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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최학송 매화 옛 등걸

by 역달1 2022.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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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花[매화] 옛등걸

─ 새봄을 맞으면서

梅花[매화] 옛등걸에 春節[춘절]이 돌아오니

예 피던 가지에 피염직도 하다마는

春雪[춘설]이 亂紛紛[난분분]하니 필똥 말똥 하여라.

이 시조는 평양 기생 매화의 읊은 것이라고도 하고 松都三絶[송도삼절]에 드는 황진이의 읊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읊은 이가 누 구라는 것을 알아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러한 문제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읊은 이가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주의를 끌 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문제이 다. 나는 이 시조를 생각하는 때마다 기생인 그 작자를 생각지 않을 수 없 이 된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와 나는 시대가 멀다. 다행히 동시대라 하였 더라도 동서에 멀리 갈리었으니 어찌 보았으리라고 꼭 보증을 하랴. 나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나는 다만 그가 남기고 간 이 시조 한 장을 통하여 그 의 가슴속을 그윽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몇 줄 되지 않는 이 글을 쏟 아 놓던 그 가슴속이 어쩐지 나에게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어 마지않는다.

이 시조는 그가 분분이 쏟아지는 춘설에 덮인 窓前寒梅[창전한매]의 即景 [즉경]을 읊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읊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가 어쩌다 춘설에 덮여서 피지 못하는 매화 봉오리를 보고 읊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 기 신세를 거기서 느끼고 읊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가 그 처럼 사람의 가슴을 찌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설움 가운데서 가장 큰 설움이 있다 하면 그것은 자기를 발휘 못 하는 설움일 것이다. 같은 사람으로서 하면 할 수 있는 역량을 드러내지 못 하고 세상의 모욕과 천대 가운데서 청춘을 값 없이 보내는 것같이 슬프고도 원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인도에 어그러지고 용납치 못할 죄를 지 어 차마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 사람으로서도 그러한 슬픔을 가 지는 일이 있거든 하물며 俯仰天地[부앙천지]에 부끄럼 없는 몸을 가지고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의 가슴이 어떠 하랴! 드러내지만 못 할 뿐 아 니라 도리어 한 걸음 들어가서 일생을 모욕과 천대 속에서 보낸다면 그의 가슴이야말로 苦[고]니 痛[통]이니 憤[분]이니 寃[원]이니 하는 따위의 형 용사로써는 삼분의 만족도 못 느낄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슬픔이 있는 것이다. 크나큰 슬픔이 있는 것이다. 어찌 매화나 眞伊[진이]의 슬픔만이 되 랴. 그것은 때아닌 춘설에 피지 못하는 일만 봉오리의 슬픔이 될 것이다.

내가 九原[구원]에 그의 가슴을 엿보고 엿보려고 하고 또 엿보여지도록 되 는 것도 오로지 이럼으로써이다. 이 시조를 쏟아 놓은 가슴은 벌써 塵土[진 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 가슴은 살았다. 때아닌 춘설이 이 인간에게 뿌리 는 날까지 그 가슴은 만인의 가슴이 될 것이다.

새봄을 맞는 내 가슴은 몹시 슬프다. 나로도 형언할 수 없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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