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론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백석론을 쓰는 것도 일종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하나 시집 ⟪사슴⟫이외에는 그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 그를 논한다는 것은 더욱이 제한된 매수로서 그를 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없다. 남을 완전 히 안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 견해에 비추어가지고 남을 이해하는 것인 만큼 불완전한 것인데 더욱이 그의 시만을 가지고 그의 전 인간을 논하는 것은 대단 불가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백석론은 씨의 작품을 통하 여서 본 씨 자신의 인간성과 생활을 논위함이라고 변해(辨解)를 해야만 한 다.
백석 씨의 ⟪사슴⟫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조선 시단의 경종이었다. 그는 민족성을 잃은 지방색을 잃은 제 주위의 습관과 분위기를 알지 못하고 그저 모방과 유행에서 허덕거리는 이곳의 뼈 없는 문청들에게 참으로 좋은 침을 놓아준 사람의 가장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백석의 자랑이 아니라 한 편 조선 청년들의 미제라블한 정경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나 보기의 백석은 시인이 아니라 시를 장난(즉 향락)하는 한 모던 청년에 그쳐버린다. 그는 그의 시집 속 ‘얼룩소 새끼의 영각’안에 ⌜가즈랑 집 ⌟, ⌜여우난골족⌟, ⌜고방⌟, ⌜모닥불⌟, ⌜고야(古夜)⌟와 같은 소년기 의 추억과 회상을, ‘돌덜구의 물’안에 ⌜초동일(初冬日)⌟, ⌜하답(夏畓) ⌟, ⌜적경(寂景)⌟, ⌜미명계(未明界)⌟, ⌜성외(城外)⌟, ⌜추일산조(秋 日山朝)⌟, ⌜광원(曠原)⌟, ⌜흰 밤⌟과 같은 풍경의 묘사와 죄그만 환상 을 코닥크에 올려놓았고, ‘노루’와 ‘국수당 넘어’에도 역시 추억과 회 상과 얕은 감각과 환상을 노래하였다.
그는 조금도 잡티가 없는 듯이 단순한 소년의 마음을 하여가지고 승냥이 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와 돌나물김치에 백설기 먹는 이야기, 쇠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타는 모닥불, 산골짜기 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 보는 할미를 차 굴 린다는 땅 안에 고래등 같은 집 안에 조마구 나라 새까만 조마구 군병, 이 러한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들었던 이야기와 그 시절의 생활을 그리고 기억 에 남는 여행지를 계절의 바뀜과 풍물의 변천되는 부분을 날치있게 붙잡아 다 자기의 시에 붙여놓는다. 그는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고 해도 앞에 지 은 그의 작품만으로는 스타일만을 찾는 모더니스트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그는 시에서 소년기를 회상한다. 아무런 센티도 나타내이지는 않고 동화 의 세계로 배회한다. 그러면 그는 만족이다. 그의 작품은 그 이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그는 앞날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인즉슨 그는 이러한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근심을 모르는 유복 한 집에 태어나 단순한 두뇌를 가지고 자라났으면 단순히 소년기를 회상하 며 그곳에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기 하나만을 위하여서는 결코 나쁜 일 이 아니니까. 다만 우리는 그의 향락 속에서 우리의 섭취할 영양을 몇 군데 발견함에 지나지 아니할 뿐이다.
하나 우리는 이것을 곧 시라고 인정한 몇 사람 시인과 시인이라고 믿는 청년들과 및 칭찬한 몇 사람 시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그냥 변화시키지 않고 흡수하기 쉬운 자연계의 단편이 있다. 가령 제주도에는 탱자나무에도 귤이 열린다 하고 평안도에서는 귤나무에서 탱자 가 열린다 하자. 물론 이것을 아름다웁게 수사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냥 기술 한다고 하여도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평안도의 탱자열매가 시가 될 수 있고 평안도 사람에게는 큰 귤이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석의 추억과 감각에 황홀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의 어 린 시절을 그리고 자기네들의 생활과 습관을 잊어버린 또는 알지 못하는 말 하자면 너무나 자신과 자기 주위에 등한한 소치임을 여실히 공중 앞에 표백 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상의 내 말을 독자가 신용한다면 백석 씨는 얼마나 불명예한 명예의 시인 칭호를 얻은 것인가. 다시 그를 시인으로 추대하고 존숭한 독자나 평가(評家)들은 얼마나 자기네들의 무지함을 여지없이 폭로 시킨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내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은 신문학이니 새로운 유파이니 하며 그의 작품을 신지방주의나 향토색을 강조하는 문학이라고 명칭하여 옹 호할 게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이라고밖에 나는 볼 수가 없다. 지방색이니 무어니 하는 미명하에 현대 난잡한 기계 문명에 마비된 청년들은 그 변태적인 성격으로 이상한 사투리 와 뻣뻣한 어휘에도 쾌감과 흥미를 느끼게 된다. 하나 이것은 결국 그들의 지성의 결함을 증명함이다. 크게 주의(主義)가 될 수 없는 것을 주의라는 보호색에 붙이어가지고 일부러 그것을 무리하게 강조하려고 하는 데에 더욱 모순이 있다.
그리하여 외면적으로는 형식의 난잡으로 나타나고 내면적으로는 인식의
천박이 표시가 된다. 모씨와 모씨 등은 이 시집 속에 글귀글귀가 얼마나 아 담하게 살려졌으며 신기하다는 데에 극력 칭찬을 하나 그것은 단순히 나열 에 그치는 때가 많고 단조와 싫증을 면키 어렵다. 미숙한 나의 형용으로 말 한다면 백석 씨의 회상시는 갖은 사투리와 옛이야기, 연중행사의 묵은 기억 등을 그것도 질서도 없이 그저 곳간에 볏섬 쌓듯이 그저 구겨넣은 데에 지 나지 않는 것이다.
백석 씨는 시인도 아니지만 지금은 또 시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또 백씨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위엣말은 많은 착오도 있을 줄 안다. 하 나 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는 백석 씨만은 가급적으로 음미를 하여보았다.
백씨와 나와는 근본적으로 상통되지 않은지는 모르나 나는 백씨에게서 많 은 점의 장점과 단처(短處)를 익혀 배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백씨에게 감 사하여 마지않는다.
‘시인’이란 칭호가 백석에게는 벌써 흥미를 잃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참으로 백석을 위하여 그리고 내가 씨에게 많은 지시를 받은 감사로서도 씨 가 좀더 인간에의 명석한 이해를 가지고 앞으로 좋은 작품을 써주지 않는 이상, 나는 끝까지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고 싶지 않다. 그것은 다른 범용 한 독자와 같이 무지와 무분별로써 시를 사주고 싶지는 않은 참으로 백석 씨를 아끼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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