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園硏究[춘원연구]
1. 緖言[ 서언]
우리의 過去[과거] 우리는 과거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국가를 역사적으로가 져 보지 못했다.
三國鼎立[삼국정립]의 이전 시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벌써 우리의 祖先[조선]의 비참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북으로는 唐[당]이며 오랑캐들의 끊임없는 침노와 남으로는 왜의 건드림을 받으면서 안으로는 삼국 서로 끼리끼리의 싸움의 계속- 한때도 편안히 베개를 높이하고 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오늘날 서로 뭉쳐져서 이천만이라는 수를 이룬 조선 민족이라는 것은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오륙 개에 나누어진 적국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의지한 기록으로 상고하건대 삼국 분립과 삼한의 이전에는 한 뭉치에 뭉쳐진 민족이었다. 그것이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여러 국가로 분립 되면서 이제까지는 형아! 아우야! 하던 동족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그 싸움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서는 이족인 외국의 세력까지도 빌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新羅[신라]의 三國統一[삼국통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그 뒤를 그대로 앗은 고려조를 지나서 이조의 소멸을 보기까지 한때도 외국을 굽어 보거나 넘겨본 역사가 없이 전전긍긍히 지냈다. 元[원]을 흉보면서도 머리를 숙이고 절한 고려조며, 왜를 업수이 여기면서도 왜군에게 전국을 짓 밟히며, 胡[ 호] 를 더럽게 보면서도 그 正朔[정삭]을 받들지 아니치 못한 이조에까지- 과거의 우리의 역사는 그들의 후손인 금일의 우리들로 하여금 분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선조에게 존경과 애모의 염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祖先[ 조선] 의 훌륭한 예술 유산이었다.
藝術[예술] 遺產[유산] 만약 이 예술 유산만 없었더면 우리는 이 우리의 빈약했던 조선의 무덤에 침을 뱉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의 기복이 자심했으며 그런 때마다 前[전] 국가의 국민으로 하여금 조국을 회상하는 길을 막는 수단으로서 전대의 유산을 모두 없애 버렸으매, 예술 유산이라야 풍부하지는 못하다. 심산에 있는 사원, 그 사원에 잔존 한약간, 혹은 능묘에 감추인 고인의 소지품, 또는 지중에 매몰된 것 약간- 이 런 것이 우리가 예술 유산으로서 우리의 조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양으로는 빈약키 짝이 없는 것이다. 몇 번의 국체의 변동에 혹은 파괴 되고, 혹은 소실되고, 또는 유실, 被盜[피도],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 그냥 잔존 되어 있는 수개의 예술-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커다란 긍지로써 異民族[ 이 민족]에게 우리의 조상을 자랑할 만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양의 다소를 말함이 아니라, 그 질로써 우리의 조상은 그 당시의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빼어난 문화 생활을 하였다는 증거가 넉넉히 되므로….
조각에 있어서, 회화에 있어서, 또는 공예에 있어서, 우리 조상은 가장 높은 문화 생활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최고 수준의 문화 생활을 경영한 우리 조상이 후세에 남길 만한 문학 예술은 왜 창조하지 못했나?
창조치 못했을 것이 아니라, 창조는 하였지만, 후인이 잃어 버렸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지나의 문자가 수입되고 또 吏讀[이두]가 발명된 이상에는, 문학을 창조치 못하였을 까닭이 없다. 인생 감정의 고등 표현 방식인 미술과 음악을 가졌던 민족이, 비교적 단순한 표현 방식인 문학을 못 가졌을 까닭이 없다.
고려조에 와서 저작된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記[삼국사기]」와 一然[ 일연] 의 「三國遺事[삼국유사]」를 보면 거기는 역사적 사실보다 전통적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바보 溫達[온달]의 이야기라든가, 官昌[관창]의 이야기라든가, 百結先生[백결선생]의 이야기라든가, 이 밖에도 이와 근사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실재한 사담이라기보다 삼국시대의 소설이 아닐까 추측된다. 삼국시대의 소설이 전하고 전해서 고려조에 와서는 史上[사상]에 실재화하여 올리지 않았나? 이렇게 추측되는 점이 많다.
暗澹[암담]한 高麗朝[고려조] 조선 민족의 예술사상에 있어서 가장 암흑 한시 대가 고려조였다.
지금 시장의 상품으로 화해서 비싼 값에 매매되는 고려자기가 고려조 예술을 자랑하는 유일의 증거품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밖에는 어떤 예술을 가졌었는지 상상도 허락하지 않는 배다.
李太祖[이태조]가 이씨 조선을 건국한 뒤에 가장 고심한 것은 고려 애국자의 박멸이었다. 그 수단으로써 '고려’를 상기할 만한 물건은 모두 파괴하고 燒棄[소기]하였다. 고려조의 문화의 기념품은 이씨의 손으로 모두 부숴 버렸다. 善竹橋[선죽교]가 남아 있는 것이 웬 까닭인지 의심될 만치 고려 냄새를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 버렸다. 금일의 소위 고려 그릇은 모두 이씨조선 건국 이전에 흙 가운데 묻혔던 물건이지 地面上[지면상]에 있는 고려 물건은 이씨의 손에 잔멸되었다.
고려의 미술, 문학 등도 이때에 이 진시황 아닌 조선 시황의 손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려조는 조선 예술사상에 '암흑 시대’라는 넉 자를 적어 놓고 지나갔다.
李氏[이씨] 朝鮮朝[조선조] 「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는 이씨 조선을 찬송 하기를 강제하는 한낱 정략적 시가에 지나지 못하다 하나, 정략적으로 미루어 그 뒤에 숨은 예술적 가치는 거부할 수 없는 바다.
그러나 암담키 짝이 없는 이씨 조선이었다. 이조의 문헌이며 제작품 등은( 兵火[ 병화] 몇 번에 다소간의 유실은 있다 하여도)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오백 년간에 겨우 이것이었던가? 오백 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동안에 겨우 이것이었던가?
金時習[김시습]의 저작 수편, 許筠[허균]의 저작 수편, 金萬重[ 김만중] 의 저작 수편, 朴趾源[박지원]의 저작 수편, 그 밖에 몇 가지- 이것이 이씨 조선 문학의 전부이었다.
기타 예술에도 특필할 만한 것을 몇 개 남기지 못하였다.
그 밖에는 평민 압박하기와 양반 끼리끼리의 싸움과 주자학의 말단 연구로 오백 년간을 무위히 보냈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벌써 문장 예술의 도취경을 맛본 이 민족은 이러한 빈약한 문학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가 없었다.
正本[정본]이며 그 작자까지도 알 수 없는 많고 많은 평민문학이 애독 되고 애청 된 크나큰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임진록,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금송아지전, 흥부놀부전, 토끼전, 숙영 낭자 전, 그 밖의 헬 수 없을이만치 많고 많은 문학 작품이 귀로, 눈으로, 이 민족의 새를 끼여다녔다.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에 대한 욕구심은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 결함 때문에 문학의 지도자를 못 가지고, 문학의 제공을 받지 못한 이 민족의 새에는 정본도 알 수 없고 작자의 氏名[씨명]도 알 수 없는 평민문학이 흘러 다녔다.
가장 배우기 쉬운 문학을 가지고, 그 위에 활판까지 아는 이 민족이, 그들의 애독하는 춘향전이며, 흥부전의 원본에 의지한 사본이나, 활판본을 가지 지 못하고 그 원작자의 씨명까지 잃어버렸다 하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이냐?
이러구러 이씨 조선도 그 종말이 가까왔다. 세태가 차차 복잡하여 가면서 外事多端[ 외사 다단], 외국(서양) 문화의 수입 등, 차차 어지러워 가서 민 간사에 일일이 양반들이 간섭키가 힘들어 갔다. 아직껏 인생의 末技[ 말기] 로서 수모받던 예술도 차차 그 날개를 자유로이 펴도 간섭할 사람이 없어졌다.
菊初[국초] 李人稙[이인직] 한 개의 혜성이 나타났다, 국초 이인직이었다.
과연 혜성이었다. 황량한 조선의 벌판에 문학이라는 씨를 뿌리고자 나타난 국초는 「鬼[귀]의 聲[성]」, 「치악산」, 「血淚[혈루]」 등 몇 개의 씨를 뿌려 놓고는 夭逝[요서]하였다.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가 혜성과 같이 사라졌다.
산간에 피었던 한 개 名花[명화], 그러나 樵夫[초부]들은 이 명화를 알지못하였다. 남이 알지 못하는 새에 피었다가 알지 못하는 새에 져 버렸다.
그 뒤를 맡아 가지고 일어선 사람이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다.
초년의 호는 孤舟[고주]-외배, 그 뒤에 春園[춘원], 長白山人[ 장백산인] 등, 여러가지의 이름을 가진 이광수.
2. 春園[춘원] 李光洙[ 이광수]
춘원은 1892년 춘삼월에 平北[평북] 定州邑[정주읍]에서 남쪽으로 한 사십리 들어가서 있는 산촌의 全州[전주] 李門[이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시골서는 내로라고 뽐내는 집안이요, 춘원의 출생 당시에는 가산도 넉넉하였으나, 그가 세상에 나온 지 사오 년 뒤에는 차차 기운이 기울어져서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작은 집에서 오막살이로 걷잡을 새 없이 영락 되기 때문에, 지주로서 자작농으로,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이리하여 팔 구세 때에는 벌써 어린 몸으로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고 소를 끌고 밖에 나다니는 고역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조선 농촌에서 사는 가난한 집 소년이 맛보는 온갖 고생을 그는 다 맛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소년을 시험하심에 그만 고생으로 끝을 막지 않으셨다.
- 그것은 내가(춘원 자기) 열한 살 적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로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동생과 나와 단둘만 남았을 때다. 부모는 다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내가 물을 길어 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靈臺[영대]〉제2호, '人生[인생]의 香氣[ 향기]’에서)
早失父母[ 조실 부모] 한 孤兒[고아] 아직 철부지인 열한 살 적에 그는 고아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누이동생과 자기와 단둘이라 했지만 그 밖에 또 아직 젖먹이 어린 누이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젖먹이 동생은 할 수 없이 남의 집으로 보내고, 남은 누이동생과 함께 부모를 잃은 외로운 집을 지켰다.
이리하여, 여기서 인생의 가장 고달프고 쓰라린 경우에 직면한 소년은 어떠한 수난의 도정을 밟았나?
춘원 자기가 쓴, 자서전의 일종이라 할 만한 '인생의 향기’에서 한두 토막 그때의 그의 고생을 적어 보자.
음력 구월(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것이 음력 팔월이다) 어떤 날, 이 소년은 저녁밥 지을 나무를 해오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인생의 향기’에는 ' 나는 서툰 솜씨로 불 잘 붙을 만한 풀을 골라 가면서 베었다’ 하였지만, 이 서툴다 하는 것은 어른과 대조하여 하는 말이지, 벌써 꽤 숙련된 솜씨 였을 것이다. 나무를 좀 베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왕 온 이상에는 내일 땔 것까지는 베어 가지고 내려가려고 욕심을 부리던 이 소년은 낫질을 잘못 해서 왼손 무명지 세째 마디를 꽤 깊이 베었다.
거기서는 피가 솟았다. 이 피를 볼 때에 소년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와 장래가 더욱 딱하게 생각되어서 소리를 쳐서 울었다.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산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에 웬 여인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가까이와 서 따뜻이 위로하고 자기의 치마 고름을 찢어 소년의 손을 싸매어 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린 누이가 대문 밖에 나와서 울고 섰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지금 해온 나무로 밥을 지어 누이와 같이 부뚜막에 앉아 먹으면서 그 여인의 얼굴을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부모가 다 돌아가신 뒤에 처음으로 기운을 얻어서 언제까지든 살리라, 힘있게 살리라 하였다.
아무리 오막살이라 하나 소년의 힘으로서는 그 집을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소년은 하릴없이 어떤 친척의 집에서 눈치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불쌍한 소년을 위해서 동네 사람이 돈 삼 원을 주었다. 그 삼 원을 가 지고 소년은 담배 장사를 하였다. 무엇이라나 하는 궐련을 평양서 한 통을 사 다가 한 갑 한 갑씩을 팔면 근 일 원의 이익이 붙는다. 정주 읍내에서 사오면 이익이 박하다 해서, 이 소년은 멀고먼 길을 평양까지 가서, 사다가는 팔고 팔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구러 일 년을 지낸 뒤였다.
나는 마침내 어린 누이동생이 있는 곳을 탐지하여 알았다. 어른들이 두고두고 속여 왔지만 나는 마침내 알아 낸 것이다. (略[약])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있는 곳도 서로 모르고 서로 떠나 있던 그리운 누이동생- 인제 겨우세 살 잡히는 어린 누이동생- (약) 누이가 있는 곳은 여기서 삼십 리다.
늦은 가을 볕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졌지마는 인제 떠나면 해 지기 전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어린 것을 찾아와야겠다. ( 약) 첫 고개 너머는 작년에 한꺼번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이 있다. 쥐통(콜레라)에 돌아가신 까닭으로 동네 사람들도 들여다보지를 않아서, 바로 마당에 묻었던 것을 내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돈 일백 스무 냥( 십이 원)을 구걸하여다가, 이 고개 너머다 옮겨 묻었다. 옮겨 묻은 지가 아직 한 달도 못 넘은 무덤은 마치 새 무덤과 같았다. 나는 우두커니 무덤 앞에 서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해골을 옮겨 오던 광경을 생각하였다. 나는 그때에 구걸 해 온 돈으로 베와 백지와 칠성판도 사 왔으나, 밀짚 거적으로 싼 것이 아직 썩지 않았으니 구태 송장내 나는 것을 끄를 필요가 없다 하여 그대로두 사람이 지게에다 져다가 그대로 묻어 버리고 말았다. 그 가슴께는 굵고, 머리와 다리는 가는, 아직도 누런 빛이 그대로 있는 밀짚 거적에 싸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가 눈에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서 동뚝 틈으로 숨어서 시체를 지고 올 때에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어쩌면 내 아버지와 어머니 시체를 저렇게도 초라하게 섬거적에 싸서 묻는담!’하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더구나 개판조차 아니 덮고 시체 위에다 함부로 흙을 퍼부을 때에 금할 수없이 눈물이 났으나 곁에 섰던 어른들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분해서 가만히 돌아서서 눈물을 씻어 버렸다.
나는 우리 옛 집터에 다다랐다. 집은 벌써 헐려 버리고 그 자리에는 무 배추를 심었다. 그래도 저 오동나무 잎, 살구나무 아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막 사 년의 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신 집이 허깨비 모양으로 보이는 듯 하여. ( 약)… 둘째 고개에 다다랐다. 이 고개는 여우가 나와서 사람을 홀려 간다는 무서운 고개로서, 아이들은 해만 넘어가면 이 고개 밑에서 놀다가도 소리를 지 르고 달아나는 데다. 우리 동네의 봄은 이 고개에 제일 먼저 온다. (약) 나는 다시 달음질을 시작했다. 눈물에 몽롱하여진 눈에는 발밑으로 휙휙 지나가는 길바닥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큰 개, 작은 개들이 콩콩 짖는 촌중을 지나서 내 누이가 잡혀 와 있다는 그 이웃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내 먼 일가집이다. (약) 심부름 갔던 여편네가 웬 아이를 데려다가 내 앞에 세운다. 이것이 내 동생이야? 저 뼈와 껍질만 남은 누더기에 싸인 어린애가 내 동생이야? 그 불 그 스레 하던 뺨은 어디 갔어? 별 같던 눈의 광채는 어디 갔어?
어쩌면 이것이 내 동생이야? ( 약) 나는 또 한번 "이애, 너 나 알아보니? 야, 아니?"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또 알아볼 리도 만무하다.(약) 나는 그 집에서 나왔다. 어스름에 내가 그 집에서 나서서 앞길로 나갈 때에 누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것과 내가 그날 밤 혼자서 그 여우 나는 고개를 넘어오면서 이십 리 동안이나 울고 온 것은 기억되나, 내가 왜 그 누이를 안 데리고 왔는지는 생각 안 난다.
나는 그 후 일 년 동안이나, 이리저리로 동냥글을 얻어 읽고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내에게 네 누이가 다녀간 후에 한 달이 못 되어서 이질로 죽어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인생의 향기’에서) 이리하여 여기저기 동냥글이나 얻어 읽고 눈치밥을 먹으며 다니다가 이 소년은 드디어 자기의 고향을 뒷발로 차고 서울로 뛰어올라왔다. 담배 장사를 하여 번 돈과(그의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의 장가들 적에 쓰려고 준비해 두었던) 명주 몇 필, 무명 몇 필을 판 돈 모두의 합계가 삼십원 내외의 大金[ 대금]을 쥐고, 이 소년은 향학열에 들떠서 서울로 올라왔다. 아직 경의선이 개통되기 전이라, 진남포 가서 화륜선을 타고 인천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온 것이다.
서울서 얼마를 공부하다가 다시 현해탄을 건너서 동경으로- 이리하여 오륙 년간을 공부를 할 때
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無依無託[무의무탁]하게 돌아다닐 때에 흔히 노인들께서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다.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하는 말로 위로하여 주는 말을 들었다.
유년 시대에 그렇게도 박복했던 이 소년이건만 이상히도 그에게는 늘 몇 사람의 후원자가 있었다. 그것은 물론 그의 才分[재분]의 덕이겠지만 진퇴 유곡하여 '죽어 버릴까 하고 죽을 방법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무슨 일 하나가 생겨서’ 그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이런 의외의 행운이 그로 하여금 神經的[신경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교적 낙천적인 오늘날의 그 의 성격을 이룬 것이다.
열아홉 살에 그는 동경서 중학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다가 자기 조부 위독이라는 飛電[비전]에 다시 오래간만에 고향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향에서 조부상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서 그는 오산중학교의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감격되기 쉬운 나이인 열아홉 살의 청년, 다정다한한 그의 공 상적 생활은 이 산간 중학의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로 하여금 차차 시인이 되게 하였다. 가슴 속에 충일되고 압축된 감정의 덩어리를 깊이 감추고 산간 소로를 철학자와 같은 기분으로 거닐면서 여러가지의 공상에 잠길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하늘이 그에게 주신 예술적 재분이 차차 높은 소리로 울리어나기 시작하였다.
사 년간을 산간에서 교원 생활을 하였다. 그런 뒤에 표박의 길을 다시 떠났다.
시베리아로 돌아다녔다. 만주로 支那[지나] 본토로 지향없는 그의 방랑 생활은 일 년간을 계속하였다. 해가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지든가, 산에서 뜨지 않으면 산으로 지기라도 하는 산 투성이 조선땅에서 살아서 산을 보지 않재야 않을 수 없는 땅만 돌아다니던 그에게는 해가 지평선에 떠서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벌판은 경이였다. 경이라는 것은 범인에게 있어서도 시를 자아내거든 예술적 천분을 가지고 있는 이 청년에게랴? 진일을 막막한 벌판에 서서, 뜨는 해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소녀와 같이 가슴을 두근거리던 그-.
본시는 아메리카 유학차로 떠나던 길이지만 일 년간을 표박을 하다가 일 년 후에는 그는 다시 오산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어린 벗에게 」
이전 학생 시대에 그의 후원자요 지기이던 六堂[육당] 崔南善[ 최남선] 이 간행하는 잡지 〈靑春[청춘]〉에 「어린 벗에게」를 기고한 것이, 바로 이 두번째의 오산중학교 교원이 된 직후였다.
때는 1914년 그 스물네 살 나던 해-.
「少年[소년]의 悲哀[비애]」도 그와 전후하여 같은 〈청춘〉 지상에 발표 되었다.
전에도 수개의 단문의 발표가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춘원이 창작 가로서 의제 일보를 내디딘 것이 이때이다.
3. 「어린 벗에게」와 「少年[소년]의 悲哀[비애]」, 其他[ 기타]
당시의 조선의 사정은 바야흐로 문예라는 물건을 맛보고서 허덕이는 때 였다. 아직껏은 순조롭지 못한 환경 때문에(그다지도 이 민족이 좋아하는) 문예를 정면으로 맛보지 못하던 것이 시대가 바꾸이면서부터(약) 문예에 대 한 동 경이 매우 심하였던 때였다. 국초 이인직이 너무도 일찍 나기 때문에, 민족과 연락이 되지 못하였던 '문예’에 대한 열이 바야흐로 무르익었을 때 였다. 누구든 그 첫 기치의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이때에 춘원의 「젊은 꿈」(당시의 원명은 「어린 벗에게」이었다)이 〈 청춘 〉 지상에 나타났다.
西洋文學[서양문학]의 影響[영향] 다른 문제는 다 둘째로 밀고 이 「 젊은 꿈 」 의 한 편은 서양 문학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조선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서 할 가치를 가진 자다. 무론 그 전에도 임시 임시의 소설 비슷한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된 점에서, 혹은 애독되고 널리 알리운 점에서, 또는 그 가치에서, 서양 문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최초의 소설이라는 일 컬음을 넉넉히 받을 것이다.
장차 눈뜨려는 조선이었다. 아직껏 최량의 수단을 다하여 서민 계급을 압박 하던 정치가 몰락되고 동시에 유교 만세의 시대가 지남을 따라서 거기 대한 반항심이 서민 계급에 올라 있을 때였다. 그리고 온갖 새로운 사조와 사물을 얻어 들이려고 기다리는 때였다. 그때에 춘원의 첫번 소설이 나타났다.
조선이라 하는 바다에 '시대적’이라는 배를 타고 그 첫걸음을 내어 디딘 춘원의 「젊은 꿈」은 그럼 어떤 작품인가?
「젊은 꿈」 전편에 충일된 내용은 고적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熱熱[ 열 열] 한 동경이다. 공상에 가까운 이상적 사랑을 힘을 다하여 부르짖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애라 부를 종류의 것이 아니요, 연애라 명명할 종류의 것이다. 당시 아직 스물네 살의 청년 춘원은 인간애를 알지 못하였다. 뿐더러 그의 생장이 생장이었더니만치 인간애라는 위대한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 하였 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시대였다. 돈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그는 그 생장이 가난하였더니만치, 고단하고 쓰라린 과거를 보았을 뿐, 애정이라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가 생존했으나, 살림이 고단 하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할 겨를도 없는 집안이었고, 가난하기 때문에 친척들에게도 구박을 받았을지언정 사랑을 맛보지 못한 그가 차차 인생이라는 것에 눈뜨기 비롯한 뒤에 처음으로 느낀 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애보다도 小愛[ 소 애] 였다.
나는 조선 사람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듣고 맛은 못 본 조선 사람 이로소이다. 조선에 어찌 남녀가 없사오리까마는 조선 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 본 일이 없나이다.
「젊은 꿈」의 이 한 귀절은, 그의 심경을 여실히 말하는 바다.
인생의 가장 즐거워야 할 유년 시기와 소년 시기를 기구하고 고달프게 보낸 그가, 겨우 제 철이 들면서,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느끼고 바란 것은 ' 사랑’ 이었다. 사랑 가운데도 소애였다. 인간애라 하는 것은, 그가 좀더자라서 좀더 마음의 여유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느낄 것이다.
남녀 관계도 육교를 하여야 비로소 만족을 얻음은 야인의 일이요, 그 용모 거지와 심정의 우미를 탄상하며 그를 정신적으로 사랑하기를 무상한 만족으로 알기는 문명한 수양 많은 군자로야 능히 할 것이로소이다.
얼마나 이상적 사랑에 동경하는 부르짖음이냐? 이것은 그 여생을 고적에서 보낸 사람의 苦叫[고규]이다. 고규라기보다도 저주에 가까운 부르짖음이다. 다른 모든 인생 문제라는 것이 그의 안중에 없었다. 사랑을 맛보고서야 다른 것은 생각할 것이지 사랑을 아직 맛보기 전에는 다른 것은 무의미한 일 이었다.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한다 하면 곧 추행을 상상하는 이는-.
사랑하는 대상으로서는 결코 여자만을 바라지 않았다. 소년이라도 불관 하였다. 누구든 품에 안겨 줄 이만 있었으면 족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첫 소설인 동시에 조선 신문학부의 구체적 건설기의 그 첫 작품은 '사랑에 대한 열렬한 동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젊은 꿈」은 그 내용 전부가 '사랑에 대한 동경’일 뿐 아니라 그 소설형에 있어서도 어떤 '나’라는 청년이 '그대’라는 미소년에게 보내는 편 지의 형식으로 된 것이다.
技巧[기교]와 形式[형식] 소설의 기교-형식에 있어서는 이 소설은, 순 란 한미 문( 그것은 조선 구어체 문장의 초창기인 당시에 있어서도 과연 경이의 미 문이었다) 이 한동안 연애하는 남녀의 편지투의 표본이 될이만치 훌륭하였다는 점 이외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없다. 꿈과 같은 일을 써 나아가다가 그나마 결말도 짓지 않고 끝막아 버렸다.
이 세상의 냉혹하고 괴로움을 생각할 때에 하루라도 바삐 이 세상을 벗어남을 기뻐하였나이다. 나는 더러운 병석에서 오줌 똥을 싸 뭉개다가 죽지아니하고, 신선한 아침 햇빛, 망망한 해양 중, 비참한 광경 속에서 죽게 됨을 행복으로 여겼나이다.
이와 같이 熱[열]과 공상으로 찬 辭句[사구]로 꾸며 나아가다가 사건적으로 아무 결말도 보이지 않고 '끝’자를 달아 놓았다.
원래, 춘원은 단편 작가로서는 너무도 무능하다. 그의 단편 중에 그 자신도 사랑한다는 「가실」조차(이것은 장차 다시 말하려 하거니와) 도덕적 이요 사건적의 결말이 없이 '끝’자를 달아 놓아서, 감상자로 하여금 기이한 염을 품게 하거니와 「할멈」, 「血書[혈서]」, 「혼인」 어느 것 안 그런 것이 없다.
다시 學窓[학창] 生活[생활] 「젊은 꿈」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서, 그는 다시 학창 생활을 하려고 동경으로 건너갔다.
장편 「無情[무정]」이며 「開拓者[개척자]」를 쓴 것이 이때이다.(그 장편에 대하여도 아래 다시 쓰겠으니 여기서는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 장편을 쓰는 틈틈이 〈청춘〉 지상에 발표한 것이 「소년의 비애」, 「失戀[ 실연] 」( 원명은 「尹光浩[윤광호]) 등이다.
「소년의 비애」를 여기서 그 내용이며 형식을 일일이 검토한다 하는 것은 초년 기의 작품을 부러 들추어 내는 감이 없지 않으니, 붓을 놓는 편이 도리어 옳은 일일 줄 안다. 다만 그 수편의 습작품에서, 그의 고적한 심경이 동 생애, 동성애나마 행여 하고 바라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 소년의 비애」를 쓴 것이 1917년 1월 10일 朝[조]요, 「실연」이 1917년 1월 11일 夜[야], 전날은 사촌 동생에 대한 사랑을 테마로 한 소설을 썼고 이튿날은 남자끼리의 동성애를 테마로 한 소설을 썼다는 점과, 그 썼다는 절기가 冬期[ 동기]이며 그 장소가, 東京[동경] 유학생 감독부 기숙사이었던 것을 附記[ 부기] 하면, 당시의 그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1917년 1월 17일에 쓴 감상문 「彷徨[방황]」의 한 귀절
평생에 불김을 보지 못하는 침실은 춥다. 게다가 누가 저편 유리창을 반 쯤 열어 놓아서 콧마루로 찬 바람이 휙휙 지나간다.
이런 가운데서, 「무정」, 「개척자」 기타 초창기의 수개 단편이 생겨난것이다.
4. 「無情[무정]」과 「開拓者[ 개척자] 」
「 무정 」을 발표한 기관은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의 후 신 이요, 당시의 유일한 조선문 신문이던 〈每日申報[매일신보]〉였다.
춘원은 「무정」의 대부분을 동경 조선 유학생 감독부 기숙사에서 썼다. 쓴 동기는 무론 한 가지로는 문학적 창작욕이나, 또 한편으로는 약소한 고료로 나마 학비를 좀 벌어 보겠다는 욕망에서였다.
그런지라 「무정」을 보려 할 때에는 학창 시대에 더구나 번거로운 기숙사에서 썼다는 '핸디캡’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육당의 「무정」 서문의 일절에 있는 바
혼자 매 크지 못하도다. 그러나 빈 들에 부르짖는 소리는 본디 떼지어 하는것이 아니로다. 벗 부르는 맹꽁이 소리는 하나가 비롯하여 온 벌이 어우르는 것이로다.
라는 말과 같이 번거러운 기숙사에서 약소한 고료를 얻기 위하여 쓴 그 작품이 양에 있어서 아직껏 조선에서의 초유인 동시에 질에 있어서도 아직껏 조선 사람이 보지 못하던 새로운 것이었다.
춘원은 아직껏의 수개의 단편에서도 그러하였고 그 훨씬 뒤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여러 개의 장편에서도 그러하였거니와 그는 소설을 언제든지 설교 기관으로 삼았다.
처음 쓴 장편소설인 「무정」에서도 먼저 설교로써 시작하였다.
조선의 과도기의 선각자연하는 사람들을 비웃기 위하여 '김 장로’라 하는 인물을 만들어 내고 과도기의 소위 신여성으로서 '선형’을 제조 하고 또한 과도기의 모범 청년으로서 주인공 '이형식’을 제조하고- 이러한 과도기의 수개의 인물의 움직임으로써 '과도기의 조선의 모양’을 그려 보려 하였다.
過渡期[과도기]의 모양 거기는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이라는 주인공 이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 개인교수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 된다.
선형의 아버지 김 장로는 신식 인물이라고 자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딸과 이형식과를 약혼시키기 위하여 그 교제를 위해서 이런 방책을 취하였다. 이렇게 두어 번 서로 보게 한 뒤에는 약혼을 하게 된다.
형식이라는 인물도 과도기의 조선 청년의 성격을 대표하는 자로서 자기는 新人[ 신인] 이어니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자기의 친구 신우선이라는 사람을 구식 인물이라 경멸하고 김 장로의 新人然[ 신 인연] 하는것을 역시 경멸하고 자기 혼자가 신인이어니 자신하고 있다.
이런 이형식에게 삼각 관계를 가진 한 개의 여성이 등장을 한다. 그것은 형식의 어렸을 때의 은사의 딸이요, 어렸을 때의 약혼자로서 기구한 운명의 희롱을 받아, 현재는 기생에 적을 두고 있는 박영채라는 여인이다.
영채는 구사상의 전형이다. 그는 삼강오륜을 신조로 하고 어렸을 때에 자기의 아버지가 짝지어 준다고 한 이형식이란 우상(?)을 사모하고 바라며, 아직껏, 그 몹쓸 반생을 보내면서도 오로지 이형식을 만날 날을 즐기며 그의 정조를 지켜 왔다.
- 이것이 이 소설의 서곡이다.
거기서 일전하면서는 이 형식이 김 장로의 딸 선형을 영어를 가르치며 ' 예쁜 계집애로다’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는 때에, 영채가 출장을 한다.
영채는 오래 두고두고 이형식의 거처를 찾다가 겨우 알아 가지고 형식을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형식의 가슴에서는 두 개의 여성이 난무를 한다. 하나는 돈과 신식과 신학문을 가진 선형이라는 여성이다, 또 하나는 순정과 눈물과 열과 자기 희생의 크나큰 사랑을 가진 영채라는 여성이다.
자기가 자유로 취할 수 있는 두 개의 여성에서 형식은 어느 편을 취하 였나?
제 28절에서 작자는 형식을
형식의 속 사랑은 여문 지 오래였다. 마치 봄철 곡식의 씨가 땅 속에서 불을 대로 불었다가 안개비만 조금 와도 하룻밤에 쑥 움이 나오는 모양으로 형식의 속사랑도 갑자기 껍질을 깨뜨리고 뛰어난 것이다. 하였지만 아직 깨지 못하였다. 그는 영채를 생각할 때는 영채를 위하여 눈 물을 흘리고, 그와 결혼을 할 결심을 하며, 또 한편으로 선형을 보면 선형에게도 또한 마음이 기울어진다. 그는 아직 줏대를 못 잡은 사람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의 뜻대로 행하지를 못하고, 바람에 기울거리는 갈대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구식이라고 경멸하는 신우선에게도 의견을 물으며, 혹은 형식이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노파 따위에게까지 의견을 묻고 한다.
여기 우리가 매우 흥미를 느끼는 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흔들리기 쉽고 줏대가 없는 주인공 이형식을, 우리는 즉시로 이 소설의 작자인 이춘원으로 볼 수가 있는 점이다.
신 도덕률을 세우고 신 연애관을 말하고자, 춘원은 이 소설을 붓 하였거늘 아직 인생 행로의 과정을 덜 밟은 작자는 자기의 말하려는 의식적인 의사보다도, 그의 마음에 내재하여 있는 구도덕적 꼬리를 더 많이 보였다.
이 소설의 주지로 보아서, 당연히 내정한 붓끝으로 조상하여야 할 구 도덕의 표본 인물인 박영채를 너무도 아름답고 열정적인 붓으로 찬송하였기 때문에 독자는 도리어 작자가 말하려는 신도덕보다도 영채의 경력이 말 하는구 도덕에 동정을 가지게 된다.
그것뿐 아니라 기생 월화의 '에피소드’에 있어서도 작자는 당연히 월화를 '시대의 부산물인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상하여야 할 것이어늘, 정열에 넘치는 붓끝은 월화를 너무도 미화하여 월화가 신봉하는 구도덕을 독자에게 주장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직 줏대 잡지 못한 작자의 전모를 독자 앞에 스스로 내어보인 미숙한 일이다.
주인공 이형식은 김 장로의 딸과 약혼 준비 행동을 계속하는 동안에, 박영 채의 신상에는 변사가 생긴다. 즉, 형식이 봉직하고 있는 경성학교의 교주요, 부자요, 방랑아인 김현수라는 사람에게 청량사에서 강간을 당한다.
아직껏 이형식을 위하여 곱게 지켜 오던 정조를 빼앗긴 영채는 인제는 살 면목이 없다 하여 유서를 써 놓고, 대동강에 빠져 죽으려 평양으로 내려간다.
이것을 안 형식은 영채를 구하고자 부랴부랴 평양까지 쫓아 내려간다.
그러나 평양까지 내려갔던 형식은 대동강을 찾아 보지도 않고, 칠성문 밖을 한 번 휙 돌아보고는 도로 상경하여 버린다.
왜 영채의 시체(그렇지 않으면 영채의 행방)를 찾아 보지도 않았느냐?
작자는 이 기괴하고도 모순된 형식의 행동을 속여 넘기기 위해서, 童妓[ 동기] 계향의 적삼 등에 땀이 내배인 이야기며, 평상 위에 앉아서 몸을 흔들 거리고 있는 '탕건 쓴 노인’을 등장시켰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작자 의사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영채의 행방을 그냥 감추어 둥서 독자로 하여금 영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증이 나게 하기 위하여 이런 술법을 써서 형식으로 하여금 그저 도로 상경 케 한 것이다. 작가가 아직껏 우리에게 제공해 오던 형식의 성격으로는, 결코 이렇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신우선에게 세 번 이상의 전보를 쳐야 할 것이며, 경찰에는 서른 번은 갔어야 할 것이며, 대동 강변은 삼백 번은 오르내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선형과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하고 미국 유학을 가는 공상을 삼천 번은 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형식은 이만치 약하고 줏대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줏대 없는 인물을 가지고 작자가 자기의 연애관을 설명하려 하고신 인생관이며 신도덕을 말하려 하니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달아 나오는 모순이 모두, 작자가 주인공의 성격을 잘못 선택한 데 있다. 이러한 줏대 없고 정견 없고 자기의 주장이 없는 인물에게( 저 곳 속담말과 같이) 타케니보오오(竹[죽]に棒[봉]-대나무에 막대기를) 접한 것같이 초인적이며 거인적인 사상을 머금게 하였으니 어찌 모순이 생기지 않으랴? 도리어 신우선과 같은 성격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형식 같은 성격을 구형의 인물로 만들어 끝까지 희롱을 했거나 하였어야 될 것이다.
형식은 평양서 무위하게 도로 상경을 하였다.
형식은 경성학교에서 쫓겨 났다. 기생을 따라 평양 다녀왔다는 죄목이지만 교주 김모의 비행을 들추어 낸 까닭에 쫓겨 난 것이다.
그러자 그는 드디어 김선형과 약혼을 하였다.
그 婚約[혼약]의 場面[장면] 이 소설에 있어서, 작자가 주인공 이형식을 이상적 인물로 만들려고, 공상과 사색이 꼬리를 물어 나가는 장면을 만든 이외에는 이 소설 전편은 과도기의 조선의 진실한 형상이다. 된장에서 구 데 기를 골라 내는 주인 노파며 기름때가 뚝뚝 흐르는 영채의 양모며, 유리창 달린 집에서 의자를 놓고 초인종을 달고, 이것이 개화거니 하고 생활 하는 김 장로 집이며, 페스탈로치며 엘렌 케이의 이름도 몰라서 "푸스털과 얼는 커의 학설은 보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 꾸레( じだいおくれ- 시대에 뒤떨어진)외다"라고 갈파하는 배 학감이며, 어느 것이 '조선의 모양’ 아닌 것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이 약혼의 장면이야말로 가장 과도기의 조선의 꼴이다.
서양서는 남녀가 미리 교제를 하다가야 약혼한다는 말을 듣고 이형식을 자기 딸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수개월 간 서로 보게 하고, 인제 는다 되었거니 하고 형식을 불러서 혼인을 청하는 김 장로나, 영채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 온 그 길신의 먼지가 아직 있는 동안에 김 장로의 딸과 혼인하기를 승낙한 이형식이나
'에그 어쩌나, 어쩌면 좋아?’하면서도 약혼을 승낙하는 김선형이나,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靜觀[정관]하며 축복하고 있는 목사님이나, 이 몇 개의 인물이 모여 앉아서 엄숙한 형식 아래서 행한 일장의 희극은, 당시 조선의 형태를 너무도 여실히 그려 낸 것으로서 문헌적 가치로도 우리가 보유하여 둘 만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형식은 어디까지든 영채를 다시 찾아 보려 평양으로 간다 만 다야 단을 하다가, 잊은 듯이, 김 장로의 딸 선형과 약혼을 하고 이 가을로 선형과 함께 미국 유학을 가기로 작정을 한다.
이것이 즉 제85절.
제49절에서
'선생이시여, 이 몸은 가나이다. 십구 년의 짧은 일생을 더러운 죄로 지내다가 이 몸은 가나이다. 그러나 차마 이 더럽고 죄 많은 몸을 하루라도 세상에 두기 하늘이 두렵고 금수와 초목이 부끄러워 원도 많고 한도 많은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더러운 이 몸을 던져 양양만 물결로 하여금 더러운이 몸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죄 많은 이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운운한 유서를 남겨 놓고 평양으로 내려갈 뿐 영채의 생사에 관해서는 일구 일언도 쓰지 않았다.
50절에서 85절까지 그 새 36절간을 독자는 영채의 소식을 몰랐다. 당시의 일을 모르기는 모르지만 아마 이 소설을 연재하던 매일신보사 편집국에 '영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르쳐 달라’는 투서장이나 잘 들어 왔을 것이다.
이렇게 감추어 오기를 36절, 제86절에서 비로소 작자는
이제는 영채의 말을 좀 하자. 영채는 과연 대동강의 푸른 물결을 헤치고 용궁의 객이 되었는가?
하는 서두로써, 그 새 잊어버린 듯이 버려 두었던 영채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 새 오랫동안 〈매일신보〉지면상에서 그림자를 감추었던 영채가 다시 독자의 앞에 등장할 때는 그는 기차의 객이었다. 자살하러 평양으로 가는 즈음 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 〈매일신보〉連讀者[연독자]는 열광하였다. 독자는 영채의 죽음을 바라지 안했다. 작자는 영채라는 여인을 한 개 낡은 전형의 여성으로 조소를 하려는 의도로 이 소설을 출발시켰지만 독자의 온 동정은 영채에게 모여 있었다. 구탈을 벗으려 하면서도 아직 채 벗지 못한 작자라, 영채를 조소하려 하면서도 정열의 붓은 영채를 너무도 미화했기 때문이다. 낡은 사상의 위에 억지로 새로운 사상을 도금하려 하였지만 도금보다는 本紙[ 본지] 의 은색이 찬연히 빛났다.
영채의 탄 기차 안에는 병욱이라 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동경 유학생으로 귀향하는 길이었다.
이 병욱이야말로 작자가 보여 주려는 새로운 사조를 한몸에 지닌 인물이다.
말괄량이라고 하고 싶은 괄괄한 성미의 주인이요, 굳센 성격의 소유자며 이지와 판단력을 아울러 가진 위에, 자기의 인생관도 웬만치 가진 한 개의 신 여성 이었다.
이병욱이란 여성은 작자가 이 소설을 써 내려가다가 중도에서야 비로소 자기의 誤斷[오단](이형식과 같은 성격의 주인으로서는 도저히 이 소설을 이상대로 진행시키고 결말내기가 힘들 점)을 깨닫고 급조하여 출장시킨 인물인 듯한 감이 없지 않다. 급조하여 출장시킨 증거는 여러가지로 알 수가 있으니, 병욱이의 登場[등장] 첫째로는 이병욱의 동행자로, 병욱의 남동생이 기차에 동승하였다고 하였는데 병욱의 고향에서는 이 남동생은 종적이 사라지고말았으니 이것은 작자가 갑자기 소설의 진전을 전환시킬 때에 장래의 계획을 미처 세우지 못하고 막연히 '이런 인물도 혹은 필요하리라’하여 집어넣었다가 그만 그 뒤에는 잊어버린 것일시 분명하고, 둘째로는 황주에 하차하여서의 처음 한동안의 생활 묘사가 그야말로 '踏步[ 답보] 로’ 식으로 갈팡질팡 소설을 어떻게 진전시킬까 애쓴 형적 등으로 병욱 등장 이후의 이 소설은 전혀 '동달이’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작자는 병욱이라는 '동달이’로써 이 소설을 합리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작자 자신이 아직 '연애’라는 괴물을 분명히 알지 못 하는지라, 병욱도 연애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이하 「 무정 」에서)
여학생( 병욱) 은 영채의 신세타령을 듣고
"그러면 지금도 그(형식)를 사랑하시오?" 사랑하느냐 하는 말에 영채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자기가 형식을 사랑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자기는 형식이란 사람을 자기가 찾아야 할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요, 십팔 년래로 일찍 형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어서 형식을 찾고 싶다. 어서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이루겠다. 만나면 기쁘겠다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채는 멀거니 여학생을 보다가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어려서 서로 떠났으니까 얼굴도 잘 기억 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면 부친께서 너는 아무의 아내가 되어라 하신 말씀이 있으니까 지금껏 찾았읍니다그려…. 별로 사모하는 생각도 없었는데."
"예, 그렇고…."(약)
작자는 이러한 말로써 독자에게 '영채가 형식에게 품었던 바는 연애가 아니라’ 고 강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작자가 병욱이라는 인물을 이상화 하기 위해서 억지로 부회시키는 억지에 지나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작자 자신이 아직도 든든한 연애관을 파악치 못하였다는 점을 독자에게 발표 한 데 지나지 못한다.
연애라는 것은 이지의 산물이 아니요, 감정의 산물인 이상에는 ' 이유를 따져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영채가 과거 십팔 년간을 오로지 형식 한 사람만을 사모하고 동경하고 지내 온 그 아름다운 행동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작자는 여기 대하여 '부모의 명령이니’하는 억지의 해답을 내렸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 때문에 하는 의리적 행동에 과연 이런 크나큰 순 정이 생길 수 있을까?
당시의 선각자로 자임한 작자는 그의 저돌적 용맹으로써 온갖 재래의 인습을 다 파기하려 하여 이런 억지까지 나오게 된 것이겠지만 우리는 영채의 형식에게 가진 바 감정을 '사랑’이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사랑을 하기에 부모의 명령도 자연히 복종하고 싶었을 것이고, 사랑을 하기에 그를 위 하여 정절을 지켜 왔을 것이고, 사랑을 하기에 자기의 정절이 남에게 더럽힌 뒤에는 죽기로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무정」 이후의 춘원의 소설이 흔히 범한 과오가 역시 이것이다. 그의 생장과 교양과 전통이 그에게 준 바 성격과 그의 이상이 낳은 바의 이론이 미처 조화되지 못하고, 그 조화되지 못한 것을 소설에서 억지로 부회 시키 려하고 하여서 가여운 희극과 강제가 나타나고 한다.
그리고 여기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박영채가 자살하러 가는 ' 기차’에서 병욱을 만나게 된 이 '기차상의 기연’이라는 점이다. 춘원의 소설에서는 흔히 기차상의 기연(혹은 정거장)이 있다. 「흙」에도 누차 이런 장면이 있었고, 「재생」에도 그런 곳이 있고, 「어린 벗에게」도 (그것은 기선이나) 그런 곳이 있고, 그 밖에도 차상의 기연이 흔히 있다. 이것은 혹은 춘원이 과거에 있어서 기차에서 기이한 일이라도 경험한 일이 있어서 자연히 소설마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지.
前半部[전반부]를 잘라 버리고 황주 병욱의 집에서의 월여의 생활.
소설 「무정」은 그 전반부는 잘라 버리고 여기서 출발을 하는 편이 도리어 소설 가치를 높이게 되지 않을는지?
거기는 할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오빠가 있고 올케가 있고 하며 한 집안이 갖추어 있는데 그 每人[매인]이 모두 한 시대를 대표 하는 성격을 가졌다.
병욱의 성격과 영채의 성격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딸이 공부를 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방임하는 아버지며
, 의리를 알면서도 제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오빠며,
조선의 부엌 며느리인 올케며, 어머니 할머니며,
이 몇 사람이 모여 앉아서 밀국수를 먹으며 지내는 광경은 과도기의 조선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 낸 것이다. 너무도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성격들을 과장시킨 혐이 없지 않으나- 그리고 이것이 춘원이 흔히 범하는 과오이나- 이러한 여러가지의 성격의 인물을 한 좌석에 모아 놓고 조종하는 것은 이 작자의 독보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우리는 작자의 不用意[부용의]를 볼 수가 있으니, 즉 작자는 이 소설을 어떻게 어디로 언제까지 끄을고 가려는지 확호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증거로는(장래의 진전상 혹은 필요할까 하여) 영채가 병욱의 오빠에게 이상한 감정을 가지게 만든다. 혹은 이것을 쓸 당시에는 장래 병국( 병욱의 오빠)과 영채와를 결합을 시킬 심산으로 그 복선을 꾸며 두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리하여 영채는 안온한 전원 생활에 월여를 보낸다.
희극 배우 이형식이 다시 등장을 한다.
이 희극 배우요, 또한 자기딴에는 자기는 선각자려니 하고 있는 형식은 영채의 뒤를 따라 평양까지 갔던 그 먼지를 채 떨지도 못하고 영채를 위 해서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선형이라는 돈 많은 미인과 혼약을 하고 - 형식은 깨어서부터 잘 때까지 선형과 미국만 생각한다. 그래도 조금도 적막하지 않고 도리어 더할 수 없이 기뻤다. 형식의 모든 희망은 선형과 미국에 있다. 기생집에 갔다고 남들이 시비하고 돈에 팔려 장가를 간다고 남들이 비방을 하더라도 형식에게는 모두 우스웠다. 천하 사람이 다 자기를 미워하고 조롱하더라도 선형 한 사람만 자기를 사랑하고 칭찬하면 그만이다. (약) 길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도 이제는 자기와는 종류가 다른 불쌍한 사람같이 보인다. 더구나 이전에는 자기의 동무로 알아 오던 주인 노파가 지극히 불쌍하게 보이고 갑자기 더 늙고 쪼그러진 것같이 보인다.
이같이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뻐하고 있다.
성격의 불통일- 작자는 어찌하여 이형식에게 있어서는 성격의 통일이라는 점을 유의치 않았는지? 이런 때는 이렇듯 굳센 성격의 주인이 되고 어떤 때는 어린애나 일반으로 좌우하는 성격의 주인인 이형식은 우리의 소설 상식으로는 상상치 못할 인물이다.
세상의 비방을 안중에 두지 않을이만치 굳센 성격의 주인이 또한 황주 김병욱의 편지 한 장 때문에 무한 번민을 한다.
황주 김병욱의 편지라 하는 것도 소설 기술상으로 엄밀히 보자면 한낱 ' 답보로’에 지나지 못한다. 신문 지상의 명일 분의 소설은 써야겠는데, 전개 방침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거기서 답보로를 하면서 양일간을 그냥 넘기면서 그동안 생각한다는 한 속임수에 지나지 못한다. 그런지라 답보로 의 몇 절은 혹은 관대히 넘겨야 할 종류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답보로 를 하려 해도 성격 혼란의 責[책]은 면치 못할 것이다.
영채는 병욱과 함께 황주서 지내다가 병욱을 따라서 음악 공부 하러 동경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 작자의 즐기는 '차중 기연’은 다시 생기게 된다. 선형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이형식이 같은 기차에 타게 된 것이다.
미국 가는 형식 그 새 전원 생활 월여에 온갖 과거의 잡념에서 벗어났던 영채는 남대문 정거장에서 '이형식 군 만세’라고 여럿이서 외치는 소리에 소스라 쳐 놀랐다. 영채와 병욱과의 대화 "언니, 웬 일인지 나는 가슴이 몹시 설렙니다."
"왜? 이형식 씨란 말을 듣고?"
"응, 여태껏 잊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잊은 것이 아니야요. 가슴 속에 깊이깊이 숨어 있던 모양이야요. 그러다가 '이형식 군 만세’라는 소리에 갑자기 터져 나온 것 같습니다. 마음이 진정치 아니해서 못 견디겠소."
"아니 그렇겠니. 어쨌든 칠팔 년 동안이나 밤낮을 생각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떻게 쉽게 잊겠니? 이제 얼마 지나면 잊을 테지만."
"잊어야 할까요?"
"그럼 어찌하고?"
"안 잊으면 안 될까요?"
이것을 작자는 그냥 '사랑’이 아니라 '인습’이라고 할까. 만약 이 것을 인습이라고 일축하려면 사람이란 어떤 것이라고 표본을 보여 줄 의무가 작자에게는 있다. 그러나 '인습에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고 오단은 내렸지만 이 이상 다른 종류의 소위 '참 사랑’을 파악치 못한 작자는 一者[ 일자] 를 인습이라고 경멸하면서도 새것을 보여 주지를 못하였다.
병욱은 물끄러미 영채를 보더니 영채의 곁에 가 앉아서 한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형식 씨가 벌써 혼인을 하셨다. 지금 동부인하고 미국 가는 길이란다."
"에? 혼인?"하고 영채는 병욱의 팔을 잡는다. 병욱은 위로하는 소리로 "아까 여기 왔던 선형이라는 이가 그의 부인이란다."
"그러면 그때에 벌써 약혼했던가." 하고 지나간 일에 실망을 한다. 자기의 지나간 생활이 더욱 슬퍼지고 원통 해진다. 자기는 세상에 속아 서( 약) "언니, 왜 그런지 원통한 생각이 나요."
"그러나 장래가 있지 않으냐?"하고 힘있게 영채를 안아 준다.
이 소녀의 심경을 사랑이 아니라면 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하려는고.
작자가 아무리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구구히 설명하나 그것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식도 이 기차에 영채가 탄 것을 알게 된다. 이 희극 광대는 여기서도 또 공상을 한다. 성격의 통일과 감정의 순화에 서투른 작자는 형식이 공상에 빠질 때마다, 혼선을 거듭한다. 이때의 형식의 공상도 이전의 여러 번 거듭한 공상과 마찬가지로 그런 형이었다. 거리는 철학적 술어를 많이 늘어 놓아서 여러가지로 형식의 공상을 합리화시키려 한 노력이 보이기는 하지만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갈피를 차릴 수가 없다. 작자도 갈피를 못 차렸을 것이다. 형식이도 갈피를 못 차렸다. 작자의 난필이 어지러이 춤출 뿐이다.
이렇게 아무도 갈피 차리지 못할 亂想[난상]을 하다가 형식은 영채를 만나 보려고, 영채의 차실로 향한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형식의 성격으로는 이때에 임하여 미국이고 아내고 돈이고 모두 내던지고 변소에 가는 체하고 몰래 기차에서 뛰쳐내려서 도망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망친 뒤에는 또 도망친 일을 후회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형식은 그런 인물이다.
그런데 형식은 비교적 정돈된 머리로서 영채를 방문하고 순서 있게 영채와 이야기를 하고, 더구나, 병욱이가 형식을 조소할 때에,
'이 계집애가 꽤 사람을 골린다’라고 냉정한 판단까지 내릴 수 있다는것은 우리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형식이가 영채를 차실로 찾았으면 영채의 앞에 가슴을 두드리며 통 곡해 사죄하고 영채와 살자고 빌다가 병욱에게 쫓겨가야만 순조로운 진행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되면 소설이 되지 않겠는고로 작자는 여기서 이전의 형식의 성격을 슬쩍 속여 버리고 또한 굳센 사나이로 만들어 놓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주인공 이형식의 성격을 그릇 선택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자초지종으로 이렇듯 불통일이 된 것이다.
새로운 의문 하나 형식의 마음에는 새로운 의문 하나가 일어난다.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까 남대문에서 차를 탈 때까지는 오직 선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듯하더니, 지금 또 영채를 보면 선형은 둘째가 되고 영채가 자기의 사랑의 대상인 듯도 하다. 그러다가 또 앞에 선형을 보매 이야말로 내 아내, 내 사랑하는 아내라는 생각도 난다. 자기는 선형과 영채를 둘 다 사랑하는가.(약) 사랑은 결코 동시에 두 사람 이상에 향할 수 없는 것이어늘 지금 자기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에 있나(약).
오래 생각한 뒤에 형식은 이러한 결론에 달하였다.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결코 뿌리 깊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는 선형의 얼굴이 예쁜 것과 태도가 얌전한 것과 학교에서 우등한 것과 부자요, 양반의 집 딸인 것 밖에 아무것도 선형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이렇게 발단하여 혼선적 묘사는 다시 시작되어 한참을 내려가다가 또 의례 히 시작되는 大悟[대오]가 있고, 대오가 생긴 뒤에 또 만족해서 빙긋이 웃는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와 선형과 또 병욱과 영채와 그 밖에 누군지 모르나 잘 배우려 하는 사람 몇 십 명, 몇 백 명이 조선에 돌아오면 조선은 하루 이틀 동안에 갑자기 새 조선이 될 듯이 생각한다. 그리고 아까 슬픔을 잊어버리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잠이 든다.
이 가련한 희극 배우는 이렇듯 스스로 위로하고 그 위에 國士然[ 국 사연] 한 감회까지 품으며 잠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오를 독자는 결코 신용치 않으리라. 칠면조와 같이 변하기 쉬운 형식이 한때 대오하던들 그것이 몇 십 분이나 가랴?
이 갸륵한 남편에게 전염됨인지 형식의 아내 선형도(공상의 대가인 형식 도잠이 들었는데) 자지도 못하고 공상을 한다. 좀더 적절히 말하자면 강 짜를 한다.
공상! 공상! 왜 작자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이렇듯 공상 즐기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우리의 아는 선형은 좀 둔감하고 多信[다신]한 여인 이었더니. 만약 이런 여성으로서 강짜를 하였다면 중인환시중에서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울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둔감한 미소를 띠고 맞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의 인물을 실은 남행 열차는 삼랑진까지 갔다. 여름 폭우에 선로가 파손되어 승객들은 모두 내리게 되었다.
여기서 이 네 사람은 부득불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내려서 모두 함께 어떤 '이랏샤!’를 부르는 여관으로 들어가서 한 좌석에 마주 앉는다.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결말을 향하여 급템포로 내려간다.
각각 제 감정을 따로 품은 네 인물, 한 남자와 세 여자.
자기의 앞에서 난무하는 三角的[삼각적] 一組[일조]의 남녀를 조소와 동정으로 보고 있는 병욱이.
약혼한 남녀와 영채와의 새를 불쾌한 생각으로 보는 선형이.
근 이십 년간을 사모하던 사람을 잃고 속으로 애타하는 영채.
이 틈에 끼여서 동으로 서로 건들거리는 형식이.
이 네 개의 인물이 한 자리에 모이매 작자는 이 융화를 어떻게 꾀 하려는가?
여기서 삼랑진 수해 만난 사람들에게 대한 민족애로써 4인의 감정을 융화 시킨 점은 용하다. 이런 거대한 사건이 돌발하지 않았다면 네 사람은 제각기 제 품은 감정대로 헤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民族愛[민족애] 이 민족애라는 것이 또한 이 작자의 항용 쓰는 무기이나 대개가 억지로 의식적으로 삽입하여 작품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은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것인데 이 장면에서뿐은 이런 문제가 아니면 도저히 서로 한 좌석에 모여서 한 마음으로 담소를 못할 것으로서 춘원의 전 작품을 통 하여 유일의 '적절한 삽입’이었다.
단지 우리가 그냥 의심하고 믿지 못할 것은 이때의 순간적 심리로 인하여네 사람이 같은 감정 아래서 행동하였다 하나 이 감동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침뱉는 바지만 형식과 같은 줏대 없는 인물에 있어서 이 감동이 단 1일을 갈지가 의문이다.
하여튼 네 남녀는 여기서 이 동족들이 대자연의 暴威[폭위]에 집을 잃고 產[ 산]을 잃고 먹을 것을 잃고 우는 양에 동정심이 생겨서 임시로 정거장을 빌려 가지고 거기서 동정 음악회를 열어서 거기서 얻은 의연금으로 이 가련한 동족들에게 만분지 일이나마 조력을 한다.
그런 뒤에는 여관에 돌아와서 아직 흥분에 들뜬 이 네 사람은 서로 흥분 되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형식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방 안을 거닌다.
"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흥분되기 쉽고, 그 꼴에 국사를 자처하는 형식으로는 할 만한 노릇이다.)
이 말에 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한참 있다가, 병욱이가 "불쌍하게 생각했지요"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한다. 오늘같이 활동하는 동안에 훨씬 친하여졌다.
"그렇지요. 불쌍하지요.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무론 문명이 없는 데 있겠지요. 생활하여 갈 힘이 없는 데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 저들을 구제 할까 요."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 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그러나 이 문답은 도리어 병욱이가 묻고 형식이가(연지구지한 끝에) 대답을 하였어야 될 것이다. 이런 문답을 계속하는 동안에 신우선이가 이 방에 들어온다. 신우선은 사(신문사)의 명으로 수해 실황을 보러 왔다가 정거장에서 네 남녀의 기특한 행동을 듣고 감격하여 이리로 찾아온 것이다.
이리하여 여기서 다섯 사람이 흥분과 감동으로 제각기 장래의 희망을 토론 하는 막으로 이 소설은 대단원을 맺는다.
제126절은 사족이다.
126절에 있어서는 작자는 아직껏 이 소설에 등장하였던 인물 전부를 재등장을 시켜서 그들의 십 년 후를 독자에게 알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파 비극( 혹은 正劇[정극])의 대단원과 같은 느낌을 줄 뿐 소설적 효과를 조금도 더 돕지를 못하고 도리어 우습게 만든 데 지나지 못한다.
신우선과 영채가 결혼했더면 한 가지 더 기괴한 것은 신우선과 영채를 결합 시키지 않은 점이다.
작자는 누차 신우선이 어떻게 영채를 내심으로 사랑하였는지를 설명 하였다. 영채도 또한 신우선을 밉지 않게 보았다는 말도 여러번 하였다. 이 두 남녀야말로 서로 성격도 맞고 지식에도 공통점이 많으며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왜 이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않았는지.
이 소설의 일부의 목적이 인습 타파와 신 연애관 수립에 있다는 것이 부인 치 못한 사실인 이상에는 이 점으로 보아서라도 반드시 결합이 되어야 할것이다.
그런데 신우선은 '내 친구를 사모하던 여인이니’하고 그만 단념하고, 영채는 또한 '형식 씨의 친구니’하여 단념한 것은 작자가 자진하여 인습을 지키라고 지시함과 마찬가지로 모순의 감을 면치 못한다.
아아, 우리의 땅은 날로 아름다와 간다. 우리의 연약하던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약)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 무정을 마치자.’ 이 감개무량한 數言[수언]이 「무정」 전편의 끝막음 절이다.
이리하여 「무정」은 무정하게도 말미가 몽롱하게 끝이 났다.
이 「무정」은 여러가지 의미에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수확이다.
아직 그 문장에 있어서는 기미년 〈창조〉 잡지가 나타나서 구투를 일소 하기까지는 그래도 '이러라’ '이로다’ '하더라’ '하노라’의 투가 많이 남아서 「무정」에 있어서도 그 예를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조선 구어 체 로써 이만치 긴 글을 썼다 하는 것은 조선문 발달사에 있어서도 특필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무정」이 조선 사회에 던진 파동도 특필할 만한 것으로서 거장 이인직이 그 새 몇 개 발표한 소설은 감정에 있어서 재래의 감정이었었는데 새로운 감정이 포함된 소설이 조선에 나타난 효시로도 「무정」은 특필할 가치를 가졌으며, 대중에게 一顧[일고]도 받지 못하고 서거한 이인직 씨의 이후로 조선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환영된 소설로도 특필할 가치가 있거니와,
이 소설의 작자인 춘원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작품이니, 그 뒤에 발표 된 모든 장편소설(사담은 제하고)이 엄정한 의미에 있어서 「무정」의 연장에 지나지 못하는 점(이것은 후에 논함)으로 보아서도 이 「무정」은 아직껏 의춘원의 대표작인 동시에 조선 신문학이라 하는 대건물의 가장 긴한 주춧돌이다.
그 뒤에 춘원의 文學史上[문학사상]의 功罪[공죄]는 차차 論[ 논] 하려니 와이 한 작품만 가지고도 춘원의 이름은 조선 신문학사에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무정」이 완결된 지 얼마 지나서 역시 〈매일신보〉 지상에 춘원의 제 2 장편 「개척자」가 실렸다. 그러나 이 「개척자」는 논치 않는 편이 도리어 점잖지 않을까.
「무정」을 게재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았는지라 〈매일신보〉는 판매 정책상 춘원에게 또 소설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을 것이며, 춘원은 용돈이라도 얻어 쓰느라고 집필을 한 것이지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무정」에 있어서 있는 정열을 모두 다 쓰고 빈 마음에 새로운 감동을 집어넣기 전에 「개척자」를 쓴 것이라 거기는 한 개의 감동도 없고 한 개 의정 열도 없다.
아무 성격이며 정서며를 가지지 못한 몇 개의 인물이 마치 '잠결에 듣는 옛말’ 과 같이 꿈틀거리다가 결말을 맺었다.
춘원의 '이데올로기’를 소설 형식으로 억지로 빚어 놓으려고 성격도 없는 허수아비를 몇 개 만들어 놓고 부자연한 언행을 행케 한 '문학의 濫費[ 남비]’에 지나지 못한다.
그의 소설마다 으례히 나오는 몇 장 노래도 더욱 그 부자연감을 돋굴 뿐이다.
말하자면 춘원은 교활하게 되어서 '신문소설이다. 되는대로 쓰자’고 진실한 태도를 내어 버린 모양이다.
그런지라 「개척자」는 논외로 집어던질 수밖에 없다.
5. 己未[기미] 前後[ 전후]
〈 매일신보 〉 지상에 「무정」과 「개척자」를 게재한 뒤에 춘원은 또, 〈 매일신보 〉 의 촉탁으로 남조선 답파를 하였다. 그러나 거기는 「 무정 」으로서 조선에 말하려던 그 이상의 별것이 없었다. 새로운 관찰이며 의도 며가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도 「무정」의 한 연장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무오년이 넘어가고 기미년이 이르렀다.(6행 약) 그때 마침 귀향하여 있던 춘원은 이 의논이 한창 무르익은 때에 다시 동경에 발을 들여 놓았다.
× × × × × (독립선언서-편자 註[주])를 초함에 있어서 그 초안자에 급하였던 유학생 간에서는 이 유학생계 유일의 문필가인 춘원에게 그것을 촉탁 하였다.
이것은 춘원에게 있어서는 달갑고도 또한 무서운 일이었다. 그가 아직 주창 하여 오는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보아서는 이 위에 더 명예로운 일이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 글을 초함으로 당연히 받을 법적 제재는 역시 그에게는 쓴 일이었다.
春園[춘원]의 망명 그는 × × × × × 를 초하였다. 그런 뒤에는 그의 동지 이자 또한 위촉자들이 그냥 留東[유동]하여 있는 데 반하여, 그는 황황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조선문학 사상에 있어서 집필할 만한 기념 탑인 〈 창조 〉 지 창간호 발행의 수일 후이었다.
이 피신이라는 것이 춘원의 온갖 방면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바다. 춘원은 어디까지 든 문학의 人[인]이지 결코 전선에 나설 실행의 인물이 못 된다. 지금도 춘원은 자기 스스로를 문사라기보다, 오히려 정객으로 보고 싶어 하고, 남이 그렇게 보아 주지 않는 데 대하여 불평까지 품고 있으나, 춘원은 어디까지 든 문학의 인이지 정치의 인이 아니며 筆[필]의 인이지 실행의 인이 아니니, 이제라도 누가 만약 '위험성을 띤 정치 운동’에 춘원더러 참가하라 하면 춘원은 피신의 여지를 본 뒤에야 승낙을 할 것이다.
기미년이라는 해는 조선에 있어, 온갖 방면으로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 것같이 문학 운동에 있어서도 기미 전의 것은 과도기인 것에 반하여 기미년부터 비로소 구체적으로 발전 과정에 들었다.
〈創造[창조]〉와 朝鮮文學[조선문학] 이인직에게서 이광수로, - 이 리하여 이광수에게서 얼마만치 생장한 문예는 온갖 의미에 있어서 계발기의 문학 이었다.
아직 그 플로트에 있어서든 묘사에 있어서든 구탈의 흔적이 그냥 남아 있었다. 문장에서까지도 역시 구탈이 그냥 남아 있었다.
이 모든 구탈이 기미년 2월에 창간된 〈창조〉에서 비로소 일소되었다.
춘원까지의 문예에 있어서는 소설의 흥미를 그대로 '이야기의 재미’ 와 ' 연애 혹은 정사의 재미’로써 빚어 보려 한 데 반하여, 〈 창조 〉에서는 ' 리얼리즘의 진미’야말로 소설의 최고 흥미라 하고 '이야기로서의 흥미’ 를 거부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아직껏의 소설 내용에 대한 정의를 뒤집어 놓는 한편으로는, 조선문학이 쓸 형태를 비로소 만들어 놓았다.
첫째로 구어체의 확립이었다.
춘원까지에 있어서는, 그 글투에, '이러라’, '이더라’, ' 하도다’, ' 이로다’ 등은 그냥 구어체로 사용하였다. 〈창조〉 동인들은 의논 하고 이런 정도의 글까지도 모두 일축하고 '이다’, '이었다’, '한다’ 등으로 고쳐버렸다.
조선 말에는 존재치 않을 He와 She 등 대명사를 몰몰아 '그’라 하여서 지금 조선서 소설 쓰는 사람에게 편리케 한 것도 〈창조〉의 공이다.
겁 많은 춘원이 감히 생각내지 못한 지방 사투리- 특히 평안도 사투리를 지문에 잡아넣으며 일변으로는 전인이 '점잖지 못하다’고 일고도 하지 않던 土語[토어]들을 모두 지면상에 부활시키어서, 조선어를 풍부케 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지금 문예물뿐 아니라 온갖 글에, 조선어가 아무런 말이라도 사용될 수 있 다는 점을 先鞭[선편]을 붙여서, 오늘날 조선어를 이만치 풍부히 만들어 놓은 점은 〈창조〉에 치하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만약 〈창조〉에서 이런 만용을 보이지 않았다면(문예의 내용은 춘원 시대보다 변하였을지 모르나) 형식에 있어서는 얼마한 진보가 있었을는지 심히 의심하는 바이니, ' 이러라’, '하도다’ 등도 당년에 있어서 그 구어로 인정되는 바이니, 이 탈에서 벗어났을는지도 의문이어니와, 토어를 무제한으로 문장화한다는 것은, ' 무지하다고 일컬을 만한 만용’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도 춘원은 '한다’ '이다’ 등으로 족하다 한 데 반하여, 〈창조〉에서는 '했다’ '이었다’로 모두 과거사로 만들어서, 실감 미를 주었으니, 그 이래 지금까지 조선의 문학이 걸어온 것은, 전혀 이형식에 입각하여서다.
이리하여 기미년 2월에 창간된 〈창조〉지는, '조선문학 개척’의 도끼를 높이 들고 이 황야를 다스려 나갔다.
기미년의 한소리 만세성에 寺內[사내]와 長谷川[장곡천]의 정치가 깨어지고 齋藤[재등]의 온정주의가 조선의 위에 날개를 폈다.
동시에, 寺內[사내] 시대의 조선이 좀 풀리며 민간에도 신문 잡지 발행을 좀 너그러이 할 때에, 몇 개의 잡지가 생겨났다.
문예지 〈廢墟[폐허]〉도 온정주의의 여덕에 생겨났지만, 불행히도 〈 폐허 〉 지 자체는 조선 문예 계발에는 아무 공헌도 없었다.
文人輩出[문인배출] 〈開闢[개벽]〉지도 온정주의 여덕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개벽〉지는 문예 잡지는 아니었지만, 〈창조〉 이후에 문예에 큰 공헌이 있었으니 〈폐허〉의 동인이던 廉想涉[염상섭]이 소설가로 전환 하여 成家[ 성가] 한 것도 〈개벽〉이요, 玄鎭健[현진건], 羅彬[나빈], 金素月[ 김소월] 등도 〈개벽〉을 무대로 생겨난 작가들이다. 그밖에도 많은 문인들 이 배출 하였다.
만약 이 배출 시대에 있어서, 과거 〈창조〉가 쳐 놓았던 선편만 없었다면, 그야말로 군웅난무의 혼란 상태를 이루었을 것이다. 문장이며 용어 범위며 표현이며 '리얼의 한계’ 등에 모두 선편이 있었는지라, 이 군웅은 一絲[ 일사] 의 얽힘도 없이, 오로지 문학 건설에 정진하였다.
바야흐로 이러한 때에, 상해 피신해 있던 춘원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때의 조선문학은, 그가 떠날 때와는 비길 수도 없도록 진보 하였다.
춘원이 상해 재류중은 安島山[안도산]의 훈도를 받았다.
동하기 쉬우니만치, 또한 감격키도 쉬운 춘원은 비상한 심경으로 비상한 지경에서 비상한 생활을 하는 중에, 감화력이 놀랍게도 강한 도산의 훈 도를 받은 것이다.
이전 「무정」조에서 말한 바 춘원의 이원적 성격에, 여기서 또 한 가지가 첨가 되었다. 피신 이후의 춘원이 그 성격상 매우 커 보이는 때는 이상 3 자가 잘 융화된 때요, 모순이 보일 때는 이상 3자가 상격이 된 때다. 감수성이 많고 공명성이 많은 춘원은 일시 감격된 감정은 모두 그대로 삼켜 버렸다. 재래의 것과 모순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찰치도 않고….
그런지라, 파쇼를 찬미하는 한편으로는 톨스토이를 찬미하며, 제국주의를 강조하는 한편으로는, 또한 침략주의를 배격하는 데도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도 이 모순된 二面[이면]을 모두 정당시하고, 결코 부자연타 보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격이 대단히 단순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공명성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단점인 동시에 또한 그의 장점에 다름없다. 많은 모순을 보이는 이 단점은 또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새로운 사상에 대하여는 늘 선봉을 선다는 선도자 로서의 그의 일면을 보여 준다. 다만 한 가지 붉은 사상뿐에는 한 번도 물들어 보지 않은 것은, 도산의 위대한 감화의 힘이 아닐까.
'長白山人[장백산인]’ 귀국 후에 한동안 춘원이 사용한 호 ' 장백산인’ 은 상해신문 × × 에서 그가 쓰던 호이니, 거기 대한 도산의 설명은, "주머니 속이 늘 비었으니, 一長白[일장백]이요, 겨울에도 흰 夏洋服[ 하양 복]을 입었으니 二長白[이장백]이요, 마음이 단순하니 三長白[ 삼장백] 이요, 장백산 하의 조선인이니 此亦[차역] 長白[장백]이라."
함과 같이, 상해에서의 춘원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만약 이 때에 도산의 위대한 감화력만 없었더면 춘원은 빈곤에 못이기어 타락하였을 것이다.
헐벗고 굶고, 이런 빈곤과 싸우다 못하여 그는 어떤 기회에 그만 귀국 하기로 한 것이다. 단순하고 심약한 춘원이 이 '귀국할까’ '말까’의 양 난의자리에서 얼마나 번민하였을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다가 드디어 눈 꾹 감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現[현]부인 許英肅[ 허영 숙] 씨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비로소 틀었다.
이 귀국한 뒤의 춘원의 거취에 대하여는 그때 갓 형성된 문단은 매우 흥미의 눈으로 보았다.
어떤 길을 밟으려는지. 춘원이 아직껏 산출한 문학은 한 민족의 계몽 기의 대중문학 이었다. 그러나 수년간 망명 생활을 한 뒤에 귀국한 때의 조선문학은 20세기의 세계문학과 동열의 것이었다. 조선 민중의 문학에 대한 감상 안은 어느 정도이건, 문학만은 홀로이 높은 자리에 뛰어올랐다.
춘원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따라오려 하였다.
〈개벽〉〈조선문단〉등에 게재된 「가실」, 「거룩한 이의 죽음」, 「血書[ 혈서] 」 등 수편의 단편이 이때의 작품이다.
6. 「가실」 以下[이하] 短篇[ 단편]
春園[ 춘원] 의 短篇[단편] 「가실」 이하의 수개 단편은 조선 사회에 상반 된 두 가지의 관점 아래서 발표되었다.
대중은 또 다시 열광하였다. 그 새 대중의 앞에 제공된 소설이라는 것은, 대중적 안목으로 보자면 건조무미한 것이었다. 거기는 연애도 없고 연애가 있 댔자 자조적 의미 이상의 것이 없고, 활극이 없고 비극이 없고- 말 하자면 리얼과 주관의 맛을 알 만한 고등한 감상안을 못 가진 조선 대중에게는, 문자의 濫費[남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설이랍시오 하고 대중의 앞에 제공하여 오던 것이었다.
이 달갑지 않은 고등 요리에 기아증을 느끼고 있던 대중의 앞에, 오래간만에 춘원의 소설이 나타났다. 거기는 사건적 흥미가 있고, 화려한 문장이 있고, 그 위에 그 새 망명 기간에 춘원의 마음에 생긴 바(그 전부터 있던 것이 자란 것이었다) 웅장벽과 감격벽이 다분히 든 점까지 대중의 기호에 맞았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비교적 냉담하였다. 문예적 가치로 보아서, 「 무정 」 등 전기 작품보다 훨씬 떨어지는 작품으로서, 거기는 당시의 문단의 일종의 자존심과 시기까지 섞였겠지만, 이 소설들을 문예라 보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 단편들은 어떤 것인가, 개개로 간단히 보기로 하자.
-「가실」
이것은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가실의 이야기를 物語化[물어화]한 위에, 그 중간에 당시의 춘원의 감수성 많은 성격이 잡아넣었던 反戰[ 반전] 의식을 약간 가미한 한 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사건적으로든 소설적으로든 또는 도덕적으로든 채 끝 맺지 못한 소설이다.
신라 어떤 시골 총각이 동리 처녀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구려 원정군 에끼여서 전장에 나갔다가, 거기서 포로가 되어, 수년간 고구려 머슴으로 지내면서도 신라에 남겨 둔 처녀(그와 약혼한 색시)가 못 잊히어, 드디어 정 들었던 제2 고향을 떠나서 고국 신라로 향한다 하는 데서 이 소설은 끝이 났다.
그러면, 그는 무사히 신라까지 돌아갔느냐, 혹은 중도에서 병이라도 나서 죽었느냐. 만약 중도에서 병이 나서 죽었으면, 이는 천도가 무심한 것이다.
만약 무사히 신라까지 돌아왔다면, 그의 약혼한 처녀는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나. 혹은, 소식 없는 낡은 님보다, 눈앞에 보이는 새님을 맞아 갔나. 전자라면 거기는 감격할 인정이 있고, 후자라면 몸서리칠 무정이 있다.
이 삼자 중의 한 가지의 말단을 보여 주지 않으면 이 소설은 미 완이라는 비방을 면치 못할지니 사건적으로 보아도 아직 미완일 뿐더러 ' 소설이란 한 개 인생을 말한 것’이라는 견지로 보아도 미완이며 '인생’을 ' 불구화’ 한다는 도덕적 견지로 보아도 불완전한 작품이다.
이리하여 「가실」은 '중도에 끊어진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 그 이상은 올라가지 못하였다.
-「어떤 아침」
悲壯味[비장미] 이것은 춘원의 비장벽과 감격벽의 산물로서, 거기는 한 개의 성격도 없고 사건도 없고 그 작품 주인공인 '그’라는 인물이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혼자서 비장한 감격에 잠겨서 '오오’와 '아아’를 부르짖는 부자연한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거룩한 이의 죽음」
이 소설은 춘원의 소설을 말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예증들 만한 점을 가 진자이다.
이 소설의 첫머리에 주인공인 듯이 등장시켰던 '대위 부처’를 작자는 하반 부에서는 잃어버리고, 전력을 다하여 동학 선생 해월의 뒤를 따라갔다. 이것은 이 소설의 상반부와 하반부에 주인공을 달리한 것으로 소설 통일 상지장이 있는 바다. 해월을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대위 내외’가 중대 시 되었다.
이것은 단편소설의 효과상 피해야 할 일이다.
또, 춘원이 소설상에서 위인 혹은 理想人[이상인]을 쓰려면, 거기는 그 의비 장벽과 감격벽이 너무도 강렬히 나타나서, 비장미보다도 희극미가 도리어 앞서는 것을 이 소설에서도 볼 수 있으니 이 비장벽이 과히 활동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춘원이 말하려던 '자기 희생의 대정신’은 도리어 이 희극적 비장미 아래 감추여서 막연하여졌다.
崇神人組合[숭신인조합]에서나 운운할 만한 몇 가지의 기적적 사건은 피하 여야 할 것이다.
- 요컨대 「거룩한 이의 죽음」은 천도교 기관의 잡지인 〈개벽〉을 위 하여 쓴 것이라는 一語[일어]로서 전부가 끝날 것으로서, 거기는 신격으로 과장 된 인물의 부자연스런 최후가 있을 뿐이다.
-「殉敎者[순교자]」
이것은 극이다.
내용은 「거룩한 이의 죽음」과 同工異曲[동공이곡]인데다가 한 가지 춘원이 소설상 즐겨 등장시키는 중년색의 재산가인 송 서방이라는 인물이 첨가 된 뿐이다.
그러나 춘원은 왜 이것을 극이라고 썼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마디마디마다 설명 지문이 나오고 등장 인물의 전 행동의 가장 조그만 일동까지라도 모두 지문으로 설명한 이 물어는, 극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춘원은 '각본’을 몰랐다.
-「혼인」
소화 5년 10월 10일 발행 興文堂[흥문당] 書店[서점] 印本[인본]에 나타난이 혼인은 어찌된 셈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야기가 한참 진행 되다가, ' 새벽 닭이 두 홰나 울 때쯤 하여’ 로서 그 뒤가 없다.
이것은 무책임한 출판업자의 무지한 일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이 책이 제4판이니) 제4판이 되도록 이런 실수를 정정치 않은 원작 자의 책임도 면치 못할 것이다.
-「할멈」
이것은 한 개 스케치지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인물과 사건과 배경 -즉 성격과 행동과 문제- 이 삼 자가 구비 되어야지 그 한 가지라도 빠지면 안 되는 것인데 여기는, 소설상 사건이라고 볼 자가 없다. 한 소설의 일 장면- 이렇게 볼 밖에는 없다.
-「血書[혈서]
이리하여 수개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은 춘원은, 드디어 돌아서서 다시 연애소설을 썼다.
이 「혈서」가 대중에게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지는 이 「혈서」가 게재 된 〈 조선 문단 〉 잡지가 순식간에 절판이 된 점으로 알 수 있다.
大衆[대중]은 興味[흥미]를 求[구]한다 조선의 작가들은 연애소설을 그 새 쓰지 않았다. 전 지구상에 너무도 많은 작가들이 모두 연애를 주제로 소설을 썼는지라, 인제는 연애로서는 새로운 '인생’을 말할 만한 재료를 구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자연히 연애소설은 몰각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인생’보다도 '연애’를 구하고자 하는 대중들은 戀愛物語[ 연애 물어]에 주렸다.
여기, 춘원의 연애소설이 대중의 앞에 제공된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은 연애에 애타는 이국 소녀가 너무도 타는 심정에 마지막에는 죽어 버리며 ' 나’라는 주인공은 소위 '큰 뜻에 바친 몸’으로 일생 결혼을 안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대중에게 꼭 맞았다.
당년 조선 대중이 얼마나 연애물어에 주렸던가 하는 점은 「사랑의 불꽃 」 이라 「金孔雀[김공작]의 哀想[애상]」이라 하는 등등의 책자가 놀라운 부수로 발행된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혈서」는 춘원의 화려한 문장과 춘원의 플로트 조성 재능으로 빚어진 재미있는 물어와 춘원의 정열적 문자가 합하여 된 센티멘탈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소설은 '인생’을 말하는 바가 없다. 독후에 沈思[심사]케 하는 여음이 없다.
-말하자면 이것도 소설로는 실패의 부에 속할 자다.
-「H군을 생각하고」
이것은 작자도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실담’이다. 그런지라 소설로운 운 할 것이 못 된다.
만약 이것을 소설로 보이려면 작자는 사실을 좀 굽혀서라도 소설적 가미를 할 의무가 있다. 더우기 H군의 애인이라는 여인의 배신적 행동(독자는 그렇게 보았다)에 대하여도 작자는 독자의 오해를 똑똑히 풀어 줄 의무가 있다. 이 모든 점을 그냥 넘겼으매, 「H군을 생각하고」는 작자의 일기의 발췌로 보아 둘 밖에는 도리가 없다.
失敗[실패]의 原因[ 원인] 이 리하여 귀국 이후의 재출발을 창작 방면으로 뻗으려던 춘원의 기도는 완전히 실패하였다.
사건적 흥미에 너무 치중하려는 생각(이것은 신문소설을 쓴 여독이다) 이그의 실패의 첫 원인이고, 내재한 비장벽을 발표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비 장벽이( 단편이니만치 너무도 부자연하도록 명료하게 나타나므로) 작품을 損[ 손] 치는 둘째 원인이요.
단편을 취급함에 장편적 수법을 사용하였음이 또한 실패의 원인이다.
여기서 춘원은 번민하였다.
온전히 붓을 꺾을까. 꺾자니 그래도 알끈하였다.
그러면 붓을 그냥 계속하여 잡을까. 그러나 그냥 잡자니 스스로도 작품에 불만을 느끼는 것을 어찌하랴.
대중의 환호와 동업 문인의 냉시 가운데서, 자기의 거취에 대하여 번민을 거듭하 다가, 그가 제3차 출발의 활로를 발견한 것은 동아일보 지상의 신문 소설 게재였다.
이리하여 춘원은 비로소 자기의 정당히 나아갈 길을 발견하였다.
신문소설을 엄정한 의미의 문학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이단적 조건이 많이 갖는다.
그러나 신문소설이 그 민족 문예 조장에 가지는 역할은 무엇에 비기지 못 할지니, 明治[명치] 초년의 일본 문단에 있어서 尾崎紅葉[미기홍엽]이며 德富蘆花[ 덕부 노화] 등의 소설을 문예물로 보기에는 좀 거리가 머나, 문학 운동의 부가결하 운동이라는 점은 부인치 못할 것으로서 그들의 대중적 운동이 없었더면 오늘날의 일본문학의 대성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춘원이 동아일보를 무대삼고 나타난 제3차 출발은, 또한 허수 로이 볼 수가 없는 일이다.
數種[수종] 論說[논설] 여기 대해서는 순차로 論之[논지]하고 그 전에, 순서상 춘원의 논설 등에 대하여 매우 간단히 한 마디 하여야 할 것이다.
-'新生活論[신생활론]’, '民族改造論[민족개조론]
이 논설 등은, 춘원이 자기 문학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동안 신국면 타개의 일 방도로서 한 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논 중의 주의로서 직접 이는 춘원의 주의어니 하기에는 춘원은 너무도 변하기 쉬운 사람이니, 감수성이 강한 춘원이 어떤 원인으로 일시적 흥분과 감동으로 揮之[휘지]한 장논문으로 보면 그만이다.
무론 그런 논설을 쓴 이후에는 그의 마음에도, 이 논과 상부하는 사상도 저장 하였겠거니와, 부분적으로는 그 논과 정반대되는 논도 또한 정당하다고 믿고 있느니만치 단순하고도 감수성 강한 춘원이다.
그런지라 이 주장이 춘원의 절대적 사상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만치, 이 논으로 춘원의 사상 동향을 폄하기 어려우니까, 가벼운 정도로 보아 넘길 종류의 논설이다.
이리하여 제1기와 제2기를 지나서 제3기에 들어선 춘원을 이하 순차로 보기로 하자.
7. 物語[물어]와 史話[사화]와 小說[ 소설]
엄정한 의미의 창작이 자기의 본질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춘원은 이에 제 2 차의 도정을 밟았다. 동아일보를 무대로 삼고 連載物語[연재물어]를 쓰기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春園[춘원] 執筆[집필]의 信條[신조] '아무쪼록 쉽게 언문만 아는 이면 볼 수 있게, 읽는 소리만 들으면 알 수 있게, 그리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그리고도 독자에게 도덕적으로 해를 받지 않게’ 이상이 「춘원 단편소설집」의 自序[자서]의 일절이다.
결국 이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당년의 조선 문예는 독자 대중을 안중에 두지 않고 너무도 높이 올라뛰었다. 문예는 문예대로- 독자는 독자대로- 이렇게 서로 평행적으로 걸어갔다.
너무도 높이 올라뛴 문예를 독자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애당초 보기부터 거부하였다.
그때의 문예물의 독자는 수인의 문학 청년과 그 밖에 '문예를 읽어야 새로운 사람이거니’하는 '모던’급 사람에 지나지 못하였다. 대중은 이 건조 무미한 문예를 읽을 생각도 안하였다.
나빈의 신문소설, 염상섭의 신문소설, 등등 수개의 신문소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신문에 연재하였으니 신문소설’이지 결코 신문소설의 본질에 맞는 자가 아니었다.
이리하여, 문예는 문예대로 제 갈 길만 가고, 대중은 대중대로 저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이리하여 문예와 대중은 영구히 평행적으로 나아갈 듯이 보이는 이 현상에 미루어, 반드시 그 양자를 한군데 악수케 할 중간적 문예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치 일본에서 明治[명치] 문단에 있어서 신진 기예의 순문예파와 아직 눈 뜨지 못한 대중을 악수시키기 위하여 大町桂月[대정계월]의 문장 운동과 尾崎紅葉[ 미기 홍엽] 德富蘆花[덕부노화]의 문화적 문학 운동이 불가결의 것 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있어서도 그 중간의 작자가 생겨나지 않으면, 문예는 저 혼자 외로운 춤을 추다가 저 혼자 쓰러져 버릴 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文化的[문화적] 文學[문학] 運動[운동] 말하자면 문화적 문학 운동이었다.
그것은 우리 자손에게 끼쳐 준 유산으로서의 문학 운동보다도 그 문학 선까지( 눈 어두운) 독자를 끌어 올리려는- 문학 운동이라기보다, 문화 운동이라는 편이 더 적절한 운동이었다.
춘원은 이 길에 내리려 하였다.
신문학 수립에 있어서 이인직의 뒤를 이어 고군분투하려 일어섰다.
「許生傳[허생전]」 이하 많은 장편이 동아일보에 꼬리를 이어 나타났다.
이하, 춘원이 그간 발표한 많은 장편을 (완결된 것만을 추려서) 순서를 따라서 논하려 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그 여러 작품을 대략 분류하여 볼 필요가 있다.
作品[작품]을 分類[분류]하면 그의 작품을 대략 '物語[물어]’와 '史話[ 사화]’ 와 '小說[소설]’의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許生傳[허생전]」과 「一說[일설] 春香傳[춘향전]」이 물어의 부에 들것이요, 「麻衣太子[ 마의태자] 」 와 「端宗哀史[단종애사]」와 「李舜臣[ 이순신] 」 등이 사화의 부에 들 것이고, 「再生[ 재생] 」 과 「群像[군상]」과 「흙」과 「有情[유정]」 등이 신 문 소설의 부에 들 자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순서로 따져 보자면 「허생전」, 「일설 춘향전」, 「 재생 」, 「마의태자」, 「군상(혁명가의 아내 삼봉이네집, 사랑의 다각형) 」, 「 이순신 」, 「흙」, 「유정」- 이렇게 된다.
그런데 이상의 아홉 편을 왜 물어와 사화와 신문소설의 삼자에 분하느냐 하면, 그 삼종이 다 각각 다른 특색을 가졌기 때문이다.
「허생전」과 「일설 춘향전」은 '물어’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종류이다. 그것은 소설로서의 조건을 갖지 못하였으니 소설이랄 수도 없는 자요, 사화가 아니니 사화의 부에 들 수도 없는 것이요, 한 개 이야기 로밖에는 분류할 수 없다.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의 3 편은 또한 사화라는 특수한 부류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소설로 되기에는 너무도 史實[사실]에 충실하여 작자의 주관이 제거 되었으며, 소설로서의 말미도 미비하고(史實的[사실적] 말미가 있을 뿐) 사담으로 보기에도 아직 '譚[담]’으로서의 전개가 없으니 사화( 外史[ 외사]) 로 볼 밖에는 없다.
「재생」과 「군상」과 「흙」과 「유정」이 신문소설로 볼 수 있는 자다.
여기 대한 상론은 그 개개의 작품에서 하려니와, 이 삼자를 모두 한데 뭉쳐서 개괄적으로 말할 바에는 이상의 것이, 모두 신문 지상에 게재 되었다하는 점이다.
대체, 신문 지상에 게재된 작품에는 여러가지의 '핸디캡’을 붙이지 않을수가 없는 것이다.
1일 1회분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가지니만치 그 1회분을 채우기 위 하여는 ' 쓸 말’을 제거하는 수도 있고, '쓸데없는 말’을 집어 넣는 수도 있으며, 그 1회 1회분이 모여서 한 개의 이야기를 구성하여야 하느니만치 거기도 특수한 고려가 필요하며, 문장도 간명 평이를 위주해야 하느니만치, 거기도 '핸디캡’을 붙여야겠고, 그 위에 더우기, 춘원의 작품에 대하여 더 특수한 '핸디캡’을 붙여야 할것은, 춘원의 신문 연재물의 9할 이상이, '춘원이 該社[해사]의 기자로 재 근 중에 제작된’ 점이다.
이 점에 특별한 핸디캡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될지니, 대체 그 신문사 사원의 자리에 있으면, 작품의 본질적 가치보다도 흥행적 가치에 더 유의를 할 의무가 있느니만치, 여기부터가 제한이 붙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많은 구속을 안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먼저 시간적으로 보아서, 총망중에 순시의 여유를 얻어서 작품의 붓을 잡았다가라도 신문 사원으로서의 용무가 생기면, 쓰던 붓을 내어던지고 그 용무를 끝내고, 다시 계속해 붓을 잡아야 하며, 이리하여 밀리고 밀려서, 편집 끝마감 시간이 다닥치면 그야말로 飛筆[비필]로라도 그날 분은 써 날려야 하느니만치, 거기는 조잡되고 설친 곳이 많게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공간적으로 또한 신문 편집 책임자로서의 어지러운 용무를 머리에 담고 있느니만치 작품의 진전에 관하여 서서히 생각할 여유가 없이 그날 그날 당하는 것을 억지로 계속시키기 때문에 성기고 '되는 대로 쥐어붙인 데’가 많 다.
「단종애사」 같은 데서 당연히 알아본 뒤에 집필하였어야 할 궁중 풍속이라든가 재상가의 예의 등에 관해서도 한 군데도 조사해 보지 않고( 상식으로 추측을 허락치 않는 이 조선 궁중 풍속을) 단지 자신의 상상으로 써 나가기 때문에 작품이 도리어 희극화한 점 등은 이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이런 점 등을 모두 그 작품 개개에서 자세히 보기로 하고 먼저 춘원의 귀국 후 최초의 '완결된 新聞上[신문상] 작품’인 「허생전」을 보기로 하자.
8. 「許生傳[ 허생전] 」
朴燕巖[ 박연 암] 의 「熱河日記[열하일기]」 중의 '玉蓮夜話[ 옥련 야화]’ 가운데 있는 허생의 이야기를 物語化[물어화]한 것이 이 「허생전」이다.
그러나 춘원의 「허생전」은 연암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단지 효종대왕 시의 墨積洞[묵적동]에 허생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 허생이 卞[변] 進士[진사]라는 부자에게 돈 만 냥을 꾸어다가 안성서 과일 무역을 하여 큰 돈을 남기고, 뒤이어 제주서 말총 무역을 하여 큰이를 남기고, 그 뒤 도둑의 무리를 인솔하고 어떤 무인도에 가서 거기를 개척하여 거기 소산을 長崎[장기]에 팔아서 삼 년간에 巨利[거리]를 본 뒤에 자기는 단신 도로 귀국(利[리] 오십만여는 바다에 던지고)하여 버렸다.
때마침 효종대왕은 북벌의 큰 뜻을 품고 인재를 고르던 중, 허생의 인물 됨을 듣고 정승 李浣[이완]을 보내서 허생을 부르려 하였는데, 허생은 이완의 인물 됨이 마음에 안 들어 표연히 어디로 가 버렸다고 하는 대략의 줄기가 연암의 것과 공통되지, 이야기의 전개는 전혀 춘원의 창작이다.
이야기의 전개뿐 아니라, 거기 담긴 사상이라든지 주장이라든지 암시 라든지는 모두 박연암의 것과는 大相不同[대상부동]이다.
「許生傳[허생전]」도 創作[창작] 그것은 철두철미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문장에 있어서든 표현에 있어서든 진전의 기술에 있어서든 한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한 마디로써 끝이 날 것이다.
표현 기술상으로 보아서 「무정」 시기보다도 이인직의 시기보다도 썩 더 뒷걸음 쳐서 「흥부 놀부전」이며 「장화 홍련전」의 의발을 繼襲[ 계습]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단지 그 고대소설과 상이되는 점은 「 허생전 」에는 춘원 자신의 인생관이 때때로 암시된다는 점뿐이다.
"글쎄 이놈아. 도둑놈이 오면 벌벌 떨던 것이, 연약한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기운이 나느냐?"
한 대목이나,
"세상 사람이란 저 생긴 것보다 낫다고 해주어야 좋아하는 것이다."
혹은
"손을 대지 말아라. 완력을 쓰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여."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허생을 시켜서 말하게 하는 바 이런 주의 등이며,
"그래 겨우 그뿐(효종 시대의 북벌의 의미가, 명나라에 대한 보은이라는 말에 대하여)이란 말이요? 종이 상전의 원수를 갚는 것이구료."
"조선 8도의 힘을 기울여서 북벌을 한다 하기로 그래도 좀 큰 뜻이나 있는가 하였더니 겨우 그것이란 말이오? 겨우 대명국 원수를 갚는 것뿐이란 말이오?"
하여 국수적 사상을 암시한 점 등이 고대소설에서 보지 못할 새로운 점이다.
그 밖에는 '여러 사람이 목침을 베고 누워서 한 사람은 읽고 다른 사람은 들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거기는 아무 진실성도 없고, 아무 박력도 없다. 이러한 한 개 허황한 이야기 일지라도 그 주인공인 허생의 성격을 하나 창조하여 근대적 묘사에 뿌리를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아갔으면, 재미있고, 문학적으로도 좀더 나은것이 되겠거늘 춘원은 이 점에 너무도 겸손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작자가 주인공의 외양에 얼마나 부주의하였는가 하는 점으로서는 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몸집이 조그맣고 식은 코를 홀작홀작 들여 마시는 사람으로 만든 것부터가 어울리지 않으니, '성큼성큼 나가 버리고’
'빙그레 웃고’
'천천히 걸어가고’
'엄숙한 어조로’ (時文社[시문사]판 「 허생전 」)
등은 작자가 설명한 바의 주인공의 외양과는 조화되지 않는 바이다.
年代[연대]의 錯誤[착오] 작자가 이야기를 씀에 얼마나 부주의하였는지는, 175頁[혈]에 '일본이 흉년이 들어서 명나라에서 곡식을 사다가’ 운운이있으니, 대체 이 이야기는 효종 때로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이룩 된지도 수십 년 후인데 명나라가 웬 명나라며 더우기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어떤 노인(구십 살이 가까운 노인) 의 이야기에, ' 자기 선친이 난리 때 일본으로 왔는데 자기는 일본서 나서 고국 구경 은하 지도 못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임진왜란은 선조대왕 이십 사오 년에 시작 되고 선조 재위 사십일 년 광해군 재위 십사 년, 인조 재위 이십칠 년즉 임진 후 효종 전까지는 육십 년 미만이요 이 이야기(허생전)는 효종 초엽이나 중엽의 이야기니, (효종 재위 연수는 십 년이다) 임진 난리에 일본으로 간 사람이 낳은 자식이면 아무리 최대한도로 볼지라도 칠십 삼사 세 이내다. 팔십 세 이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평범한 연수까지 상고하여 보지 않고 썼으니 다른 점도 얼마나 설치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작자가 이 작품을 대하기에 이만치 불충실하였으니만치 이야기의 줄기도( 한낱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너무도 부자연한 데가 많다.
허생이 말총 무역을 하러 제주도로 갔는데, 그 며칠 뒤부터는 벌써 제주는 지상 낙원으로 변하여 제주 목사는 송사 하나를 받아 보지 못하고 동헌에서 파리나 날리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쓸쓸하여 목사는 관속들을 내보내서 까닭 없는 트집으로 성 중 사람들을 노하게 하여보려고 애쓴다.
관속들이 혹은 음식을 먹고 일부러 값을 안 내고 일어서면 섬 사람들은 ' 돈이 없나 보다. 후일 셈하시오’ 할 뿐 다투려 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의 따귀라도 때리면 '그 양반 도깨비 들린가 보다’하고 피하고 말고, 귀에 담지 못할 욕이라도 하면, '타관에서 온 사람인가 보다’하고 대 척치 않고 아무런 행패를 할지라도 성중 사람은 송사하러 오는 사람이 없다-. 이 이야기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다.
이만치 감화력이 센 성인이 어찌 제 아내 하나를 御[어]치 못하였나? 물욕을 모르고 도통한 이 성현의 아내로서는 너무도 물욕 세고 속세적인 악처 였다. 허생의 놀라운 감화력으로도 제 처까지는 감화를 못 시켰던가.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누차 말한 바와 같이, 춘원에게 내재한 모순된 두 가지의 감정- 범인류애주의와 국수적 주의는 이 「허생전」에도 나타나서 ' 새 나라’ 장에서 그렇듯 인류애를 강조하던 작자가 말미에서 허생으로 하여금 강렬한 국수주의자로 만들어서 북벌책을 논케 한다.
이 「허생전」에 있어서 작자는 허생을 너무도 만능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온갖 곳에서 부자연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노련한 水夫[수부]보다도 더 항해에 밝은 허생이었다.
허생은 언제 검술을 배웠는지,
"이 놈아 "하는 우뢰 같은 소리가 나며 허생의 칼이 번쩍하며 곰보( 惡人[ 악인]) 의 손에 잡았던 칼이 마당에 나가 쟁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곰보도 땅에 엎드려 허생의 손에 모가지를 눌리고 속절 없이.(약) 또 허생은 언제 그렇게 이십세기 지리를 배웠던지 무인고도의 소재 처까지 다 알았나?
요컨대, 「허생전」은 연암의 '옥련야화’의 일절을 뼈로 삼고 그 위에, 「 아라비안 나이트」와 「로빈슨 크루소」로 살을 만들고 인도주의와 민족주의로 피를 만드는 위에 고대소설형의 옷을 입힌 재미있는- 그러나 또한 부자연한 이야기다.
만약 춘원으로서 '조선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저급 물어 를 쓰려는 목적으로 이 「허생전」을 썼다 하면 그것은 너무나 '뒷걸음질’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허생전」보다 훨씬 나은 「무정」도 그만치 독자층에게 환영을 받은 것으로 보아서 우리나라 독자는 「무정」만한 정도면 넉넉히 이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단은 아니겠다.
9. 「一說[일설] 春香傳[ 춘향전] 」
「 허생전 」을 쓴 뒤에 춘원은 다시 「일설 춘향전」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型[형]으로 보아서 「허생전」과 동곡이요, 질로 보아서 李海朝[ 이해조] 의 「춘향전」의 부연에 지나지 못한다.
이전에 〈매일신보〉에 연재되고 그 뒤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지금까지도 연년 수만 부씩 인쇄하는 「獄中花[옥중화]」는 본시 이해조가 광대( 창극 배우) 들을 불러다가 구술케 하고 그것을 필기한 것이다.
춘원은 이것을 재차 필기한 데 지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유가에서의 사서삼경이나 '예수’ 교인에게 ' 바이블’ 이나 일반으로, 춘원은 이 「옥중화」는 가감을 허락치 않는 신성한 글로 보았던지, 한 장면, 한 행동까지도 모두 원서에 구속되어 1촌 1분도 자유로 그 탈 을 벗지 못하였다. 한 개의 재담 한 마디 넋두리까지라도 가하지 못하고 감 하지도 못하였다.
왜 이다지도 「옥중화」에 구속되었는지? 여기는 춘원이 작품마다 즐겨서 집어넣는 인도주의며 민족주의며 또는 비장한 기분까지 집어넣을 줄을 잊고, 조심조심히 전자의 발자국을 따랐다.
文化的[문화적] 文學[문학] 運動[운동] 이리하여, 춘원은 양개의 물어를 동아일보 지상에 게재하였다.
조심조심히 썼다. 춘원이 상해로 망명하기 이전과 다시 귀국한 뒤의 사이는, 문학적으로 조선의 사회가 너무도 변하였으므로 여기 질겁한 춘원은 자기의 인제 밟을 길로서 '문화적 의미를 가진 문학 운동’을 개척하려고 이렇듯 「허생전」이며 「일설 춘향전」의 '레벨’까지 뒷걸음을 친 것 이었다.
그러나, 춘원 자신으로도 기대하지 않았던 성원이 독자층에서 울리었다.
"당신의 작을 기다린 지 오래다. 목마른 우리에게 그대는 그 윤택 있는 작을 보여 다고. 건조무미한 소위 문예들은 보기도 싫다."
이러한 성원성이 굉연히 독자층에서 울리기 시작하였다.
동하기 쉽고 감격키 쉬운 성격의 주인인 춘원은 여기 감읍하였다. 독자는 아직 내게 있다 하는 자부심까지 일어났다. 아직껏 쓸쓸한 마음으로 내버렸던 문학에 대한 자신까지 다시 생겼다.
여기서 일단 내어버렸던 희망을 다시 잡은 춘원은 그 새 두 편 쓴 저급 물어형을 내어던지기로 하였다. 다시 소설을 붓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붓한 것이 「재생」이다.
그의 출세작 「무정」과 비교하여, 그 기교에 있어서 천양의 차로 진보 되었으나 내용에 있어서 열과 정이 감퇴된 소설로서 「재생」이 동아일보 지상에 게재되었다.
이하 「재생」의 완숙한 기교와 비범한 내용을 들쳐 보기로 하자.
10. 「再生[ 재생] 」
「再生[ 재생] 」 발표 당시에 이 「재생」만치 독자의 환영을 받은 작품도 조선에서 드물었거니와, 발표가 끝난 뒤에 또한 이 「재생」만치 빨리 잊히어 버린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재생」이 동아일보상에 연재될 때에 얼마나 많은 학생(그 중에서도 여학생) 이 신문 배달부를 마치 정인이나 기다리듯 기다렸으며, 서로 소설의 전개를 토론하며 슬퍼하고 기뻐하였던가.
그만치 전 조선의 청년 남녀에게 공전의 환영을 받은 「재생」이 또한 어찌하여 그렇듯 일찌기 버림을 받았는가.
「무정」으로 초출발을 할 때는 춘원에게는 열과 용이 있었다.
「허생전」으로 재출발을 할 때는 겁과 '소심’과 '시험감’이 있었다.
「재생」으로 제3차 출발을 할 때는, 다시 회복한 자신 이외에 ' 어차피 신 문 소설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느낌이 섞였던 모양이다.
붓에 대하여 너무도 무책임하였던 증거로는 이 소설의 중요 인물인 백 윤희의 본댁이, 첫머리에는 다방골이라 하고 얼마 내려가다가는(이사도 안 하였는데) 관수동으로 되고 더 내려가다가는 관철동으로 된 점으로도 알 수가 있다.
典型的[전형적] 人物[인물] 이 소설에는 「무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의 전형적 인물이 등장을 한다.
순영─ 그는 미션 칼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학교의 가장 전형적 여성이다. 허영심이 꽤 많고 정조에 대하여 분명한 관념을 못 가졌고, 눈이 높고, 그러면서도 판단력과 이지가 결핍된- 가장 전형적의 여성이다.
봉구─ 그는 고지식하고 꽁하고, 여자라는 것을 신성시하는 한 개 샌님이다.
김 박사─ 그는 예수교 계통으로 미국을 다녀온 가장 보편형의 인물 로서 ' 지어서 하는 듯한 공순한 태도와 웃음’의 주인이요, 여학생들의 엉덩이를 추근추근히 따라다니는 인물이요 한 사람에게 거절을 당하면 즉각으로 제2 후보자로 돌아서느니만치 변통성 좋은- 지금 보통 말하는 바 미국 박사 라면 그 전면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타입의 인물이다.
백윤희─ 그는 조선식 '오입쟁이’라면 그 전폭이 설명되는 타입의 인물이다.
이상의 주요 인물과 그 밖에 부속 인물 몇몇이 섞여서 한 개의 비극을 연출 한다.
먼저 기미년 만세통에, 순영이는 그의 오빠와, 오빠의 친구 봉구와 함께 비밀 출판 등을 하다가 봉구와 오빠는 관헌에 붙들려서 囹圄[영어]의 몸이 되고 순영이는 다시 W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여기 백윤희라는 부자가 등장을 하여 순영의 다른 오빠를 가운데 내세워 가지고 순영이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봉구는 만세통에 순영과 함께 숨어 다니면서 지내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서 옥중에서도 순영만 생각하며 자기 딴에는 순영도 자기만을 생각하고 있 으려니 하고 스스로 위로받고 있지만 정동 처녀의 대표적 성격을 가진 순영은 지난 시절의 소꼽놀이를 그냥 기억할이만치 한가하고 수구적의 여인이 아니었다.
어느날 순영의 오빠는 제 누이를 백윤희에게 선보일 양으로 순영을 기숙사에서 불러 내어서 함께 산보가자고 얼러서 동대문 밖 백윤희의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
장안 갑부 백의 별장의 호화로움은 이 허영심 많은 계집애의 마음의 한편 구석을 단단히 두드렸다.
이리하여 순영의 마음에는 '이 세상에는 이러한 호화로운 생활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런 일이 있은 그해 겨울방학 때에 또 둘째 오빠에게 불리어서 오빠의 집에 나간 순영은 오빠를 따라서 그 밤으로 동래온천으로 갔다. 작자는 이 때에 순영의 심리를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지만(않았는지 혹은 출판상 착오인지 불명하다. 왜 그러냐하면 滙東書舘[회동서관]판 「재생」에는 상편 38, 39의 양회가 유락되어 소설의 이야기도 연결이 안 된다) 순영은 필시 자기가 동래로 가는 사건에 대하여 무슨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순영은 자기 둘째 오빠의 위인을 알며 그 위에(작자는 역시 그런 말은 않았지만) 이런 종류의 여학생으로서는 백윤희에 대하여 자존심상으로라도 자기를 다시 찾을 것을 분명히 믿고 있었을 터이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동래행에 대하여 어떤 정도까지의(공포 섞인) 희망이라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동래는 백윤희가 먼저 가 있었다. 그날 밤 순영은 백 윤희에게 정조를 빼앗겼다. 그리고, 그 이튿날 도로 학교 기숙사로 도망하여 왔다.
이리하여 다시 종교 학교의 기숙사 안에서 외양뿐은 경건한 생활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 난데 없는 밀고장이 학교 당국자에게 뛰쳐들었다. 즉, 순영은 백 윤희와 동래 온천에서 정교를 맺었다는 사건에 대한 밀고였다.
순영은 딱 잡아떼었다. 그런 일이 없노라 하였다. 본시 신용 받은 순영이라 순영의 말이 서기는 섰다.
이리하여 학교의 의심은 좀 풀어 놓았지만 순영의 마음에는 다시 파도가 일었다. 이제는 자기는 깨끗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통절히 가슴에 서리었다.
여름방학.
순영은 또 오빠의 집으로 나왔다. 나오고 보니, 세상은 기숙사보다 넓고 자유로 왔다. 오빠는 이번은 노골적으로 '백이 원산 별장에서 기다리니 그리로 가자’고 달랬다. 순영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운 살이 그립고 힘 있게 자기를 꽉 껴안던 두 팔이 그리워져서’ 오빠를 따라서 원산으로 갔다. 원 산서는 오십여 일을 백윤희와 내놓고 부처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에 술도 먹어 보았고 담배도 배웠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날 밤 열한시 차에는 해수욕장에 왔던 손님들이 많이 탔다. 순영을 아는 서양인과 조선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조금도 꺼림 없이
"용서 하셔요. 나는 몸이 곤해서." 하고 침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오십 일에 순영은 이만침 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해 가을에 감옥에 들어갔던 봉구가 나왔다. 감옥에서 몇 해 오로지 순영만 그리던 봉구는 출옥하자 곧 순영에게 편지를 하였다. 그러나 순영은 회답도 안하였다. 안하는 동안 비로소 봉구가 자기를 그렇듯 사랑 하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허영의 여인은 번민하였다. 번민이라야 인생으로서의 번민이 아니라, '백에게 갈까’ '봉구에게 갈까’하는, 양 손의 떡 格[격]의 번민이었다.
이러다가 봉구를 충동하여 봉구에게 돈 오백 원을 만들게 하고 둘이서 釋王寺[ 석왕사] 로 놀러 갔다.
"기쁘시어요!"하고 순영은 봉구의 어깨에 기댄다.
"네", 봉구는 퍽 싱겁게 대답하였다고 혼자 낯을 붉히었다.
"저도 기뻐요 미스터 신이 그렇게 저를 사랑해 주시니깐 기뻐요, 저를 오래오래 사랑해 주세요."
"오래오래?"
"네, 오래오래 아주 오래."
"-."
"그러시지요? 그런다고 그러세요! 네.(약)"
이 교사한 여인은 자기의 허물을 감쪽같이 감추고 천진한 청년과 함께 음락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순진한 청년 봉구는 이 음녀를 그대로 잔뜩 믿기 때문에 아무 의심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석왕사에서는 의외의 일이 돌발한다. 즉 순영과 백의 관계를 아는 ' 선주’라는 여인이 나서서 무심코 순영에게(봉구와 동반했을 때) 향 하여 금년 여름 원산서 애기나 배지 않았느냐는 인사를 한다.
이리하여 봉구의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불길이 일어났을 때에 순영은 어떤 태도를 취하였나? 그는 변명치 않았다. 단지 자기 좌수 무명지를 이빨로 딱 하니 깨물어서 거기서 흐르는 선혈로 '영원불변’이라 쓰고 울 뿐이었다.
이 수단의 효과는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봉구는 다시 힐난하지도 못하고 ' 내가 잘못했소이다’고 女神[여신] 전에 사죄를 하였다.
그리고 이 여행중, 순영은 봉구라는 인물에 대하여 비로소 연애를 느꼈다.
그 순진함이 마음에 푹푹 박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여행에서 돌아와서 한 달 미만에 백 부자에게 시집(첩으로)을 가 버렸다. 그런데 시집을 가기 전날 순영은 이전 석왕사 갈 때 비용 기타의 오백 원을 곱다랗게 봉구에게 반송했다. 즉, 순영에게 있어서는 그 오백 원만 도로 주면 봉구에게는 아무 의무감도 느끼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 소설의 무대는 두 곳으로 갈라진다. 서울 동대문 밖 백 부자의 별장의 美花[미화] 순영은 깊은 안방에서 봉구가 힐난하러 올까 봐 전전긍긍 히 지낸다.
그러는 동안 봉구는 제 늙은 홀어머니를 버려 두고 서울서 자취를 감춘다. 그가 金英鎭[김영진]이라는 변명으로서 몸을 나타낸 곳은 인천 김모라는 취인소 중개점이었다. 그는 거기 점원으로 들어갔다. 애인을 금전에게 빼앗긴 봉구는 자기도 부자가 되어 자기를 차 버린 애인을 돌려 볼 마음으로 그 곳에 간 것이었다.
後日[후일]의 後悔[후회] 춘원이 이런 경우에 있어서 흔히 주인공으로 하여금 비장한 기분 아래 國士的[국사적] 행동을 취케 하는 것이 상투 수법 이었는데 여기서 그 비장벽을 버리고 가장 속적인 취인 중개점으로 가게 한 것을 춘원은 후일 후회했을는지도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소설의 말미에서 봉구로 하여금 취하게 한 입장은 위에 말한 그런 도정을 밟은 뒤에야 더 적절하겠으매….
그러나 감상자 측으로 보자면 이 발전은 가장 자연스런 것이다. 봉구와 같은 성격의 사람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 길(중개점 점원)을 밟은 것이 가 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리하여 얼마 중개점에 있는 동안에 봉구는 주인의 신임을 얻고, 주인의 가정 내사까지 도맡아 보게 된다.
그 중개점 김씨 집 가정 내막을 보면, 주인 김씨는 단지 호인이라는 一語[ 일어] 로 끝날 사람이며 전처 소생 맏아들 '경훈’은 동경서 공부를 하는 학생인데 위인이 좀 부족하게 생겼고, 소박데기 맏딸(역시 전처 소생)이 있고 작은딸(지금 아내 소생) 경주도 좀 부족한 편인데 W여학교에 통학중이며, '경훈은 사랑 골방에 있는 금고를 엿보고 경주 어머니는 안방 금고를 엿보고 시흥집(맏딸)은 거기서 떨어지는 부시러기를 엿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봉구는 주인 김씨 내외의 신임을 사고 작은딸 경주의 짝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金色夜叉[금색야차]」의 貫一[관일]과 같이 오로지 금전만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위에 자기를 차 던진 순영에게의 애착을 그냥 잊을수 없는 봉구는 경주의 사랑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순영의 남편 백 부자도 월미도에 놀러 왔다가 이 김씨에게 米豆[ 미두] 를 사려고 십만 석 팔기를 주문하였는데 그 증거금 이십만 원을 받아 가라는데 그것을 받아 올 역할을 봉구가 지게 되었다. 봉구는 이 기연을 통절히 느끼면서 이십만 원을 받아 오러 월미도로 갔다.
여기서 작자의 붓은 조금 지나쳐서 월미도서 봉구로 하여금 여관 하녀가 아기 수레에 모시고 있는 아기를 걸핏 보고
"꼭 나로구나."
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 아기가 자기와 순영과의 아이라 단정을 하게 하였다. 생후 이 개월여의 어린애에게 능히 아무 예비 지식도 없이 이만한 판단을 어떻게 내릴까?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차차 복잡하여진다. 김씨의 맏아들 경훈은 좀 덜 난데다가 어떤 사상 단체에게 이용되어 자기 아버지에게서 돈 삼십만원을 훔쳐 내려고 늘 벼르던 중이다. 그리고 이 날 봉구가 월미도로 간 날이 그 약속한 최후 기한이다. 그 날까지 삼십만 원을 변통치 못하면 피살당할 줄 믿고 있다.
그 날 백 부자에게 이십만 원을 받아 가지고 돌아온 봉구는 그 돈을 주인에게 전할까 하였으나 불행히 주인을 만나지 못하여 그냥 있던 중, 밤 아홉 시경에 의외에 순영의 방문을 받았다.
순영은 봉구가 제 남편에게 왔다 간 것을 알고 이즈음 차차 봉구가 그리워오던 차에 봉구 생각이 심하여, 봉구에게 용서함을 빌러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뾰롱한 봉구는 마음으로는 통곡을 하였으나 표면 끝끝내 냉담하게 순영을 돌려보냈다.
그동안에 김씨 집에서는 좀 덜난 위인 경훈이 돈을 빼앗을 양으로 제 아버지를 권총으로 죽인다.
그 혐의는 즉시로 봉구에게 씌워진다. 봉구는 주인 피해범으로 잡히어가고 그 봉구를 옹호한 죄로서 경주도 공범으로 잡혀 간다.
여기서 이 소설은 상편이 끝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상반부와 하반부를 나누어서 말할 필요가 있다. 상반부를 쓰고 춘원은 병이 심하여 그의 폐를 하나 잘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대수술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다행히 경과가 양호하여 다시 完人[ 완인] 이 되게 되었다. 그러나 수술 때문에 소설을 오랫동안 신문 지상에서 끊쳤고, 건강이 회복된 뒤에야 다시 집필을 하였다.
技巧[기교]에 完全[완전] 춘원의 전 작품을 통하여 이 「재생」 상편만치 기교에 있어서 완전한 자가 없다. 거기는 백 부자의 집이 茶屋町[ 다옥 정] 이 되었다. 觀水洞[관수동]이 되었다 한 희극은 있지만, 그 외에는 일점의 나무랄 데가 없는 자다.
플로트를 꾸미는 데 있어서 너무도 흥미 일방으로 만든 것과 취급된 문제가 너무도 「금색야차」 식이기 때문에 통속소설의 비방은 면치 못 하겠지만, 기교에 있어서는 만점이었다.
이 소설은 하편이 씌어지기 때문에 전편을 망쳐 버렸다.
하편에서는 어떻게 되었나.
이 성격의 사람이면 이렇게 진전되어야 하겠다는 점을 하편에서는 무시 하였다.
상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봉구가 국사적 기분으로 해외로 탈출치 않고 주식중 개점 점원으로 취직한 등으로 성격을 주요시한 것이 분명하지만 상편에서는 성격을 무시하고 사건을 만들었다.
순영, 봉구, 백윤희, 경주 등 몇 사람이 등장하여 전개될 장면은 「 재생 」 하편과는 다를 것이다. 하편에 있어서는 이 소설 전체를 신파 비극적 결말을 맺게 하기 위하여 旣製[기제]의 코스에 억지로 인물들을 끌고 다녔다.
다시 말하자면 작자는 '이 인물들이면 이렇게 전개되리라’는 필연 코스 를 취하지 않고 신파 비극식의 코스를 만들어 놓은 뒤에 인물들을 억지로 그리로 몰아 놓었다.
그런지라 하편에 있어서는 등장 인물들은 제 성격에 맞지 않는 코스를 가느라고 그야말로 작자의 채찍에 몰려서 허덕허덕 쫓겨 다닌다.
이 하편의 코스는 작자가 본시 「재생」을 쓰려고 시작한 때의 기도는 결코 아니리라.
제명부터가 「재생」인 이상에는 종말에 있어서 무슨 '재생’적 사건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종말에서는 여주인공 순영은 구룡 연 물에서 비참한 최후를 보았으며, 남주인공 봉구는 마음에 없는 생활을 자포적 기분으로 '사회나 위하여 바치자’고 자기희생적 심경을 취하 였으니 거기 무슨 '재생’이 있으랴?
동아일보 지상에 게재 당시에 그렇듯 환영받고 끝난 뒤에 그렇듯 빨리 잊힌 연유도 여기 있다. 신파 비극적 사건의 매력에 끌렸던 것이요 신파 비극적 安價[안가]의 매력이기 때문에 장속성이 없는 것이다.
그 하편을 이하 보기로 하자.
살인범으로 잡혀간 봉구는 어떠한 심문에도 입을 봉하고 대답치 않는다. 그야말로 자기의 이름이 봉구인 것과 같이 封口[봉구]이다. 봉구의 성격으로는 함직한 일이다. 영웅감으로라도 그랬을 것이며 염세적 자포 기분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침묵은 법정상의 봉구의 입장을 매우 나쁘게 한다.
그런데 순영은 이 때문에 매우 마음을 썼다. 여기는 작자의 말 일절이 가장 이때의 순영의 심정을 잘 설명할 것이다. 가로되, ' 순영으로 하여금 이렇게 마음의 아픔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백( 남편)에게 대한 불만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것은 어린애를 낳 음으로하여서 생긴 정신의 변동이다.’ 이때에 순영을 위로하여 주기 위하여 인순이라는 여성이 등장을 한다. 순영의 동창 선배요 기숙사 시대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이런 타입의 여성은 춘원이 즐겨서 작품상에 등장을 시키나니 「무정」에 있어서 ' 김병욱’ 이와 한 타입의 여성으로서 이지, 의지, 주장, 도덕관, 연애관 등이 비상히 밝고 활발성과 친절성이 풍부하며 그 위에 또한 교만치는 않으면 피고가 유리하게 됐읍니다. 참 어쩌면 그렇듯 기지가 많으시오!"하는 것 이다.
이리하여 재판소 사건은 유야무야중에 없어져 버린다. 남편도 그다지 의심을 안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박한 여인은,
"내가 왜"하고 순영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책망하였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그 남편을 사랑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내 '의무’가 아닐까? 어린애(봉구와의 새에 낳은 그러나 표면은 백씨의 아이)는? 누가 알길래? 나 밖에 누가 알길래. 그렇다. 자기는 이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도리어 남편이 자기를 의심할 것을 근심한다. 수일 후 검사국에 불리운 그는 이전 공판정에서의 공술을 전면으로 부인 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봉구의 사건은 유리하게 전개될 듯하다가 다시 떨어져 버린다.
그러나 봉구는 그런 것을 모른다.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또한 지극히 미워하던 순영이가 공판정에서 그렇듯 자기를 변명하여 준 일에 대하여 감읍 할 뿐이다.
판결은 내렸다. 봉구는 사형.
여기서 작자의 붓은 외도로 벋었다.
이 사형 판결에 대하여 봉구는 맹렬히 생의 집착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일찌기 순영을 굽어보기 위하여 취인 중개점으로 달아났던만치 凡人[ 범인] 인 봉구는 여기서 사랑하던 순영의 悔心[회심]까지 보았는지라 무엇보다도 생을 가장 바랐어야 할 것이다. 하루바삐 세상에 나가서 다시 순영을 품에 안고 즐겁게 살 날을 생각하며 '살려 살려’ 애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춘원의 비장벽은 이 남주인공으로 하여금 비장한 코스를 밟게 하기 위하여 성격을 무시하고 외도를 밟게 하였다. 여기서 봉구는 한 희극적 영웅으로 변한다.
'죽음은 무엇이냐?’
이러한 비장한 영웅감으로 봉구는 공소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사형의 날을 기다렸다.
'윤 변호사에게는 봉구의 이러한 심리는 알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였다. 사람이란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좋은 것 운운.’ 하였지만 이 심리는 윤 변호사뿐 아니고 온 독자도 이해치 못할 자다. 작자자 신도 이해치 못할 것이다. 단지 작자의 기정 코스에 봉구를 억지로 끌어 온 것뿐이었다.
이리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뒤의 봉구의 성격은 지리멸렬이었다. 그는 대체 지사적 비장한 기분으로 사형을 달갑게 받으려 하는지? 혹은 죽음에 대하여 극도로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람인지 독자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混亂[혼란]된 서술 감옥 안에서 윤 변호사의 면회를 받고 도로 감방으로 돌아온 뒤의 수십 면은 독자로서는 도저히 갈피를 차릴 수 없는 혼란된 서술이다. 작자의 붓이 지향 없이 난무할 뿐이지 합리적의 심리 진전은 얻어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난무하던 붓을 작자는 장차 어떻게 맺으려 하나.
판결 받은 지 닷새째 되는 날 즉, 이 날 안으로 공소를 하지 않으면 일심 판결이 확정되는 날 봉구는 갑자기 생에 대한 집착을 느꼈다. 그러나 작자는 여기서, 윤 변호사에 대하여 그렇게 큰 소리(공소할 필요가 없다는 말)를 하여놓고 또 검사와 판사에게 그렇게 큰 소리를 하여놓고 이제 다시 공소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염치 없는 일같이 생각되었다. 운운.
이렇게 서술하였다. '생’에 대한 욕망에도 능히 염치 문제가 낄 틈 사리가 있을까.
"공소를 하자."
이렇게 봉구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차마 典獄[전옥]에게 얘기할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여지없이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 되었다. 이 때문에 봉구는 더욱 괴로왔다. 그는 주먹으로 벽을 때려보았다. 발로 방바닥을 굴러 보았다. 그러나 튼튼한 벽과 방바닥은 다만 텅텅 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마침내 봉구는 정신 빠진 사람 모양으로 키보다는 높은 창에 붙어서 멀거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애타하고 초조해 하는 봉구의 가슴의 한편에 이 생사 문제보다도 더욱 긴하게 염치 문제가 개재할 여유가 있을까. 단지 독자의 마음을 충 동키 위하여는 주인공 성격을 무시하고 붓이 외도로 벋어나간 것이다.
이리하여 봉구의 생사가 어떻게 될지 미지수로 남겨 둔 채 작자는 슬쩍 딴 소리를 꺼내었다. 일찌기 「무정」에 있어서 영채로 하여금 대동강에 빠져 죽으러 길을 떠나게 한 뒤에 붓을 딴 길로 옮겨서 독자로 하여금 속을 타게한 奇謀[기모]를 작자는 또 여기서 사용했다.
白[백] 富者[부자]의 別莊[별장] 무대는 동대문 밖 백 부자의 별장.
순영은 어떤 날 본마누라 문병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매 남편은 웬 머리땋아 늘인 여자와 백주에 同衾[동금]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당연히 부처 싸움이 일어난다. 그런 뒤에는 자기 집을 뛰 쳐 나와서, 이젠 자기가 재학하던 학교에 피 부인을 찾아 간다.(여기도 또한 상편에서는 W학교더니 여기서는 V학교로 되었다) 무얼 하러 피 부인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작자도 설명치 않았다. 이 때의 순영은 반 광란의 인물이라 작자도 광인의 행동에는 설명을 못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피 부인은 처음에는 순영을 냉담하게 대하다가 마지막에는 순영을 동정하여 순영을 입맞춘다. 그때 순영은
피 부인의 입맞추고 등을 만짐은 순영의 영혼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마치 전기와 같이 순영의 영혼을 찌르르 하게 흔들어 들추어서 새로운 영혼을 이루는 듯하였다. 순영의 눈물흐르는 눈앞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 하였던 광명의 세계가 번뜻 보였다. 아침 햇빛이 넘치는 새로운 세계에 끝없는 푸른 벌판이 열린 듯하였다.(약) 순영은 자기가 하려고 가지고 왔던 말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오직한 마디 할 말이 있다 하면 그것은
'선생님 말씀은 과연 옳으십니다. 저도 오늘부터는 선생님 말씀대로 새 생활을 시작하겠읍니다. 제 맘이 흐리고 어두워서 보지 못하였던 것을 선생님께서 분명히 보여 주시었읍니다’할 것뿐이다.
운운하여 일견, 순영은 진심으로 회오를 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과거에 있어서 누차 순영이의 임시적 회오를 보고 희망을 붙였다가 낙망하고 한 독자는 역시 이를 신용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신용할 수 없었다.
춘원의 작품에 흔히 나와서 도리어 장면을 그르치는 것이 이 극적의 경건한 씬을 만들기 위하여 작자는 작중 인물의 성격으로서의 필연적 발전을 고려 치 않고 이런 장면을 끼우기를 즐겨한다.
그러는 일방 감옥에 있는 봉구는 사형의 선고를 받은 몸이라 당연히 죽을것이지만 하늘이 그의 무죄를 돌보아 주었던지 우연히 진범인 경훈이가 사상 관계 사건으로 잡혔기 때문에 봉구의 冤罪[원죄]가 드러나서 봉구는 다시 광명한 일월을 보게 되었다.
비장한 장면을 부러 만들기 위하여 봉구의 성격을 무시하고 '묵묵히 사형을 기다리는 봉구’를 만들었던 작자는 이 소설의 기정 코스 (봉구의 무죄 출옥)을 밟게 하기 위하여는 좀 어색한 필법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사 정에 경훈과의 대면장이며 봉구의 출옥 장면은 슬슬 넘겨 버려서 실감을 주지를 않았다.
봉구와 함께 출옥한 경주(인천 김 의관의 작은딸)는 도로 인천으로 내려간다. 그 경주를 정거장까지 전송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봉구는 돌아오는 길에서 의외에도 순영이를 보았다.
순영도 비극의 코스를 밟는다.
그는 피 부인을 만난 날부터 남편의 집에서 나왔다.
나오기는 나왔다. 그러나 순영과 같은 성격의 사람으로서는 다시 들어갈 길을 예정하지 않고는 나오지를 않을 것이다. 법정에서 봉구를 변호하고 돌아와서도 그냥 남편의 품을 그린 이 여자이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이 소설에 비극적 결말을 짓기 위해서 순영으로 하여금 감연히 남편의 집에서 뛰쳐나오게 하였다. 뿐더러 순영은 그냥 남편의 집으로 안 갔으며 남편이 누차 사람을 보내서 도로 오라 할 때도 순영은 귀도 안 기울이고 남편이 직접 와서 달랠 때도 여전히 잡아떼었다.
이것은 백씨의 성격으로도 하지 않을 일이요, 순영이의 성격으로도 못 할 노릇이다. 단지 작자의 비장벽이 순영을 그런 코스로 인도한 따름이다.
이 순영의 수난적 비극을 더욱 비장하게 만들기 위하여 작자는 더욱 곡필을 하였으니 즉 인순이가 순영이에게 대한 태도이다.
인순이는 아주 온순하고 애정의 權化[권화]로서 일찌기는 순영이가 백의 첩 노릇을 할 때도 함께 월미도까지 가서 벗을 하여주던- 순영이에게는 지기 지우였다. 순영이가 남편의 집을 뛰쳐나와서 쓸쓸한 생활을 할 동안 순영은 인순이라도 좀 만나 보고 싶어서 인순이에게 편지를 하였다.
그랬는데 인순에게서는 회답도 오지 않고
(상략) 어느 날 저녁 신문에 인순이 사진이 나고 인순은 미국에 유학 가는 길로 그날 밤차로 일본을 향하여 떠난다는 말이 났다. 그 기사를 볼 때에 순영은 실망과 분노와 시기가 한데 섞인 무서운 불쾌감을 깨달았다.
그 이튿날 저녁 엽서 한 장이 왔다-.
'편지는 받았으나 길 떠날 준비에 분주하여 가지 못하였으며, 옛 일을 다 회개하고 새생활을 시작하려 하신다니 기껍사오며 아무쪼록 주의 뜻을 잊지말고 나아가시기를 바라나이다. 총총 이만.’ 이렇게 냉정한 편지다.(약)
작자가 상편에서 보여 준 인순이의 성격은 결코 불우에 있는 친구를 냉대 할 사람이 아니다. 단지 작자가 고의로 순영의 환경을 더욱 비참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막을 꾸며 넣은 것이겠으나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고의로 인순을 얄밉게 보는 결과를 짓게 한 것으로서 작중 인물에게 대하여 범한 작자의 죄과라 아니할 수 없다.
美國[미국] 博士[박사] 金氏[김씨] 登場[등장] 이 고적한 순영에게 또 미국 박사 김씨가 추근추근 찾아 다닌다.
함께 미국이고 어디고 얼려 가자 한다. 김 박사는 그 새 많은 여자의 엉덩이를 쫓아 다니다가 다 실패를 하고 다시 순영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순 영 이의 뱃속에 지금 생장하는 백씨의 씨를 떼어 버리자, 그리고 멀리 말썽 없는 고장으로 가자, 연하여 꾀는 것이었다.
이 유혹에 솔깃하면서도 주저하고 주저하면서도 거절하는 기괴한 심리를 탄복 할 수밖에 없다. 아직껏 순영의 성격을 잃어 버리고 비극적으로만 끌어가려고 갈팡질팡하던 붓은 여기서 수십 頁間[혈간]을 다시 제 길로 들어서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동안의 한 에피소드로서 작자는 조선 사회의 일면을 독자의 앞에 공개 한다. 즉, 이 불운한 여성을 좀 어떻게 건드려 볼 양으로 신문기자며, 문 사라는 일당이 연하여 찾아와서 서로 "기미 도오까? 얍바리 와가, 슝에이상와 비진다로? (자네 어떤가? 역시 우리 순영 씨 이쁘지?)"
"오이, 꼬라. 와가 슝에이또와 게시카란소. (에이, 이사람아. 우리 순영씨라고 해서는 안 되지) "등등 야료를 하다가 순영에게 욕을 얻어 먹은 뒤에는 그 분풀이로 순영의 사건을 아주 고약하게 신문에 낸다.
이런 등등 아주 수난의 생활을 하던 순영은 어떤 날 결심을 하고 봉구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봉구는 순영을 잊지 못하여 앙앙 불락하 고 있었다. 이 꽁한 샌님은 순영을 미워하고 싶으나 미워하지도 못하고 가슴만 태우며 있다. 그런데 인천 김경주에게서 지금 급한 일이 있으니 내려와 달라는 통지를 받고 바야흐로 길을 나서려 할 때 순영이 봉구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미워하려 하나 미워할 수도 없던 순영의 방문을 받은 봉구는 필시 마음은 환희로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 냉연히 맞았다. 순영은 봉구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하였다. 그러나 봉구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하다.
이 냉담(表面上[표면상]의)은 어떤 정도까지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후일 경주의 그렇듯 끓는 애모를 차 버리고 일생을 자발적 독신 생활을 하니만치 순영을 연연불망하는 봉구로서 끝까지 이렇듯 냉담한 표면을 가식 할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단지 작자가 이 작의 기정 결말로 봉구를 끌어가기 위하여 봉구의 행동을 강제하였다.
장면은 일전하면서 인천.
경주의 어머니 임종이다. 경주의 아버지는 비명횡사를 하고 그의 장자인 동시에 상속인인 경훈이는 尊親族[존친족] 故殺犯[고살범]으로 옥중에 있는지라, 그의 유산에는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제각기 먹어 보겠다고 달려든다. 더구나 경주의 어머니조차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중태라 가정 소란이 대단하였다.
여기서 경주의 어머니는 첫째로는 딸 경주의 장래를 부탁하고자, 둘째로는 재산 정리를 부탁하고자 고인 적부터 신임해 오던 봉구를 부른 것이다. 경주 모의 임종석에서 넘어가는 마지막 목숨을 억지로 멈추고 자기 딸과 봉구의 손을 마주 잡혀 놓고 '내 딸을 거두어 주게’하는 부탁을 내리고 드디어 세상을 떠난다. 이러한 정성에도 감동치 못하는 봉구. 봉구는 그래도 경주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의 생각하는 것은 순영뿐이다. 순영 이외의 여인은 여인으로 볼 줄을 모르는 봉구이다.
이리하여 이 소설은 여기서 일단락을 맺고 그리고는 껑충 뛰어서 삼 년이라 하는 세월이 흘러간 뒤의 사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 소설의 전체를 망쳐 버린 모순된 비극을 향하여 급템포로 내려간다.
삼 년 뒤.
순영은 영등포 방직공장의 여공으로 그 새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 왔다. 그때는 이전 백씨와 헤어질 때에 그의 배에 들었던 백씨의 씨가( 계집애다) 생 겼다.
백씨에게서 전염된 성병 때문에 계집애는 소경이 되었다.
이 순영이는 지금 그의 생애의 청산을 하려는 길에 마지막으로 봉구를 한번 더 만나 보고 싶어서 봉구를 찾아간다.
그때는 봉구는 비통한 가슴을 부둥켜안고 금곡서 농사를 짓고 야학 선생 노릇을 하며 뜻 없는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때의 봉구의 심경을 작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야학을 가르치고 눈 위에 비친 달을 밟으면서 늦게야 집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눈 위에 끌려 오는 혹은 앞서 가는 자기의 외로운 그림자를 보고 울 지아니 하였던가. ― 울 때마다 그의 눈물 속에는 순영이를 생각하는 깊은 슬픔이 녹아들지 않았던가. 경주가 인천에 있는 자기 집도 버리고 봉구를 따라와 진일 궂은 일을 다 하여 가며 오직 봉구의 곁에만 있기를 원할 때에 봉구는 경주의 그 참되고도 측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가슴에 깊이 박힌 순영의 생각을 떼어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던가?(중략) '나는 이로부터 혼자다. 하늘 아래 땅 위에 나는 혼자다. 영원히 혼자다.’
'인제부터 조선의 강산이 내 사랑이다. 내 임이다. 불쌍한 백성이 내 사랑이다. 내 임이다. 죽고 남은 이 목숨을 나는 그들에게 바치련다. 그들 과같이 울고 같이 웃고 그들과 같이 고생하고 같이 굶고 같이 헐벗자! 그들의 동무가 되고 심부름꾼이 되자, 종이 되자!
모든 빛나는 것이여! 모든 호화로운 것이여. 모든 아름다운 것이여! 다 가라. 조선의 백성들이 다 안락을 누릴 때까지 내 몸에 안락이 없으리라, 다한 가히 놀 수 있을 때까지 내게 한가함이 없으리라.’ '만일 순영과 같이 한다면?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꿈일러라. 다시 오지 못 할 꿈일러라.’
'가자! 우리 임에게로 가자! 불쌍한 조선 백성에게로 가자! 거기서 그들과 같이 땀을 흘리고 그들과 같이 죽어 그들과 같은 공동묘지에 묻히자.’ 이 센티멘탈한 문장으로 엮어 내린 봉구의 비장한 결심은 어떤 전제가 있기 전에는 존재치 못할 것이다. 봉구의 성격으로는 이만한 자기 학대 벽은 가졌을 사람이지만 이런 결심을 내리기에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순영은 봉구에게 안 온다는 條件[조건] 즉 순영이 영구히 봉구에게 올 가망이 전무하다 하는 조건이다.
이 땅에 바치자 한 봉구의 결심은 작자도 말한 바와 같이 '순영이 이미 없으니 이 땅에나 바치자’는 자포적 심경에서 나온 자다. 이러한 심경으로서 자기를 학대를 하는 사람에게 순정이 다시 찾아온다 하면 그 결과가 어떠할까?
그는 몇 번 더 냉담을 가식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자의 눈물을 보면 그는 이 앞에 감읍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주도 봉구의 집에 와서 산다. 그렇다고 夫妻[부처]가 된 바가 아니다.
경주는 봉구가 너무도 그리워서 '그저 곁에 두어 두시오’하고 와서 함께한 집에 살 따름이다. 이리하여 이 금곡 농촌에는 殉情的[순정적] 자기 희생자 한 사람과 자포적 자기 희생자 한 사람이 세상에 기묘한 생활을 하고있다.
여기 순영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무위히 있다가 元山[ 원산]으로 가노라는 한 마디를 남겨 놓고 다녀간 지 엿새 만에 금강산 온 정리에서 부친 순영의 편지는 왔다. 그 편지에는 자기는 자살하러 이곳에 왔으며 이 편지가 '사랑하는 봉구 씨’에게 이를 때쯤은 자기는 벌써 죽었으리라는 말이 적히어 있다.
봉구는 곧 행장을 수습하고 금강산을 향하여 떠난다.
外金剛[외금강] 九龍淵[구룡연]의 씬 외금강.
구룡연 가는 길.
소경 딸을 이끈 초라한 여인이 단풍의 금강산을 구룡연을 향하여 길을 더듬고 있다. 비극적 奇遇[기우]가 생긴다. 즉 순영의 모교 생도들이 수학여행을 온 것이다. 이리하여 상거 만 리나 되는 양자의 대조가 독자의 눈앞에 展列[ 전열] 된다.
그 뒤에는 이 모녀는 폭포 속으로 잠겨 버린다. 봉구가 허덕허덕 달려왔다.
시체를 얻은 봉구.
'아아. 순영이! 안 죽어도 좋을 것을’자기 학대벽을 다분히 가진 이 기 청년은 일이 저질러진 뒤에 후회를 한다.
얼마나 사랑하던 사람인고. 어떻게나 사랑하던 사람인고. 그런데 그 사람은 소리 없이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한 마디만 말을 하였으면 한 이 없을 것 같았다. 봉구 자기가 지금까지 변함없이 순영을 사랑하여 왔다는것과 순영의 지나간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겠다는 말만 들려 준 뒤에 순영이가 죽었더라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금곡 왔을 때에 봉구가 한 마디만 부드러운 말을 하여주었더라도 순영이 가죽지는 아니하였을 것을―순영을 사랑하노라고 한 마디만 하여주었던들 순영은 자기의 품 속에서 남은 세상을 살아 갈 수도 있었을걸―세상에서 다시지 접 할 곳이 없어 자기를 찾아온 순영을 자기마저 냉대하여 죽음의 나라로 보낸 것을 생각할 때에 봉구의 가슴은 칼로 에는 듯이 아팠다.
그러나, 봉구와 같이 자기 학대벽이 강한 인물에게는 순영의 주검 앞에서 자기의 지난 실수를 스스로 책하는 편이 통쾌하지 않을까. 순영과 일생을 같이 하여 調信之夢[조신지몽]을 歎[탄]을 하느니보다는 이 편이 행복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래서 희극 한 개가 더 연출되고 이 상하 편의 「재생」은 막을 닫친다.
순영의 오빠 순홍이 갑자기 뛰쳐나온다. 수년 전에 어디다가 폭발탄을 던지고 잠적하였던 순홍이가, 봉구가 홀로 밤에 순영의 시체 앞에 밤경을 할 때에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누이의 시체를 한 번 보고는 다시 표연히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튿날 神溪寺[신계사] 동구 밖에 새 무덤이 생기고.
'나의 사랑하는 아내 순영의 무덤. 무정한 봉구는 울고 세우노라.’ 하는 비석이 섰다는 것으로 「재생」은 아무 '재생’도 없이 종막을 고한 다.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이 결말은 작자의 본시의 기도는 아니리라.
'순영을 밉게 보기 때문에 봉구는 세상을 버리고 농촌에 숨었다,’
그때에 세상살이에 시달리고 시달린 순영이(어떤 곡절로든) 봉구를 찾아온다. 봉구는 아직껏 그렇게 밉게 보던 순영을 만났다. 순영의 눈물을 보았다. 봉구가 진심으로 순영을 미워하던 것이 아니었다. 순영의 눈물을 볼 때에 봉구의 마음은 다 녹아 버렸다.
'그리고 회개한 여인과 용서한 남자의 두 사람은 새로운 활기로써 그들 이 재생의 길에 나선다.’
이런 기도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 하면 「재생」이라는 제목은 무의미하다.
이 作[작]의 死因[사인] 요컨대「재생」은 그 단원에 있어서 이것을 비극적 비장미를 내게 하기 위하여 작중 인물들을 억지로 딴 길로 끌어들인 데이 작의 사인이 있다.
이「재생」전체를 읽은 뒤에 독자의 머리에 그냥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 다. 비극이었다 하는 개념 이외에는 남는 자가 없다.
무엇이 이런 비극을 지었느냐?
작자도 대답 못할 것이고, 독자도 대답 못할 것이다. 여기 대답 하려면 「 재생 」 의 내용을 전부 다시 되풀이하여야 하지, 합리적 원인을 들 수가 없다.
왜?
이 소설 자체가 합리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으니까.
이 소설의 내용이 흥미 일방인지라, 독자는 그 압력에 끌리어서 단숨에 말미까지는 읽을 것이다.
그러나 독파한 뒤에 深思[심사]할 근터리를 주지 못한 이 소설은 따라서 ' 읽기를 강제하고 생각키를 금한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
흥미에 끌리어서 一氣[일기] 독파한 뒤에 맹랑한 느낌을 받는 연유가 여기있다. 이 소설은 소설 속의 몇 개의 인물의 行狀記[행장기]지 그것이 합쳐서 한개 인생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11. 「麻衣太子[ 마의태자] 」
「麻衣太子[ 마의태자] 」 도 東亞日報[동아일보]에 「마의태자」도 춘원의 대부분의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동아일보 지상에 연재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의태자」에 대하여서는 그다지 쓸 말이 없다.
첫째로 이 「마의태자」는 작자의 본래의 플랜에 의지하여 쓴 자가 아닌 모양이다. 이 소설이 근 칠백 頁[혈]이나 되는 거책인데도 불구하고 마의태자에 관한 부분은 겨우 그 말미에 數頁[수혈]에 지나지 못하고 사백여 頁[ 혈] 이나 되는 대부분을 弓裔[궁예]의 이야기로 종사하였다. 아마 작자는 본시 먼저 궁예로 시작하여 신라 말년의 어지러운 정계를 성큼성큼 소개하고 마의태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본편에 착수하려던 것이 서편이 본격적으로 되고 너무 길어지므로 본편인 部[부]를 간략히 꾸민 모양이다.
역사로 고찰하자면 金傅[김부] 왕의 세자 되는 마의태자라는 사람은 ' 단지 역사를 배경삼아 가지고 태자의 인물과 성격과 행사 등은 순전히 작자가 창작을 하여서뿐 한 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지 史上[ 사상] 의 마의태자는 이야기의 주인이 될 거리가 없다.
시정의 한 호한이던 김부라는 사람에게 갑자기 왕위가 구을러왔다. 그 덕에 부의 아들이 태자가 되었다. 그 뒤 신라가 망하매 왕 되는 부는 고려의 臣子[ 신자] 가 되어 고려로 갔는데 태자는 그것을 깨끗다 아니하고 皆骨山[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여생을 마의를 입고 초근을 먹으며 보냈다 하는 것 뿐이다. 그런지라 난국의 신라 말년을 배경으로 이 마의태자를 주인공 삼아한 개 이야기를 꾸미자 하면 절호의 것이 꾸미어질 것이다.
춘원도 처음에는 그것을 뜻하였으리라. 더구나 마의를 입고 석굴에서 여생을 보냈다 하는 태자의 비장한 마지막은 춘원의 즐겨하는 바로서, 이 한 가지의 효과를 겨누고라도 넉넉히 춘원이 취재할 만한 자이다.
그러나 그 시초를 궁예에서 한 춘원은 궁예전을 창작해 내는 흥미에 쏠려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이 반도에 대제국을 건설하려던 궁예의 雄志[ 웅지] 도 춘원의 비위에 맞는 자로서 춘원은 이 흥미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까지도 잊어버리고 붓을 그리로만 돌렸다. 그러면서도 거북하기는 한지 내려가다가 한두 번 억지로 장래의 마의태자를 등장시키고 그 註[주]로서 '이 분이 장차 마의태자가 되실 분이다’고 암시는 잊지 않고 하였다.
그런지라 이 이야기의 제목이 「마의태자」라 된 것은 잘못 된 일이다.
또한 이「마의태자」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로서의 일관한 이야기의 줄기가 없고 계통이 없다.
이 이야기에는 소설적 의미의 주인공도 불분명하다. 사백여 頁[혈]이 되는 전편으로 끝이 났다 하면 당연히 궁예를 주인공이라 하겠으나 그 뒤로 근 삼백 頁[혈]이 첨가되었으며 더구나 궁예가 죽은 뒤 근 이십 년 후의 일에까지 미쳤으며 제목까지가「마의태자」로 되었으니 궁예를 주인공이라 할수도 없고 만약 궁예와 마의태자의 새에 무슨 유기적 연락이라도 있었으면 또한 그렇게라도 볼 수가 있겠지만 그야말로 궁예와 마의태자는 소설적으로 아무 연락도 볼 수가 없으니 말하자면 두 개의 이야기를 맞이은데 지나지못 한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것으로뿐 아니라 소설로서의 요소는 거지반 무시당하였으니 이것은 소설로는 볼 수가 없는 바다.
무론 단순한 야사도 아니다. 이 이야기의 안에 나오는 사건은 대부분이 춘원의 제작으로서 정사와 야사에서 얻어 볼 수 없는 바다.
이 이야기의 초두는 소설적 필법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차차 내려가면서 사건이 복잡다단하여 감을 따라서 어느덧 어름어름 변하여 버렸다.
喜劇的[희극적] 唱劇調[창극조] 더우기 전에 「일설 춘향전」을 쓰기 위 하여 李海朝[이해조] 편의 창극 춘향전 「옥중화」를 읽고 그 인상이 아직 꽤 많이 머리에 남아 있는 춘원은 이「마의태자」가운데도 희극식 창극조를 많이 집어 넣었으니 에컨대 궁예가 아슬라성에서 나날이 명망이 높아 갈 때에 그의 선배 되는 양길이 이것을 시기하여 원회를 보내어 궁예를 모살하려 할 때, 양길의 딸 난영(그는 궁예의 애인이다)은 제 애인을 구하고자 아슬라성으로 달려온다. 자객인 원화는 가장 친우인 체하고 궁예를 찾아와서 궁예와 대작을 하면서 바야흐로 칼을 몰래 뽑으려 하는 이 위급하고 아슬아슬할 찰나에 남복한 난영이 달려오는 것이다.
난영은 궁예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나가며 넌짓 팔을 들어 노래 가락으로
'석남사 깊은 밤에 눈 헤쳐 찾던 사람아 슬라 머나먼 길어이하여 오다던고 독한 칼 품은 옛 벗을 삼가소서 함이라.’
하고 머리에 쓴 오각선을 벗어 버렸다. 그것은 난영이었다.
이런 창극식 장면이 수없이 나온다.
무론, 신라시대에는 가무를 좋아하였다는 말은 전하되 그것도 정도 문제이다.
또한 그 풍속과 제도에 있어서도 좀더 고전 색채가 나도록 제작을 하였어야 될 것이다. 너무도 현대식이기 때문에 가다가 소좌가 나오고 중위 하사 졸이 나올지라도 돌연감을 느끼지 않을 만치 되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근 백 개나 나오는 것도 독자를 번거롭게 하고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한다. 모두가 계통 있는 한 개 줄기를 뽑아 내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개의 講談[강담] 말하자면 순전한 한 개의 강담이다. 高座[고좌]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며 이야기로서 들려 줄 종류의 것이다.
이만한 내용을 일껏 꾸며 가지고 왜 한낱 강담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기우의 장면을 즐겨하는 춘원은 「 마의태자 」 가운데도 여러 군데 기우를 집어 넣었는데 궁예왕이 산중에서 죽을 때에 하숙 하였던 주인 집 노옹이 뜻안한 30년 전의 궁예의 스승이던 白夜國仙[ 백야 국선] 인 등, 마의태자를 사모하다가 뜻밖에 마의태자의 아버지의 아내가 된 낙랑공주가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불공하러 입산하였다가 또한 뜻안한 마의태자와 비장한 회견과 이별을 하는 등, 그 밖에도 기우가 꽤 여러 군데 있 다. 여기는 춘원의 斥唐主義[척당주의]가 좀더 심각히 들었어야 할 터인데 그것조차 없었다.
「마의태자」는 한 개 재미있는 강담― 이 이상 더 말할 바가 없다.
12. 「無情[무정]」에서 「麻衣太子[ 마의태자] 」까지
「 무정 」에서 「마의태자」까지 춘원이 걸어온 발자취― 그것은 연락과 계통이 없다 할 수 있다.
뇌동성이 너무도 풍부하기 때문에 매 작품마다 작풍이 다르고, 만약 자세히 조사를 한달 것 같으면 그 작품이 다른 每個[매개] 작품, 아직 그 작품을 내어놓기 전에 춘원이 읽은 책자와 공통점이 많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정」과 「개척자」가 그 작풍이 전혀 다르고, 「일설 춘향전」과 「 허생전 」 은 비슷한 곳이 많으되 그 양자와 「재생」은 다른 사람의 작품인 듯이 풍이 다르고, 「마의태자」에는「일설 춘향전」의 流[류]를 품은 흔적이 많이 있지만 또한 근본적으로는 상위점이 많다.
수개의 단편에 있어서도 작품의 개개가 모두 다르다.
이것은 모두 뇌동성과 피감화력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시시로 변하는 춘원 이기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 춘원의 생활은 사회적으로와 가정적으로 든든히 자리잡혔다.
일찌기 한 재주 있는 고아로서 표랑하던 시대와 달라 가정과 가족이 생기고 지위가 굳어 가고 생활의 근거가 서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춘원을 遇[우]하기 厚[후]하였다. 상해에서 춘원을 데려 내 온 뒤부터 꾸준히 그의 뒤를 보아 주었으며 춘원이 병상에 넘어져서 사무를 못 볼 때에 춘원의 의자는 비워 두어서 후일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고 하였다. 그런지라 만약 춘원의 편에서만 동아일보를 배척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든 동아일보는 춘원을 즐겨 맞았다.
이렇듯 서로 굳게 맺어진 동아일보가 점점 장성하였다. 다른 온갖 신문의 위에 군림하듯이 되게까지 되었다. 이 동아일보의 대성이라 하는 것이 춘원의 사회적 대성과 떼지 못할 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춘원은 동아일보 지상에 소설을 쓸 의무를 社[사]에서 지게 되었다.
사와 춘원의 새는 물론 소설을 쓰는 것이 '춘원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 나 한 개 문학자로서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한개 커다란 권리라 볼 수가 있다.
대체 조선과 같이 출판계가 빈약한 곳에서는 자기의 작품을 활자 화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무한히 활자화할 의무를 지게 된 춘원은 바꾸어 말 하자면 무제한으로 창작을 발표할 기관을 얻은 것이나 일반일 것이다.
여기서 춘원은 쓰고 또 썼다. 연달아 동아일보 지상에는 춘원의 작품이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세력 있는 신문 지상에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가장 널리 알리어졌다.
이러한 절호의 환경에 있어서 춘원이 좀더 힘들이어 쓰기만 하였으면 그는 조선 신문학의 개척자로뿐 아니라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가치로까지 末代[ 말대]까지 빛이 났을 것이어늘 그는 이 좋은 기관을 너무도 허술히 사용 하였다.
거기는 무론 여러가지의 까닭도 있으리라.
가장 큰 원인은 동아일보의 죄일 것이다.
동아일보는 문예를 모른다. 이순신 사당을 중수할 기금을 얻기 위하여 그 인기를 높이고자 춘원에게 이순신전을 쓰기로 명하며,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에 인기를 얻기 위하여 만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 제조를 명하여(이 일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지는 되었지만)― 이렇듯 소설이라는 것을 단지 한낱 기회적 이용물로 여기고 또는 일본의 大每[대매], 大朝[대조] 등 대 신문에 학예 면이라는 것이 없다 하여 일시 학예면까지 폐지하였던 동아일보 니만치 동아일보는 문예에 無理解[무이해]이다.
이 동아일보의 사원으로 앉아서 동아일보 지상에 소설을 쓰는 춘원이매 거기 얼마간 구속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低頭平身[저두평신]하였다.
본시 호인인 춘원은 자기 주장을 강조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의 안정을 따라서 차차 침착은 생겼다. 이 침착 하에서 집필한 「端宗哀史[ 단종애사] 」「群像[ 군상] 」 이하의 오늘날까지의 작품을 이하 보기로 하자.
이상의 것도 주로 춘원의 작품 비평에 치우쳤다. 그 작품의 사회성이며 사회 영향에 관해서는 의식적으로 피하여 왔다.
이하도 무론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작품 비평 이외에 관한 부분은 죄 몰아서 마지막에 한 묶음으로 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하 「단종애사」를 보기로 하자. 이 글을 쓸 때 어떤 날 춘원 자신이 "단종애사만은 욕하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한 일이 있느니만치 춘원의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요, 겸하여 이 작품이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당 시 누계 수천 통의 투서가 들어오니만치 독자군의 인기가 굉장하였던 작품이다.
그 「단종애사」를 소설 성과상으로 검토하여 보자.
13. 端宗[단종] 前後[전후] 歷史[역사]와 文獻[ 문헌]
「端宗哀史[ 단종애사] 」 의 像備[상비] 智識[지식] 춘원의 「 단종애사 」 를 논평 하려면, 그 예비지식으로 역사 즉 실사를 잠깐 뒤적여 볼 필요가 있다.
이씨 조선의 창업주 태조대왕이 洪武[홍무] 壬申[임신] 7월 16일에 즉위 하였다가 6년 후인 戊寅年[무인년]에 정종대왕께 禪位[선위]하고 당신은 上王[ 상왕] 이 되었다.
정종대왕은 재위 2년 후 당신의 아우님 태종대왕께 선위하고 당신은 상왕이 되었다.
태종대왕은 즉위 후 원자 讓寧大君[양녕대군]을 세자로 책하였다가 "양녕은 광인이라"誣[무]하여 廢[폐]하고 忠寧大君[충녕대군](후일 세종대왕)을 다시 세자로 책한 뒤에 재위 18년 후 세종대왕께 선위하고 당신은 상왕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그 놀라운 지력으로 치정에 노력하다가 건강을 상하여 임시로 세자( 후일의 문종대왕)께 庶務[서무] 參決[참결]케 하였다가 재기할 기회가 없이 승하, 문종대왕이 등극하였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세인이 다 아는 바, 만고에 쉽지 않은 聖[성], 德[ 덕], 智[ 지] 를 겸한 분이었다. 세종의 妃[비] 되는 분이 또한 억센 성격의 주인 이었다. 이러한 두 분 새에 아드님이 여덟 분, 따님이 두 분이요, 서출로 아드님 열 분, 따님 두 분, 합계 22남매였다. 그런 중에 적출 왕자들은 부모가 다 그런 분이니만치, 8왕자가 다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역사상의 비극은 개막이 된다.
맏아드님(문종대왕)은 후일 왕위에 오를 분이니만치 교양(유교적)에 매우 힘썼다. 이것이 첫째로 그분의 건강을 損[손]하였다. 그 뒤 부왕( 세종대왕) 이 탈로 누었을 동안, 정무를 代攝[대섭]하고 병석에 侍候[시후]하는 6년 간건강은 상할 대로 상하였다. 이 상한 건강 상태로 등극을 하였다.
정무의 번잡과 상중 素食[소식] 등은 더욱 신왕의 건강을 해하였다.
그런 중에 심적 苦勞[고로]가 또 하나 있었다. 당신의 동생들이 너무도 걸 출인 데 대한 의구였다. 몸이 약하면 마음이 약하여진다. 마음이 약하여지면 의심치 않을 것을 의심하고 무섭지 않은 것을 무서워하게 된다. 왕은 동생네 들을 의심하고 무서워하였다. 당신 재세중에는 무슨 근심이 없겠지만 당신만 승하하고 보면 당년 10세의 왕자가 어찌될까.
왕위라 하는 것은 무서운 매력을 가진 것이다. 이 왕위라 하는 찬찬한 자리가 무사히 어린 왕자에게 전하여질까. 억센 동생(왕자에게는 叔[ 숙]) 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심적 고로는 왕의 건강을 더욱 상하게 하였다.
동생 넷 중에도, 가장 맏동생 首陽大君[수양대군]과 그 다음인 安平大君[ 안평대군] 이 가장 무서웠다. 수양대군은 억세고 활달하여 소절에 구속 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매양 입궐하여서는 왕께 기름진 음식을 잡숫도록 권하고 단상을 권하고, 왕이 상중이라 하여 돌보지 않는 정무에까지 간섭하여 왕을 떠받고 충동하였다. 이것이 도리어 왕에게는 무슨 야심이나 있지 않은가고 의심 되었다.
이 수양보다도 더욱 의심되고 두렵고 꺼리우는 것은 안평대군이었다. 안평은 왕족― 더우기 왕의 同母弟[동모제]로서의 부귀나 누리고 근신하는 생애나 보냈으면 좋을 것인데 무슨 연고인지, 文武士[문무사]를 많이 모으며 도당을 모으는 듯한 모양이 보이며 이러한 無職群[무직군]뿐 아니라 현직 재상들과도 結連[결연]을 모으며 인심을 사는 등 모든 행동이 적지 않게 의심스러웠다.
이러한 호랑이들 틈에서 양과 같은 어린 세자가 장차 능히 위를 보지 하여 나아갈 수가 있을까. 이것이 왕의 걱정이었다.
首陽·安平 兩大君[수양·안평 양대군]과 '顧命重臣[고명중신]’ 이 걱정은 더욱 왕의 건강을 해하여 2년 후에는 임종을 보게 되었다. 이 왕에게는 모 후도 승하하고 왕비도 승하하여, 대궐 안에는 嬪[빈] 이하의 궁녀들 뿐이지, 어른 될 만한 이가 없었다. 이 왕이 승하하면 당년 12세의 어린 세자가 신 왕으로 등극케 된다. 漢地 古例[한지 고례]에 의지하여도 15세 이하의 유군에게는 섭정하는 분이 있어야 하는데 대궐 안에는 그럴 만한 분이 없었다. 이러한 경우에 임하여 왕이 취할 길은 당연히 당신의 동생 중 가장 큰 이 수 양대 군께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친 중 가장 연 로자인 양녕대군(왕의 백부)께라도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부탁이 없이 승하 하였으면 대행왕의 가장 근친인 수양대군이 자진하여 유왕 섭정을 선언 하든가, 정부에서 수양께 섭정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啓請[계청], 裁下[ 재 하] 등에 있어서 소년왕이 어떻게 자의로 재단하고 명하고 결하고 할까. 섭정이 없으면 중신들의 자의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왕가의 존재라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동생들을 의구하는 왕은, 임종에 있어서 重臣[중신]과 儘臣[ 진신] 들을 불러서 어린 세자의 보우를 부탁하였다.
위에 말한 양녕대군이란 어떤 이냐 하면 태종대왕의 맏아드님이요, 세종대왕의 맏형님으로 처음에는 태종의 세자로 책되었던 분이다. 그러나 양녕보다도 세종을 더 총애하는 태종은 양녕을 폐사하고 세자로 책립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세종의 신하들은 양녕의 존재를 꺼리어서 매양 세종께,
"양녕이 여사여사한 죄가 있사오니 도모하소서."
하고 청하고 하였다. 6진을 建置[건치]하여 그 勇名[용명]을 천하에 날리 고후에 좌상까지 되었던 金宗瑞[김종서]도, 그런 상계를 하였다가, 세종께, "이는 내 뜻을 모름도 심함이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말라."
는 질책에 가까운 嚴敎[엄교]까지 받은 일이 있다. 즉 왕족 중의 기린아 였다.
문종대왕은 임종에, 대신들에게 고명을 하고 대궐에서는 惠嬪[혜빈] 楊氏[ 양씨] 로 하여금 장차 유주의 준섭정(?)을 부탁하였다. 양씨는 본시 중인 집 딸로 궁녀로 들어왔다가 세종대왕의 고임을 받아 封嬪[봉빈]까지 된 사람으로 격식에 있어서든 가벌로 보든 섭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못 되었다.
이렇게 되어 신왕(소년왕 단종)이 등극하매 이 나라에는 임군은 존재 하나 왕권 행사자는 없게 되었다. 대신들이 선왕의 고명을 간판삼아 대신끼리 의논 하여 작정하고 결재하고 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매 당연한 순서로서 왕숙인 수양이(비공식으로나마) 대궐에 출입 하면서 유왕을 대신하여 정치에 容喙[용훼]하였다. 수양이 이러니 안평대군도 대궐 출입이 잦게 되었다.
대신 측으로 보자면 이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이 왕숙들만 없으면, 자의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데, 왕숙들이 감시하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사헌부를 시켜서 '禁奔競案[금분경안]’을 제출케 하였다. 금분경이란 왕족들의 분경을 금한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제출시켜 아직 아무 철도 모르는 어린 왕께 한 번 보이고 교서가 내려 놓으면, 이것은 왕명이라 왕숙들 의 대궐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왕권은 대신들에게 全屬[ 전속] 되고 專屬[ 전속] 되게 된다. 왕숙으로 보자면, 큰일 난 문제이다. 수양과 안평은 즉시 당시의 수상 皇甫仁[황보인]에게 달려가서 엄중 항의를 하여 이 안을 묵살하여 버렸다.
그러나 일정한 섭정이 없으니만치, 아무리 왕숙들이 감시를 한다 하나, 정무는 대개 대신들의 임의로 되었다.
당시의 삼공은 영상이 황보인이요, 좌상이 김종서요, 우상 鄭苯[ 정본] 이었다.
영상 황보인은 단지 한낱 문사이지, 정치가로서의 업적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문을 숭하는 시대에 오래 살고 오래 벼슬에 있고 큰 흠이 없어서 저절로 영상까지 기어올라갔지, 영상 재목은 못 되었다.
좌상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아래서 6진을 건치한 무공은 있지만, 위에 기록한 양녕 참소로 보아도, 그리 향그럽지 못한 위에, 부하 李澄玉[ 이징옥]에게 북국 미녀를 뇌물로 받아서 여기 혹한 등― 將材[장재]는 될지언정 相材[ 상재] 는 못되었다.
우상 정본 역시 한 개 문사에 지나지 못하였다. 섭정이 없는 유왕의 아래 이러한 대신들이 布列[포열]되어,'선왕의 고명’을 방패삼아 국정을 좌지우지 하는지라,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국정은 보잘 나위가 없이 되었다.
세종대왕 6년간은 환후와 그 뒤 문종대왕 2년간의 상중무위의 뒤를 이는이 세태는 눈 있는 자로 하여금 근심치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게다가 왕숙 안평대군은 무엇하려는지 더욱 문사·무사를 모으며 대신들 을사 괴며 하여 일대 숙청을 가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위가 의심스러웠다.
드디어 수양대군이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선왕의 고명을 유일의 정강으로 삼는 무능노물들을 다 처치하여 버리고 스스로 영상 이·병 양조 판서 겸 병마도통사가 되고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로서 내각을 조직 하였다. 안평대군의 행사가 의심스럽다 하여 안평 부자도 정배를 보냈다.
讓寧大君[양녕대군]을 讒訴[참소] 이런 때에 임하여 가증한 것은 조선 신하들의 참소 심리다. 김종서가 양녕을 세종께 참한 것은 위에도 기록 하였거니와 태종, 세종 양조를 통하여 양념을 참한 자 부지기수요, 태조 시에 芳幹[ 방간] 의 난을 꾸며 내고 芳碩[방석]의 난을 꾸며 내고, 대대로 적잖은 逆獄[ 역옥]을 꾸며 낸 이들이 모두 臣類[신류]다. 이들은 수양께 연방 안평을 제하여 버릴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수양은 이를 힘있게 눌렀다.
정치에 대하여 自家見[자가견]을 가지고 있는 수양은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어린 임군은 대궐 안에 평안히 있게 하고, 임군께 위안될 시설을 게을리 지 않는 한편으로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다.
이때에 이 수양을 보는 세 가지의 눈이 있었다. 하나는 의혹의 눈이었다.
이제 저러다가 보위까지 엿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수양의 심복들로서, 어린 임금은 상왕으로 높여 모시고 수양이 보위에 오르소서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수양의 赤誠[적성]을 알아보는 일군이었다.
이 가운데서, 전 양자는 수양에게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자기는 어린 조카님을 위하여 이렇듯 애쓰거늘 세상은 이를 곡해하는구나. 여기서 수 양은이 의심의 눈을 막고 자기의 적성을 알게 하기 위하여, 군신의 반대를 일 축하고 어린 왕께 왕비를 간택케 하고, '상중근신’에서 벗어나게 하여 드리고자 유신들의 예의론을 무시하고 단상을 실시하였다. 어서 왕비에게서 원자가 탄생하여 세자로 책하여 이 임군의 御代[어대]를 든든하게 하여 자기게 향하는 의혹의 눈을 걷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변함 없는 것은 '臣心[신심]’이라고 명명할 일종의 심리가 고려조부터 그냥 흘려내려 와서 지금까지 미친 바 小人心[소인심]이었다. 수양이 임군 되기를 바라는 일군은 자기네의 억측으로써 수양도 그려려니 하고, 내부 공작을 많이 하여 어린 임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수양을 즉위케 하려하였다.
수양도 신이 아니다. 야심과 패기가 남보다 더한 사람이다. 그런 위에 자기에 직접 왕권이 없기 때문에 행정상 지장도 많아서 내심 클클하던 차이라,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여 왔지만 종내 이 유혹에 빠졌다.
首陽[수양]이 新王[신왕] 되다 선위가 되었다. 수양이 신왕이 되었다. 어린 왕은 상왕으로 높였다.
신, 민에게 이의가 없었다. 상황의 신하이던 사람들은 모두 이 신왕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전통상 위에서 하는 일은 당초에 알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태조 개국 이래로 선위가 관례가 되어 오니만치, 등한 히 보았다.
신왕은 상왕으로 하여금 부와 귀에 부족이 없게 하여드리고자, 창덕궁에 모시고 시종, 물품 등을 풍부히 하고, 옛날 왕이 상왕께 대접한 절차를 지켰다.
그 뒤 왕이 창덕궁에 상왕께 문안을 갔는데, 마음에 없이 왕위를 떠난 상왕은 왕을 만나지를 않았다. 창덕궁 앞까지 세자와 함께 위의를 갖추고 갔다가 돈화문을 들어서 보지도 못하고 경복궁으로 돌아온 것은 왕에게는 큰 망신 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은 다른 방면으로 한 개 사건이 배태 되었 다. 과거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로 있는 成三問[성삼문] 朴彭年[ 박팽년] 등은 간간 세종이 친히 어린 손주님(지금 상왕)을 품에 안고, "이 뒤 이 왕손이 성장한 때는 너희들은 노신이 되겠구나 그때 잘 보좌 해라." 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성, 박등은 문종의 학우였으니만치 문종 재위 2년 간 늘 (아우님들을 꺼리는 문종은) 이 동무 겸 신하에게 장래 보좌 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어린이가 지금 왕에서 상왕으로 높이우기는 하였다 하나 심중 불평이 있는 것이 확연하여질 때에 양심상 가책이 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당년의 집현전 학사들끼리 모이면, 한탄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뿐, 무슨 대책을 취 할 줄도 몰랐거니와 지금 왕의 정치적 수완에 感[감]한 그들은 이 어대를 어지러이 하기도 싫었다.
이러구러 병자년 여름 明使[명사]가 오게 되었다. 왕은 상왕과 함께 창덕궁에 명사를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그때 雲劍[운검]으로 뽑힌 사람이 오위도총부 도총관 成勝[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훈련도감 兪應孚[ 유응부] 였다.
여기서 급격히 모의는 진보되었다. 본시부터 일철한 무인으로서 이 왕위 변동을 재미 없게 보던 성승은 아들을 독려하여 문사 동지들을 모으게 하고 자기는 함께 운검으로 서게 된 유를 설복시키며 일변 무사 동지들을 모았다. 그 계획이란 것은, 잔칫날 왕과 세자의 뒤에 설 운검 성과 유는 왕 과세자를 弑[시]하고, 성과 유의 영솔하는 병사며 동지 무사들의 병사로 상왕을 끼고서 경복궁으로 달려가서 상왕을 복위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만한 폭력을 가졌으면 넉넉히 될 만하였다.
잔칫날에 이르렀다. 그 날 행인지 불행인지 세자가 갑자기 잔치에 불참 하게 되었다.
여기서 삼문과 팽년 등의 심경을 잘 볼 수 있다. 그들은(더우기 삼문은 시종의 직으로) 현왕의 恩威[은위]가 구비한 왕자적 기풍을 안다. 일찌기 세종께 뽑히어서 몸소 세종의 위업을 보았고 문종의 무위를 본 그들은 지금 의상왕과 왕과를 대조하여 볼 줄을 알았다. 臣節[신절]로 보자면 상왕께 死仕[ 사사] 하여야겠고 大局[대국]으로 보자면 왕을 시할 수 없었다. 성·박 등은 세자가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사를 중지하고 후사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여 유응부와 정면 충돌까지 하여 중지시켰다. 물론 갑자기 모사 하였 더니만치 정예 분자만이 아니라, 일이 발각나서 큰 일을 저지를 각오는 하였을 것이다.
일을 중지한 이상은 10에 8,9는 발각될 것이다. 더우기 지자가 많은 현 정부에게…. 여기서 결사 동지 중 金礩[김질]이란 인물이 어차피 발각될 이상에는 자기가 앞서 밀고하여 자기 죄는 사함을 받고 상까지 타려는 욕심으로 그 장인 鄭昌孫[정창손]과 함께 밀고를 하였다.
이 밀고로써 사건의 전면이 드러나고 모두 잡히게 되었다. 여기서, 임군은 그들을 장차 죽이어야 할 것이나, 그 재질이 너무 아까와서 몇 번을 순응을 권하고 형장으로 내보낸 뒤에도, 다시 승지 하나를 따라 보내서 또 다시 순응을 권하여 보았다. 그러나 강개를 위주하는 문사나 一直[일직]한 무사나 모두 상왕께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이상은 돌이키기를 불긍하였다. 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에 성삼문이 현왕의 총신인 과거의 학우들을 돌아보며, "자네들은 현주를 도와서 태평을 이루게. 나는 지하의 고주께 뵈려 가네 "한 말은 의미 깊은 말로 본다.
이 사건은 또 '신심’을 움직여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도 벌써 여러 번을 "상왕을 외지로 보냅소서"라 "강봉합소서","서인으로 떨구소서 "야단인 것을 왕은 '불윤’의 두 자로 버티어 왔는데, 또 야단들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불윤하고 단지 상왕을 아직껏의 거소이던 창덕궁에서 금성대군 구택으로 옮기었다.
그 뒤 宋玹壽[송현수]와 權完[권완]이 역모를 한다고 고발하는 이가 있었다. 송은 상왕의 장인이요, 권은 상왕의 외숙이었다. 재상들은 또한 상왕 처치 문제를 꺼내었다. 왕도 하릴없었다. 상왕이 그냥 상왕으로 있는 동안은 상왕을 빙자하여 혹은 상왕께 충심으로 현왕께 대항하려는 일이 뒤 이어 날 것이다. 한양에 상왕이 그냥 있어도 그런 일이 그냥 날 것이다. 여기서 상왕을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봉을 하고 영월로 보내게 되었다.
魯山君[노산군] 되어 寧越[영월]로 왕은 밀지를 강원감사에게 내려서, 상왕 ― 지금은 노산군에게 물질적 불편이 없도록 하게 하고 노산을 모시던 궁녀, 환시 등을 뒤따라 보냈다.
이것으로 노산 문제는 끝난 줄로 알았다. 그랬는데 순흥에 정배 가 있던 금성대군( 왕의 同母弟[동모제]요, 노산의 삼촌)이 노산 복위를 도모 하느라고 동지와 병사를 모으다가 발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야단을 하였다. 그 새 영월에 가 있는 동안도 연하여 야단 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더욱 야단하였다. 노산이 생존한 동안은 이런 일은 그냥 있을 터이니 도모 합시 사고, 아직껏 꾸준히 이런 상계에 불윤의 두 자로 대하던 왕은 이번은 하릴없어, "죽이지는 차마 못하겠으니, 서인이나 만들어라." 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들을 리가 없었다. 私恩[사은]은 사은이고 국법은 국법이니 종사에 득죄한 이를 어찌 그냥 둡니까.
少年[소년] 王者[왕자]의 可憐[가련]한 最後[최후] 近言[근언] 亂言者[ 란 언 자] 는 모두 노산을 핑계하오니 이제도 그냥 두었다가는 결코 안 됩니다고 宗親府[ 종친부], 議政府[의정부], 忠勳府[충훈부], 六曹[육조]가 함께 상계 하여 가련한 소년 왕자는 그 최후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史實[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썩 후년 성종조에 南孝溫[ 남효온] 이란 문사(금일의 소설가에 해당할 듯)가 당시 상황께 殉[순]한 成[ 성], 朴[ 박] 등 육신의 충렬에 감하여 붓한 기록은 원체 전문에 의지하여 쓴 것 이니만치 誤記[오기]도 많거니와 육신의 충성을 말하자니까 상왕을 폐위, 강봉, 사사한 세조께 대한 곡필도 많았다.
일자의 틀리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柳成龍[유성룡]이 지적한 河緯地[ 하위지]( 육신 중 1인)의 再仕[재사] 일자 등은 치지하고라도, 병자년 정월에 병사한 신숙주 부인 윤씨를 소설화하여'성, 박 등은 죽었는데 신숙주는 의기양양히 집으로 돌아오므로 윤 부인은 이를 부끄러이 여겨 목매 죽었다’등, 6월에 자살한 것같이 만들었다.
뿐더러, 성, 박, 成 父[성 부], 유 등등이 선위시부터 벌써 상왕 복위를 圖[ 도] 코자 자살치 않았다고 하였으나 만약 그렇다면, 도총관 성승의 군사와 유의 훈련원 군사를 가졌으면 비단 明使[명사] 來朝時[내조시]가 아니 라그 전에라도 언제든 거사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요, 더우기 그런 밀모가 그런 장기간을(연여이다) 발각 안 되었을 까닭도 없고, 김질이 연여를 감추어오다가 그날 따라 밀고하였을 까닭도 없다. 하물며 황보인, 김종서 등은 誅[ 주] 할 때부터 비분강개하였다 운운은 당치 않기 짝이 없다.
요컨대 남효온의 「秋江集[추강집]」「六臣傳[육신전]」은, 육신의 충심을 表揚[ 표양] 키 위하여 저작한 한 개 소설로서 소설인지라 史實[사실]과는 상위 내지 상반되는 점이 많다.
그러면 춘원의 「단종애사」는 어떤 것인가.
남효온의 「육신전」에서 가장 부자연히 보이는 것은 단종의 諸臣[ 제신] 이 일률로 세조(수양)께 대하여,
"나는 그대의 녹을 먹지 않고 따로이 쌓아 두었으며 칭신치 않았(박팽년은 계문에 臣[신] 자를 巨[거] 자로 썼다 운운) 노라 "고 하였다는 점이다. 대저 녹이라는 것은 국록이지 왕록이 아니라는 것도 모를 육신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 임군을 임군으로 섬기기 싫으면 爵[ 작]을 던지고 낙향하여 주경야독으로 여생을 마침이 온당하겠고, 더 일 보를 나아가서 상왕 복위를 위하여 거짓 臣仕[신사]하였다 하면, 어디까지 든 표면으로는 순히 종하여 털끝만한 의심도 사지 않았어야 할 것이요, 박팽년의 '巨[ 거]’ 자 운운의 모험은 절대로 피하여야 할 것이다. 더우기 시종의 직에 있어서 매일 신왕 면알하는 성삼문이 1년간을 어떻게 칭 신하지 않고 지냈으랴.
不自然[부자연]한 臆說[억설] 부자연한 억설일 뿐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육신을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일으키게 하기 쉬운 망령된 설이다.
14. 春園[ 춘원] 의 「端宗哀史[ 단종애사] 」
춘원의 「 단종애사 」 는 남씨의「육신전」을 골자로 삼아 쓴 이야기다. 남씨의 「 육 신전 」 이 가진 바의 모순이며 부자연까지도 모두, 판단과 수정이라는 도정을 過[과]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였는지라, 전체적'이야기’로서 이 구성에 관하여는 여기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 이야기는 단종대왕의 탄생에서 비롯하여 단종대왕의 승하로써 끝을 막은 ― 한 개인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설이지 한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譚[담]이 아니다. 담도 아니매 더우기 소설은 아니다.
남효온의「육신전」이 육신의 충렬을 표창하기 위하여 적지 않게 세조를 誣[ 무] 한 형식이 있다. 그것을 골자삼아 쓴 이야기인지라 역시 그 譏[ 기] 를면 치 못하리라 본다.
「端宗哀史[단종애사]」도 東亞日報[동아일보]에 이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연재 될 때에 이 이야기를 두고, 두 가지의 상반된 독자가 생겼다. 절대적 환호 층의 독자와 誹譏層[비기층]의 독자― 이런 두 종류이다. 그 두 종류는 전 후자를 다 또한 둘씩에 나눌 수가 있다. 즉 환호층의 독자를 두 종류로 나누자면 하나는, 미지사―옛날의 궁정과 양반 계급을 등장 인물로 하여 역사적 사실을 대중화하여 널리 알려 준 데 대한 환호이요, 나머지 하나는 고사를 보고 늘 단종의 박명한 일생을 서러워하던 사람이든가 그 사건의 단종 측 인물의 후손이 되든가 하는 사람이다.
또 비기층 독자를 나누자면, 하나는 춘원이 그럴듯이 묘사한 궁정 혹은 양반 계급의 생활, 풍속, 습관, 제도 등등이 하나도 정작과는 비슷도 안 하여 애 당초 읽을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층이요, 또 하나는 남효온의 稗史[ 패사]에 수긍치 못하든가 혹은 세조 측 인물의 후손 되는 사람들이다.
과연 무식(갑자기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이 용어를 쓰지만)한 독자는 환호하였다. 궁중 사건은 민간에게는 諱之秘之[휘지비지]하여 오던 이 왕조라, 秘[비]하는 자에게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 인정으로, 이 백성들은 궁정록이라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춘원은 ' 궁정 풍속 제도는 이러이러 하였다’는 듯이 보통 풍습과는 다른 풍습을 창작 하여 써 넣었다.'무식’이란 것은 불쌍한 것이다. 무식한 독자들은 춘원의 이 멀쩡한 거짓말―창작 풍습(궁중이며 양반 댁의)에 연방 머리를 끄덕였다.
春園[춘원]의 創作[창작] 風習[풍습]·制度[제도] 우리는 「 단종애사 」 를 펴 놓고, 이야기로서의 효과의 善否[선부]를 검키 전에, 지엽적의 일이나마 춘원의 창작 풍습·제도를 살펴보자.
일일이 다 들추자면 「단종애사」의 첫 頁[혈]에서 끝 頁[혈]까지 모두가 창작 풍습이라 불가능한 일이니, 중요한 자만 보기로 하자.
그보다 먼저 한 개의 삽화를 기입할 것이 있다.
이 「단종애사」중에, 경성 남대문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崇禮門[ 숭례문]’이라는 3자가 세종대왕의 제3왕자 안평대군의 필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여는 춘원에게, "그것은 안평이 아니라 양녕대군(세종대왕의 백 형) 의 필적이라고 온갖 문헌에 나타나 있다"고 알으 켰더니, 춘원은 "누가 쓰는 현장을 보았답디까. 어느 전라도 유생이란 말도 있 읍 디다 "고 웃어 버렸다.
이것이 「단종애사」를 쓴 춘원의 태도다. 즉 말하자면, 어느 대군의 필적이라는 것은 들은 법한데 안평이 문장이 용하였다 하니까 숭례문의 현판을 안 평의 필적이라 속단하여 버린 모양이다. 그런 뒤에 진정한 주의를 들어 도표면 자기의 그릇을 수긍치 않는다.
이 이야기의 가운데 나오는 임군과 왕비에게는 모두 지문에도 경어를 썼는데 그 경어가 어떤 때는 경어인지 욕인지 구별키 힘들게 되었다. ' 안 계시었다’ 하면 좋을 것을 '있지 않으시었다’하는 등의 용어는 둘째 두고, 임군이 이 전편에서 한 번도 '용안을 드시지’못하고 '얼굴’을 들고 ' 마리’( 하다못해 머리)를 돌리시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시는 등, 너무 상스러운 것은 둘째 두고, 웬 '놈’이 그리 많이 나오는지 임군, 대신들은 막론이요, 재상가 부인네까지가 모두, "정인지 놈이 여사 여사합니다 ""김종서 놈이 이러저러합디다"… 그 놈이 어떻고 이 놈이 어떻고― 마치 병문 친구들의 대화나 다름이 없다.
무론 궁정 용어라 하는 것은 주를 달지 않고 그대로 쓰면 독자도 모를 것이고, 독자는커녕 웬만한 재상가에서도 이해치 못하는 말이 많았다 하니, 궁정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쓴대야 무의미한 일이지만, 조금 더 한자를 많이 넣어 쓰고 또한 조금 더 점잖게 쓸 필요는 있을지니, 이 「단종애사」의 최초의 대화로 나오는 것이 궁녀들이 세종대왕께 왕 탄생의 희보를 아뢰는 것으로서, "상감 마마. 세자빈께옵서 시방 순산하시어 계십니다."
"이 해에 경사가 많구나. 종서(김종서―때의 좌의정)가 육진을 진정하고 돌아오고 또 원손이 났으니,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이렇게 되었다. 임군이 신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承傳色[ 승전 색]( 宦官[ 환관]) 이 왔다면 모르거니와 궁녀가 나오기가 뚱딴지다. 전편을 통하여 내내 임군 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궁녀가 모시었으니, 이것은 작자의 오해이다. 정일품 '嬪[빈]’에서 비롯하여 종구품 '秦羽[ 진우]’ '秦變宮[ 진변궁]’ 등에 이르기까지의 내명부가 내전 이외― 더우기 남성 재신들이 모시고 있는 자리에까지 나온다는 것은 좀 과한 망발이다. 대화도, "상감 마마. 원손 탄강하오셨읍니다."
"금년에 과연 경사가 많구나. 좌당이 육진을 진정하더니 운운"등, 한문을 좀더 많이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때의 점잖은 사람의 용어는 한문에다가 토만 겨우 조선말을 단 것쯤이지 오늘날까지 조선말이 남아 있는 것은 전혀 常人[상인]이나 부녀자의 덕택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자초지종으로 양반이거나 常人[상인]이거나 부녀자거나 꼭 동일한 말을 썼다.
'상감마마’라는 칭호도 일고할 필요가 있다. 대내에서 부인들이나 환관들은 임군께 대해서는 '상감마마’라 한 듯하다. 그러나 보통 신하들은 ' 전하’라고 불러 모셨지 상감마마라 하지 않았다. 이 ' 이야기’ 전편을 통하여, 전하라 부른 것은 한 군데인가 두 군데 밖에 없고, 그 밖은 다 상감 마마라고 되었는데, 이것도 잘못이다.
임군이 삼공에게는 相禮[상례]로 대하는 제도인데 '종서’가 운운도 안되었거니와 여기뿐 아니라 이 '이야기’에는 대화에서 제삼자를 화제에 올릴 때에, 모두 그 성명을 불렀지 칭호로서 말한 것이 없다. 예컨대 대화 중 ' 김 판서가 여사여사하고’ '이 참판이 이러저러’하다는 곳은 없고 모두가 '김 아무개’ '이 아무개’― 게다가 때때로는 '놈’까지 붙여서, 천인들의 대화같이 만들어 놓았다.
전편을 통하여 대화며 용어가 천스럽지 않게 된 곳을 찾자면 지난( 한 군데도 없는지도 모르겠다)한 일이니까, 이런 것은 일일이 집어 낼 수 없고 다른 방면으로 보자.
用便[용변]도 ' 매화 틀’에서 단종이 즉위 후 경회루에 혼자 배회 하며( 임 군은 재위중'혼자’라 하는 경우는 단 일 초라도 없다. 심지어 용 변도 ' 매화 틀’이라는 운반 변기에 내시 부액으로 본다) 어떤 때는 '얼음이 얼거든 핑구나 돌릴까’생각하며(임군이 핑구라는 이름은커녕 구경이라도 한일이 있을까) 임군이 궁녀들과 산보할 적에 대신이 내리까지 혼자서 뛰 쳐 들어와 임군께 뵈오며, 단종이 상왕이 되어 壽康宮[수강궁]으로 나온 때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초를 못 사오고(돈이 이조에는 효종조에 처음 鑄[ 주] 하였다. 그 전은 楮布[저포]다) 매일 조회를 받고(조회라는 것은 절 일 이나 혹은 무슨 受稅[수세]할 일이나 그런 등사가 있는 때야 있다) 아무에게나 김 생원 이 진사라 부르며(생진과에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이 칭호를 못 부른다. 지금은 함부로 영감, 진사, 주사 등으로 부르나 당시에는 白面[ 백면] 이면 단지 서방이다) 임군이 당신의 부왕의 생각을 하는데 ' 아바마마’ 며 ― 이런 풍속, 습관, 제도상의 실수를 찾아 내자면― 아니, 도리어 실수 아닌 것을 찾자면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여기는 대궐에 어떻게 얼컨하게 관련이 있는 사람의 집은 모두 ' 궁’ 이라하였다. 수양대군 궁, 안평대군 궁, 무슨 군 궁, 무슨 尉[위] 궁, 심지어 혜빈 양씨 궁이라는 것까지 있다. 하인배들의 간편을 위한 지칭으로 부마 궁, 무슨 洞[동] 궁 등으로 불리는 일은 있으나, 정식으로 궁호가 내리 기전에는 궁이 될 까닭이 없다. 더우기 양씨는 중인 집의 딸이라, 제 친정으로 돌아갔으면 솟을대문도 못할 평대문의 민가요, 自家[자가]를 장만 하였으면 양씨 댁이다. 이전에 모씨의 모 야담에 '상궁마마’라는 것이 있어서 고소를 금치 못하였더니 이것도 거기 그다지 손색이 없다.
문종비를 매번 '顯德嬪[현덕빈]’이라 하였다. 현덕빈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우기 '열네 살에 良娣[양제]로 동궁에 들어와 5년 지나서 良媛[양원]으로 봉하다’하였다는데 양제는 종이품이요, 양원은 종 삼 품이라 아마 양원으로 동궁에 들어와 양제로 進封[진봉]이 되었달 것을 꺼 꾸로 쓴 모양이다.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는 '初封承徽[ 초 봉승 휘]( 종사 품), 進封良媛[진봉양원], 後遂封世子嬪[후수봉세자빈]’이라 되었다. 그 뒤 세자빈으로 책되었으면 그저 '세자빈’이요, 세자가 후일 등 극한 때에는 왕비요, 왕의 승하 후에 계왕이 바친 호가 '현덕왕후’이다. 왕( 문종) 의 능이 현릉이기 때문이다. 현덕빈이란 것은 존재치 않았다.
이 '이야기’는 맨 첫 줄로부터 맨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 "네 ― 이 ―"라고 길게 뽑아서 하는 대답은 한 군데도 없다. 아랫사람이 웃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대답도 모두 금일의 평교끼리의 대답인 '예’한 마디로 되었다. 임군이 세자빈을 부르는데, "아가. 듣거라."
운운은 고소를 지나칠 일이다.
신하가 임군께 자칭하는데, '소신이 여사여사’라 하고 하였는데, 이도 과오 로서, 蕃邦[번방]으로 자임하는 조선서는 '폐하’라 못 부르고 ' 소신’ 이라 자칭치 못한다.
이 '이야기’로 보자면 아랫사람이 웃사람께 뵐 때는 반드시 꿇어앉는 것으로 되었으나, 조선의 실풍습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은 웃사람 앞에 반드시 읍하고 서 있어야 하며, 계급의 차가 조금만 벌어지면 楹內[영내]에조차 들어서지를 못하고, 좀더 벌어져서는 臺石[대석](댓돌) 위에도 올라가지 못 한다.
쇤네(소녀)라 할 것이 전부 소인이라 되었다.
편복이라 할 것이 전부 군복이라 되었다.
'이야기’의 줄기는 宮廷[궁정] 秘話[비화] 요컨대 '이야기’의 줄기는 궁정 비화이면서도 궁정이며 거족들의 생활 습관, 풍속, 제도 등은 시골( 시골 서도 양반 없는 평안도나 함경도) 토호의 집안 이야기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대궐이나 顯家[현가]의 습, 속, 제 등은 엿볼 바이 없다. 위에 기록한 것은 그 대범한 자이고, 세소한 一句[일구]까지도 모두 시골 토호의 생활이지 궁중이나 대가의 생활이 아니다.
무론 궁중 풍습의 세소한 자는 대관도 알지 못하는 바요, 내관이라야 비로소 알바이지만 대범한 것까지도 알아보지 않고 상상뿐으로 썼다 하는 것을, 작자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신문사에서 그 신문의 편집국장의 직을 가지고 여가에 쓰는 것이라, 참고 할 겨를도 없기는 없었겠지. 그러나 너무도 의붓자식 취급한 점은 변명 할 여지가 없다. 「단종애사」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약)성삼문이 북경 갔던 길에 어떤 사람(중국인)이 조선 문장 온다는 말을 듣고 墨画[묵화] 白鷺圖[백로도] 한 폭을 가지고 와서 화제를 청하였다. 삼 문은 그림을 보자마자, "雪作衣裳玉作趾[ 설작 의상 옥 작지], 窺魚蘆渚幾多時[규어노저기다시], 偶然飛過山陰墅[ 우연 비과 산음서], 誤落羲之洗硯池[ 오 낙 희지세 연지] "라고 불러서 명나라 사람들을 놀래었다고 한다. 아무리 삼문이 시는 잘 못 짓는다 하더라도 이만큼은 그도 시인이다.(약) 이상은 대체 삼문이 시를 잘 짓는다는 칭찬인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 다. 이것은 「稗官雜記[패관잡기]」에 있는 아래와 같은 삽화를 춘원이 誤釋[ 오 석] 한 것이다. 즉, 삼문이 북경에 갔는데 그곳 사람이 백로도를(펴 보이지는 않고) 題詩[제시]를 청한다. 그래서 삼문은 "雪作衣裳玉作趾[ 설작 의상 옥 작지], 窺魚蘆渚幾多時[규어노저기다시]"라고 부르는데 그때야 그 사람은, 백로도를 펴 보인다. 보매 묵화도라, '雪作[설작], 玉作[ 옥작]’ 은 안 되었다. 여기서 삼문은 頓智[돈지]를 내어 "偶然飛過山陰墅[ 우연 비과 산음서], 誤落羲之洗硯池[오낙희지세연지]"라 不句[불구]를 불러서 '雪[ 설]’ 과 '玉[옥]’의 땜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맛 것을 오석할이만치 한문 지식이 약한 춘원이 아니다. 의붓자식 격으로 대수롭지 않게 붓을 잡았기에 이런 실수가 생겨난다.
위에 기록하니만치 개괄적으로 결점을 들추었으면 인제부터는 逐頁檢討[ 축혈 검토] 를 하기로 하자.
사건의 발단은 세종 23년 7월 23일로 시작된다.
이 날 왕실에 원손이 誕降[탄강]하였다. 지금 임군의 맏아드님인 왕세자의 원자로서 장차 왕세손으로 책봉이 될 분이요, 겸하여 장차에는 이 나라의 임군으로 등극을 할 귀한 영아였다.
申叔舟[신숙주]와 成三問[성삼문]의 忠逆[충역] 마침 집현전에 입직한 두 학사 신숙주와 성삼문(장차 이 왕손이 등극한 뒤에 그분께 申[신]은 역신이 될 사람이요, 成[성]은 충신이 될 사람이다)을 데리고 産報[산보]를 기다리던 임군은 남손 탄강이라는 보도에 매우 기뻐하는 일방 거느린 두 신하에게 원 손이 장래 등극하는 날에 잘 보좌하기를 당부하였다.
그 뒤에는 이야기는 일전하며 이 임군의 가족 상태를 알려 준다. 이 임군께 는 元妃[원비] 誕生[탄생]의 왕자가 세자까지 여덟 분이나 되는데, 다른 왕자는 다 건강하고 더우기 제2의 수양이며 제3의 안평 등은 패기만만한 인물 임에 반하여 세자는 우애심은 지극하나 건강이 아주 나쁜 분이다. 그러니만치 원손 탄강은 더욱 경사이며 왕가 基業[기업]을 튼튼히 하는 초석인 동시에, 원손의 숙들이 너무 괄괄하므로 근심도 적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가련한 원손은 탄강 이튿날 그 생모(세자빈)를 여의어 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이리하여 초단을 막음하고 사건은 12년을 건너뛴다.
그렇게 조선을 위하여 큰 일을 많이 하신 세종대왕께서 경오년 2월에 승하 하신 지 삼 년이 지나서 지난 2월에 대상이 지나고, 그 후 석 달이 못 되어 임신 5월 14일에 우리가 지금껏 세자라고 불러 오던 문종대왕께서 승하 하시어 이제 열두 살 되시는 아기께서 왕위에 앉으신 것이다.
작자는 이렇게 말하여 12년 전 탄생의 왕손의 등극을 報[보]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작자는 서술의 순서를 잃었다. 상기와 같이 소년왕의 등극을 보한 직후에는 붓을 돌아서서 다시 3년 전 세종대왕 승하에서 비롯 하여 문종대왕 승하까지를 뒷걸음쳐서 보하였다. 그런 뒤에는 다시 또 뒷걸음 쳐서 현덕왕후(소년왕의 모후) 승하 이후로 돌아 있다가 또 썩 물러서서 문종의 初娶[초취]인 徽嬪[휘빈] 김씨 때부터 문종의 情史[정사]를 기록 하기 실로 30數[수] 頁[혈](박문서관판 초판)에 亘[긍]하였다.
그러나 기교상으로 보든지 효과상으로 보든지 문종의 정사는 원 줄기에는 아무 필요가 없는 자로서 1,2頁[혈]쯤으로 간략히 처치하여 버릴 종류의 것 이었다.
이렇듯 서술의 순서가 바뀌어 등극한 신왕이 다시 왕세자로 되고 승하 한 선왕이 다시 왕이 되고 과거의 왕(문종)의 정사가 나오고 노신들에게 세 자고명이 내리고 혹은 전혀 이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는 權陽村[권양촌]의 삽화의 5,6頁[혈]을 허비하는 등, 이 순서 바뀐 것이 실로 제18頁[혈]에서 비롯 하여 104頁[혈]까지 근 90頁[혈]에 긍하였다.
그 다음에 유왕 등극으로 돌아온 뒤의 첫 양면은 權擥[권람]과 수 양 대군의 밀의 다.
권람의 생각에는 남이 내게 불충불효하더라도 '그러면 어떠냐’하고 치지도 외하겠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아니하여 자기의 불충불효는 용서 하더라도 남이 내게 대한 불충불효는 수호만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작자는 이렇게 써서, 여기서 두 사라의 성격을 갈라 세웠다.
史的[사적] 코스와 人物[인물]의 性格[성격] 그러나(아래서 기회 있는 때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작자는 이야기의 진전을 기정 코스에 끌어넣기 위 해서는 언제든 작중 인물의 성격을 무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우기 역사 물어에 있어서 史的[사적] 코스를 좇아가기 위하여 작중 인물의 성격은 조석으로 변하는 일이 흔하다.
제95頁[혈]에서 작자는, ( 약) 이 것이 왕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뒤에 몇 번 눈을 뜨시었으나 말씀은 못하시고 운명하시었다.
이 날에 수양대군은 실망이 어떻게 컸던 것은 궁에 돌아오는 길로 사모를 벗어 동댕이를 치어서 모각이 부러진 것을 보아 알 것이다.
즉, 왕의 승하를 본 뒤에 수양은 집에 돌아와서 권람과 의논을 하였는데 작가는 이미 쓴 바를 잊어버리고 수양과 권이 상의하는 도중에도 2, 3 차, ' 왕의 壽[수]가 경각에 있다’는 뜻을 말하여서 독자로 하여금 왕이 승하 하였는지 아직 생존중인지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야기 진전을 독자에게 미리 암시하여 위하여 수양으로 하여금 평범한 우문을 연발케 하고 권을 명쾌히 대답을 하여서 수양을 우인같이 만든것도 불찰의 하나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수양과 권과의 밀의로써 '顧命篇[고명편]’은 끝난다. 고명편은 장차 진전 될 이야기의 서두와 및 장래의 암시는 어느 정도까지 되었으나, 작품으로서는 실패였다.
'고명편’의 뒤에 '失國篇[실국편]’이 계속된다.
王[왕]과 韓[한]의 登場[등장] 이 작자는 어느 작품에 있어서든 반드시 선인( 주인공 혹 기타)에 대하여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악인을 대립시킨다. 이 「단종애사」에 있어서도 고명편에서 벌써 지선지성한 왕과 대립 시키기 위하여 수양의 가장 평범하고 무의미한 행동에까지 모두 장차 簒位[ 찬위] 를 圖[ 도] 한다는 암시를 보여 주었고, 실국편 첫머리에 韓明澮[한명회]라는 악의 대표를 등장시켰다. 이 한명회를 악의 대표로 만들기 위하여는 한의 외모까지도 붓끝이 능히 사출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다하여 흉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또한 한의 심리 상태를 그려 가로되, 한명회는 열 달을 못 채우고 지레 낳을 때에 선악을 가리는 양심 하나를 잊어버리고는 다른 것은 다 찾아 가지고 나온 것이다.
하여 표리가 상부한 악인을 만들었다.
[상기 저작물은 저작권의 소멸 등을 이유로 저작권 보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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