무리를 모아 가지고 밤이면 사람 없는 곳에서 몽둥이와 칼 쓰기를 익히고, 또 가끔 나라를 팔아 먹는 대관의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버들골 청루를 설레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 충이 태자고 된 뒤에는 서로 만나 이야기할 기회도 적었다.

삼년 전 왕건이 서울에 왔을 때에 두껍쇠는 패당과 함께 왕건을 따라 온 선필을 때려 죽이려 하여 그 뜻을 후환을 끼치리라 하여 모 솨 리라 고금 하였다. 그러나 점점 국세가 그릇되어 가슴을 볼 때에 두껍쇠는 왕건까지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다가 오늘 밤에 다시 선필이 고려 왕의 사신으로 왔단 말을 듣고 태자의 앞에 가서, 『 동궁 마마, 이번에는 그놈을 때려 죽이려 하나이다. 만일 이번에도 못 때려 죽이면 이 몽동이로 이 머리를 때려 바수려 하나이다.』 하고 몽둥이로 두껍쇠 자기의 머리를 가리키었다.

태자는 말이 없이 들어 가 버렸다.

그 길로 두껍쇠는 몽둥이를 끌고 고려 사신 숙소로 가서 지키는 군사들을 때려 쫓고 선필 있는 곳이 달려 들어, 『 이 놈 역적 선필아, 두껍쇠 몽둥이 맛을 보라.』 하고 선필에게 대들었다. 선필도 칼을 빼어 몽둥이를 막았으나, 두껍 쇠의 몽둥이를 당할 길이 없어 두껍쇠에게 목덜미를 붙들렸다.

『내 분한 마음을 보아서는 너를 죽이기 시각이 바쁘다마는 얼 빠지 만조백관의 징나 삼으려고 만조 백관 모인 중에서 네 골을 바수고 배를 가라 역적 놈의 뱃속에 오장이 있나 없나 보리라.』 하고 선필을 끌고 정전으로 들어 간 것이다.

왕은 겨우 정신을 진정하여 옥좌에 바로 앉았다. 그러나 두껍쇠에 쫓기어- 339 - 구석으로 들어 박힌 백관들은 수족이 떨려 어찌할 줄을 모르고 둥그렇게 뜬눈들만 휘황한 촛불에 반짝거렸다.

왕은 김 봉휴(金封休)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간 곳이 없었다. 왕은 황 황하게, 『 시랑 봉휴는 어디 갔는고?』 하였다. 이미 고려 사신을 죽게 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왕은 오직 김봉 휴 만를 믿고 찾는 것이다.

그제야 봉휴가 바로 옥좌 밑으로 기어 나왔다. 봉휴의 낯빛은 까맣게 질렸다.

왕은 봉휴를 바라보며, 『 이 일을 어찌하료? 시랑아, 이 일을 어찌하료?』

하고 왕은 한숨을 지었다.

봉휴는 옥좌 앞에 꿇어 엎디어 한참이나 몸이 떨려 말을 이루지못하다가, 『 항복 항복 항복.』

하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김 비(金朏)와 이 의( 李儀) 는 『 항복은 김시랑이 하라. 우리는 싸워 죽으리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왕은 또 두껍쇠나 아니 들어 오는가 하여 사방을 둘러 버며, 『 항복인가? 싸움인가?』

하고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항복 아니면 도륙이로소이다. 뉘 고려 군의 도륙을 막을 것이니이꼬?』

하고 봉휴의 말은 또렷또렷하다.

『차라리 도륙을 당할지언정, 살아서 이 무릎을 굽히지 못하리라.』

하고 김 비·이 유는 다투었다.

마침내 왕은, 『 봉휴여 항서를 쓰라!』

하였다.

「항서를 쓰라!」하는 왕의 말씀에 백관 중에서는 통곡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통곡 소리 중에는 김 봉휴의 항서 쓰는 붓이 움직였다.

태자는,

『천년 종사가 오늘에 망하는가?』

하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비씰비씰 문밖으로 뛰어 나갔다.

- 340 - 전 내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보고 또 태자가 통곡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대궐 안에 모두 곡성이 진동하였다.

태자는 나온 길로 어머니요, 왕후 되는 백화부인이 계신 대로 들어 갔다.

거기는 백화 왕후와 태자비와 유렴 부인이 모여 앉아 나라 일이 어찌 되는것을 근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유렴 집 종 시월도 태자를 모시는 궁녀가 되어 이곳에 모시고 있었다. 전내에는 수색이 차고 시중 드는 궁녀들도 기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때에 태자가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며 들어 와 왕후의 앞에 절하며, 『 소자는 가나이다. 이제 나라이 망하오니 백성과 산천을 대할 낯이 없이 소자는 가나이다.』 하고 느껴 울었다.

왕후는 무슨 일인지 안 듯이 채자에게 더 묻지도 아니하고 다만, 『 나라이 망하였나뇨?』

하고는 엎어지어 기절하였다.

태자비와 시중 부인과 궁녀들은 왕후를 붙들어 일으키었다.

이윽고 왕후는 눈을 떠 태자를 보며, 『 어디로 가려느뇨?』

하였다.

『망국 여생이 정처가 있사오리이까?』

하고 태자는 고개를 들어 왕후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태자비계 영 아기를 보았다. 계영아기도 오랜 동안 근심에 얼굴에 핏기가 없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를 대신하여 늙으신 어머니를 뫼시라.』

하고 다시금 계영아기를 바라보았다.

백화부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이윽히 침음 하더니, 『 나도 태자를 따르리라. 나를 두고 가지 말라.』 하며 궁녀를 불러, 『 이 곳에 우리 오래 있지 못하리니 너희는 각각 민가에 내려 유자 생녀하고 인간 복락을 누리라.』 하였다.

궁녀들은 왕후의 앞에 엎드리며, 『 어디를 가시옵거나 따라 뫼시리이다.』

하고 울었다.

태자는 궁녀들을 보며,- 341 - 『 너희는 어디를 따르러 하느뇨? 정처 없는 행색이 어디로 갈 줄이나 알 관대, 나라도 없고 집도 없이 뿌리 없는 부평초 모양으로 떠돌아 다닐우리 신세를 어디를 따르러 하나뇨?』 하였다. 궁녀들은 더욱 울며, 『 정처 없이 가시면 정처 없이 따르리이다. 뿌리 없는 부평초같이 떠 도시면 뿌리 없는 부평초같이 따르리이다. 이몸이 어느 우로 중에 길리 웠기로 뒤에 떨어질 줄이 있사오리이까?』 하고, 찬란한 궁녀의 옷을 벗어 버리고 미리부터 준비하였던 평민의 옷으로 갈아 입고 나섰다.

왕후는 태자를 보고, 『 가자. 따르는 이로 하여금 마음대로 따르게 하라. 이미 나라이 아니어니 시각을 지체하랴. 가자.』 하고 태자를 재촉하였다.

그 길로 왕후와 태자비와 궁녀 사오인과 태자가 두껍쇠는 대궐 옆문을 열고 빠져 나왔다. 모두 서인(庶人)의 옷을 입고 짚신을 신었다. 두껍 쇠가 몽둥이와 등불을 들고 앞장을 서고 태자는 백화부인을 부액하였다. 때아닌 발자국 소리에 동네 개들은 무심히 짖었다.

김 봉휴가 왕의 항서를 가지고 서울을 떠나려 할 때에 금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서울 백성들이 이에 응하여 김 봉휴의 길을 막았다. 나라에서는 군사를 풀어 이것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군사들이 영을 듣지 아 ㅣ 할 뿐더러, 도리어 반군과 합하여 형세가 자못 위급하였고 수십만 군중이 반월성( 半月城) 과 임해궁을 에워 싸고 통곡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통에 왕은 미복(微服)으로 몸을 황룡사에 피하고 김 봉휴도 간신히 몸을 피하여 황룡사에 숨었다.

백성들은 왕과 김 봉휴가 황룡사에 숨은 줄을 알고 그리로 밀려 갔으나 이 때에는 벌써 금필이 거느린 고랴 군사가 서울에 들어 와, 『 감히 소동하는 자는 효수하리라.』 하는 방을 방방 곡곡에 붙이며, 군사를 놓아 대궐과 황룡사를 에워 싼 반군과 백성을 흩였다.

이날에 길가에 주검이 낙엽같이 쌓이고 골목 골목에 피가 흘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시랑 김 봉휴의 집은 백 성의 손에 겁략을 당하였다. 그러나 고려 군사의 위풍에 사흘이 못되어 서울은 잠잠하였다. 그러나 가게는 모두 닫히고 길에 사람의 그림자가 끊이고 오직 밤낮으로 길로 달리는 고려 군사의 말 발굽 소리만 요란하였다.

- 342 - 김 봉휴는 고려 군사의 호위를 받아 가지고 고려를 향하여 떠났다.

그리고 고려 군사는 이 일이 모두 태자의 농간이라 하여 엄중히 태자의 거처를 수색하였으나 마침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 태자 일행은 전부터 잘 아는 백률사(栢栗寺)에 잠깐 숨어 모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등에 바랑을 메고 누더기를 입고 둘씩 셋씩 떨어져 동냥을 하며, 북으로 향하였다.

백률사의 노승이 앞길을 잡았다.

태자는 밤에 산을 넘을 때에 마지막으로 화광이 충천한 서울을 바라보고세 번 절하고 통곡하였다. 두껍쇠는 몽둥이를 두르며 한바탕 서울을 설레어 역적의 머리를 모조리 바수지 못함을 한하였으나, 태자는 머리를 흔들어 만류 하였다.

왕건은 김 봉휴가 가지고 온 신라 왕의 항서를 받고 곧 시중 왕철( 王鐵) 과 시랑 한 헌응(韓憲邕) 등을 서울로 보내어 왕을 불렀다.

왕은 한 잘 동안 고려군 중에 숨어 있다가 십 일월 바람 찬 날에 왕을 따르는 백관을 데리고 서울을 떠났다. 벌써부터 고려에 항복하여 집과 땅을 준비하여 두었던 자, 새로 왕을 따라 항복하는 자, 합하여 왕을 따라 고려로 가는 자가 삼백여 명이나 되었다. 천년 동안 지켜오던 서울 떠나 가산 즙물을 수레에 싣고 늙은이와 부녀들과 어린것들을 데리고 고려를 향하여 서울을 떠날 때에 서울 백성들은 울고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창검을 번뜻거리는 고려 군사들은 우짖는 서울 백성들을 때리고 찔렀다.

어떤 이는 고려로 가는 아비를 버리고 울고 떨어지고, 어떤 이는 고려에가 는 아들을 보고, 『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통곡하고, 어떤 이는 고려로 가는 남편을 바리고 가지각색의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고려 군사에게 붙들려 옥에 집어 던짐이 되었다.

왕의 일행이 수레와 말과 아울러 삼십리에 뻗으니 길가에는 백성들 이나와 통곡하여 보내고, 혹은 고개에 큰 나무를 가로 놓아 길을 막고, 혹은 개천의 다리를 무너뜨리고, 혹은 길가 우물에 더러운 것을 넣어 왕의 일행에게 물을 아니 주려 하고, 혹은 수백명 백성이 떼를 지어 길에 엎 디어, 『 못 가시리이다.』 - 343 - 하고 길을 막아 쫓아도 가지 아니하고 죽여도 가지 아니하여, 『 상감 마마는 잠시 다녀 오신다.』 는 뜻을 말하여 겨우 물리치기도 하였다.

하늘도 나라의 운수를 아는 양하여 왕이 서울을 떠난 뒤로 유난히 일 기 가불 순하여 어떤 날은 북풍에 눈이 날리고 어떤 날은 동풍에 궃은 비 뿌리고 어떤 날은 난데 없는 우뢰가 울고 낮이면 떼까마귀가 행차를 따라 울고, 밤이면 여우가 행궁(行宮)에 와서 울었다.

왕이 고려 서울에 이를 때 고려 왕은 의장을 갖추어 교외에 나와 맞되 이웃 나라 임금의 예로써 하고, 왕을 유화궁(柳花宮)으로 맞아 들이고 왕을 따라 온 백관도 각각 집과 비복을 주었다.

왕이 송도에 들어 오매 고려 왕은 곧 날을 택하여 낙랑 공주를 왕에게 허하였다. 공주는 슬퍼하여 울었으나 부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 하여 왕에게로 시집 갔다. 혼인 하던 날에 왕은 공주의 손을 잡고 오래 막혔던 정회를 말하였으나 공주는 울며, 『 나의 마음은 이미 태자께 바치었사오니, 폐하께 바칠 마음이 없나이다.』 하였다.

이 말에 왕은 놀래고 슬퍼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주를 곁에서 떠나지못하게 하였다.

공주는 밤낮으로 울며 왕을 모시나 왕과 자리를 같이 하기를 워니 아니하여 밤이면 시비 부용으로 왕의 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술이 취한왕은 부용을 공주로만 알았다. 원래 부용은 공주와 용모가 흡사하다 하여 특히 공주의 시비로 택함을 받았었다. 이리하여 낮이면 공주가 모시고 밤이면 부용이 왕을 모시었다.

왕은 송도에 온 후에 심히 평안하였다. 하루는 왕이 고려  상소를 께 하기를, 『本國久經亂亂曆數己窮無復望保基業願以臣禮見( 우리 나라가 오래 난리를 지나 운수 이미 다하여 다시 기업을 안보하기를 바라지 못하울지니, 원컨댄신의 예로써 뵈옵게 하소서.』 하여 칭신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은 허락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왕은 왕을 대하기를 여전히 왕의 예로써 하였다.

이때에 일대 문장 김 봉 휴( 金封休) 가, 『天無二日地無二王一國二君何以堪願廳基請( 하늘에 두해 없고 땅에 두 임금 없으니, 한 나라의 두 임금을 백성이 어찌 견디리오? 원컨대 그 청을- 344 - 들으소서.)』 하고 다시 상소를 지어 신라에서 따라 온 여러 신하들이 연명으로 고려왕께 올렸다.

김 봉휴는 유렴에게 이 상소에 이름 두기를 청할새 유렴은, 『 역적아, 물러나라!』

하여 봉휴를 물리치고, 『 이제 내 목숨이 끊일 때를 당하였도다.』

하고 준비하였던 약을 마시고 동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자진하였다.

왕이 고려에 온 후에 유렴은 오직 한번 왕을 대하여, 『 원컨댄 폐하는 서울로 환행하소서.』

하고, 한 마디를 아뢰고는 다시 왕을대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왕은 유렴의 장례를 후히 하고 충절이라는 시호(諡號)를 주 고유 렴의 집터에 충절사(忠節詞)를 세우기를 명하고 김 봉휴로 하여금 문을 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 봉휴 등의 상소를 받고 고여 왕은, 『 민심이 그러할진댄 막지 아니하리라.』

하여 천덕전(天德殿)에서 군신을 모으고, 『脫興新羅血同盟庶幾兩國永好各保宗社今羅王固請稱臣〇等亦以爲可脫心〇傀衆意難違( 짐이 신라로 더불어 피를 마시어 서로 맹세하되, 두 나라가 길이 좋아 각각 종사를 안보하기를 바라더니 이제 신라 왕이 굳이 신이라 일컫 기를 청하고 경들도 또 옳이 여기니, 짐이 마음이 비로 부끄러우나 뭇 뜻을 어기지 못할지라).』 하고 왕을 불러 정견지례(庭見之禮)를 행하였다. 이것을 보고 고려 군신은 소리를 질러 칭하하며 그 소리가 망월대를 울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칭 하하는 높은 소리를 친 이는 신라 백관 중에서 김 봉휴 밖에 없었고 다른 서 럼들은 등에 땀이 흘렀다.

이날부터 왕은 다시 김 부(金傅)가 되어 관광 순화위국 공신 상주 국 낙랑왕 정승(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 樂浪王政丞)이 되고 식읍 팔 천 호를 주고 위는 태자의 위에 잇게 하고, 신라 나라를 경주(慶州)로 삼았다.

마의태자

왕(이제부터는 고려 왕 왕건을 가리킨다)은 사방으로 태자의 간 곳을- 345 - 수탐 하였다. 어디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것은 태자의 소위로 생각 하였으나, 급기야 잡아 보면 태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신라 땅에는 태자라고 자칭하는 자도 많이 나오고, 또 어디 태자가 있더라 하고 소문을 전하는 자도 많았다. 그래서 옛 나라를 사모하는 백성들은 태자 있다는 곳으로 따라 나섰다. 이리하여 태자의 이름을 내어 세우고는 수백 수천 의군중을 모아 고려 관헌에게 반항하였다. 그러나 반항하는족족 고려 군사에게 진압을 당하였다.

그러나 한 곳에서 진압을 당하면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나서 거의 아니 일어나는 곳이 없었고 경주라고 부르는 서울에서도 십여 차나 반란이 일어나서 마침내 고려 군사는 이십만호나 되는 큰 서울에 불을 질러 버리고말았다.

이 통에 반월성 대궐과 임해궁 대궐도 다 타버리고, 안압지( 眼壓池)에 있던 새와 고기와 임해궁 내에 있던 호랑이 사자 코끼리 같은 짐승들도 무서운 소리를 내고 타 죽고 굉장한 황룡사와 아름다운 분황사조차 타 버리고, 그통에 기울어진 대로 잇던 구층탑도 요란한 소리를 내 고타 버리고 그 속에 잇던 석가산과 연당과 연화를 아로새긴 주춧돌만 타지 않고 남았다.

불은 사흘째 되는 날에 갑자기 뇌성 벼락이 일어나고 된소나기가 쏟아져 캄캄하게 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천년 신라의 옛 터는 옛 생각을 할 물건조차 없어져 버렸다.

각처에서 쫓긴 의병은 산으로 들어 숨고 산에 든 형적이 있으면 산에다 불을 놓았다. 이 모양으로 혹은 싸와 죽고 불 타 죽고 혹은 효수를 당하여 죽은 자가, 혹은 십만이라 하고 혹은 입시 만이라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어디 갔는가? 아무도 아는 이기 없었다. 이러한 지 오년이 지나매, 일어날만 한 신라의 지사들은 다 죽어 버리고 김 비(金朏)와 이 유( 李濡) 도곰의 나루 싸움에 단둘이 남았다가 죽임이 되었다.

이 모양으로 죽을 자는 다 죽고 더러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더러는 배를 타고 혹은 진(晋)으로 혹은 일본으로 혹은 탐라(耽羅)로 혹은 유구( 琉球) 로 망명하여 바리고, 인제는 국내에 아무 소리도 없게 되었다.

그제야 왕건은 마음을 놓았다. 마의태자도 어디서 싸와 이름 모르게 죽었으리라 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삼국을 통일하여 놓고 보니, 왕건도 이미 늙고 같이 일 하던 사람들도 거의 다 죽어 버렸다. 배 현경(裵玄慶)도 죽고 유 금필( 庾黔弼) 도 죽었다. 국사 충담(沖湛)도 죽었다. 궁예도 죽지 아니하였는가. 당나라도- 346 - 망하지 아니하였는가, 더구나 천축(天竺) 승이 고려에 와서 인생의 무상함을 설할 때에 왕은 억제할 수 없는ㅍ슬픔을 깨달았다. 자기가 왕업을 이루노라고 첫째는 아버지의 유훈을 저버리고, 둘째는 은혜 있는 궁예를 저 버리고, 세째는 무고한 많은 백성을 죽게 한 것을 생각할 때에 일종 후회하는 생각과 두려운 생각이 일어났다. 더구나 낙랑 공주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볼 때에는 아비의 정으로 가슴이 쓰림을 깨달았다.

그래서 왕은 군신을 불러 불법을 숭상할 것을 말하고 국비로 각처에 절을 세우고 또 의병과 싸울 때에 불사른 절을 증수케 하고 자기도 친히 불전에 엎 디어 왕업을 이루기에 죽은 무고한 생명을 위하여 빌었다.

왕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친히 명산 대찰을 찾아 가 수 없는 원혼을 안위하고 또 구가 만년의 운을 빌기로 결심하고 양춘 삼월을 택 하여 많은 비번과 낙랑 공주를 데리고 금강산을 향하고 떠났다.

금강산에서는 왕이 오신다고 중들이 떨어나 길을 닦고 다리를 고치 고왕이 머무르실 방을 수리하고, 또 오랫 동안 지켜 오던 신라 여러 왕의 유물을 감추어 버리기에 바빴다. 그중에도 장안사( 長安寺) 와 표훈사( 表訓寺) 와 정양사(正陽寺)가 더욱 바빴다. 마하연( 摩訶衍) 까 지도왕이 오실는지 모른다 하여 법당과 마당을 깨끗이 치우고 만 폭동( 萬瀑洞) 길을 도로 쌓아 수리하였다.

왕은 가는 곳마다 고을에 들어 민정을 살피고는 반드시 그 고을 큰절에 머물러 치뇌 재를 올렸다. 왕은 특별히 길을 돌아 싯내벌 궁예왕 옛 서울에 들러 보니 불과 이십년에 청초만 나고 썩은 양을 보고 크게 재를 베풀어 궁예왕과 난영과 두 왕자를 위하여 재를 올릴 제 벌판의 어두운 봄밤에 재 올리는 화투 불길이 하늘로 올라 갔다. 옛 서울에 떨어져 살던 늙은 백성들이 모여 들어 서로 옛일을 말하였다.

왕은 싯내벌 하룻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새도록 전전 반측하였다.

왕은 삼방(三房)까지 가서 궁예왕의 무덤을 조상하려 하였으나 아직도 삼 방 골짜기에는 궁예의 유신이 산도적이 되어 웅거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 하의 간함을 들어 삼방까지는 중지하고 바로 금강산으로 들어 가기로 하였다.

길에서 몇 번이나 신라 유민이라는 말 못되게 초췌한 무리를 만났다.

그들은 왕의 행차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뻗디었다. 왕은 좋은 말 로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큰 변은 없이 왕은 장안사(長安寺)에 득달하였다.

금강산에 들어 온 지 사흘만에 왕은 표훈사로 가 정양사의- 347 - 헐 성루( 歇惺樓)에서 만 이천 봉의 전경을 바라보고 다시 표훈사로 내려 와 밤을 쉬었다.

밤에 왕이 표훈사에서 노승을 불러 여러 가지 기사 이적과 노승의 일생 경험 중에서 가장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라 하고, 또 금강산 안에 중이나 속인 중에 이상한 사람을 물었다.

노승은 여러 말을 하던 끝에, 『 이 산중에 무슨 아뢸 만한 일이 있사오리까마는 저 건너 돈도 암( 頓道庵)에 승수자 네 사람이 있사오니, 입산하 온지 오룩 년이 되어도 어디서 온 줄을 알 수 없사오며 일찍 한번도 산에서 내려 온 일이 없 사옵고, 그중에 젊은 승수자 하나이 무슨 일이 있으면 한 달에 한부 번 큰절에 내려 올 뿐이옵고, 혹 사람이 돈도암에 가면 항상 네 사람이 부처님 앞에 모여 앉아 합창하고 예불하는 양을 보다 하오니 외양을 보매 귀한 댁 사람인 듯하오니, 어디서 온 지 또 성씨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사오고, 또 산너머 영원동(靈源洞)에 두 행자(行者) 있사오되 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베옷을 입고 움을 파고 지나오되 사람을 대하여도 말이 없고 산으로 돌아다니며 풀 뿌리와 나무 뿌리를 캐어 먹사오며, 아침 해 뜰 때와 저녁 해 질때면 반드시 저 밝은대(望軍臺) 꼭대기에 섰는 양이 보이나이다. 물어도 대답을 아니하오매, 누구인 줄도 알 수 없사오나, 산 내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 이로소이다.』 하였다.

노승의 말이 끝나매, 왕은 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 말에 가장 놀란 이는 낙랑 공주였다.

낙랑 공주는 지금까지도 백화부인과 계영부인이 반드시 어느 산에 숨어숭이 되었을 것을 믿고 있었다. 신라 왕이 항서를 쓰던 날에 왕후와 태자와 태자비가 밤으로 대궐을 빠져 나가 간 곳을 모른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공주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면 돈도암(頓道庵)에 있다는 이가 그이가 아닌가 하고 공주는 가슴에 찔렸다.

그러면 태자도 어찌되었을까? 태자도 곰의나루에서 죽었다고도 하고아 슬라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죽었다는 소문이 난뒤에 얼마 아니하여 반드시 태자가 어디 살아 잇다는 소문이 난 것을 공주가 안다.

그러므로 아직 아무도 태자의 거처를 아는 이가 없거니와, 공주는 결코 태자가 죽었을 것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영원동에 토글을 파고 사는이가 태자는 아닐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베옷을 입고 산으로 풀 뿌리를 캐러 다니는 양이 공주의 눈에 비치일 때에 공주는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348 - 답답하였다.

그날 밤에 공주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새이기를 기다렸다. 공주는 반월성 대궐 월정교 위에서, 밤에 태자와 만나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까지 이름만 정승 김 부의 부인으로 청승스러운 슬픈 생활을 하여 오는 것도 생각 하였다. 공주의 시비는 벌써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김 부도 그 아이 가공 주의 배에서 나오지 아니한 줄을 아나 세상은 그것이 공주의 낳은 아들 로만 여겼다.

새벽 종소리가 울어난다. 왕도 일어나 법당에 들어 가 아침 예불을 하고 공주도 이날에는 특별히 전신을 냉수로 목욕을 하고 눈같이 하얀 옷을 입고 불전에 엎디어 초췌한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며 태자와 왕후를 위 하여 빌었다.

날이 샌 뒤에 왕은 표훈사의 노승을 불러, 『 돈도 암의 니승을 불러라.』

하였다.

노승은 불러서 올 사람이 아닌 줄을 알았으나, 왕명을 가역하지 못 하여 사람을 보내었다.

이때에 백화부인은 팔목에 염주를 걸고 계영부인과 시월과 함께 손수 산에서 꽃을 파다가 마당에 심고 있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산 꽃나무를 파다가 마당에 심그거 그것이 꽃으로 피어 나는 것을 보기를 즐거워하였다.

이리하여 조그마한 돈도암은 봄에서 가을이 되도록 꽃 속에 묻히어 꿀벌과 나비 소리가 끊일 새가 없었다.

『오늘 첫 꽃이 피었어라.』

하고 누가 아뢰면, 백화 부인은, 『 첫 꽃이 피었나뇨, 어느 나무에?』

하고 곧 나가 보았다.

이날은 돈도암에서 한참 되는 서편 골짜기에서 계영부인과 시월이 전신에 이슬을 묻히면서 어린 목련(木蓮)과 더덕 한 뿌리를 파다가 그것을 심고있었다.

『이것이 목련인가?』

하고 왕후는 어린 목련을 손에 들고, 『 이 것이 자라 꽃 피는 것을 볼까?』

하고 한숨을 지더니, 『 누구나 볼 사람이 있지 아니하랴?』

하고 땅을 파고 기다리는 시월에게 목련을 준다.

- 349 - 호미를 들고 더덕 심을 구덩이를 파던 계영도 허리를 펴 백화 부인을 본다. 백화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진다.

시월과 계영은 들었던 호미를 떨어뜨렸다. 호미가 목현 위에 떨어져 둥그레한 어여쁜 잎사귀 하나를 끊었다.

『내 이리하려 아니하였더니.』

하고 백화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굵은 데로 지은 남복을 입고 흙 묻은 버선을 신고 계영을 바라보며, 『 볼 때마다 눈물겨워라.』 하고 계영의 등을 만진다.

백화부인이 설어하는 양을 보매, 계영부인도 마음이 설었다. 언제는 슬프지 할까 하여 항상 기쁜 모양을 꾸미고 있었으나 백화부인의 눈물을 볼때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울고 싶어도 마음 놓고 울지 못 할신 세이므로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월도 그러하였다.

나라가 망한 것도 슬픈 일이어니와 사랑하는 남편을 이웃에 두고 만나지못하는 것이나 세월이 뜻없이 흘러 가는 것이나 모두 다 슬픈 일이었다.

게다가 친어머니 되는 유렴 부인은 늙고 병들어 인제는 아랫목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믿으려 하나 가슴 속에는 슬픔만 가득 차서 부처님의 은혜도 들어 갈 틈이 없는 듯하였다.

세 사람이 정히 망연히 섰을 때에 수풀 속으로 사람 기척이 나며, 두 사람이 올라 오는 양이 보였다. 세 사람은 얼른 눈물을 씻고 나무 옮기는 일을 시작하였다.

백화부인은 잎 떨어진 목련을 집어 들며, 『 아차 한 잎이 떨어졌구나!』

하고 떨어진 잎사귀를 집어 떨어진 자리에 붙이어 보나 붙지 아니하였다.

『아차!』

하고 계영부인과 시월도 그것을 보았다.

『한번 떨어진 잎은 다시 붙지를 못하는구나!』

하고 백화부인은 창연하였다.

이때에 찬란한 관복을 입은 고려 관인은 마당 끝에 서고, 표훈사 늙은 중이 웃는 얼굴로 합창하고 백화부인 앞에서 며, 『 나무아미타불.』 하며 허리를 굽힌다. 백화 부인도, 『 나무아미타불 』- 350 - 하고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며, 『 노승님 어인 행차이시니이꼬?』 하고 공손히 물었다.

노승은 곁에 선 두 젊은 승에게도 같이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고 두 젊은 승도 합창 답례하고는 심던 나무를 심고 바가지로 물을 떠다가 뿌려 준다.

노승은 다시 백화부인 앞에 허리를 굽히며, 『 대왕 마마께 오서 스님의 덕 높으심을 들으시고 부르라 하시와, 저 기사자를 보내시나이다.』 하고 손을 들어 마당 끝에 선 관인을 가리키었다.

백화부인은 속으로 놀랐으나 놀라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 대왕 마마 시라니, 어느 대왕마마니이꼬?』

하였다.

노승은 놀라는 듯이, 『 천무 이일이요 국무 이왕이라 하였사오니, 이 천하에 대고려국 대왕 마마 한 어른 밖에 또 어느 대왕마마 있사오리이까?』 한다.

백화부인의 두 눈썹이 한번 움직이며, 『 소승이 세상을 잊은지 오래오니 일찍 대신라 상감마마 계오신 줄을 들었거니와, 대고려 대왕마마를 듣지 못하였나이다.』 하였다.

노승은 한번 더 놀라는 빛을 보이고 다시 웃으며, 『 갸륵 하시어라. 어찌하면 신라 망하고 고려 된 줄을 모르시니이꼬? 예전 신라 상감마마께오서는 낙랑 공주 부마 되시와 정승으로 영화를 부리시 옵고, 공주마마께오서는 벌써 두 아드님 낳으시와 어제 국재를 올리 옵실 때에도 두 분 아기 수북 강녕하소서 빌었나이다. 큰 절에가 시오면 낙랑 공주마마도 보실 것이니 어서 가사이다.』 하고, 노승은 묻지도 아니하는 말을 지껄이며 손을 들어 관인을 부른다.

관인이 와서 역시 백화부인에게 허리를 굽힌다. 비록 초솔하게 차렸을망정 부인의 위엄에 눌린 것이다. 부인도 합창하고 허리를 굽혔다.

왕의 사자는 다시 백화부인에게 왕이 부른다는 뜻을 전하고 노승은 이 황송한 어의를 거스리지 말고 곧 가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백화부인은 엄절하게, 『 소승이 세상을 잊고 산에 든 지 오랴거든 고려 대왕마마께서 소승을 알으실 리 마누하고 또 소승도 고려 대왕마마를 알 지 못하오니 부름 심도- 351 - 부질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아뢰소서.』 하였다. 그리고는 볼일 다 보았다는 듯이 몸을 돌려 계영과 시월이 심어놓은 목련 가지를 만져 발로 그 뿌리의 흙을 밟으며, 『 이 나무를 잘못 심지 않았는가? 나무도 처음 만났던 방향대로 심어 야한다거든 남쪽으로 향하였던 것이 북쪽으로 향하면 살지 못한다 하 거든 바로 심었는가?』 하였다.

계영은 웃으며, 『 옛 은 그러하였사오나, 이제는 천운이 변하여 사람들도 남으로 향 하였다가 북으로 고개를 돌려야 영화를 누리고 초목도 그러하다하나이다. 남으로 흐르는 아리나리 물도 북으로 흐른다 아니하나이까? 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세상이오니, 나무도 거꾸로 심었으면 더욱 번성 할줄아오나 아쉬운 마음에 그리는 못하옵고 방향만 돌려 심었나이다.』 하였다.

시월도 웃었다. 그것을 보고 백화부인도 웃었다. 그러나 그 읏음은 무서웠다.

노승과 관인은 서로 돌아 보며, 『 이상한 사람 아니이이꼬?』

『예삿 사람은 아니로다.』

하고 말없이 물러가 버렸다.

그날 저녁때에 돈도암에서는 떡을 만드느라고 절구에 쌀을 빻았다.

오늘은 백화부인의 생신이다. 이날에는 배자가 두껍쇠를 데리고 일 년에다 만 한번 돈도암을 찾아 오는 날이다. 이날 하루를 기다리고 삼백 예순 날을 천년같이 고대하는 것이다.

이날이므로 식전부터 돈도암에서는 방과 마당을 소제하고 우물을 치 고기명을 깨끗이 하고 새 옷을 내어 입고, 꽁꽁 묶어 두었던 맛나는 버섯과 고비와 고사리를 내어 담그고 신선한 산채를 뜯어 오고 봉하여 두었던 꿀 항아리를 내어 놓고 마당에 향토를 펴고, 또 태자와 두껍쇠를 위 하여 굵은 베옷을 새로 다려 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삼월 하순의 반쪽달이 구멍봉(穴望峰)에 비치일 때쯤 하면, 태자는 두껍 쇠를 데리고 어느 길로 어떻게 오는지 모르게 마당에 발자국 소리를 내고, 『 어마 마마!』 하고 부른다.

- 352 - 그러면 안에서는 일제히 일어나, 『 아아 동구마마!』

하고 나와 맞는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 가 절할 데 절하고 울고 이여기하다가 새벽에 숲속에 잡새 소리가 나고 골짜기 물소리 높아갈 때가 되면 태자는 다시 절하고, 『 한 해 지난 뒤에.』 하고는,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어둠 속에 스러져 버린다. 아 번번이 부인이나 계영이나 이번에는 태자를 붙잡고 놓치 아니하리라. 그까지는 못 하더라도 붙들고 실컷 울어라도 보리라 하나, 번번이 그리하지 못 하고 밤은 줄달음을 쳐 이별 때를 당해 버리고 태자가 어둠속에 스러진 뒤에야 산을 향하여 합창하고, 『 동궁 마마! 동궁마마!』 하고 부르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오늘은 근심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고려 왕 왕건이 표훈사에 와 있음을 알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부르는 것을 보니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모를 것이요, 또 왕건이 신하 중에는 예전 신라 사람이 많이 잇을것이니, 그렇다 하면 발각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태자에게 기별 할 수도 없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떡을 찌며 밤이 깊기만 고대 하였다.

아랫목에 앓고 누운 유렴 부인도 번히 눈을 뜨고, 『 오늘이 동궁마마 오시는 날이뇨?』

하였다.

계영부인은,

『오늘이————오늘밤이.』

하고 대답하였다.

부엌으로서는 떡 찌는 구수한 냄새가 들어 오고 물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붓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화부인은 불전에 앉아서 향을 피우고 일년에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하여 또 불쌍한 며느리를 위하여 또 이미자 기를 잊어 버린지 오랜 남편을 위하여, 빌고는 절하고 빌고는 절한다.

딱딱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 부인에 메인 다홍 빛 가사( 袈裟) 가 흔들리는 촛불에 음침한 빛을 발한다.

『구멍봉이 훤하였네.』

하는 시월의 소리가 들린다.

- 353 - 달이 뜨려는 것이다. 이 달 뜨면 태자 온다.

시월이도 인제는 우담화(優曇華)라는 이름을 가지고 백화부인도 이름을 변하여 선광니(善光尼)라 하고 계영부인은 만타라( 蔓陀羅)라는 불명( 佛名)을 가지었으나,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고 식구들만 있을 때에는 옛날 대궐 안에 잇을 때와 같은 칭호를 불렀다.

『달이야 달이야!』

하는 시월의 소리가 나매, 계영부인은 얼른 일어나 창을 열었다. 과연 하얀 조 각 달이 잣나무 가지 사이로 비쭉 올라 오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도해 쓱하고 맑은 달이, 『 달이 떴으니 동궁마마도 오시려니 마당에 불켜라.』 하였다.

백화부인도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떠 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합창 하며, 『 나무 월광보살(月光菩薩)!』

하고 그 빛이 아들의 앞길을 비치기를 빌었다.

시월은 마당 한복판에 있는 둥근 돌등대(石燈臺)에 잘결은 솔깡을 한아름 놓고 불을 질러 놓았다. 잘 마른 솔깡 향기는 발하여 호박 빛 불길을 내었다.

부엌에서 음식 냄새 나는 것을 맡고 다람쥐가 서너 마리 모여 와 시월 의방을 따라 다닌다.

그리고는 늘 하는 법대로 사람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린다. 이것은 태자의 청이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거니와, 태자는 마당에 사람이 있으면 들어 오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방안에 들어 간 뒤에야 모양을 나타낸다.

『어서 들어 오라.』

하여, 시월이까지 방으로 부러 들인 뒤에 마당에서는 솔깡 불만 혼자 타고있었다.

방안에서는 네 사람이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여 태자의 발자국 소리만 기다렸다. 돌을 넘어 떨어지는 시냇 소리는 잠깐 높았다. 또 잠깐 낮아지면 안 부는 듯 부는 바람이 풍경을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를 낸다. 이따금 밤새 소리가 들린다.

x xx x 사자가 돌아 가 왕께 백화부인의 말을 전하니 좌우 제신은 그 무례함을 책 하려 하였으나 왕은 고개를 흔들며,- 354 - 『 천하는 앗을지라도 한 사람의 뜻은 앗지 못하나니, 뜻을 지키는 자를 허물하지 말라.』 하고 도리어 주지승을 불러, 『 매년 돈도암에 백미 오십석을 부치되어 이름 모르는 시주로부터 보낸다하라.』 는 하교를 내렸다.

이날 밤에 낙랑 공주는 자연 심서를 진정지 못하여 홀로 침음 하다가 마침내 두 시녀와 길 인도하는 중 하나를 데리고 은밀히 절에서 나와 등을 들리고 돈도암에서는 마당에 불을 피울 때였다.

공주는 지팡이로 길을 더듬어 우거진 잣나무 숲길로 깎아 세운 듯 한 산비탈을 올라 간다.

『이 어두운데.』

『이 험한 길에.』

하고, 시녀들은 공주가 험한 길을 걷는 것이 황송하여 공주를 붙들었다.

그러나 공주는 이 길이 모든 죄악과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는 해탈( 解脫) 의 정로(正路)와 같이 생각되고 한번 이 길을 올라 가면 다시내려 오지 못할 것 같았다. 서울로 가면 구중 궁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다 무엇이냐/ 색 밖엔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 김 부를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고 또 아들(神劒)의 원수를 갚노라고 왕건의 군사를 빌어 제나라인 후백제를 떨하고 제 혈육의 자식을 혹은 죽이고 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마침내 서도 회한(悔恨)을 이기지 못하여 등에 큰 종기가 나서 죽은진 헌을 생각하거나, 혹은 신라의 혹은 백제의 구신(舊臣)들이 제 나라도 다잊어 버리고 가정 고려에 충신인 체하여 불의의 부귀와 쾌락을 부리는것이나, 그러한 무리 속에 높이 올라 앉은 아버지 왕건이나 모두 우습고 시끄럽고 더러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 이렇게 깨끗한 밤, 이렇게 만고에 한결 같은 물 소리와 바람 소리, 하늘엔 만고에 변함없이 반짝거리는 별, 무슨 생각은 있고도 말은 아니 하는 듯한 늙은 나무와 바위————이러한 것은 홍진 만장의 서울이나 구중 궁궐 속에서는 꿈도 못 꾸던 신기로운 이경이다.

그러한 속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조그마한 등불이 비치는 길을 찾아 두 걸음에 한번 세 걸음에 한번 쉬엄쉬엄 가는 공주 자기의 몸까지도 이 세상을 떠난지 오랜 사람 같았다.

『아아! 제도(濟度)할 수 없는 중생(衆生)!』

하고 공주는 김 부를 생각하였다. 그가 술 취한 얼굴로 허연 수염을- 355 - 너 슬 거리고 공주의 손목을 끌고 음탕한 웃음을 웃던 것을 생각하고 또 자기 몸 대신 김 부의 잠자리를 모시게 하던 시비가 아기를 낳은 뒤로는 도리어 공주에게 시기하는 빛을 보이고 버릇 없어지는 양을 보이던 것을 생각 하였다. 그러나 그 모양도 다 우습고 더러운 것 같았다.

하늘에 별빛이 있었으나 수풀 속은 캄캄하였다. 캄캄한 수풀 속에 한 줄기 등불 빛이 비치어 검은 그림자가 길게 짧게 우물거린다.

얼마를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올라 갓을 때에 눈앞에는 환한 불이 보였다. 공주는, 『 저 어인 불인고?』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도솔암 뜰에 피워 놓은 불이로소이다.』

하고 길 인도하던 중이 읍하고 대답한다. 그 불은 바로 머리 위에 있는듯 하였다. 그러나 그 불이 숨었다 나왔다, 컸다 작았다 하여 좀처럼 가까와 지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공주는 도솔암 마당에 올라 섰다. 솔깡 불빛이 공주의 얼굴과 몸 모양을 비친다.

노승은 가만가만히 암자 앞을 걸어 가, 『 선광 스님! 선광 스님!』

하고 불렀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이 밤에 기다리던 태자는 아니 오고 그 누가와 서 찾는고? 시월은 문고를 잡고 열지는 아니하고, 『 그 누구시뇨?』 하고 대답하였다.

『큰절에서 왔나이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오신고 나아가 여쭈어 보아라.』

하고 백화부인이 시월에게 명한다.

시월이 문을 열고 나선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큰일인나 아니나는가 하고 귀를 기울인다.

시월은 노승을 이상히 바라보고 합창 하며, 『 어 두운 길에 무슨 일로 오시니이꼬?』

하였다.

노승은 웃는 낯으로 합창 하며,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도솔암에 오래 서기 비치옵더니, 오늘밤에 낙랑 공주 이곳에 임 하시이다, 』- 356 - 하였다.

『낙랑 공주?』

하고, 시월은 옛날 서울에서 뵈옵던 것을 생각하고 반가운 듯이 소리를 질렀으나 아까 왕의 사자가 왔던 것을 생각하고 얼른 흥분한 빛을 감추며, 『 아니 낙랑 공주라시니 누구시니이꼬?』 하였다.

노승은 손을 들어 가리키며, 『 저기 왕림하와 계시옵거니와, 금상마마의 따님이시옵고 이전 신라 상감 마마 지금 낙락왕 정승 김 부(樂浪王政丞金傅)마마의 부인이시니이다.

선왕 스님의 덕을 들으시옵고, 밤길을 마다 아니하시옵고 이에 임하시니이다.』

하고 또 합창하고 허리를 굽힌다.

노승이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고 공주는 좌우에 시녀를 세우고 가만가만히 걸어 온다.

시월은 잠깐 공주를 바라보고 방에 들어 가 노승이 말하던 대로, 『 낙랑 공주 이에 임하시다 하나이다.』 하였다.

백화부인이 일어나 나오니 계영도 따라 나온다. 백화부인은 시월과 계영의 부액을 받아 나오며, 『 노신이 산에 들어 온 지 오래매, 천하사를 모르거니와 공주 오신다하오니 아니 나와 맞으랴. 공주 어디 계신고?』 하며 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 선다.

불은 활활 타 오른다.

부인은 공주를 향하고 공주는 부인을 향하여 서로 바라보며 점점 가까이가더니, 공주는 부인의 모양이 신라 왕후와 같음을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한걸음 뒤로 흠칫 물러선다.

부인도 공주를 보고는 아무리 억제하려곤 하면서도 놀라는 빛을 아니 보일 수 없고 계영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곧 태연하게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며, 『 어느 나라 공주시완대, 이 깊은 밤에 이렇게 임하시이니이꼬?

나무아미타불.』

하였다.

그제야 공주도 합창하고 무릎을 땅에 대며, 『 어느 나라 공주도 하지 마옵소서. 나는 죄많은 여인으로 노사( 老師) 의- 357 - 덕을 흠모하여 이곳에 임하였거니와.』 하고 고개를 들어 부인과 계영과 시월을 한번 둘러 보고, 『 노사( 老師) 는 제가 십년 전 신라 서울에서 뫼시던 왕후 아니시니이까?』 하였다.

부인은 웃으며, 『 노신을 왕후라 하시나뇨? 오아후는 아마도 전생의 일인가, 노신은 산에 들어 세상을 잊은 지 오랜 수도승이 로소이다.』 하고 시월을 보고, 『 우담화야, 공주마마를 붙들어 일어나시게 하고, 만타라야 공 주 마마를 모시어 누추하나마 방에 들여 모시라.』 하고 다시 공주를 향 하여, 『 공주 마마 무릎을 꿇으시니 황송하도소이다. 죄많은 소승이 어찌 감당하 리오? 일어나 누추한 방에 드시옵소서.』 하였다.

공주는 시월에게 붙들려 말없이 기운 없이 방으로 끌려 들어 갔다.

공주는 약간 의심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설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줄은 몰랐다. 아무리 세월이 가고 또 머리를 깎고 변복을 하였더라도 왕후와 태자비를 몰라 볼 리가 있으랴? 공주는 정신이 황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에 들어 오는 길로 부처님 앞에 합창하고 엎드려 버렸다.

부처님 앞에 엎드린 공주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의 등이 들 먹거리는 것을 보아 우는 것을 알았다. 백화부인이나 계영부인이나 시월이나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비록 모든 것을 잊고 또 늘기도 한 백화부인이란 처음 낙랑공주를 대 할 때에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요 신라 마지막 왕이던 이를 생각 하여도 마음이 불쾌하고 또 낙랑 공주가 그 남편의 새 아내가 되어 두 아들까지 나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질투하고 생각도 났었다. 그 뿐 아니라 왕건은 신라의 원수가 아니냐? 낙랑공주는 원수의 딸이 아니냐?

왕건은 근 십년을 두고 태자와 왕후의 거처를 수탐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 왕건이 여기서 바로 지척인 표훈사에 와 있지 아니하는가? 만일 왕후와 태자가 여기 있는 줄을 알면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를 것 아니냐? ———— 이러한것도 무슨 흉계가 숨어 있는지 모를 것이다. 더구나 그가 왕건을 따라서 울( 지금은 경주라고 부른다)에 온 것도 왕과 태자를 호리려 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 하면 부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양을 하는 것도 무슨- 358 - 흉계인지 알 수없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백화부인도 생각 하고계 영부인도 생각하였다.

그래서 계영부인은 시월을 밖으로 불러 내어 귓속 마로, 『 동궁 마마, 오시더라도 밖에서 기다리시게 하라. 행여 방으로 들어오시어 왕건의 집에 알리게 말라.』 하였다.

이렇게 마음을 작정하고는 백화부인과 계영부인은 처음에 설레던 마음 도다 가라앉고 냉정하게 공주가 하는 양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공주는 일어났다. 세 번 불전에 합창 배례하고 나서도 이 윽 히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그 부처님은 대궐에 봉안하였던 관음상(觀音像)이다.

신라 국보(新羅國寶)의 하나로 왕후 침전에 봉안하였던 것을 공주는 기억한 다. 한 달 동안이나 거기서 왕후를 모시고 숙식하였으니, 이 관음상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 인자하고도 맑은 얼굴이며 산 사람의 용모는 몰라 볼이만큼 변하였을 망정, 관음상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금빛을 놓고 있다. 공주가 얼굴을 대고 있던 다홍 방석은 눈물에 젖고 그 얼굴에도 눈물이 줄줄이 번쩍거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은 더욱 해쓱하고 맑아서 그 가슴 속에는 티끌만한 흐린 마음도 있을 것 같디 아니하다.

공주는 불전에서 물러나 마치 오래 떠났던 딸이 그 어머니에게 매아 달리는 모양으로 백화부인 옷자락을 잡고 매아 달렸다.

『왕후마마! 나를 속이지 못하시리이다. 저 관음보살님은 분명 경 주 서울서 뵈옵던 용모시니 마마께옵서 이미 삭발 위승하옵시고 용모는 변하셨다 하더라도 한 달동안 자모(慈母)같이 뫼시옵던 낙랑을 곡이지 못하 시리이다.』 하고 운다.

백화부인도 부지 불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과연 그렇게도 애통하는 낙랑공주의 마음에는 한점 죄악의 구름도 머물까 싶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화 부인은, 『 공주 일어나소서. 이몸은 세상을 잊고 산중에서 늙은 죄인이어니 공주 반드시 이몸을 잘못 보신 것인가 하나이다. 무슨 연유로 겨오 신지 모르거니와 진정하소서.』 하였다.

이 말에 동주는 고개를 들어 백화부인을 바라보고 다시 계영을 바라보았다. 계영의 그 꽃같이 아름답던 얼굴이 어떻게나 초췌하였으랴?

공주는 마치 죄 지은 사람이 살려 주기를 비는 사람 모양으로 손을 들어- 359 - 계영 부인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계영부이의 눈에도 눈물은 있었다. 그러나 백화부인이 공주의 손을 잡고아노라 하기까지 자기가 먼저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주의 손을 뿌리치고 옛 정과 피차의 신세를 생각하여 돌아 서서 울었다.

낙랑 공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주는 하릴없이 일어나 백화 부인을 보며, 『 나를 모르신다 함도 마땅하도소이다.』 하고 한번 하직하는 절을 하고 시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면서도 다시금 백화·계영 두 부인을 돌아 보고 또 관음상을 돌아보았다.

백화부인은 문까지 따라 나가며, 『 이러한 누추한 곳에 귀하신 손님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나이다.』

하고 냉랭하게 인사하였다.

공주는 혼잣말로, 『 나도 이 옷을 벗고 머리를 깎고 노사를 따를까?』

하고 혼잣말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마당에 피인 솔깡 불은 기월이가 새로 놓은 관솔이 새로 타오른다.

공주는 그 빛에 늙은 잣나무 뒤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는 것을 보였다. 태자는 두껍쇠와 같이 돈도암으로 오다가 시월의 손짓을 보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확 피어 오른 불빛이 자기의 낯을 비치 임을까 달을 때에 태자는 얼른 몸을 나무 그늘로 숨겨 버렸다.

바로 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 서려던 공주는 태자를 번쩍보았다. 그 헙 수룩한 머리와 섬거적인가 의심하는 옷! 그러나 공주는 그것이 태자인 줄을 알고 놀라는 빛으로 우뚝 섰다.

<내 허깨비를 본가?>

하고 공주는 다시 태자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시니이꼬?』

하고 시녀 하나가 공주의 보는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는 손을 들어 가리키며, 『 분명 저 잣나무 그늘에 사람의 얼굴을 보았건마는 다시 보니 없소라.

분명 보았거든 없소라!』

하고 공주는 그리로 향하고 간다.

『불빛에 허깨비를 보심이 아닌가?』

하고 한 시녀가 뒤를 따른다.

- 360 - 백화 부인과 계영부인은 가만히 서서 공주이 하는 양을 본다.

공주는 서너 걸음이나 태자있던 곳을 향하고 가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며, 『 동궁 마마! 동궁마마! 돌아 가셨다 하더니 혼이 계셔 내 눈에 보이신가?

혼이라 하더라도 어찌 한번만 보이신가?』

하고 합창하고 바라본다.

『이 무삼 말씀이시니이꼬? 깊은 산, 깊은 빰에 어느 동궁마마 겨 시료 가사이다.』

하고 시녀가 공주를 붙들어 일으키려 한다.

공주는 몸을 흔들며, 『 나를 두고 너희들은 가라! 나는 이곳에 머물러 돌아 가지 아니하리라.

둥궁마마 살아 겨오시거든 혼이라도 다시 뵈울 때까지 나는 돌아 가지아니 하리이다. 나도 머리를 깎고 굵은 베옷을 입으리라 ———너희는 가라.

가서 아바마마께 그 연우를 아뢰어라.』

하였다.

두 시녀는 공주의 말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때에 잣나무 그늘로서는 태자가 나타났다. 그 초췌한 얼굴로 ———— 이세상 사람 같지 아니한 얼굴로 가만가만히 나타났다.

공주는 두 팔을 들고 태자를 바라보았으나 태자는 공주를 잠깐 바라보고, 백화 부인 앞으로 나아가 말없이 무릎을 꿇어 절하고 그러한 뒤에 다시 낙랑공주 앞으로 와서, 『 낙랑 공주 아니시뇨?』 하고 물었다.

공주는 다만, 『 동궁 마마!』

하고 말이 막혔다.

태자는 이윽히 낙랑 공주를 바라보더니, 『 모두 한바탕 꿈이던가 ————꿈이라면 그리고 원한 깊은 꿈이로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공주는 태자를 우러러 보고 다만 느껴 울었다. 그러나 태자의 눈에는 눈물도 없었다.

『열 두번이나 돌아 가셨다는 동궁마마를 오늘 뵈오니 생시인가 꿈인가 혼령이신가?』

하는 공주의 말에 태자는,- 361 - 『 열 두 번 죽으려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내 몸이 부끄러워라. 가슴에 굳게 맺힌 원한이 내 목숨을 붙들어 죽지고 못하게 하고 살지도 못 하게하고 반은 죽고 반은 살아 반은 사람 모양으로 반은 귀신 모양으로 낮이면 숨고 밤이면 나와 다니노라. 죽지 못해 사는 신세는 나를 두고 이르는말…… 그런데 낙랑공주는————낙랑부인이라던가 ————어디로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이리로 오신고? 크게 길을 잘못 들었쎄라.』 하니 공주는 태자를 우러러 보며, 『 날더러 길을 잘못 들었다 하신난고? 십년 동안 헤매고 찼던 길을 오늘이야 찾았다고 하소서. 분명 동궁마마는 살아 계시었던가? 진실로 이 것이 금강산 깊은 밤의 꿈은 아니었던가? 살아 계시가하소서 ———— 곰의 나루와 아슬라성에서 활을 맞아 돌아 가신 것은 아니라 하소서. 이것이 꿈이 아니라 하소서————꿈이 아니라 오랜 꿈이 깨었다하소서.』 태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지 며, 『 깰 수 있는 열은 꿈일진대 그 아니 다행이랴. 천만겁(千萬劫)에 깨져못 할 슬픈 꿈이니 그것이 설워라. 사람으로 세상에 살자 하니 사람이 부끄럽고, 죽어서 황천에 가자 한들 무슨 낯으로 선왕(先王)을 대하리.

엉거주춤하고 죽도 살도 못하여 산에 숨어 있으나 초목이 부끄럽고 말못하는 바위와 흘러 가는 물이 부끄럽고 날고 기은 새 짐승이 부끄러워라.』 하고 눈물을 흘린다.

『가엾으시어라! 인생을 모두 한바탕 꿈으로 아실진댄, 어이하여 수도 성불( 修道成佛) 하실 뜻을 두지 아니하시난고?』 하는 공주의 말에 태자는, 『 수도 성불! 수도 성불이라는 하시나뇨? 하늘에 사무친 원한과 뼈마디 마디마다 감긴 원한이 나를 지옥으로 끌어 들이거든 성불을 바라리. 비록 석가모니 불이 몸소 나를 끌어 극낙으로 가자 하시더라도 나는 아니가리라. 이 슬픔과 이 원한을 품고는 차라리 땅 속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가 숨는 무엇이 되리라 ————안 가리라 안 가리라.』 하고 머리를 흔든다.

『어이하여 그런 말씀을 하는고? 나라 망한 것이 동궁 탓이 아니어든 어이 그리 원한이 깊으신고? 그리 생각을 마라 잊으라! 잊으라! 우리 다 잊지 아니하려나뇨?』 하고 백화부인이 태자의 곁으로 걸어 와 그 어깨에 손을 없는다.

- 362 - 『 잊을까? 잊어질까?』

하고 태자는 고개를 숙인다.

『잊으소서 안 잊은들 어이하리?』

하고 계영도 태자의 곁으로 온다.

『동궁마마! 이 모든 원한이 이몸의 아바마마 탓이라 하면 이몸으로 그 죄를 지지는 못하리이까? 이몸이 지옥도(地獄道)에 떨어지거나 축생도( 畜生道)에 떨어지거나 동궁마마의 슬픔과 원한을 풀지 못하리이까?

그러할 도리는 없사오리이까?』

하고, 공주는 합창한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그 손에 대어 정례( 頂禮) 를 한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모두 눈물이 있었다.

솔깡 불은 그믈그믈한다.

시월은 사람들 뒤에서 두껍쇠의 어깨에 매어 달려 울고 있고 두껍 쇠는 태자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린다.

낙랑 공주를 따라 왔던 시녀들과 노승은 영문을 모르고 대여섯 걸음 뒤에 떨고 섰다.

달은 높이 올라 오고 시냇물 소리는 점점 높아 가는데 돈도암 마당에서는 사람들의 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새벽이 되었는가? 아래 큰절에 쇠북 소리 우렁차게 들린다.

태자는,

『일어나라!』

하고 공주를 붙들어 일으키었다.

이튿날 아침에 공주는 벌써 구름 같은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베옷을 입은 승이 되었다. 공주에게 대한 모든 오해는 풀리어 백화부인은 공주를 붙들고 울었다.

『이몸을 딸과 같이 일생을 곁에 뫼시게 하소서.』

하는 공주의 청을 백화부인은 여러 번 물리쳤으나 마침내 허락하였다.

표훈사에서는 안과 밖의 발깍 뒤집혔다.

『공주 어디 가신고?』

하고 횃불을 들고 사방으로 두루 찾았으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공주 어디 계신지 아무리 찾아도 가신 곳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총섭(總攝) 노승이 왕께 아뢸 때에 왕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왕은 낙랑 공주를 위하여 근래에 심히 슬퍼하게 되었다. 오직 왕업을- 363 - 위 하여 사랑하는 딸의 일생을 희생하여 버린 것이 왕이 더욱 늙을수록, 낙랑 공주의 슬픔이 더욱 클수록 뉘우쳐지었다.

신라에 다녀 온 뒤로 공주가 얼마나 태자를 그리워하였고 또 김부에게 시집을 보낼 때에 얼마나 공주가 슬퍼한 것을 왕은 다 안다. 그러나 왕은 신라 왕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자기도 신라 왕의 질녀를 왕후로 맺는 것 이 왕업을 이루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첫째로 공주를 신라왕에게 시집 보내고, 둘째로 내조의 공이 많은 유씨 왕후의 슬퍼함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김시를 맞아 아들을 나았다. 본래 기승하던 유씨 부인도 그 때문에 성병하여 원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마는 신라 백성의 마음을 사려면 고려 왕실에 신라 왕실의 피를 흘려 넣는 것을 필요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왕업은 이루었거니와, 유씨 부인의 원혼과 낙랑 공주의 슬픔은 무엇으로 위로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왕이 늙어가고 눈이 어두워지고 귀도 멀어지고 몸이 전과 같이 기운차지 못하게 되매, 인생의 무상(無常)한 것을 점점 깨닫고 천축승(天竺僧)의 설법을 들으매, 그 마음은 더욱 괴로와졌다.

왕은 가끔, 『 흥, 왕업은 다 무엇이고? 모두 흘러 가는 물과 같고 떠 가는 구름과 같지 아니한가? 있을 때에 있는 듯하여도, 다시 보면 없지 아니한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천하를 다 내 마음대로 할 지존(至尊)의 지위에 있다는 것도 다 헛꿈이 아니냐? 어두워가는 눈, 멀어가는 귀, 쇠하여가는 몸을 어찌하지 못하고, 딸 낙랑 공주의 한번 깨어진 기쁨을 다시 어찌할 수 없지 아니하냐? 몇 만 사람의 다시 못 올 청춘과 다시 얻지 못할 생명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기쁨을 희생하고, 이 왕업인고? 한번 숙어지면 패한 궁예나 흉한 왕건이나 모두 한 줌 흙이 아닌가? 게다가 만일 이생에서 지은 업이 내생의 과보( 果報) 로 돌아 온다 하면, 수십만의 생명을 죽이고 수백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기는 어찌될 것인고? 이러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할 때에 왕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옛날의 왕위도 다 내어 던지고 삼계 중생( 三界衆生)을 제도(濟度)하기로 대원을 세운 석가모니 불의 자비뿐이다. 그래서 절을 세우고 그래서 금강산에를 왔다.

그러나 공주에게는 기쁨이 없었고, 왕에게도 마음의 평안함이 없었다.

도리어 낮에는 눈에 피 오른 신라 태자의 독한 비수가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고, 밤이면 삼십년 병전(兵戰)에 죽은 사졸(士卒)과 신라의 충혼들 이 어둠을 타고 모여 드는 듯하였다. 베옷 입은 중들이 코를 골고 자는 양을 볼 때에 황포 입은 왕은 알 수없는 무서움에 밤을 새운 것이다.

- 364 - 『 공주는 어디 간고?』

하고 늙은 왕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었다. 그때에 어떤 중이 들어 와, 『 밤이 깊은 뒤에 돈도암 길로 등불 하나 올라 가는 것을 보았사오나.』 하고 아뢰었다.

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왕은 돈도암으로 사람을 보내려 할 때에 공주를 모시고 갔던 중이 돌아와서 어젯밤 공주를 모시고 돈도암에 갔던 일과 돈도암에서 생긴 여러 가지 일을 허둥지둥 동이 닿지 않게 아뢰었다. 왕은 그 중을 가까이 불러, 『 그 베옷 입고 머리 헙수룩한 사람은 누구더뇨?』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석이(石耳) 따는 사람들이 가끔 만난다는 영 원동( 靈源洞) 벙어리 처사(處士)인 듯하오나, 말이 청산 유수 같음을 보매 벙어리는 아닌 듯하 오나, 누구인지 알 수 없사오며, 공주마마께서오서는 그 사람을 동궁 마마라고 부르시오나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사오며, 또 돈도암에 있는 승들도 혹은 왕후마마라 하옵고 혹은 아니라 하옵고 갈피를 잡을 수 없 사오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꿈속만 같고 미친 것도 같사옵고 아마 소승이 미친가 하나이다.』 하고 땅에 엎드린다.

『공주는 어디 계신고?』

하고 왕은 다시 물었다.

『공주마마께옵서는……』

하고 중은 흩어진 정신을 모으는 듯이 한참 주저 하다가, 『 공 주 마마께 오 서는 돈도암에 계오신 듯하나, 또 안 계신 듯도 하나이다.』 하고 중얼거린다.

『그 무슨 말인고?』

하고 왕은 놀라는 듯이 어성을 높인다.

『소승이 꼭 길목을 지키고 있었사오니 어디로 아니 가신 것은 분명하오나 방안을 들여다 뵈옵든지 나와 다니시는 양을 뵈옵든지 머리 있는 이는 한 분도 아니 계시오니, 소승이 잠깐 꼬빡 조는 동안에 어디로 가신 것은 아닌가? 모두 꿈 같사와 갈피를 잡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왕은 마침내 참지 못 하여, 『 몸소 돈도암애 가리다.』

- 365 - 하고 말을 내렸다.

좌우는 간지(諫止)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왕은 시종을 데리고 중으로 길을 인도케 하고 절에 쓰는 조그마한 연을 타고 돈도암으로 향하였다.

신하들은 왕의 몸을 근신하여 은밀히 군사를 풀어 왕의 눈에 띄지아니하도록 먼저 돈도암으로 보내어 숲에 숨어서 왕을 호위하게 하였다.

왕의 연이 돈도암 가까이 임하였을 때는 태자와 두껍쇠가 길을 떠나려고 마당에 나와 서서 앓는 유렴 부인을 제하고는 개로 머리를 깎은 공주까지도 뜰에 나와 이별을 아낄 때였다.

태자는 공주에게 이상한 사람들이 영원동에 움을 묻고 산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듣고, 인제는 영원동을 버리고 비루봉을 넘어 다른 골짜기에 숨을 생각을 하였다.

『어디로 가든지 해마다 날 하루는 와 뵈오리이다.』

하고, 백화부인께 하직하고 물러나려 할 때에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고 섰을 때에, 수풀 속으로서 문득 사람의 소리 들리며 왕의 연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놀랐다.

태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그럴 것이 없음을 생각하고 허리에 숨긴 단도 자루에 손을 대었다. 그 칼은 아무 때나 한번 쏠 듯 하여 시퍼렇게 갈아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다.

<오늘은 쓸까? 왕건을 찌를까?>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태자의 머리로 지나간다.

태자의 눈치를 엿보던 두껍쇠도 손에 들었던 마가목 지팡이를 꼭 쥐었다.

태자의 입에서 한 소리만 떨어지면 태자의 칼이 가기도 전에 두껍 쇠의 몽둥이가 늙은 왕을 후려 갈길 것이다.

연에 앉은 왕은 뜰에 모여 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연에서 내려 섰다.

낙랑 공주는 그 앞으로 달려 가서 꿇어 앉으며, 『 아바마마!』

하고 불렀다.

왕은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옷을 입고 합창하고 앞에 꿇어 앉은 낙랑공주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눈에 눈물이 고이며, 『 이 어인 일고? 뉘 이리하라 하더니꼬? 네 분명 낙랑 공주뇨?』 하고 추연한 빛을 보였다.

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 딸이 머리를 깎고 먹을 들인 옷을 입는 것이 무삼 그리 노라운 일이 리 이 꼬? 일천년 옛 나라의 왕후마마와 동궁마마도 저 모양이시어든.』 - 366 - 하고 백화부인과 태자를 향하여 한번 합창한다.

『왕후마마? 동궁마마?』

하고 왕은 눈물 들어 백화부인과 태자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모두 외면 한다.

태자는 또 한번 칼자루를 만지었다. 그러나 왕의 늙은 눈엔 눈물이 번쩍 거리는 것을 볼 때에 칼자루를 잡은 태자의 손은 스르르 힘이 풀려 버렸다.

왕도 돈도암과 영원동 「벙어리 처사」말을 들을 때에 혹시나 하는 의심이 없지 아니하였지마는「설마」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그것이 사실인 것을 알았다. 왕은 한번 더 왕후와 동궁을 바라보았다. 비록 십여 년이 지나고, 모양과 복색은 뱐하였다 하더라도 옛 모습을 차장 볼 수가 있는 듯도 하였다.

『그러면 태자 살았던가?』

하고 왕은 혼잣말로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동궁마마께오서는 죽으려 하여도 죽지 못하고 살려 하여도 살지못하여, 반은 사람으로 반은 귀신으로 하늘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사람을 꺼리고 초목 금수도 꺼리고 흐르는 물까지 꺼리면서 돌아다니 신다하나이다.』 하고 공주가 아뢰었다.

왕은 공주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이윽히 침음하더니 태자의 겉으로 걸어 갔다. 왕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태자는 또 한번 칼자루를 쥐었다.

왕이 앞에 다다라도 태자는 돌로 깍은 사람과 같이 가만히 서 있었다.

왕은 눈물 고인 눈으로 태자를 바라보며, 『 태자는 나에게 원한이 있나뇨?』

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원한이 있노라. 내 머리카락 올올이 왕건을 원망하는 원한으로 떠는것을 못 보나뇨?』

하고 태자는 왕건을 노려 보았다.

『원한이 있거든 원한을 풀라.』

하고 왕건은 한걸음 더 가까이 태자의 앞으로 갔다.

태자는 오른손에 서리 같은 칼을 빼어 들었다 —————『 이 칼을 품은 지 십년에 오늘이야 나의 원수, 나라의 원수를 만났도다.

그러나 왕건을 이 칼로 찌르는 것만으로 이 원한을 풀 것 같지 아니하니 어찌하 랴.』

- 367 - 하고 칼을 왕건의 가슴에 겨누었다.

이 광경을 보고 수풀 속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고함을 치고 대들었다.

두껍쇠는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왕은 손을 들어 태자를 향하고 모여 드는 군사를 제지 하며, 『 태자는 마음대로 원한을 풀라! 아무도 태자를 막을 자 없으리라.』 하고 태연히 태자를 바라보았다.

백화부인은 태자의 팔을 잡으며, 『 살생을 말라, 살생을 말라.』

하고 낙랑 공주는 태자의 앞에 엎드려 합장하고 태자를 우러러 보며, 『 동궁 마마 그 칼로 나를 죽이소서.』 하고 울었다.

태자는 말없이 손에 들었던 칼을 땅에 던지고 두껍쇠를 보며, 『 가자 모든 일이 끝났도다! 원한도 다 끝났도다!』 하고 수풀 속으로 들어 간다.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공주가 허둥지둥 태자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시녀들이 붙든다. 공주는 소리를 내어 운다. 백화부인도 울고 계영부인도 운다.

왕은 태자의 간 뒤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 이 모든 슬픔이 다 나로 하여 생김인가?』

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윽고 한 골짜기 건너 편 바윗등에 태자의 손 든 모양이 보이며, 『 잘 있으라! 나는 가노라!』

하는 소리가 울려 온다.

사람들은 일제 히, 『 동궁 마마!』

하고 불렀으나 다시는 대답이 없고 태자의 모양도 어디 간 줄을 몰랐다.

그 후에 가끔 산 뫼타는 사람들이 혹은 불정대(佛頂臺)에서 태자의 모양을 보았다 하고, 혹은 일출봉(日出峰)에서 보았다 하고, 혹은 삼성동( 三聖洞)에서 보았다 하나 알지 못하였다.

삼성동에는 지금도 태자의 무덤이 있어 해마다 산 뫼 타는 사람들 이정성으로 벌초를 하고 「벙어리 처사」있던 곳을 웃대궐 터 아랫대궐 터라 하여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다.

(一九二六年五月十日~一九二七年一月九日 《東亞日報》所載)- 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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