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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채만식 과도기 [하]

by 역달1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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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침 어느 일요일이었었다.

"에라, 오늘은 해수욕이나 하러 가겠다…… "

하고 봉우는 보던 책을 덮어 치우고 일어섰다.

"형식이두 가구 정수두 가구 인제 내일 한 과정만 마치면 그만인데 어찌 맘이이라 설뚱거리나! 문자씬 안 가시려우. 자 얼핏 일 어나 요들…… "

그러나 정수는 헤엄을 칠 줄 모른다는 핑계를 하고 가려 하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문자를 보고

"문자두 오지 말라구. 헤엄두 칠 줄 모르구 또…… "

"아니에요…… 나두 갈 테야요. 헤엄칠 줄 모르면 배라두 타지? 정수씨두 가세요, 네? 우린 헤엄은 칠 줄 모르니까 보트라두 타면 좋잖아요?"

하고 문자는 따라갈 듯이 일어섰다.

형식은 문자를 막으며

"글쎄 헤엄두 칠 줄 모른다면서 밸 타다가 빠지면 어쩔려구 그래? 그리구 문잘 데리구 그런 델 가면 못된 불량소년 놈들이 나대는 꼴이 보기 싫어…… 그러지말구 집에서 정수하구 놀아요."

하고 살살 달랬다. 봉우는 벌써 문밖에 나가 서서 혀를 끌끌 차며

"에끼 못생긴 것. 불량소년 놈들한테 매 맞을까 봐서 그러니? 염려 마라 이애.

내가 한손에 열 놈씩 당할 게니…… "

하고 풍을 쳤다.

형식도 곧 밖으로 나가고 집안은 갑자기 조용하여졌다. 문자는 따라가려고 말은 그 처럼 하였으나 정수와 남아 있게 된 것이 도리어 다행이었다.

정수와 문자는 툇마루로 나가서 정수는 등의자에 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고 문자는 자기 방에서 가지고 온 의자를 그 옆에 다가놓고 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모처럼 두 사람이 단둘이서 만나 단출히 앉게 되었으니까 어쩐지 마음이 푸근하고 안심이 되는 듯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 그 '피상적’ 이야기가 나왔다.

"정수씬……"

하고 문자는 좋은 말거리를 얻은 듯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정수씬 참…… 예수굘 믿잖으시지요?"

"네…… 밎잖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신약 구약 다 보섰지요? 문학을 하시는 터이니까…… "

"아직 다 보진 못했습니다. 첫머리 조금씩 보다가 그것두 싫증이 나서요 문자 씬 기독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두 성경두 좀 보구 믿는 사람한테 이야기두 좀 들어보구 했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리구 아주 모순이 많은 듯해요? 정수씬 많이 생각해 보 섰으니까 잘 아시겠지요? 좀 들려주세요."

"저두 자세힌 모르겠습니다. 그리구 전 어쨌든 무신론(無神論)의 입 각지( 立脚地)에서 생각을 약간 해봤으니까요. 전 물론 신(神)의 존재부터 부정 합니다…… 그러구 이 세상의 인류라는 것을 크게 보질 않구 아주 미소한 동물이라구…… 전혀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저의 인생관의 뼈라구 할 수가 있으니까 요. 그러니까 종교가나 또는 독신자들이 '아! 하나님이시여!’라든가 종교의 신성한 것을 말한다든가 인생을 위대한 것이라구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건 참구 역질나도록 비위가 거슬려요.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종교의, 가령 말하면 기독교의 이상이야 좋다구 할 수두 있겠지요. 애(愛)랄지 무저항을 주장해서 사람을 선(善)으로 인도하려구 하는 것이…… 그렇지만 종교란 것이 미신의 좀더 진화 된 것이 아닙니까? 원시종교에는 애라든가 무저항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이 다만 별이나 해나 그런 것을 보구 절을 하며 저희들의 행복만 빌고 그렇든 게 아니에요? 가령 기독교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방황할 때에 번개 치는 것을 보구 그 이상스럽구 두려운 힘을 믿는 맘으로 그걸 심볼 라이즈 해가지군 에호바라구 한 게 아니에요? 그때엔 그 에호바의 신격(神格)이 다만 저 의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는 데 지나지 못하다가 그 담 바빌론캡티비티 이후에 동 방종 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때엔 그 신격이 한층 올라가 정의(正義)의 신이니 유일신이니 창조의 신이니 하게 된 게지요? 그러다가 그리스도라는 소위 참 위대한 종교 가가 나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기독교를 완성시켰지요? 그러나 그때 사람의 머리가 단순하던 때의 것을 훨씬 더 교활해진 지금의 사람에게 그대로 이용을 하려니까 물론 잘 되지 않을 게 아니에요? 지금 아무리 이 세상에 기독교 신자가 사억만이니 어쩌니 떠들지만, 그 사억만 사람 가운데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몇 이나 있을는지 전 그것이 의문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도 시댈 따라서 진화가 있어야 않겠습니까? 물론 약간 진화가 없는 건 아니겠지요. 가령 기독교로 말 하면 인생이 이승(現世[현세])에 대한 접착성을 이용해서 천당이란 것을 만들어놓 구이 세상에 착한 사람에게 소극적 위안을 받게 하구…… 또, 악한 사람을 위협 해서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선 지옥이란 것두 만들구……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독교에선 사람의 영생욕(永生慾)을 이용하는 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 인생은 미래( 未來) 즉 하나님의 세상 때문에의 인생이요, 결코 이승 때문에의 인생이 아니라’ 는 야릇한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게지요?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난 것이라’구…… 물론 이것이 기독교가 기독교인 이상엔 다시 어쩔 수 없는 말이겠지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ㅡ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ㅡ 오늘날와 서 이 시대에 적응성이 많질 못한 듯해요…… 사실 말이지 인생이 현세 때문에 인생이지 결코 미래나 하나님 때문에의 인생이지 결코 미래나 하나님 때문에의 인생이 아니니까요. 그리구 성경 ㅡ 더우기 구약 ㅡ 같은 것은 지금 와선 도리어 기독교도들의 소위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데 지나지 못 하니까 요. 그 하나만 들어 말하면, 구약에 있는 노아 때의 대홍수란 것을 기독교는 아주 깊이 생각할 거예요. 노아 때 대홍수로 인해서 많은 사람과 생명이 죽었다구 그러지요? 그런데 그 큰 홍수는 하나님이 내인 게라지요? 그러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더구나 하나님의 자손을 그처럼 참혹히 죽여서야 하나님의 하나님 된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두 죄악이라구 해서 지옥을 가네 어쩌네 하면서…… 그러면 하나님두 지옥을 가야 옳잖겠읍니까? 그리구 오늘날 와서 기독교를 세계적의 것이라구 표방을 하면서 성경에다는 이방인( 異邦人), 이교도를 배척한 말을 엄연히 써놓구…… 그러니까 만일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신앙과 영생의 관계를 참되게 발견하려면 오늘날 종교의 견 지에서 훨씬 초월한 생각을 가지구 관찰을 해야겠지요…… "

정수는 이처럼 통일이 적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을 맺었다. 문자는 정수의 말을 듣고 있기는 하였지만, 자세히 알아듣지 못할 말이 많았으므로 좀은 흥이 적은 듯이 묵묵히 앉았다가 뜻밖에 문제를 고쳐 "그런데, 정수씬 왜 결혼생활을 싫어하세요?"

하고 물었다.

"아무리 해두 결혼생활이 자유롭질 못하구 또…… "

하고 정수는 다음 말은 어물어물하여 버렸다.

"무에 그다지 부자유로워요?"

"그거야 물론 자유롭질 못할 게 아니에요? 결혼을 하면 가정이란 게 생기지요? 그러다가 자식이 생기지요? 그런 게 모두 약간 괴롭게 굽니까?"

"그렇지만 결혼생활을 아니하면 웬만한 자유야 얻는대지만 그 대신 잃는 게 많잖아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정다운 부부간에 따뜻하게 살아가는 게 큰 낙이 아니에요? 그리구 늙어지면 자라나는 자손을 보는 게 낙 이구…… ""하긴 그두 그렇지만…… 그역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그런 데서 낙을 얻지 못 하는 사람두 있으니까…… ""그러면 정수씨가 아마 미리서 부자연한 결혼을 하셨기 때문에 아주 싫증이 나셨나 봐요?"

"하긴 그래요. 그렇지만 전 이 세상에서 저 스스로가 제 몸을 내버린 터이니까 아무 희망이나 낙을 기대칠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되잖는 세상에 맘대로나 살다가 죽어야지요. 제 자신을 위시해서 이 세상의 무엇 하나라두 즐거운 눈으로 볼 수가 있어야 희망이니 낙이니 하지요?"

"에그 정수씨두 아직 젊으신 이가 왜 그런 말씀만 하세요?"

하고 딱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리고 그의 얼굴은 한없이 비수를 머금었다.

예전부터 정수의 마음속에 깊이 숨어 그를 괴롭게 하던 고독한 감상은 그새 얼마 동안 잠잠하더니 이제 갑자기 머리를 들고 일어서 그의 마음을 한량없이 쓸쓸하고 섧게 하였다. 정수의 마음 ㅡ 동지 섣달의 벌판같이 쓸쓸하고 처량한 마음은 지금 문자와 같이 마음이 단순하고 상냥한 여자의 가슴에 안겨 맘껏 소리를 높여 울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문자도 정수의 그렇듯한 모양을 보고 자기의 전부를 바쳐 그를 위로하여 주고싶은 생각이 간곡하였다.

문자는 정수의 그 쓸쓸한 얼굴빛에는 자기 마음까지 쏠리는 듯하여 억지로 웃음을 띠고

"네 정수씨…… 인젠 그런 말은 하지 말구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나해요. 네?"

정수도 문자의 정답고 귀여운 말소리에 마음이 저으기 위로가 되는 듯이 피식 웃으며 "그러니까 누구래 어쩝니까?"

"그래두 하마 했드라면 정수씨 우실 뻔했는데요. 아니, 참…… 그런 말은 않기 로 했지. 그런데 정수씨, 그동안 써 두신 시(時) 좀 보여주세요."

"시요? 허허 시란 다 무엡니까? 누구래 실 쓸 줄 안답디까?"

"아이 내숭스럽게…… 그러지 말구 어서 좀 보여주세요. 봉우씨랑 형식씨랑 그러는데 많이 써두셨다는데요?"

하고 해죽해죽 웃으며 아양을 부렸다.

정수는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문자를 끄윽 바라보았다. 마주 바라보는 문자의 그 윽한 추파에 정수의 창자 속에서는 은은한 욕망이 일어났다.

착착 들어붙을 듯이 연(軟)하고 흰 가슴과. 춘정이 흐르는 그 입술은 정수로 하여금 침을 삼키게 하였다.

문자는 온몸이 간질간질하여지는 듯 하여

"왜 그렇게 절 바라보세요?"

하고 머리를 숙이고 정수를 가릅떠보았다.

이 두 사람 ㅡ 꿈속에 노는 듯하는 두 사람은 별다른 두 사람이었다.

맹목적이요 찰나적의 두 사람이었다. 정수는 정수였으나 정말 정수가 아니고, 문자도 문자였으나 정말 문자가 아니었었다. 과거나 미래가 없는 금시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찰나의 정수요, 참말 문자를 보지 못하는 맹목의 정수였었다. 문자도 또한 과거나 미래가 없는 금시 땅에서 솟아 나온 듯한 찰나의 문자요, 참말 정수를 보지 못하는 문자였었다. 서로 마음을 끄는 ㅡ 호기심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 정수와 문자는 그렇듯한 정수와 문자였었다. 그렇듯한 정수와 문자가 참말 정수와 문자의 속에 하나씩 들어앉아 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었었다.

두 사람은 또다시 그 '피상적’의 이야기를 내려 할 즈음에 현관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며 "김군( 金君: 즉 정수) 집에 있나?"

하는 일본 사람의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는 무우 캐어먹다 들킨 아이처럼 공연히 얼굴에 무참한 빛이 나타나더니 그것을 억제하고 현관으로 나갔다.

"아, 평야(平野)군인가? 오랜만일세 그려…… 자 들어오게…… "

하고 정수는 온 손(來客[내객])을 맞아들였다.

그 평야라는 일본 사람은 정수를 따라 들어오며

"이 집에 식구가 많이 불었다지? 그래 혼자 있기하구 어떻든가?"

하고 인사하기 겸하여 그 손은 물었다.

"물론 좋지. 혼자 있기 보 담은…… "

하고 정수는 방석을 내놓고 평야와 마주 앉았다.

평야는 툇마루에 가 계면쩍은 듯이 섰는 문자를 한번 흘끔 보더니 정수를 보고 ' 누구냐’ 고 묻는 듯이 미소를 하였다.

정수는 난처한 듯이 좀 머뭇거리다가 자기 변명을 하느라고

"문자씨, 일루 들어와서 두 분이 인사나 하십시오. 자 평야군…… 이인 지 전 문자씨 신데 이참에 이 집으로 온 임군의 부인이시구, 이분은(평야를 가리키며) 평야 청일( 平野淸一) 이란 분인데, 저편 맨 갓집에 있습니다."

하고 소개를 하였다.

문자와 평야는 초면 인사를 공순히 마치고 문자는 차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평야는 나이 삼십이 넘어 보이고 ㅡ 실상 그는 스물여섯 살이나 얼굴에 그 처럼 노티가 나타났다 ㅡ 그의 얼굴은 매우 맑게 생겼었다. 그는 머리털을 제 털 남바위처럼 더부룩이 길렀고 기골(氣骨)은 매우 장대하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온순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평야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었다. 정수의 방 바람벽에 걸어놓은 그림도 전부이 평야가 그려서 정수를 준 것이다.

14

"그래 오늘은 그리잖나?"

하고 정수는 평야에게 물었다.

"응, 오늘은 잠깐…… 그런데 왜 요샌 우리 집에 도무지 오질 않나?

무슨 섭섭한 일 봤나?"

하고 평야는 초곤초곤 말을 내었다.

"천만에, 무슨 그럴 리가 있나…… 하는 것 없이 바빠서 그랬지. 그런데 자네 매씨( 妹氏) 두 잘 있나?"

하고 정수는 의미있게 미소하였다.

평야도 의미있게 웃으며

"응, 잘 있지…… 그런데 내가 오늘 오긴 그애(자기 누이) 일 때문에 온걸세. 영자(永子) 그애가 원체 답답한지 인젠 나한테 세세한 말을 다 하데그려…… 물론 나두 대강은 짐작을 하구 있었지만…… 그래, 그런데 자넨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 자네 말두 좀 들어 보세 그려…… "

하고 침착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정수는 하찮은 듯이 피식 웃으며

"말은 무슨 말이야? 영자씨가 자네한테 한 말이 그 전부지…… 그 밖엔 아무 것두 없단 말이야."

"아니, 자네두 그렇게 농말로만 그럴 게 아니야. 그애가 며칠을 두구 잘 먹지 않구 앉아 울기만 하다가 인젠 죽는다구만 한단 말일세. 자네두 영자나 내 근 경을 좀 생각해 보게…… 영자와 나완 세상에서 보통 오뉘(男妹[남매])란 그 관계 보담 두 훨씬 더한 사정이 있는 터이니까. 자네두 혹 영자한테 들어서 알구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그애가 아홉 살 났을 적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구 나니까 소위 우리 어머니라는 인 채 한 달이 못해서 우리두 몰래 다른 곳으로 후 갈( 後嫁[ 후가]) 가버렸겠지. 아, 그러구나니까 이 넓으나넓은 이 세상에 불쌍한 우리 오뉘가 맨주먹만 쥐구 길거리로 유리하다시피 하잖았나…… "평야의 하는 말은 나직하니 고저(高低)가 작고 약간 떨리는 듯한 그 목소리는 마치 저 창자 속에 깊이 뭉친 설움의 실마리가 풀려나오는 듯 하고 위로 치뜬 그의 눈은 멀리 옛일을 회상하는 듯하였다. 정수도 그제는 평야의 하는 말을 따라 얼굴이 점점 흐려갔다.

평야는 말을 이었다.

"아 ! 그때에 우리 오뉘가 쓰린 고생을 하든 일을 생각하면! 때 내 나이가 겨우 열 여덟 지났댔나…… 어린 영잘 앞세우고 세상을 한번 돌아보니 넓기야 한없이 넓지만 조그마한 우리 오뉘의 두 몸을 의지할 곳이 있어야지. 슬픈 배두 많이 고 파 보구, 한뎃잠자리를 한두 번 했나. 그때 고생하던 말은 한두 시간을 가지 구 이루 말할 수가 없네. 그래 내가 이(齒[치])를 오그려물구 나서서 철없는 영자더러 '내가 인제부터 내 한몸은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두 어떻게든지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키구 널 장래에 잘 되도록 하겠다’구 굳게 맹셀 한 뒤에 그때의 그골똘한 맘을 변치않구 지내온 까닭에 그래두 넉넉은 못하나마 겨우 생활의 안정은 얻게된 걸세…… 그래 이렇듯한 사정이 있는 터라 내가 영잘 귀애하구 영자가 날 따르는 정이야말로 이 세상에선 둘두 없다구 해두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그 애가 지금 와서 '인젠 죽는다’고만 한단 말이야. '이 세상에 살 재미가 없다’ 구…… 그러한 말을 들으니까 분한 생각이 꼭뒤까지 치밀어서 대번에 쫓아와자 넬 죽이기라두 하구 싶데그려. 사실대로 내가 자네한테 자백을 하는 말 일세만, 처음엔 내가 자넬 여간 저주한 바가 아닐세. 그러나 그것은 내가 영잘 너무 사랑 하는 까닭에 편벽된 생각에서 나오는 젊은 피의 소치로 그런 게니까 그건 자네 두 과 히 허물진 않을 줄 믿네."

이때에 마침 문자가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차를 따라 놓았다. 정수는 차를 마시려고도 아니하고 눈을 내리깔고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였다. 문자는 두 사람의 얼굴이 몹시 흐린 것을 보고 매우 이상히 여겨 호기심을 가지고 중간에서 듣는 말을 이해하여 보려고 애를 먹었다.

평야는 차를 마시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가 어데까지든지 순결(純潔)한 태도로 영잘 대해나온 것은 나두 잘알구 있는 터이니까 깊이 감사하는 바일세. 만일 자네가 맘이 좀 불량한 사람 같았더라면 지금 영자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지 알겠나? 그처럼 썩 괜찮은 처녀가 아주 그렇게 달겨붙은 터이니까 그대로 일시적 위안이나 보구선 헌신 짝( 廢鞋[ 폐혜]) 벗어 내던지듯 할 것이 요새 어린 놈들의 항용 하는 짓이니까. 그래 그건 그렇다 치구 자네두 영자가 그만큼 매우 자넬 사랑하는 줄을 알구 있을 터인데, 자네가 그것을 들어주질 않을 게 무언가? 자네가 아주 영잘 조금두 사랑치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내가 보기에두 그렇진 않은 듯싶은데…… 그러니까 결관 어찌 되든 말이나 좀 하게. 그래야 나두 속이 시원하구 영자두 그런 줄이나 알 게 아닌가?"

하고 평야는 말을 맺었다.

문자는 그제야 이 평야라는 사람이 언젠지 정수가 그 애인이 있다고 한 그 여자의 오빠인 줄을 알고, 또 두 사람이 그 여자에게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았다. 문자는 평야의 하는 말 가운데 그의 입에서 '순결한 태도’란 말이 나올 적에 문자는 어쩐지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 자기의 순결하던 옛날이 그리운 듯도 하였다. 또한 그 '순결한 태도’란 말에 그는 정수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지 않지를 못하였다.

정수도 역시 정수라, 그 '순결한 태도’란 말에 문자를 한번 흘끔 바라보며 스스로 부끄런 듯이 얼굴을 돌렸다.

문자는 정수의 입에서 이러이러한 대답이 나오려니 하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운 듯이 정수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수는 아주 침착하고 냉랭하게 말을 내었다.

"자네가 그처럼 말하는 것두 당연한 말일세. 모두가 무린 아니야…… 사랑을 최후까지 이루려는 영자씨두 무리가 아니구…… 또 귀애하는 자기 누이의 일을 그 처럼 돌봐주려는 것두 무리가 아니구…… 그러나 나두 역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까 자네들이 무리가 아닌 줄은 알건만 그래두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

"그러면…… "

하고 평야는 정수의 냉정한 듯한 말에, 또한 자기가 묻는 말을 넘겨짚고 대답 하는 그 말에 좀은 야속스러운 듯이 "그러면 자네의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은 무언가? 좀 들려주게…… "

"자넨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만…… 연애라 하면 그것이 원칙상으로 봐서 그 목적이 남녀가 결합하려는 데 있잖나? 다시 말하면 남녀가 결합할 준비 행동( 準備行動) 이 사람의 감정의 요구를 따라 미화(美化)된 게 연애라구 하겠지? 그 렇지만 이 세상에선 연애가, 그 자격이 너무 높구 내용이 복잡해서 원칙의 목적인 결합까지 이루지 못할 만큼 그 정도에 벗어나는 게 많질 않은가? 나두 말 하자면 ㅡ 아니 영자씨가 ㅡ 결혼을 하지 못할 연앨 한 것이지. 그 상대자인 내가 결혼을 못할 사정에 있는 터이므로 말이야…… "

"결혼을 못해? 그러면 자네가 벌써 다른 여자하구 결혼을 했단 말인가…… "

"하기야 그렇지. 물론 난 벌써 결혼한 몸이지. 그렇지만 내가 만일 다시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조금치라고 거리낄 게 없으니까. 난 결혼은 가시 않더라두 인제 곧 이혼을 할 터이야…… "

"그러면 자네가 혹 이렇듯한 생각으로 그러잖나? 영자가 일본 여자니까 국경이 있다는…… "

"그건 지금 생각할 문제두 아니지…… "

"그러면 왜 그래, 글쎄? 자네가 굳이 말하길 즐겨 아니하면 더 묻질 않겠네만 아무래두 난 모르겠는데?"

"그것은 내가 결혼생활을 하구 싶질 않으니까 그러는 게지…… "

"결혼 생활을 하구 싶잖아? 왜 그럴구?"

"난 이 세상에서 아무것두 바라질 못하게 된 사람이니까…… 그러면 최후로 절대자 유나 한번 얻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걸세…… 그러니까 난 결혼 생활이란 환경을 내 손으로 만들어놓구 내가 요구하는 자율 빼앗기구 싶잖아…… "

"허허…… "

하고 평야는 탄식하 듯이

"자네가 그건 너무하는 일일세. 자네가 염세증(厭世症)이 있는 줄은 나두 알던 터이지만 그건 참말 너무하네…… 자네 목적이 자넬 배반하거든 다른 방면으로 목적을 세워가지구 자네 자신을 개척해 나갈 것이구, 또 사회가 자네의 이상과 맞질 않거든 활발스럽게 나서서 사휠 좀 개조하게…… 자네가 지금 아직 나이 어린 사람이 그처럼 자포자길 해가지구 자네가 자네 자신을 그처럼 학대할 건 무언가? 아닌게아니라 사람마다 자네만한 나이 되면 그렇듯 공상두 하구 비관두 하구 허욕( 虛慾)을 내어 보기두 하긴 하지만 자넨 특별히 더하네그려?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가 지금부터 십 년만 지난 뒤에 지금 한 일을 한번 돌아보면 자네 스스로 냉소를 않지 못할 게니까. 현실이란 참 무서운 걸세. 내가 지금 자네한테 두 마디 말을 부탁할 게니 들어보게…… 하난 자네두 인젠 그만 공상의 꿈을 깨어서 현실생활의 맛을 좀 보라는 말이구, 하난 우리 영자의 불쌍한 근경을 좀 생각하라는 말일세."

"자네가 그처럼 말해 주니까 얼만큼 고마운지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가, 내 가지 금 생각하구 있는 것이 전혀 공상이라구만 믿어선 그건 잘못일세. 그것이 나의 이상이지 결코 허무한 공상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난 어디까지든지 내 맘에 하구싶은 대로 한세상 살려고 하는데야…… 그리구 자넨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순전히 공상이라구만 믿구 내 맘을 돌이켜주려구 그러나 보네만 그건 헛된 노력 일세. 차라리 그 노력을 가지구 영자씰 달래게. 영자씨야말로 지금 꿈을 꾸는 터이니까. 그야말로 참 현실에서 떠난 꿈이지. 영자씬 그 꿈만 깨면 그만일 게 아닌가? 나두 결혼생활이 한편으로 썩 좋은 줄은 모르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난 그 결혼에서 떠난 꿈이지. 영자씬 그 꿈만 깨면 그만일 게 아닌가? 난 그 결혼 생활에서 좋은 것보다두 낮은 것을 더 많이 발견한 터이니까. 그리구 내가 지금 한 걸음 양보해서 영자씨하구 결혼을 한다면 물론 잠깐 동안은 피차의 행복이 될지두 모르겠지만 그건 영원한 불행의 원인이 되구만단 말이야. 내가 결혼을 한 뒤에 바로 그 이튿날부터 영자씰 싫어하게 될지 또는 극단에 이르러서 내가 이혼을 하려 한다든지, 혹은 내가 결혼하는 그날 밤에 자살이라두 해버릴는지 어찌 안담? 내가 그만한 짓을 할만한 극단성을 가진 것은 자네두 잘 아는 터이지? 영자 씬 투으게니예프가 지은 소설 『격야(隔夜)』의 여주인공 에레나를 아주 썩 부러워하는듯 해…… 그렇지만 난 그 인사로프가 되질 않을 테야. 그건 내가 인사 로프가 에레나를 사랑한 만큼 영자씰 사랑치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도리어 그 보 담더 영자씰 사랑하니까 그러는 게야. 인사로프가 왜 그처럼 에레나를 사랑은 하면서 에레나의 영원한 행복은 돌아보지 않았느냔 말이야? 자기가 폐병이 들었으니까 얼마 더 살지 못할 줄은 알면서두 에레나를 데리고 간 것이 너무 생각이 부족한 게 아니라구? 그래 자기의 중한 생명을 더 짧게 하구…… 더구나 에레나를 길든 고향과 정든 부모의 품에서 떠나 그렇듯 참혹한 고생을 시킬 게 무어야. 눈앞의 행복만 보았지 영원한 불행은 생각질 않는 까닭이 아니라구? 내가 아닌게 아니라 영자씰 여간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지금껏 영자씨한테 그런 말을 하지아니한 것두 영자씰 위해서 그런 거야. 일전에 내가 갔을 적에 영자씨가 그젠 참다 못해서 내 목에 가 매달려 애원하듯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만 바라보며 ' 정수씨!……’라고 부르고는 다시 아무 말도 못하구 몸부림을 하드란 말이야. 그래 나두 그처럼 자존심이 많구 활발스럽던 영자씨가 내 앞에선 풀이 죽어가지구 그러는 걸 보니까 앞이 캄캄한 듯해서 그대로 꽉 쓸어안고 '오냐, 내 사랑아’ 하구 더운 키스라두 맘껏 할 생각이 와락 쏠렸지만, 그래두 뒷일을 생각 해서내가 나를 억제하구 아무 말없이 영자씰 떼치고 오긴 했지만…… 그러자니까 내 맘인들 여간 아프겠나? 난 인젠 다시 할 말 없네. 그러니까 자네가 돌아가서 잘 알아듣도록 달래게. 이 세상에서 연앨 하다가 최후까지 못 가구 중간에서 실패하는 수가 약간 많잖나? 그 실패한 걸 가지구 죽느니 못 사느니 하는 것은 너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게 아니야? 물론 영자씬 맘이 천진스럽구 게다가 자존심이 많은 까닭에 이번 같은 일을 처음 당하구 보니까 맘에 섭섭두 하구 또 꺾인 자존심 때문에 약간 분하기두 하겠지. 그래 앞길이 아득해서 그처럼 낙심을 하기두 하겠지만, 그야말로 참 현실생활에 경험이 없는 소치가 아니겠나?"

평야는 정수가 처음에는 냉정한 듯하였으나 나중에 감상적 어조로 은근스레 말 하는 것을 유심히 듣고 있다가 정수의 말이 끝나자 한숨을 후유 내쉬며 '참 아깝다’ 란 말 한마디를 하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무엇인지 생각을 하였다.

문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정수의 말을 듣다가 평야가 있는 것도 꺼리지 아니하고 참지 못하겠는 듯이

"정수씨 ! 정수씨가 그건 너무 하시는 게 아니야요!"

라고 문자에게는적당치 아니한 열정을 띠고 감상적으로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 말에 정수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자, 난 그만 가겠네…… "

하고 한참만에 평야가 초조히 일어섰다. 정수는 내키지 않는 웃음을 얼굴에 띠고 마주 일어서며

"그러면 가서 영자씨한테 부디 말이나 잘하게. 그렇지만 내가 그처럼 영자 씰 사랑 한단 말은 말구…… "

하고 부탁을 하였다.

아 ! 정수의 꿈, 영자의 꿈 ㅡ 장차 언제나 깨려는지!

15

문자와 정수는 평야를 보내고 다시 툇마루로 나가서 앉았던 의자에 가 걸터 앉았다. 문자는 무슨 말을 좀 하려 정수의 침울하여진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만 말긋말긋 보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듯이 "정수씨 !"

하고 불렀다.

"네……"

하고 정수는 한눈을 팔며 시름없이 대답을 하였다.

"정수씨한테 청할 게 하나 있는데요, 들어주실 테예요?"

"청할 거요?"

하고 그제는 문자를 바라보며

"무어에요?"

"꼭 들어주길 테예요?"

"웬만한 것 같으면 들어 드리지요. 그렇지만 너무 억지 말씀은…… "

"아니에요. 첩경 쉬운 일이에요."

"그러면 말씀해 보시우."

"그러면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저, 정수씨 시 하나 좀 보여주세요."

"허허허허……"

웃고 정수는 문자의 하는 짓이 귀여운 듯이

"시요? 정 그렇게 보고 싶어하시면 못 보여 드릴 거야 없지만, 진정 말이지 보여 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글쎄 그런 겸사 말씀은 그만해 두시구 어서 보여주세요. 자, 어데다 두섰어요? 가서 가지구 올까요?"

"아니올시다. 제가 가지구 오지요."

하고 정수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서 책상 서랍을 한참 이것저것 뒤적 거리 다가 원고용지에다 쓴 시 하나를 찾아가지고 나와서 문자에게 주었다.

"이거예요?"

하고 문자는 즐거운 듯이 받아 펴들고 읽으려 하다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정수를 암상스럽게 흘겨보며 야속하다는 듯이 "어이구 참, 내숭스럽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조선말로 쓴 걸 글쎄 절더러 보라구요?"

정수는 문자에게 시를 주고 빙그레 웃으며 그의 거동이 재미스럽고 탐도 나는듯이 바라다보다가

"그러면 조선말이 아니구 영국말일라구요?"

"아니에요. 일본말로 쓴 것 말씀이에요."

"네, 일본말이요? 그렇지만 조선 사람이 왜 일본말로 시를 쓰나요?

"아이구 참 정수씨두…… 정수씨두 인젠 형식씨하구 봉우씨 본을 보구 공연히 절 성화만 먹이려구 들어…… 그러지 말구 어서 일본말로 쓴 걸 보여주세요."

하고 문자는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어리광을 부리느라고 짜증을 내듯이 정수를 졸랐다.

"문자씨, 진정 말이지 보여 드리기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요, 일본말로 쓴건 말이 모두 틀리구 그래서 차마 보여 드릴 수가 없어 그럽니다. 그 대신 내가 그걸 일본말로 번역을 해서 읽어 드리지요. 네? 그러면 일반 아닙니까?"

문자는 속으로 맘먹은 것이 있는 것처럼 얼핏

"네. 그러면 그러세요."

하고 무엇을 만족해하는 듯이 해죽해죽 웃었다.

정수는 그 시를 문자에게서 받아 들고

"물론 완전히 번역을 할 수는 없습니다. 어학이나 문학에 특질이 있는 것이니까…… "

하고 서서히 번역을 하여 읽어내려갔다.

그 시는 다음에 쓰인 것이었었다.

시 「님은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

님은 길을 떠나시도다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님은 길을 떠나시도다

부세( 浮世) 의 험한 언덕을 넘어

머나먼 저승의 벌판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영원의 길을

님은 다만 홀로 침묵과 소멸 속으로

후유 후유 적막한 길을 떠나시다

다정하던 님이여

지난해에 님과 의좋게 놀던 봄은

변치 않고 다시 와서

님을 찾건만

섧도다, 님의 자취는 뵈이지 않도다

님은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 시도다

이른 봄 저문 해에

부슬부슬 적막하게 내리는

애처로운 빗 소리는

님을 그려(思慕[사모]) 만가(輓歌)를 부르도다

반쯤 핀 어린 꽃봉오리는 님을 기다리다 만자저

아미를 숙이고 눈물을 머 금도다

아 ! 님이여,

님은 진정 떠나 시도다

영원히 돌아보지 못하는 길을

우리 님은 떠나 시도다

지난해 봄에 님의 가슴을 녹여 주던

훈훈한 봄바람은

잊지 않고 다시 불어와

님을 부르건만

섧도다 님은 대답이 없도다

다만

님의 남은 자취라고

거칠( 荒凉[ 황량]) 한 님의 무덤( 墓[ 묘]) 과

차디찬 님의 빗돌( 碑石) 이

비인 언덕에 처량히 섰을 뿐이도 다

님이 주시던 따스한 정은 찾을 바 없고

다만

님을 사모하는 눈물이

하염없이 내릴 뿐이도 다

다만

즐거 웁던 그 옛적에

즐거움을 즐거운 대로 누리지 못한

아쉽고 안타까운 한숨이

절로 나올 뿐 이도다

아 ! 그리운 님이여

부세를 잊고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

머나먼 길을 떠나신 님이여

편( 傳便[ 전편]) 있거든

저승의 낙을 이몸에도 알려주 오

정수는 읽기를 마치고 문자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았다. 문자는 조용히 앉아 듣다가 정수가 읽기를 마치자 자랑스레 웃으며 "참 좋은데요......전 비평할 능력은 없어두 듣기에 그래요. 썩 좋아요…… 그만한 재줄 가지시구두 그저 그리 자포자길 하세요?"

'흥' 하고 정수는 시답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너무 그리 비웃진 마시우…… "

"아니, 아니에요. 전 진정으로 그러는데 정수씬 왜 그러세요?"

"응, 그러니까 그러면 문자씨가 절 시험을 해보셨단 말씀이지요? 허허…… 그러면 그 시험성적이 어떻습니까?"

"어이구 참, 왜 그러세요 글쎄! 그러지 말구 인젠 일본말로 쓴 걸 보여주세요…… "

"옳지 옳아. 문자씨한테 내가 속았군…… 문자씨 수단이 아주 썩 그럴듯한데요? 허허 허허…… "

문자도 자기가 정수를 속인 것이 재미가 있는 듯이 소리를 내어 웃으며

"그건 정수씨가 하나만 보여주시구 다신 안 보여주시겠길래 그런 거예요. 자, 어쨌든 이번엔 일본말로 쓴 걸 보여주세요. 전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말로 쓴 걸 보여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문자씨, 일본말로 쓴 건 아무래두 보여 드릴 수가 없으니까 동화나 하나 더 번역해서 읽어 드릴 게니 어쩌시렵니까?"

"동화요? 네 그러세요. 전 무엇보담두 동활 썩 좋아하니까요."

그렇지만 다신 더 보여 달라구 조르면 안됩니다."

"네, 다신 안 그래요."

"아니, 그렇게 말로만 할 게 아니라 꼭 그러겠다구 약속을 하세요."

"아따, 글쎄 그러세요. 맨 그저 절 성화만 먹이시려구…… 있는 대로 좀 보여주시면 제가 그걸 뺏어갈까봐 그러십니까? 써가지구 혼자만 언제까지든지 두구 보실 테예요?"

"저 혼자만 보려구 그러는 게 아니라 보여 드리기가 부끄러우니까 그럽니다.

그리구 맨 첨에 그걸 쓴 목적이 남의 앞에다 내놓으려구 쓴 게 아니라 제 힘 두

시험해 보구…… 또 저 혼자 즐기려구 한 거니까요."

정수는 방으로 들어가 책장문을 열고 한참이나 뒤적거리다가 그 동화를 찾아가지고 나와 문자에게 일본말로 번역하여 읽어 주었다. 그러나 그 동화는 먼저 시보다도 더욱 번역하기가 어려웠다. 그 동화는 다음에 쓰인 것이었었다.

동화 「 파랑새( 靑鳥[ 청조]) 」

오래 ─ 오래 된 오랜 옛적에 어느 먼 시골 한구석에 아주 퍽 불쌍하고 나이도 어린 누이와 동생이 있었습니다. 누이의 이름은 복순이라고 하는데 아홉 살 나고 동생의 이름은 옥동이라고 하는데 네 살 났습니다. 집안에는 어머니도 아니 계시고 아버지도 아니 계시고 지붕 처마가 모두 무너져가는 외딴 오막살이집에서 날이 새나 해가 지나 단둘이서 서로 붙안고 앉아 어머니를 가다리는 참말 불쌍한 오뉘 였습니다.

건넌마을에 사는 늙은 할머니들이랑 젊은 아주머니들이랑은 날마다 밥도 가지고오고 떡도 가지고 와서 잘 먹여주고 옷도 깨끗하게 빨아 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그 중에 제일 마음이 상냥한 할머니 한 분은 올 때마다 그 어린 오뉘가 하도안 스러워서 하는 말이 "이애 복순아, 옥동아, 우리 집으로 아니 가려니? 우리 집으로 가서 날더러 어머니라고 부르고…… 나하고 잠도 함께 자고 밥도 함께 먹고 그러자. 내가 너의 어머니처럼 잘 해줄 게니…… "

하고 곰살스레 달랬습니다. 그러나 복순이는 옥동이를 그러안으며

"아니에요…… 우린 안 갈 테예요. 여기가 우리 집이니까, 여기 있으면 우리 어머니가 인제 우릴 데릴러 올 거에요."

하고 누구가 와서 억지로 데려갈까 두려운 듯이 울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하는 말이

"세상에 몹쓸 귀신도 다 있지. 너희들을 어쩌라고 너희 어머닐 잡아가다니 "

하고 혼자 탄식을 하고 울며 돌아가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불쌍한 오뉘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어느 겨를에 따뜻한 봄이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두 오뉘가 따스한 양지가 비치는 무너진 뜰팡에 나란히 앉아 무어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작년 가을에 강남으로 날아갔던 제비 한 쌍이 날아와서 묵은 서답줄에 나란히 앉아 "아이구 저런…… 아기씨, 도련님…… 그동안 많이도 자랐구려…… 어머닌 어델 가셨소?"

하고 정다운 소리로 반가운 듯이 지저귀었습니다.

복순이는 옥동이를 두 팔로 그러안고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하여지며 슬픈 소리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비야 제비야

강남 갔던 제비야

너희들은 날개로 날아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먼 데도 잘 간다면서

우리 어머닐 좀 찾아다 다오

내 이 가락지 너흴 줄 거니

이건 우리 어머니가

날 붙안고 앉아

"인제 많이 자라거든

잊지 말고 끼고 다녀라"하시면서

내 치맛고름에 채워 주신

이 가락질 너흴 줄 게니

건넌 마을 장자집에 가지고 가서

돈으로 받고 팔아가지고

그 돈으로 노자 삼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울 어머니 만나거든

"우리 우리 옥동이가

밥도 아니 먹고 잠도 아니 자고

어머닐 찾고 울기만 한다"고

어서어서 집에 와 서

옥동일 안고 앉아

젖도 많이 먹여주고

눈물도 닦아주고

눈물도 닦아주고 하시라고

"낮이며는

앞 남산에 나무 하고

뒷동산에 나물 뜯어

저녁 거리 장만 하고

밤이며 는

옥 동일 옆에 뉘고

다독다독 재우면 서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마루 밑에 흰둥이새끼 잘도 잔다.

뜰팡 밑에 어룽이새끼 잘도 잔다

자장 자장 자장 아가 야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옥동이 잘도 잔다

하여 가며

옥동이가 잠들거든

어머니는 나와 함께

등잔 앞에 마주 앉아

바느질도 알 쳐주고

이야기도 들려주고

베도 짜고 그러 자고 "

제비야 제비야

울 어머니 만나거든

어서 바삐 오시라고

제비야 제비야

강남 갔던 저 제비야

어서 어서 어서 바삐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먼 데도 가보고

그래도 만나질 못하 거든

더 먼 데도 가보아서

부디 부디 울 어머 닐

부디 부디 찾아다오

제비야 제비야

강남 갔던 제 비야

하고 복순이는 눈물을 씻으며 치맛고름에 꽉 잡아매었던 은가락지 한 개를 풀어 손에 들고 제비에게 주려고 얼렀습니다. 제비는 그것을 보고 슬픈 노래로 물었습니다.

"에그머니 딱도 해라, 안스럽기도 해라. 아기씨 어머닌 어델 가셨기에 그러시우?"

복순이는 또 울면서

"누가 안다나? 그때 저…… 그때 우리 어머니가 방 아랫목에 누워 잠을 잤 더란다. 우리 옥동이가 젖을 달라고 울어도 일어나시질 않고…… 내가 울면서 불러도 일어나시질 않고…… 그래서 나하고 우리 옥동이하고 옆에 앉아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울었더니, 앞마을 아저씨들이 모두 와서 우리 어머닐 새끼로 꾹꾹 묶어 별난 데다 태워 갖고 저 산 너머로 갔더란다. 아저씨들이 우리 어머닐 태운 걸 떠 메고 등불을 켜가지고 가길래 나하고 우리 옥동이 하고 울면서 따라가려니까 ' 너 흰 못 온다’고 하곤 저산 너머로 갔단다. 그리고 우리 어머닌 다시 오시질 않았어야. 이애 제비야, 너도 저 산 너머로 가서 찾아보아라. 그리로 갔으니까. 어서, 제비야…… "

하고 제비를 앙버티고 졸랐습니다. 제비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며

"에그 저런, 저걸 어쩌나…… 여보 아기씨, 어머닌 벌써 황천(黃泉)엘 가셨다우, 황천에요. 에그 저걸 어쩌나 !"

"황천엘 가? 그러면 넌 우리 어머니 가신 곳을 알면서 왜 어서 가질 않니? 어서 좀 가보렴, 응. 제비야…… "

하고 복순이는 제비가 원망스러운 듯이 재촉을 하였습니다.

제비는 답답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듯이 "에그 참…… 딱한 아기씨도 다 있지 ! 황천이란 곳은 살아선 못가는 곳이에요. 죽어야만 가는 곳이에요. 아기씨 어머니도 죽어서 황천엘 가신 거예요."

그러나 복순이는 더욱 야속스러운 듯이

"글쎄 그러면 왜 넌 죽질 못하니? 죽어가지고 좀 가보렴…… "

"아니에요. 우린 아직 강남 제비왕님이 죽으란 영(令)을 내리지 아니 하셨으니까 지금 죽진 못해요. 그리고 또 한번 죽어서 황천엘 가면 다신 오질 못하는 거예요."

"정말? 응, 제비야…… 아이고 그러면 우리 어머니도 다신 못 오시겠구나?"

하고 복순이는 또 울었습니다. 제비는 불쌍한 듯이 복순이를 바라보며

"네, 아무렴요. 한번 죽어서 황천엘 가면 아무리 해도 다신 오진 못하는 거예요."

복순이는 울기를 그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엇을 생각 하다가

"이애 제비야…… 그러면 아무라도 죽기만 하면 황천이란 델 갈 수 있니? 우리도 죽으면 황천엘 가서 우리 어머닐 뵐 수 있니?"

하고물었습니다.

"네, 그렇구말구요."

"그러면 이애, 죽는 건 무어라니? 어떻게 하면 죽는 거니?"

제비는 무엇을 한참 생각 하다가

"죽는 것은요, 저…… 그때 아기씨 어머니처럼요…… 잠자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서 다신 일어나질 않는 거예요. 그리고 죽으려면요, 음…… 죽으려면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래오래 가만히 누웠으면 죽어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기씨랑 도련님이랑은 지금 죽는 게 아니에요. 인제 훨씬 나이 많아지면 저절로 죽어지는거예요."

하고 제비는 달래듯이 말을 하였습니다.

복순이는 그 말을 듣고

"아이구 이애, 그러면 나도 지금 좀 죽어보겠다 이애. 지금 어머니가 보고 싶으니까…… "

하고 옥동이를 안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제비는 깜짝 놀라 방문 앞까지 날아와서

"아이고 아기씨, 도련님…… 제발 마세요. 제발 마세요."

하고 울었습니다.

복순이는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문을 잠그고 나서 옥동이를 아랫목에 뉘고 그 옆에 가 누우며

"아가 옥동아, 인젠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먹지 말고 나하고 여기 가만히 누웠 자. 그러면 인제 어머니한테 곧 갈 게니까 그리고 배고프다고 울지 말아. 그리고 저, 할머니랑 아주머니랑 와서 밥먹으라고 해도 일어나지 말아. 밥 먹고 떡 먹고 그러면 어머니한테 못간다, 응? 옥동아…… "

하고 옥동이를 달랬습니다.

옥동이는 어머니한테 간단 말이 기뻐서 '응’이라고 대답을 하고 누나가 하라는 대로 하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날을 누워서 배도 고프고 힘도 풀어진 두 오뉘는 손목을 마주 잡고 어머니를 찾아 머나먼 황천길을 처량히 울며 떠났습니다. 이처럼 복순이와 옥동이가 황천길을 간 뒤에 앞마을 사람들은 그 불쌍한 오뉘의 죽음을 그 어머니 무덤 양편에 조그맣게 하나씩 묻어놓고 댁내들과 처녀들은 흰옷을 입고 그 옆에 서서 오랫동안 슬피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뉘가 살던 오막살이 빈 집에는 그 뒤에 아무도 들어 살지 아니하고 뜰팡과 지붕에는 망초라는 풀이 수북이 났는데, 날마다 아침에 해가 뜰 때와 저녁해가 설핏이 질 때가 되면 어디선지 파랑새 두 마리가 날아와서 처마 끝에 나란히 앉아 구슬픈 소리로 울다가 날아가고 날아가고 하였습니다.

정수는 읽기를 마쳤다. 문자는 몸을 꼼짝도 아니하고 앉아 듣다가 혹 정수가 번역 하기에 적당한 일본말을 발견치 못하여 한참씩 어물어물할 때에는 몹시 답답한듯 정수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정수는 읽고 나서 착착 접어 내던지고 마른 입술에 담배를 물고 맛이 있데 거푸 빨았다. 문자는 듣고 아서 얼굴에는 아주 선선한 미소를 띠고 "참말 잘 되었는데요. 물론 그것이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정수씨가 창작 하신 거지요?"

"네……"

하고 정수는 문자를 바라보았다. 문자는 속맘으로 깊이 감동이 되어 그 동화가 ' 걸작’ 이란 말을 정수에게 하려고 열정적으로 정수를 바라보았으나 이번에도 또 핀잔을 먹을까 봐서 갑자기 말을 꾹 삼키고 말았다. 정수는 문자의 얼굴 표정으로써 그 마음을 짐작하고 피식 웃었다. 한참만에 정수는 일어서 문자에게로 손을 내밀며 "자, 인젠 그만 집어치웁시다. 그것두 이리 주시오."

하고 먼저 읽던 시를 달라고 하였다.

"이건 제가 좀 가지구 있을 테예요. 아까 번역하신 대로 한번만 더 읽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받아쓸 게니까요, 네? 정수씨, 안 그러실 테예요? 그리구 그 동화두…… " 하고 문자는 의자에서 마주 일어서 두 손을 뒤로 감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죽 해죽 웃었다. 정수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반쯤 벌린 입과 간소롬한 눈초리에는 이상스러운 웃음을 띠고 문자를 끄윽 바라보았다.

〈'아따, 그저 요걸…… 요걸. 그저…… 저 젖가슴을 꽉 훑으려 안고 빨간 입술을 쪽쪽 좀 빨았으면…… 그저, 그저…… 아이구, 저 얇디얇은 옷을 그나마 확 벗겨 버렸으면…… 아이구, 그저 그랬으면……’하는 욕망이 정수의 전부에 나타났다.

ㅡ 뚫어지도록 문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과 그 미소며, 반쯤 벌린 입이며 문자에게로 내숙인 그의 몸이 ㅡ 〉 문자는 마음에 내키는 듯이 방긋이 웃으며 허리를 뒤로 젖히고 정수의 하는 것만 바라보았다.

정수는 두 팔을 반이나 벌리고 문자에게로 몸을 와락 쏟치려다가 무엇을 생각 하였는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얼핏 손을 내리뜨리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허허 내가 이게 무슨 짓인고"라고 문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말로 구 시렁 거렸 다.

문자도 그제야 얼굴을 붉히고 그대로 의자에 가 주저앉아 손에 들었던 시를 펴 들고 굽어다보았다. 물론 그것이 자기는 읽지 못하는 것인 줄을 알고야 있었지마는 그래도 그는 그것을 펴들고 굽어다보았다.

정수는 방안에서 하는 것 없이 공연히 어물어물하다가 그래도 맘이 쏠려 툇마루로 나가서 앉았던 의자에 가 앉았다.

두 사람을 태우던 정욕은 갑자기 사라졌으나 그 인상(印象)만은 선연히 새로와 서 지금 두 사람의 천연스러운 피상적 태도는 얼굴을 서로 들지 못하도록 계면 쩍게 하였다.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은 그 피상적 태도에서 건조무미하게 묵묵히 앉았다가 또다시 그 '피상적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얼굴이 간질간질 가려운 듯하여 무엇으로 자기의 얼굴을 듬쑥 가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듯하였다.

두 사람의 마음은 벌거벗은 몸을 가지고 수많은 남녀의 군중(群衆)이 모여선 곳에 나가서 자기가 자기 손으로 눈을 가리고 섰는 듯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서로의 속마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아무렇지도 아니한 듯이 천연스러운 빛을 띠고 천연스러운 '피상적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 마치 두 사람이 벌거벗고 큼직한 체경 앞에 옆으로 나란히 서서 그 체경 속에 있는 서로서로 의 벌거벗은 온몸을 ㅡ 정수는 문자의, 문자는 정수의 ㅡ 손가락질하며 바라보는 듯이 얼굴과 온몸이 간지러웠다.

16

해는 거의 석양이 가까웠다. 정수와 문자가 앉아 있는 툇마루 앞 뜰팡에는 선선한 집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멀지 아니한 사적장(射的場)에서는 총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음습(陰濕)한 검은 구름이 하늘을 차차 덮기 시작하고 그 를 따라 사람의 몸은 훈더운 기운에 보채어 흐르는 땀이 몹시 진득거렸다. 검은 구름은 삽시간에 하늘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그 그득 덮여 있는 모양은 금시 대지( 大地) 를 내리누르는 듯하였다. 정수와 문자는 숨이 콱콱 막히는 듯하여 부채질을 활활 하며 '어서 소낙비가 한 줄금 왔으면 ’하고 기다리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구름 속에서는 무서운 번갯불이 참담히 번득거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에 문자는 깜짝깜짝 놀랐다. 이리 한참이나 야단을 하며 벼르다가 꿀맛 같은 선선한 바람이 휙 불더니 손 굽으렁이 같은 빗낱이 바싹 말라 먼지가 푸근푸근한 땅 위에 하나씩 둘씩 폭폭 완고하게 떨어지기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빗낱은 점점 자주 듣다가 갑자기 댓줄기 같은 빗줄이 확확 부는 바람을 따라 옆으로 비스듬히 김싸게 좍좍 내리쏟아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비에 잠겨 운치 있게도 암암히 보였다. 땅위에는 순식간에 검누른 흙물이 이리저리 흘러내려가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선선한 산( 生[ 생]) 기운이 떠올랐다. 함석지붕 때문에 비 듣는 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가 한데 뒤 섞여 귀가 윙해서 말소리가 잘 들이지 아니 하므로, 두 사람은 말을 하려면 입을 귀에다 바싹 대고 말을 하였다. 이처럼 소낙비는 한참이나 잠자코 쏟아지다가 겨우 큰비는 그쳐버리고 다만 실낱 같은 가는비가 바람에 살살 날려 안개와 같이 흐트러 졌다. 검은 그름은 바람에 몰려 뭉툴뭉툴 헤어져 가고 서편 하늘에서 구름장을 방긋이 떠들고 눈이 부시게 족족 뻗어나오는 햇발은 가는비에 나부껴 마치 하늘에서 금가루(黃金末[황금말])가 조용히 내려오는 듯하였다.

빗소리에 잠겨 잠깐 동안 그친 듯하던 전차소리, 총소리, 사람들의 지껄이는 소리는 마침 기다리고 있던 듯이 빗소리가 막 그치자 한꺼번에 와락 몰려나왔다. 만상은 모두 정하게 목욕을 한 듯이 새로운 기운이 나보였다. 매초롬하게 씻겨 내린 땅 위에는 유리 조각, 자개 껍데기가 보얗게 솟아나와 반가운 듯이 반짝거리고 정하게 씻긴 나뭇잎에서는 매끄러운 반사가 일어났다.

두 사람의 먼저 긴장되고 계면쩍던 마음도 상쾌한 천후(天候)의 영향을 받음 인지 인제는 아주 쾌활하여져 가지고 '봉우와 형식이가 비를 담뿍 맞지나 아니하였나’ 하여가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침 우체사령이 "편지 받으오 ㅡ "하고 문 여는 소리에 문자는 얼핏 현관으로 나가서 편지 한 장을 들고 들어 왔다. 이 편지는 봉우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순에게서 온 편지였었다.

그 편지는 도화(桃化)색 도는 바탕에 흰 백합꽃이 찍힌 조그마한 양봉투에 봉 우의 주소소 성명을 또박또박 쓰고 이면에다는 다만 경도오제(京都吳弟)라고만 썼었다. 그러나 누가 보든지 첩경 그 내용이 연서(戀書)라고 생각할 만하였다.

문자는 빙긋이 웃으며

"이 것이 분명 영순씨한테서 온 편지지요?"

하고 그 편지를 정수에게 주었다.

정수는 받아들고 피식 웃으며

"네, 옳습니다. 봉우가 또 의기가 양양해지겠구먼…… 그렇지만 이번엔 대관절 무어라 구 답장을 했을꼬? 이 편지 속엔 사진두 들지 않은 듯한데…… 봉우가 지난번 편지에 자기 사진을 보내주었던가요?"

"아니에요. 하긴 봉우씬 보내려구 하는 것을 형식씨가 들어서 못 보내게 했어요. 지금 보내선 못쓴다구…… 그래 보내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편지에 별 말을다 썼어요. 그 편진 봉우씨하구 형식씨하구 둘이서 의논해가면서 쓴 건데요. 그래 제가 한번 읽어 달라고 조르니까 일본말로 번역해서 읽어주는데…… 참 별 말이 많아요. 저 누구라든가? 그 사람 욕을 막 하구요…… "

"서태문이라 구 그러지요?"

"네네, 서 무엇이라구 그래요. 그리구 맨 끝에 가선 이런 말두 썼겠지요. ' 저녁마다 열두시, 새로 한시가 지나두룩 잠을 이루지 못하구 영순씨 생각만 하구있다가 어찌어찌해서 겨우 잠이 들면 영순씨의 그 아리땁고 다정스러운 그림자가 선연히 제 앞에 보이구 합니다. 그래 전 반가운 마음에 와락 달려들어 영 순 씨의 그 보드라운 움파 같은 손목을 훑으려고잡고 영순씨! 하고 부르구 나선 그동안 그려하든 설화나 하려 하면 웬일인지 목이 막혀 말이 나와야지요! 그래 전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묵묵히 섰느라면 영순씨가 잡혔던 손목을 확 잡아 뿌리치는 바람에 저는 깜짝 놀라 잠이 깨어 사방을 휘휘 둘러봅니다. 아! 영순씨, 그때에 영순씨는 간곳 없고 저는 옆에 누운 정수군의 손목을 꽉 훑으려잡고 있겠지요. 얼마나 제 맘이 섭섭하겠습니까? 그 꿈에 만나 그리워하는 말을 좀 하려하나말이 도무지 나오질 아니하는 이 봉우의 가슴이 비록 꿈은 꿈일지언정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영순씨…… 영순씨…… 저는 밤마다 밤마다 이처럼 마음을 졸이고 지냅니다. 저의 외로운 혼은 애인을 찾으려고 멀리멀리 적막 사막에서 방황을 합니다. 아! 우리 영순씨는 그 근경을 알아주시는지? 오늘밤도 이미 깊었습니다. 붓을 들고 책상에 의지하여 졸던 저는 높다란 하늘에서 흰구름을 타고 선경의 노래를 부르는 영순씨를 보기도 하고, 무서운 짐승에게 몰려가다가 깊은 구렁에 빠져 헤매는 영순씨를 보기도 하였습니다. 아! 그래도 우리 영순씨는 이러한 근 경 을 전혀 모르시고 다만 홀로 고요히 누워 아리따운 꿈을 꾸시겠지! 아 그 색색 하는 숨소리…… 선경의 노래 같은 그 작은 숨소리를 듣는 듯한 저의 혼은 또다시 멀리멀리 애인을 찾으려! 영순씨!…… 영순씨의 입에서 나오는 예스( 오냐) 의그 한말은 이 봉우에게 얼마나한 생명수가 될지 짐작하여 주시오. 만일 영 순 씨가 그 오냐란 대답을 하시기에 아직두 더 시간이 필요하신 경우거든 그동안 태우는이 봉우의 가슴을 측은히 생각하시고 한 장 사진을 보내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마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영순씨, 제가 이 편지를 토스트에 집어넣고 나서 날마다 얼마나 우체사령의 편지 받으오 하는 소리에 가슴을 뛰놀리며 영 순 씨의 회답을 기다리겠는지 짐작하여 주시오……’라구 썼겠지요. 하하하하…… 그리구 그 편지가 여간 긴 게 아니에요. 그때 언젠지 봉우씨가 '이건 꼭 두구 우리 영 순이한테 쓰는 편지에만 쓰는 거다’ 하고 사가지고 온 그 편지에다가 깨알( 荏實[ 임실]) 이 쓴 게 여덟 장이나 되었어요. 하하하하……"

하고 문자는 재미스럽게 웃었다.

정수도 문자를 따라 웃으며

"봉우가 꿈에 영순일 만나서 손을 잡구 어쩌구 한단 말은 정말인가 봐요. 아니, 손을 잡는 게 아니라, 껴안구 입두 맞추구 그러는 모양이에요. 요새 저녁이면 아주 귀찮아 못견딥니다, 전…… 그 사람(봉우)이 잠을 자다가두 잠덧을 하면서 제 목을 그러안구 무어라구 구시렁거리겠지요 그래 제가 확 뿌리치면 잠을 깨어 가지군 절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응, 정수댔나?’ 하구 돌아 눕겠지요…… 매일 밤 그래요. 하룻밤에도 몇 번씩…… 그리구 참, 그처럼 껴안군 제 어깨에 다나 등에나 입을 대구 키스하는 흉낼 내겠지요. 허허 허허…… "

문자는 뱃살을 거머쥐고 웃으며

"네, 그런데요…… 꿈에 만나서 꽉 껴안을 제 고 보들보들한 살이 자기 팔에가 닿으면 그건 참 온몸이 녹아나는 듯하나요. 그렇지만 키슬 하면 어쩐지 보드라운 맛이 없구 뻣뻣하다나요. 그래두 좋아서 막 내리 빨다가 영순씨가 확 뿌리치는 바람에 화닥닥 놀라서 보면 정수씨 목을 그러안구 그 옷자락에다 키슬 하구 그런 대 나요. 하하하하. 그래 봉우씬 그 편지에다 그런 말까지 모조리 쓰려구 하는 것을 형식씨가 '이애 넌 공연히 그따위 말 썼다가 영순이가 널 보구 아주 음탕한 놈이라구 도리어 욕이나 하면 어쩔려구 그러니? 차라리 손목이나 잡는다구 쓰렴…… ’ 그랬대나요. 그래 그 말대로 손목만 잡는다구 쓴 거래요. 하하 하하…… "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재미있게 웃었다.

그때에 마침 봉우와 형식이가 문 밖에서 요란히 지껄이며 들어왔다. 문자는 그 편지를 얼핏 품에다 감추고 시치미를 뚝 떼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자는 두 사람이 비를 후줄근히 맞은 것을 보고

"흥, 그러면 그렇지…… 저게 모두 천벌이에요. 날 떼어놓구 혼자들만 간…… 하나님이 무심할 리가 있나…… "하고 웃으며 들어오는 두 사람에게 농말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문자에게 지지아니하려고 "내가 천벌을 받으면 문잔 그저 편할 줄만 아나? 내가 비 맞아서 옷을 버렸으니까 그걸 빨아주려면 문자가 받을 천벌은 어떨구?……" 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어이구 그래 봐요 좀? 옷을 빨아주나. 빨고 안빨긴 나한테 매었으니까 내 가안 빨면 그만이지…… 네? 봉우씨, 그렇잖아요?……"

"아무렴요. 그렇구말구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난 그런 말은 안했으니까 내 옷은 빨아주시겠지요?......"

하고 봉우는 너털웃음을 쳤다. 형식과 문자도 같이 재미있게 웃었다.

이처럼 세 사람은 지껄이며 옷을 갈아 입고 형식은 툇마루로 나아가

"정수, 자넨 왜 그러구 가만히 누웠나? 영감처럼…… "

하고 문자가 이제껏 앉았던 의자에 가 앉았다.

그러나 그가 '이 의자에 문자가 정수와 마주앉아……’라고 생각하니 문득 불쾌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져 버렸다.

정수는 흔연히 웃으며

"그래 오늘은 재미있게 놀았나?……"

하고 물었다.

형식이 마침 대답을 하려고 하는 것을 봉우가 방에서 나오다가 와락 내 달으며

"하, 잘 놀구말구…… 재미가 어찌 많든지 좀 남겨가지구 와서 자네랑 문자씨랑 좀 주구 싶데그려…… 그리구 싸움을 또 한바탕 부시구…… "

하고 소리를 높여 말을 하였다.

"싸움? 싸움이 또 웬 싸움이야?……"

하고 정수는 좀 근심스런 듯이 물었다.

봉우는 여전히 높은 소리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마침 빌 맞으면서 품천(品川) 해수욕장에서 나오느라니까 웬 왜놈들이 우리 뒬 따라오며 ㅡ 우리가 조선말로 막 지껄이긴 했댔지 ㅡ ' 지나인, 짱꼬로’ 어쩌구 그래…… 그래 비까지 맞구 골이 난 판이라 달려들어두 놈을 개(犬[견])잡듯이 두들겼지. '이놈들, 버젓한 조선 양반들더러 지 나인 짱 꼬 로라니’ 하구…… 어쨌든 그놈들 코에서 조선 사람 냄새가 물씬물씬 나게두 들 겼지…… "

"그리구?"

"그리구 나서…… 허허, 망신을 하려니까, 파수막으로 잡혀갔댔지. 순 사 놈이 무어라 구 지껄이기에 '저놈들이 우릴 보구 지나인이니 짱꼬로니 하구 모욕( 侮辱) 하길래 젊은 혈기에 싸운 것이라’구 그랬지…… 그리구 어쩌구저쩌구 하구 얼렁얼렁 얼러넘기구 와버렸지. 오늘 빈 맞었지만 맘은 시원하다. 〈'난 왜놈두 들 겨주는 게 맘에 제일 상쾌해……’"(이 말만은 우리나라 말로) 하고 자기만 마치 유쾌한 듯이 웃었다.〉

문자는 봉우의 옆으로 다가서며

"봉우씨, 봉우씨한테 참 좋은 걸 하나 드릴 게 있는데요…… "

하고 머리를 돌려 정수를 바라보며 의미있게 웃었다.

"좋은 것이요?"

하고 봉우는

"대관절 무엇입니까? 내가 보아야 좋은지 어쩐지 알 게 아니요?"

"아니에요. 지금 보여 드리면 그 좋은 가치가 반이나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구 그것이 좋단 것은 저 정수씨가 담보하시는 터이니까 요…… "

하고 또 정수를 바라보며 미소하였다.

"네, 그러면 좋다구 그럽시다. 그러면 그 좋은 것을 주실 터인데 어쩌란 말씀이요?"

"한턱을 잘 내셔야 해요…… "

"한턱? 한턱은 말구 열턱이라두 내지요. 문턱하구 내 턱하구만 해두 벌써 두 턱이나 안됩니까?"

문자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영순에게서 온 편지를 봉우에게 얼핏 내주어 버렸다 봉 우는 받아 들고 빙그레 웃으며 요리조리 만져보다 가 "응, 이것…… 우리 영순이…… 러브레터…… "

그 거동을 보고 형식은 시험하려는 듯이

"자넨 그런 좋은 걸 자네 혼자만 보려나?"

하고 봉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라. 곧 죽어두 백봉우다…… 내가 그러면 자네들 알아듣두룩 낭독을 하지…… "

하고 봉우는 쾌쾌히 말을 하고 편지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내어 펴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 편지는 석 장쯤 되는 조그마한 편지지에다 쓴 것인데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문자는 알아듣지 못하여 몹시 답답한 듯이 읽는 봉우의 입만 바라보았다. 읽어가는 동안에 봉우의 얼굴은 매우 좋지 못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 하였다.

'우리는 지금 배우는 중이니까 다른 생각은 전혀 끊어버리고 배우는데다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하겠읍니다’란 말과, 봉우더러 예배당에 착실히 다녀서 세례를 받으란 말과, 또 그동안 봉우에게 하는 편지의 항용투대로 이번에도 '자기는 이( 齒[ 치]) 를 악물고 공부를 한 뒤에 우리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다 하여야겠다’ 는 말을 잊지도 아니하고 썼었다.

정수는 듣고 나서 의자에서 몸을 돌이켜 누우며 그의 입술에는 몹시 경멸 하는듯 한 찬 민소(憫笑)가 떠올랐다. 형식도 경멸하는 듯이 "멱국 먹었네 멱국 먹어…… 그게 글쎄 그때 그 편지 답장이야?"

하고 문자가 그 편지의 내용을 몰라 답답하여 하는 것을 보고 대강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문자는 그 말을 듣고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봉우를 보며

"아주 썩 얌전하세요. 네? 그렇잖아요?"

형식은 봉우를 성화를 먹이려고

"얌전은 무엇이 얌전해? 그렇잖아요?"

형식은 봉우를 성화를 먹이려고

"얌전은 무엇이 얌전해? 그것이 모두 예술 잘못 믿은 여독(餘毒)이지. 그리구 얌전하면 정말 얌전해서 그러나? 남의 눈을 꺼려 그러지. 사실 말이지, 요새 그 신여 자란 게 새롤 신자 신여잔지 초(酸[산])처럼 시단 신여잔지 모르겠더구나 이애…… 눈꼴이 시어 볼 수가 있어야지. 성경자나 보구 찬미가깨나 부르구 하 면제 소위 신성한 생활이나 하는 줄로…… 눈을 가릅뜨구 다니며 남을 낮추 보구…… 그러구 그따위들이 방탕을 하기 시작해 봐요. 걷잡을 수가 없지. 저희 가무 얼 난체해…… 잘나고도 잘난체하는 것두 보기가 싫은데 못난 것들이 난첼 하니 어찌잔 말이야…… 저희가 무얼 좀 안단 건 모두 개대가리에 감투 씌운 셈이지. 정수 말 본으로 그것들이 모두 과도기 특산물 부스러기들이야…… "

하고 봉우를 흘끔흘끔 보았다. 봉우는 얼굴에 실망한 빛을 띠고 편지를 착착 접으며

"아니야, 얌전하긴 썩 얌전해요. 그렇지만 아직두 철을 몰라 그러나봐?……"

"철을 몰라? 이앤 어이구…… 지금 영순이 나이 열여덟이야. 그리구 그 편지에다 널더러 '세례 받으라’구 쓴걸 보구, 또 예전 편질 보아두 너한테 아주 맘이 없진 않은 것 같애. 그러니까 웬만한 계집애 같았으면 지금 연애라면 죽을 줄 살줄 모르구 달려들 때야. 그런데 그건 무어야. 도무지? 돌부처두 아니구…… 모두 그것이 예수교 중독이야. 시실 말이지 지금 교회란 게 우리나라에선 감정의 도수장이니까. 젊은 남녀가 교제하는 걸 당(唐)비상보담두 싫어하구…… 영순이두 이 애, 어려서부터 그따위 감활 받구 자라났기 때문에 그런다. 글쎄 처녀면 처녀 다운 어트모스피어가 있어야지!"

"그렇지만 영순이가 날 의심하는지두 모르지? 서가놈한테 한번 속은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두 그렇잖아…… 자기 부모가 날 신용할만큼 편지두 하구 그랬으니까…… "

그러나 형식은 그 말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이상스럽게 흥분이 되어

"또 그리구 현재 자기 위칠 변명하느라구 자기소개까지 했겠지. 무어 어때? 민족을 위해서 어쩌구 어째? 진정 그런 맘이 있거든 한두 번 썼으면 그만 이지…… 봉 우한 테 그동안 다섯 번인지 편질 했는데, 할 때마다 그 말을 꼭 잊질 않구 문안 투( 問安套) 로 쓴단 말이야. 공연히 세상이 어찌 되어가는 줄두 모르구 남이 하는 대로 엄벙덤벙 따라가면서…… 〈글쎄 민족을 사랑하겠다면서 왜 민족의 체면을 팔아먹느냔 말이야? 공불 해가지구 애국자가 되겠대나? 그러면 이 세상에 무식한 사람은 애국자 노릇두 못하나? 그리구 또 무식하면 유식한 애국자가 되두룩은 민족의 체면을 먹어두 관계칠 않은가?〉무슨 말이야 도무지…… 참말이지 구역 날 꼴이 하두 많으니까!……"

하고 영순이가 아주 얄미운 듯이 말을 하였다. 정수는 형식이가 처음에는 봉우를 성화를 먹이느라고 농말을 하던 것이 그처럼 흥분이 되어가지고 자기가 역시 모순 되는 말을 섞어 함부로 남을 욕하는 것을 보고 "아니야. 자네가 그건 아무리 농말이라두 너무 하는 거야. 남의 집 처녈 그처럼 욕해서야 될 수가 있나?……"

하고 다시 봉우를 흘끔 바라보며

"그리구 또 봉우가 너무 노엽게 생각하라구……"

하고 피식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암만 그래두 우리 영순인데…… 인제 보게, 돌아온 주일부턴 예배당에 다녀야겠네…… "

하고 허물없이 웃었다.

아! 봉우도 깊은 꿈에서 아직 방황한다. 영순이도 그 꿈속으로 끌려 들어가려 한다. 현실에서 멀리 떠나는 그 꿈 ㅡ 그 맛에 앞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끌려 간다.

17

그날 저녁이었었다. 밤은 이미 깊었으나 정수는 그의 항용 버릇으로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기장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누우며 여러 가지 공상으로 그의 머릿속은 어수선하여졌다. 옆에 누운 봉우는 보던 책을 손에서 내리 뜨리 고 불안스럽게 잠이 들었다. 정수는 일어나서 전등불을 꺼버리고 불안스럽게 잠이 들었다. 정수는 일어나서 전등불을 꺼버리고 도로 드러누웠으나 그래도 잠은 오지 아니하였다. 그의 귓속에서는 왕 하는 소리, 우르릉거리는 소리, 버스럭 거리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요란히 귀가 울므로 그처럼 고요하고 깊은 밤이었지만 조금도 조용한 듯한 기운이 없이 수많은 군중이 모여 훤화하는 속에 누웠는 듯 하였다. 정수는 다시 벌떡 일어나 모기장을 걷어치고 툇마루로 나가서 등의자에 가 드러누웠다.

앵 하는 소리를 치며 염치없이 달려드는 모기떼들은 사정없는 정수의 부챗 바람에 쫓겨가고 쫓겨가고 하였다.

변화 많은 구름이 떠돌아다니는 하늘에는 흰구름이 빵긋한 사이로 작은 별들 이하나씩 둘씩 반가운 듯이 반짝였다.

정수는 그가 항용 하는 공상을 다시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사람이지? 살아 있지? 그리고 지금 스물한 살이것다. 가만 있자. 지금부터 십 년을 지나면, 서른 살…… 그동안, 그동안 십 년이면 삼천육백쉬흔 날. 시간으론 음, 사오 이십하고 사륙에 이십사, 삼사십에 이하구, 또…… 이오는 십, 이륙 십에 이, 삼은 육하면…… 어디 보자. 팔천 아니 팔만육천쉬흔 시간인가 보다. 그러니까 내가 팔만 시간만 더 지나면 서른 살이란 말이지. 그리고 또 팔만 시간만 지나면 마흔 살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 같은 젊은 핀 다 밭아 버리고아주 교활한 생존욕(生存慾)만 남으렷다. 판에 박힌 현실생활의 종놈이 된단 말이지…… 어! 허망한 노릇이로군. 그렇지만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가 있을까? 마흔 살까지…… 그래, 가령 그때까지 산다고 해두고, 그러면 그때엔 내가 어떻게 되어가지고 있을꼬. 거지가 되어버릴려나…… 그렇잖고 아주 모진 병이 들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생을 할려나…… 또, 그렇잖으면 아주 썩 내 이상에 맞게 되어가지고 재미있게 살아갈려나. 아무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가령 재미있게 잘 살아간다더라도 나이 마흔 살이면 얼마 아니해서 죽어버릴 운명인데 재미가 있으면 얼마나 할라고…… 도리어 더 서러울걸. 아서라 아 서라, 도무지 쓸데없는 짓이다. 인생은 아무 생존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마흔에서 십 년을 또 지나면 쉬흔, 또다시 예순…… 그러면 그때엔 대가리에 가 열 없는 흰 터럭이 허렿게 나고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혀가지고 늙은이가 된단 말이지. 어이구, 그게 무어야…… 그러다가 마지막엔 죽어버린단 말이지. 내가, 인제 그렇게 되어가지곤 죽어버린단 말이지. 지금 이렇게 멀겋게 살아 있는 내가…… 그 야속히 보기 싫은 꼬라지가 되어가지곤 죽어버린단 말이야.죽어…… 죽으면 지금처럼 이런 생각도 없어지고 이 살도 모두 썩어버리고, 말도 못하고 숨도 못 쉬고…… 그저 그저 없어져버리겠지. 그리고 망측하게 생긴 뼈다 귀만이 아무것도 모르고 땅에 가 파묻혔거나 그렇잖으면 그 뼈다귀나마 가장자리로 해골 각각, 팔다리뼈 각각 굴러다니겠지. 내가 죽으면 그렇게 된단 말이야. 그런데 꼭 한번은 안 죽을 수가 없지. 죽어, 죽는단 말이야. 죽으면 난 이 세 상선 아무것도 남지 않으렷다…… 그러니까 나만 죽어지면, 나한테는 나한테 있는전 부가 없어지겠지. 저기 떠돌아다니는 구름도 저 예쁜 별들도 우주도 인생도 인생의 모든 것도…… 아! 인제 내가 장차 영겁의 무(無)에 돌아가는구나…… 내가이 세상에 생겨나지 아니하였던 과거에 내가 이 세상에선 무(無)였던 그것과 꼭같이 미래에도…… 아! 아무리 허위대도 죽음은 꼭 한번 오는구나. 삼천갑자 동방삭( 三千甲子東方朔) 이도 필경은 죽었으니까…… 그러면 죽긴 일반이지. '천년 은 살거나 만년이나 살더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 노소(老小)가 있나' 하는 노래가 과연 그럴 듯한걸…… 장자(莊子)가 제팽상 ( 濟彭殤) 이라고 한 말이 진리( 眞理) 야. 아! 인생, 인생…… 기가 막히게 짧은 동안에 한없이 고통만 큰 것이 인생…… 이렇듯한 인생으로 태어나서 살려고 허위댈 게 무어야. 좀더 산단 것은 필경은 고생을 좀더 하겠단 의미에 지나질 못하지. 아! 인생은 어찌 인생에 지나질 못하는고…… 아무 내력 없이 슬며시 이 세상엘 한번 나와서 어물어물 하다가 또 어느 겨를에 팩팩 쓰러져 죽어버리곤 다음엔 아무것도 남질 않는 것이 인생…… 굳이 남는 것이 있다 하면 대자연의 인명록(人名錄)에 성명 삼자( 姓名三子) 가 남을 뿐…… 인생이란 고따위 것들이건만 그래도 제깐에 나댄단 말이야. 낳고 살고 죽는데 아무 목적도 사명도 없는 파리 발만한 능력도 없는 것들이, 하루살이 같은 고것들이…… 요 좁쌀낱 하나만한 지구 위에 가 옴닥옴닥 모여서 그래도 고 조동아리론 ’위대'란 말을 하것다…… 그래도 고들이 담본 큰 체해. 개미(蟻[의])집만도 못한 사회, 어린애 장난 같은 과학, 구역질나는 종교, 거짓 부리는 예술, 수박 겉핥기 같은 철학, 같잖은 도덕, 십 년 묵은 대통( 煙管[ 연관]) 같은 사상…… 그래 가지곤 저희끼리 자유니 평등이니 진보니 퇴보니…… 자연 곌( 自然界[ 자연계]) 정복하느니, 진릴 찾느니, 선악이 어쩌니 미추(美醜)가 어쩌니…… 국가(國家)니 전쟁이니, 혁명이니 개조니, 영이니 육이니 해가면서 저희 끼리도 잘난 놈 못난 놈 구별을 해가지곤 색다른 놈은 다른 색다른 놈에게 텃셀 하고…… 그래서 서로 잡아먹질 못해서 으르릉거리고…… 어이구 구역난다. 그런데 난 어쩌고. 그렇지만 나도 그중에 하나야. 조금도 다름없는…… 이 우주의 무궁대에 비해 보면 먼지 한낱보다도 크다고 할 수가 없는 요 몸뚱이…… 우주의 무궁한 시간에 비하면 짹하는 일초 시각보다 그다지 길다고 할 수도 없는 육십 년쯤 되는 생명…… 그 몸 그 생명을 가지고 요 기가 막히고 구역이 나는 인생 사회에 가 뒤섞여서 나 역시 어쩌구어쩌구 나댄단 말이야. 어허허…… 이 것 이 무어야 도무지. 그렇지만 아무래도 살아 있는 동안엔 '생활'이란 걸 면할 수가 없는데…… 생활, 생활, 인생생활…… 현실, 아! 현실…… 어라 이놈의 세상이 귀찮다. 그런데 문자, 고게 왜 그럴까…… 문자, 내가 문자 고걸 사랑해서 그러나? 아닌 건 아니야. 아닌 건 아니라 썩 육감적이야. 영자완 같잖아. 어쩐 지영자 한텐 그렇게 못하겠는데…… 말하자면 영잔 신성한 듯도 해…… 영자, 영자, 아! 영자…… 아니다 아니다. 영자도 인생이다. 인생은 인생이 인생인 것을 모른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다. 아! 나는, 나는……’ 마침 이때에 방에서 샛문이 열리고 눈이 부신 전등불이 확 몰려나오며 문자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문자는 "이 방엔 왜 불을 껐나?" 하고 전등을 찾아 불을 확 키고 곤한 잠이 가득 든 눈을 주먹으로 비비며 비틀비 틀하면서 툇마루로 걸어나갔다. 그는 잠을 자다가 변소에 가려고 함이었었다. 나가다가 등의자에 가 사람이 누웠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에그머니, 저게 누구야…… "하고 소리를 쳤다.

"놀라지 마시우. 저 올 시다…… "하고 정수는 음울하게 대답을 하고 일어 앉아 문자를 바라보았다.

문자는 옷을 입지 아니하고 다만 도화색 도는 얇은 고시마기(일본녀가 아랫 도리에 두르는 것) 하나만으로 아랫도리만 가리고 나왔었다. 그러므로 거진 나체( 裸體) 나 다름없는 문자를 정수는 볼 수가 있었다.

운치 있게 흐트러진 머리칼, 잠이 가득 든 두 눈, 그것을 비비는 두 주먹, 우유 빛같이 부옇고 오동포동한 웃도리, 잘 발육된 앞가슴에 예쁜 곡선(曲線)을 그린 불쑥 내민 두 젖통, 통통한 두 팔이 닭의알같이 곱게 내려붙은 좁으장한 두 어깨 ㅡ 의 모든 것이 정수로 하여금 체모도 없이 얼빠진 사람처럼 뻔하고 바라보게하였다.

문자는 정수의 말소리를 알아듣고 꺄웃이 한번 굽어다 보더니

"에그머니, 이걸 어쩌나…… "하고 얼핏 자기 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정수는 손에 들었던 보물이나 놓친 듯이 섭섭하여 문자의 뒤만 바라다 보았다.

문자는 부끄런 마음에 전등을 얼핏 꺼버리고 모기장 속으로 들어가서 소피를 억지로 참고 곤히 자는 형식의 품에다 얼굴을 푹 파묻었다.

이렇게 한참이나 있다가 그는 다시 일어나 전등을 켜고 옷을 찾아 입은 뒤에 정수가 어찌하고 있나 보려는 호기심으로, 또 정수와 이야기하는 동안에 긴장 되는 맛을 좀 보려고 변소에 가는 척하고 다시 툇마루로 나갔다. 문자는 정수의 옆 으 로 가까이 가며 "정수 씬 왜 잠도 안 주무시고 그러세요? 모기가 이렇게 엉켜지르는데…… 아마 무슨 번민이 계시지요?"

하고 해쪽이 그 '피상의 웃음’을 웃었다.

정수는 열병 앓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서 얼굴에는 그윽한 욕망을 띠고 말 없이 문자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보다가 정수는 문자를 껴안을 듯이 두 팔이 벌어지는 줄 모르게 반이나 벌어지고 그의 허리는 앞으로 내 숙여졌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주저하는 듯이 그 모양으로 서서 문자를 바라보는 눈과 벌린 입에 '계면쩍은 미소’가 정수 자신도 모르게 떠올랐다.

문자는 거짓 위협하는 듯이 미소가 떠오르는 눈으로 정수를 암상스럽게 홉 떠보며 그래도 '네 맘대로 해라’하는 듯이 허리를 뒤로 비스듬히 젖혀 가슴을 내 밀고 고개를 꺄웃꺄웃하며 해쪽이 웃는 그의 입술에는 은근한 춘정(春情)이 그 윽 히 떠올랐다.

정수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 하였는지

' 하마 터 라면’ 하는 그 찰나에 돌연히 두 팔을 맥없이 내리뜨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모기장 속에 드러 누 우 며 "허, 내가 이게 무슨 짓이야……"

하고 죽은 듯이 고요히 있었다.

문자는 두 번째 정수에게 이러한 일을 당함에 그 변덕지덕하는 것이 노 엽기 도하고 또 자기를 놀리느라고 그러하는 듯도 하여 마음에 약간 섭섭한 생각도 나고 부끄럽 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문자가 정수에게 움직여지는 변치 못 할 힘에게 덮여 눌리고 말았다.

정수는 혼자 속으로 '에라, 내일 내가 여길 떠나야지 그렇잖으면 큰일이 나겠다. 인젠 이번 학기도 며칠이 남질 않았으니까. 그러면 내일 곧 길을 떠나는 게 좋겠군……’ 하고 집에 돌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 이튿날 정수는 학교에도 가지 아니하고 귀국할 짐을 챙겼다.

봉우는 금년 봄에 결석한 것을 보충할 양으로 그대로 동경에 머물러 하기 강습을 할 작정이었고 형식은 문자를 데리고 귀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남겨둘 수도 없었으므로 그대로 남아 있을 작정이었다.

남아 있을 세 사람 ㅡ 봉우, 형식, 문자는 이번 하기방학에 정수는 응당 귀국 할줄이야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그처럼 일찌기 귀국할 줄은 몰랐으므로 매우 섭섭히 여겨 서로 권유하여 가며 며칠 더 머무르도록 말을 하였다.

정수는 그들의 청을 듣는 척하고 하루 이틀 나갔다. 그러나 사실 말하면 그들이 권하는 말을 듣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는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아니하여 그러 한 것이다. 그는 영자도 영자려니와 문자와도 갈리기가 진정으로 싫었다.

문자도 역시 문자라, 세 사람 중에 제일 열성으로 정수를 말리며 한달 동안만 더 있으라고 간청을 하였다.

정수는 이번 길이 영자나 문자와 영영 이별이라는 것을 아무 근거도 없이 본능적으로 의식하였다. 그는 그 하루 이틀 미뤄 나가는 동안에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졸이고 설뚱거렸다.

아! 이 어린 꿈 ㅡ 면할 수 없는 꿈 ㅡ 언제나 깨려나. 아니, 아니다. 차라리 그녀로 하여금 하루라도 더디게 그 꿈을 깨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행복이다. 하루라도 더디게 현실의 비애를 맛보게 하는 것이 적선(積善)이겠다.

18

정수는 동무와 문자의 말리는 청도 이제는 더 듣지 아니하고 로맨스의 회상이 깊은 동경을 등지고 때와 장소를 이별하게 되었다.

정수는 동경역까지 나오면서도 속마음으로 '도로 돌아가서 하룻밤 더 지내고 내일 떠났으면’하는 생각도 간절하였으나 그것은 다만 생각뿐이지 실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정수의 아무 말 없이 섰는 쓸쓸한 얼굴과 남은 세 사람의 추렷한 기운은 방금 동경을 떠나 하관(下關)으로 달아나려 하는 삼등급행(三等急行)의 승객(乘客) 전송 객들이 훤화와 혼잡을 이루는 플랫폼의 공기를 내리누르는 듯하였다.

정수는 맨 마지막 객차 한편 구석에 자리를 잡아놓고 다시 나와 세 사람과 작별 하는 인사를 시름없이 하고 있는 동안에 시계바늘은 네시 오십 칠분을 가리켰다.

발차 시간은 삼 분밖에 남지 아니하였다. 정수는 아직도 차에 오르려 하지를 아니하고 지껄이며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군중과 시계바늘을 번갈아 치어다보며 누구 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영자는 왔다.

시계바늘이 네시 오십팔분을 가리킬 적에 얼굴이 해쓱하여 가지고 가쁜 숨을 활활 쉬며 눈을 이리저리 내두르는 영자의 초췌한 형상이 정수의 앞에 나타났다.

영자는 죽을 기를 쓰고 작은 발을 자주 옮겨 달려오며 정수를 찾으려고 눈을 돌리다가 정수와 눈이 마주치자 그만 그 자리에 ㅡ 정수의 네댓 걸음 앞에 ㅡ 무료한 듯이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 없이 멈칫 서서 머리를 숙이고 가쁜 숨을 자주 내쉬었다.

영자는 나이는 열일곱에 났었으나 그의 얼굴은 그보다도 훨씬 더 어리어 보였다. 아직 열네댓 난 어린 계집아이처럼 애티가 나타났다.

그는 과연 미인이었었다.

사랑을 잃음으로써 심신이 파리하여 가지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옛애인을 작별 하려 왔으나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무료히 섰는 그 모양이야 말로 갓 핀 매화가 모진 추위를 만나 시들어지려 하는 듯이 애처롭고 깊은 설움이 솟아오르는 듯 하였다.

남은 세 사람은 그가 영자인 줄을 짐작하였는지 입이 떡 벌어지며 다 각기 속마음으로 '저렇듯 한 미인을……’하지 아니치…… (이하 부분은 落張[ 낙장] 되었다 ─ 編輯者[ 편집자]) < 文學思想[ 문학사상] 11 ․ 12호, 1973. 8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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