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방에서, 『 선종아.』 하고 스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선종은 칼을 지에 꽂아 벽장에 집어 넣고 스님 방으로 들어 갔다.
스님은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깬 모양이다, 이빨이다 빠지어서 옴쏙 들어 간 입을 오물거리면서, 『 나 냉수.』
하고 뼈만 남은 소나뭇가지 같은 팔을 내어 두른다.
선종은 얼른 바가지를 들고 법당 뒤로 뛰어 가 오탁수(鳥琢水)의 찬 냉수를 떠다 드렸다. 스님은 욕심나는 듯이 두어 모금을 마시니 그만 기운이 부치어 베개 위에 쓰러지며 꿍꿍 앓는 소리를 한다. 선종은 꿇어 앉아 스님의 베개를 바로 잡어 드리고 걸레를 갖다가 엎지러진 물을 씻었다. 스님의 허연 수염 끝에는 물방울이 맺히어 번쩍번쩍하였다.
『선종아.』
하고 스님은 눈도 아니 뜨고 부른다.
- 86 - 『 네.』
스님은 입만 우물거리고 대답이 없다.
선종은 스님의 수염 끝에 물방울을 씻고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세상은 점점 떠들어 세달사 젊은 중들도 경 공부와 염불에 뜻이 없고 모여 앉으면 어디는 누가 몇 백명 군사를 가지고 웅거해 있고, 어디는 누구와 누구와 싸와서 누가 이기어 한 골을 차지하고, 어디 누구는 본디중으로서 몇 천명 군사의 두령이 되어 술과 고기와 젊은 계집 속에 묻히어있고, 또 서울서는 대궐 안에 호랑이가 들어 와 관등을 하고, 대가리 셋 가진 아이가 나고, 또 군사를 모집하는데 사뭇 녹(祿)이 많고…… 이러한 소리를 늘 하게 되고 가끔 중에 한두 명씩 사중(寺中)에 있는 재물을 훔치어 가지고 달아나는 중도 있고 부처님의 이마빼기에 박힌 구슬을 빼다가 벌을 받아서 소경이 되었다는 중도 있었다. 늙은 중들은 여러 가 지엄한 훈계와 무서운 말로 젊은 중들을 위협하였으나 젊은 중들은 글은 체도 아니하고 팔매치기, 담 뛰어 넘기, 몽둥이 두르기, 달음질 하기로 일을 삼고, 마음들이 이렇게 됨을 따라 어디서 들어 오는지 모르나 술과 고 기도 가끔 절에 들어 와 얼굴이 벌겋고 비틀 걸음 치는 중이 가끔 보이게 되었다.
『댓골(竹州) 기헌(箕萱)의 군사가 세달사를 치러 온다.』
하는 소문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중들은 바람에 나뭇잎만 부시럭거려도 깊은 꿈을 깨어 징 북을 울리며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기헌이라면 이 근방에서는 어린애들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디서는 물 길러 가는 젊은 아낙네가 기헌의 푸른 수건을 동인 군사에게 붙들려 가고, 어느 골 태수(太守)가 기헌과 싸와 죽고……이러한 소리며 기헌은 힘의 장사요 세실 담을 넘어 뛰고 활을 잘 쏘고 칼을 두르면 몸이 공중에 솟아올라 삼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잘 때에도 한 눈을 감으면 한 눈을 뜨고 그 눈을 감으면 다른 눈을 뜨고 몸에는 비늘이 돋고, 집에는 열 두 첩을 두고 날마다 새 처녀를 갈아대고……이러한 여러 가지 말이 들렸다.
젊은 중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재미 절반 무서움 절반으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마을에 재 올리러 갔다 올 때마다 새 이야기가 하나씩 둘씩 늘었다.
『선종 시님 안 가 보오?』
하고 시종을 빈정대는 중도 있었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선종의 마음은 누를 수 없이 움직였다. 선종은 하루에도 몇 번 씩 칼을 빼어 보고 활 줄을 켕기어 보았다. 활 줄을 한번- 87 - 튀겨 통! 하고 울 때에 선종의 피는 끓는 듯하였다.
그러나 선종은 괴로왔다. 어려서 자기를 길러 준「어머니」를 버리고 또십 육년 동안 길러 준 은인인 늙고 병든 허담 스님을 버리고 떠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아, 나는 전생에 죄 많은 놈이다.』
하고 선종은 손길을 비틀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큰일을 하는 자는 일에 얽매일 수가 없다. 이때야말로 어머니 의원 통한 원수를 갚고 도탄에 든 창생을 건지어 한번 대장부의 뜻을 필 때가 아니냐? 가거라 선종아! 목탁을 집어 던지고 칼을 들고 나가거라.』 하고, 밤중에 일어나 선종은 혼자 말하고 활과 칼을 내어 메고 차고, 병으로 곤하게 자는 스님의 방 앞에 꿇어 엎드려 합창하고, 『 스님! 스님!』 하고 속으로 두어 번 부를 때에 눈물이 떨어지었다. 선종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스님의 종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스님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이윽히 듣다가, 『 스님 나는 가요. 부디 왕생 극락(往生極樂)하시어. 나무 아미타불.』 하고 한번 더 합창하고 다시금 뒤를 보며 암자문을 나섰다.
크나큰 세달사 즐비한 가람(伽藍)은 으스름한 달빛속에 조는데 법당에 장명 등만 반짝반짝 영구한 세상의 어둠을 비친다. 선종은 법당을 향 하여 한번 절하고 합창하고 스님의 복을 빌고 절 문을 나왔다. 바람에 몰리는 구름이 달을 향하고 끊임 없이 달아난다.
선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물가에 나와 거닐었다. 자갯돌 위로 흘러 가는 물은 늦은 가을 빛을 받아 금빛으로 번쩍거리며 여울 여 울 소리를 낸다. 달은 바로 댓재(竹嶺)에 걸려 강 건너편에는 산 그림자가 먹 빛과 같은데 댓재 중턱에는 양길(梁吉)의 군사가 밤 파수로 피우는 불이 반딧불 모양으로 여기 저기 반짝거린다.
이따금 돌아 가는 기러기 소리와 함께 찬 바람이 휘 지나가며 강언덕에 허 옇게 마른 멧갈 포기를 흔들어 우수수 소리를 낸다. 선종의 거니는 발이지 나갈 때마다 벌레 소리가 뚝 끊지고 저편 기헌(箕萱)의 군막( 軍幕)에서 늦도록 질탕하게 노니는 풍악 소리가 들린다. 강가로 길게 늘어 선 군사들의 장막에서는 아무 빛도 아무 소리도 아니 나고 이따금 잠 옷 이루어 나와 거니는 군사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보일 뿐이다.
<벌써 역 온 지 일년이 되었다>
- 88 - 하고 선종은 기러기 소리에 끌려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하늘에는 잘 자리를 찾지 못한 기러기 한때가 들입 자로 진을 지어 남으로 피곤한 날개를 친다. 달은 더욱 더욱 하늘에 닿은 듯한 댓재 마루 터기에 허덕거리며 올라 간다. 이때에 뒤에서, 『 궁예( 弓裔)인가?』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선종은 선종이라는 중의 이름을 버리고 기헌의 휘하에 온 때부터 궁예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하였다.
『아, 자네들인가 ——— 웬일로 아직도 자지 않고 나와 다니나.』
하고 궁예는 두 사람을 보고 손을 들었다. 그 두 사람은 원 회( 元會) 와신훤( 申煊)이다. 원회와 신훤은 지난 봄 상벌 싸움에 궁예가 큰 고을 새운 때부터 궁예를 사모하였다. 더구나 궁예가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의 공을 남에게로 돌리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더욱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들 중에는 궁예를 따르려 하는이가 많고 기헌의 인망이 떨어질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아무리 하여도 큰일은 다 틀렸으니 무슨 끝장을 내어야 아니하겠나?』
하고 원회가 궁예의 소매를 끌어 사람을 꺼리는 듯이 늙은 버드나무 그늘로 간다.
『끝장을 어떻게 내나?』
하고 궁예는 원회와 신훤의 버쩍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원회는 지혜가 많고 신훤은 용맹이 있었다. 두사람은 산중에서 공부도 같이 하였고 이태 전 기헌의 휘하에 올때에도 같이 왔고 주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피를 마시고 서로 맹약힌 사람이다.
원회는 한번 사방을 돌아 보아 인적이 없음을 살핀 뒤에, 『 자, 이 사람이 아무리 해도 큰일은 못할 사람이 아닌가. 지 금도 우리들이 한참이나 이 사람과 다투었지만 그만 주색에 빠지어서 헤어 날줄을 모르네그려. 내일은 양길과 대접전을 할 텐데 밤새도록 저 모양이요, 군사들에게는 소 한 마리 술 한동이 이렇다는 말이 없으니 군사들이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지금군사들 중에는 수군거리는 자도있는 모양이니 만일 이때에 일을 바로 잡지 아니하면 우리들까지도 이 사람 한가지로 군사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일을 하려면이 기회에 무슨 끝장을 내어야 한단 말일쎄. 그런데…….』 하고 운회가 더 말하려는 것을 신훤이 참지 못하는 듯이 가로 막고, 『 여러 말할 것 있나, 그녀석을 해내고 자네가 우리 두목이 되란 말일쎄.
그녀석 해내는 것은 내 담당함세. 또 삼천명 군사도 자네라면 다 따를- 89 - 것이요, 또 우리들의 말이라면 안 들을 이가 없네. 첫째 그녀석을 두고야 백서의 원망에 견딜 수가 있나. 오늘도 남의 청혼해 놓은 처녀를 빼앗어다가 지금 저 지랄이니 자 어찔 텐가 단마디로 끝장을 내소!』 하고 궁예의 곁에 바싹 대든다.
원회·신훤 두 사람이 궁예를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궁예는 고개를 흔들고, 『 그것은 물의일쎄. 우리가 우리 윗사람에게 불의를 하면 우리 아랫사람이 우리에게 또 물의를 할 것일쎄. 하니까 우리 힘껏 간하여서 하 회를 보세.』 하고 눌러 왔었다. 그리고 원회와 신훤 두 사람은 틈 있을 때마다 기헌을 간하였다. 그러나 기헌의 하는 일은 점점 더 악하여질 뿐이요, 조금도 고칠줄을 몰랐다.
『이 천하에 나를 당할 놈이 있느냐? 있거든 나오너라. 내가 하려면 사흘 안에 서울을 내 손안에 넣을 것이다. 하하.』
이 모양으로 뽐내기만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참 오천명이라고 일컫던 군사 중에서 이천명이나 더러는 싸와 죽고 더러는 달아나고 인제는 군사라고 삼천명 밖에 아니 남았다. 양길이 대리고 온 군사 중에는 기헌의 군사 이었던 군사가 반이나 되고 그 군사들은 대개 기헌을 원망하는, 무슨 원통한 것을 품은 사람들이다.
지난 일년 동안에 사오차나 큰 싸움이 있었다. 그때마다 궁예는 목숨을 내놓고 싸와서 큰 공을 세웠다.
『궁예가 아니더면 이번 싸움에는 함몰을 당할 뻔하였다.』
하고 모든 군사들도 다 말하였다. 그러나 기헌은 싸움에 이긴 것이 다 자기의 모략과 용기라고만 말하고 궁예와 다른 장졸들에게는 위로하는 말한 마디도 하는 일이 없었다 본래는 그렇지 안히더니 점점 교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궁예에게 대하여서는 일종의 미움을 가지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몰랐다가 차차 궁예가 활을 잘 쏘고 칼을 잘 쓰는 것을 볼때에 그것이 십 육년간 전 수리재 위에서 자기의 활과 칼을 빼앗던 애꾸 놈인 것을 알게 된 때문이다. 그는 하루는 조용히 궁예을 불러, 『 자네를 나를 모르나?』 하고 물었다. 궁예도 그제야 기헌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그 모습이 낯 익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윽히 있다가, 『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저 수리 재서…… 』 하고 말을 끊었다. 그때부터 기헌은 궁예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 90 - 그리고 싸움이 나면 궁예를 항상 선봉으로 내어 보냈다. 첫째는 궁예 가어서 죽기를 바란 것이요, 둘째는 궁예가 싸움에 이기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충성으로 기헌을 섬겼다. 궁예는 백의 국선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윗사람에게는 수종하라, 아랫 사람을 아끼라. 이것이 병가( 兵家) 의 첫째 가는 요결이니라.』
하고 백의 국선은 여러 번 선종과 소허를 가르치었다.
『한번 누구에게 몸을 허하였거든 죽기까지 그에게 충성되라. 오직 만민( 萬民) 이 도탄(塗炭)에 든 때에만 대의(大義)의 칼을 들지니, 이 것은 탕( 湯)· 무( 武) 의 일이어니와 저마다 할 바 아니니라.』 이러한 말도 여러 번 백의 국선에게 들었다. 궁예는 이말도 그대로 실행 하려 하였다. 진실로 궁예는 이름만 고친 것이 아니요, ㅁ 맘도 고치어지어 선종으로 잇을 때와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선종은 큰 뜻을 품게 된 것이요, 큰 뜻을 이루는데는 백의 국선의 가르침대로 하여야 할것을 깨달은 것이다. 선종이 기헌 아래 온 지 일년동안에 사오차나 큰 싸움을 치르고 나서는 자기의 힘이 켤코 남에게 뒤지지 안함을 깨달았고 또 삼전 군사와 댓골 인민의 맘 이 자기에게 돌아 온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이 산속 조그마한 골은 궁예에게는 너무 작은 것이었다. 다만 여기서 좀더 힘을 기르고 자기의 이름을 높여 더 큰일을 도모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할 때에 원회와 신훤은 기헌을 없이하고 자기더러 두령이 되라고 조른것이다.
셋 함은 여전히 늙은 버드나무 그늘에 걸터 앉았다. 달이 점점 산 머리로 기어 내려 올수록 파란 빛이 세 사라마의 검은 갑옷 가슴을 비치고 볕 에그을 은 얼굴을 비친다. 발에 흐르는 강물을 더욱 빛을 내고 더욱 소리를 높이는 듯하였다.
원회와 신훤이 아무리 권하여도 궁예는 오직 인된다는 뜻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그러나 달빛을 받어 번쩍번쩍하는 궁예의 눈에는 이상하게 강한 광채가 난다.
이때에 푸르륵하는 소리가 나며 난데 없는 화살한 대가 달빛에 번뜩이며 강을 건너 와 세 사람은 놀라서 고개를 들어 화살이 온 곳을 바라보았다.
산 그늘에 어두운 강 건너편에서는 마치, 『 내가 쏘았다.』
하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빨간 등불이 서너 번 흔들리고는 꺼진다.
원회는 일어나 모래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그것은 칠한 대에 장끼- 91 - 깃으로 꼬리를 사고 은같이 반짝거리는 날카로운 장끼 깃으로 꼬리를 삼고 은같이 반짝거리는 날카로운 살촉을 일부러 끝을 종이로 싸서 박은 것인데 꼬리에는 편지 한 장이 달렸다. 원회는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보기를 꺼려두 사람이 서 있는 버드나무 그늘로 들어 왔다.
세 사람은 고개를 모으고 달빛에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 피봉에는, 『弓裔將軍幕下』라고 쓰고 속에는, 『弓裔元會申煊三位將軍鑑』이라는 허 두 로, 『高白隱聲華隱聞白矣』 하는 이 두 체로, 『 높으신 성화는 익히 들었사오되 뵈온 일 없사옴을 한하오며, 비인( 鄙人) 이 감히 군사를 일으킴은 기울어진 나라를 안태케 하옵고 도탄에든 창생을 건지오려 하옵기 밖에는 다른 뜻이 없사온지라. 이제 기헌이 이름을 보국 안민(輔國安民)에 빌어 민생을 학(虐)함이 그칠 바를 알지못하오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같이 노하는 배라 이에 비인이 천의와 민심을 받아 응징(膺懲)의 군사를 거느려 이곳에 이르렀사옵거니와, 그 윽 히 생각 하옵건대 세 분 장군은 의리가 하늘에 닿고 용맹이 천하를 덮으신 지라한 가지로 큰일을 같이 하기를 바랄지언정 서로 시 석지간( 矢石之間)에 뵈 옵 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원컨대 세 분 장군은 비인의 미 충( 微衷)을 헤아리 옵소서. 회음(回音)을 기대(企待)하오며 밝는 날에 존가( 尊駕) 를진문( 陣門)에서 봉요(奉邀)하올까 하나이다.
북원 대장군 양길 국궁(北原大將軍梁吉鞠躬) 이라 하였다.
다 보고 나서 원회와 신훤은 궁예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서 원회의 손에 들린 양길의 편지는 펄렁 거렸다.
건너편 어둠 속에서는 또 등불이 서너 번 번쩍거렸다. 그것이 마치 회답 보내는 활을 그리로 향하고 쏘라는 듯 하였다.
원회는 궁예의 팔을 끌며, 『 자, 어찌할 텐가?』
하고 대답을 졸랐다.
『자, 어찌할 텐가? 이 편지를 도로 쏘아 보낼 텐가, 백지 답장을 보낼텐가?』
하고 신훤도 곁에서 졸랐다.
아직도 기헌의 진막에서는 이따금 북소리가 둥둥 울려 온다. 강가에- 92 - 늘어선 장막들은 비낀 달빛에 비치어 내일 싸움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군사들은 양길과 싸와 이기지 못할 줄을 알므로 싸움 형편을 보아 얼른 항복하여 버리든지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 동료 중에 양길의 군사가 된 군사들은 가끔 행인 편에 기별을 보내어 기헌을 버리고 양길군 앞으로 오라고 권하였다. 내일 싸움은 같지 아니할 것을 군사들도 잘알므로 도리어 걱정 없이 잠들을 잤다. 궁예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일 년 동안 섬기던 기헌을 버리고 양길의 앞으로 달아가는 것이 맘에 심히 괴로 왔다.
『어찌할까?』
원회와 신훤은 당정에 기헌을 죽이고 삼천 군사를 거느려 양길의 앞으로가 기를 권하였다. 양길은 기헌보다 다섯 갑절이나 되는 땅과 군사를 가지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며 인재를 존중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궁예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궁예는 여전히 안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어찌할 텐가?』
하고 원회는 성난 듯이 벌떡 일어난다. 신훤도 일어난다. 두 사람의 투구에 은 장식이 번쩍하고 빛을 발한다.
궁예는 원회의 손에 들었던 양길의 편지를 빼앗아 돌돌 말았다. 원 회와 신 훤은 이 사람이 어찌하려는고 하고 가만히 보고 있다.
궁예는,
『나도 내일 싸움에는 이길 기약이 없는 줄을 아네, 또 기헌이 오래 같 이일 못할 사람인 줄도 아네, 그렇지마는 적장(敵將)의 이간( 離間) 하는 글발을 보고 제 임금을 버리고 몰래 직장을 따르는 것은 나는 못 할 일일 쎄.』 하고 화살 한대를 쑥 떼어 그 끝에 양길의 꼬기꼬기한 편지를 달아 잔뜩 활을 밟아 강 건너 등불 이른거리는곳을 향하여 탕하고 쏘아 버렸다. 살은푸륵 소리도 내는 듯 마는 듯 달빛에 잠깐 번쩍하고는 어 둠 속애 사라지고말았다. 궁예가 살 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과연 또 등불이 두 번 번쩍하고는하고는 다시 아무 기척이 없었다.
원회와 신훤은 일변 무안하고 일변 분하여 궁예를 버리고 버들 그늘에서나 섰다. 궁예는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 가는 등을 바라보며, 『 만일 자네가 이 강을 건너 양길에게 간다 하면 나는 이 활로 자네들은 등을 쏠 것일쎄. 자네네가 만일 내친구여든 밝는 아침에 같이 싸워 죽 어의로운 귀신이 되세.』 하고 껄껄 웃었다.
- 93 - 두 사람은 멈칫 서서 고개를 한번 돌리고는 가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평명에 기헌의 진중에서는 싸움을 재촉하는 뜽 나팔 소리와 징 북 소리가 울었다. 아직 만데 사람이 자세히 보이지 아니하고 하늘에는 숨다 남은 별이 여기 저기 반짝반짝할 때에 군사들은 일어나 밥을 먹고 창을 들고 활을 메고 열을 지어 나섰다.
기헌은 찬란한 도독(都督)의 복색에 황금으로 집에 쌍룡을 아로새긴 긴 칼을 차고 은 굴레 백달마에 높이 앉아 반열 지어 늘어선 삼천 군사를 한번 돌아 보고, 『 오늘 싸움에 이기면 북원(北原)은 우리 것이요, 북원의 금 은 보배 는다 너희 것이다.』 하고 군사들을 장려하였다. 기헌이 말 위에 앉은 풍채는 과연 당당하여 영웅 호걸의 풍채가 있어서 기헌의 말이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군사들의 고개가 자연 숙였다.
그러나 오늘 싸움에 좌익장(左翼將)이 될 원회와 우익장(右翼將)이 될신훤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두루 찾아도 나오지 아니하며 기헌은 크게 노하여, 『 누구나 원회·신훤 두 놈을 잡는 자면 양길을 잡는 자와 같이 크게상을 주리라.』 하고 영을 내렸다.
군사들은 원회와 신훤이 없어진 것을 보고 기운이 떨어지었다. 그러나 궁예의 말 탄 모양이 보일 때에 풀렸던 다리에 힘이 오르는 듯하였다.
궁예의 맘은 괴로왔다. 일생에 큰 뜻이 오늘 하루 싸움에 물 거품같이 스러지는 듯하여 슬펐다. 그러나 나가 싸우자, 싸와서 양길을 잡거니못하거든 죽자 하고 궁예의 뜻은 굳게 정하였다. 원회와 신훤을 잡으라는 영을 내린 기헌은 자못 낙담이 되었다. 삼천 군사가 다 자기를 배반 하더라도 원회·신훤은 자기와 사생을 같이 하기로 믿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도리어 자기가 믿지 않고 미워하던 궁예는 끝까지 남아 있고 믿던두 사람이 달아 나는 것을 볼 때에 기헌은 감개 무량하였다. 기헌은 앞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궁예 자네만 믿네.』
하는 기헌의 목소리는 떨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궁예는 눈을 들어 기원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어제까지 보이던 교만 무례한 빛도 다 없어지고 그 패기 있던 눈에는 궁예의 맘을 깊이 감동 시켰다.
- 94 - 이 때에 강 건너 편에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오고 아침 안개가 바람결에 잠깐 걷힐 때마다 잎 떨어진 나무 숲 사이로 거뭇거뭇 사람들이 뛰아 내려 오는 모양이 보인다. 이편에서도 북을 울리고 군사를 몰아 물을 건너게 하였다. 살이 한 대 두 대 이 편에 와 떨어지어 말이 놀래어 앞발을 들고, 이편 살도 푸륵푸륵 저편을 향하고 날아 갔다. 싸움은 열린 것이다.
군사들은 기운차게 허리까지나 오라 오는 물을 절벅절벅 건너고 말들도 고개를 번쩍 들고 물바래를 쳤다. 군사들이 물을 건너는 동안에도 저편화 살이 푸륵푸륵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지나가고 물에도 떨어졌다. 찬물에 아랫 도리가 젖고 화살 소리가 푸륵거리는 것이 들리매, 군사들의 맘에는 싸우고 싶은 기운이 발하였다.
양길은 천명쯤 되는 군사를 데리고 본진에 머물러 있어서 높게 지어 놓은 망대 위에서 바라본다. 저편에서는 망대를 향하고 활을 쏘는 모양이나 아직 살은 거기까지 미치지 아니하였다. 커단 북을 가죽이 터져라 하고 두드리니 새벽 안개 끼인 산천이 덜덜 떨려 운다. 기헌의 군사가 불을 거의 다 건넌 때에 매부리라는 봉우리에는 아침 해의 붉은 빛이 피를 묻힌 듯이 비치이고 골짜기에 끼인 안개가 뭉글뭉글 용솟음치기 시작하였다.
양길의 군사 있는 편에는 안개가 더욱 깊어 보이고 그 안개가 매부리에 비치인 햇빛을 받아 철색이다가 연빛이 다가 은빛이다가 자주 빛이 다가 금빛으로 변하고 뭉게 뭉게 피어 오르는 안개 봉우리가 어떤 것은 불길이 타오르는 듯이 환하였다. 기헌의 군사들은 그것을 바라보고, 「와!」하고 함성을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맨 앞에서 말을 달리는 궁예의 투구와 갑옷 뒷장식에 햇빛이 번득거려 불 같은 빛을 발할 때에 군사들은 또, 「와!」하고 함성을 지르고 궁예의 뒤를 따랐다. 밤 이슬에 젖은 땅에서는 먼지 하나 일이지 아니하고 다만 마른 풀과 늦게 핀 흰 국화 송이들이 말 발굽에 놀래어 고개를 흔들었다.
궁예는 샛강(아까 건너 온 데보다는 좀 작은 강이다)언덕에 발을 세웠다.
거기는 굼틀굼틀 물결같이 된 사람의 키 하나만한 긴 언덕이 있었다.
궁예를 따르는 군사들은 이 언덕에 몸을 감추고 매복하였다.
양길 편의 불소리가 더욱 가까와지고 화살 푸륵거리는 소리가 더욱 많아진다. 불붙은 안개 속으로서는 점점 화살이 수없이 이편을 향하고 날아온다. 궁예가 몸을 기울여 피한 살 하나가 바로 궁예 뒤에 섰던 군사의 가슴을 뚫고 꼬리를 떨었다. 그 군사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내어 뿜을 때에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활을 당기었다. 이편에서 쏘는 살은 깃 단 꼬리를 떨며 저편 안개 속으로 들어 가 스러졌다. 「툭」하고 활줄 튀기는- 95 - 소리 푸르륵하고 살 나가는 소리, 살에 놀래어 말 우는 소리가 여울 여울 흘러 가는 강물 소리와 어우러져 처량한 광경을 이룬다.
붉은 해가 산머리에서 갑자기 뛰어 올랐다. 천지는 갑자기 환하여지고 댓 재 골목골목에 뭉글거리던 안개들도 점점 스러지기를 시작하여 숨었던 작은 봉우리도 고개를 내어 놓고 잎 떨린 나무들도 우뚝 나서게 되었다.
이따금 안개가 휘 지나가면 불그레한 땅에 까만 군사들이 미리로 향 하고 움직이는 양이 보였다. 그러할 때에는 일제히 그리로 향하고 화살을 몰아 넣었다. 그러나 그담에 안개가 터진 때에는 그 곳에는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군사들은 활에 살을 메어 든 채로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건너편에 안개가 터지어 사람들의 모양이 번쩍 보이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번뜻 보일 때에는 「툭」「씨르륵」하고 이천 활이; 일제히 운다.
해는 높이 올라 와서 군사들은 이마에는 구슬 땀이 맺히었다. 공중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지나가건마는 땅위에는 아직도 더운 김이 남은듯 하였다.
양길과 궁예는 여러 가지 진형을 바꾸었다. 그러할 때마다 군사들은 물결과 같은 혹은 오른편으로 혹은 왼편으로 우르르 밀렸다. 그리고 나서는 또 한바탕 화살 소리가 쏟아지고 많은 군사들은 혹은 가슴에서 혹은 이마에서 핏줄기를 뿜고 넘어졌다. 넘어진 지 오랜 군사의 송장에는 벌써 개미가 까맣게 붙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군사들은 그것을 돌아 볼 새가 없고 오직 저편에 번득 거리는 적군의 가슴을 겨누기에만 바빴다.
궁예는 이 모양만으로 싸움 끝나기 어려운 줄을 깨달았다. 애초에 궁예의 생각에는 양길의 군사가 밀어 들어 오도록 유인하여 샛강과 큰강 새 벌판에 몰아 넣고 싸우려는 계책였으나 양길은 군사들은 나무 사이에 숨겨 놓고 용이하게 움직이지 아니하여 도리어 성급한 궁예를 산 밑으로 끌어 들인 뒤에 좌우 복병으로 일시에 엄살하려는 계책이었었다. 더구나 궁예 의군 략을 잘 아는 원희와 신훤은 결코 군사를 벌판으로 내몰지 말기를 양길에게 말하였다.
『군사가 벌판에만 나가면 궁예 혼잣손에 다 죽어 버리오.』
원희는 이렇게 양길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양길은 군사를 몇 십 걸음 앞으로 내몰았다가는 다시 징을 치어 뒤로 물리고 이리하여 궁예의 분통을 간 지렸다. 궁예는 맟ㅁ내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손에 빼었던 칼이 피에 목 마른 듯하고 탄 말은 앞발을 들고 길게 울었다. 궁예는 작의 칼이 족 히 양길의 군사를 대적하여 소리개가 병아리 떼를 쫓듯이 대번에 대재로 넘겨- 96 - 쫓고 그 바람으로 뒷벌(北原)깢 무인지경 같이 들이칠 것 같았다. 궁예의 눈앞에는 자기의 칼 바람에 쫓기는 병아리 떼 같은 양길의 군사들이 발 이 땅에 붙지 못하고 달아나는 양이 보인다.
다른 군사들도 양길의 군사가 고양이 무서워하는 쥐 모양으로 들락날락하 기만 하고 기운차게 대들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애초에 집어 먹었던 겁도 다 없어지고 도리어 자기 하나가 저편 열을 당할 듯싶었다.
『뒷벌에 있는 금은 보화는 다 너희들의 것이다!』
하던 기헌 장군의 말을 생각하고 그들도 궁예와 같은 맘을 가진다.
이때에 양길의 진중에서는 소와 돼지를 잡는 소리가 들려 오고, 또낮밥을 짓는 연기가 나무 사이로 한가롭게 올라 간다. 군사들의 눈앞에는 김나는 밥과 냄새 좋은 고깃국과 등이 동이 넘치는 술이 번뜻 보이고 입에 침이 돈다. 저편의 밥 짓는 연기는 더욱 많이 뭉게 뭉게 올라 간다.
양길의 군사는 길다란 줄을 지어 이편을 향하고 고함을 치며 달려 들어온다. 이편에서는 일제히 그 군사를 향하고 활을 쏘았다. 저편을 향 하고 날아가는 화살의 떼는 마치 수없는 귀뚜라미 떼와 같이 햇빛을 가리었다.
그때에 저편에서는 다시 큰 고함 소리가 나고는 뽀얀 안개를 일으키고 군사들은 도로 물러 들어 갔다.
궁예는 칼을 머리 위에 높이 들었다. 칼날에는 햇빛이 비치어 서너 줄기 무지개 날 때에 나아가라는 영기(令旗)가 여기저기서 풀렁거리고 백여 개 큰 북이 일시에 쾅쾅 울었다. 궁예의 말이 물바래를 치고 샛강을 건너 갈 때울었다. 궁예의 말이 물바래를 치고 샛강을 건너 갈 때에 군사들도 절벅 절벅하고 물에 들어 섰다.
궁예의 군사들도 연기 나는 양길의 진중을 향하여 달려 간다. 세 걸음에 한번씩 네 걸음에 한번씩 활을 쏘며 물결같이 몰려 들어 간다. 창검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군사가 지나간 뒤에는 먼지 구름이 높이 피어 롤라 마치 회리바람 지나가는 자취와 같다.
양길 편의 화살은 소나기 모양으로 쏟아졌다. 군사들은 붉은 피를 뿜고 번뜻 번뜻 나자빠지나 그것을 돌아 볼새도 없어서 군사들이 저 앞에 까맣게 나아간 뒤에 빈 발판에 쓰러진 군사들이 팔다라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마지막 괴로움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두둥둥 북소리가 나고는, 「 와 으아!」하는 무서운 소리가 난다. 군사들의 눈에는 사도 없고, 들도 없는듯 하였고 오직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과 밥과 동이 동이 철철 넘는 술과 이기는 기쁨이 보일 뿐이었다.
궁예의 군사가 양길의 진에 가까이 오매, 양길의 군사도 활을 버리고- 97 - 칼과 창만 가지고 달려 나왔다. 이 나무 숲에서 한떼, 저 나무숲에서 한 떼, 왼 편으로 한떼, 오른편으로 한떼, 미처 눈코를 뜰 새가 없이 벌떼같이 달려 나왔다. 양진의 북은 일제히 울고 깃발을 일제히 흔들었다. 두 편 군사는 서로 찌르고 찔리고 결코 틀고 무서운 단병 접전을 하였다. 경각간에 죽은사, 상한 자가 너저분히 마른 풀 위에 깔렸다.
양길의 군사는 궁예를 피하여 궁예 없는 데로만 도망해 다니며 싸왔다.
그러나 동으로 궁예를 피하면 동에 궁예가 있고, 서로 궁예를 피하면 서에 궁예가 있었다. 흰 무지개 푸른 무지개 번뜻거리는 곳에는 모두 궁예가 있다. 칼을 들어 궁예를 치려고 하면 벌써 궁예는 없어지고 흰 무지개 푸른 무지개와 같은 궁예가 두르는 칼빛 뿐이었다. 두르는 칼빛이 궁예의 몸을 싸서 실촉 하나 들어 가 박힐 곳이 없는 듯하였다.
양길은 숲속에서 가만히 양편 군사가 싸우는 양과 궁예의 재주를 엿보고있다. 곁에 섰는 사람들을 보고, 『 과연 명장이다!』
하고 수없이 칭찬하였다.
궁예가 이리로 치고 저리로 달리고 하는 바람에 양길의 군사는 소리개에게 쫓긴 병아리 떼 모양으로 이리로 몰리고 저리로 몰리어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 감출 곳을 못 찾는 듯하였다.
마침내 양길의 군사는 쫓기기를 시작하였다. 창을 던지고 칼을 던지고 나무 뿌리 돌 뿌리 거더채여 엎더지며 자빠지며 도망을 하고, 궁예의 군사는 더욱 기를 내어 소리를 지르고 따라 간다. 쫓겨 가던 양길의 군사가 나무 틈에 숨어서 쏘는 살이 가끔 궁예의 군중에 떨어지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그것도 없어지고 양길의 군사는 숲속과 골짜기 속으로 들어 가 없어지고 말았다.
궁예는 더 따라 가는 것이 옳지 못한 줄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군사를 거두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벌써 양길의 진 쳤던 자리에 지어 놓은 국과 밥을 먹기에 겨를이 없고 동이와 독에 담긴 술을 냉수 마시듯 굴떡굴떡 마시고 있었다.
숲속으로서 가끔 양길의 군사의 쏘는 살이 날아 오건마는 먹고 마시기에 바쁜 군사들은 몸을 비틀비틀하고 살을 피할 뿐이요, 활을 들어 마주 쏠 생각도 아니하였다. 어떤 군사는 입에 밥과 고기를 한입 잔뜩 물고 씹으면서 살에 맞아 죽고, 어떤 군사는 사발에 듬뿍 담은 술을 반 쯤 마시다가 거꾸러졌다.
궁예는 하릴없이 병아리 떼를 지키는 큰닭 모양으로 먼 발치에 말을- 98 - 세우고 양길의 군사가 도로 스치어 내려을 것을 조심하였다. 그러나 양길의 군사가 도로 몰아 오는 형적은 없고 잠깐 싸움이 끝난 틈을 타서 놀라서 피난 하였던 새들이 하나씩 둘씩 나뭇 가지로 돌아 오고 풀속에서도 잠자코 숨어 있던 벌레들이 조심조심 울기를 시작한다.
어떤 군사는 한손에 밥 바가지를 들고 한손에 술 뚝배기를 들고 비틀 걸음으로 창 맞어 칼 맞아 넘어진 군사들 틈으로 돌아 다니며 아직 목숨 이 불어 있는 친구를 찾아, 『 먹어라 먹어!』 하고 밥과 술을 권한다. 한두 모금을 마시는 이도 있고, 먹고 싶은 듯이 고개만 들먹들먹하다가 도로 쓰러지는 이도 있다. 죽노라고 끙끙 하는 소리도 승전과 주식의 기쁨에 떠드는 소리에 들릴락말락한다.
그러나 군사들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숲속에서는, 「와!」하는 소리 가나고 수없는 북을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 가지에 앉았던 새들은 다시 놀라서 갈 곳을 몰라 헤매고 벌레들도 소리를 그치었다.
궁예는 군사를 시켜 기를 두르고 북을 울렸다. 취해 놀던 군사들도 칼 과활을 들고 일어났으나 비틀비틀 몸을 거두지 모하였다.
순식간에 무서운 다병 접전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즐겁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자리는 벌겋게 피로 젖었다. 밥가마·국솥·술동이를 들어 적군을 향하고 내어 던지면 그것이 혹은 칼 끝에 혹은 창 끝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고 땅에 떨어지어 깨어지고 그중에 어떤 군사는 끓는 국을 뒤집어 쓰고 거꾸러졌다.
창보다도 칼보다도 궁예의 군사를 이롭게 한 것은 돌팔매다. 여기저기 붉은 점 박힌 도낏날 같은 차돌은 날아 오는 대로 군사의 골을 바수고 양미간을 뚫고 코를 떼었다.
찌르고 찍고 엎더지고 자빠지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고 서로 붙들고 결코 틀고 사오던 술 취한 궁예의 군사는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고 두르는 칼과 창이 모두 헛손질 되기가 쉬웠다.
마침내 궁예 편 군사는 뛰기를 시작하였다. 열병 앓는 사람 모양으로 겅둥겅둥 몇 십 걸음은 뛰다가는 따라 가는 양길의 군사에게 붙들려 소리도 없이 픽픽 쓰러지었다. 넓은 벌판에는 창을 끌고 칼을 뒤로 두르며 달아나는 궁예의 군사로 뒤덮인 듯하였다. 구름 같은 먼지 속에 가끔 불길 모양으로 번쩍번쩍하는 것은 양길의 군사의 두르는 칼과 그 칼에 맞아 내 뿜 는 기헌의 군사의 피다.
오직 궁예만이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피흐르는 칼 하나로- 99 - 사방으로 에워 싸는 수백 명 군사를 대적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사방에 보이는 것이 오직 양길의 군사 뿐이요, 자기의 군사는 그림자도 없는 것을 깨 달았다.
『항복할까, 도망할까, 죽을까?』
하고 궁예는 잠깐 주저하였다.
『응, 싸워서 죽자.』
하고 손에는 다시 칼을 들어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살을 막으며 양길의 군사 속으로 스치어 들어 갔다.
그러나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양길의 화살에 궁예의 말은 가슴을 맞아 한번 높이 뛰고 땅에 거꾸러졌다. 궁예는 곧 땅에서 뛰어 일어나 칼을 바로잡았으나 왼편다리가 삐어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하여 얼마를 싸우다가 궁예는 그만 땅에 거꾸러지어 일어나지못하고 오직 눈만 부릅떠 양길의 군사들을 노려 보았다. 양길의 군사들은 땅에 엎더진 궁예가 무서워 감히 가까이 들어 오지를 못하였다. 곁에 거꾸러진 궁예의 말은 괴로운 듯이 입으로 땅을 파고 기운 없이 발을 버둥 거리 더니 그 고개를 번쩍 들어 불 같은 눈으로 궁예를 한번 바라보고는 머리로 한번 땅을 치고는 죽어 버린다.
궁예는 죽는 말을 보고 손에 든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보고 그러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궁예의 가슴 속에는 패전의 부끄러움과 일생의 큰 뜻이 물거품이 된 슬픔과 분함이 불길같이 타올랐다. 궁예는 자기 손에 든 칼로 자기의 목을 베려고 몸을 움직거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왼편 다리가 분지러지는 듯하고 전신이 아뜩하여 칼 든 찰을 바로 끌어 올 수가 없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양길의 군사 중에 기운차게 생긴 놈 하나가 달려들어 손에 들었던 쇠방망이로 궁예의 머리를 때렸다. 딱하는 소리와 아울러 궁예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이때에 기헌(箕萱)은 망대에 올라 서 자기는 군사가 양길 편 군사를 따라 들어 가는 양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부으라 하여 마시고, 이번에는 궁예가 승전을 하면 궁예로 장군을 삼는다고 말하고 원희와 신 훤의 목을 잘라 오거든 높이 달아 모든 군사로 징계한다 하여 큰말뚝 두 개를 높은 위에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는 한 손을 들어 벌을 가리고 서쪽만 바라보며 이제나 저 제나 승전 하였다는 기별을 가진 군사가 쌍쌍이 말을 달려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기별 가진 군사는 오지 아니하고 흉물스러운 까마귀 떼만 망대 곁에 있는 느릅나무 가지에서 까옥까옥하였다.
- 100 - 『 에그머니 까마귀가 왜 울어.』
하고 기헌이 가장 사랑하는 첩 돌넷집이 양미간을 찡기었다.
기헌도 그 까마귀 소리가 심히 듣기 싫었다. 마치 그 소리가 가슴속에까지 울려 들어 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기헌은 돌넷집을 보고 웃으며, 『 응 원희놈의 모가지를 뜯어 먹으려고 그리는 게지.』 하였다.
돌넷집은 기헌이 웃는 빛을 보고 자기도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돌넷 집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까마귀는 더욱 까옥거린다. 서편에는 무서운 단병 접전이 일어나는듯 하여 먼지 구름이 떠오르고 재우치는 북소리가 멀리 둥둥 울려 온다.
군사들은 모두 높은 데 올라 고개를 늘여서 바라보았다.
『다시 싸움이 일었는데.』
『저 먼지가 로 가까와지지 않나?』
하고 군사들은 손길을 이마에 대어 별을 가리고 숨소리도 없이 노랗게 일어나는 먼지 구름을 바라보았다. 가끔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일 때에 그것은 칼빛 창빛인 듯하였다.
백성들은 몰래 부녀들과 아이들을 성 밖으로 피난시키고 가끔 와서 동정만 살폈다.
만일 이편이 쫓겨 오는 눈치만 보이면 들고 뛰자는 것이다. 기헌은 군사를 시켜 골목 골목 파수를 보게 하고 피난 가거나 도망 가는 백성은 죽인다고 위협을 하였다. 어머니들은 젖먹이를 안고 젖을 먹이면서 밖에서 바싹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 그럴 때마다 젖먹이가 놀래이 울면 어머니는 손이나 젖으로 우는 아이의 입을 막았다. 성내는 조용하다.
『아이 저놈의 까마귀가.』
하고 돌넷집은 한번 더 까마귀들이 모여 앉은 느릅나무 가지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한 곳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공연히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흉한 소리를 내면 까마귀들이 운다.
기헌은 마침내 활을 당기어 퉁하고 까마귀 앉은 자리를 향하고 쏘았다.
그 화살에 까마귀 하나가 맞아 너풀너풀하고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것을 볼 때에 기헌은 얼굴을 찌푸리고 돌넷집은 진저리를 쳤다. 다른 까마귀들은 놀래어 다 달아나 버렸다.
『암만해도 저 먼지가 가까와지는 걸.』
하고 바라보던 군사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헌도 점점 몸을 이리저리 로 움직이고 여러 번 손으로 눈을 비비었다. 역시 먼지 구름은- 101 - 점점 이쪽으로 가까이 들리는 듯하였다. 기헌은 낯빛이 자주 변하는 것을 보고 돌넷집은 해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었다.
기헌은 마침내 발로 망대 마루를 한번 구르고 기를 들어 남아 있던 군사들에게 싸움 준비를 명하였다. 북소리와 똥나팔 소리가 울리며 백성들은 서로 마주 보고 말이 없었다. 군사들은 말과 창검을 들고 나섰다.
서쪽에 보이던 먼지 구름은 점점 가까와져서 저기 수없는 무지 갯발 이보이지 것은 분명 군사들이 샛강을 건너는 표다.
기헌은 칼끈을 한번 졸라 매고 말을 대령하라 하였다. 돌넷집은 망대에 사내려 가려는 기헌의 손에 매어 달려서 울었다.
『왜 울어!』
하고 기헌은 돌넷집을 뿌리쳤다. 돌넷집은 마룻 바닥에 쓰러지었다가 다시 무르팍 절음으로 기헌의 갑옷 자락에 매어 달려, 『 나는 어찌하오? 나가지 마오!』 하고 끌었다.
기헌은 잠깐 달아 보고 멈칫하더니 허리에 찼던 칼을 빼어 울고 매어 달린 돌넷집의 하얗고 가느란 목을 찍어 버렸다. 돌넷집의 목에서 내뿜는피는 기헌의 온 몸을 적시고 기헌의 갑옷 자락을 잡았던 돌넷집의 손은 기운 없이 스르르 풀리었다.
기헌은 군사더러 강을 건너 마주 나가 싸우라는 영을 내리고 자기의 군막( 軍幕)에 들어 갔다. 그 속에 십여 명 젊고 아름다운 처첩과 젖먹이 어린 애 사오인이 입술이 파랗게 떨고 있다가 피묻은 기헌이 뛰어 들어오는 양을 보고 모두 정신을 잃고 일어섰다.
기헌은 여러 처첩들과 어린것들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 너희들은 다 가고 싶은 데로 가서 잘 살아라.』
하고 피묻은 칼을 던지고 덥적덥적 기는 어린 아이를 한팔에 하나씩 안고이 윽 히 물끄러미 들여다 본 뒤에 아이들은 다시 내려 놓고 땅바닥에 버렸던 칼을 집어 들고 뛰어 나왔다.
군사들은 강가에 늘어 섰다. 그러나 아무도 물을 건느려는 생각은 없었다. 기헌은 평생에 사랑하는 백달마에 높이 앉아 「나를 따르라 」 하고 칼을 비껴 들고 말을 몰아 물을 건넜다. 기헌의 뒤를 따라 몇 백명 군사도 물에 들어 갔으나 다른 군사들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물 속에서 머뭇머뭇 하였다.
기헌은 몇 걸음 달려 나가다가 뒤에 아무도 따름이 없는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다시 강 언덕으로 달려 다시 강 너덕으로 달려 왔다.
- 102 - 군사들은 기헌이 달려 오는 것을 보고 뒤물러가 버린다. 기헌은 강 언덕에 말을 세우고 몇 마디 외치는 모양이었으나 사람과 말이 물 속에서 절벅 거리는 소리에 잘들리지도 아니하였다. 그러하는 동안에 「아!」하고 고함 소리와 함께 화살이 소나기같이 기헌을 싸고 떨어지고 더러는 도망 해 달아나는 기헌의 군사의 등에 꽂히었다.
기헌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구름같이 밀려 오는 양길의 군사 속으로 달려갔다. 기헌의 백달마는 네 굽을 높이 솟아 소리를 치고 달려 갈 때에 네 구름 기둥을 일으키고 공중으로 솟아 오르는 듯하였다. 이 서슬에 몰려오던 기헌의 군사들은 다시 돌아 서서 양길의 군사 편을 향하고 싸왔다. 그러나 반 남아 죽고 반남아 상하고 반남아 술취한 패군지졸은 저마다 제 몸 하나도 잘 거두지 못하고 얼빠진 사람들 모양으로 비틀거리고 껑둥거릴 뿐이었다.
기헌은 쾌하여 쫓겨 오는 자기의 군사의 꼴을 볼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듯 하였다. 그래도 옛정을 못 잊어 자기를 보고 발꿈치를 돌려 다시 싸 와주는 것만이 눈물이 나도록 가상하였다.
『궁예, 궁예, 궁예!』
하고 기헌은 불렀다.
『죽었소.』
하고 어떤 군사가 대답하였다.
『궁예가 죽었어?』
하고 기헌은 앞이 캄캄하여지는 듯하였다.
기헌은 양길의 군사 아파에 말을 세우고, 『 나는 죽주 장군(竹州將軍) 기헌이다. 너희 두목(頭目) 양길과 자웅을 결단 할 터이니 양길이 나오너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기헌의 위풍에 양길의 군사들도 멈칫하였다. 저 뒤에 따라 오던 양길은 좌우가 만류하는 것도 아니 듣고, 『 아무리 대적이기로 장군을 대하는 예의가 그렇지 아니하다. 내 몸소 나아가 기헌과 자웅을 결단할 터이니 너희는 보고만 있으되 내가 싸와 죽기전에는 아무도 나를 돕지 말라.』 고 분부하고 쇠를 쳐서 군사들을 수십 보 뒤로 물린 뒤에 양길은 검은 말위에 높이 앉아 단기(單騎)로 기헌을 향하고 나와, 『 내가 북원 장군(北原將軍) 양길이다. 나라이 어지러우매 너 같은 좀도둑이 험한 것을 믿고 이곳에 웅거하여 백성을 도탄에 들게 하니 네 죄를 네가 알 것이라. 내 싸울 일을 즐겨 아니하고 또 너 같은 좀도독과- 103 - 겨루기를 부끄러워하거니와, 창생을 위하여 너를 잡으러 온 것이니 네 만일네 죄를 뉘우치고 곧 말을 내려 항복하면 네 목숨을 보전하려니와, 그렇지아니하거든 곧 나와 내 칼을 받으라. 나의 칼이 불의에게는 용서 함이 없나니라.』 하였다.
양길의 말에 기헌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을 채쳐 양길을 향하고 달려 돌며, 『 요 놈 좀도독놈이 어른을 몰라 보고……간계를 써서 원희와 신훤을 꾀어가고…… 요놈 좀도둑놈아! 내 이미 네 모가지를 높이 달아 후세를 징계 할양으로 높은 말뚝까지 박아 놓는다. 어서 목을 늘여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칼을 들어 양길을 엄습하였다.
이리하여 기헌과 양길은 어우러져 싸왔다. 양길의 군사도 가만히 서서 보고 기헌의 군사도 겨우 숨을 태우고 정신을 수습하여 기헌은 항상 양길을 엄 습하고 양길은 항상 기헌을 피하였다. 가끔 비호같이 달려드는 기헌의 칼날이 양길의 몸에 닿는 듯 닿은 듯하였으나 양길은 날래게 그것을 피하였다. 마치 양길은, 『 어디 네 칼이 몸에 닿나 보자, 그래야 너만 골을 껄.』 하는 듯하였다.
이 모양으로 양길이 기헌의 칼 밑으로 쏙쏙 빠져 달아날 때마다 기헌은 더욱 화를 내어 빠르게 양길을 엄습하였다. 그러나 기헌이 아무리 빠르게 엄습을 하여도 양길은 그만큼 빠르게 몸을 피하였다. 두 말은 두 장수를 등에 실고 가로 세로 쫓으락 쫓기락 네 굽을 모아 뛰었다. 보고 있는 양편군 사들이 두 주먹에 찬 땀을 한줌씩 쥐고 숨소리도 없이 서 있다.
어젯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오늘 슬픈 일을 많이 당한 기헌은 점점 피곤함을 깨달았다. 기헌이 쓰는 칼이 점점 방향을 그르치게 될 때에 기헌은 스스로 놀라서 정신을 차리려 하였다. 이 눈치를 본 양길은 더욱 말을 멀리로 달려 기헌을 괴롭게만 하였다.
『요놈 이번에도!』
하고 기헌은 양길의 뒷덜미를 향하고 힘껏 칼을 내리 쳤다. 기헌의 칼 이 양길의 목에 내려 닿는 서슬에 양길의 목덜미에서는 두 줄 번개가 번쩍 하며 딱 소리와 함께 눈이 부신 불꽃 날았다. 모든 군사들은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양길은 칼이 목덜미에 내려 오는 기헌의 칼을 마주쳐 물리 친 것이다. 기헌은 양길의 재주와 힘에 놀라 맘에 겁이 생길 때에 눈앞이 아뜩하였다. 양길은 말을 달려 수십 보를 물러나가서,- 104 - 『 항복하라!』 하고 태연히 기헌을 향하고 웃었다.
「항복하라」하는 말도 분하거니와, 양길의 태연하게 웃는 태도가 더욱 기헌의 분통에 불을 질렀다.
기헌도 잠시 말을 세우고, 『 요 놈! 좀도둑놈! 겁이 나거든 항복하라, 이번에는 바로 네 산멱을 끊으리라.』
하고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웃을 때에 기헌의 너슬너슬한 수염이 움직이고 움쓱 들어 간 눈에서는 불빛이 났다. 한바탕 웃고 나서 기헌은 새 기운이 남을 깨닫고 이번에야말로 대번에 조마귀만한 양길을 칼끝에 반짝 꿰어 들 듯하였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살 길을 주었는데 고마운 줄을 모르고 대드니 진실로 어리석은 놈이로다. 그렇진댄 네 내 칼의 드는 맛을 보라.』
하고 이번에는 양길이 먼저 기헌을 엄습하였다.
이번에는 양길은 기헌의 칼을 피하려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헌을 엄 습하였다. 양길은 마치 몸에 날개가 있어 나는 듯이 기헌을 싸고 돌아보이는 것이 오직 양길뿐이요, 기헌은 간 곳이 없는 듯하였다. 기헌은 자기가 양길의 칼빛에 싸인 것을 볼 때에 무서움과 분함으로 온 몸에 터럭이 모두 일어났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눈앞에 양길이 그림자가 번뜻 할 틈을 타서 칼을 쳤으나 그 칼날은 오직 바람을 벨 뿐이다.
「이번에야」하고 이러하기를 몇 번 하였건마는 양길의 몸은 마치 바하고 이러하기를 몇 번 하였건마는 양길의 몸은 마치 바람으로 된 듯하여 기헌의 칼날을 받지 아니하였다.
기헌은 더욱 맘이 초조하여 함부로 칼을 두르고 좌충우돌하였다. 가끔 딱하고 벼락 치는 리가 난다. 그러할 때마다 두편 군사는 손에 땀을 부쩍부쩍 쥔다.
마침내 기헌은 자기의 팔과 칼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깨닫고도 망할 틈을 찾았다. 그러나 사방이 모두 양길의 칼빛이요, 몸 하나 빠져 달아날 틈이 없었다. 기헌은 마지막으로 힘과 정신을 모아 눈을 딱 부릅뜨고 양길의 모양이 앞에 번뜻하기를 기다렸다. 첫번은 그대로 놓치고, 둘쨋 번도 그대로 놓치고, 세쨋번에 기헌은 머리 위에 눈이 들었던 칼로 눈앞에 번쩍 지나가는 양길을 쳤다. 그러나 칼은 이번에도 바람을 찢고, 양길의 껄껄 웃는 소리와 함께 기헌은 정신이 아뜩하여 말에서 떨어지고 빈말만 제멋대로 몇 바퀴를 뛰어 돌다가 슬슬 저편으로 꼬리를 치고 걸어- 105 - 간다.
기헌이 땅에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양길도 말에서 내려 기헌의 곁으로 가까이 걸어 갔다. 기헌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더니 앞에 섰는 양길을 보고, 『 양길아, 네 재주가 용하다. 내가 오늘 싸와 네게 졌다.』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입으로 피을 뽑으며 칼을 내어 던지고 다시 쓰러진다.
양길도 칼을 도로 꽂고, 『 모두 다 한바탕 꿈일쎄. 자네가 진 것도 꿈이요, 내가 이긴 것도 꿈 일세. 이제부터 백년 후면 자네가 내나 모두 한줌 흙이 아닌가.
허허허.』
하고 웃는다.
기헌의 맘속에는 돌넷집과 어린것들과 또 자기를 배난하고 달아난 원희· 신훤의 모양이 보이어 슬픔과 분함이 복받쳐 올랐으나 양길이 웃는것을 보고 자기도 덩달아 껄껄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서, 『 양길이 내 목숨을 자네에게 주고 가니 오래 살다 오고. 저승에서 또 만나세.』 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양길은 기헌의 손을 잡아 끌며, 『 여보게 이 사람.』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사랑과 원 수 궁예는 번쩍 눈을 떠서 돌아 보았다. 어딘지 모르는 방이다. 사 간 넓이나 되는 크고 넓은 방인데 사벽에는 그림과 수와 글씨를 붙였다.
<이게 어디란 말인가?>
하고 궁예는 눈을 껌벅껌벅하고 생각하여 보았다. 왼편 다리가 쑤신다.
궁예는 양길과의 싸움에 자기가 말에서 떨어지던 생각은 나나 그 밖에는 아무 생각도 아니 난다.
궁예는 번쩍 고개를 들어 자기의 베개맡에 웬 젊은 처녀가 앉은 것을 보았으나, 머리가 아찔하고 핑핑 내어 둘려서 베개 위에 머리를 놓았다.
궁예의 눈에는 그 젊은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어찌된 셈인가 ————내가 죽었나.>
- 106 - 하고 생각하여 보았다. 다리가 쑤신다. 다시 고개를 들어 머리맡에 앉은 여자를 보려 하였으나 고개가 들어지지를 아니하였다.
머리맡에서 여자의 옷이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 물 잡수세요?』
하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먼 데서 오는 소리와 같았다.
물이란 말에 궁예는 갑작 목ㅇ 마른 듯하기도 하고, 또 그의 예쁜 말에 대답을 아니하면 아니 될 것도 같아서, 『 응.』
하고 얕은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눈은 떠지지 아니하였다.
『자요.』
하고 숟가락이 입에 닿았다. 궁예는 입을 벌렸다. 그 처녀는 숟가락을 기울여 물을 흘려 넣었다. 물맛이 달고 속이 트이는 듯하였다.
처녀는 궁예가 입을 벌리는 대로 물을 떠 먹였다. 여남은 숟가락이나 받아 먹은 뒤에 궁예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처녀는 숟가락에 떴던 물을 도로 그릇에 붓고 숟가락을 그릇 위에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자기의 얼굴을 궁예의 얼굴 가까이 갖다 대고, 『 미움 드려요?』
하고 묻는다.
궁예는 깊이 생각도 아니해 보고 고개를 도리 도리 흔들었다.
처녀는 이윽히 궁예의 얼굴울 들여다보더니 궁예의 이마에 더부룩히 내려와 덮인 머리카락을 손으로 끌어 올리며, 『 정신이 드셔요?』
하고 묻는다.
궁예는 「대체 여기는 어디며 이렇게 내 곁에 앉아 구원해 주는 처녀는 누구인고?」하고 의심하면서 정신이 들었다는 표로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아이……사흘만에.』
하고 처녀는 기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사흘 만에」라는 말에 궁예는 또 의심이 났다. 그러면 자기가 말에서 떨어져서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만에 피어난 셈인가? 그렇게 생각 하는 동안에 그날 자기가 말에서 떨어져서 아픈 다리를 끌고 혼자 싸우던 생각과 그러다가 다시 거꾸러진 생각과 무엇이 머리를 딱 때리던 생각이 난다.
그러면 어찌하여 양질이가 자기의 목을 자르지 아니하였을까? 대관절 이 처녀는 어떤 처녀일까? 궁예는 양길의 딸에 절세 미인이 있다 말을 들은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양길의 딸인가 ———— 그럴 수가 있을까?
- 107 - 냉수를 먹은 것이 효험이 나서 궁예는 점점 정신이 쇄락 하여 짐을 깨 달았다.
마침내 궁예는 다시 눈을 떠서 처녀가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봄을 볼 때에 자기의 눈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부끄러워서 다시 감아 버렸다. 자기의 애꾸눈으로 그 달 같고 꽃 같은 처녀의 얼굴울 보는 것이 마땅치 못한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 어머니의 일과 어머니를 모해하여 죽게 한 원수가 다시 생각되어 「응」하고 얼굴울 찡그렸다.
<이 원수를!>
하고 궁예는 전신에 힘을 주고, 「응」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처녀는 궁예가 얼굴을 찡기고 이를 가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두리로 물러앉았다. 정신 못 차리고 누웠을 때에는 그렇게도 정답던 얼굴이 한번 찡 길때에는 지옥의 사자 모양이 되는 것을 보고 처녀는 떨었다. 또 궁예가 애꾸 란 말은 들은 지도 오래지마는 당장에 한 눈만 번쩍 뜨는 것을 볼때에는 정이 떨어졌다. 처녀는 궁예의 머리 맡에서 이만큼 물러 앉아서 한숨을 지었다.
그 한숨 소리를 궁예가 들었다. 그 한숨 소리가 들릴 때에 궁예는 전신이 녹아 버린 듯이 하염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의 몸은 보이지 않는 줄로 꽁꽁 결박을 지어 그끝을 저 처녀가 들고 앉아서 마마대로 당기었다 늦추었다하는 듯하였다. 다리가 쑤시고 머리가 가끔 핑핑 내어 두르는 곁에 그 처녀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다 잊어 버려지고 몸이 편안히 공중에 둥둥 뜨는 것 같았다. 궁예는 일생에 처음 보는 기쁨을 깨닫고 무심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눈은 감은 채로 팔을 내밀어 그 처녀더러 가까이오라는 뜻을 보였다.
처녀는 궁예의 볕에 그을고 힘줄 덖은 팔과 한번 쥐면 바윗돌이라도 으 스러질 듯한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 힘있는 궁예의 손과 팔은 자기를 가벼운 새털 모양으로 고이 고이 들고 헌거롭게 극락 세계 상상 층 도솔천( 〇率天)까지 데리고 갈 듯하였다. 처녀는 자기의 조그마한 하얀 손을 궁예의 손바닥에 가볍게 올려 놓았다. 궁예의 손가락은 벌벌 떨리며 줄어 들어 그 하얗고 조그마한 손을 꼭 쥐고 잡아 끌었다. 처녀는 두 뺨에서 불길이 나도록 얼굴을 붉히고 무르팍 걸음으로 궁예의 곁으로 끌렸다. 궁예의 손은 불덩어리와 같이 더워 조그마한 처녀의 손은 금시 에녹어 버릴 듯 싶고 손이 녹는 것을 따라 가냘픈 몸도 힘있는 뜨거운 궁예의 팔뚝 속으로 스르르 녹아 들어 갈 것 같았다.
궁예는 다시 눈을 부신 듯이 그 처녀를 보며,- 108 - 『 아가씨는 누구요?』
하고 물었다.
『내 이름은 난영(蘭英)아기 ————아버지는 북원 장군 양길 대감.』
하고 처녀는 고개를 숙였다. 난영은 이상하게 머리카락 끝까지 맥이 펄떡펄떡 뚜미을 깨달았다.
양길의 딸이란 말에 궁예는 난영의 손목을 놓았다. 양길이란 말을 들으면 패전( 敗戰) 의 수치와 분노가 한꺼번에 복받쳐 오르는 까닭이다, 그러나난 영의 손을 놓면 자기는 공중에서 매달렸던 줄을 놓치고 허공으로 둥실둥실 떨어지는 듯하였다.
난영은 궁예의 얼굴에 괴로운 빛이 떠도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맘 이괴로 왔다.
『아버지는 원수기로 나까지 원수는 아닐 것을…….』
하고 궁예도 중얼거렸다.
<원수는 원수 풀면 그만이 어니와, 사랑은 사랑 풀어도 안 풀리는 사랑.>
하고 난영이 한숨을 진다.
아버지 양길이 죽주(댓골)로 군사를 거느리고 간 뒤에 난연은 아버지를 근심하여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애를 쓰던 끝에 하룻밤에는 옷도 입은 채로 잠깐 누워 잠이 들었더니 난영이 평소에 믿고 귀의(歸依)하던 미륵님이 꿈에나 타나 이러한 분부를 하였다.
『내일은 눈 하나를 다친 미리(龍)가 이리로 올 테니 이는 너의 일생의 배필이라 반드시 네 몸이 귀히 될 것이니 정성으로 섬겨라.』
나이 열 여덟이 되어 아침 이슬 떨치는 꽃송이 같은 난영은 생각지 아니하려 하여도 남편을 생각하던 차에 이 꿈을 얻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날이 맟도록 이 꿈이 맞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이 깊고 달이 기울어진 때에 북소리 요란하게 들리며 승전 하였다는 기별을 가진 군사들이 의기 양양하게 북원으로 몰려 들어왔다. 장군 영문에는 수없는 촛불과 횃불이 켜지고, 승전한 소식을 들은 군사들은 터져라 하고 북을 치고 쇠북을 울리고 주라와 소라와 피리를 불고 뛰놀았다.
이때에 난영은 그 어머니와 함께 발을 드리우고 바라보고 있을 제 막군 사들이 어떤 사람 하나를 맞둘러 메어 담아지고 들어 와 횃불 곁에 놓고, 『 기헌을 죽이고 궁예를 잡았네- 109 - 비호 같은 궁예도 내 철퇴에 잡혔네.』 하고 창 자루를 땅바닥을 두드리며 춤을 춘다.
「애꾸장군 궁예」란 말을 들은 지 오랜 난영은 얼른 어젯밤 꿈을 생각하고, 『 글쎄 내 꿈이 안 맞을 리가 있나.』
하고 어머니가 붙드는 것을 듣지 아니하고 발을 들고 군사들이 모여 뛰는 마당으로 뛰어 내려 갔다.
군사들은 장군의 딸아기가 오는 것을 보고, 「쉬! 쉬!」하고 물러서서 길을 열었다. 양길이 군사 중에 어는 누구가 난영을 사모하지 아니할까.
이름 없는 군졸들은 달 속에 계숫가지라 감히 껶을 생각은 못한다 하더라도 닷새에 한번 열흘에 한번 난영의 아름다운 모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도배가 불렀고 하늘에서 떨어진 저 꽃송이가 장차 누구의 품에 들어 갈꼬?
젊은 장수들은 저마다 고운 꿈을 꾸고 있었다.
난영은 가벼운 깁소매를 날리며 사뿐사뿐 군사들의 앞을 걸어 지나 궁예의 곁으로 와서 고개를 숙여 궁예의 얼굴울 보았다. 그믈그믈하는 횃불 빛에 얼굴이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므로, 『 불, 촛불!』 하고 난영은 누구를 부르는지 모르게 손을 넌짓 들었다. 군사들은 저 머다 촛불 울 얻어 가지고 나도 나도 하고 난영의 곁으로 와서 촛불을 내어 밀었다. 난영은 그중에서 하나를 받아 가지고 궁예의 얼굴울 비쳤다. 비록 볕에 그을어 검붉은 빛이 날지언정 웅장한 골격과 기상이 난영의 맘을 어지럽게 하였다. 난영은 손을 궁예의 코 앞에 대어 숨길이 있는 것을 본 뒤에, 『 물 ——— 물 ———』 하고 또 한손을 넌짓 들었다. 군사들은 촛불을 내어 던지고 달아나 물 그릇을 들고 왔다. 난영은 곁에 섰는 군사들에게 들었던 촛불을 주고 그 중에서 물 그릇 하나를 받아 옥 같은 손가락으로 궁예의 입술을 벌리 고물을 흘려 넣었다. 궁예는 눈도 못 뜨고 정신도 못 차리거니와 목마른 듯 이물을 삼켰다. 난영은 부드러운 한삼 소매로 궁예의 입과 뺨을 씻고 일어나며, 『 수족의 결박을 끄르고 별당(別堂)으로 모시오.』 하였다. 난영의 말에 곁에 섰던 군사들이 궁예의 결박을 끄르려 할 때에 한 군사가 내 달으며,- 110 - 『 어이, 아가씨 큰일 납니다. 만일 수족을 끌렀다가 이놈이 정신만 드는 날이면 우리 북원이 쑥밭이 될 것이요. 그리하옵기로 장군 마마께 옵 소서도 꼭꼭 묶어서 가두어 두되 쥐샐 틈 없이 엄중히 파수하라 하시었사옵니다.』 하고 두 팔을 벌려 궁예의 곁으로 모여 드는 군사를 물리친다. 난영은 일변 놀라며 일변 맘에 흡족하여 빙그레 웃으며, 『 못난 소리 마오. 아무리 궁예가 날래기로 혼자서 무슨 일을 하리.』 한즉 그 군사는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내아 두르며, 『 혼자도 유만 부동이옵지 어제 싸움에도 궁예 혼자서 우리 군사를 오백명은 죽였사옵고 입맞추 장군 대감께서 활로 이놈이 말을 맞추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소인네도 하나 목숨 부지 못하고 이 놈 이 손에 모가지가 날아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안 그런가?』 하고 동무들을 바라본다.
『그러하옵니다. 이놈은 나는 놈이니 꼭꼭 동여서 저옥 속에 쇠사슬로 잡아 메어 두는 것이 지당하오이다.』
하고 다른 군사들도 첫 군사의 말을 돕느다.
『겁도 많의. 후사는 내가 담당할 터이니 어서 내 말대로 하오.』
이리하여 궁예의 결박을 끄르고 별당으로 옮긴 후에 난영이 몸소 밤을 새워 병구완을 한 것이다.
어머니의 걱정도 들었으나 그래도 굽히지 아니하고 난영은 자기의 몸종 월향과 함께 번걸아 가며 깨어 이틀 밤 이틀 낮을 구완을 하던 끝에 지금 궁예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것이다. 궁예가 비록 자기가 양길의 딸이란 말을 듣고 잡았던 손을 놓아 버렸으나 난영은 반드시 궁예를 제 것을 만들 리라고 결심하였다.
궁예는 이윽히 말없이 누웠더니, 『 내가 어찌하여 여기 왔소?』
하고 다시 말을 시작한다.
난영은 전후 시말을 대강 말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궁예를 옥에가 두라던 말은 아니하고 잘 병을 구완하여 속히 낫게 하라고 분부하 엿 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러한 끝에, 『 나는 기어이 장군을 살려 내리고 맹세를 하였소. 내가 이렇게 정성으로 비는 말을 미륵님이 안 들으실 리가 없다고 믿었소.』 한다. 미륵이란 말에 궁예는 놀랐다. 그러나 궁예는 놀랐다. 그러나 궁예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한 달이 지나서 궁예는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 111 - 『 좀 일어나 볼까?』
하고 궁예가 몸을 움지럭거리는 것을 보고 난영은 월향을 불러 들여서 궁예를 불러 들여서 궁예를 붙들어 일으켰다. 이리하기를 며칠하는 동안에 궁예는 혼자 일어나 방안에서 거닐게 되고, 또 며칠 후에는 마당에서 거닐게 되었다. 그러나 상한 다리의 아픈 것은 좀처럼 가시지 아니하여 조금씩 살룩살룩 저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궁예는 다리 하나가 병신이 된것이 분하여 혼자 여러 번 탄식을 하였다.
양길은 가끔 궁예의 병석에 찾아 와서 궁예를 위로하고 궁예를 공경 하는 보이며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창생이 도탄에 들었으니 힘을 합하여 각처에 날뛰는 도둑을 진정하고 나라와 백성을 태평하게 하자는 뜻을 말하였다.
궁예도 양길의 정성에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양길이가 기헌을 후 히 장사하고 기헌의 처첩과 자녀를 데려다가 후히 대접하여 양육 하는것을 볼 때에 양길의 덕을 사모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만 궁예가 보기에 양길은 너무 지혜가 많아서 겉으로 꾸미는 것이 많고 속으로 믿을성이 적은것이 흠인 듯하였다.
궁예는 말을 달리게 되고 활과 칼을 쓰게 될이만큼 몸이 추서게 되매 혼자 여러 가지로 싸왔다. 잠시 양길의 밑에 있어서 때를 기다릴까? 그러나 아직 그렇게 이름도 높지 못한 자기로, 겸하여 패군지장으로 이제 별안간에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아니할 뿐더러, 양길의 은혜도 저 버리 기가 어렵고 또 난영의 정도 물리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궁예는 괴로운 중에 하루 이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궁예가 병이 완쾌한 후에는 맘대로 난영을 만날 수도 없고 또 기별을 들을 수도 없었다. 궁예는 겉으로는 난영의 정을 물리치는 듯이 보이면서도 속 맘은 온통 난영의 아름다운 자태로 쏠렸다. 삼십년 동안 숨겨 두었던 정의 불길이 한번 난영으로 하여 타기 시작한 뒤로는 궁예의 힘으로도 누를수가 없었다. 달이 넘도록 난영을 볼 수도 없고 소식도 들을 수 없어서 궁예의 맘은 심히 초조하였다. 말을 달릴 생각도 없고 활을 쏠 생각도 없고 오직 혼자 가만히 앉아서 난영이가 자기 병구완하던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군사를 조련할 때나 활 쏘기 말 달리기를 할 때나 사냥을 갈 때에도 궁예는 언제나 어깨를 축 쳐뜨리고 기운을 발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군사들은 궁예가 철퇴로 머리를 맞은 뒤에는 옛날 기운이 다 없어졌다고 수군거리고 비웃는 이조차 있었고 양길도 궁예에게 대하여 점점 실망하는 빛이 보이게 되었다.
양길도 처음에는 크게 믿고 궁예만 내 사람이 되면 큰 힘을 얻을 듯이- 112 - 생각 하여 장차는 딸 난영을 궁예에게 주려고까지 생각하였으나 병이 나은지 오래도록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볼 때에 마마에 심히 불만 하여 누구든지 이번 싸움에 공을 이루는 자에게 난영을 줄 뜻을 보이게 되었다.
하루는 궁예가 홀로 방에 앉아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난영의 모양만 생각하고 있을 때에 난영의 시비 월향이가 무슨 보통이가 하나를 들어다가 궁예의 앞에 던지고 간다. 궁예는 곧 문을 열고 월향을 불렀으나 월향은 벌써 간 곳이 없었다.
하릴없이 궁예는 방에 들어 와 그 보퉁이를 끌렀다. 그 속에는 솜옷 한 벌이 있다. 궁예는 반가와 그 옷을 입으려 할 때에 옷 갈피에서 편지 하나가 떨어진다. 궁예는 옷을 입다 말고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
『이 옷을 입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듣사온즉 족하는 본디 중이라 하 오니 다시 절로 돌아 가 목탁이나 두드리심이 합당하겠사오며 첩 이 족하를 한 영웅으로 잘못 안 것을 부끄러워하나이다.』 하고 편지 끝에는 이름조차 쓰지를 아니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난 영 이가 자기를 욕보이는 표다.
궁예는 그 편지를 손에 꾸겨 쥐고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몸 속에서 졸고 있던 분기와 힘이 한꺼번에 껴서 나는 듯하여 궁예는 벌떡 일 어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벾에 걸린 활과 칼을 떼어 가지고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산과 들에는 흰 눈이 쌓이고 반쪽 찬 서쪽 하늘에 걸렸다.
『응! 내 행색이 무엇인고? 어머니의 원수도 잊고 창생을 건지자는 큰 뜻도 잊고 일개 아녀자에 연연하여————응! 내 행색이 무엇인고?』
하고 궁예는 자는 말을 끌어 내어 손수 아장을 지었다. 말은 상쾌한 듯이 안개 같은 김을 코로 토하고 전신을 푸르륵 떨었다.
궁예는 손을 들어 말의 목을 만지며, 『 가자! 천하를 진정하는 길을 떠나자.』
한즉, 말도 주인의 뜻을 아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앞발로 땅을 두어 번 굴렀다.
궁예는 몸을 날려 번쩍 말에 올라 한번 고삐를 당기니 말은 눈 덮인 길을 밟아 북원 동문을 향하고 닫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잊히지 못하는 난영이다. 잊으려 할수록 난영의 모양은 말머리 앞에 번뜻거렸다. 궁예는 잠깐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 보았다. 장군 마을( 將軍府) 은 다른 백성들의 집보다 뛰어나게 높은데 빨간 등불이- 113 - 반짝반짝하는 양이 보였다. 궁예는 그 속에 난영이가 잠을 못 이루고 앉았는 양이 보이는 듯하여 애끊는 듯하였으나 궁예는 머리를 흔들어 그런 연약한 새앆을 떼어 버리고 다시 말을 몰았다.
궁예는 동문 지키는 군사를 달래어 문을 열게 하고 동문을 나서서 달을 등을 지고 필마 단기로 동으로 동으로 말을 달렸다.
이때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는 수백명 중이 모여 낮에는 경을 읽는다 칭하고 밤이면 군사 조련을 하고 있었다. 궁예의 말이 마침 치악산 앞을 지날 때에 어떤 노승 하나가 궁예의 말 앞에 합창 하며, 『 궁예 장군이 아니시니까?』 하고 절하고 궁예를 인도하여 석남사로 들어 가게 하였다. 석남사에 모여있던 중들은 궁예라는 말을 듣고 모두 내려 와 절하며 그날부터 궁예의 군사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아침에야 양길은 궁예가 달아난 줄을 알았다.
양길은
진헌(薽萱)이란 자가 무진주(武珍州)에서 도둑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말을 듣고 웅심이 발발하여 자기도 곧 군사를 모아 서울의 동쪽과 한수( 漢水) 이북을 손에 넣어 큰 뜻을 필 생각을 하고 이날에 궁예를 부르러 갔던 사자가 궁예는 없고 솜옷 한 벌과 여자의 편지 한 장만 있더라 하여 가져온 것을 보고 양길은 놀랐다. 역시 궁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윽히 큰 뜻을 품은 사람인 줄을 깨달을 때에 자기가 근일에 궁예를 냉대한 것을 후회하였다.
양길은 일변 사람을 놓아 궁예의 간 곳을 수탐하라 하고 곧 안으로 들어가 난영을 불러 궁예의 방에 있던 의복과 편지를 주었다. 양길은 그것 이난영의 소위인 줄을 안 까닭이다.
난영은 꼬기꼬기한 편지와 의복을 보고 볼라는 눈으로 아버지를 우러러보며, 『 궁예가 어찌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어디로 달아나 버렸다.』
난영은 그러한 편지는 쓰면서도 궁예가 달아나 버렸단 말에 곤에 들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 난영은 다만 궁예가 새 기운을 내어 공을 이루기를 바란 갓이요, 이렇게 달안 버리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난영은 아버지가 앞에 있는 것도 잊어 버리고, 『 어쩌면 나를 두고 간담.』 하고 눈물을 씻었다.
- 114 - 이 때에 한 군사가 들어 와 양길에게 궁예가 어젯밤 깊은 뒤에 필마 단기로 동문으로 나가더란 말을 아뢰었다.
양길은 우는 딸을 바리고 곧 마을로 나와 말 잘 타는 군사를 뽑아 동 문밖으로 궁예의 자취를 따르라고 영을 내리고 일변 수십 명 장수를 불러 행군 할 차비를 하기를 명하였다.
오천명 군사가 행군 차비를 하노라고 북원 성내는 물끊듯하고 어디서 무슨 큰 변이 났는가 하여 백성들은 눈이 둥글하였다. 수없는 수레는 무거운 짐을 싣고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눈 덮인 가상으로 부주히 왕래 하고 수천 군마는 마구에서 끄려 나와 북두를 조르며 기운차게 소리를 지른다.
『이번에는 길에는 서울을 들이친다.』
하고 군졸들은 구석구석이 모여 정들었던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며 장담을 하고, 울고 매어 달리던 아내와 아들 딸을 곧 승전하고 돌아 온다는 말로 위로하며 머뭇거리는 이도 있었다.
궁예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 가는 날이면 큰일이다. 아무리 하 여서라도 궁예를 붙들어 오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요, 만일 붙들어 오지를 못 하면 죽여라도 버려야 할 것이다. 궁예를 따르는 군사는 쌍쌍이 말을 달려 동 문밖을 내달았다.
궁예가 석남사에 있단 말을 듣고 양길이 몸소 마방 일천과 보병 일천을 거 느리고 석남사로 나가 궁예를 위로 한 후에 궁예로 동령도 총 관( 東嶺道總管)을 삼아 동해 여러 고을을 엄습하게 하고 자기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영서(嶺西) 여러 고을을 엄습하여 서울에서 같이 마 나기로 하였다.
궁예는 처음에 양길이 주는 벼슬과 군사를 굳이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그 호의에 감격하여 허락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모든 군사를 먹이고 일변 이백여 명 중으로 하여금 종과 북을 울려 이르는 곳마다 승전하기를 비는 재를 올리게 하였다. 이날에 치악산은 종소리와 북소리와 군사들의 떠드는 소리로 떠나갈 듯하였고 날이 저물매, 양길은 궁예와 작별하고 크게 공을 이루기를 빌며 북원으로 돌아 왔다.
양길이 돌아 간 뒤에 궁예는 모든 군사를 불러 삼백명을 한 대씩 일곱대에 나누어 대마다 사상(舍上)을 두고 사상 밑에 또 여러 벼슬을 두어 규률을 엄숙하게 하기를 명하고 사처에 돌아 와 앞날에 싸울 계책을 생각 하였다.
밤이 깊으니 이천 병마도 잠이 들어 법당 추녀에 달린 풍경 소리만 뎅 겅뎅겅하는 데 궁예는 손 아래 있는 이천병마와 장쾌한 앞날의 싸움을- 115 - 생각 할 때에 혼자 득의의 웃음을 아니 웃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서울 이사백 리 주천(酒泉) 내성(內城) 울오(蔚烏) 어진(御珍)을 폭풍같이 낼 밀어 장기 당당하게 서울로 대군을 들이 몰아 일변 평생 원수를 풀고, 일변 대장부의 공명을 세울 것을 생각하면 잠이 들지를 아니하였다. 궁예는 반 쯤눈을 감소 혼자 고개를 끄떡끄떡하여 취한 듯이 환하게 툭 터진 자기의 앞날을 바라보았다.
이때에 문밖에서, 『 총 관께 아뢰오, 총관께 아뢰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궁예는 꿈에서 깬 사람 모양으로 영창을 열고 내다보며, 『 누구야?』
하였다. 거기는 창 든 군사 하나가 섰다.
『젓사오되 문에서 파수를 보옵는데 어떤 젊은 선비 두 사람이 북원서 왔다 하옵고 총관께 시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하옵니다.』
『젊은 호반 두사람?』
하고 궁예는 고개를 기울이며, 『 그래 무슨 일이라더냐?』
『무슨 일은 말하지 아니하옵고 총관께 뵈오면 자연 아신다 하옵니다.』
궁예는,
『이리로 들어 오라 하라.』
하고 군사를 물리고 시원한 찬 바람에 머리를 식히며 고루( 鼓樓) 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네 그림자가 고루 밑으로서 나와 점점 가까이 궁예의 게하여 와서 고개를 숙여 예를 하고 선다. 가운데는 두 선비가 서고 창 든 군사들 이 좌우에 옹위하였다.
『어떤 선비완대, 이 아닌 밤중에 무슨 일로 왔소?』
하고 궁예는 불빛에 비치인 두 선비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으나 수선이 이마와 두 볼을 가리었으니 오직 반짝반짝하는 네 눈이 보일 뿐이다.
『자우를 몰리시오면 사뢰을 말씀이 있읍니다.』
하고 한 선비가 엄연한 음성으로 말한다.
궁예는 두 군사에게 물러가라 하고 명하였다. 두 근사의 그림자가 고루 밑으로 스러질 때에 두 선비는 손을 들어 이마와 뺨을 가린 수건을 벗었다 ——— 그들은 난영과 월향이었다. 궁예는 눈을 의심하고 다시금 보았으나 그들은 분명한 난영과 월향이다.
- 116 - 궁예는 일변 반갑기도 하고 일변 놀랍기도 하여 마루에 뛰어 나와 난영의 손을 끌어 올렸다. 남복을 하니 말쑥한 젊은 선비다.
궁예도 앉고 두 사람도 앉은 뒤에 궁예는 아직도 놀라는 빛을 가지고, 『 웬일이요? 어찌하여 왔소?』
하고 물었다.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 가려고 왔소.』
하고 난영은 얼굴을 붉혔다.
궁예는 더욱 놀라며, 『 여자의 몸으로 전장에를 어떻게 따라 가오?』
『이렇게 남복하고 따르지요! 이런 난세에 한번 떠나면 어디서 만날 것 을기 약하오? 아버지도 내일은 군사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나간다 하시니 집에는 누구를 믿고 있소?』 한다.
이튿날 평명에 궁예의 군사는 주천(酒泉)을 향하고 떠났다. 석남사의 쇠북은 은은히 울려서 그칠 줄을 모르고 아침 해는 이천명 군사의 기치와 큰 검을 비치어 오색 빛을 발하였다.
동구 밖 북원 가는 길이 갈리는 곳에서 점점 멀어 가는 궁예를 바라보고말 위에서 울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그것은 난영과 월향이다.
난영은 마침내 북원에 떨어져 잇기로 하였다. 소매에 매어 달려 우는난 영을 뿌리치기는 궁예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으나 궁예는 큰일을 위 하여 애 끊는 정을 아니 누를 수가 없었다.
『사졸(士卒)과 감고(甘苦)를 같이할 몸으로 그러할 수 없소. 장차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를 기다리오.』
하는 궁예의 말에 난영은 더할 말이 없고 오직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 부디 맘을 변치 마오. 승전하시고 너무 위태한 곳에 들어 가지 마오.』 할 뿐이었다.
궁예의 군사는 길다란 구렁이 모양으로 하얀 눈길을 굼틀굼틀 감돌아 간다. 앞머리가 벌써 고개를 넘더니 점점 고개 너머로 스러지어 마침내 마지막 사람이 스러져 버렸다.
『한번 뒤도 안 돌아 보네.』
하고 난영이 눈물을 씻을 때에 월향은, 『 뒤를 돌아 보아서 써요?』
하고 난영을 보고 웃으며, 『 영웅의 부인 되실 이가 그렇게 눈물을 흘려서 쓰겠소?』
- 117 - 하고 먼저 말머리를 북원으로 향하고 돌린다.
『이별은 슬프구나, 영우의 아내도 귀찮으니 이별 없는 아내가 되고싶다.』
하고 난영은 한번 더 눈을 비비어 궁예의 말이 넘어간 고개를 바라보고 월향과 같이 말머리를 돌린다.
『이별이 섧다고들 그럽디다마는 나는 이별할 사람도 없소.』
하고 월향은 심화가 나는 듯이 채찍을 들어 말을 갈기니 말은 뛰 기를 시작한 다.
『얘야, 같이 가자.』
하고 난영은 말을 빨리 몰 기운도 없었다.
난연과 월향이 이별이 설은 이야기와 인제 큰 싸움이 났으니 장차 어찌 될것인가 를 이야기하면서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북원 장군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는 벌써 양길은 대군을 거느리고 한물(韓水)을 건너 서쪽으로 떠나 버린 때였다.
난영은 이날부터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예를 그리는 몸이 되어 억지로 잠이 들어도 꿈길에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날마다 기별 가진 군사가 달려 왔으나 날이 갈수록 두 군사가 점점 멀어 갈수록 이틀에 한번 기별이 오게 되고 눈이나 많이 온 날은 사흘에 한번 나흘에 한번도 기별이 오게 되었다. 기별이 온대야 양길에게서나 궁예에게서나 싸운다는 기별, 이겼다는 기별, 적군을 몇 십명 사로잡았다는 기별 뿐이요, 난영에게 보내는 기별은 없었다.
양길이 북원을 떠난 뒤에 흘골(紇骨)이라는 장수가 북원을 지키고 또 양길의 가족을 보호하기로 되었다.
흘골은 본래 현강왕 때에 서울서 병부 사지(兵部舍知)로 있다가 무슨 죄를 짓고 옥에 갇히었다가 무슨 죄를 짓고 옥에 갇히었다가 옥을 깨뜨리고도 망하여 돌아 다니던 사람으로 양길의 군중에서는 가장 벼슬이 높은 사람이다. 자칭 대아손(大阿飡) 태골(太骨)의 아들이라 하나 자세히 그 내력을 아는 이는 없으되 병법을 잘 알고 또 서울 일을 잘 알므로 양길의 신임을 받아 군사(軍師)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천문도 보고 지리도 안다 하며 앞날의 길흉 화복도 알아 본다 하여 제갈량같이 양길에게 존중 함을 받았다. 그러나 평소에 말이 많이 많지 아니하고 또 나와다니 기를 싫어하여 군사들 중에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으되 그 의 얼굴을 본 이는 많지 아니하였다. 이번 행군에도 양길은 흘골의 말을 깊이 믿어 그 말대로 하기로 하였고 궁예에게도 흘골이 시키는 말을 전하였다.
- 118 - 그러나 궁예는 흘골을 즐겨하지 아니하여 항상 그를 흘겨 보았고 흘 골도 궁예가 자기를 즐겨 안하는 줄을 알므로 아무쪼록 속히 궁예를 먼 곳으로 떠내 보내려 하였던 것이다.
궁예의 군사는 숫눈길을 헤치고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동으로 동으로 나아갔다.
주천(酒泉) 싸움에 한나절이 못되어 이겨 태수(太守)를 사로잡고 관병( 官兵)을 쫓고 옥문을 열어 애매한 죄인들을 놓고 관고(官庫)를 열어 학정으로 토색한 재물을 흩어 유리 개걸하는 백성을 안도케 한 뒤로, 백성들은 궁예를 신장군(神將軍)이라고 일컬어 혹은 술을 빚어 오고 혹은 닭과 돼지를 삶아 오고 혹은 솜 많이 둔 옷을 지어다 바치고 궁예가 말을 타고 길거리로 나올 때면 길가에 남녀 노소가 합창하고 허리를 굽혔다.
이 모양으로 궁예는 군사를 끌고 가는 곳마다 탐관 오리(貪官汚吏)와 관력에 등을 대고 세민(細民)를 토색하는 토호(土豪)들을 혹은 쫓고 혹은 가두고 혹은 죽이고, 그 자리에는 백성들에게 추존을 받는 사람들을 골라 정사를 하게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동방에 있는 각 고을 태수(太守)들은 모두 겁이 나서 부랴부랴 세간을 싸가지고 서울로 도망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장군이 온다는말에 백성들은 기운을 얻어 일제히 일어나 서울로 길 떠나는 태수들의 앞길을 막고, 『 여보, 어리들 가? 가려거든 토색한 물건을 놓고 가오. 흠, 호락 호락히놓아 보낼 줄 아오?』 하고 빈정거리고 대들었다. 어떤 태수는 세간집도 내버리고, 또 어떤 이는 처자까지도 내어 버리고 목숨 하나만 살려고 개구멍으로 빠져 달아나 기도하고, 어떤 태수는 백성들의 앞에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 먹은 것은 다 토해 놓을 것이니, 목숨만 살려 주오, 백성님네들.』 하고 빌기도 하고, 또 어떤 대수는 추운 겨울날에 발갛게 옷을 벗기어 눈 구멍에 묻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백성들이 강으로 끌고 나아가 얼음 구멍을 뚫고 두 발을 거꾸로 잡아 그 구멍으로 넣었다 빼었다 하는 일도 당하다가 겨우 어떤 늙은이의 구원을 받아, 『 어허 허허, 우후후후.』 하고 덜덜 떨면서 누더기 속에 써이어 끌려 가기도 하고 그중에 백성들에게 원망도 많이 받고 또 딱딱거리던 패는 대칼과 대침으로 전신을 씰리어 몸에 있는 피를 다 쏟아 놓고 삶은 닭 모양으로 살이 하얗게 되고 팔다리가 비비 꼬여 나둥그러지기도 하였다.
- 119 - 『 오, 이놈! 평생이 네 세상인 줄만 알았더냐? 인제는 견디어 보아.』
하고 백성들은 굵다란 새끼 오라기로 북두를 조르고 손에 몽둥이를 들고, 『 이 놈! 도둑놈아 나오너라!』
하고 고함을 피며 태수 아문(太守衙門)으로 모여 들었다. 백성들이 한번 이렇게 일어나면 태수의 손 밑에 있던 군사들도 백성들에게 향하였던 창과 칼을 거꾸로 들고, 『 옳다, 이놈 아니꼽던 놈들을 없애 버려라!』 하고 태수와 사상(舍上) 같은 높은 벼슬하던 사람들을 향하고 대들었다.
『오늘은 어디 민란(民亂)이 있었다.』
『어저께는 어디 민요가 일었다.』
하고 궁예의 군사가 앞으로 나오는 대로 이러한 소문이 방방 곡곡에 전 하였다.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백성들은 밥 먹던 숟가락도 다 내어 던지고 문밖으로 뛰어 나와 팔을 뽑내며, 『 옳다 되었다. 이놈들을 모조리.』 하고 마을에 고을로 달려들어 갔다.
그러다가 어느 고을에 신장군 궁예 총관의 군사가 가까이 오면 그 고을 두 민( 頭民) 들은 십리 이십리 밖에 마주 나와 허리를 굽히고 궁예에게 예물을 드리고, 『 민등( 民等) 이 태수놈을 쫓았읍니다.』 하고 보고를 하였다.
이 모양으로 궁예는 북원을 떠난 지 일개월이 못되어 주천· 내 성· 울 오 등 십여 고을을 항복 받고 이월 초승에는 어진주(御珍州)를 향하게 되었다.
신장군 궁예의 이름은 아동 주졸이라고 모르는 이가 없고 궁예의 군사가 나갈 때에는 밤 마을에 개도 지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서울 인심이 얼마나 흉흉하였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궁예의 군사가 어진주에만 들어 오면 서울의 형세의 위급함도 경각에 달린 것이다.
어진주에서 개머리를 돌아 서울로 온다 하더라도 행군길로 불과 사오일 길이라 이월 보름 안으로는 궁예의 군사가 장안을 돌이치리라고 물론이 낭자 하였다.
애초에 주천 태수 아손 용길(阿飡勇吉)이 요행으로 궁예의 손에서 목숨 하나만 받아 가지고 도망하여 서울로 들어 온 것은 지금부터 약 한달만 전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용길은 서울에 들어 오는 대로 곧 왕께 궁예의 난을 아뢰려 하였으나 그날 밥 왕은 대야주에서 온 어떤 미남자를 불러 들여 처음으로 동방 화촉의 즐거움을 맞는 날이므로 상대등이나 시중조차 궐내에- 120 - 들어 오기를 허치 아니하기 때문에 못하고 오래간만에 집에 들어 가 놀라는 가족들을 만나 보고 이튿날 세뱃 조회에야 비로소 입내함을 얻었다.
오늘은 설명절이라 왕은 곤룡 황료(袞龍黃袍)에 황금 면류관을 쓰시고 피곤한 듯이 용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가드란 두 눈에 조는 듯한 웃음을 띄우고 상대등 시중 이하 만조 백관의 조회를 받으시었다. 벼슬 낮은 벼슬 아치들은 용상 바로 앞에 부복하여 여러 가지로 하례하는 말과 성덕을 칭송 하는 말씀을 사뢰었다.
『국 태평 민 안락하옵고 사해 창생이 상감마마의 성덕을 찬송 하나이다.』
이러한 하례를 받을 때마다 왕은 만족한 듯이 약간 고개를 끄떡거렸다.
주천 태수 용길은 궁예에게 봉변 당하던 일을 생각할 때에 맘이 오마조마하여 어서 자기의 차례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나 늙은 신하들과 벼슬 높은 신하들의 한가한 덕담이 언제 끝날지 끝이 없는 듯하였다.
풍악은 쉴 새 없이 둥둥 올려 오고 하늘에 높이 뜬 햇빛은 문무 백관 외관과 띠의 장식에 번쩍거리며 이따금 불어 오는 찬 바람은 풍경과 패옥을 울려 딸랑딸랑 소리를 내니 진실로 태평성대한 듯하였다.
용길은 맘이 조급하여 연해, 언 발로 옥계(玉階)의 박석을 울리고 부시럭거렸다. 이러한 판에 궁예가 번쩍 보이면 다들 어찌할 것인고, 자기 모양으로 그만 그 무서운 호령에 헐개가 풀려, 섰던 자리에 펄썩 주저앉으면서, 『 그저 살려 줍소사 장군마마, 분부대로 물불에라도 들어 갈 것이니, 살려만 줍소사.』 할 것이 아닌가. 용길은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이빨과 두 무릎이 떡떡 마주치고 잔등이에 찬 땀이 쭉 흘러 내리는 듯하였다.
『허 못생긴 놈! 네 목숨과 다릿마댕이는 줄 것이니 이 길로 서울로 올라가 왕께 여쭈워라, 삼월 삼질날 제비 들어 올 때에는 나도 들어 갈 터이니, 죽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여쭈어라!』 하고 궁예가 땅에 엎더진 자기의 턱을 발길로 툭 차서 일으켜 놓고, 그 무서운 애꾸로 내려다 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앞에 궁예가 섰는 것만 같아서 눈을 들어 잠깐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 궁예는 없고 자기 모양으로 두 손으로 흙을 받들고 허리를 구부리고 선 사람들뿐이었다. 용길은 궁예의 발길로 치어 들리던 턱주가리를 민틋한 흘 끝으로 한번 쓸어 보았다. 분명히 턱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한번 한숨을 쉬고 곁눈으로 전상을 바라보매, 아직도 한가한 덕담이 너저분하였다. 용길은 마주치는 무릎을 진정하노라고 두 다리를 좀 벌려 디디었다. 마침내 용길의 차례가 돌어 왔다.
- 121 - 용길은 두 손을 읍하고 전에 올라 꿇어 앉아 슬행(膝行)으로 용상 앞에 가 가까이 들어 가 이마를 마루에 세 번 조아리며, 『 북원 태수 아손 용길이요.』 하고 직함과 성명을 아뢰렀다. 왕은 오래 조회를 받기도 지리한 듯이, 잠깐 양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한번 움직였다. 맘에는 어젯밤 대야주 젊은 호반과 즐기단 생각이 나서 자리에 오래 앉았기가 싫어 손을 들어 일어날 뜻을 보였다. 이 눈치를 보고 용상 좌우에 갈라 섰던 두 시녀가 나와 왕을 부액 하여 일으킨다. 시녀라 하지마는 기실은 얼굴 아름다운 남자다. 왕은 아름다운 남자를 골라 여복을 입혀 시녀를 만들어 항상 가까이 모시게 하였다. 왕이 용상에서 내려 서려는 것을 보고 용길은 이마를 한번 더 조아리며, 『 상감 마마께 아뢰오. 지금 북원 도둑 양길이 강성하와 궁예라는 도둑을 보내어 영동 여러 고을을 엄습하읍는 바 신(臣)은 죽을 힘을 다하여 싸 왔 사오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옵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와 주야 겸행으로 어젯밤 서울에 득달하왔사오며, 궁예의 형세 사뭇 맹렬하와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오니, 예사 좀도둑이 아니오니 급히 막을 도리를 하옵실 바로 아뢰옵니다.』 하였다.
왕은 잠깐 발을 멈추고 용길을 보며, 『 양길이란 말은 들었거니와, 궁예는 첨 듣는 이름이로 구나.』
하고 잠깐 근심하는 빛을 보인다, 좌우에는 늘어선 백관들도 놀라는 듯이 귀를 기울인다.
용길은 또 한번 이마를 조아리며, 『 그 리하 올 쎄 궁예는 양길보다도 무서운 놈이옵고 활을 쏘매 백발 백 중이 오며 눈이 애꾸이옵기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별명을 애꾸장군이라 하옵고, 싸움에 귀신 같다 하와 신장군이라고도 하오며, 삼월 보름 안으로는 서울을 들이 친다고 큰소리를 하옵니다.』 『애꾸야?』
하고 왕은 웃고, 『 그래 두 눈을 가지고 애꾸한테 항복을 하여?』
하고 용길을 노려 본다.
용길은 등에 냉수를 끼얹히는 듯하였으나 겨우 정신을 모아, 『 항복은 아니하였사옵고 싸울 대로 싸왔읍니다. 그러하오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둑의 편이 되오니, 신 혼자서 어찌하오리까마는 서응ㄹ 버린 죄는 죽어 마땅하오이다.』 - 122 - 하고 용길은 아주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용길도 본래 허랑한 자로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가 얼굴이 잘난 덕에 왕의 눈에 들어 얼마 동안 고임을 받다가, 다시 왕의 눈 밖에 나서 주천 태수로 보냄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용길은 왕이 옛정을 생각하고 자기에게 대하여 관대한 처지를 할 줄만 믿었더니 천만 의외에 왕은 어성을 높여, 『 인신( 人臣) 의 도리에 도리에 도둑이 오거든 싸와 물리칠 것이요, 만일에 이기지 못하거든 성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이 마땅하거든, 이제 지키던 고을을 도둑에게 내어 주고 뻔뻔하게 살아 돌아 왔으니 너 같은 것은 목을 베어 박관을 징계하리라. 삼일이 지나거든 종로에 효수를 하도록 주천 태수를 급부에 내려 가두어라.』 하고는 시녀에게 부액을 받아,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가 버렸다. 미처 조하를 마치기 못하였던 벼슬아치들은 왕의 뒤를 향하여 허리를 굽혔다.
벼락 맞은 듯이 엎더지어 일어날 줄을 모르던 용길은 급부로 끌려 나가고 용길의 말을 백관들은 서로 돌아 보며, 『 서에는 진헌(薽萱)이요, 동에는 궁예(弓裔)라.』 하고 한숨을 쉬며 흩어졌다.
용길은 옥에 갇히어 죽을 날을 기다리며, 『 내 어이 살았던고. 옛정을 믿었던고. 이럴 줄 알았던들 궁예에게나 붙을 것을……아끼고 아끼던 목숨을 못내 아껴하노라.』 하며 울었다.
주천 태수 양길의 뒤를 이어 거의 날마다 혹은 궁예에게 쫓기고, 혹은 민요에 쫓기고, 혹은 민용에 쫓긴 원들이 서울로 기어 들었다. 더러는 팔을 싸매고, 더러는 다리를 싸매고, 또 더러는 머리를 싸매고, 그중의 어떤 원은 한편 귀를 깎이고 어떤 원은 코가 찌그러지고 이가 부러지고, 이 모양으로 거의 몸이 성한 사람이 없었고, 그중에 몸 성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미리 기미를 알고 일이 나기 잔에 살짝 빠져 온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다 도망을 못하여 궁예의 군사와 백성들의 손에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하며, 여러 고을 아문에는 혹은 원의 귀를 꿰어 매달고, 혹은 머리를 매달고 백성들이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즐겼다.
도망하여 오는 이마다 궁예를 당할 수 없는 삼월보름 안으로 서울에 올 터이니 기다리라던 말을 전하였으나, 「음란한 여왕아 회계하라」하는 말은 감히 입밖에 내는 이가 없어서 장안 백성들이 전지 문지 다들은 뒤에도 왕의 귀에는 이 말이 들어 가지 아니하였다.
- 123 - 서 편에서는 진헌의 군사가, 어제는 어는 고을, 오늘은 어느 고을을 항복 받았다고 하고, 동편에서 또 궁예의 군사가 물밀듯 바람 밀듯 들어 온다는 기별이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서울로 들어 오니 장안 인심은, 『 세상이 이제야 뒤집히네.』 하고 물 끓듯하여 피난을 가려 하나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다만 궁예와 진헌과 어느 편에서 먼저 서울을 들이칠 것인가 이것만 이야기하였다.
서울에는 진헌의 군사를 보고 온 사람도 생기고, 궁예의 군사를 구 경 한 사람도 들어 와 혹은 진헌이가 강하다 하고 혹은 궁예가 더 강하다 하여 각기 저 보고 온 군사를 강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 인망은 궁예 편으로 실렸다. 그것은 진헌은 신라 사람이면 보는 대로 막 죽이고 백성의 딸 중에 아름다운 이가 있으면 곧 빼앗아 들이되 궁예는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또딸을 바치는 자가 있어도 물리친다 하는 고문이 났기 때문이다.
궁예의 군사가 울오(蔚烏)를 깨뜨리고 어진(御診)으로 몰아 온다는 장계가 오르매, 왕은 마침 저녁 수라를 받으시었다가 손에 들었던 숟가락을 내어 던지고 성화같이 문무 백관을 부르라는 칙교를 내렸다.
그날 밤 등촉이 휘황한 큰 대궐에는 문무 백관이 구름같이 모이고 황겁 한 백성들도 사해문 앞에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왕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미남자 상궁(尙宮)의 부액을 받아 옥좌에 올라 백관의 그궁 사배의 예를 받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촛불과 그 빛에 비치이는 근심한 얼굴과 대궐 안은 수심이 차고 궁녀들도 구석구석에 모여 피난 할 공론을 하게 되었다.
왕은 수색이 만면하여 좌우를 돌아 보며, 『 지금 진헌과 궁예가 강성하여 동서로 침노하되 고을을 지키던 도독과 태수들은 허수아비같이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쥐구멍만 찾으니, 이 일을 어찌하 랴. 하물며 궁예가 벌써 어진주를 범한다 하니, 사세가 위급한 지라, 경 등은 두 도둑을 막을 꾀를 말하라. 밤이 깊고 날이 새더라도 막을 꾀를 얻기 전에는 물러가지 못하리라.』 하는 왕의 말씀에는 수참한 빛이 있었다.
왕의 말씀이 끝날 때에 이경을 아뢰는 종소리가 뗑뗑 궐 안으로 울려 들어 왔다.
모두 잠잠하고 서로 바라보며 누가 먼저 말을 내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말을 내는 이는 없고 촛불만 속절없이 끔벅 끔벅 하였다. 사람들은 인제는 서로 바라보기도 그치고 모두 눈을 내려 깔아 제 발 뿌리만 보았다. 그중에도 벼슬 높은 이는 왕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어찌하- 124 - 나 하고 그것만 근심이 되었다.
특별히 일국 병마를 한 손에 맡은 병부령(兵部令) 맹공(孟攻)과 평소에 용맹을 자랑하던 병부 대감(兵部大監)들은 자기네에게 무슨 영이 내 리자나 아니 할까 하여, 죄지은 어린애 모양으로 맘이 오마조마하였다.
마침내 왕은 참다 못하여 어성을 높여, 『 경 등은 국록지신이 되어 나라이 위태한 때에 아무 계책도 말하지 못하고 등신 모양으로 앉았는가. 평소에 그 많던 지혜와 용맹은 다 집에 두고 들어 왔는가. 평소에 그렇게 말 잘하던 헛바닥까지도 빼어서 고양이를 먹이고 왔는가. 지금 몸에 가진 것이 얼 빠진 두 눈 밖에 없는가. 금시에 진 헌 궁예가 장안으로 들어 오더라도, 다들 고만하고 앉았을 터인가, 그래도 추천 태수 모양으로 도망할 두 다리는 아직도 성하게 가지었는가. 흥! 그 몸집 집들이 아깝고 입은 옷들이 아까와라!』 하고 엎드린 백관을 꾸짖었다.
백관들은 등에는 찬 땀이 흐르고 두 관자놀이가 후끈후끈하거니와, 그래도 없는 지혜와 없는 용맹에 서뿔리 말을 먼저 내는 것보다 꾹 참고 다른사람이 압을 열기만 서로 기다렸다. 먹을 때는 앞서는 것이 좋지마는 힘드는 일에는 항상 뒤로 매도는 것이 이하다고 다들 아는 까닭이다. 등에 찬땀이 흐르기도 나 혼자만 흐르는 것이 아니니 관복 등에 소금이 도도라도 빨아 입으면 그만 이어니와, 서뿔리 덤비다가 궁예나 진헌의 칸에 목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떨어진 목을 다시 주워 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꾹 참고 실낱만한 목숨줄만 손가락 사이로 빠지지 않도록 꼭 붙들어라. 아 손대인소 노이야 어디를 가면 못하랴. 진헌도 용상에만 앉으면 상감마마요, 궁예도 그러하다 ————서뿔리 방정 맞은 소리를 하였다가 그 말이 궁예나 진헌의 귀에 들어 가면 봉변이니 왕의 말씀과 같이 도망할 두 다리만 단단히 차고 혓바닥을 랑 고양이 먹인 셈만 대자, 하고 사람들은 더욱 입을 꼭 다물었다.
병부령 맹공은 왜 내가 어저께 진작 이 벼슬을 내놓치 아니하였던고, 국고가 말랐으니 왕께서 녹을 타기는 커녕 내 집 곡간에서 양식을 갖다가 왕을 대접해야 할 판이요, 군사라고 활 메어 내세우면 꼬빡꼬빡 조는 늙은 병졸이 아니면, 손가락 다칠까봐 칼집에 손 대기도 무서워 하는 장수들 뿐이다. 상감님이 이해궁예나 혜성대왕 능행에 차례로 벌여 세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마는 이것들을 군사라고 끌고, 산전 수전에 호랑이 다 된 궁예나 진헌과 싸운다는 것은 마치 길에다가 발을 드리워서, 스치어 들어 오는 적군을 막으려 함과 같다. 게다가 힘개나 쓰고, 쌈낱이나 하고, 칼이나 활이나- 125 - 한 재주있는 군사들은 한 놈씩 두 놈씩 찼던 칼과 활만 훔치어 가지고 달아나 버리고, 남아 있는 군사라고는 궁예라는 궁자만들어도 창을 거꾸로 끌고 달아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랴……그저 입 꼭 다물고 죽여 줍시오하고 가만히 있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윗사람이 그러하니 아랫 사람도 그러하다, 나는 아랫 사람이니 윗사람 하는 굿만 보다가 먹을 떡이 있으면 먹고, 맞을 매가 있으면 달아나면 그 만이다.
그중에 제일 찬 땀을 많이 흘린 것은 무론 서불한(舒弗邯)이라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이손 준흥(伊飡俊興)이다.
『사람이 잘나서 서불한 이 더냐.
못나신 덕택에서 불한 이러라.』
이러한 민요의 웃음거리가 되고 또, 『 어화야 슴겁기준네 집 홍 도령, 남의 집 잔치에 동동 걸음이라.』
하는 조롱거리가 되도록 못한 사람이언마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뼈도 없고 가시도 없는 두루뭉수리로 왕의 말이라면 까마귀가 희다고 해도, 「에 그러하오 」, 까마귀가 붉다 해도「에 그러하오」하여 왕의 사랑을 받는 처지다. 그러나 두 귀 밑이 허연 것이, 서불한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 서불한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못 하고있는 것이, 쥐구멍으로 들어 가고 싶도록 부끄러워서 이마에 땀을 흘 끝으로 씻으며, 『 진작 물러날 것을…….』 하고 사직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나 준흥은 체면에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 없어, 『 서불한 준흥이 아뢰오.』
하고, 옥좌 앞으로 나가 엎드렸다. 모든 이 손( 伊飡)· 소 판( 蘇判)· 파진 손( 波珍飡)· 대아 손( 大阿飡)· 일 길손( 一吉飡)· 사 손( 沙飡)· 급벌손( 級伐飡)· 대내마( 大柰麻)· 내 마( 柰麻) 들 이하로 대사( 大舍)· 길사( 吉士)· 대오지( 大烏智)· 소 오지( 小烏智)· 조위( 造位)에 이르는 십 칠 관등의 대소 관헌과,- 126 - 기타 각부 대감(大監) 경(卿)들도 준흥이 나시는 것을 보고 모두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이, 안심하는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맞을 매를 준 흥이가 대신 맞아 주는 셈이다.
서불한 준흥은 왕의 앞에 세 번 이마를 조아리고, 『 흉적 진헌·궁예 두 놈이 성주의 은혜를 몰라 보고, 무리한 도둑을 소취하여 동서로 작폐하와, 신금(宸襟)을 불안하시게 하오니, 신 등은 황송하와 아뢰올 말씀이 없사오나, 예로부터 아무리 한 성주( 聖主) 의어 우( 御宇)에도 한두 놈 좀도둑은 있는 법이라, 요마 진헌· 궁예를 두려워 할 것은 업사옵고 또 충성된 문무 제신이 있사오니 반드시 목숨을 버려 사직을 안보할 것이온즉 만사는 병부령 맹공에게 맡기시압고, 이미 밤도 늦삽고 밤바람도 차오니 상감마마께옵서는 침전으로 입어하시 옵 소사고 아뢰오.』 하고 말이 끝난 뒤에 다시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
준 흥은 왕이 오늘 밤에도 대야주 미장부(美丈夫)를 침전에 기다리게 한 줄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준 흥의 말에 왕도 침실에서 기다리는 미장부를 생각하고 맘에 흡족하였다.
다른 신하들도 어서 왕더러 들어 가, 주무시라는 준 흥의 말에 만족하였다. 왕만 들어 가시면 자기네도 각각이 밤중에 찬 마루에서 등에 찬 땀을 아니 흘리고 고 따뜻한 어린 첩의 방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것을 생각한 까닭이다. 여기서 이렇게 오래 찬 땀을 흘린 대야 감기나 들 것밖에,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을 잘 알고 또 진헌이나 궁예가 장안을 둘이치기로 설마 오늘 내일이랴, 하루 이틀 지나노라면 무슨 묘리도 생기려니, 그 묘리가 안생긴다 하더라도 설마 내야 어떨라고…… 다 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준 흥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는 병부령 맹공이다.
만일 왕이 자기를 불러, 『 네 궁예를 막으라.』
하고 칙교를 내리시는 날이면 그야말로 봉명이다. 그래서 준 흥이가 어전에서 물러 나오기도 전에 맹공은 그 통통한 몸을 글려 옥좌 앞으로나 아가, 『 병 부령 이손 맹공이 아뢰오.』 하고 엎드렸다.
사람들은 이 땅달보가 무슨 말씀을 아뢰는고 하고 두 눈으로 맹공의 엎딘양을 바라보았다. 맹공은 십년 병부령에 진헌의 난이 일어나기까지는 천하- 127 - 병권을 손에 쥐고 서슬이 푸르렀던 사람으로 재물이 누 거만이요, 세력으로는 서불한 준 흥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군사의 녹은 거의 다 혼자 먹기 때문에, 『 땅딸보 땅달 보배 통만 커서, 삼만명 녹 미를 다 삼킨다.
네 땅딸보 배통이 왜 자리 큰가, 삼만명 군사가 들어 있다네.』
이러한 동욧거리가 되는 터이다.
맹공은 세 번 버리를 조아리며, 『 아뢰 옵기 황송하오나 삼만명 군사는 명색뿐이옵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모두 모으더라도 만명이 될락말락 하옵고, 장안에 있던 군사 오 천명중에서 좀 나이도 젊고 똑똑한 놈들은 거지반 도망하고, 그리고 남은 것들 중에 걸음이나 걸을 만한 놈으로 천명을 골라 일길손(一吉飡) 현승이 진헌 친다 하여 데리고 가옵고 지금 남아 있는 군사라고는 눈이 어두워져서 제 옷의 이도 변변히 못 잡는 것들뿐이옵고 게다가 오랫동안 죽으로만 연명을 하 오니 인제는 상감마나 능행길에 기를 메고 모시고 따라 갈 기운도 있는것 같지 아니하오니, 그 군사를 데리고 궁예를 막을 길은 황소하 오나 망연하 온즉 신은 이 자리에서 병부령의 벼슬을 궐하에 도로 바치오니 다른사람을 시키기와 궁예를 막게 하시옵소서 하고 아뢰오.』 하고 물러나가는 것을, 왕이 노기를 띄운 어성으로, 『 게 있으라!』
하여 맹공을 불러 놓고, 『 십년 병부령에 한 일이 무엇인고? 해마다 막대한 전곡(錢穀)을 들여 군사를 기른 뜻은 국가에 유사한 때에 쓰려 함이어든 제 옷의 이도 못 잡고 깃대 하나 들고 나설 기운도 없는 것들을 죽을 먹여 길러 온 것은 무슨 뜻인고? 짐이 들으니 병부령은 그 바통 속에 삼만명 군사를 길렀다더니 그 말이 옳은 말이로고. ———평할 때에 국록을 배불리 먹다가 이제 일이 잇은 물러 간다 하니 가증한 일이다.』 - 128 - 하고 왕은 용안이 주홍을 부은 듯하고 발을 구르며, 『 서불한!』
하고 부른다.
모든 신하들은 갑자기 무슨 벼락이 내리는고 하고 벌벌 떨었다.
『예.』
하는 준 흥의 대답이 나자마자 왕은, 『 병 부령 맹공을 당장에 내어 버히되 그 배를 갈라 삼만명 군사를 꺼내라! 누구든지 적신 맹공을 두호하는 자는 맹공과 같이 내어 버힐것이요, 또 맹공과 같이 나라이 위태한 때에 편안히 물러가려 하는 자도 내 버히어 태평한 때에 국록을 먹던 창자를 꺼내어 까마귀를 먹이게 하라!』 하고 추상 같은 어명을 내렸다.
금영 장군(禁營將軍) 양문(良文)이 이 명을 받자와 병부령 맹공의 사모와 관복을 벗기고 고하로 끌어 내리니 맹공이 무슨 말을 하려 하나, 입이어 룰하여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고 다만 입에 게거품을 물 따름이다. 계하에 끌어 내린 뒤에는 대령하였던 군사들이 달려들어 붉은 오라로 맹공을 결박 한다.
『곧 병부령 맹공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올리라!』
하고 성화같이 재촉한다.
서불한(舒弗邯) 이하로 문무 백관은 왕이 이처럼 엄한 명을 내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언제 자기의 목을 베라는 영이 내릴까 하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이윽고 금영 장군 양문은 손수 피 흐르는 맹공의 머리를 담은 소반을 왕의 앞에 받들어 드렸다. 맹공의 감지못한 눈이 촛불 빛에 번쩍번쩍 할 때에 사람들의 몸에서 소름이 끼치고 입에 신물이 돌았다.
왕은 한손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맹공의 머리를 쳐들어 좌우에 벌려 선 신하들에게 보이며, 『 너희는 천년 동안 대대로 국록을 먹고 살아 왔다. 이제 국가가 위태 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아껴서 한 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설진대, 다 이와 같 이목을 도려 후세를 징계하리라. 이로부터 군국 대사를 내 몸소 행할 터이니 각 유사(有司)는 내일 안으로 궁예를 치는 대군을 발하도록 성화같이 차비하라. 짐이 몸소 출정할 터이니 모두 칼을 들고 나를 따르라.』 하고 왕은 맹공의 머리를 높이 들어, 『 다 들 이 역적의 머리를 보라.』
하고 신하들 앞으로 굴렸다.
- 129 - 맹공의 머리는 이 사람이 굴려, 다음 사람에게로 보내고 그 사람이 또 굴려 또 그 다음 사람에게로 보내고 이 모양으로 떼굴떼굴 굴려 마지막 사람에게 간 때에는 피도 거의 다 빠지고 허여멀끔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피빠진 맹공의 머리는 그 이튿날 종로에 높이 달리고 왕이 하신 말씀을 그 곁에 대자로 써서 붙였다.
왕은 모든 사하들이 목숨을 버려서라도 궁예를 물리친다는 맹세를 듣고 오경이 친 뒤에야 침전으로 돌아 왔다.
침전에는 대야주의 미장부가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같으면 들어서는 길로 자기를 안고 갖은 희롱을 다할 것이언마는 이때에 왕의 얼굴은 무섭게 엄숙하였다.
왕은 방 한구석에 웬 셈인지 모르고 눈이 멀뚱멀뚱하여 섰는 야 주 미장 부를 보고, 『 칼 쓸 줄도 아나?』
하고 물었다.
미장부는 한걸음 왕의 곁으로 가까이 오며, 『 칼 쓸 줄 모르고 어찌 대장부라 하리까.』
하고 의기 양양하였다.
왕은 다시, 『 활 쏘기도 배웠나?』
한즉, 미장부는 더욱 의기 양양 하여, 『 멀리 당나라에는 모르거니와, 우리 신라에서는 활을 쏘아 나를 겨룰자는 없사옵니다.』
하고 한편 어깨를 쳐든다. 그는 아마 무슨 높은 벼슬이나 얻어 할까 하고 맘이 솔깃하였다.
왕은 못 미더운 듯이 이윽히 미장부를 바라보더니 벽에 갈린 칼을 벗겨 미 장부에게 주며, 『 이 칼을 가지고 이 길로 가서 궁예의 머리를 가지고 오라. 그렇지못하거든 이 칼로 네 머리를 베어 칼과 함께 돌려 보내라. 궁예의 머리를 보기 전에 나는 다시 남자와 자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미장부는 뜻밖의 말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리고 정신 없이 떨리는두 손으로 왕이 주는 칼을 받아 들었다. 칼을 받아 드니 귀가 윙윙 울고 눈이 팽팽 내두르는 듯하였다. 「궁예를?……궁예를?」하고 미장 부는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하며 허리를 굽혀 왕께 절하고 병풍에 벗어 걸었던- 130 - 옷을 벗겨 입고 왕이 주신 칼을 허리에 차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미장부는 내어 보낸 뒤에 왕은 시녀도 다 물리고 혼자서안에 기대어울었다.
진헌이 작폐를 하기로 궁예가 작폐를 하기로, 삼만의 군사가 있은 설마 어떠라고 여태껏 든든히 믿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 병부령의 말을 들으니 오늘 밤으로 궁예가 장안을 엄습한다 하더라도 막을 도리가 없을것이요, 또 것으로는 번드르르한 문무 백관이란 것들도 큰일이 생기면 말 한마디 내지 못하는 양을 볼 때에 왕은 문득 무서운 짐승들이 득시 글 거리는 심심 산중에 혼자 있는 듯한 적막과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 문무 백관들 중에 대부분은 왕이 특별히 생각하여 높은 벼슬을 준 사람들이다. 그것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았던 양을 생각하면 금시에 왕을 건드리는 자가 있 어도한 놈 목숨을 내놓고 대들 자는 없을 것 같다.
왕은 여자에게 특유한 반짝하는 직각(直覺)으로 나라와 자기의 처지가 어떻게 위태한 것을 깨닫고, 또 이것이다 자기의 지난날의 잘못인 것을 깨 달았다. 자기가 왕 된지 근 십년에 날로 한 일은 음탕한 일뿐이었다.
음탕한 일을 하기에 국고는 경갈하고 민심은 이산하였다. 하늘이 믿던 군사와 신하들도 다 믿을 수 없는 헛 값인 것을 생각할 때에 왕은 가슴을치고 울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어머니가 미웠다. 왕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모든 유탕한 버릇을 배웠다. 옛날 책을 보면 미상불 음란한 자는 나라를 망한다는 말도 있었거니와, 설마 내야 그러랴 하고 왕은 스스로 속아 왔다.
그러나 결국 자기도 그 사람이다. 이튿날, 『 궁예는 어진주(御珍州)를 무찌르고 아슬라(阿瑟羅)를 향하여 진군한다.
어진주 도독은 싸와 죽고 군사는 다 궁예에게 항복하였으며 삼월 삼질안으로 서울을 엄습한다고 장담하니 곧 구원병을 보내라.』
하는 아슬라 장군의 장계(壯啓)가 들어 왔다.
왕은 이날 조회에 눈물을 흘리며 군신(君臣)을 향하여 이렇게 윤음( 綸音) ㄹ 내리시었다 ————『 짐이 여자의 몸으로 보위(寶位)에 오른 지 우금 팔재에 덕이 엷고 운이 험하여 한 가지 다스림이 없고 백 가지 어지 어지러움이 있는지라. 이제서에 진헌이 있고 동에 궁예 있어 백성이 도탄에 괴로와하고 사직이 누란( 累卵) 과 같이 위태하였으니, 다 짐의 죄라 생각하며 두려움을 견디기 어렵 도다. 이제 집이 돌아 봄이 있고 또 대아손 치원(致遠)의 충성 된 간함을 들어, 앞으로 전에 하던 잘 못을 버리고 새로운 옳음을 밟아 국궁- 131 - 진췌하여 모든 장사를 새롭게 하려 하노니, 너희 백관 유사는 짐의 뜻을 범 받아 힘쓰고 힘쓸지어다.』 왕은 이 말씀을 할 때에 목소리가 떨리며 눈물이 흘렀다. 서불한 준 흥도 눈물을 흘리고 다른 사람들도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왕은 이내 금영 장군 양문으로 병부령을 삼아 일국 병마를 총관케 하고 최 지원으로 대아손을 삼아 군국 대사에 참예하게 하였다. 그리고 병 부령 양 문을 명하여 즉일로 궁예를 치는 군사를 발하게 하였다.
양문은 어명을 받아 장안에 있는 군사를 모조리 수습하여 보았다. 그러나 활과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갈 만한 군사는 천명도 넘지 못하고, 그 중에도 싸움에 나간다는 말을 듣고 슬몃슬몃 달아나는 자가 많았으며, 군기고( 軍器庫)에 있던 활은 줄이 썩어지고 칼과 창은 녹이 슬고 군복은 썩고 좀이 먹었으며, 말은 먹지를 못하여 뼈만 남고 털세에서는 먼지가 일었다.
양문은 장안 방방 곡곡에 군사를 모집하는 방을 붙이게 하였으나, 그것을 보고 모이는 자는 모두 합하여 백여명에 불과하고 그것도 대개는 일 하기를 싫어하는 무뢰배나 그렇지 아니하면 때묻는 몸에 누더기를 감은거지 들이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아슬라(阿瑟羅)에서는 궁예의 엄습함이 질풍과 같아서 지금 형편으로는 사오일을 견디기 어려움과 전하고 도망하여 오는 원들은 꼬리를 물고 서울로 들어왔다. 장안 백성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늙은이와 어린것들을 붙들고 갈 곳을 몰라 헤매고 방향없이 동서로 유리의 길을 떠났다. 잔사하던 백성들은 가게를 들이고 시제한 돈과 보물을 땅에 묻으며,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뒷문으로 슬슬 식구들과 재물을 뽑아 돌렸다.
양문은 겨우 천명 군사를 만들어 좀 먹은 군복을 입히고 녹는 칼을 들려 일 길손( 一吉飡) 현승(玄昇)으로 장군을 삼아 아슬라로 보내었다.
오랫 동안 조련을 받지 못하여 발도 잘 안 맞는 군사들은 그래도 의기양양하여 복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서울을 떠났으며, 아무도 이 것들이 궁예를 이기고 돌아 오리라고 믿지는 못하였다.
궁예가 자안을 향하고 몰아 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진헌의 군사도 맹렬히 싸움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서울서는 궁예가 먼저 들어 오 나진 헌이가 먼저 들어 오나 하고 근심스러운 고개를 동으로 서로 돌렸다.
검은 구름장이 서쪽에 떴어도 진헌의 군사가 들어 음이 아닌가, 음산한 바람이 동으로서 불어 와도 궁예의 군사가 몰아 옴이 아닌가 하여, 장안- 132 - 백성들은 자다가 바스락 소리만 나도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였다. 종로에는 날마다 「백성들은 안심하라」하고 싸움에 이긴 듯한 말을 써서 붙이나아 무도 그것을 믿는 이는 없었다.
일길손 현승이 거느린 천명 군사가 아슬라성을 치는 날이었다. 아슬라 장군 충신(忠臣)은 죽기로써 궁예를 막았다. 처음에는 편지로써 궁예를 달래었으나 궁예가 웃고 듣지 아니하매, 한번 싸와 장우을 결단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성중에 있는 군사가 천명에 차지 못하니 이것을 가지 고궁 예의 삼천 대군을 이길 가망이 없어 밤낮으로 서울서 구원병이 오 기 만고대하고 갖은 꾀를 다 써서 궁예와 싸울 날이 하루 이틀 미루어 오 다가 마침내 더 쓸 꾀가 없어 이날에 궁예와 대접선이 된 것이다.
충신은 성문을 굳이 닫고, 물 밀듯 사방으로 들어 오는 궁예의 군사를 막았으나 성중에 저축하였던 군량 ·마초도 다하고, 또 하나 둘씩 거꾸러지는 군사가 저녁때에 반 너머 죽어 버리고, 화살조차 남은 것 이 얼마 되지 아니하니, 아무리 하여도 해 지기 전에 성중은 전멸이 되고 말것이다.
충신은 마침 장졸에게 명하여 만일 궁예의 군사가 성문을 깨뜨리고 들어오고 우리 군사가 막을 힘이 없다고 보거든 곧 성중에 불을 놓으라 하였다.
장졸들도 싸움에 이기지 못할 줄을 알았으나, 충신의 의기에 감격 하여 죽거나 살거나 충신과 같이 하기를 맹세하고 마지막 화살이 다 하도록 싸 왔다.
궁예는 북원을 떠난 뒤로 이십여 차를 싸왔으되, 아슬라성과 같이 무섭게 싸우는 대적을 보지 못하였다.
『신랑에도 아직 사람이 있구나, 그것은 충신이로구나.』
하고 궁예는 홀로 한탄하였다. 그리고 궁예는 여러 번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었으나 그럴 때마다 받는 회답은 한결같이.
『차라리 이몸이 죽어 살을 개에게 먹일지언정, 목숨이 살아 나라를 거 스리는 도둑의 신하가 되지 안하리라. 금수도 이 나라의 우로를 받은 은혜를 알거든 너는 사람이 되어 감히 불측한 맘을 품느냐? 곧 목을 늘여 항복하라. 혹 네 목숨을 살리리라.』 하는 것이었다.
석양이 되어 궁예는 더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었다. 그때에 간단히, 『 개여, 내 죽은 몸의 살을 먹을지어다. 하늘이 반드시 너를 벌하시리라.』 하여 죽기까지 싸울 뜻을 보였다.
- 133 - 궁예는 전군을 몰아 아슬라성을 엄살할 제 양진에서 쏘는 활과 던지는 돌이 하늘을 가리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충신의 진중에서 나오는 살은 점점 줄었다. 더욱 주는 틈을 타서 궁예의 군사는 섬에 모래를 넣어 올려 쌓고 사다리를 놓고 성으로 기어 올랐다. 성안에서는 끓인 물과 고추 가루를 던지어 저항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하고 궁예의 군사는 마치 방죽 터진 데로 들여 미는 물 모양으로 성중으로 밀어 들었다.
마침내 먼저 들어 간 궁예의 손으로 성문이 열리고 궁예의 군사는 소리를 지르며 성안으로 들어 갔다. 궁예가 말을 몰아 성문으로 들어 갈 때에 성 중에서 불이 일어나 순식간에 수없는 불기두이 하늘을 태웠다.
이 때에 죽다가 남은 충신의 장졸들은 성중에 불을 놓고 나서 장군 영문에 모이었다. 거의 한사람도 성한 사람이 없고 대개는 한두 군데 살을 맞아 피가 흘렀다. 충신은 남쪽으로 서울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칼을 빼 어그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칼을 받아 곁에 앉은 두 아이를 죽이고 그 칼로 자기의 몸을 찌르고 엎더지었다. 충신은 아내와 아들의 피 묻은 칼을 들고 일어나 좌우에 있는 장졸을 보고, 『 그대들은 잘 싸왔다. 나는 죽어도 황천에서 선인을 만날 면목이 있다.
그러나 이제 승부는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각기 좋은 길을 잡으라. 나는 마지막으로 궁예와 싸와 성을 베개 삼아 죽으리라.』
하고 말에 올랐다. 다른 장졸들도 크게 통곡하고 칼을 들고 충신의 뒤를 따랐다.
현승은 아슬라성을 삼리나 두고 충신의 사자를 만났다. 그는 충신 이 마지막으로 왕께 올리는 장계를 가지고 혼자 말을 달려 서울로 가는 길이다. 애초에 둘이 떠났다가 하나는 서문 밖에서 궁예의 군사의 흐르는 살에 맞아 죽고, 자기 혼자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오는 길이라 하였다.
『인제는 거의 다 죽었겠소. 내가 빠지어 나올 때에 살아 남은 군사가 백 명도 못되었으니 인제는 다 죽었겠소. 서문까지 궁예의 군사에게 빼앗기기 전에 가라 하시어 우리 둘이 빠지어 왔으나, 서문 밖으로 내달 으 니 벌써 궁예의 군사가 성 밑으로 돌아 서문으로 오는 것을 보았소.
인제는 다 죽었겠소. 만일 성중에서 불길이 일어나거든 다 죽은 줄아시오.』
하고, 말이 마치지 아니하여 석양에 비낀 아슬라성 한 굽이를 한번 돌아보고 말을 채치어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그 사자가 얼마를 가지 아니하여 멀리 아슬라성에서는 검은 연기가- 134 - 올랐다. 현승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전군을 몰아 아슬라성을 향하고 달려간다.
해념잇고개라는 조그마한 고개에 올라 서니 바로 아슬라성이 눈앞에 보이는데 성 밑에 개미같이 오물오물하는 것은 분명히 궁예의 군사다.
풀신풀신 오르는 연기는 하나씩 둘씩 점점 늘어 수없는 연기 기둥이 하늘에 올라 이른 봄 동풍에 뭉게뭉게 서쪽으로 밀려 현승의 군사를 향하고 왔다.
점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연기는 더욱 많아지고 집 타는 누릿한 냄새까지 코에 들어 오며 종이나 헝겊 탄 검은 재가 펄펄 날려 현승의 군중에 떨어지었다.
충신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물 끓듯하였다. 아슬라성은 이미 궁예의 손에 들어 가면, 서울의 명맥은 조석에 달린 것이다. 아슬라와 서울 사이에 두 고을이 있으니 거기는 군사도 없고 성도 없다. 궁예의 군사는 무인 지경같이 스치어 들어 올 것이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의논이 생겼다. 혹은 궁예에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진헌의 힘을 빌어 궁예를 막게 하자 하였다. 대아손 효종 은진 헌의 힘을 빌자는 패의 두목이 되고, 대아손 치원은 궁예의 원하는 바를 물어 후히 주고 일시 화친을 청하여 먼 곳으로 물러가게 한 후에 서서히 힘을 모아 나라를 평정할 도리를 하자 함이다. 이 두 가지 의논으로 싸우는 동안에 헌승의 상계가 올라 왔다.
『아슬라를 회복하려고 한번 싸왔으나 중과 부적(衆寡不敵)하와, 군사를 반 이나 잃고 물러와 소을라(小乙羅)를 지키나이다.』
하는 것이었다.
왕은 황망하여 치원의 말을 들어 궁예와 화친을 청하기를 명하였다.
벼슬이나 땅이나 궁예의 소청대로 주고 궁예를 내성(柰城) 이북으로 물러가게만 하라고 하였다.
아제 문제 되는 것은 궁예에게 사자로 갈 사람이다. 진헌에게 사자로 갔던 사람들이 모두 진헌에게 잡혀 죽음을 보고, 아무도 궁예에게서 사자로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날더러 가라면 어찌 하나하고 가슴을 두군거렸다.
이때에 서불한 준 흥이, 『 듣사 온 즉, 궁예는 본시 사문(沙門)이라 하오니 대구 화상( 大矩和尙)을 보 내심이 마땅할까 하옵니다. 화상은 덕이 높고 언변이 좋으니 반드시 궁예를 열복케 할까 하옵니다.』 하였다. 대구 화상은 왕이 즉위하신 처음부터 왕의 노랫동무가 되어- 135 - 세도 하던 중이다.
왕은 준 흥의 말을 옳게 여겨 화상을 돌아 보며 그 뜻을 물었다.
화상은 잠깐 낯빛이 변하였으나 얼른 중의 평심서기를 꾸미고, 『 듣 사온 즉 궁예는 태백산 세달사 중이라 하오니 사람을 세 달사에 보내시와 궁예의 스님되는 이를 부르시와 보내심이 가장 마땅한가하옵니다.』 하고 자기의 몸을 뺀다.
왕은 일변 현승에게 명하여 궁예와 싸우지 말고 오직 재주껏 궁예를 달래어 오륙일만 궁예를 아슬라에 머물게 하라 하고 일변 잘 달리는 말을 골라 세달사에 사람을 보내어 궁예의 스님 되는 중을 불러 오게 하였다.
이때에 허담(虛潭) 화상은 소허와 선종을 다 잃어 버리고 병든 늙은 몸 이 의지 할 곳이 없어 시중 여러 젊은 중들에게 몰려 가며 시중을 받고 어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룬 하담 회상뿐 아니라 사중에 있는 중들도 소 허가 진헌이 되고 선종이 궁예가 되었으리라는 꿈도 못 꾸고 있던 터이라 서울서 온 왕의 사자가, 『 이 절에 궁예라는 중이 있었느냐?』 하고 물을 때에는, 모두 눈이 둥글해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궁예가 애꾸 장군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천하에 애꾸가 한 사람뿐이 아니려든 애꾸 선종이가 궁예 신장군이라는 믿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사중에 연전에 선종이라 부르는 애꾸 중이 있기는 하였으나 궁예는 본 산에 있은 일이 없사옵니다.』
하고 노승은 사신에 아뢰었다.
사신은,
『시각이 급한 때라는 일각도 지체할 수 없으니, 그 선종인가 하는 중의 스님에게로 인도하라.』
하였다.
허담 화상은 왕의 사신이 임하였다는 말을 듣고 놀래어 젊은 중들의 부축을 받어 자리에 일어나 사신을 맞았다.
사신은 공손한 말로, 『 대사가 선종의 스님이요?』
하고 물었다.
허담 화상은 황송하여 여러 번 합창 하며, 『 예, 소승이 상좌 두놈을 두어, 한 놈은 선종이라 하옵고 한 놈은 소 허라 하옵더니 두 놈이, 다 늙고 병든 소승을 버리고 연전에- 136 - 달아났 사옵고, 그런 후로는 어디로 가서 어찌되었사온지 이내 소식이 없사옵니다. 그놈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사온지 알 수 없사오나, 한 놈은 아주 흉물스럽소 간사한 놈이옵고, 한 놈은 정직하오나 우락부락 하옵기로 무슨 큰일이야 하오리까? 아마 사람을 죽였는지 알 수 없사옵니다.』 하고 두 놈을 생각하며 심히 쾌씸한 듯이 화상은 낯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신다.
사신은 더 길게 말하지 아니하고 곧 사중에 명하여 탈것을 장만하게 하고 왕이 화상에게 보내는 대승정(大僧正)의 의복 일습을 영문도 모르는 허담 화상에게 입혀 성화같이 서울로 데리고 올라 왔다.
사중에서도 영문도 모르고, 허담 화상도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왕 이 허담 화상에게 대승정의 법의 일습을 내리신 것을 보니, 불길한 일은 아니라고 안심하고 사중이 모두 따라 나와 동구 바까지 허담 화상을 전송 하였다.
허담은 서울에 오는 길로 왕께 뵈 옵고, 『 들으니 궁예는 본시 대사의 상좌라 하오니, 이제 궁예가 군사를 몰아 서울을 피박하니 대사가 한번 가서 구예와 화친을 하도록 힘을 써 주오.』 하는 왕의 앞인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화상의 눈에는, 그어는 해 늦은 가을 세달사 동구에서 도토리 주워 먹던 흉물스러운 애꾸 아이 놈 이보이고, 『 이 놈 용덕 왕자로구나.』 하고 자기가 물을 때에, 『 아니요, 애꾸가 나 하나 뿐인가요?』
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왕은 허담 화상으로 대승정 국사(大僧正國師)를 봉하여 정사( 正使) 를 삼고, 대아손 치원으로 부사를 삼아, 즉일로 아슬라를 향하고 떠나게하였다.
허담 국사는 누운 대로 가마에 담겨 「이놈 선종이 이놈이」하고 연해 중얼거리며 찬란한 은사(恩賜)의 법의를 연해 만지고 빙그레 웃었다.
아슬라성에 들어 온 궁예는 심히 맘에 흡족하였다. 비록 어제 불에 많은 집이 타 버렸으나 성내에는 고루 거작이 즐비하고 거상 대과 동문에 서남 문과 서문에 닿았으며, 장군 마을을 세달사 대법원당보다도 웅장 한 듯 하였다. 지금까지 여러 고을을 지내 왔으나 이처럼 웅장한 고을은 처음 보았다. 오늘부터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내다 할때에 궁예는 스스로 웃지아니 할 수 없었다.
- 137 - 성에 든 지 이튿날 궁예는 옥문을 열어 모든 죄수를 내아 놓고 일변 장군 충신과 같이 어제 싸움에 죽은 장졸들을 후히 장례하였다. 그날 싸운 양군의 죽은 자가 천여 명이요, 상한 자 천여 명이요, 불탄 집이 이 천 호나 되었다. 만일 해지게 우연히 큰비가 오지 아니하였던들 아슬라성은 온통 재가 될 뻔하였다.
장졸의 장례가 끝난 뒤에 궁예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일변 몸소 주이 되어 싸와 죽은 장졸을 위하여 재를 울리고, 일변 모든 군사들을 한바탕 먹이고 또 성중 주민들을 술을 먹었다.
성중 백성들은 죽은 충신을 사모하지 아니함이 아니나, 또한 새 주인을 기쁘게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 모여 오던 백성들은 모두 왕 께나 뵈 옵는 사람들 모양으로 가정 좋은 옷을 입고 가각 손에 예물을 들 고삼 문에서부터 허리를 굽히고 장군 마을에 들어 왔다. 그중에 나이 많고 지위 있는 몇 사람은 계상에 올라 궁예에게 승전한치하를 아뢰었다. 그러할 때마다 궁예는 가장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백성들이 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를 줄을 모르고 민만하여 하는 것을 보고, 궁예는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자칭하던 옷을 좀더 찬란하게 고치어 대장군의 군복을 삼았다. 그리고 부하 장졸 중에서 사람을 골라 군중과 성 중을 다스리는 여러 벼슬을 내리고 각각 직분을 맡아 정사를 하게 하며, 성 뒷산에 있는 솔밭을 백성에게 주어 성화같이 불탄 집을 다시 축 조하도록 영을 내렸다.
백성들은 점점 궁예의 덕을 칭송하게 되어 혹은 길거리에 선정 비를 세우고, 혹은 성문에 찬양하는 시와 노래를 써 붙이며, 혹은 글을 지어 궁예에게 바치었다. 그중에 어떤 선비는 궁예의 덕을 찬송하여 「 왕덕( 王德) 」 이 있다고 까지 하였다. 또 아슬라성 원근에 있는 모든 절에서는 일제히 궁예를 위하여 재를 베풀고 그 복을 빌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궁예를 흡족하게 하였다.
말을 타고 성내를 순시할 때에 골목 골목 선정비와 송덕표를 보는것이나, 자기가 지나갈 때에 백성들이 다투어 나와서 합창하고 자기를 우 러러 보는 것이나, 어는 것이 없었다. 그중에도 자기를 「왕」의 덕이 있다고 한 것이 아무리 하여도 잊히지 아니하였다.
이 모양으로 오랫 동안 싸운 군사를 쉬게 하고 일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하며, 서울을 들이칠 일과 어머니의 원수를 결박하여 발 아래에 꿇 리고 자기의 손으로 그 목을 베고 간을 내아 어머니의 무덤 앞에 제사 드릴 것을 생각하고, 혹은 흡족하여 웃고, 혹은 이를 갈고 있을 때에 문- 138 - 지키던 군사가 왕의 사신이 이르렀음을 아뢰었다.
『왕의 사신?』
하고 궁예도 놀래었다. 그러면 왕도 벌써 자기의 위엄에 눌려 화친 하는 사신을 보낸 것인가 할 때에 궁예는 더욱 자기의 힘이 위대한 것을 깨 달았다.
『몇 사람이나……왔더냐?』
『한 사십명 되옵고 구중에는 자주 옷을 입은 이와 붉은 옷을 입은 이 가열은 넘사오며, 화친을 청하러 온 사신이라고 말하옵니다.』
하고 문 지키던 군사가 말한다.
궁예는 이윽히 생각 하다가, 『 흥, 화친! 늙은 여우, 젊은 여우가 목을 늘여 내 칼을 받는 것 이 화친이다.』
하고, 궁예는 분함을 이기지 못한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 들라고 일러라.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자.』
하고 또 한번 픽 웃었다.
사신 일행은 궁예의 군사가 인도하는 관객에 들었었다. 그날은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밝은 날에 궁예와 만나기로 하였다.
일행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궁예에게 대하여 할 일을 의논하였다.
『대왕의 직사가 오는데도 성문 밖에 나와 맞지도 아니하니 그런 괘씸한 일 있소?』
하고 분개하는 이도 있었으나, 부사 최 치원은 이런 위급한 경우에 그런 것을 탄할 처지가 아니란 말로 쉬쉬하고 눌러 버렸다.
치원은 설마 궁예가 그날 밤에 몸소는 못 오다리도 사람이라도 보내어 문안을 하리라 하였고, 적어도 이튿날 아침에는 궁예가 몸소 객관에 나와 맞으리라 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밥이 끝나고 해가 한나절이 되어도 궁예가 오기는커녕 궁예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고, 객관을 지키는군 사들이 창과 칼을 든 채로 객관에 들어 와 무엄하게 기웃거렸다.
사신 일행은 모두 울분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진헌 모양으로 당 정에 죽여 버리지는 아니한다 하더라도, 불도 잘때 지 아니한 힝덩그러한 방에 일행을 가둬 놓고는 금침조차 때묻은 것을 주고 조석도 보행 객주의 밥상과 다름이 없을 뿐더러, 술 한잔도 대접함이 없고 잘왔느냐는 문안 한 마디도 없는 것을, 진헌의 행세보다도 더 무례하다고 말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귀엣말 뿐이요, 한참 얼굴에 핏대를 돋치고 말을 하다가도 밖에서 파수하는 군사나, 순도는 군사의 발자취만 들리면 다들 쉬쉬하고 입을- 139 - 다물었다.
『그런 법이 있나?』
『응, 오랑캐 놈 같으니.』
『모가지를 자를 놈 같으니.』
하고 사신 일행은 이를 갈고 궁예를 꾸짖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궁예의 처분만 내리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벌써 낮이 기울었다.
사람들은 다만 허담 화상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상도 금빛이 찬란한 법의 를 입은 채로 세월 없이 들어 누워 눈을 감고 염주를 세어 가며 잠꼬대 모양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찾을 뿐이요, 무슨 도리를 생각하는 모 양도 없었다.
『국사 스님 해가 낮이 기울었읍니다.』
하고 사신 중에 누가 말하면, 허담 화상은 번히 눈을 뜨고, 『 응, 아직 선종(善宗)이놈이 아니 왔나? 고이한 놈 같으니, 평소에도 밥솥에 불을 때다가도 제 맘만 나면 토끼 사냥을 가는 놈이더니.』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소린지 알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염주를 세며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낮이 기울어도 궁예에게서는 소식이 없고 지키는 군사에게 재촉하는 말을하여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점심조차 아니 주니, 일행은 추운 중에도 시장함을 금치 못하여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더러는 때묻은 이불로 몸을 싸고 시장한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떠들지도 못하고 어찌되는 셈을 몰라 몸만 좌우로 흔들고 앉았다.
『국사 스님이 배고픈데 점심도 아니 주니 이런 법이 있읍니까?』
하고 누가 불평을 하면, 허담 화상도 그제야 시장한 것을 깨달은 듯이 침을 삼키며, 『 허, 선종이놈이 토끼 사냥을 가서는 가끔 밥을 굼기더니.』 하고는 또 여전히 태연 무사로 염불만 한다.
팔팔 뛰고 화를 내던 사신 일행도 허담 화상이 태연한 것을 보고는 적 이맘이 가라앉아 화상의 흉내를 내어 염주 대신 손가락으로 꼽아 가며 입속으로 「 나무 나무 나무 나무」하고 염불을 외운다. 이렇게 되면 점점 무시무시한 맘이 생겨 사람들은 목숨줄이 금시에 끊어진 연줄 모양으로 손에서 빠져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글쎄, 이게 웬일이야?』
『이런 법도 있나?』
하고, 사람들은 점점 마당 한복판으로 내려 가는 해 그림자를 보며- 140 - 중얼거렸다. 객사 참새들은 마당으로 오르락 내리락 지저귀되, 장군 마을에서는 오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궁예는 장군 마을에 앉아서 왕의 사신들이 괴로와할 것을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한번 이를 갈았다.———
『오냐, 내 원수 갚을 날이 왔다. 신라 왕! 신라 왕! 너는 내 손에 든 토끼다!』
하고 껄껄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오늘 정사(政事)도 다 끝나고 심심하니, 어디 그 토끼 새끼들이나 불러 들여 볼까?』
하고 사신 일행을 불러 들이라고 영을 내리고, 그 사신들하고 사신들에게 욕을 보일 것을 생각하고 혹은 픽 웃고 혹은 이를 갈았다.
장군 마을에서 사람이 나와 사신을 부른다는 말을 들은 때에 허담 국사는, 『 저 놈이 안 나와 보고 나를 불러?』
하고 소리를 지르며, 『 선종이 놈을 이리로 불러라.』
하고 야료을 하였다.
치원이가 가까스로 허담을 달래어 수레에 태워 앞세우고 장군 마을로 들어 갔다.
왕의 사신이 들어 온다고 백성들은 길가에 나와 구경하였다. 사신들은 각각 벼슬 계제를 따라 혹은 자주 옷을 입고 혹은 분홍 옷을 입고 혹은 푸른 옷을 비고 금과 옥이 찬란한 품대에 난과 학이 날아 오는 듯한 흉배를 붙이고 수레 위에 엄연히 앉았다.
그중에도 허담 국사는 금실 섞어서 짠 자주 비단 장삼에 불 타오르는듯 한 가사를 메고 한 팔목에는 수정 염주를 넌짓 걸고 한손에는 육 환석장( 六環錫杖)을 들고 비스듬히 몸을 수레 나간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입을 우물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수척하였을망정 붉은 얼굴에 은빛 털이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심히 위풍이 있고, 바로 그 뒤에는 달마 존자( 達磨尊者) 와 같이 뚱뚱한 대구 화상(大矩和尙)이 가느란 눈을뜰락감으락하고, 그 뒤에는 치원(致遠)이 반백이나 된 긴 수염을 드리고 어엿히 앉은 것이 신선과 같았다.
사신의 일행은 천천히 몰아 고루(鼓樓)를 지나 원문(轅門)을 지나 박석 길에 수레 바퀴 소리와 당(璫) 소리와 패옥(佩玉) 소리를 당그랑당그랑 울리며 삼문(三門) 밖에 다다라 수레를 멈추었다.
- 141 - 삼 문에도 궁예가 마중 나오지 아니한 것을 보고 치원은 심히 맘 이괴로 왔다. 그렇다고 체면에 그대로 들어 갈 수도 없어 한참이나 거기서 머물러 어찌할까 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때에 대구 화상이 한번 낯을 찌푸리더니 수레에서 내려 창검이 별 걸듯한 사이를 대답보로 걸어 삼문을 들어 가 계상에 올라 궁예의 앞에나 아가, 『 태백산 세달사 허담 스님 행차시오.』 하고 마을이 떠나가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물러나왔다. 범패( 梵唄) 로 닦은 대구 화상의 목소리는 큰 종소리와 같이 뜨르르 울렸다. 그 소리에 모든 사람들은 놀라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궁예도 놀랐다. 그러면 허담 국사는 자기의 스님인 허담 화상인가 그 병든 허담 화상이 국사는 어인 국사인가 하고 곧 일어나 삼문으로 나와 본 즉, 수레 난간에 기대어 앉은 이는 과연 삼년 전에 떠난 허담 스님이었다.
『소자 선종이 아뢰오.』
하였다.
허담 화상은 눈을 번쩍 떠서 수레 앞에 무릎을 꾼 선종을 이윽히 보더니, 『 이 놈, 토끼 사냥을 간 줄만 알았더니 여기 와서 이런 짓을 하고있었어? 고이한 놈 같으니, 소허(少虛) 놈은 어디 갔단 말이냐? 두 놈이 다 똑 같은 놈이어니.』 궁예는 고개를 들어 허담을 보며, 『 소 허는 진헌이라 일컫고, 후백제 왕이 되었읍니다.』
『후백제 왕?』
하고 허담 화상은 웃으며, 『 그래 너도 왕이 될 생각이냐? 부처럼 되어 볼 맘은 생심도 못하고 겨우왕이야? 허허, 좀된 놈 같으니, 어서 민간에 나와 작폐 맏고 날 따라 절로 들어 가자!』 하고 석장을 들어 찬란한 장군의 복장을 입은 궁예의 등을 후려 갈긴다.
궁예는 허담 화상이 이렇게 무서운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저 맘 좋고 못난 중이라고만 생각하였고 스님의 정의를 생각하 고삼 문 밖에 나와 맞을 때에도 자기의 위풍만 보면, 스님도 두려워하는 맘을 가지 리라고 속으로 믿었었다. 그러나 허담 화상이 자기를 세달사에 잇을 때와 같은 어린 상좌로 여기는 것을 당할 때에 궁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김에 칼을 빼어 화상을 베어 버릴 생각도 났으나, 궁예는 꾹 참고 손수 허담 스님을 이끌어 안으로 인도하였다. 허담은 비씰 비씰 궁예에게 부액을- 142 - 받아 안으로 가면서도, 『 이 놈 날 따라 가련? 왜 중놈이 세상에 내려 와서 작폐를 하여? 고이한 놈 같으니, 네가 없으면 내 죽을 누가 쑨단 말이냐? 고이한 놈 같으니, 소 허 놈이 왕이 되었어? 좀된 놈 같으니.』 하고 중얼거리는 마지 아니한다.
궁예는 허담 화상을 모시어다가 내아(內衙)에 자리를 깔고 눕혔다.
화상은 따뜻한 아랫목 부드러운 금침에 몸이 편안하여 순식간에 드렁드렁코를 골기를 시작하였다.
궁예는 그제야 마을에 나와 좌정하고 치원 이하 여러 사신을 대하였다.
치원은 길이 두 자나 넘는 붉은 비단보로 쌀 상자들과 오동 칼집에 자금( 資金)으로 용을 아로새긴 칼 하나와 맨 나중에 남산자옥으로 새 신인( 印) 하나와 기들과 도끼 하나와 병부(兵符) 하나를 내어 놓았다.
궁예는 보기를 다하고 그 첩지와 인과 병부를 손으로 밀어 치원에게 주며, 『 원로에 이 무거운 것을 오노라고 수소하였소. 그러나 이곡에는 신라왕에게 봉작(封爵)을 받을 사람은 없더라도 당신네 여왕께 아뢰오. 궁예가 원하는 것은 두 늙은 여우의 머리라고 전하고 자세한 말은 삼월 삼질 날 서울서 만날 때에 청련각(靑蓮閣) 위에서 하자고 말전하오.』 하였다.
치원이나 다른 사신들이나 궁예의 말에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 두 늙은 여우의 머리」란 무엇이며 「청련각에서」가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치원은 일이 다 틀린 줄을 알았으나 봉명 사신으로서 이만하고 말 수는 없어서 이윽히 생각하던 끝에 위엄을 갖추어 지금 각처에 도둑이 봉기하 여창 생이 도탄 중에 괴로와하니, 이때는 정히 충신 열사가 나라를 위하여 큰 뜻을 펼 때라. 왕이 어지러운 천하를 진정할 인재를 얻으려고 소의 한식으로 신념을 믿지 아니하여 궁예가 재주와 덕망이 높음을 알고 이에 특히 사자를 보내어 높은 벼슬로 부르시는 것인 즉, 궁예는 응당 충의지 사일 것이니 옛날의 제갈 무후의 본을 받아 왕사를 위하여 국궁 진췌함이 마땅하다는 것과, 나중에는 지금 영동과 관북 지방에 인심이 이반 하여 북으로 오랑캐와 통한다는 소문까지 있으되 이것을 진정할 이는 오직 궁예뿐이니, 시각을 지체 말고 군사를 돌려 북을 향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도도 수천 언으로 말하였다. 멀리 당나라 장안에서 닦여난 치원의 구변은 참으로 현하(懸河)와 같았다. 더구나 치원의 일언 일구에는 근심과 정성과- 143 - 힘이 한데 엉키어 마디마디 사람의 폐간을 찌르고 장군 마을의 기둥과 주춧돌까지도 피땀을 흘릴 듯하였다. 마침내 치원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 나도 십수년 세상 일에 맘을 끊고 운수 종정으로 산수간에 방랑 하였으나, 이때를 당하여 안연히 있을 수가 없어 대왕 마마의 부르 심으로 일어났으니 장군도 돌이켜 생각하시기를 바라오.』 하고 말을 끊었다.
그후에도 치원은 두어 번 궁예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궁예더러 함께 기울어지는 나라를 붙들기를 권하였다. 치원은 궁예가 의리 있는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의리로 궁예를 움직이려 하였다.
궁예도 치원의 정성과 충의에 감동하지 아니함이 아니었다. 더우기 치원의 덕에 감복되어 치원을 자기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그러하 나치원의 충의를 볼 때에 궁예는 감히 치원더러 왕을 배반하고 자기의 사람이 되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다.
치원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 와서는 모든 것을 당나라와 같이 하려고 힘을 쓰고 본디 우리 나라 것은 다 이적(夷狄)의 것으로 더럽게만 보았다.
그러나 점점 내 나라 것을 알아 보고, 낫살을 먹을수록 내 나라는 내나라요, 당나라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고 더구나 산중에 들어 방랑한 지 십년 동안에 여러 국선(國仙)을 만나 도(道)로 토론할 때에 우리 나라에 예 로부터 전하는 도가 우리 나라 사람의 골수에 깊이 박혔을뿐더러, 결코 남에게 지지 아니함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치원은 오랫 동안 뒤집어 쓰고있던 당나라 사람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참된 신라 사람이 되어 기울어지는 신라 나라를 바로 잡기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시무 십여 조( 時務十餘條)라는 상소(上疏)를 품고 표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때에 마침 진헌의 무진주(武珍州)에 일나 서남 여러 고을을 엄 습하고 북에 양길과 기헌이 있으며 각지에도 도둑은 봉기하고 국고는 경갈한 때라, 왕도 그윽히 앞일을 근심할 때이었으므로 치원의 상소를 들어 그 말대로 정사를 개혁하기로 하였다. 그러할 때에 궁예가 마른 벌판에 붙는 불의형 세로 몰아 들어 온 것이다. 치원이 비록 벼슬이 아손에 지나지 못 하나 내외 대소의 정사는 치원의 말대로 되는 때이었다. 치원을 진헌을 손에 넣어 보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었으나, 사람이 간교하고 의리가 없으며 어찌 할 수 없고, 궁예는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안위하고 비록 대적이라고 죽은 후에는 그 신채를 후히 장사하고 그 유족을 후히 보호한단 말을 들을 때에, 그는 뛰어난 큰 뜻을 품은 사람인 줄을 짐작하고 왕께 누누이 여쭈어- 144 - 궁예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국가 대사를 맡기기를 아뢴 것이다. 그러 나왕은 치원의 뜻을 바로 알아 듣지 못하고 또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큰 판국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궁예를 멀리 변방으로 내쫓아 일시 편안함을 얻을 양으로 관북 대도 둑이라는 벼슬을 새로 마련하여 궁예를 속여 쫓는 수단을 삼은 것이다.
치원은 궁예를 대하매, 위인이 왕자의 풍이 있고 위의와 언사의 비범을 깨 달았다. 그래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궁예와 의를 맺어 손을 맞잡고 자기는 문정( 文政)을 맡고 궁예는 병마(兵馬)를 맡아, 나라를 바로 잡는 큰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진정을 떨어 놓고, 천언만어로 궁예를 달래었다.
그럴 때마다 궁예는, 『 썩은 기둥이 다시 서오? 새 기둥을 세우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고 은근히 새로 나라를 세울 뜻을 보였다.
궁예의 이 말을 듣고는 치원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치원은 궁예더러 같이 나라를 바로 잠자고 달래고 허담 화상은 궁예를 대 할 때마다, 『 선종아, 절로 들어 가자.』
하고 다시 중이 되리라고 졸랐다.
마침내 치원의 원하는 뜻은 이르지 못하고 다만 치원에게서 다시 무슨 기별이 있기까지 궁예가 서울을 엄습하지 않기를 약속하고 치 원 은아 슬 라성을 떠났다. 그날에 궁예는 큰 잔치를 베풀어 허담과 치원과 기타 사신 일행을 대접하고 남문 밖까지 궁예 몸소 사신들을 전송하였다.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에도 궁예와 치원은 서로 작별을 아끼고 허담 은어서 민간 작폐를 그치고 산으로 돌어 오라고 궁예에게 호령을 하였다.
사신 일행이 아슬라성에서 무사히 돌아 옴을 보고 장안에서는 적이 안심 되었다. 그러나, 『 두 늙은 여우의 머리를 보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청련각에서 만나자.』 하는 궁예의 말을 들을 때에 왕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하여 좌우에게 물었으나 역시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왕은 생각다 못하여 오래 잊어버리고 만나지 못하던 어머니를 찾았다. 육십이 넘은 두 분 태후는 뒷 대궐에 함께 살며 어렸을 때 형제로 의 좋게 자라던 모양으로 중년의 모든 미움과 시기도 다 잊어 버리고 슬프나마 의좋게 함께 늙었다.
인제는 두 분 태후에게는 아무 세력도 없으니 찾아 올 사람도 없고, 또이 세상에 아무 욕심도 없으니 누구를 특별히 찾아 만날 필요도 없었다.
오직 예로부터 모시던 늙은 궁녀들과 벗을 삼아 이따금 늙은 여승이나- 145 - 청 하여 다가 진언(眞言)이나 외고 염불이나 하며 대자 대비한 관세음보살과 아미 타불이세 매어 달려 왕생 극락하는 길이나 닦을 뿐이었다. 왕의 따님으로 왕의 아내로 왕의 어머니로 일국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두 분 태후도 앞으로 죽을 날을 바라볼 때에는 오직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아주하 잘 것 없는 죄인이었다. 일생에 지난 일을 생각하며 현세세서도 깨어서 생각으로나 잠들어서 꿈으로나 수없이 지은 죄가 무섭지 아니하고 이롭지아니한 것이 없으려든, 하물며 염라대왕의 앞에서 저울에 죄를 달을 ㄸ 깨에 아귀도( 餓鬼道) 나 축생도(畜生道)나 지옥도(地獄道)를 벗어날 길이 없을듯 하였다.
『대자 대비하신 관세보살님께만 매달리시고 아미타부처님만 부르시 면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습니다. 왕생 극락하십니다.』
하는 여승의 말에 위로를 받아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만 불렀다. 혹 경문왕이 승하하신 날이나 기타 두 분의 맘에 찔리는 기억이 있는 날에는 특별히 두 분을 원망할 듯한 여러 사람의 위패를 써 놓고 승을 불러다가 정성으로 재를 올려 그 사람들의 원혼이 원망을 풀고 왕생 극락 하기를 빌고, 밤을 새워 갖은 진언을 외우며 염불을 하였다. 두 분을 본받아서 뒷대궐에 모시는 궁녀들도 수없이 합창을 하고 수없이 염불을 하였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기왓골에도 쑥대가 길로 자란 속에서 십 여명 늙은 부인들은 세상과는 모든 인연은 끊고 염주를 세며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만 불렀다.
오랫 동안 이러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두 분 태후와 늙은 궁녀들은 얼굴과 태도조차 변하여 이 세상 사람인 기색이 없고, 눈이 멍하여 마치 등신 같으며 한번 앉으면 무슨 일이 있기 전에는 일어날 생각도 아니하고 피차에 이야기도 아니하고 마주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저마다 제 생각과 제 염불에만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딴 세상의 뒷대궐에도 봄이 오면 마당의 썩은 풀 뿌리에서 움도 나오고, 몇 십년 전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뿌리에서 꽃도 피고 제비 소리도 나고, 가을이면 처량한 달빛에 지나가는 기러기의 소리도 울려 왔다. 그러할 때에는 이 늙은이들은 또 봄이 왔나 가을이 되었나하고말 없이 한숨을 짓고 옷을 갈아 입었다.
이러한 뒷대궐에 왕은 한번도 와 본 일이 없었다. 왕이 어머니의 얼굴을 대한 지가 오륙년이 지났다. 그래서 뒷대궐에 있는 이들은 일생에 왕의 낯을 다시 대할 생각도 아니하고 다만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왕의 복을 빌 고왕을 위하여 임부를 하였다.
- 146 - 그러하던 차에 천만 뜻밖에 하루는 왕의 행차가 듭신다는 기별이 와서 두 분 태후마마 이하로 여러 늙은 궁녀들은 갑저기 오래 들었던 잠을 놀래어 깨어나는 듯하여 눈들이 둥그레져 사로 바라보았다. 서로 바라보니 서로 평생에 만나 보지 못한 사람 같아서, 『 다 들 늙었구나 ————변하였구나!』 하고 속으로 한탄하였다.
뒷대궐에서는 왕의 거동을 맞을 준비를 하노라고 바빴다. 궁녀들이 손수 마당에 황토를 ㅕ고 문 위에 남거미줄을 쓸고 마루에 먼지를 쓸고 마루에 먼지를 쓸고, 여러 해 동안 입어 보지 못하고 장 속에 박아 두었던 물 다 빠진 옷들도 내어 입었다. 그리고 왕이 들어 와 앉으실 대청 정면에는 낡은 비단 보료와 방석을 깔았다. 모든 준비가 다 된 뒤에야,< 상감 마마께서 어찌하여 오시는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아무도 입 밖에 내아 말은 아니하였다.
왕은 극히 간단한 궁녀 두 사람의 부액을 받아 들어 오시었다.
쓸쓸하게도 된 집과 이 세상 사람 같지 아니한 궁녀들을 보고 왕도 감개 무량한 모양으로 얼굴에 검은 구름이 끼었다.
두 분 태후도 끝까지 나와 맞았다. 왕은 맨 처음 자기를 낳아 준 친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음에는 이모요, 또 어머니 되는 정화마마의 손을 잡았다.
『어마마마!』
하는 왕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두 태후마마의 주름 잡힌 뺨에도 눈물이 번쩍 거렸 다.
『상감마마!』
하고, 영화마마는 목이 메어 다시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자식에게 대한 어머니의 정은 지난 날의 더러운 질투와 미움에 대한 후회의 정이 함께 복받쳐 올라 와 떨리는 몸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지나 놓고 보면, 한바탕 부끄럽고 신물되는 꿈인 것을 내 어찌 그리하였던고 할 때에 두 분 마마나 상감마나나 모두 비창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한번만 더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런 짓을 말았을껄.』
하고 두 분 마마는 잘 돌아 가지 않는 목소리로,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불렀다.
왕도 자리에 앉고 늙은 궁녀들도 왕의 명으로 둘러 앉았다. 늙은 궁녀들 중에는 참다 못하여 문밖으로 나아가 느껴 우는 이도 있었고 누구나 눈에- 147 - 손을 대지 아니한 이는 없었다. 한참 동안은 혹혹 느낀 소리 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그 큰 집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서로 울음을 그치려고 코를 들여마시나, 눈을 떠서 피파의 얼굴울 바라보면 새삼스러운 설움이 복받치어 새로 눈물이 흘러 내렷다.
왕도 오래간만에 어머니를 대할 생각을 할 때에는 다소 감격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이처럼 피차에 비상할 줄은 뜻하지 못하였다. 일생의 모든 죄와는 슬픔이 다한데 모여 나오는 듯하고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의 불행이 다 자기로 말미암아 생긴 듯할 때에 왕은 가슴이 저리도록 슬펐다.
그러나 왕은 이러고만 잇을 수가 없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한가하게 슬퍼 할 처지가 아니다. 왕은 입을 열어, 『 어마 마마 지금 나라에 큰일이 생겨 아무리 생각하여도 좋은 도리가 없고 만조 제신도 꾀를 내는 자가 없어서 어마마마께 아뢰어 보려고 왔 읍니 다. 늙은이는 젊은 이에게 없는 지혜가 있다고 하옵니다.』 하였다.
『나라의 큰일이라니 무슨 큰일이요?』
두 분 마마는 놀래는 듯이 근심스럽게 묻는다.
왕은 진헌의 이야기와 궁예의 이야기를 대강 말한 뒤에, 『 궁예의 말이 늙은 두 여우의 머리를 보내면 화친도 하려니와, 그렇지아니하면 삼월 삼진날 청련각에서 만나자 하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읍니다.』 하였다.
『청련각?』
하고 영화마마는 파랗게 질리며, 『 그러면 그 궁예라는 것이 용덕아기가 아닌가.』
한다.
『용덕아기?』
하고 정화마마도 펄쩍 뛴다. 늙은 궁녀들도 모두 놀라고 왕도 그제야 어려서 듣던 이야기가 생각 난다.
용덕아기란 말에 왕도 놀라며, 『 어떻게 궁예가 용덕왕자인 줄 아시오?』
하고 영화마마께 물었다. 왕은 용덕아기라는 왕자가 있었다는 말과, 아버지 경문대왕께서 죽이라 하시어서 우모가 안고 도망하였다는 말과, 경문대왕 승하 하신 때에 어떤 애꾸 아이놈이 용덕왕자의 쏜 살이 대궐 기둥에 박히어 꼬리를 흔들고 아무리 하여도 빠지지를 아니하였고 가까스로 뺄 때에도- 148 -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하여 그 자국까지 본 것과, 이만큼은 알았으나 그 이상 자세한 말은 듣지도 못하고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다. 대개 대궐 안에서는 뒷 대궐마마나 용덕왕자 이야기를 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영화태후는 길게 한숨을 쉬며, 『 청련 각에서 만나자는 말은 분명 용덕왕자요.』
하고 말하기 괴로운 듯이 용덕아기이 어머니 되는 뒷대궐마마가 청련 각에서 연못을 향하고 내어 던진 것을 유모가 받아 가지고 갔단 말을 하고, 맘이 괴로와 차마 더 말을 못하는 듯이 말을 끊고 염주를 만지면서 들릴 락말락하게 염불을 한 후에, 『 그 뒷대궐마마가 바로 여기 있었소. 여기 있기 때문에 뒷 대궐 마마라고 불렀소.』 하고, 방안의 무엇을 보는 듯이 눈을 들어 사방을 돌아 본다. 다른사람들도 모두 방을 눌러 보고 몸에 소름이 끼치었다. 왕도 여자의 본능으로 무서움이 생겨 몸을 한번 소스라 치며, 『 그래 뒷대궐마마는 왜 죽었소?』 하고 물었다.
이 말에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여기 있는 늙은 궁녀들은 다 그때부터 두 분 마마를 모시어 모든 일을 다 아는 까닭이다.
두 분 태후는 입술이 벌벌 떨린 뿐이요, 혀가 돌아 가지 아니하였다.
삼십년 잊어 버렸던 죄악이 이처럼 다시 드러나서 나라에 큰 화단이 될줄을 어찌 알았으랴.
<아이 끊어질 줄 모르는 인과의 줄이어!>
하고 영화마마는 안 보이는 칼로 가슴을 어이는 듯이 괴로왔다.
이 눈치를 보고 잇던 궁녀 하나가 왕의 앞에 나앉으며, 『 뒷 대궐 마마가 이손 유흥(伊飡允興)과 간통한 줄을 아옵시고 또 용덕 아기께서 얼굴이 이손 윤흥과 같다 하오시어, 경문대왕 마마께서 모자를 다 죽이라 하시었읍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면 용덕아기는 우리와 동기가 아니요, 운흥의 씨던가.』
하고 왕이 고개를 끄덕끄덕할 때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영화마마는 가위 눌린 듯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몸을 떨며, 『 아니요, 아니요. 뒷대궐마마는 아무 죄도 없소. 모든 것이 다 내 죄요.
다 내가 뒷대궐마마를 시기해서 지어낸 소리요. 어찌하면 상감 마마의 총애를 받는 저것을 없이할까, 어찌하면 항상 내 말을 아니 듣는 윤흥의 삼- 149 - 형제를 없애 버릴까 하여, 내가 그런 소리를 지어 낸 것이요. 요망 하고 음탕한 계집이 말한 뒤로 세 충신과 한 열녀를 죽게 하고 이처럼 나라에 큰 화단을 블렀으나, 모두 내 죄요. 죄 없이 흐른 열녀의 피와 충신의 피가 삼십 년을 지나도록 스러지지 아니하고 있다가 지금 원수 갚기를 원할것이요…… 내가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기로 이 못 한 원혼들이 나를 지옥으로 끌어 넣고야 말 것이요.』 하고 왕을 향 하여, 『 모두 내 죄요, 모두 내 죄요. 오늘날이 있기를 기다리고 죄 많은 내 목숨이 살아 온 것이요, 상감마마는 아무 염려 마오. 내머리를 드릴 것이니 용덕 아기에게 보내어 주어. 마땅히 하올 일이 오늘에야 왔소.』 영화마마의 말이 그치자 정화 마마도, 『 나도 같이 갑시다. 두 늙은 여우의 머리라 하였으니 내 머리도 같이 줍시다. 백제·고구려의 이백년 묵은 원혼도 여태껏 돌아 갈 줄을 모르고 피 묻은 원한이 뭉치고 뭉치어 원수의 피를 마시고야 쉬거든 칼 물고 죽은 원혼이 삼십년에 스러질 리가 있겠소? 밤마다 꿈에 보이는 것도 원 수의 피를 먹으려는 뜻이요, 원한이란 갈수록 커지고 들수록 깊어지는 것이요.
한 여자의 원한이 삼십년을 자라고 자라서 나라에 큰 화단이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의 피를 주어 돌아 가지 못하는 원혼을 돌려 보냅시다.』
하고 일어나 곁방으로 들어 가려 하였다. 영화마마도 뒤를 따른다. 곧 칼을 들어 자결하려 한 것이다.
늙은 궁녀들은 울며 일어나는 두 분 마마를 붙들었다.
『붙들지 말라! 붙들지 말라! 이 원한을 두고 삼생을 두루 돌며 뉘우침의 괴로움을 당하게 말라, 칼만 한번 번 찍하면 이몸을 가지고 금생에 지은 모든 죄를 소멸지는 못하여도 죄의 뿌리는 끊을 수도 있을 것을 ———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죽거든 머리는 용덕아기에게 보내고 몸은 들에 버려까 막 까치의 밥이 되게 하라.』 하고, 두 분 마마는 미친 듯이 여러 늙은 궁녀들의 붙드는 손을 뿌리치려 하나, 여러 손에 끌려 펄썩 주저앉으며, 『 아아, 어찌하잔 말인고? 죽어서 만일 혼백이 잇다 하면 삼도천( 三途川)을 건널 때에 내 손으로 죽인 수없는 원혼들을 어떻게 헤어 나며 황천(黃泉)에 들어 가서 먼저 가신 대왕마마를 무슨 면옥으로 보이랴? 이몸의 목숨을 끊을 칼은 없던가? 만일 몸은 죽어도 혼은 살아있다 하면, 저 원혼의 원망을 내 어찌 받으리. 십년 이십년도 어렵거든 영 겁( 永劫) 의 괴로움을 내 어이 받으리. 아아, 혼까지 태워 버리는 불은- 150 - 없을까?』 영화마마가 목을 놓아 울면 정화마마도 따라서, 『 일생에 찼던 영화가 지나고 보니 회한(悔恨)뿐이로구나! 한 찰나( 刹那) 쾌락과 미움이 영겁의 지옥이 될 줄을 몰랐구나!』 하고 운다.
두 분 마마가 울고 하소연하는 것을 볼 때에 왕도 지나간 일생의 모든 불의의 쾌락이 일시에 시커먼 불길이 되어 자기를 살려 놓고 태우는듯 하였다. 천년 종사를 이 꼴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도 땅에도 설 곳이 없는 몸이 된 것이 분명히 눈앞에 보일 때에 왕은 견딜 수 없이 슬펐다. 그러나 모모이 일국의 왕이 되었으니 죽기도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왕은 복받치어 오르는 뉘우침과 괴로움을 꾹 참고 태연한 두 분 마마를 위로하렸다 ———『 과도 히 슬퍼 마시오. 궁예가 진실로 용덕아기라 하면 두 분어 마마마께서는 원수라 하더라도 나와는 동기 형제니 설마 무슨 도리가 없으리까. 들으니 궁예는 진헌과 달라 인정이 있고 덕이 잇다 하니 피를 나눈 누이의 말을 설마 아니 들으리까. 자연 도리 있을 것이니, 부디과도 히 설어 마시오.』 하고, 차마 그 자리에 더 있지 못하여 두 분 마마께 하직하고 왕은 침전으로 돌아 오시었다.
침전에 돌아 와 왕은 좌우를 물리고 혼자 목을 놓아 울었다. 지금까지 체면에 참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온 것이다. 더구나 저렇게도 애통하는 어머니를 볼 때에 자식의 슬픈 정이 나고 자기의 친어머니와 그동안에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관계로 지낸 것을 생각할 때에 억제할 수없이 뉘우침이 칼날이 가슴 속에 돌았다.
왕은 그날 종일을 눈물로 보내고 온 밤을 옷도 안 끄르고 근심으로 새웠다. 오랫 동안 졸다가 깜짝 놀라 일어난 왕의 양심은 새로 갈아 놓은 칼날 모양으로 사정 없이 왕의 몸과 맘을 찌르고 비웃었다.
이튿날 평명에 뒷 대궐 궁녀는 왕에게 무서운 소식을 전하였다. 그 소식은 이러하였다 ———— 그날 종일 궁녀들은 잠시도 두 분 마마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꼭 따랐다. 여러 궁녀의 권으로 저녁 진지도 물에 말아서 조금 뜨시고 불을 켜놓은 뒤에는 별로 괴로와 하는 빛도 없이 궁녀들과 이야기도 하고 분황사( 芬皇寺) 의 늙은 승 청조(淸照)를 불러 들여 법화(法話)를 들었다.
그러다가 청조도 나가고 두 분 마마는 평시에 모시고 자던 궁녀더러는, 『 오늘 밤에는 우리 형제 같이 갈 터이니 들지 말라.』
- 151 - 하고, 두 분이 관세음보살의 금상(金像)을 모신 영화마마의 첩방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가끔 두 분이 관세음보살님 바에서 주무신 일이 있으므로 궁녀들도 하릴없이 뒤에 떨어지어 곁방에 모여 손근소근 이야기도 하고 가끔 벽에 귀를 대고 엿듣기도 하였다. 밤이 깊어 삼경 북이 울릴 때까지도 두 분이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서 안심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늙은 궁녀들은 하나씩 둘씩 감이 들어 버리고 사경 북이 올 때에는 영화마마를 모시던 궁녀 하나만이 깨어 있었다. 여전히 염불 소리가 울려 왔다. 밤이 깊어 고요한 넓은 대궐 속에 구슬픈 염불 소리가끊이락이으락하였다.
그렇게 잠이 들지 아니하고 엿듣다가 늙은 궁녀는 잠깐 잠이 들었다.
그랬다가 오경북을 치는 소리에 놀래어 깨어 엿들으니, 그때에는 염불 소리가 없었다. 맘에 웬일인가 하는 생각도 났으나 무엄하게 문을 열어 볼 수도 없어 아마 잠이 드셨나보다 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잠이 들었던 궁녀들은 모두 일어나서 서로 바라보았다. 여럿이 의논 한 끝에 아무리 하여도 수상하다 하여, 두 분마마께서 주무시는 문밖에 가서, 『 태후 마마, 태후마마.』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때에 문밖에 있던 궁녀들은 몸에 냉수를 끼 얹으는 듯하였다.
마침내 영화마마를 모시던 늙은 궁녀가 황황하게 문을 열었다. 문 고리는 걸리지 아니하였다. 문밖에 섰던 여러 궁녀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관세음보살 불단(佛壇) 앞에는 거의 다 타버린 촛불을 둘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펄렁거리고 불단을 향하여 두 분 마마는 끓어 엎디어 예 불하는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있다. 정화마마는 몸이 한편으로 좀 쓰러졌으나 영화 마마는 금시에 일어날 듯이 두 분의 입은 하얀 옷자락은 방에 깔려 피에 젖었고 방안에서 피비린 내가 코를 받치며 아직 채 굳지 아니한 피가 촛불에 번쩍번쩍한다.
궁녀들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방에 들어 가 두 분 마마에게 매어 달렸다. 그러나 벌써 두 분의 몸은 식고 굳었다.
늙은 궁녀는 향로에 새로 향을 피워 놓고 곧 왕께로 이 말을 전하러 간것이다.
왕은 궁녀의 눈물 섞어 아뢰는 말을 다 듣더니, 『 칼로 돌아 가시었더냐?』
하고 물었다.
『예, 두 분 마마께옵서 다 칼을 입에 무시옵고, 그림에 그린 듯이 곱게- 152 - 돌아 가시었읍니다.』
왕은 다시 여러 가지로 자세한 말을 물은 뒤에, 『 마마께서는 왕생 극락을 하시었을까?』
하고 물었다.
늙은 궁녀는 새로 솟는 설움을 못 이가 한참 동안 목이 메어 말을못하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눈물에 젖은 늙은 얼굴로 왕을 바라보며, 『 분명 두 분 마마께서옵서는 왕생 극락하시었읍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금생 모든 죄를 뉘우치고 염불 공덕을 세우시었사오니 왕생 극락은 의심 없 읍니다.』 하고 더욱 느껴 운다.
북원에서는 양길이 궁예의 이름이 갑자기 높아 가는 것을 심히 맘에 불평 하였다. 그래서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궁예더러 급히 돌아 오기를 명 하였으나, 듣지 아니할뿐더러, 아슬라성에 들어 간 후에는 대장군이라고 자칭 하였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양길은 이를 갈았다.
『이놈이, 이놈이 은혜를 모르고.』
하고 펄펄 뛰었다.
그리하던 차에 왕의 사신이 아슬라성에 와서 궁예를 찾아 보았고 궁예는 왕에게서 높은 벼슬을 받아 왕의 사신이 돌아 갈 때에는 큰 잔치를 베풀고 성문 밖에 나와 전송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속이 끓어 오를 듯이 미운 생각과 시기지심이 났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제는 궁예는 자기의 대적이아니다. 북원 성내에서도 아동 주졸까지도 애꾸눈 신장군이라 하여 자기보다도 궁예를 더 높게 보고 더 어려워하였다.
『그놈을 왜 그때에 아니 죽여 버렸던가. 왜 잡혔던 호랑이를 들에 놓아 후환을 끼쳤는가.』
하고 양길은 배꼽을 물어 뜯었다.
이때까지는 서울서 혹 상을 준다는 말도 오고, 벼슬을 준다는 말도 왔다.
그러할 때마다 양길은 큰 소리를 하고 뻗대었다. 그러나 궁예가 나선 뒤에는 서울서나 세상에 서니 양길의 이름을 잊어 버리게 되었다.
궁예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애타는 것은 양길뿐이 아니었다.
진헌도 무엇인지경을 횡해와듯이 서남 여러 고을을 휩쓸고 이대 로만 가면, 불원에 서울까지도 엄습하려는 뜻을 두었던 차에, 궁예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차차 들으매, 그가 선종인 것을 알고 더욱 놀래었다.
궁예가 선조일진댄, 그는 반드시 자기에게 대하여 좋지 아니한 생각을- 153 - 가지었 으리라고 진헌은 생각하였다. 자기가 허담 스님 밑에 있을 때에도 선종과 자연히 사이가 좋지 못하였거니와, 백의 국선에게 재주를 배울 때에도 선종을 속였고 떠날 때에도 아무 말도 아니하였던 것이다. 선종 의원 험을 샀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궁예의 세력이나 저다지 훌륭하니 미웁기 그지없었다. 자기는 궁예의 밑으로 들어 갈 수 없고, 궁예도 자기의 밑에 들어 올 리는 만무하였다. 그러할진댄 세불 양립이니, 둘 중에 하나는 없어질 밖에 수가 없다고, 군사를 들어 대빈에 궁예를 무찔러 버릴까 싶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궁예의 세력은 점점 커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할 때에는 진헌의 맘은 괴로왔다.
그러할 즈음에도 왕의 사신이 아슬라성에 궁예를 찾았단 말과 궁예가 큰 잔치를 베풀고 성문 밖에까지 사신을 전송하였다는 말과, 또 일설에는 궁예에게 병마(兵馬)의 대권을 맡겨 진헌을 치게 한다기도 하였다.
이에 진헌은 사자를 양길에게 보내어 양길로 비장(裨將)일삼고 궁예가 양길에게 대하여 반심을 품었단 말로 이간을 붙이었다.
진헌의 꾀는 맞았다. 양길은 마침내 궁예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진헌은 원하는 바다. 일찍 같은 스님 밑에서 사형으로 섬기던 궁예를 자기의 손으로 죽였다 하면 후세에도 말썽이 될 것이요, 또 당장 민심에도 좋지 못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양길의 산을 긁어 궁예에게 대한 미움을 돋우면, 반드시 양길이 스스로 궁예를 죽일 꾀를 낼것을 믿을 것이 그 죄가 꼭 들어 맞은 것이다.
『나와 그대와 두 사람이 합함이 아니면 천하를 어찌 진정하랴 아무쪼록 속히 우리들이 만나 피를 마시고 맹세하여 옛날 유관장의 본을 바라노라.』
진헌이 친필로 양길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러한 구절도 있었고 또 양길의 공과 덕을 찬양하여 궁예가 양길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 통분 하다는 뜻도 있었다.
『궁예놈은 과연 배은 망덕하는 놈이다!』
하고 양길은 이를 갈았다.
양길은 궁예 죽일 일을 생각하노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일은 극비밀히 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일이 먼저 탄로되면 도리어 무슨 변을 당할는지 알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밀한 일을 하려고 본 즉, 그 많은 사람에게도 믿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면 도리어 모든 사람들이 다 궁예와 통하고 자기를 속이는 것같이 보 엿 다.
- 154 -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양길은 원회(元會)를 생각하였다. 원회는 자기의 부하가 된 뒤로 극히 충성되었다. 그뿐더러, 원회는 이미 한번 자기의 주인 되는 기헌(箕萱)을 배반한 일이 있는 사람이니, 이로써 꼬이면 반드시 그 친구 되는 궁예를 배반할 수도 있으리라고 믿었다. 또 원회만 가면 우직한 궁예도 반드시 그를 믿을 것이요, 믿어야만 목적을 달할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신훤(申煊)도 좋으나 신훤은 너무 우직하여 이러한 일을 맡길 수 없고, 또 궁예를 믿는 뜻을 숨기지 아니하고 언사에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신 훤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요ㅡ 이 일을 할 자는 꼭 원회라 하였다.
마치 좋은 것은, 원회가 양길의 딸이요, 궁예를 사모하는 난영에 맘을 두는 눈치가 있는 것이다. 양길은 두서너 번이나 난영이가 원회가 마주 서서 길게 무슨 이야기 하는 양을 보았다. 그리고 원회가 양길을 대 할 때마다 일종 수치의 정을 가지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양길은 혼자 웃었다. 딸로 원회를 낚는 미끼를 삼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마침내 밤이 이슥한 때에 원회를 불러 들였다. 난영에게 맘을 다 빼앗긴 원 회는 바스락 소리만 나도 난영의 일로만 알게 될 때라, 아닌 밤중에 자기를 부르는 것이 역시 난영에게 관한 이로만 여겼다. 풍운에 뜻을 두 고 십여 년 간 시석지관(矢石之間)에 달리던 원화로운 생각을 하게 되니, 번개같이 지나가는 청춘의 행락이 아까운 생각이 나는 동시에 익을 대 로익은 난영의 아름다움을 볼 때에는 천하를 얻느니보다, 난영은 얻는 것이나을 들하였다. 그러나 난영은 궁예를 사랑한다. 궁예가 전장으로 떠날 때에 단신으로 남복을 하고 석남사(石南寺)까지 따라 가지 아니하였더냐?
지금도 자기를 만나면 하는 말이 모두 궁예의 말뿐이 아니랴!
『이번 싸움에는 어찌되있소?』
하고 난영이가 그 아름다운 얼굴에 수삽한 빛을 띄우고 궁예의 길을 물을 때에 자기가, 『 이겼소! 궁예 가는 곳에 대적이 어디 있겠소?』
하고 대답할 때에 난영이가 어떻게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가 앞에 있는 것도 잊어 버린 듯이 합장하고 서편 하늘을 우러러 보며, 『 아아, 고마우신 미륵존불(彌勒尊佛)!』 하고 눈물을 흘렸던가! 이것은 궁예가 어진주(御珍州)를 항복받은 때 일이다. 그때에 원회는 어떻게 궁예에게 대하여 질투를 가지었던가. 궁예가 싸움에 이긴 것을 기뻐하는 난여의 모양으로 볼 때에는 마치 눈에 아니 보이는 궁예의 발이 자기의 가슴과 얼굴을 함부로 밟는 듯하였다.
- 155 - 궁예가 처음 전장으로 떠날 때에도 원회의 말의 한편 구석에서는,< 오, 네가 가면 내게도 기회가 있다.>
하는 기쁨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원회의 궁예에게 대한 친구의 의리는 간곳을 모르게 되었다. 궁예가 울오(鬱烏)를 향한다는 기별을 들을 때에 원 회는 처음으로,< 이번에야 그 애꾸눈이 죽을 테지.> 하고 스스로 자기의 맘에 놀랐다.
그러다가 궁예가 어진주를 친다는 기별을 들을 때에,< 이번에는 꼭 죽어라!>
하고 원회는 이를 갈고 동남을 바라보며 저주하였고 적어도 싸움에 패하여서 지금까지에 얻은 이름을 여지없이 잃어 버리기를 맘으로 빌었다.
그러나 궁예는 원회의 저주도 듣지 아니하고 어진주를 손에 넣고 다시 질풍같이 아슬라성을 들이친다는 기별이 왔을 때에 원회는 맘을 진정할수가 없이 괴로와서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영문 마당에서 거닐었다.
『이 사람 우리 궁예가 과연 신장군이로세.』
하고 자기의 어깨를 치며 기뻐하는 신훤까지도 미웠다.
그러나 그때에 신 훤과 같이 웃으며, 『 아무렴 나도 지금 궁예가 아슬라 싸움에 어찌되었는가 그것이 궁금하여 잠도 못 이루고 나와서 말굽 소리를 기다리는 것일세.』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신헌은 수상한 듯이 어둠 속에서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 하다 고개를 돌렸다.
원회는 양길의 밑에 온 후에 난영의 말을 끌 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활 쏘기와 칼 쓰기로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고, 게다가 한번 말 달리기를 할 때에 원회는 개천을 건너 뛰다가 말에서 떨어져 망신을 한 뒤로 더욱 난영의 눈에 낮추 보였으리라고 생각하고 심히 부끄러웠다.
모략으로 남에게 지지 않는 줄 믿으나 궁예의 이른바 늙은 쥐라는 군사( 軍師) 가 양길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자기의 모략을 시험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하던 터에 양길에세서 밤에 부른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야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가 하고 가슴을 두군거리며 투구 갑옷을 갖추고 장군 마을 양길의 침방으로 들어 갔다.
양길은 마침 서안에 기대 앉아 무심히 고서를 읽다가 원회가 들어 오는것을 보고 책을 접어 놓고 원회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 156 - 원 회는 장군에게 대한 예로 팔을 들어 인사한 후에 양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원회는 이렇게 양길과 단둘이 밀실에 마주 앉아 본 일은 없었으므로 맘에 매우 흡족하였다.
『마치 좋은 술이 있기로 한잔 나누고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소. 갑옷 투구는 다 벗어 놓고 편히 앉으시오. 오늘 밤에 한 친구로 술을 나누고 놉시다.』 하고, 양길은 설령줄을 쳐서 시비(侍婢)를 불러 원회의 투구와 갑옷을 받아 걸게 하고 준비한 주안을 내오라고 명하였다.
꽃 같은 시비는 사뿐사뿐 발을 놓을 때마다 패옥 소리에 아울러 가슴에 찬 울금향의 향기를 피웠다.
주안 상이 나와 두어 순배가 들도록 양길은 술 이야기며 여러 가지 잡담으로 원회의 맘이 탁 풀리도록 꾀하렸다.
먹은 술이 기름이 되어 피차에 말이 미끄러져 나오게 된 때에 양길은 시비를 물리고 원회와 단둘이만 마주 앉았다. 양길은 사람을 대할 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정다운 생각이 나게 하는 용모를 가지었고 그의 언어와 태도가 마주 대한 사람을 턱 믿게 하는 힘을 가지었다. 양길이 민간에 명성이 높은 것이 이 때문이다.
오늘은 양길은 더욱 원회에게 대하여 믿고 친한 빛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무슨 중대한 일을 엄두에 놓치 아니하는 자의 위엄을 갖추었다. 다만 그 의 유순한 듯하면서도 빛나는 눈이 웃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사람의 폐간을 꿰뚫어 보려고 잠시도 쉬지 않는 듯하였다. 원회는 그 눈을 안다.
그러나 원회는 양길의 눈을 당할 수가 없었다. 양길은 농담 삼아, 『 아슬라에 안 가보시려오.』
하고 웃었다.
원회는 어인 셈을 몰라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 말에는 무슨 무서운 것이 품겨 있는 듯한 까닭이다.
그러나 원회도 그만한 말에 들을 듯한 사람은 아니다. 원회는 가장 엄숙한 태도로, 『 장군께서 가라고만 하시면 이밤에라도 가옵지 무슨 말씀이 있겠 읍니까?』 하였다.
양길은 그 온순한 듯하고도 사람의 폐간을 꿰뚫는 눈으로 원회를 이 윽 히 보더니, 『 아니 그런게 아니라, 대사(大舍)는 본래부터 궁예 장군과는 친한- 157 - 사리니 궁예장군이 전장에 나간 후로 연전 연승하여 아슬라성까지 항복 받고와의 사신을 맞아 큰 벼슬까지 받았다 하니 대담히 기쁘지 아니하겠소?
나는 인제는 이름과 세력이 다 궁예 장군의 뒤에 떨어지니 궁한 나를 따르는 것보다 궁예 장군을 따라 가는 것이 이롭지 아니하겠소? 그러니까아 슬 라성으로 갈 뜻이 없느냐 말이요?』 하고 일부러 원회의 눈을 피하여 다른 데를 본다.
원회는 양길이 궁예를 어떻게 의심하고 시기하는 줄을 안다. 그래서 첨에는 궁예의 위인이 결코 의리를 저버릴 사람이 아닌 것을 변명도 하였으나, 근래에는 도리어 궁예가 양길에게 의심받는 것이 자기에게 이로울 것을 생각하고 변명할 만한 일에도 변명을 아니하고 도리어 더욱 의심이 깊어질 만한 말을 한 마디 두 마디 무심코 하는 듯이 말하여 왔다.
원회는 편안히 앉았던 무릎을 모아 엄연히 꿇어 앉으며, 『 치악산이 평지가 되고 한물이 오대산으로 거슬러 흐르더라도 원 회가 장군께 바친 듯은 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궁예와 원회가 비록 친구 오나 친구의 정리로써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변할 수 없사오며 또 만일 궁예가 아무리 원회의 친구라 하더라도 불의를 할 때면 원회의 칼은 궁예의 목을 벨 것이옵니다. 원회의 충성을 굽어 살펴 주옵소서.』 하고 원회는 두 손을 짚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 그 말에는 충서이 사무친듯 하였다. 원회는 이리한 기회에 자기의 충성을 양길에게 보인,ㄴ 것이 편리한 줄을 잘안다.
양길도 원회의 말이 맘에 흡족하였다. 더구나 자기를 임금으로 보아 「 군 신지의 」라고 하는 말이 더욱 맘에 흡족하였다. 그러나 양길은 짐짓 낯을 찌푸리며, 『 대사도 한번 의리를 배반한 일이 있지 아니하오?』 하고 한번 원회를 찔렀다.
원회도 이 말에는 등과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렀다. 십년 감고를 같이 한 기헌을 배반한 것이 가끔가끔 맘에 찔렸던 것이다. 원회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 책망 하시는 불의를 배반하고 의리를 좇은 것이라 하옵니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양길은 웃으며, 『 그러면 나도 불의를 하는 알이면 배반하시겠소?』
하고 원회를 바라보았다.
『그렇기도 하오나 소관(小官)은 이미 이몸을 장군께 바치었 사오니 죽으나 사나 장군을 따르겠읍니다. 물에 들라 하시면 물에 드옵고 불에- 158 - 들라 하시면 불에 들겠읍니다.』 하고, 다시 양길의 앞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양길은 손수 술을 따라 원회에게 주며, 『 자, 술이나 한잔 자시오, 내가 대사의 뜻을 믿으니 술이나 한잔자 시오.』
하고 권하였다.
원회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이번엔, 원회가 손 수술을 따라 양길에게 드렸다. 양길도 시양 아니하고 받아 먹었다. 원 회는 하늘에 오른 듯이 기뻤다. 원회가 술이 얼근하여 즐거움을 이기지 못 함을 보고 양길은 돌연히 손을 내밀어 원회의 손을 꽉 쥐고, 『 내가 청하는 일을 들을 테요?』 하였다.
불의에 양길이 자기의 손을 잡고 내 청을 듣겠느냐 할 때에 원 회는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주저할 처지가 아니라 하여, 『 예, 장군의 명이시면 물불을 가리겠읍니까?』 하였다. 그러나 무슨 일을 부탁하려나 하고 맘에는 의심이 있었다. 대 개원 회는 인제는 공명을 위하여 위험한 싸움을 하는 것은 지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피 흘리는 일을 버리고 난영과 같이 안온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양길은 잡았던 원회의 손을 놓으며, 『 곧 가서 궁예의 목을 가지고 오오. 궁예가 나의 은혜와 내게 대 한 의리를 잊고 신라 왕과 통하여 도리어 나를 대적하려 하니 살려 둘 수 없는 놈이요. 내일로 떠나서 궁예의 머리를 가지고 오오.』 하고 명랑하는 태도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불길이 나는 듯한 성난 눈으로 놀라는 원회를 바라보았다.
원회는 이 말에 앞이 깜깜해짐을 깨달았다. 궁예의 목을 자기 손으로 벤다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어니와, 또 눈을 꽉 감고 그러나 하더라 도자기의 힘이 족히 궁예를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궁예의 목을 베다가못 베면 자기의 목이 달아날 것이 아닌가. 높은 벼슬과 아름다운 계집도 목숨이 산 뒤에 쓸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회는 이 자리에서 못 한다고 할 계제는 못된다. 물불을 아니 가린다고 장담하던 혀끝이 마르기도 전에 무슨 혀끝을 가지고 못한다고 하랴. 이왕 할 말이면 기운 있게 하는 것이나을 것이다, 하고 원회는 고개를 번쩍 들며, 『 명대로 하리이다. 재주 부족하와, 궁예를 못 베면 소관의 목숨을- 159 - 장군께 바칠 것이오니, 또한 소관이 평소에 원하는 바이옵니다.』 하였다.
양길은 일어나 벽에 걸린 오동집 한 비수(匕首)를 내어 원회에게 주며, 『 이 것은 날에 독을 바른 비수니 칼끝만 조금 살에 들이 가저라도 그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을 것이요, 지금까지의 우정(友情)으로 올가미를 삼아 궁예를 끌고 우직한 궁예놈이 그 우정의 올가미에 걸리거든 이 독한 칼날로 궁예의 목숨 뿌리를 뚝 끊으오……내일 평명에 아무도 모르게 떠나되 만일 중로에서 묻는 이가 있거든 양길을 배반하고 달아나노라 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거든 옛 친구 궁예를 찾아 간다 하오. 그러고 그 말이 먼저 굴러 궁예의 귀에 들어 가도록 하루 이틀 중로에 지체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궁예를 죽이거든 궁예의 죄상을 들어 군중에 포고 하고 대사는 그날부터 동남도(東南道) 대장군이라고 일컬으오!』 하였다.
원회는 비수를 받아 품에 품고 양길이 손수 따라 주는 굴을 한잔 받아 마신 뒤에, 『 장군의 명대로 소관은 가거니와 소관이 평생에 소원이 있 사오니, 소관의 충성의 값으로 들어 주시리이까?』 하였다.
『무슨 소원인지 모르거니와 이번 일에 성공을 할진댄, 내 힘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나 대사의 뜻대로 믿으오. 대관절 소원이란 무엇이요?』
하고 양길은 원회는 말하기 어려웠으나 이러한 때에 말을 아니하면 언 제나하 랴 하고, 『 아뢰 옵기 황송하오나 난여아가씨를 소관의 아내로 허하여 주시겠 읍니까?』 하였다.
『내 딸이 동남도 대장군의 부인이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지요. 철 없는것이 궁예를 생각하는 모양이나 궁예가 죽은 것을 보면 제 뜻인들 죽지아니하겠소? 글랑 염려마오.』 하고 양길은 웃어 버린다. 원회는 양길에게 하직하고 물러 나왔다. 밝은 날에는 무서운 갈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다시 살아 돌아 올지도 모르는 길이니 떠나기 전에 난영을 한번만 만나고 싶었다.
원회는 난영이 새벽마다 시비 운영을 데리고 장군 마을 뒤 미륵당에 가는줄을 안다. 원회는 그전에도 가끔 길가 늙은 소나무 뒤에 숨어서 난 영 이가 자기를 본 체 만 체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사푼사푼 자기의 앞을 걸어- 160 - 지나갔다. 그러나 난영이가 기도를 다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혹시 원 회를 알아 보는 체하고 전장 소식을 묻는 일이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새벽마다 비옵니까?』
하고 혹시 원회가 물으면 난영은 말없이 한번 생끗 웃거나 어떤 때에는, 『 아버님 운수 창성하소사 비오.』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 의인은 창성하고 악인은 멸망하소서 비오.』
난영의 이러한 간단한 대답이 가끔 원회의 가슴을 찌르도록 힘이 있었다.
원회는 양길의 명을 받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 와서 이 생각 저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하는 동안에 고루에 북이 울고 미륵당에 시북이 울고 또 닭이 울었다.
원회는 남들이 아직 곤한 잠을 잘 때부터 일어나 길 떠날 차비를 하였다.
투구·갑옷에 환도 하나, 활 하나 등에 전통을 지고 양길에게서 받은 독을 바른 비수를 깊이 품에 품고 손수 말에 안장을 지었다.
주인을 알아 보고 코로 푸룩푸룩 소리를 내는 말에 안장을 직고 북두를 바싹 조를 때에, 누군지 원회의 어깨를 치는 이가 있었다 ——— 그것 은신 훤 이었다.
『자네 어딜 가려나 왜 날이 새기도 전에 갑옷을 입고 말 안정을 짓나?』
하고 신훤은 정답게 물었다.
원회는 깜짝 놀랐다. 속으로 「이 원수놈이」하는 생각이 나도록 신 훤이 미웠다. 그러나 원회는 한손으로 말갈기를 쓸어 주며, 『 심심하길래 새벽 사냥을 가는 길일쎄.』 하고 아무 일 없는 듯이 대답하였다.
『새벽 사냥? 사냥을 갈 양이면 이렇게 죄 짓고 도망하는 사람 모양으로 소리도 없이 갈 것이 있단 말인가? 지금 양길이가 궁예로 하여 우리들을 잔뜩 의심하는 모양이니 이런 짓을 하다가는 더욱 의심 살것 일 쎄…… 대관절 어젯밤 자네가 양길한테 불려 갔던 모양인데 무슨 말을하던가?』 하고 신훤은 원회의 말 안정에 북두 접힌 것을 바로 잡아 준다.
원회는 맘에 초조하는 것을 억제 하면서, 응. 엊저녁 불려 갔었네마는 무슨 별말 있겠나 ———그저 그 말이지.』
하고 원회는 양길에게 받은 비수가 옳게 제자리에 있는가 하고 살짝 가슴을 만져 보았다. 가슴에는 딴딴하고 기름한 것이 만지어 보인다.
『그 말이라니? 궁예가 반심을 품는단 말이지? 그래 무에라고 했나?
- 161 - 양길이 따위가 궁예의 충성을 알 리가 있는가. 꼭 바꾸어 되어서 양 길이가 궁예의 밑에서 모사노릇이나 하었으면 알맞을 것을 궁예는 양길에게는 너무 터, 안 그런가 ……그래 자네는 무에라고 했나?』 『대답할 말이 한 마디 밖에 있나 ————치악산이 평지가 되고 한 물이 오대산으로 거슬러 흐르더라도 궁예의 의리는 안 변하다고 그랬지.』
하는 원회의 맘은 꽤 거북하였다.
신훤은 원회의 어깨를 또 한번 치며, 『 잘 했네! 대단 잘했네! 하지마는 좀된 것이 그 말을 알아 듣겠나.
처음에는 인물이 어지간한 줄만 알았더니 아주 요것이란 말이야.』
하고 신훤은 새끼 손가락을 들어 원회의 코앞에 갖다 대고 흔들며, 『 겉으로는 덕 있는 체 겸손한 체하지마는 좀되고 간사걸. 그래서 아무 려나 자네도 조심하소. 까딱하면 큰일 나리. 그리고 풍세 보아서 궁예 한 테로 가세. 여기 있어야, 신통한 일은 생전 없을 모양이야…… 이왕 떠났으니 사냥이나 잘하고 오소.』 하고 신훤은 원회를 작별하고 들어 가 버린다.
신훤의 모양이 어두 에 사라지고 먼 발자취 소리만 들리게 된 때에 원 회는 등에 찬 땀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나기는 비록 딴 날에 났어도 죽기는 한 날에 죽자고 일생을 맹세한 벗을 속인 것이 맷돌과 같이 원 회의 맘을 눌렀다.
『신훤은 맘은 변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불의의 짓을 하였다하더라도 신훤은 나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하고 순직한 신훤의 우정과 의리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맘을 꽉 누른 맷돌은 더욱더욱 무거워지는 듯하였다.
원회가 고개를 숙이고 서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때에 원회의 말이 원 회의 갑옷 자락을 입으로 물어 끌었다. 원회는 성을 내어 손바닥으로 말의 뺨을 갈겼다. 말은 갑옷 자락을 놓고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덜려 버렸다. 이런 것이 다 원회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원회는 안 나오려는 말을 끌어내어 섬쩍 올라 장군 마을 긴 담을 돌아 북문 안 미륵당 곁 늙은 소나무 아래 미처 말에서 내리지도 아니한 채로 이리 저리 거닐면서 난 영 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솔밭 속에 청결하게 지은 미륵당에는 촛불이 켜 있고 당을 지키는 늙은 마누라가 요령을 흔들며 아침 예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마누라는 승도 아니요 무당도 아니언마는, 몸에 미륵불이 실렸다 하여 고깔 장삼을- 162 - 입고 요령을 흔들고 이 미륵당을 지키는 보살이다. 이윽고 가볍게 디디는 발자취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울려 오고 그 소리에 놀램인지 솔가지에서 자던 새 한마리가 포드득 날아 수풀 속으로 들어 가 버린다.
원회는 말 혁을 바로 잡아 길에서 잘 보이지 아니하도록 큰 소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울려 오는 발자취 소리를 엿들었다. 짜작짜작 느리고도 힘 있게 걷는 걸음은 분명 난영의 걸음이다.
짜작짜작하고 가물가물하는 새벽 어스름 속에 하얀 두 모양이 점점 분명히 나타난다. 난영은 새로 빨아 다린 하얀 장삼에 세모가 똑 찍은 듯 한 고깔로 머리와 낯을 가리고 왼편 어깨서 오른편 옆구리로 붉은 띠를 늘이 고장 심보다 고 고깔로 머리와 낯을 가리고 왼편 어깨서 오른편 옆구리로 붉은 띠를 느리고 자삼보다도 고깔보다도 더 하얀 두 손을 합창하여 젖가슴 가로 쳐 들었다. 그러고는 짜작짜작하고 미륵당을 향하여 가벼고도 힘있게 걸음을 옮겨 놓는다.
원회도 몸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난영이 층층대를 올라 석등롱 앞을 지나 미륵당 계전에 다다랐을 때에 미륵당 마누라가 활활히 뛰어 내려 와 안영에게 합창하고 여러 번 허리를 굽힌다. 난영은 합창한 손을 잠깐 들었다 놓아서 답례하는 뜻을 표하고는 곧 층계를 올라 당으로 들어 가 버린다.
난영이 들어 간 뒤에 다시 쇳소리가 나고 요령 소리가 나고 염불 서리가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난영의 붉은 띠가 눈에 뜨인다.
동편에는 점점 훤한 기운이 뻗고 그럴수록 풀 속은 더욱 침침하여진다.
그때에 다시 짜작짜작하고 흰 장삼 흰고깔에 북은 띠 맨 난영은 시비 운영을 데리고 나온다. 이번에는 합창하였던 두 손을 늘었다.
원회는 얼른 말에서 내려 말 고삐를 내어 던지고 기침을 한번 하면서 난영의 곁으로 와서, 『 난 영 아기! 대사 원외요.』
하고 허리를 굽혔다.
난영은 깜짝 놀라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며, 『 대사 운회가 누구요?』
하고 원회를 노려 본다. 하얀 고깔 밑에는 복숭아꽃 같은 얼굴이 잠깐 보이고 별 같은 두 눈이 찬 빛을 토하며 반짝 거린다.
원회는 난영의 날카로운 눈매를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한덜음 더 가까이 가며, 『 나를 몰라 보십니까? 대사지(大舍知) 양길 장군의 충성된 신하- 163 - 원 회 옵니다.』 하고 소리를 높여서 이름을 아뢰었다. 난영은 원회를 돌아 보지고 아니하고 다시 걷기 시작 하여, 『 춘신 원회일진댄 길을 잘못 들었소. 여기는 장군 마을로 가는 길이아 니요.』 하고 쌀쌀하게 말끝을 맺었다. 워낙 쌀쌀한 난영이기로 이처럼 싸늘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한번 생끗 웃어는 보였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는 그 눈매와 입술에서 얼음가루가 펄펄 날렸다. 원회는 쇠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듯이 두 귀가 윙윙하고 잠 못 잔 눈앞에 불똥이 으글쏘글 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원회는 빠른 걸음으로 난영을 따라 가 길 앞을 막아 서며, 『 난 영 아기! 원회는 장군의 명으로 먼 길을 떠납니다. 살아 돌아 올는지 죽어 돌아 울는지 알 수도 없는 길을 떠납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 히 떠나는 길이오매, 여기서 잠깐 하직을 하여고 아직 자던 닭이 울 기 도전부터 여기서 아기씨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난영은 길을 가로 막혀 한걸음 디로 물러서며, 『 춘 신의 목숨은 못 믿을 목숨, 살아 돌아 오는 것보다 죽어 못 돌아오는 것이 공이 높다 하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히 떠나는 길을 나 같은아 녀자에게 말하는 갓도 속절없는 일이요. 내 길을 막아 서느니보다 충성 된주인을 바리고 달아나는 말의 앞길이나 막으오.』 하고 난영은 퍽 웃는다. 운영도 웃는다. 원회도 놀라 난영이 바라보는 데를 바라보니 자기가 타고 왔던 말이 무엇이 놀랐는지 아직도 캄캄한 숲속으로 내 굽을 모아 뛰어 들어간다.
원회는 황망히 허리를 굽히며, 『 그러면 다녀 오리이다. 비록 얼음같이 차고 칼날이 날카로운 말씀을 주시더라도 떠나기 전 한번 뵈운 것만 기쁘게 알고 다녀 오리다. 충성 된 원 회를 잊어 주시지 마옵소서.』 하고 돌아 설 때에 난영은 아까보다 맑고 유쾌한 목소리로, 『 무슨 일로 가시는지 모르거니와, 부디 부디 잘 다녀오시오. 충신이 되어지라고 부처님께 비오리다.』 원회는 의외에 난영에게서 기쁜 말을 듣고 말 따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벌써 난영은 자기도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짜작짜작 걸어 갔다. 그 흰 장삼에 붉은 띠만이 분명히 원회 에게 보이고 몇 걸음 아니 가서 난여의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164 - 원 회는 등에 진 전통을 털럭거리며, 『 이 놈아, 이놈아.』 하고 말을 따라 갔다. 등뒤에서는 또 은방을 소리같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영은 원회가 전통을 들먹거리며 뛰어 가는 양을 돌아 보고, 『 운영아, 저것 봐라! 전통의 살들이 점옹의 산같이 흔들리 득 하는구나, 무슨 패가 나오려노.』 하고 웃고 나서, 『 얘, 그 말이 어찌해 그렇게 뛰느냐?』
하고 운영을 본다.
운영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으면서, 『 내가 아주 끝이 뾰족한 돌멩이로 그놈의 말의 이마빼기 센 점을 때렸지요. 그랬더니 말도 주인같이 의리를 잊고 저렇게 달아납니다 그려, 호호.』 난영은 장삼 손매를 펄렁거려 손뼉을 치고 웃으며, 『 그건 왜?』
하고 묻는다.
『아가씨 길을 막아 서서 귀찮게 굴 길래 한번 속일 양으로 그랬지요. 그 작자가 아가씨에게만 정신이 가서 내가 돌팔매를 치는 것도 모르겠지요.』 하고 두 사람은 또 웃었다.
난영이 운영으로 더불어 실컷 웃고 집으로 돌아 오니, 아버지를 모시는 시비 작은솔이 난영의 방 앞에 섰다가 귀엣말로, 『 아가씨 큰일 났읍니다.』 한다.
난영은 아까 웃던 것이 아직 가시지 아니하여 여전히 웃으며, 『 너도 큰일난 줄을 하느냐? 정말 큰일이 났단다. 전통이 덜거덕덜거덕 거려서…… 그놈의 말이……호호…… 이애 운영아, 그 놈의 말이 십리는 갔을레라…… 내처음보아.』 『십리만 가요? 이십리는 갔을 껄 종일 따라 다니면 전통은 다 부서지고말 껄.』
하고 운영도 새로 웃는다.
작은솔은 영문도 모르고, 『 아가씨 전통이요 말도 말이어니와, 그보다 더 큰일이 났읍니다.』
하는 동안에 셋사람은 난영의 방으로 들어 왔다.
난영은 고깔과 장심을 벗어 운영을 주며,- 165 - 『 그래 무슨 큰일이 났단 말이냐?』
하고 팔목에 걸었던 수정 여주를 벗겨 서안 위에 놓고 앉는다.
작은솔은 난영의 앞에 꿇어 앉으며, 『 아가씨 장군마마께서 궁예 장군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사람을 보내었 읍니다.』
하고 작은솔은 하려는 말이 미처 나오지 아니하여 눈만 뒤룩뒤룩한다.
난영은 놀라며, 『 궁예 장군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왜 궁예 장군의 머리가 언제 몸에서 떨어졌더냐?』
하고 몸을 바로 앉힌다.
『장군마마께서 독 바른 비수를 주시며, 그것으로 궁예 장군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그러시겠지요. 내가 수상하길래 가만히 장지 밖에서 모두 엿 들었죠. 삼경은 친 담에 저, 저, 원회 대사를 불러 들이시더니, 주안을 가져오라 하시고 날더러는 나가라고 하시더니 장군마마께서 원회 대사를 사뭇 치켜 세시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겠지요. 그래서…… 』 하고 작은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영은 두 눈썹을 짱긋 거슬려 올리며, 『 그래 원회가 비수를 받던?』 하고 작은솔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럼요. 받고는 장군의 명이시면 물에 들라면 물에 들고 불에 들라면 불에 들겠노라고. 재주가 어찌 많은 지 궁예 장군의 목을 베어 가지고오겠노라고 그리고…… 』 하고, 작은솔은 갑자기 우스운 듯이 손으로 입을 막고 웃으며, 『 그리고 말이 우습겠지요. 궁예장군의 머리를 베어 올것이니 아가씨를 주사 겠느냐 고요 ———.글쎄 원회가 그러는 구먼.』 하고는 웃은 것이 죄송한 듯이 살짝 난영을 본다. 운영도 장삼을 개 키다 맏고 난영의 등뒤에 꿇어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다.
난영은 태연히, 『 그래 나를 달란 말이지?』
『그럼요.』
『그래 장군마마는 뭐라시던?』
『무어 동남도 장군이라나, 원회가 공만 이루면 동남도 장군을 봉하 신다고…… 동남도 장군위 부인이라면 내 딸에게 부끄럽지 않지, 그 러시고 웃으시어요……오, 또 장군마마께서 이러시겠지요 ———— 그것이 궁예 놈을 생각하는 모야이지마는, 궁예놈이 죽으면 그것의 생각도 죽을- 166 - 것이라고…… 어쩌시면 그러시어요?』 하고 작은솔은 웃던 얼굴을 얼른 근심하는 얼굴로 변하며, 『 그래 사경이니 치도록 엿듣다가 원회 대사가 나가신 뒤에야 들어 와 보니 아기씨는 주무시고 그래서 아까아까 일찌감치 왔더니 미륵당에 가시고…….』 하고 지금이야 그 말을 전하는 변명을 한다.
난영은 웃던 빛도 다 없어져 멍하니 앉았다. 운영과 작은솔은 상전의 눈매만 엿보고 앉았다. 창은 환하게 밝았다.
난영은 이윽히 먹먹히 앉았더니, 『 내 그저 그런 줄 알았어.』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 에그 어찌하시나.』
하고 운영도 낯을 찌푸린다.
『설마 어떨라고요. 궁예 장군마마가 이기시지 고까진 바람개비가 이길라고요.』
하고 작은솔이도 위로한다.
난영은 눈물을 씻으며, 『 힘이나 재주로 싸우면 원회가 열 스물 덤빈들 어떠랴마는, 믿는 체 친한 체하고 가까이 하면 그것이 근심이지 이 일을 어찌하나, 그런 줄만 알았던들 아까 내 앞에 고개를 수그리고 뱅충 맞은 소리를 할 때 그 놈의 산멱이라고 물어 뜯어 주었을 것을……벌써 그놈은 말을 잡아 타고아 슬 라성을 향하고 달리겠구나. 내 몸이 남자로만 태어났으면 당장에 말을 달려 따라 가서 그놈을 대가리서부터 말 아울러 두 쪽에 내어 줄것을…… 그 놈이 맘 놓고 말을 타고 까딱거릴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구나.』 하고 뽀드득 이를 간다.
『글쎄 말씀이요. 그놈이 그런 줄만 알았더면 그 돌멩이로말 이마를 때리지 말고 고 빤질빤질하게 거짓으로 발라 놓은 골을 갈라 주었을것을…… 글쎄 요것아 왜 지금이랴 그 말을 해!』 하고 운명은 작은솔을 노려 본다.
『그럼 주무시니깐 어떡하오?』
하고 작은솔도 애타는 듯이 뺨을 만지며, 『 그러나 염려 없소. 지금이라도 따라 가서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내흔든다.
- 167 - 『 그 놈은 벌써 몇 리를 갔겠으니 인제 따라 간들 어떻게 따라 잡느냐.
길에서 고것을 없애 버리지는 못하여도 원회가 아슬라성에 도달하기 전에 내가 한걸음 먼저 갈수 있었으면 좋은련마는……나같이 약한 것이 어떻게 대장부를 따라 말을 달리랴 닷셋길은 된다던데 ——』 하고, 난영은 참다 못하여 두 손으로 두 뺨을 움키고 방바닥에 쓰러진다.
운영은 난영의 허리를 껴안고 안아 일으키려고도 아니하고, 『 아기씨, 아기씨 』 하고 느낄뿐이다. 나는 새에게나 편지를 달아 보내기 전에는 원 회보다 앞서서 아슬라성에 들어 갈 길은 만무하다.
작은솔은 가만히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무릎을 탁 치며.
『아기씨 아기씨 염려 없읍니다.』
하고 난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쳐든다.
『응, 무슨 수 있니?』
하고 운영이 고개를 들고 난영도 행여 무슨 꾀가 있을까 하여 절망한 듯 한 얼굴을 들어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작은솔을 본다. 작은솔은 또 무릎을 치며, 『 수가 있읍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어젯밤에 듣노라니깐, 장군 마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셔요————길에서 누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거던나를 배반을 하고 궁예를 따라 간다 그러라고. 그리고 그 말이 먼저 굴러 궁예의 귀에 들아 가게 하는 것이 좋으니, 중로에서 하루 이틀 지 제해도 좋다고 그러시는 것을 들었어요. 그러니까 원회도 죽을지살지 모르는 길에 젠들 빨리 가겠어요. 쉬엄 쉬엄 소문만 내고 갈껄. 내가 분명히 둘었어요.』 하는 말에 난영은 살아 난 듯이, 『 분명 그러시더냐?』
하고 작은솔의 팔을 잡는다.
『그럼요. 분명 그러시고말고.』
『그래 원회는 무어라던? 그런다고 그러던?』
작은솔은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해 보더니, 『 원 회는 무에라고 하던가 ———암말도 아니한 것 같애요. 아마 예 에, 그러기만 했나봐.』
하고,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더욱 생각을 한다.
작은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영은 손바닥을 딱 치고 합장하고, 『 나무 미륵존불!』
- 168 - 하고 벌떡 일어나며, 『 작 은솔아, 고맙다. 네 신세는 꼭 갚으마. 옳지 내가 가면 이런 것은 다 무엇하니.』
하고, 장문을 활활 열어 젖히고 알뜰한 의복 몇 가지와 패물 몇 가지를 싸서 작은솔의 앞에 던지며, 『 옛 다 너를 안 주고 누구를 주랴. 날 본 듯이 가지어라.』 하고는 다시 자기의 머리에 꽂았던 푸른 옥비녀를 매어 운영에게 꽂아주며, 『 옛 다, 이걸랑 네가 꽂아라. 그리고 내방에 있는 것 다 네가 가지어라.
섭섭하다마는 다시 마날 때도 있겠지.』
하는 것을 운영이 고개를 흔들며, 『 나는 아기씨 따라 가오. 이 비녀 다 작은솔이나 주시오.』
하고, 머리에 꽂힌 비녀를 빼어 작은솔의 머리에 꽂아 준다.
『그러면? 너도 나를 따라 가련?』
하고 난영은 감격한 듯이 운영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나도 원회 같은 줄 아시오?』
한다.
『오, 인제부터는 너와 나와 단들이 먼 길을 떠난다. 죽든지 살든지 너와나와 단들이 가야만 된다.』
하고 난영은 어린 동생을 귀애하는 모양으로 운영의 등을 만지고 수없이 목을 껴안아 준다, 운영도 두 손으로 상전의 손을 잡는다. 그날 저녁에 난영과 운영 두 처녀는 여전히 고깔 장삼에 붉은 띠를 띠고 미륵당으로 올라 갔다. 미륵당에서는 여전히 쇳소리가 나고 염불 소리가 들리고 두 북은 띠가 수없이 절하는 양이 보였다. 그러는 동안 북원의 기나긴 이른 봄날도 저물어 희멀끔한 달이 동편 하늘에서 조금씩 푸른 빛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난영과 운영이 미륵당에서 나오는 것을 본 이는 없었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어떤 구 소년이 말을 달려 동문으로 나갔다는 소문이 들렷다. 그 두 소년이 난영과 운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말을 다려 가는 곳마다 원회의 자취를 물었다. 그의 모습을 말하고 그의 탄 말의 모습을 말하면 주막에서는, 『 예, 그런 양반이 그저께 여기서 자고 지났지요.』 하고 어디로 가더냐고 물으면, 『 아슬라성으로 애꾸 신장군을 찾아 가노라고 그럽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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