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문학

채만식 과도기 [상]

by 역달1 2022. 7. 28.
반응형

過 渡 期 [ 과도기]

1

'…… 안쿠…… 아이구 이걸 어쩌면 졸까…… 저년을 목을 바짝 눌러 죽여 버릴까 보다…… 그리곤 감쪽같이 씻어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차마 내 손으로 죽일 수가 있어야지…… 차라리 병이나 들어 저절로 죽어나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저도 고생을 면하고 나도 그 덕분에 한평생 잘 살련만…… 그렇지만 저 따위가 곧 죽지도 않아…… 눈치 먹는 아이 오래 산단 푼 수로한 오백 살이나 살 게야. 아이구, 이걸 그저…… 내가 인제 어린 놈이 이것이 무슨 죄야…… 이것이 모두 뉘 잘못이야?’ 이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짜증이 나고 그를 따라 자기의 안해가 얄미워 견딜수가 없었다.

밤은 이미 훨씬 깊었고 창 밖에서는 거친 바람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때는 아직 삼월 초생이라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바람끝이 몹시 싸늘하였다. 방안은 등불을 꺼버렸으므로 굴속같이 컴컴하여 서로서로의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봉우는 찬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느라고 덮었던 이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똘똘 말아 덮었다. 한즉, 한참만에 방바닥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다시 찬 이불 속으로, 스며올라와 그는 포근한 쾌감을 느꼈다. 이 포근포근한 쾌감에 싸인 그의 육체는 다시 자기의 아내인 이성의 불안스러운 숨소리, 그윽한 살 냄새, 더우기 머리털에서 우러나는 기름 냄새의 자극을 받아 산뜻한 성욕의 충동을 일으켰다.

그 숨소리, 그 살냄새, 그 머리털에서 우러나는 기름냄새 ─ 는 모두 봉우가 예전에 자기 안해에게서 육욕을 일으키던 꼭 그것이었으므로 봉우 자신은 그것을 설령 의식치 못한다 하더라도 제삼자의 눈으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어 그리운 감상을 머금은 듯한 것이었었다.

봉우는 덥석 달려들어 자기 안해를 껴안고, 밉고 싫기는 하나마 눈을 질끈 감고 춘 정을 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욕망을 견뎌내느라고 몸을 비비 틀며 혼자 속으로 자기를 나무라고 이혼할 생각을 또 하기 시작하였다.

'어 ! 내가 이래선 안될걸…… 내가 이걸 이 자리서 이겨내야지, 만일 그렇지못하면 이혼을 한다구 말할 면목이 있나. 이번엔 꼭 이혼을 해버릴 작정으로 얼마 아니 되는 휴가에 동경서 집엘 왔으면서…… 그래그래…… 내가 참아야만해…… 그리고 이혼을 꼭 해버려야지. 그렇지만 무슨 조건이 있어야지…… 물론 협의 론 못할 게구, 그러면 재판을 해야 할 터이니까 상당한 조건이 없인 안될 건데. 그리고 또 집안에서도 생성화만 대고 들어먹어 주질 않을 게야. 아이구…… 이 걸 글쎄 어쩌나…… ’ 이처럼 그는 생각을 하며 그 욕망을 억제하느라고 '하마터면’ 하는 위태로운 적도 몇 번을 겪고 기어코 그는 그 꾀임을 이겨내다가 필경은 잠이 슬며시 들어 버렸다.

봉우는 지금부터 아홉 해 전, 즉 그가 열네 살이고 그의 안해가 열다섯살 나던 해에 부모가 시키는 대로 아무 철도 없이 장가를 든 것이다.

그러나 봉우는 차차 나이 들어감을 따라 그 건조하고 멋없는 자기 아내를 싫어하고 괄시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는 반면으로 그는 '나이도 자기보다는 훨씬 더 어리고 신지식이 넉넉하고 아양이 족족 흐르는 활발스럽고도 온순한 미인’을 일상 그리워하였다.

봉우는 열다섯 살 나던 해로부터 자기 집에서 나가 군산으로 가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중학을 마친 뒤에 일본 동경으로 갔으므로 지금껏 객지 로만 돌아다니고 별로 자기 본집에 있은 적이 없었다. 다만 학교에 휴가가 있는 틈을 타서 일 년에 몇 번씩, 그렇지 않으면 일 년에 한 번쯤 집에를 다녀갈 뿐이었었다.

봉우가 자기 아내에게 쌀쌀하게 구는 태도는 그가 집에 다니러 올 때마다 더하여 갔다.

그리하여 지금 와서는 아주 길에서 서로 보고 지나가는 행인을 대하는 것이나 진배 없고 미워하기는 원수보다도 더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봉우가 그 의 아내를 지금까지 처녀로 온전히 두어온 것은 아니었다.

봉우는 성욕가(性慾家)였었다. 그러므로 그가 열일고여덟 나던 해로부터 스물하나 둘까지 이르는 동안, 즉 그의 춘기가 발동되는 동안에 일어나는 성욕의 충 동 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고향에 다니러 올때마다 자기 안해를 미워는 하면서, 싫어는 하면서 그래도 하는 수 없이 그 타오르는 성욕의 불길을 자기 안해에게 풀어왔다.

그러나 봉우는 그 순간만이라도 자기 안해에게 대하여 조그마한 애착심도 생기지 아니하였다. 도리어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밉고 싫은 감정이 전보다 한층 더할 따름이었었다.

다시 말할 것 없이 그의 안해는 그에게 대하여 성욕의 기능을 가진 기계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기계나 같았으면 애착심은 없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싫어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봉우의 안해는 아주 순박한 시골 부인이었다. 키는 봉우보다도 ㅡ 봉우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ㅡ 더 커 보이고 몸과 얼굴은 썩 부대하여서 보기에 매우 복 성스러웠다. 그러므로 봉우가 자기 친구나 누구에게 자기 안해의 말을 하려면 ' 뚱뚱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사실 밉고 보기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의 성질은 매우 온순하고 다정하여 봉우의 집안에서는 봉우를 빼놓은 외에 누구나 한 사람도 그를 귀여워 아니하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동리 사람들도 모두 '남편에게 그다지 괄시를 받으면서도 아무 티색이 없이 시집살이를 잘하는 것이 참말 얌전하다’고 칭찬을 하고 널리 소문이 퍼졌었다.

그러나 그러한 장점을 그가 가지고 아니 가진 것이 그의 남편인 봉우가 그에게 대한 냉랭한 태도를 낫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처님 같은 봉우의 아내일망정 가끔 그 동서(봉우의 형수)와 마주 앉으면 하는 말이 "형님 같은 이는 참 좋겠소…… 부부간에 정이 깊어서 아들두 낳구 딸두 낳구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가시니 참으루 부럽소…… 나는 세상에 무슨 죄가 그 리두 많아서 이 모양이라오? 무엇을 바라고 세상에 살 재미가 있어야지요…… 차라리 날 같은 년은 진즉 죽어나 버렸으면 좋으련만 모진 목숨이 잘 죽지두 않구…… 지금은 그래두 부모두 계시구 형님두 계시니까 그렁저렁 아모데나 의질 하구 살지만 인제 좀 있다가 부모두 돌아가시구 형님하구두 흩어지면 그땐 누굴 믿구 어델 가 살아요! 그러나마 자식이나 하나 생겼드라면 그것이나 믿구 살걸……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왕방울같이 큼직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한숨을 거듭 쉬었다.

이처럼 서러워하기를 작년 올로 들어서 갑자기 더하였다.

그것은 봉우가 작년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을 적에 자기에게 대한 태도가 말 할수 없이 더 참혹하여진 까닭이었다.

과연 봉우는 작년 여름에 돌아왔을 적에 자기 안해가 지어 주는 옷은 입지도 아니하고 박박 잡아 찢어버리며 그가 가져다 주는 밥상은 박차 버리고 밥을 아니 먹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안해가 자는 안방에는 발걸음도 들여놓지 아니하고 날마다 자기 모친을 조르면서 자기 안해를 그 친정으로 쫓아보내 버리라고 성화를 대었다.

이번 봄방학에 봉우가 갑자기 돌아온 것을 보고 봉우 모친은 지성스럽게 봉 우 가 밥을 먹는 밥상머리에 가 앉아 달래듯이 말을 일렀다.

"이애 개똥(개똥이는 봉우의 어렸을 때의 이름)아! 너두 인젠 그 공분지 무엔 지 좀 제발 그만해 두구 살림살이 좀 안해 보련?…… 넌 그저 한평생 공부만 하 기로 작정이니? 그리구 너 왜 글쎄 네 아내한테 그리 몹시 구니? 그리질 말구 좀곰살갑게 굴어보렴…… 다른 사람 같으면 이애 벌써 사위라두 며누리라두 네 낫세에 보았겠다…… 내가 답답하구 속이 상해서 못살겠구나! 그애(봉우 아내) 가무 얼 조금치나 잘못하구 그리는 게 있어야 미월 하든지 쫓아보내든지 그 리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런 안해만 얻었으면 참말이지 세상 살기 근심도 없겠다…… 제발 덕분 그리지 좀 말구…… 오늘 저녁엘랑은 곰살갑게 말두 해주구 잘 풀어 일르기두 하구 그래라…… 그앤들 맘에 좋겠니? 내 안이 남의 안이란 말처럼 너두 좀 생각을 해보렴…… 오늘두 네가 오든 멀로 좋잖은 낯으로 절 흘겨보구 그리니까 제 방으루 들어가서 울기만 하더구나…… 밥두 먹질 않구…… 네가 그리니까 난 인제 죽어두 눈을 감구 죽질 못하겠다…… "

그러나 봉우는 이 말을 듣고 자기 모친을 한번 흘긋 치어다보더니 다시 밥을 퍽퍽 퍼먹으며 업수이여기듯이 말하였다.

"그러니까 왜 어린 자식을 장간 들이랍디까? 말을 아니하려니까 말이지…… 아이구, 참……어머니 아부지가 절 장가 일찍 들여주셨기 때문에 남의 자식( 봉 우의 안해) 이나 내 자식 (봉우)이나 신세 망쳐 주신 줄은 모르시우? 어 !…… 답답해…… ""어이구 이애야…… "하고 봉우 모친은 봉우의 하는 말에 기가 막히는 듯이 말을 하였다.

"어이구 이애야…… 사람마다 자식 낳아가지구 남혼여가(男婚女嫁)시켜서 저희 끼리 오손도손 잘 살구 자손 많이 퍼쳐서 번족하게 되는 걸 보는 게 늙어선 제일 큰 재미란다…… 그래 넌 부모 생전에 장가 아니 들구 총각으로 한평생 살렸던?"

"허허…… 어머닌 참 답답한 말씀두 다 하시지…… 그래 제가 지금 오손도손 살어 갑니까? 그리구 어머니나 아부지께서 안 여워 주셨으면 한 평생 장간 못 갈줄 아십니다그려? 어이구, 어머닌 참 …… 지금 버젓하게 장갈 가구 싶어두 어머니 아버지께서 미리서 장갈 그 따위로 들여주셨기 때문에 저 혼자 지금 속으로 꿍꿍 앓기만 해요…… 아시우? 어머니, 그리구 또 부모가 재미있어하는 노릇이면 자식을 아무렇게라두 해서 재미만 보면 그만이겠읍니다그려? 자식은 어찌 되던…… 그리구 자식은 아무 말두 못하구 보모가 시키는 대루만 따라가구?" 하고 봉우는 경멸하듯이 자기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렇길 이르겠니?……" 라고 봉우 모친은 퀄퀄히 대답을 하였다.

"그렇길 이르겠니 ?…… 부모의 뜻을 거슬리잖는 게 효자 아니니?"

"네, 그래요 그러면 어머니…… 부모가 자식을 칼이나 총으로 놓아죽이는 것이 재미 라면 자식을 죽이기라두 하겠읍니다그려? 글쎄 말씀을 마세요…… 제가 조곤조곤 말씀을 해 드리려두 어머닌 제가 하는 말을 깨닫지 못하실 게니까 말씀을 아니 해요…… 어머니두 그만해 두세요…… ""어느 몹쓸 어미아비가 자식을 죽인다던?…… 널 장가들인 것두 다 널 위해 그런 게지. 어미아빈 다 너희 잘 되라구 그랬건만 너흰 그 공두 모르구 그러는구나…… "라고 봉우 모친은 봉우의 하는 말이 노여운 듯이 풀이 죽어가지고 말을 하였다.

"글쎄 어머니…… 그만 좀 해두세요. 참 답답해 못견디겠쉬다."

"답답이나 무에나 난 모르겠다…… 네 안해한테 그리 몹시 굴지나 말아라…… "하고 봉우 모친은 일어섰다.

"어머니두 그런 걱정은 마시우…… 내가 저한테 몹시 굴건 다른 놈한테루 시집이라 두 가서 제 맘대루 살잖구 왜 육신이 멀건 게 구구하게 내 집에 들어 붙어서 제 고생하구 나까지 속상하게 굴어 ! 못생긴 것이 못생긴 구실을 하느라구 그 리나? 어머니! 아따 그렇잖아두 이번엔 꼭 조철해버릴랴구, 그 일 때문에 왔으니까 염렬 마시우…… 오늘 저녁에 말이나 잘 일러서 다른 곳으로 가서 살게 하겠 쉬다…… "봉 우 모친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말없이 금시에 울기라도 할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밖으로 나아갔다. 봉우는 혼자 속 맘으로 ' 오늘 저녁 어디 말이나 좀 해보아야지…… 될 수만 있으면 협의로 하는 게 좋으니까......’ 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날 밤에 자기 안해를 데리고 앉아 이혼에 대하여 맘먹은 말을 하여 보려고 안해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마주 앉아 말을 하려고 한 즉 무어라고 말을 꺼내야 좋을지, 또 그동안 않던 말을 섬뻑 하기가 어째 계면 쩍은 듯하여서 여러 번 망설이다 필경 말을 하지 못하고 딴 생각만 하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혼에 대하여 혹 다른 필요한 말을 봉우가 자기 안해에게 말 하려다가 그만 못하기는 이번뿐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렇듯한 일이 가끔 있었다.

또한 봉우의 아내는 봉우 말대로 하면 '무식장이’ 이었으므로 봉우의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터이었다. 말하자면 그저 우리 나라 농촌에 파묻힌 소위 '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 부인’에 곡 알맞은 형전(型典)이었다.

2

봉우는 갑자기 방 윗목에서 요란히 나는 소리에 겨우 들었던 잠이 깜짝 놀라 깨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 웃목에서는 퉁탕거리는 소리, 버스럭거리는 소리, 거친 숨소리에 야단법석이 일어났으나 봉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봉우는 속맘으로 '필경 이 방에 도적놈이 들어왔구나’ 생각을 하고 두려운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방바닥을 쓱쓱 더듬어 성냥을 찾았다.

요란한 소리는 끊이지 아니하고 봉우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그는 성냥을 겨우 찾아 한꺼번에 여남은 낱이나 잡고 확 그어대고 '웬놈이냐’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 요란한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봉우는 한번 더 두려움에 놀랐다.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가슴은 말 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냥불이 켜지자 방 웃목에는 봉우가 상상한 도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자기 안해가 귀신같이 무섭고 흉악한 모양을 하고 우뚝 섰었다.

그 모양이야말로 참 몸서리가 나도록 끔찍하였다. 얼굴은 양촛빛같이 해쓱하고 혓바닥을 세 치나 빼어 깨문 입에서는 붉은 피와 게거품이 질질 흘러 빡빡 찢어 발긴 저고리와 치마에 붉은 핏물을 들이고 그 검고 기다란 탐진 머리채는 얼굴로 어깨 위로 앞가슴으로 풀어 흩뜨린 채 흴쭉한 눈으로 봉우를 바라보는 그 형상 이성냥 불에 훤히 나타났다가 불이 사라짐을 따라 그만 암흑 속으로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에 봉우의 머릿속에는 '오…… 저년이 나를 죽이려고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일어나 성냥불이 사라지자 '악’ 소리를 치고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야단 소리에 단잠이 곤히 든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잠을 깨어 불을 켜가지고 모여들었다.

맨먼저 온 사람은 봉우 모친이었다. 봉우 모친은 촛불을 켜가지고 지벅지벅 오면서 생각 밖에 침착한 말로 봉우를 보고 '조용해라 조용해…… 그리 요란히 굴지 말구’란 말을 이르고 봉우가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봉우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다만 뜰팡에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서 남이 하는 거동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안에서는 다시 쿵 소리가 나며 봉우의 안해는 방바닥에 가 넘어져 기절을 하였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달려들어 봉우 안해를 아랫목으로 옮겨 뉘고 일변 수족을 주무르느니 일변 찬물을 먹이느니 하여 한참이나 급히 나대다가 겨우 정신이 깨 어났다. 집안 사람들은 겨우 마음을 놓고 모두 밖으로 나오고 봉우 안해는 감았던 눈을 힘없이 한번 떠보더니 몹시도 부끄런 듯 해쓱한 얼굴에 핏기운이 확 몰려 오르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한두 줄기 조르륵 흘러내렸다.

봉우 모친은 맨나중에 밖으로 나와 봉우를 찾느라고 컴컴한 곳을 굽어다보며 불렀다.

"이애 개똥아, 개똥아…… 어데 갔니? 어서 오너라, 어서…… 인젠 관계치 않으니 어서 들와 자요."

봉우는 그제야 자기 모친 앞으로 다가나오며 볼메어진 소리로 볼품 사납게 말을하였다.

"아 글쎄 그년이 절 죽이려구 그랬는데 그래요!" 라고 봉우는 말을 하면서 자기 안해가 자기를 죽이려고 그 흉악한 거동을 하고있던 일을 문득 생각하니 다시 화가 무럭무럭 치달아 숨을 식식거리며 자기 안해가 누웠는 방안을 흘겨보았다.

봉우 모친은 봉우의 하는 말이 놀랍기도 하고 또 방에 누웠는 봉우의 안해가 듣고 오직 섭섭하여하랴 생각하고 야속스러운 듯이 말을 하였다.

"이앤 공연히 속두 모르구 그리더라…… 죽이긴 누가 누굴 죽여…… 제 본 병으로 그리지…… 그런 흉한 말은, 이애 입밖에 내지두 마라."

"본병?" 하고 이번에는 봉우가 놀라운 듯이

"본병 ? 응응응…… 그래요…… 옳지, 옳아…… "하고 그의 입술에는 경멸하는 빛이 떠오르더니

"흥, 본병으로 그린다…… 미치광이 ? 지랄병이란 말씀이지요 ? 흥 !제 신세두 딱 은 하지…… "라고 아주 냉랭하게 조소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속맘으로 자기가 오래 두고 기다리던, 이혼하기에 썩 알맞은 조건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다시 메어지르는 말소리로

"그리면 지금 당장에 제 친정으로 쫓아보내요…… 인젠 옥황상제가 말려두 전 듣질 않을 터니까. 왜 그리구 진즉 저한텐 그런 말두 안해 주었어요…… 진작 알았드라면 벌써 전 쫓아보냈지 지금껏 우리 집에 두질 않어요. 어서 지금 당장에 쫓아 보내요…… 자식 잘 되라구 여워 주신 게 지랄장이 계집? 어서 얼핏 쫓아 보내요……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봉우 모친은 더욱 그 며느리에게 미안쩍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봉우를 나무라듯 달래듯 말을 하였다.

"이애 넌 왜 그다지두 자발적게 구니 ? 보내긴 이 밤에 어델 보내, 글쎄…… 넌 십 년이나 공부했다는 게 안해 쫓아내기 어미아비 성화 먹이기 그따위 공부 했니?" 하고 다시 말을 낮추어 "하긴 그애(봉우 안해)가 시집인지 무엔지 오던 그 이듬해부터 그 증세가 생겨가지군 그동안 줄곧 일 년에 몇 차례씩 야단이 났드란다…… 약인들 수월히 먹이구 의원인들 한두 사람만 뵈었니 ? 그래두 낫질 않구 점점 더해 가는 걸 집안에선 들 어쩌니? 그렇다구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가 그렇잖아두 너희끼리 금슬이 좋지 못한데다가 그 일을 어쩌라구…… 그렇지만 인젠 하는 수 없다…… 너두 알구 그랬으니까 내일 날이 밝거든 너희 아부지하구 의논해서 제 친정으로 보내든지 할 게니까 어서 들어가 잠이나 자거라…… 자, 어서 들어가요…… 자리옷만 입고치운 데 가서서 저래서 감기 들겠다…… "하고 봉우를 달래었다.

봉우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사랑방으로 나가버렸다. 봉우는 사랑방으로 나가 잠을 자려고 하였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아니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물밀 듯이 일어났다.

ㅡ 뜻밖에 놀라던 일…… 진저리가 나게 무서운 자기 안해의 그 형상…… 그러나 인젠 그만하면 이혼을 할 수가 있다는 생각…… 이혼을 한 뒤에 자기가 자나깨나 속맘으로 상상하던 그 아리따운 안해에게 다시 장가를 들 일…… 학교를 마치고 나서 돈을 어쨌든지 많이 좀 모을 일…… 삼층 양옥…… 피아노, 별장, 서서( 瑞西) 나 이태리로의 여행, 사회사업, 동포 구제, 사회에서 자기의 높은 명예…… 이처럼 봉우는 마지막에 가서는 재미가 꿀 같은 앞길의 '공상’을 하고 있었다.

봉우의 모친은 봉우가 나가는 것을 보고 병인을 혼자 둘 수가 없어 다시 봉 우의 안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이제껏 봉우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눈물만 흘리는 그 며느리 옆에 가 조용히 앉아 머리도 짚어 주고 자애가 깊은 눈으로 가끔 그 애처로운 형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밤은 훨씬 더 깊어서 거의 첫닭이 울 때나 되어가고 불던 바람도 그만, 근처 사방이 모두 죽은 듯이 고요하여졌다. 방안에는 졸음이 오는 듯한 등잔불이 끄느 름하게 비쳐 있고 두 사람의 숨소리는 번갈아 색색거렸다.

봉우의 아내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웠으니, 그의 설움은 무궁히 깊어 흐르는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그는 곰곰 생각을 하였다.

'아! 모진 병…… 하필 남편 앞에서…… 다른 사람의 부부와는 달리 허물이 더 많은 남편 앞에서 내가 그 부끄런 꼴을 보이다니! 그뿐인가…… 내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고? 아이고! 내가 이것이 무슨 죄다짐인가? 나를 쫓아보낸다고? 나를…… 에라 인젠 꼭 죽어버리는 수밖에…… 내가 이 위에 더 살면 무슨 그다지 끔 직한 재미가 있을라고? 가면 갈수로 고생뿐이지…… 인젠 필경 내가 지랄장이라고, 자길 죽이려고 그랬다고 모함을 잡아가지고 쫓아보내기가지 하려고 드니! 세상에 이런 원통한 일이 어데 있을까…… 진즉 맘먹었을 적에 죽어 버렸더라면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아니하였을걸…… 얼굴이나 한번 더 보고 죽으렸던 것이 필경은 이 지경을 당했구나. 에라, 어서 죽어버리겠다. 그렇지만 기왕 오늘 저녁이면 죽을 몸이니 그때 첨 장가들던 때처럼 오순도순 이야기나 서로 앉아 한번 더해 주었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구면…… 에라, 그것도 쓸데없는 생각이지. 오순도순 정답게 이야기할 사람이면 나한테 그리 몹시 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죽는 게 제일이다. 나 같은 년은 죽어 없어지면 그때엔 어질고 착한 안해 얻어서 재미있게 잘 살겠지. 아이고 ! 이다지도 모질고 야속한 세상에 난 왜 났는가?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 나서 잘들도 살더라만 나는 전생에 무슨 업원(業冤)이 그 리도 깊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설움을 받는가 ? 어려선 초독한 계모 손에서 눈물을 받아먹고 자라다시피 자라다가, 겨우 시집살일 한다는 게 모진 병을 얻어 들인데다가 가장(男便[남편])조차 이리 구박을 주니, 이 위에 더 살면 인젠 죽기보다도 더한 욕을 볼 테니…… 나도 죽은 뒤에 저생에 가선 다신 계집이 되지 말고 버젓한 사내가 되어 이생에서 이 서러운 고생하던 일을 일러가며 잘 살아야지…… 아! 그렇지만 지금 죽긴 참으로 원통하고 섧다 ! 남은 한평생을 잘 살다가 제명에 죽기도 싫어하는데 난 좋은 때 눈물 아니면 한숨으로 지내다가 필경은 이 청춘에 자결을 하다니 ! 인제 한번 죽어지면 난 이 세상에선 그만이지…… 섬 거적에 둘둘 말아 아무데나 꿍꿍 파묻어버리곤 제사날이 돌아와야 찬물 한 그릇 떠놓아 줄 사람도 없으니, 세상에 이다지 야박한 신세도 또 있을까? 아! 서럽고 원통하다…… 아무리 밉고 싫어도 쫓아내지나 말았으면 죽은 목숨으로 알고 한평생 이 집에서 종살이라도 하련만…… 장간 열 번이라도 다시 가고 첩이라도 얻어 살잖고. 첩을 얻건 장갈 다시 가건 내 터수에 무슨 강짜까지 할라고? 에라 그 꼴을 보고 내가 잘 살 건 또 무어야…… 어! 세상도 참 모질고 야속하다. 죽어야지…… 죽어도 이 집에서 죽어야 죽은 귀신이라도 옳은 귀신 노릇을 하지……’ 생각 하니 소름이 쪽쪽 끼쳤다.

생각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힘없는 팔을 짚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눈물이 어리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인제는 자기는 죽느니라 생각을 하고 가뜩이나 설움이 가슴에 복받친데다가 평소에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던 그 시 어머니의 인자스러운 얼굴을 한번 바라보니 뭉쳤던 설움이 억제할 수도 없이 터져 올라와 그만 그 시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머니 이이!…… 으으…… 으으…… "

하며 흑흑 느껴가며 애처로이 울었다.

시어머니는 그런 줄 저런 줄, 며느리의 깊은 설움은 알지 못하여도 다만 불쌍한 그 정경을 보고 안스러운 마음이 극도에 다다라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오냐 오냐. 우지 말아…… 그것두 다 네 팔자가 사나운 탓이다. 이제 약도 더 먹고 맘을 편히 가지면 곧 낫느니라…… "하고 곰살갑게 달랬다.

봉우의 안해는 한참이나 울다가 겨우 일어나 팅팅 부은 눈을 치맛자락으로 씻으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봉우의 모친은 그 거동을 보고 깜짝 놀라 마주 일어서며 "어델 가니 ? 넘어질려 구…… "하고 팔을 벌려 비틀비틀하는 그 며느리를 붙들어주려 하였다.

봉우의 안해는 좀 머뭇머뭇 하다가

"뒷간에 가요…… "하고 시어머니가 따라올까 염려를 하여 없는 힘을 내어서 몸을 바로잡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봉우 모친은 어찌할 줄을 몰라 다만 근심스러운 눈으로 그 뒤를 바라볼 뿐이었다.

봉우 안해는 힘빠진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예전부터 잘 간수하여 두었던 양잿물 그릇을 찾아가지고 잠깐 서서 망설이다가 도로 나와서 어린아이들만 누워 자는 큰방으로 들어갔다.

큰방으로 들어가서 웃목에 있는 사그라져 가는 화롯불에다 꽁꽁 굳은 양잿물을 녹이면서 화로 옆에 앉아, 자기가 이제 이것을 먹고 죽어버리리란 생각을 하니 다시 설움이 복받쳐 돋는 눈물이 마른 재에 무심히 구멍을 뚫었다.

한참만에 겨우 마시기 알맞도록 녹은 것을 보고 일어서서 방안을 둘러보다가 아랫목에서 색색 자는 어린 조카 병길(柄吉)의 귀여운 얼굴에 그는 눈이 띄었다.

그는 아랫목으로 삽작삽작 걸어가서 어린아이가 잠을 깰까 조심스러이 그 옆에가 엎드려 볼을 마주 대고 눈물 섞인 입안엣 소리로 "병길아 병길아! 너하구두 이젠 마지막이다! 부디 잘 자라라…… 나도 너 같은 아들이나 하나 있었으면…… "하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어린아이가 기지개를 발끈 쓰고 몸을 돌려 눕는 바람에 얼핏 일어나 화롯가로 가서 앵잿물 그릇을 집어들었다.

집어들고 마시려고 입에 가까이 들고 서서 그는 마지막으로

"야속한 세상이 모질기두 하더니 인젠 모다 그만이루구나…… 왜 난 살질 못하고 이 청춘에 이런 죽음을 …… "

하고 흑흑 느끼면서

"어머니! 형님! 전 인제 가요……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에 들었던 앵잿물 그릇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죽을 기를 쓰며 한 방울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조리 들이마셨다.

봉우 모친은 혼자 앉아 기다리다가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므로 초조히 불을 켜가지고 밖으로 나와 혼잣말로

"이 앤 무얼 이리 하나 ?" 라고 구시렁거리며 뒷간문 앞으로 가서

"색이 여기 있니 ?" 하고 뒷간문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뒷간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고, 컴컴한 속으로 자기의 말소리가 자취없이 사라져버릴 뿐이었다.

그래 봉우 모친은 겁이 더럭 나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큰방에서 나는 이상스러운 신음 소리를 듣고 정신없이 큰방으로 쫓아들어갔다.

들어가다가 봉우 안해가 방 웃목에 넘어져 코와 입으로 붉은 피를 쏟으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보채는 것을 보고 소리를 ' 으악’ 지르며 뒤로 한 발을 물러섰다.

집안은 또 한번 와락 뒤집혔다. 집안 사람들은 달려들어 일변으로 의사를 부르러 보내고 일변으로 개숫물을 먹이고 하였으나 원체 많은 양잿물을 먹었으므로 인제는 목구멍이 띵띵 부어 막혀버려서 한 숟갈씩 떠 먹이는 개숫물도 잘 넘어가지를 아니하고 또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독기와 피는 목구멍에까지 올라오고는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다시 '꾸르륵꾸르륵’하며 내려갈 뿐이었다.

봉우 모친은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이제 아무 정신없이 거의 죽어가는 며느리를 무릎에 뉘고 눈물어린 눈으로 그 얼굴을 굽어다 보며 "아이구 이애야! 이 몹쓸 자식아…… 좀 고생스러워두 그대로 참구 살아가질 않구…… 늙은 어미아빌 두고 네가 청춘에 이것이 무슨 짓이란 말이냐…… "하고 비죽비죽 울었으나 며느리의 귀에는 그런 말을 들어볼 정신이 없는 듯 하였다. 다만 그는 겨우 눈을 반쯤 뜨고 무슨 말을 좀 하고 싶어 하였으나 혀가 바싹 오그라들어 마음대로 돌지를 아니하므로 간신히 머리를 돌려 웃목 한구석에 가 얼굴을 찌푸리고 섰는 그의 남편 봉우를 아무 표정 없이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몸을 용트림을 하며 몹시 고민하였다.

의사는 얼마 아니하여 곧 왔으나 다만 입맛만 다시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어 경관이 온다. 이십 리나 되는 군산서 검사(檢事)가 출장을 한다 하여 애처 로운 기운을 머금은 집안의 공기는 자못 조이는 듯하였으나 아! 죽음을 뉘라서 말리리요!.

불쌍하고 가엾은 그는 ㅡ 봉우의 안해는 그날 새벽에 먼동이 채 트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천 길이나 깊은 저 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비수(悲愁)와 원한을 머 금은 눈동자로 전별하는 듯이 봉우를 한번 바라보고는 그만 이 세상 ㅡ 스물네 해이 세상에서 구천에라도 사무치고 오뉴월 삼복염천에라도 서리칠 무궁한 원한과 설움을 가슴에 품고 그만 자취도 없이 소리도 없이 다시 오지 못하는 소멸의 나라로 길을 떠나고 말았다.

3

꽃 피고 새 울고 화기로운 마취약으로 새파란 청춘 남녀를 못견디게 속살거리던 봄도 어느 겨를에 애달피 지나가고 힘찬 가지에 무르녹은 푸른 잎이 우거진 여름철이 왔다.

땅바닥에서 확확 치닫는 더운 기운은 길바닥에서 부옇게 일어나는 먼지와 뒤 섞여 숨길을 콱콱 막고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은 사람의 몸을 느긋느긋 녹여내어 사지에는 게으른 기운이 가득차고 온몸에서는 구슬땀이 물 솟듯 흘러내렸다. 정수( 正洙) 는 흰 바탕에 검은 점 박힌 일본 여름옷(浴衣[욕의])을 입고 호산원 ( 戶山原: 즉 日本[일본] 東京[동경] 市外[시외]에 있는 練兵場[연병장]) 한편 구석에 있는 소나무 그늘 밑 잔디 위에 읽지도 않는 원서 한 권을 손에 들고팔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 앞에 오락가락하는 사람들과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벌판에서는 총끝에 날카로운 창을 꽂아 들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병정들이 누런 저고리에 땀이 베어 시커매 가지고 상관의 꾸짖는 소리에 쩔쩔매며 이리저리 터드럭터드럭 달려다니면서 산개 연습(散開練習)도 하였다.

아롱진 옷에 빨간 양산을 가볍게 든 일본 댁네가 이제 겨우 자박자박 걷기 시작 하는 어린아이 손을 이끌고 논밭 사이 잔디 위로 서서히 거닐고 있었다.

양기롭게 떼를 지어 더운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며 기롱질하는 소학교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짝 나란히 붙어서서 어깨를 서로 비비며 무어라고 재미있게 소곤거리는 젊은 남녀도 있고 그것을 보고 조롱을 하며 방해를 붙이려고 하는 심술궂은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왱’ 소리를 치며 달아나는 전차도 있 고 등에다 대바구니를 둘러멘 점방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기도 하고 머리털이 흰 노인이 어린애를 등에 업고 벌 판 가에 있는 집 문앞에 서 있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따가운 햇빛과 두려운 상관의 호령 소리에 가뜩이나 긴장된 병정들의 검고 담 흐르는 얼굴과는 아주 딴판으로 썩 한가한 빛을 나타내었다.

정수는 그런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저것이 모두 사람들이지 ? 저 구더기처럼 모여서 움덕움덕 움덕거리는 것들이…… 그래도 이상은 해. 저 사람마다 다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란 게 있고…… 몸에는 피가 흘러다니고…… 그리고 제가끔 하는 일은 있겠다…… 저 병정 놈들, 저 인(人)백장놈들은 사람 죽일 공불하구…… 계집은 사내, 사 낸 계집…… 장자( 長者) 사람은 돈…… 어, 참우스운 것은 사람이지…… 살면 얼마나 살고 얼마나 잘살겠다고 저것들이 저리 나대는고…… 저기 저 큰길로 가랭이가 찢어지도록 급히 걸어가는 놈은 무얼 하려구 지금 어델 저러고 갈까 ? 저놈도 물론 저 할 일이 꼭 있으니까 그러겠지 ? 또, 저 전차 속에 가득 탄 사람들? 저 사람들도 다 각기 가는 곳과 볼일이 서로 같질 않으렷다…… 다 각기 제 일 제가 하느라고…… 그래 살려고…… 살아도 좀더 낫게 살려고…… 그러다가 팩팩 쓰러져 뒤어질 것들이…… 또 저기 저편에서 비틀거리고 오는 놈은 분명 술이 취했지 ? 글쎄 조 놈은 대관절 무엇이 그리도 좋길래 저지경이야?’ 이처럼 공상을 하는 중에 저편 솔밭 속으로 봉우가 빙그레 웃고 나오며

"여보게, 정수…… 자넨 무얼 그리 보구 있나?"

하고 정수의 옆으로 가까이 왔다.

봉우는 동경상과대학 예과 학모를 쓰고 손에는 책가방을 들고 왔다.

그가 입은 교복은 근본 남색이던 것이 얼마나 입었는지 빨갛게 빛이 바랬다봉우는 본판이 얼굴빛이 검은데다가 요즘 햇볕에 그을어서 더욱 검어지고 다만 그 의 희고 잘 골라선 이빨만이 빙글빙글 웃을 때마다 두툼한 입술 속에서 해뜩해뜩 곱게 반짝였다.

정수는 일어나 반가운 듯이 봉우의 손을 잡으며

"어, 봉울세그려…… 언제 왔댔나?"

하고 의미 있게 미소를 하며 봉우를 마슬러 보았다. 봉우는 얼굴을 찌푸리고 양복 단추를 빼며

"어찌면 이리두 더워이?" 하다가 다시 얼굴에 가는 웃음을 띠고

"나? 음…… 얼마 되잖아. 그래 그동안 재민 어떤가?" 하고 물었다.

"재미 ? 재미가 무슨 재미야…… 난 언제든지 그대로이지. 그리구 참, 자네 이번에 못 당할 일을 당했데그려…… 그래 내가 자네한테 편지했댔지…… 그 편지 받아 봤나 ?"

"응, 봤지…… 그리구 자네 지금두 그 편지에다 쓴 그 주소에 있나?"

"응, 거기 그대로 있지.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이랬나? 지난번 봄 참에…… "

봉우는 정수에게 지난 봄참에 자기 안해가 그처럼 자살하던 자세한 말을 모조리 들려주었다.

말을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봉우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잘 죽었다구 할 수가 있지…… 물론 불쌍하기두 하지만…… 사람이 그 지경이 되어가지구 좀더 살면 무어야? 누구든지 그 지경이 되었건 진즉 죽어버리는 게 편치…… "

정수는 조용히 앉아 잔디풀만 똑똑 뜯으며 듣고 있다가 그는 속맘으로 생각을 하여 보았다.

생각은 하였으나 그의 일면관(一面觀)인 피상적 인생관으로는 봉우의 안해가 죽은 그것에 대하여 깊은 판단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 그 뒤에 한번두 꿈에 보이거나 그렇진 않던가?" 하고 정수는 한참만에 봉우에게 물었다.

"꿈에? 없지 없어…… 사실말이지 난 내 양심에 조금치라두 거리 끼는게 없으니까…… 내가 절 보구 죽으란 적 없구 그리구 또 내가 이렇게 맘을 먹었댔지 ㅡ 이혼을 한 뒤에 넉넉친 못하나마 논 석지기나 하구 돈천이나 하구 주어 보낼려 구 ㅡ 자넨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만 난 조금두 잘못이 없다구 생각 하네…… "

"박봉우 자네론 그도 괴이찮은 말일세만 자네한테 전혀 잘못이 없다군 또 말 할수두 없지…… "

"왜 그래 ? 만일 잘못을 가려내자면 그건 사회의 잘못, 사회의 죄라군 하겠지만."

"물론 그것이 알기 쉽게 말하자면 사회의 죄겠지…… 그러나 우린 사회란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잖아 ? 그러니까 난 이것이 잘못된 생각일진 모르지만, 그것이 모두'사람이 사람인 죄’라구 생각하네…… 그러나 그런 말은 지금 할말이 아니구…… 자네 부인두 자네 말대로 하면 아무 잘못이 없지 ? 그런데 그 아무 잘못이 없는 그가 자넨 어찌 되었든 '자네 때문에 ’ 이 세상에서 그 자신으로 보아선 무엇하구두 바꾸질 못할 생명을 그처럼 참혹히 잃었단 말이야…… 그 뿐 아니라, 그가 그처럼 죽기 전에는 '자네 때문에’ 그렇듯한 고생을 하잖았나? 그러니까 죄가 있구 없는 걸 묻자면 자네두 적긴 하지만 죄가 있다구 할 수가 있잖나?……"

"흥……" 하고 봉우는 농하듯이 이제는 말을 하였다.

"흥, 여보게…… 그것은 자네 같은 사람이나 할 말이지 난 그런 건 일 없네…… 그런 답답한 이론은 일없어…… 하나, 그건 그만해 두구…… 그리구 그뚱뚱보가 말일세…… 내 지갑 속에다 돈을 오십 원이나 집어넣어 놓구 죽었겠지…… 나두 몰랐다가 며칠 된 뒤에 지갑을 열어보니까 돈 한푼 없던 지갑 속에서 십원짜리가 푹푹 다섯 장이 나온단 말이야…… 어머니 아부지두 그런 일은 없다시구 형님두 그런 일은 없다시구…… 그러니까 분명 그게 집어넣은 게 아니겠나? 그리구 또 농 속을 열어보니까 내 옷을 말이야, 내 옷을 모조리 깨끗하게 빨아 바느질을 잘 해서 두었더래."

"그러니까 자네가 인제 다시 장갈 들더래두 다신 그런 안핸 만나질 못 해요…… "

"어질긴 하건 안하건 부부간에 서로 사랑만 하면 그만 이지…… "

"그러니까 자네 부인이 자넬 사랑칠 안했단 말인가? 그러니까 글쎄 자네가 지금 다른 여자하구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한대두 자네 먼점 부인만큼 자넬 사랑 하는 안해는 얻기가 어렵단 말이야…… 만일 자네가 '어진 안핼’ 얻으려거든 농촌엘 가 구해요…… "

"그런 말 말게…… 시골뜨긴 아주 싫증이 났네…… 그래 이번에 오는 길에 경도 (京都)서 선까지 봤댔네…… 그런데 양장미인이야. 썩 미인…… "하고 봉우는 아주 만족해하는 듯이 눈을 간소름히 뜨고 빙글빙글 웃었다.

정수는 믿지 않는 듯이

"무에 어째? 선을 봐? 정말?……" 하고 물었다

"아무렴. 범 연하겠나…… "

"누군데? 어찌 된 일이야?" 하고 정수는 호기심이 나서 바싹 다가 물었다.

봉우는 다음에 쓰인 사실을 대략 정수에게 말을 하였다.

4

금년 봄에 봉우 안해가 죽은 지 얼마 아니 되어 봉우의 집안에서는 군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봉우의 형은 그대로 그 촌에서 농사일을 보게 하고 그 나머지, 봉 우의 양친과 봉우와 어린아이들만이 이사를 한 것이다.

이사를 한 것은 별다른 목적은 없었으나 첫째 어린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봉우가 살던 촌에는 보통학교 하나도 없었다), 둘째는 도회지에 나와서 약간 장사도 하여 보려 함이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고 보면 봉우의 안해가 죽은 데 대하여 미신적으로 그 집에서 살기를 꺼려하고 또 시골 사람으로서 도회지 생활을 동경한 것이 은연중 그 원인이 되었다.

봉우는 군산으로 이사하는 모든 준비를 자기가 통 맡아 하여야 되겠으므로 학 기초에 동경을 가지 못하는 것을 적지 아니하게 불평히 여겼다.

그러나 자기 외에는 마땅히 그 일을 할 사람이 없고 더구나 군산으로 이사 하기를 자기가 들어서 주장한 터이므로 하는 수 없이 얼마 동안 학교를 결석하고 집안일을 보게 되었었다. 봉우는 먼저 영정(榮町) 복판에다 큼직한 묵은집 한 채를 사가지고 그것을 모조리 헐어버렸다.

그리고 그 터에다 새 재목을 들여 안채와 바깥채를 덩시렇게 지어가지고 그 바깥채에다 는( 바로 길거리였으므로) 그리 작지 아니한 포목전 하나를 벌여놓고 자기가 살던 촌에서 착실한 노인 하나를 얻어 전방 일을 보게 하였다.

봉우는 집짓는 곳에서 손수 집안 머슴이나 진배없이 같이 들어 일을 하고 일꾼들을 딱딱하게 잡도리를 하였다.

봉우는 자기 골에 틀리는 일만 있으면 어느 계급 어느 사회에 속한 사람에게든지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쌈을 싸웠다.

그러므로 봉우의 성질의 그 일면만 보는 사람들은 봉우를 '쌈 잘하는 몽리꾼’이라고 은연중 두려워를 하고, 또 밉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놈이 일본 가서 공부 하는 세를 믿고 건방진 짓을 한다’ 하기도 하였다.

봉우가 집짓는 곳에서 그처럼 일을 하는 동안에 '오병묵(吳柄默)의 딸 영 순( 永順) 이가 고학하러 일본 경도로 자기 부모 몰래 달아났다’하는 자자한 소문을 들었다.

봉우는 이 소문난 것을 매우 이상히 여겼다.

그는 '영순이란 처녀가 고학을 하려고 경도로 달아난’ 그 사실을 매우 범 연히 생각 하였다.

그러므로 그 범연한 사실을 가지고 그다지 소문이 자자히 난 것을 매우 이상히 여기며 그렇듯한 사람들의 심리를 비웃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영순이란 처녀가 분명히 군산서 그만한 세력을 가졌나 보다하여 영순에게 은연중 호기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어느 날인지 봉우가 지나면서 문득 자기 집 바로 뒷집이 그 오병묵의 집인 것을 보고 그 다음날부터는 그 집 어린아이와 오병묵의 안해 이씨(李氏)를 유심히 보고 가까이 상종을 하였다.

오병묵의 안해 이씨야말로 과년한 딸을 둔 부인이라 언제든지 사윗감 될 만 한 청년을 심상히 보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봉우의 동정을 잘 살펴보아 왔 다.

보아 오는 동안에 그는 봉우에게로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봉우가 집짓는 곳에 와서 벗어붙이고 꿍꿍 일을 하는 착실한 것이랄지, 이씨 자기와 집안 어린아이들에 다정히 구는 것이랄지, 모든 일에 쾌활한 성질이 랄지, 그 외에 일본 유학생이고 또 시골 사람들이 귀신보다도 두려워하는 사 법관이나 경찰관을 딱딱 어르는 ㅡ 이 모든 것이 이씨로 하여금 속맘으로 '나도 저런 사위를 얻었으면……’하는 간절한 희망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래 하루는 봉우집 머슴이 우물에서 물을 긷노라니까 이씨가 물동이를 들고 와서 조용히

"자네 집 젊은 주인 (봉우) 장가들었나?" 하고 물었다.

"장가요?. 네…… 장가 들구 말구요…… "하고 순직한 머슴은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씨의 마음은 적지 않게 섭섭하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이씨는 '봉우가 장가를 들기는 하였으나 금년 봄에 양잿물을 먹고 그 안해가 죽었다’는 말을 누구에게선지 또 들었다.

이 말에 이씨부인의 사라지려 하던 그 희망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봉우의 안해가 양잿물을 먹고 죽었다는 말에 한편으로는 봉우에게 대하여 어쩐지 두려운 생각이 나는 듯도 하였다.

날이 갈수록 집안에서는 서로서로의 집안 내용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봉우도 오병묵의 가정을 대개 알게 되고 영순에게 대한 일도 여기저기서 들어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필경 봉우는 영순의 성격이나 행동이 그가 자라난 그의 가정과는 아주 딴판인 것을 알았다.

오병묵의 가정은 별로 보잘것없는 가정이었다.

오병묵은 남의 중개점에서 일을 보아주고 있었으나 그가 가진 지식이라고는 남이 하는 편지 한 장도 변변히 읽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그 두 내외가 마주앉아 집안싸움을 할 때에 ㅡ 그것은 한 달에 몇 번씩 정해 둔 듯이 부부싸움을 하였다 ㅡ 이씨의 입으로 자기 남편에게 '이놈 저 놈, 개 같은 놈, 죽일 놈’ 하고 욕지거리를 하는 말은 심상히 말하듯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영순이는 아주 기독교를 독실히 믿었으나 그의 가정에서는 거의 아무 종교도 없고 도리어 영순의 신앙까지도 반대를 하였다.

오병묵은 이번에 영순이가'그처럼 한 일도 예배당에를 다니더니, 고년이 너무 되바라져서 그 지경이 된 것이라’ 고 얄밉게 말을 하였다.

그러나 영순이가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을 막지는 아니하였다.

영순이가 군산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에 서울로라도 보내어 좀더 공부를 시키려고는 하였으나 가세가 하락치를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군산서 오리쯤 되는 곳에 있는 미국 사람 교회에서 세운 여학교에서 세운 여학교에 입학을 시켜 그나마 좀더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영순이가 예수교를 믿는 것은 매우 반대를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오병묵의 가정에 종교란 명색이 없는 것은 아니었었다.

지금 아직도 우리나라 종교계의 대부분을 차지한 유교와 애매한 인습적인 불교사상과 조선숭배(祖先崇拜)의 그것이 오병묵의 가정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었다.

봉우가 집안일을 대개 마치고 길을 떠나려는 그 안날 저녁에 이씨는 봉우를 찾아와서

"내일 아츰에 떠나신대지요?" 하고 인사 겸 물었다.

"네, 내일 일찌기 떠나야겠읍니다......" 하고 봉우는 그에게 고유한 공순한 태도로 대답을 하였다.

"우리 영 순이가,"하고 이씨는 영순에게서 온 편지봉투를 봉우에게 보이며 말을 하였다.

"우리 영순이가 여기 있대는데요......"

이렇게 말을 하고는 '좀 찾아가 보아주지 아니하려느냐’는 듯한 얼굴 빛으로 봉 우 를 바라보았다.

이씨는 ㅡ 이씨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시골 여자는 대개 그렇다 ㅡ 지리( 地理) 란 것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가 사는 군산이란 곳이 어느 곳에 붙어 있는지, 조선이 어딘지 일본이 어딘지를 도무지 모르는 터이다.

그저 일본이라 하면 그 일본의 지리 ㅡ 지리뿐 아니라 다른 것도 그렇지만 ㅡ에 대하여 지방적 개념이 도무지 없으므로 다만 일본인 줄만 알았다.

그러므로 일본을 간다면 단지 일본을 갈 뿐이지 동경이란 곳이 있어 동경으로도 가고 경도나 대판(大阪)이란 곳이 있어 경도나 대판으로도 가고 하는 줄을 알지못하였다.

그러므로 봉우가 일본을 가서 영순이를 찾아보는 것이, 가령 말하자면 서울 종로에 사는 사람이 동대문이나 서대문 근방에 사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줄만 알고 있었다.

봉우는 전부터 영순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는 터라 속맘으로'경도라니까 가는 길에 좀 들러볼거나......’ 하는 내숭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그 편지봉투만 만지작거리며 이씨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이씨는 말하기가 난처한 듯이 머뭇머뭇 하다가

"아따 저, 어려우시지만 그애 좀 찾아보아 주세요…… 어린 것이, 더구나 계집애가, 혼자 타국엘 가서 그러구 있으니까 잠시라두 맘이 놓여야지요."

하고 미안스러운 듯이 봉우의 눈치를 보았다.

봉우는 속맘으로는 '에끼나 되었다’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천연스럽게 말을 하였다.

"네. 별로 어려울 건 없읍니다. 가는 길초니까요......"

"아니 그러면......" 하고 이씨는 의외로운 듯이 물었다.

"아니 그러면 우리 영순이 있는 곳하구 학생(이씨는 봉우와 말을 할때에 일상 학생이라고 불렀다) 가시는 데하구 다른가요?"

"네. 좀 다르긴 하지만 바로 가는 길초니까요…… 별루 관계찮습니다…… 편지나 무엇 보내실 것 있건 절 주세요."

"아이그 그러세요? 참 고맙습니다…… 그러면 지금 가서 편지하구 옷 한벌 해논 것하구 가지고 오지요…… 그렇지만 짐스러울 터인데요?……"

"아니올시다. 옷 한 벌이 얼마나 됩니까 어데…… 관계찮으니까 보내실 것 있건 아무것이라두 갖다 주세요."

"네. 그러면 지금 곧 가져오겠 읍니다…… "하고 이씨는 총총히 돌아갔다.

그러나 이씨가 봉우에게 이처럼 영순이 찾아보기를 당부하는 것이 영순의 신상을 근심하는 마음도 있겠지마는 한편으로는 이씨 자신도 잘 의식치 못하는 별다른 목적이 있는 까닭이었었다.

또한 봉우도 하루바삐 동경으로 가야만 할 형편이건만 그래도 경도에 들러서 영 순이를 찾아보려는 것은 별다른 희망을 가진 까닭이었었다.

그 이튿날 오병묵은 정거장까지 봉우를 따라나와서 '집에서 통 돈 한 푼 보내주지 못하는데 어린 계집애가 고학을 한다고 그처럼 가 있으니까 부모 된 사람이 한시라도 맘을 놓을 수가 있겠소? 이번에 가시거든 수고는스럽지만 부디 좀 찾아보아서 만일 못 쓰겠거든 내게 기별을 좀 해주시오…… 내가 곧 쫓아가서 붙잡아 와야겠으니까 요……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계집애자식을 버리잖겠소? 부디 좀잘 알아서 자세히 기별을 좀 해주시요’란 말을 신신당부하였다.

5

영순이는 금년에 열여덟 난 처녀였었다.

그는 봉우가 말한 것처럼 그처럼 미인은 아니었었다.

다만 그의 좁으장한 어깨통과 홀쭉한 키와 가는 허리와 긴 다리가 양장을 하고 나서면 뒷맵시가 썩 그럴듯하였다.

그의 얼굴은 밉상도 아니고 미인도 아니었었다.

그의 얼굴은 말하자면 엄격한 얼굴이었다.

어느 구석엔지 용이히 침노치 못할 듯한 기운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영순의 얼굴이 독살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얼굴의 본판은 온순한 것이 영순의 엄숙한 신앙의 심리작용을 입어 그 처럼 엄격한 빛이 가미된 것이었다.

그는 지금 일본 경도에 있는 B고등여학교 삼년급에 다니는 중이다.

그는 물론 맨손으로 ㅡ 겨우 경도까지 가는 차비를 장만하여 가지고 ㅡ 집을 떠났었다. 그러나 영순이는 예전부터 경도서 공부를 하는 K라는 여자와 사귐이 있었다.

영순이가 집을 떠나 바로 경도로 간 것도 그 K를 찾아간 것이다.

그 K라는 여자는 경도에 있는 일본 정객(政客)들과 실업가들이 정치적 야심으로 기 본 금을 모아 가지고 세운 화친회(和親會)란 단체에서 매삭 육십 원씩의 학비를 타서 공부를 하는 중이었었다.

영순이도 K의 소개로 그 화친회의 회원이 되어 그 육십 원이란 돈을 매삭 얻어서 이름 좋은 고학을 하여나갔다.

그런데. 그 화친회에서는 애초에 사업을 가장 잘하여 나갈 목적으로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르나 조선사람 서태문(徐泰文)이라는 검은 장막에 싸인 의심다운 인물에게 그 회의 모든 사업을 맡겨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화친회는 서태문의 독점사업이나 진배가 없었다.

서태문은 K의 소개로 영순이가 고학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첫째는 자기의 직무도 수행할 겸 둘째는 영순에게 흉악한 야심이 일어나 다른 사람에게는 곧잘 허락 치 아니하는 것을 영순에게는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학비 대주기를 허락하였다.

그래 매삭 초사흘이면 육십 원이란 돈표와 서태문의 이상스러운 ㅡ 그 이상스러운 것을 영순이는 이상스러운 줄을 모르는 ㅡ 편지가 영순의 손에 또박또박 떨어졌었다.

물론 영순이는 서태문으로 하여금 학비 대주기를 손쉽게 허락케 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영순이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요, 얼굴이 밉상이 아니고 사람 됨이 어수룩하여 세상 물정을 모르므로, 장차 서태문의 손에 녹아날 만한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철 없고 세상 인심을 모르는 영순이는 생각밖에 그러한 고마운 양반을 만나매 어찌나 기쁘고 감사한지 자기 말대로 하면 '아부지와 같이 공경하고 사랑’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으례 서태문을 '서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영순이는 속맘으로 '고학하기가 썩 어렵고 또 여자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몸을 버리 기가 쉽다더니, 지금 와서 당해 보니 참말이지 고학하기란 누워 떡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라’고 하는 생각이 나서 한편으로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거만된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순은 서가의 말이라고 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의심을 아니하였다.

서가는 영순에게 명년이면 동경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동경을 가면 여자대학이 다섯 군데나 있는데 어디든지 자기 소개장만 가지고가면 어려움 없이 입학을 할 수가 있다고.’ 영순은 길전(吉田)이란 여선생 ㅡ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ㅡ 의 집 이층에 기숙을 하고 있었다.

서가에게는 이것이 매우 불만족이었었다.

더우기 길전 선생은 독신생활을 하는 성격이 매우 엄정한 여자이었고, 어디까지든지 영순이를 잘 지도하고 보호하려 하였으므로 서가에게는 그것이 더욱 앙통 하였다.

이것은 영순이가 경도로 간 지 얼마 아니 되어서의 일이다.

영순이가 서가의 간절한 청으로 다른 조선 여학생 ㅡ 모두 화친회에서 돈을 얻어 쓰는 ㅡ 들과 함께 서가의 집으로 하룻밤 놀러간 일이 있었다.

놀러가서 서가에게 은근한 대접을 받고 먹을 줄 모르는 술도 좀 먹고 밤이 깊도록 화투를 치며 놀다가 전차가 끊겨서 돌아오지를 못하고 그만 그 집에서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야 돌아온 일이 있었다.

길전 선생은 밤이 새도록 기다리고 전차정거장으로 하인을 보내 보고 하였으나 필경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 이튿날 길전 선생은 영순이가 지난밤에 그처럼 한 일을 알고 눈이 빠지도록 나무랐다. ㅡ 길전 선생은 서가의 행동을 심상치 않게 보아왔었다.

그러나 영순이는 실컷 나무람을 듣고도 자기 방에 돌아가서 얼굴에는 불평한 빛을 띠고 혼잣말로 '내가 서선생님 같은 어른의 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온 것 이 무에 그다지 잘못인고’하고 매우 불쾌히 여겼다.

영순은 자기 옷과 편지를 가지고 일삼아 찾아온 봉우를 매우 은근히 접대 하였 다.

더우기 고향에서는 서로 이웃 사이요, 자기 부모의 친서에 착실한 사람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친근스러운 감상이 일어났다. 그래 영 순이는 자기가 현재 경도서 지내가는 형편을 대개 이야기하였다.

길전 선생도 아무 의심없이 봉우를 접대하고 영순이가 서가에게 너무 허물 없이 하는 것을 근심스러운 듯이 봉우에게 말을 하였다.

봉우는 영순을 작별하고 여관으로 돌아오며 입안엣말로 '서태문이 ? 서태문이? 알듯 알듯 하다만?’ 하더니 한 사흘 동안 경찰서도 찾아가고 서태문도 찾아보고 경도에 있는 조선 유학생도 찾아보고 하며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동경으로 길 떠나는 날 밤에 영순이를 찾아가서 작별인사를 한 뒤에 주먹을 부르 쥐고 분개한 듯이 말을 하였다.

"오늘 저녁에 만일 그놈을 정거장에서 만나면 대번에 쳐죽여 버리겠읍니다. 서 태문이 그놈 말씀이야 요…… ""왜 그러세요?" 하고 영순은 봉우의 이 뜻밖의 말에 눈이 둥그래지며 말을 물었다.

"내가……" 하고 봉우는 다시 소리를 나직이 하여 말을 하였다.

"내가 아무리 보아두 그놈의 하는 짓이 수상스럽기에 뒬 좀 살펴봤 댔지요……< 그 놈의 본 이름은 서태문이가 아니라 서병욱이란 놈이에요. 인제 알구 보니까…… 그놈이 동경서 아주 지독한 친일파놈이드랍니다. 그놈, 제 말이 제가 명치 대학을 졸업했단대지요? 아닌게아니라 명치대학 학모에 교복은 입구 다녔드랍니다. ― 인삼장수 엿장수 하느라구요 ― 그놈이 인삼장수 엿장술 하다가 잘 팔리질 않으니까 보인회 회장 곡산초칠랑(谷山初七郞)이란 자의 궁댕이에 가 들어 붙어서 제 말대로 '일선 융화에 큰 노력을 했다’나요…… 그러다가 필경은 우리나라 유학생들한테 들켜나서 죽두룩 두들겨맞고 이 경도로 쫓겨왔드래요…… 경도로 와서 또 무슨 일을 저지르구 ― 사기취재라는 사람두 있구, 처녀 유인 죄란 사람두 있으니까 자세힌 모르겠읍니다만 ─ 잡혀가서 얼마 동안 콩밥을 먹은전과 자라나요…… 그놈이 감옥에서 나올 때에 마침 이 경도에 있는 일본 사람 야심가 들이 저희 말대로 하면 소위 '일선 융화를 촉진’할 목적으로 그 화친 회란것을 세우는 기밀 알구, 그놈이 에끼나 먹을 것 생겼구나 하구 그곳에 뛰어들어가서 지금 그 꼬릴 펴구 다니는 거예요…… 그래 고놈이 ― 아이구! 그저 고 놈의 소 윌 생각하면 ― 우리나라 민족의 체면을 팔아 일본 사람에게 아첨하기, 어리숙한 조선 여학생 꾀이기…… 그러면서두 고놈이 외면으룬 애국잔 체 일류 신산 체하고 뭐라구 딱딱거리구 다니니 그놈의 하는 짓이 분하구 밉잖겠읍니까? 대판 있 는 C교회두 그 화친회 돈으루 유지해 나간답니다. K, 고년두 서태문이와 한칼에 목을 베어 죽일 년이에요…… 영순씰 서가에게 소개한 것두 고년의 소위지만 전 화친 회와 서가놈의 내용을 번연히 알면서두 영순씨한텐 일절 그런 말을 아니 한 것을 보면 저희끼리 공모해 가지구 영순씰 속여 저희 맘대루 하잔 수작이 아닙니까?>"(이하 < > 표한 부분은 검열에서 '삭제’당한 부분임 - 편자) 봉우의 말소리는 점점 높아갔다.

영순이는 처음에는 얼굴에 놀라운 빛과 호기심을 가진 빛을 띠고 들었으나 말이 차차 깊어감에 따라 그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하여지고 아무 말도 없이 봉 우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하고 봉우는 소리를 더 높여

"< 그러니까 그놈의 담보가 좀더 크구 조선이란 땅덩이가 하나 더 있드라면 마저 팔아먹을 놈이 아니예요?>"

하고 잠깐 말을 그치고 영순을 바라보았다.

영순이는 섧지 아니한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여지며 무슨 말을 하려 하였으나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고 다만 옷자락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는 '그것이 진정이냐’고 한번 물어보고도 또한 싶었으나 봉우의 태도가 너무 열정적이고 그의 얼굴에 조금도 가식한 빛이 없으므로 그의 말을 믿지 아니 할수가 없었다.

물론 봉우의 말을 꼭 믿었다.

그러나 서태문에게 대한 신용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하고 봉우는 다시 나직하고 다정스런 말로 영순을 측은히 여기듯이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물론 영순씨 잘못이라구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린 지금 아주 가난한 처지에 있지 않습니까? 영순씨두 가난하시지요? 하나, 공분 하구 싶으시지요? 고학은 물론 못하실 것이구…… 그러니까 저두 이제껏 한 말씀이 참말 미안스런 말씀 입니다. 지금 영순씨더러 그 돈을 받으시지 말란 말씀은 아니에요. 받아서 착실히 공불 하시되, 그 돈의 내력이 그런 것이니까 그에 대해서 장차 할 깊은 자각을 가지셔야 될 줄 압니다. 그리구 서가놈을 대단 주의하십시오…… 길전 선생에게 영순씨가 서가놈한테 너무 허물없이 하신단 말을 듣구 제깐엔 놀랐는데요…… 서가놈이 이제껏 영순씨가 생각해오신 것관 아주 딴판이니까 요…… "하고 봉우는 말을 맺었다.

봉우는 영순에게 부디 자기 부모한테 그런 기별을 하지 말아 달라는 목마른 듯한 부탁을 듣고 그날 밤에 경도를 떠났다.

영순은 기가 막혀 방바닥에 가 엎드러져 울음을 울었다.

쓸쓸하고 고적한 감상이 자기를 내리누르는 듯하여 방금 작별한 다정스러운 봉우가 말할 수 없이 그리운 생각이 일어났다.

그는 혼자 탄식하듯이 생각을 하였다.

'나는 왜 돈이 없어 그런 더러운 돈으로 구구히 공부를 하게 되었는고…… 그러나마 내가 이제부터라도 그 돈을 받지 말면? 무얼 가지고 공불 해? 이런 일을 당할수록 공분 더 해야만 할 텐데…… 고학? 고학은 참말 자신이 없고…… 에라 모르겠다. 그 돈이나마 눈을 질끈 감고 받아서 공불 한 뒤에 내가 그만큼, 민족에게 누를 끼친 만큼 더 많이 갚으면 그만이지. 더러운 진흙에서 고운 연꽃이 피고 좋은 열매가 맺질 않나…… 봉우씨 말씀대로 할밖에……’라고 맘을 먹고 나서 두 무릎을 단정히 꿇고 두 손을 합장하여 위를 우 러러 보며 엄숙한 말소리로 "하나님이 시여! 약한 나를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가 팔을 걸핏할 적에 눈에 얼핏 띄는 팔걸이 금시계와 방안에 늘어놓은 문방구, 벽에 걸린 화려한 의복을 보니 문득 꺼림칙한 생각이 나서 아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넓으나넓은 빈 들에 혼자 방황하는 듯한,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설움이 가슴에 복받쳐 방바닥에 다시 엎드러져 밤이 깊도록 소리를 숨겨 울었다.

6

봉우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조용히

"그리구…… 요새 난 야단났네. 학교엘 가서 앉았으면 선생의 강의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야지. 공연히 맘이 싱숭생숭해서…… 그러다가 집에 돌아가면 교과서나 필기장은 집어치우구 맨 그저 본다는 게 연애소설이야. 자네두 잘 알지만 내가 예전엔 그따위 것을 눈이나 바로 떠봤댔나? 그러든 것이 지금 와선 아주 재미가 꿀 같단 말이야. 그리구 참, 경도서 말이야…… 영순이가 현관에서 작별을 하 군 문을 닫았다가 다시 방긋이 열구 "부디 안녕히 가세요……"하는데 고 오동포동한 손목에다 조그마한 팔걸이 금시곌 찬 것이 어쩌면 그리두 곱구 어여쁜지! 그리구 정거장에 나가서두 도무지 오구가 싶어야지. 도로 여관으로 가서 담날 한번 더 영순일 보구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그걸 꿀꺽 참구 차에 올라서 막 잠이 들려니까 영순이가 '부디 안녕히 가세요……’하는 것이 선연히 뵈겠지요…… 아이구! 사람 죽을 노릇이지…… 그리구 그뿐인가…… 그새 여기 와 서두 줄곧 꿈에 뵌단 말이야…… 어서어서 영순이한테루 장갈 들어야 할 터인데…… "

하고 다리를 들먹거리며 못견디어하였다.

"허허," 하고 정수는 웃으며

"떡 사 줄 양반은 맘두 안 먹었는데 김칫국물 먼점 마신다는 식으로…… 여보게 자네 그러다가 공연히 외짝 정사( 情死) 하리…… "하고 조롱하듯이 말하였다.

"외짝 정사나 무에나 영순이가 내 말 듣잖군 못견딜걸…… 내가 지금 영 순이 아부지 한 테로 영순이가 화친회의 돈으로 공불 하면서 서가놈에게 반해 다닌다구 편지 한 장이면 영순이가 공부하긴 그만이니까…… 그리구 군산교회로 투서 한장만 하면 영순이 신용은 그만이야. 지금 군산서들 영순일 약간 신용하구 있는줄 아나?"

"그렇지만 자네가 영순이한테 그따위 모진 일을 할 건 무어야?"

"아니야 아니야. 그건 잠깐 농말이구…… 만일 영순이가 나와 결혼, 아니 결혼은 아직 이르지만 약혼만 허락을 하면 난 공불 못하는 한이 있더래두 영순일 그대로 두진 않아여. 우리 영순일, 내 학비라두 영순일 대주구 난 집에 돌아가서 장사나 하다가 영순이가 졸업을 하거든 그때엔 내가 또 공불 하지…… 영 순이더러 돈 좀 벌어서 내 학빌 좀 대라구 그러구…… 응 정수! 그러면 좋잖아? 흠…… "

"그렇지만 영순이가 싫다면?……" 하고 정수는 봉우를 시험하는 듯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만두어 버리지…… 사내자식이 어델 가면 계집 없을까 봐서?"

"그러면…… 지금 영순이와 약혼을 해두지? 그리구 자네가 학빌 대주지? 그래 영 순이가 공불 마친 뒤에 그때에 '너 같은 것은 일없다’하구 자넬 저버리면?"

"죽여버리지. 오십전짜리 단도 하나면 알아볼 걸…… "하고 봉우는 쾌쾌히 대답을 하였으나 자기의 한 말이 너무 과한 것을 웃으며 "아니야. 우리 영순이가 그럴 리야 있나…… "하고 스스로 만족한 듯이 웃었다.

"아직은 내가…… "하고 정수는 인제는 점잖스럽게 말을 하였다.

"아직은 내가 자네와 영순이 사이의 관곌 자세힌 모르지만……어찌 되었든 자네가 지금 그다지 자발적게 굴 일은 아니야. 자네가 얼핏 한번 그 얼굴만 보구 몇 마디 이야기만을 들어가지구 영순이가 어떠한 여잔질 안단 말인가?"

"아니, 그것은 내가 확실히 알구 있는 터이니까…… 영순이야말로 참 얌전해 요. 어 군산서 영순일 아는 사람은 누구 할 것없이 '저 처녀가 오병묵의 가  든 정에서 자라났단 말인가?’하구 의심할 만큼 얌전하다구그래…… 그리구 나두 보긴 했지만 사람마다 그 성질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

"또 영순이가 자넬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구 있는지? 가령 자넨 영순일 잘 안달 지라두 말이야…… 영순인 자넬 전혀 모른달 만하잖나? 그러구 참……자네가 나 보담 두 그것은 더 아는 터이지만 지금 영순이 주위가 어떠한가? 물론 그 지경이 되었으니까 ─ 내가 이것이 남의 어린 처녈 너무 나쁘게 마하는 것 같지만 ─ 영 순이한테 의심까지라두 생길 게 아니냔 말이야…… "

"아니야 아니야. 그건 그렇잖아. 영순이가 누구라구…… 그리 손쉽게 타락이 될 리가 있나…… "

"그래, 그러면 그것은 그렇다구 해두구…… 자네가 지금의 모양으로 여성( 여성) 이란 것을 이해하든지 접촉해 가다가는 인제 영순이가 ─ 영순이뿐만이 아니라 자네가 지금 동경하구 있는 그런 형식과 내용이 어떠한 여자든지 ─ 자네란 사람이 그렇듯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면 자넨 떡국이야 떡국…… 어찌 되었든 자넨 배운 것 많구 온순한 미인이면 그만이라잖나? 그렇지만 지금 우리나라 사회 해 방계급에 있는 소위 신여자(新女子)의 대부분이 연앨 생명보다두 더 중히 여기는 줄을 모르나, 자네? 그것이 물론 여자 해방 과도기의 변태현상이지만 어쨌든자 넨 그 신여잘 선택하려면 그 현상되루 순응할 수밖엔 없단 말이야…… 그런 데자 넨 그러한 현상에 순응할 적응성이 없단 말이야…… "

"왜 그래. 내가 영순일 약간 사랑하나? 난 연앨 못할 사람이어서? 인제 보게…… "

"허허, 저런 말을 좀 들어 보게. 자네가 정말 영순일 사랑하는지 어쩌는 지 두 의문이지만…… 가령 사랑을 한다는 것두 영순이가 자네의 요구하는 그 조건 ─ 지식이라든지 얌전하다든지 밉상이 아닌 것이라든지 ─을 갖추어 있으니까 사랑이니 건넌방이니 그따위 소릴 하지, 만일 영순이가 그러한 조건이 없으면 사랑 칠 않겠지?"

"아무렴, 그야 물론이지…… 털어놀구 말이지, 밉구 사납구 무식한 것이 내 망에 들겠나?"

"흥, 그러니까 자네 말이 모순이구 자네가 완고란 말이야. 그렇지만 박봉우 자네로는 그두 또 괴이찮은 일일 세…… "' 그렇지만……’ 하고 정수는 위의 말은 하고도 혼자 생각을 하였다.

'그렇지만 봉우의 말이 한편으론 옳을지 몰라? 사실 말하면 예쁘고 온순하고 지식 있는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이끌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많으니까. 연애란 원 칙으로 보면 남녀가 결합하는 준비 행위니까. 남잔 여자, 여잔 남자의 서로서로 의 성질이나 자격을 잘 이해찮고 다만 사랑만 한 것으로 곧 결혼을 했다가 그것이 영구히 계속치 못하는 폐단이 간혹 생기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봉우처럼 외적 조건이 갖추어 있는 이성을 가리어 가지고 그에게 우러나는 사랑으로 영구 히 정답게 지내는 것이 좋을지 몰라? 그렇지만 이성과 이성 사이에 있는 연애나 성적( 성적) 관곈 그다지 단순칠 않으니까…… 플라토닉 연애나 봉우의 말하는 것이나 두 가지가 다 완전한 건 못되는군…… 완전한 연애? 완전한 남녀 결합? 그것도 운명이다. 조그마한 사람이란 것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사람이다! 그것이 사람의 사람 된 원리겠지!’ 라고 그처럼 생각을 하다가 다시 봉우에게 말을 하였다.

"자…… 우리 집으로 가세. 난 지금 집을 한 채 빌려가지구 자취를 하는데…… 오늘이 토요일이지? 토요일이니까 나하구 오늘 저녁에 같이 놀구 내일두 놀구 그러세…… "하고 일어섰다.

"자취?" 하고 봉우도 일어서며

"좋지. 그래 집센 얼만가?" 하고 물었다.

"이십 원…… "

"시 끼긴( 집세의 오개 월분)…… "

"몇이 있나?"

"혼자 있지."

"응, 방이 몇인데 혼자 있어?"

"육조(六疊[육첩]) 하나, 사조 반 하나, 현관이 이조야…… 그리구 수도에다 와 사까지 있구……"

"그러면 썩 좋겠군. 취방이라지? 어디쯤이야. 예서?"

"얼마 되잖아…… 자, 어서 가요……"

두 사람은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해는 벌써 서편으로 기울어졌다.

병정들은 다 없어지고 넓은 벌판에 야구하는 사람들만 여기저기 그물을 세워놓고 던지는 놈 받는 놈 달아나는 놈 방망이로 치는 놈한테 뒤섞여 정신없이 나대는데, 한가한 구경꾼들은 그물 뒤에 가 모여서서 공연히 얼굴에 긴장한 빛을 나타내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산보하러 나온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산보하러 나온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따가운 햇볕은 쪼이지 아니하였으나 그 대신 훈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은 넓은 벌판을 건너오는 동안에, 두 사람의 기다란 그림자는 쌍으로 앞에 누워 착실히 걸어갔다.

"자넨 지금 어디 있나?" 하고 정수가 걸어가며 물었다.

"나? 상야(上野) 있어……"

"상야면 학교 다니기가 너무 멀잖아?"

"멀다뿐인가……"

"그러면 웬만하건 우리 집으로 오게……"

"글쎄, 나두 그 생각은 있네만…… 그래두 멀지?……"

"멀긴 왜? 자네 학교까지 한 시간이면 넉넉할 겐데……"

"그럴까? 그러면 오지……"

"그래 내일 오소.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구 말이야…… 내일 짐을 옮기란 말이야……"

"음. 그래……"

두 사람은 이처럼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7

두 사람은 집 문앞에 다다랐다.

집은 조그마한 단층이었고, 말하자면 북향(北向)집이었었다. 이편 북쪽 길거리로 문이 나고 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현관이 있고 바른손 편에 사조반 방이 있고, 그 사조반 방과 서로 연하여 남편으로 육조방이 후스마(조선 병풍처럼 문짝을 만든 샛문) 하나로 사이가 나뉘어 있었다.

그 육조방 남편으로는 또다시 조그마한 툇마루 하나가 있고 침대용의 등의자 하나가 놓였었다.

변소는 그 툇마루 안편에 가 숨어 있고 부엌은 현관과 마주 연하여 있었다.

집 남편으로는 명색 정원 비스름한 것이 있고 그와 연하여 널찍한 부자집 후원이 있었다.

이 집은 말하자면 요사이 일본 도회에 고유한 미인식(美人式) 건축이 있었다.

그리고 집 좌우로는 그와 꼭 같은 모양의 집이 세네 채씩 죽 들러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조반 방은 비워 두었는지 혹 침실로 쓰는지 모르나 아무것도 놓인 것이 없이 천장 한가운데 전등 하나만 축 늘어졌고 육조방에는 책상 책장 같은 것이 너절하게 늘어놓였고, 사방 바람벽 위로는 꽤 익단 솜씨의 풍경화 초상화가 몇 개 걸려있었다.

정수는 뒤 뜰팡으로 나아가 이웃집 댁네더러 집 보아 준 인사를 하고 들어오며

"어느 방에 자네가 있을려나?" 하고 상의하듯이 물었다.

"방? 방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지금 배가 고프니까 어서어서 고기두 사오구 비루두 사오구 밥 좀 해요…… 그리구 연애소설두 하나 주구……" 하며 책장문을 열고 책을 뒤적거렸다.

"그래 염렬 마요……" 하고 정수가 앉아 담배를 피우노라니까 봉우가 소리를 지르며 그의 고유한 왈패를 부렸다.

"아, 글쎄 배고프다니까 그래. 담밴 또 어린 사람이……"

이처럼 봉우는 농하기 겸 정수에게 성화를 대는 판에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 가나며

"얘, 봉우놈이 또 여길 와서 정술 못견디게 굴잖니?……" 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다같이 "형식이 아니라구?"하고 봉우는 그대로 앉아서 "키다리 왔니?……"하고 소리를 쳤다.

정수는 현관으로 나아가 그 형식(亨植)이란 사람과 악수를 하고 웃는 낯으로

"형식인가? 오랜만일세그려…… 자, 어서 올라오게……" 하고 형식의 손목을 이끌다가 언뜻 문 밖에 배젊은 일본 여자가 섰는 것을 보았다.

정수는 형식을 바라보며 '누구냐?' 묻는 듯이 미소하였다. 형식은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며 일본말로

"문자( 文子) ! 들어가서 잠깐 쉬어 가자구…… 종일 걸어 다니느라구 다리가 아프겠군. 어서 들어와요…… "

하고는 계면쩍은 듯이 정수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정수는 벌써 짐작을 하고 공순히 일본말로 문자에게

"잠깐 들어오시지요? 누추해서 안되었읍니다마는......"

"네 고맙습니다. 그러면 잠깐…… "하며 그 여자는 허리를 납신 굽혀 인사를 하고 형식을 따라 조심스레 현관으로 올라갔다. 봉우는 그제야 나와 형식의 어깨를 탁 치며 "흥, 동부인합시구…… 얘, 팔자 좋구나…… "라고 악의(惡意) 없는 조소(嘲笑)를 하다가 다시 문자더러

"문자씨도 오셨 읍니 다그 려…… "

하고 일본말로 인사를 하였다.

문자는 반가운 듯이 봉우의 옆으로 다가서며

"봉우씬 참 잘두 돌아다니세요. 어느 겨를에 여길 또 오셨어요…… "

하고 허물없이 웃었다.

네 사람은 방을 들어가 정수는 방석을 내놓고 앉기를 권한 뒤에 자기도 문자와 맞은 바라기에 앉았다.

(작자는 여기서 잠깐 한 말을 하려 한다. 이 다음에 나오는 말은 대개 일본말 로그들이 하였다. 문자와 말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말로 하였지만 그네 조선 사람 끼리만이라도 우리 조선말로 말을 하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문자에게 미안스럽다는 의식을 그네끼니 아무 약속이나 제정이 없었을지라도 본능적으로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이 경험은 일본에 유학한 우리 조선 학생들 중에 지내본 사람이 적지 아니 할 줄 믿는다.

이 다음에 혹 가다가 일본말을 그대로 쓴 것이 있는 것은 일본말을 이는 독자에게 그 말을 한 사람의 감정이나 그 말 자체의 참뜻을 음미하기 편하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한마디 더 할 말은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 문학의 작품이요 일본말을 조선말로 번역하여 놓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작자가 일본말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쓴 것이 아니라 작품의 인물들이 ' 우리말’을 일본말로 번역하여 한 말을 자자는 다시 먼저의 그 '우리말'로 돌려 보내 가지고 쓴 까닭이다.) 정수와 문자를 형식은 소개하였다.

"자 이분은 김정수씨란 분인데, 지금 조도전대학 문과에 다니시구…… 또 이 사람은 지전문자(池田文子)라구 하는데…… 저…… 저…… "

하다가 말을 못하고 웃어버렸다.

문자는 얼굴이 빨개지며 정수와 인사를 마쳤다.

형식은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친 것을 보고 문자를 놀리듯이

"문자가 동무 하날 또 만났군. 더구나 정순 문학의 천재니까 또 미남 자구…… 그렇지만 이 불쌍한 나로 봐서 너무 반하진 마오…… "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문자는 한번 더 얼굴을 붉히며

"아이 그 잡성스러라......이인 똑 어이구 참......"

하고 그래도 고새를 갸웃거려 아양을 부리며 손바닥으로 형식을 슬쩍 밀쳤다.

그러다가 문자는 머리를 돌려 정수를 마주보다가 정수의 눈과 마주쳐 머리를 숙이고 혼자 해쭉 웃었다. 그러나 봉우와 형식은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정수는 속맘으로 '썩 귀여운걸……’하는 생각이 저 창자 속에서 우러나는 듯이 일어나 이상스럽게 맘이 기뻤다. 아무말도 아니하고 있던 봉우가 마침 정수의 옆구리를 쥐어지르며 그가 잘하는 농을 또 내어놓았다.

"이 사람아, 글쎄 배가 고프다니까 그래…… "

이 말에 형식이가 내 달으며

"저 앤 그저 목구멍에다 거지 보퉁일 차구 다니나? 어쩌면 그리 먹을 것 만 찾니 ?"

하고 허물없는 말로 핀잔을 주듯이 말을 하였다.

"흥, 이애…… 수염이 대자 오치라두 먹어야 양반이란다. 넌 예쁜 색시 손목이나 붙잡구 다니니까 먹잖구두 살 듯싶으니?"

하고 문자를 흘끗 보며 웃었다.

세 사람은 모두 웃었다.

"그래 글쎄 염렬 마오. 자네 굶기진 않을 게니까......"

하고 정수는 일어서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아니, 여보게 정수…… "

하고 형식이가 정수를 막으며

"잠깐 내 말 좀 듣구 나가게…… 자네 집에 방이 둘일세그려? 하나좀 나한테 빌리잖으려나? 아니…… 멋 빌린단 게 아니라 같이 좀 있세…… 이 색시( 문자를 가리키며) 가 밥은 해줄 게니까…… "

이 말을 들은 정수는 아직 아무 말도 못하고 어려운 듯이 봉우를 바라보는데 봉우가 얼핏 내달으며 말하였다.

"어라 얘…… 내가 오기로 벌써 말해 두었 더란다…… "

"응? 정말이야? 정말인가 정수?……"

"응……"

하고 정수는 여전히 얼굴에 어려운 빛을 띠고

"그렇지만…… "하며 봉우를 의미있게 바라보았다.

봉우는 정수의 눈치로 그 뜻을 짐작하고 더욱 완고하게

"아니야 그건…… 나한테 우선권이 있으니까…… "

라고 말은 하고도 자기 역시 우스운 듯이 허허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웃으며 형식이가 다시 "여보게…… 우선권이 있건 상선권(商船權)이 있건 그만두어 버리고 나한테 양보 하게…… 아닌게아니라 그동안 일 주일이나 두구 셋방을 하나 얻으려고 돌아다녀 보았지만 알맞은 게 있어야지…… 응 여보게…… 아니 여보 박생원…… 어쩌려우?"

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봉우는 나오는 웃음을 참고 억지로 강경한 듯이

"흥, 이놈…… 인젠 박생원이야? 그래 너 좋자구 난 어찌란 말이니?"

"그러면……"

하고 정수가 말을 거들었다.

"그러면…… 기왕에 방이 둘이니까 봉우두 오구 형식이두 오지…… 그러면 물론 방이 좁아서 곤란은 되겠지만…… 형식이가 문자씨하구 한방 차지하구 난 봉 우 하구 한방에 있구…… "

하고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정수가 이러한 계책을 낸 것은 형식에게 대한 친분도 친분이겠지만 문자와 같이 있고자 하는 호기심 ㅡ 몽롱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었었다.

"어, 그래두 우리 정수가 낫군…… "

하고 형식은 눈초리에 웃음을 띠고 봉우를 흘겨보며

"저 앤 뚝뚝하기가 나무토막이야 나무 토막…… "

"말 마라 이애…… "

하고 봉우는 우리말로

"나무 토막이나 무어나, 너희 둘이 인제 와서 있게 되면 샛문 하나 사이서 너희 내 외간에 좋아하는 꼬라질 어찌 보라구 그러니…… 우리 홀아비놈 둘이서…… "

하고 형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수와 형식은 뱃살을 거머쥐고 문자는 무슨 영문인 줄 모르고 벙벙하다가 필경 자기에게 부끄런 말인 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고 덤덤히 앉아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8

문자는 지전삼랑(池田三郞)이란 동경 어느 관청에 다니던 사람의 외딸이었다.

지난해 봄에 지전살랑이 죽은 뒤에 문자는 홀로 된 자기 모친 천 대부인( 千代夫人) 과 함께 동경 시외에 있는 중야(中野)라 하는 곳으로 가서 자기 부친이 끼쳐 준 그다지 적지 아니한 재산을 가지고 한적한 생활을 하여갔다.

문자는 금년에 열아홉에 난 귀염성 있는 여자이다.

그가 열여덟 나는 해 봄에 동경 시내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에 지전의 내외는 곧 양자(養子)를 들여 결혼을 시켜 가지고 남은 세상의 재미를 보려 하였으나 마침 알맞게 양자 들어올 사윗(婿郞[서랑])감이 없고 또 문자가 공부를 좀더 하겠다고 간청하므로 아직은 목백여자대학(目白女子大學)에 입학을 시켜 지금까지 계속하여 다니는 중이었다.

천대부인은 그동안 줄곧 양자 들어올 사위를 골랐으나 눈 높고 자존심 많은 그에게는 별로 맘에 맞는 사윗감을 얻기가 쉽지 못하였다.

문자는 동경에 별로 친척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고 다만 본향구(本鄕區)에 무전( 武田) 아무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문자의 외가뻘로 조금 친척 관계가 있었다.

멀리 되는 친척이었지만 서로 고단한 처지에 있었으므로 두 집에서는 매우 가까이 지내왔다.

금년 봄에 문자는 자기 모친 천대부인이 구주(九州)에 있는 고향에 간 사이에 무전의 집에 가서 있게 되었다.

이 집이 곧 위에 말한 임(林)형식이가 작년 여름부터 이층에 방을 빌어가지고 기숙을 하고 있는 집이었다.

형식은 그 사람 됨이 얌전스러우므로 누구에게나 좋은 감정을 주었다.

더우기 그의 성질은 여성에 근사하므로 차마 못하는 인정이 있고 또한 맘이 곧아서 남을 속이거나 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는 지금 경응대학 의과(醫科)에 다니는 중이고 고향에는 그의 본처와 네 살난 딸까지 있었다.

그러므로 무전의 안해는 가끔 놀러오는 문자와 마주 앉으면 형식에게 대한 이야기를 잘 하였다.

그리고 이제 스물둘 난 형식이가 네 살 난 딸이 있다는 것을 저희간에는 놀라운듯이 이야기를 하였다.

문자는 예전에 무전의 집에 놀러올 때마다 무전의 안해가 형식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문자의 머릿속에는 문자 자기와 아주 썩 정다운 형식이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어찌하다가 눈에 띄는 형식이를 매우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형식이는 문자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문자가 놀러온 것이 눈에 띄더라도 문자에게 대하여 아무런 인상도 생기지를 아니 하였다.

문자라 하는 여자가 이 세상에 있는지를 그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금년 봄방학 노는 동안에 형식이가 있는 옆의 방으로 문자가 있으러 온 그때부터 형식은 문자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아침저녁 인사만 할 뿐이고 매 우사이가 서어하였다.

그러나 문자에게는 이것이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못하였다. 문자는 예전부터 형식을 심상치 아니한 눈으로 보아왔으므로 그의 마음은 벌써 말 할 수 없는 무 긋한 힘에 끌리어 형식에게로 향하였다.

날이 감을 따라 두 사람은 차차 가까이 상종을 하게 되고 형식도 문자를 매우 사랑스럽게 보았다.

문자의 얼굴은 매우 귀염성이 있고 그의 눈동자는 그윽히 다정하였다.

더우기 문자의 말하는 것은 참으로 귀여웠다.

인제 대여섯 난 어린아이가 잘 돌지 아니하는 혀로 떠듬떠듬 말을 하듯이 문자는 말을 할 때에는 손으로 앙징스럽게 형용을 하며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여 가면서 동글고 가는 목소리로 종알종알 말을 하는 말소리와 그 모양은 참말이지 귀여웠다.

물론 이것은 문자의 천성이다.

형식이는 오래지 아니하여 문자에게 마음이 매우 끌리게 되었다.

문자의 그 그윽한 육감적 아트모스피어(atmosphere)는 더욱이 형식의 마음을 설뚱거리게 하였다.

형식은 일삼아 문자를 말을 시켜놓고 번히 앉아 그 말하는 입을 바라보기를 즐겨하였다.

문자가 무전의 집으로 온 지 일 주일쯤 지나서는 두 사람은 아주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저녁마다 형식은 문자의 방으로 건너가서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모르고 이 야기도하며 화투도 치고 놀았다. 그리고 낮이면 꽃구경 가기, 연극장 가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 두 사람의 사이에 의문이나 주저보다 한 걸음 앞서 두 사람을 이끄는 그 무거운 인력(引力)이 점점 그 힘을 더하여 가게 되었다.

그들이 마주앉아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아주 건조무미한 것 이었지마는 그 둘만은 아주 재미가 꿀이 듣는 듯하여 '그만그만’하는 맘은 있으면서도 그대로 눌어붙어서 항용 밤 열두시까지나 새로 두시나 세시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놀다가도 형식이가 잠을 자려고 자기 방으로 건너와서는 문자의 방과 자기 방 사이에 있는 후스마(샛문)를 사이가 벌어지지 아니하게 꼭 바로잡아 닫기를 결코 잊지 아니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문자는 그 문 닫는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며 심상치 아니한 미소가 눈초리에 떠올랐다.

봄은 차차 늙어가고 일기도 제법 따스해져서 마침 창문을 열치고 시들어진 꽃 사이로 달구경하기가 알맞은 때가 되었다.

이날 밤에도 형식은 문자의 방으로 가서 남으로 향한 창문을 열치고 그 문턱에 문자와 나란히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며 달구경을 하였다. 밤은 적이 깊었다. 온 하늘에는 고기비늘 같은 구름조각이 곱다랗게 가득 덮였고 그 사이로 아직 만월( 滿月) 이 채 되지 못한 달이 매끄럽게 건너가며 숨바꼭질을 하였다.

가끔 불어오는 가는 바람은 맞은편 집 정원에 가득 들어선 사꾸라나무에 나부껴시든 흰 꽃잎을 눈발같이 날렸다.

문자는 하얀 바탕에 널찍널찍한 줄이 길이로 진 자리옷 하나만 입고 오도카니 앉아 달과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가슴은 거의 다 벌어져서 보얀 젖통이 보 일락 말락 하였다.

푸른 달빛이 비치는 문자의 얼굴에서는 그윽한 정취가 흐르는 듯하고 흐트러 진 머리칼 두서넛이 가끔가끔 바람에 날려 그 얼굴로 살랑살랑 스쳐 지나갔다.

형식은 달구경은 그만두어 버리고 취한 듯이 문자의 얼굴과 흰떡으로 빚은 듯이 보드랍고 하늑하늑한 젖가슴을, 벌린 입을 다물 줄 모르고 바라보았다.

보는 사람의 눈이 없는 듯한 이 단출한 장소, 듣는 사람의 귀가 없는 듯한 고요한 밤에 춘정을 띠고 달을 우러러보는 월하(月下)의 미인 문자와 마주 앉은 형식은 아무래도 평온한 기분과 안정된 정신의 작용으로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문자는 얼마 동안이나 달을 바라보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머리를 돌려 그 윽한 추파가 흐르는 눈동자로 형식을 보다가 형식이가 그처럼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것을 보고 자기 허벅다리로 형식의 허벅다리를 가볍게 슬쩍 문지르며 "에그머니......무얼 그리 보세요 ?"

하고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흔들며 못견디겠는 듯이 웃었다.

"에, 그만 자겠소......"

하고 형식은 온몸이 야질야질 녹아나는 듯하여 그대로 벌떡 일어서며 ' 안녕히 주무시오’ 란 말을 하고 얼핏 자기 방으로 건너가서, 그런 중에도 잊지 않고 샛문을 꼭 바로 닫은 뒤에 펴놓았던 이불 속으로 푹 들어갔다.

그는 잠을 자려 하였으나 잠은 오지 아니하고 불일듯 일어난 성욕을 억제 하려하니 놓친 기회가 한없이 안타까왔다.

문자는 형식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형식이가 여전히 샛문을 닫는 것을 보고 혼자 속맘으로 〈오도꼬와나 바가다와〉(사낸 모두 바보예요) 생각을 하였다.

그로부터 이어 사흘 밤 두 남녀는 속을 태웠다.

아무렇지도 아니한 듯이 둘이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곤 하였으나 조마조마하고 졸이는 맘이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불안하며, 일어나는 성욕은 극도에 다다랐다.

그러다가 그대로 흩어져 각각 쓸쓸한 빈 자리에 누워 잠을 자려 하면 안타까운 마음과 섭섭한 생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사흘 동안이 그들에게는 십 년 감수나 하는 듯이 괴로왔다.

마주 대하여 앉으면 부끄런 맘, 조마조마하는 맘, 붉어지는 얼굴, 두근거리는 가슴에 차마 둘 중에 한 사람도 먼저 손을 댈 기운이 나지를 아니하다가 그대로 돌아서지 아니하는 발길로 헤어져 저 혼자 눕게 되면 두 방 사이에 있는 샛문 하나가 천리나 만리나 서로 떨어진 듯하여 마주 앉았을 적에 결단을 못낸 것이 끔 찍이 안타까와서 후회를 하였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저편이 잠을 벌써 자나 하여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저 편이 지금 문을 방긋이 열고 자기 이블 속으로 아무 말 없이 들어오지나 아니하나란 허망한 희망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온몸은 자릿자릿 하여 아랫배가 노글노글한 성욕을 억제하느라고 몸을 이리저리 틀다가 바로 눕지를 못하고 엎딘 채 겨우 잠이 들면 진저리가 치게 무서운 꿈을 꾸곤 하였다.

이처럼 맘을 보채며 서로 속맘으로 '내일 밤엔 꼭꼭’하고 믿어오다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문자는 형식을 보고 밑도 끝도 없이 다만 생긋 웃으며 의미가 간곡한 말소리로 "<오도 꼬 와나 바가다와〉(사낸 보두 바보예요……)"

하였다.

이 말은 그 사흘 동안 문자가 밤마다 한번씩 속으로 되풀이를 하여왔다.

"왜?"

하고 형식은 묻기는 하였으나 속맘으로는 '흥……’ 하고 의미가 깊고 내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자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에 형식은 한짝만 열렸던 샛문을 모조리 열어젖히며 심상한 말로 "인젠 날두 다수어지구 그랬으니까 이 샛문은 열어버리구 잡시다 우리?"

"네, 그러세요…… 원체 그게 좋아요…… "

하고 문자도 역시 피상적으로 천연한 얼굴빛을 나타내었다.

형식은 마음을 굳게 먹고 신문을 들고 앉아 읽으려 하였으나 그의 눈에 보이는 글은 모두 '사낸 모두 바보예요’라고만 쓰인 듯하여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그래 형식은 머리를 득득 긁고 앉았는 차에 문자가 나직한 소리로 불러 말을 하였다.

"네, 형식씨…… 왜 이 방으로 아니 오세요? 여기 엎디어 달구경을 하니까 참 좋아요. 어서 오세요. 네, 형식씨…… "

"네, 갑니다…… "

하고 형식은 자리옷을 입은 채 문자의 방으로 건너갔다.

〈문자는 펴놓은 이부자리 속에 엎디어 달을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모로 일으켜 팔을 돋우 베고 한팔로 자기가 덮은 이불자락을 떠들쳐 주며 "자, 일루 들어오세요. 여기 엎디어서 저 달 좀 보세요. 아이고 어찌면 저리도 달이."

하고 형식과 달을 번갈아 보며 형식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형식은 좀 머뭇머뭇하다가 그대로 문자가 떠들어 주는 이불 밑으로 푹 들어가두 팔로 턱을 괴고 엎디어 달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차마 결단을 못하고 다만 달만 바라보았으나 그의 눈에는 달이 달로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달 그것처럼 정취가 넘치는 문자의 나체가 보이는 듯하고 그의 손은 아까 문자가 자기를 들어오라고 이불을 들춰 줄 적에 보이던 그 볼록 내민 오리알 같은 젖통으로 ㅡ 그리고 그 아래로 손이 갈까말까 하였다.

문자는 팔을 돋우 베고 모로 누워서 빨개진 형식의 귀밑때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몇 번 꾸벅꾸벅 졸더니 머리를 내려뜨려 요 위에다 고개를 대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형식은 한참 동안이나 털끝 하나 꼼짝 못하고 간을 녹이다가 겨우 문자의 자는것을 한번 흘끔 보더니 그대로 엎드려 저 역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참으로 잠을 잤는가?

아니다. 결코 잠을 잔 것이 아니다. 다만 잠을 자는 체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서 잠이 올 리가 만무한 것이다.

한참만에 형식은 잠덧을 하는 것처럼 팔을 들어 문자의 가는 허리를 그러안고 다리를 들어 문자에게로 들어 얹었다. 문자도 기다리고 있은 듯이 ㅡ 하나 잠덧을 하는 듯이 ㅡ 고개를 들어 형식의 팔을 베고 너그러운 그 품에 바싹 들이 안겼다.

형식은 잠깐 눈을 떠서 문자의 얼굴을 탐이 나는 듯이 굽어다보다가 문자의 반짝 뜨는 눈과 마주쳤다. 문자는 부끄럼을 피하려고 얼굴을 형식의 가슴에다 다시 폭 파묻고 온몸에 힘을 발끈 주어 형식에게 껴안기더니 다시 부족함을 깨닫고 한 꺼풀 입은 자리옷이나마 마져 벗어버렸다.

형식도 떨리는 손으로 띠를 풀고 옷을 벗어버렸다.

두 낟알 몸뚱이는 다시 한번 힘있게 껴안을 제 문자의 설면자같이 보드라운 살은 형식의 굳은 몸에 착착 들어붙었다 ㅡ 마치 울퉁불퉁한 돌멩이에 차진 찰떡이 들어 붙듯이.

형식은 바로 누워 주는 문자의 나체 위에 덮칠 제 그의 눈초리와 입가에는 형식이 자신의 의사에게 나오지 아니한 미소 ㅡ 계면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밤은 훨씬 깊어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다.

높다랗게 솟은 달은 열어젖힌 창문으로 두 사람의 하는 짓을 굽어다 보며

"어랍시요, 조것들.보게……"

하고 하하 웃는 듯하였다.

뼈끝을 녹여내는 듯한 극락의 순간이 지나갔다.

형식은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벗었던 옷을 주워 입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일어섰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하였다 물론 아무에게도 들려나지 아니하고 또한 들려날 리도 없었지만, 그의 가슴은 그의 의사를 잡아 누르고 맘껏 두근거렸다.

문자에게 '잘 자요’ 하는 한마디 말은 자기가 듣고도 놀라울 만큼 떨렸다.

문자는 이제껏 이블을 푹 덮어쓰고 부끄럼을 피하다가 형식이가 가려함을 보고

"가지 말구 여기서 같이 자요…… "라고 역시 떨리는 소리로 애원하듯이 겨우 말을 하고는 다시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죽은 듯이 누웠었다.

형식은 마음에 그다지 당기지 아니하였으나 그래도 문자를 그대로 떼칠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다시 누워 문자를 품고 불안은 하나 그 대신 정취가 진진한 하룻밤을 새웠다.〉 9

그 이튿날이다.

문자는 무서운 짐승에게 휘달린 어린 양처럼 풀이 죽어 슬픈 눈동자로 형식 의방을 가끔 건너다보며 홀로 생각이 깊었다.

'어젯밤 일, 아! 어젯밤에 지나던 일…… 난 인젠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없어졌구나. 참 꿈결 같다. 하지만 저인(형식) 썩 다정스러운 이야. 말하자면 내가 저 일 유인한 셈이지…… 내가 저일 참말 사랑하나? 아닌게아니라 저이가 맘에 썩 좋아, 아주 썩…… 저이 같으면 한평생 믿고 살겠는데…… 그렇지만 저이가 맘 이 어떤 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저이도 날 사랑하나? 그렇잖고 그저 일시적 쾌락이나 취하느라고 그런 게 아닌가? 그거야 어쨌든 저이가 날 사랑하기만 하였으면 좋겠구먼 두…… 저이 맘이 어떤구? 나보고 음란한 계집애라고나 않나? 아이 고참, 저인 부인이 계시지…… 아! 이걸 어쩌나 ! 내가 그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게 무슨 짓이야. 저인 또 조선 양반이고 난 일본 사람인데…… 또 내가 우리 집 외 딸이니까 저이가 나하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려면 저이가 우리 집으로 양자( 養子) 를 들어와야지…… 아 ! 아무래도 저이와 난 결혼할 형편이 못되는데…… 난 인젠 버린 몸이야. 몸은 버리고 사랑은 잃고…… 이걸 어쩌나 ! 난 인젠 저이 아니곤 살 수 없어. 어저께까지도 별로 그러진 않더니 오늘부터 갑자기 이래…… 오늘부텀이야. 아이고 이걸 어쩌면 좋아 ! 저인 왜 아무 말도 없이 저러고만 있나?’ 하고 참다 못하여 답답한 가슴을 안고 엎드러져 울었다.

형식은 문자의 깊은 속을 몰랐다. 다만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부끄럼과 겁나는 맘으로 그러는 줄만 알았다.

그래 그는 옆으로 가까이 가서 잘 위로라도 하고 싶었지만 남의 눈에 뛸까 하여다만 두어 마디 말로 타이르고 그대로 나가 놀다가 그날 밤 늦게야 돌아왔다.

형식이가 그처럼 나가는 것을 보고 문자는 더욱 마음이 조민하여지고 인제는 형식이를 영영 못 보나 보다' 싶어서 그날 해가 저물고 밤이 깊도록 울기도 하고 생각도 하여 보았으나 아무 좋은 도리는 없고 다만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그는 무전의 안해에게 의심을 받을까 겁내어 몸이 편치 못하다는 핑계를 하고 물론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하루 사이에 그의 형용은 몹시 파리하여졌다.

밤이 늦어서야 형식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문자는 매우 반가와 하였다.

형식은 돌아와서 말할 수 없이 깊은 비수(悲愁)를 띤 문자의 추렷한 형상을 보고 마음에 급히 변화가 일어났다.

사자에게 몰려가던 어린 양이 인제는 힘이 다하여 그 자리에 엎드러져서 잡아먹기만 기다리고 아무 반항과 원망이 없이 다만 두려움과 애처로운 눈동자로 사자의 상판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그렇듯한 '죽음’의 빛이 가득한 문자의 얼굴을 본 형식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자비(慈悲)의 설움에 복받쳐 목이 메어지는듯 하여 잠깐 동안 말을 내지 못하였다. ㅡ 어린 양을 쫓아가던 그 사자가 그 양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보고 눈물을 머금은 듯한 그러한 정경으로.

문자는 그러한 중에도 형식이 자기를 보고 반기어 맞는 것을 본 형식은 마음에 어찌나 느긋하고 그리운지 그대로 문자를 쓰러안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더운 키스를 하였다. 두 사람은 한 가지로 창문턱에 걸터앉아 달을 띠고 이야기를 시작 하였다.

문자도 물론 문자거니와 형식이도 세상에 나서 이만큼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거죽이 두터웠고 그동안 문자를 사랑하는 맘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도 그다지 진진한 정은 아니었 었다.

"형식씨……"

하고 문자가 먼저 입을 열어 형식을 불렀다.

"응……"

하고 형식은 문자를 바라보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저, 아따 저…… "

하고 문자는 부끄러운 듯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하였다.

형식은 한층 더 다정스러운 말로

"무에야? 응? 말 해요…… "

하고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면 말할 테니 흉보지 마세요."

"흉? 흉은 무슨 흉이야?"

"그러면 저…… 어제 저녁 일을 형식씬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 말을 겨우 하여 놓고 문자는 머리를 숙였다.

"어제 저녁 일?"

하고 웃으며 "어제 저녁 일이야, 그야 말하자면 그저…… 말하자며 우리가 잠깐 잘 못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지…… "

"그러면 형식씨 절 사랑하세요?"

하고 문자는 말을 하고 또 머리를 숙였다.

〈형식은 얼굴에 흡족하여하는 웃음을 띠고 손끝으로 문자의 턱아리를 살짝 들어 그의 얼굴을 탐나는 듯이 굽어보다가 다시 한 팔로 그 목을 그러안고 붉은 그 입술을 한번 쪽 빨았다.〉 그리고 그의 아무말 없이, 다만 의미가 간곡하게 미소하며 문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문자의 요구하는 전부를 말하였다.

문자는 형식의 그 흡족하여하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무엇을 문득 생각한 듯이 다시 얼굴빛이 새 초롬하 여지며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서로 사랑은 한대두 그것은 보구 못 먹는 떡이야요. 전 그렇게 생각 해요…… "

하고 여기서부터는 아주 절망적으로 부르짖으며

"형식씨! 저하구 정식 결혼하실 테야요? 우리 집으로 양자 들어오실 테야요? 당신은 지금 고국에 부인이 계시잖아요? 네 살난 딸두 있지요? 당신은 조선 양반 이구 전 일본 계집이 아니야요? 전, 전, 당신이 조선 양반이건 청국 사람이건 제가 사랑하는 이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ㅡ 예전에 당신이 하신 말씀과 비교해 보면 조선 양반이신 당신은 ㅡ 일본 사람 한테로 양자 들어올 형편이 못 되잖아요? 양자두 양자거니와 당신은 지금 남의 남편이시구 남의 아버지가 아니세요? 형식씨! 전 어쩌면 좋아요?"

하고 형식의 무릎에 엎디어 흑흑 느껴 울었다.

형식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자기 역시 아무 도리도 없는 듯이 다만 난처한 빛을 얼굴에 띠고 말없이 문자의 모양을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문자를 일으켜주며 "울긴 왜 울어요 ! 많이 울어서 좋은 도리만 있으면 얼마든지 눈물이 말라 나오지 않을 때까지라두 울겠지만, 지금 와서 울어야 남보기만 흉했지 별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자, 울지 말구 우리 둘이서 잘 의논을 해보자구…… "

하고 어루만지듯이 달랬다.

문자는 겨우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앉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형식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하고 형식은 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내었다.

"우리가, 남녀가 서로 결합하는 제일 큰 조건인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문잔 날 사랑하지 ? 난 문잘 사랑하구…… 그러니까 그 외의 다른 어려운 일은 우리가 사랑하는 힘으로 이겨내면 그만이 아니야? 만일 그 어려운 일을 이겨내질 못한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힘이 약한 표적이 아니라 구? 원체 남녀가 사랑을 한다든지 있던 사랑이 없어지든지 하는 것은 우리 사람의 의사론 어쩔 수가 없는 게야…… 이번 일로만 해두 문잔 내가 그렇듯한 처지에 있는 줄 문자가 모른 것이 아니지만…… 나도 역시 문자의 처지가 그렇듯 한 줄을 모른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두 오늘 이 지경이 된 걸 보면 사랑의 힘이란 범백을 초월하는 맹목적의 것이구 또한 사람의 면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문자두 깨달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인제부터 또다시 그 운명에 앞서서 힘 미치는데까지 노력을 하고 결과에 가선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단 말이야."

"형식씨 말씀 같아선 속이 시원한 듯두 합니다만 우린 그 운명에 앞서 노력만이라도 해볼 수 없는 참혹한 처지에 있질 않아요? 형식씬 아무래두 지금 남의 아버지 시구 남의 남편이 아니세요?"

"그거야, 이혼을 해버리지…… 계집애가 있는 거야 문자가 기르구…… 라고 무엇을 아주 과단을 하기는 하나 그래도 뒤로 끌리는 힘이 있어 확확 말을 못 하는듯 하였다.

"그러면 전 벌써 남의 어머니가 되나요?"

하고 문자는 잠깐 철없이 웃었으나 그것은 곧 사라져버리고 다시 참한 말로

"그렇지만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선 어쩌시라구요? 저 같은 사람 때문에…… " "그거야 문자 때문에 이혼을 하나 ? 난 벌써부터 이혼을 해버릴 맘이 있었지만 그래두 차마 결심이 들어서질 않아서 지금까지 주저한 것이니까, 말하자면 문자는 다만 새로운 자극만 준 셈이지…… 어쨌든 한번 이혼은 면치 못할 게니까?"

"지금 계신 부인은 어떠하신 이에요?"

"기왕 말이 났으니까 그러면 내가 자세한 이야기나 해보지…… "

하고 형식은 한숨 한번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장갈 들긴 열여섯 나던 해구 그가(자기 안해) 열다섯 나던 해댔나 그랬지. 그래 그때엔 무슨 철을 알댔나.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지…… 또 아닌게아니라 맘에 좋긴 하더군, 장갈 든다니까…… 그래 장가 들구 보니까 아주 썩 예쁜 색시가 ㅡ 본시 얼굴은 아주 보잘것없이 생기구 키는 난장이처럼 작았지만 그땐 어찌 그리두 곱게 보였던지! ㅡ 내 앞에서 아른아른하며 내 비윌썩 잘 맞추어주구…… 그리구 처가엘 가면 ㅡ 내가 가기나 하나. 왠 사인굘 가지고 날 모시러 오댔지 ㅡ 그래 아주 참 그건 부원군 팔자야. 그리구 우리 장모 라나 하는 사람은 어쩌면 날 그리두 귀애하는지…… 그리구 그때 내가 서울서 중학교 이년급에 다녔으니까 집에 있을 수 있나. 그래 서울 있으면서두 일상 집 생각이 간절했댔지…… 그리구 학기시험이 끝이 나면 그날 밤차로 바로 집엘 왔겠지…… 그게 한시라도 어서 보고 싶어서…… 그처럼 열여섯 일곱 여덟 아홉 나던해 봄에 중학굘 마치구 이 동경으로 오는 길에 집엘 들르잖았나. 참말이지 그때 이별 하긴 싫더군. 그래 둘이서 붙들고 울기까지 했겠지……"

하고 여기서 형식은 잠깐 말을 그쳤다. 말하는 동안에 즐겁던 옛일을 회상 하는 그 의 얼굴에는 가끔가다 기쁜 미소까지 떠올랐다.

문자도 형식을 따라 웃어가며 재미스럽게 들었다.

"그래 그처럼…… "

하고 형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그처럼 그동안 둘이서 정이 꿀같이 지내다가 내가 동경으로에온 뒤에부터 맘이 변했지…… 내가 처음 와서 얼마 동안은 그가 그리운 생각두 나구 보구싶 기두 하더니, 두어 달쯤 지나니까 그제는 일절 보구 싶은 생각은 없어지구 도리어 가만히 그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면 싫구 미운 생각이 나더란 말이야. 그 래그 해의 여름방학에 집엘 돌아가 보니까 아니나다를까 예전엔 맘에 들구 귀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아주 딴판으로 얄밉구 싫어 보이겠지. 그리고 아일 배었다 구배를 앞으로 뚝 내밀구…… 그래 일절 그 담엔 돌아보질 않구 남 보듯 했댔지. 그래 그는 예전 같음만 대구 나한테 말두 좀 해보려구 하구 그랬지만 내가 들어 먹어 주나, 웬걸…… 일절 안방에라군 발걸음도 않고…… 그러는 한편으론 내 가속의 어느 구석인지 한편이 빈 듯두 하구 공연히 맘이 슬퍼서 저절로 눈물이 흐 르기두 하구 어떤 때엔 세상이 귀찮아서 곧 죽어버릴 생각두 나군…… 그러는데다가 일 년에 한번씩 집이라구 돌아가서 그를 보면 한층 더 짜증이 나더란 말이야. 그래 가끔 먹을 줄 모르는 술이나마 몇잔 집어먹군 안방으로 들어가서 이혼을 한다는 둥 자기 친정으로 가라는 둥 하며 성활 멕이구…… 그리구 우리 어머니더러는 장가 잘못 들여주었다구 짜증을 내구…… 그러니까 우리 집에선 공 방이 들었느니 일본다 첩을 얻어 두었느니 하면서 공방풀일 한다구 굿을 하구 경을 읽구 야단을 한 도무지 소용이 있나. 그의 성질이야 말이지 참 온순하구 썩 다정하지…… 내가 그처럼 욕지거릴 하구 성활 먹여두 곱다시 앉아 들을 뿐이지 말 대 꿀한 번하거나 불쾌한 얼굴 한번 보인 적이 없구, 더우기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은 하질 않으니까. 정 참기 어려우면 저 혼자 울기나 할 뿐이지…… 그러다가 내가 작년 겨울방학에 집에 돌아가 ㅡ 이혼을 해버리려구 ㅡ 그날 밤에 바로 맘껏 조르구 나서 '이편이 이 세상에서 내 아내란 명색을 가지구 있는 동안엔 인제 난한 시라두 더 살 수가 없으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지 않으려거든 이 자리서 곧 이편의 집으로 가버리구 나하구 이혼을 하게 하라’구 내리 졸라댔지…… 그래 두 여간 해서 말대꿀 해주어야지. 그날 밤에 나두 술두 아니 먹고 그랬건만…… 그러다가 내가 하두 못견디게 조르니까 겨우 입을 열구 하는 말이 '당신이 날 보구이 자리서 당장 죽어버리라시면 두말 않구 죽기라두 할 것이니 제발 나가란 말만 말아 주오’하구 그만 느껴 울겠지."

여기서 형식은 한숨 한번을 내쉬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

문자는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져 가지고 듣다가 "형식씨 ! 제발 마세요. 차라리 저 하나만 죽어버리면 그만 아니에요?"

하고 몸부림이라도 할 듯이 울었다.

"죽어 ? 죽긴 왜 죽어, 글쎄? 누가 문잘 잘못했다나? 그러지 말구 담말을 들어 봐요. 그래 그때 마침 계집애(자기 딸)가 제 할머니한테서 놀다가 마침 들어오겠지…… 내가 그동안 계집애만은 썩 그리구 귀여워했댔으니까 날 따르던 터이라…… 들어와서 제 어미가 우는 것을 보구 내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며 ' 아부지 아부지, 엄마 으으 운다’하구 제 어밀 가리키겠지…… 그걸 보니까 별난 감상이 다 나든군…… 그리구 내가 그때 그 자리서 너무 잘못했단 생각두 나구…… 그래두 맘에서 우러나는 귀여운 생각은 덮어 놓구 눈을 딱 부릅뜨구 '요년!’ 하구 나무랐더니 그게 노여워라구 비죽비죽 울면서 제 어미 무릎에 가 앉아서 날 가리키며 제 어미더러 '엄마 엄마, 아부지 에비다 아부지’ 그런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 어민 그걸 쓸어안구 눈물을 닦아 주구 젖을 먹이며 더욱 울겠지…… 내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니까 애처로운 생각이 무럭무럭 올라와서 내 눈에 서두 단번에 눈물이 흐르는 듯해요. 그래 와락 달려들어 두 어미 새낄 꽉 쓸어 안구 실컷 좀 울었으면 사라진 옛정이 다시 솟아날 듯해요. 그래 나두 다시 아무 말두 못하구 있다가 도로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지금 와선 예전처럼 밉구 싫은 생각은 사라진 듯도 해. 그리구 그에게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려면 불쌍한 생각이 앞을 서구……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혼을 해버리면 한평생 홀과수로 늙기 아니면 그대로 타락이 되어버릴 게니까. 그가 지금 날 떠나서 저 혼자 바른 앞길을 열어 나갈 힘이 있어야지……'보름날’이란 말을 못해서 열닷샛날이라구나 하 구제 생일이 구월이라 했다 삼월이라 했다 하는 위인이야. 이렇듯한 처지에 있어가지구 이혼을 하려니까 낸들 약간 맘이 아플까 봐서? 문자는 그걸 차마 못 봐서 문자가 죽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가령 지금 문자가 죽어버린다든지 혹 날 저 버리구 다른 곳으로 간다든지 하면 난 그대로 이성에게 대한 요구가 사라져 버릴 듯 싶은가? 문자가 없더라두 다시 다른 여성이 내 가슴에 젊은 피가 있는 동안엔 언제든지 지금의 문자처럼 내 앞에 나타날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혼일라컨 마세요. 그처럼 어지신 부인을 저버리시다니요? 저 같은것은 열번 죽어두 그이한텐 따르질 못할 게니까요. 전 그저 지금의 이것이면 만족이에요. 당신이 맘만 변치 않으시면…… "

하고 문자는 열정적으로 말을 하였다.

"지금의 이것으로 만족을 해?"

형식은 문득 불쾌한 듯이

"그러면 나하구 정식으로 결혼은 못하구 또 변치두 않구…… 그러면 그것이 무슨 말이야? 그래 그러면 처, 처, 첩으로 만족을 한단 말이야?"

하고 문자를 끄윽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첩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첩이 아니라 첩보담 더한 이름이라두 관계 찮아요. 본처니 첩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에서 영화나 명예하구 작별한 저 한텐 그다지 구별이 없는 거예요. 오죽하면 이다지 팔자가 기구할라구요!"

하고 문자는 자포자기가 되어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가 다시 "그러니까 저한텐 이 세상에 아무것두 없고 다만 형식씨 당신 하나만 있을 다름이에요. 그리구 진정 말이지 당신 부인 같으신 이하구 함께 있어보기가 원이에요. 형식씨 !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하고 애원하듯이 말을 하고 무량한 감개를 억제치 못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느껴 울었다.

형식은 비창한 말로

"아무리 문잔 그런대두, 난 내가 사랑하는 문자로 봐서 그럴 순 없어. 사회가 또 허락칠 않아……"

하고 한숨을 거듭 내쉬며 눈을 위로 치뜨고 오래 생각을 하였다.

"자, 울지 말구 도 내 말을 들어요. 어려운 대목이 또 하나 남았으니까…… "

하고 형식은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어 말을 내었다.

문자도 울음은 그쳤으나 아직도 흑흑 느끼는 것은 억제를 못하고 띵띵 부은 눈으로 형식을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다.

"인제 또 한가지 것은 양자 문젠데…… 진정 말이지 내가 양잔 갈수가 없는 형편이야.〈난 어디까지든지 조선 사람이니까…… 지금 피정복자의 설움 가운데서 자기네의 존재까지도 의심할 만한 조선민족에게는〉'사랑이나 주의에는 국경이 없다, 는 말은 그다지 힘차게 울리질 않고…… 또 그것이 결코 무리의 일이 아니야. 이렇듯한 동포의 큰 기대나 희망을 저버리구서 내가 문자하구 결혼을 해서 피 섞인 자식을 뒤에 끼치는 것만해두 여간 큰일이 아닌데다가, 더구나 내가 아주 일본 사람이 되어버린단 것은 너무나 내가 잘못이 아니라구?"

문자는 잠깐 동안 무엇인지를 까막까막 생각 하다가

"사정이 벌써 이리 되었으니까 양자 문제 같은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게 없잖아요? 정식으로 결혼을 못하게 된다면 양자 문젠 도무지 일어나질 않을 게니까요. 그리구 만일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 때에 형식씬 양잘 들어오지 못 한다시 구우리 어머닌 양잘 아니 들어오시면 아무리 해두 결혼 허락을 않으신다면 전 그때엔 우리 집과 절연을 해버리면 그만 아니에요. 그러면 전 아주 자유니까…… "하고 아주 담대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형식은 문자의 이 말에 자기 몸이 바싹 졸아들어 문자의 무릎 앞에 꿇어앉은 듯한 부끄런 생각과 감사한 생각이 일어나 문자의 손을 꽉 잡고, 문자에게 그만 한 용기가 있느냐?' 고 묻는 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 현실에서 멀리 떠난 두 사람의 꿈은 더욱 깊어진다.

10

그들 형식과 문자 두 사람은 울어야 할 엄청난 어려움이 앞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낙도 또한 그에 지지 아니하게 컸었다.

그들은 어려운 일에 대하여 생각도 하지마는 즐거운 앞길도 서로 의논하고 계획 하여 보았다.

둘이서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가서 형식은 병원 하나를 잘 세원 돈도 모으고 자선사업도 하고 문자는 소학교나 하나 세워 조선 아이들을 모아놓고 열심히 가르치고…… 사회의 방면으로는 그러하고, 가정에서는 형식이가 병원에서 몸이 피곤하여 돌아오면 문자는 피아노 위에 앉아 청아한 곡조로 위로나 하고…… 예쁘장스러운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때맞추어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그렇지만 만일 형식이가 문자와 부부가 되어가지고 그처럼 하면 사회에서 혹 배척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조선으로 갈 것이 아니라 남미나 남양이나 아프리카로 가서 천연스러운 토인(土人)들을 상종하여 가며 한평생 사는 것이 좋겠다는 둥, 그것도 좋지만 태평양이나 대서양 ㄱ운데로 가서 무인도나 하나 발견하여 가지고 그곳에서 한평생 살면 들의 사이에 정의도 변치 않고 아주 썩 좋겠다는 둥 ㅡ 이처럼 그들은 꼭같은 공상을 하며 그 공상이 인제 장차 꼭 그들의 눈앞에 실현 될 것이란 것을 의심치도 아니하였다.

이처럼 한 열흘 동안 그들은 근심을 잊고 꿈 같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흥분 된 그들의 머리로는 첩경 생각지 못한 큰일이 생겼다.

하루 밤에는 두 사람이 전과 같이 문자의 방에서 서로 품고 잠이 든 사이에 별안간 층층다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닫혔던 문이 벼락같이 열리며 집주인 무전이가 성이 불같이 나서 소리를 치며 "형식이, 왜 자기 방에서 자질 않구…… 웬일이야 이것이?"

하고 눈을 부라렸다.

무전의 부처는 예전부터 두 사람의 행동을 의심하여 왔었다. 그래 그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아니하고 엿듣고 있다가 그 확실한 것을 알고 그리한 것이다.

무전은 자기가 문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리한 일이라고 나중에 변명은 하였지마는 피차 머리가 식은 뒤에 그 일을 생각 하고 형식과 문자는 그 수단이 너무 상스러운 것을 새삼스럽게 불평이었었다.

형식은 일이 벌써 그릇된 줄을 알고 서서히 일어서서 말을 하였다.

그는 침착하여 가지고 냉정히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그의 말소리와 가슴은 남이 보면 우스울 만큼 떨렸다.

"무전씨…… 이것이 물론 우리가 잘못된 일이니까 다시 무어라구 말할 말이 없소. 내일 날이 밝거든 정중히 사과할 것이니 이 밤중에 너무 그리 요란히 굴진마 시오…… "하고 겨우 말을 하였다.

문자는 얼굴이 흙빛같이 죽어 사지를 불불 떨며 아무 말도 못하고 한편 구석에가 섰었다.

무전은 형식을 그저 곧 달려들어 두들기기라도 할 듯이 독살스러운 눈으로 흘겨보다가 그 눈을 다시 문자에게로 돌리며

"문자가 나쁘다, 형식이두 나쁘구…… "

하고 말을 하여 부딪고는 그대로 발을 쿵쿵 구르며 무어라고 남이 알아듣지 못 하는 말로 두덜거리면서 내려가 버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흩어져 잤다.

형식은 그래도 남자라 무전에게 들려난 일을 그다지 두렵게 생각을 아니하였으나 문자는 밤이 새도록 한잠도 자지를 못하고 근심을 하였다.

그 이튿날 형식은 일찍 일어나 문자에게 "인제는 이 위에 이 집에 더 있을 수가 없으니 혼자 있기가 좀 안 되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중야에 있는 문자의 집으로 가면 자기가 매일 찾아가마"는 말을 이르고 자기도 하숙을 찾으러 나갔다.

두 사람은 뒷일 조처에 대하여 상의도 좀 하여보고 싶었지만 주인이 또 들으면 창피한 일이 또 있을까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나가면서 주인에게 어제 저녁일이 매우 잘못된 일이니 용서를 하고, 또 자기는 그날로 집을 옮기겠다는 말을 하였다.

무전은 성이 좀 풀어져서 그런지 어쩐지는 모르나 자기는 자기 책임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너무 허물치 말라고 심상히 대답을 하였다.

형식은 그날 저물어서야 돌아와서 문자가 짐도 챙기지 아니하고 추렷이 앉았는것을 보고

"무얼 그리 근심해? 기왕 그리 된 걸 가지구…… 하늘이 무너져두 솟아날 구멍은 있을 테니까 염려 말구 어서 짐이랑 챙겨요. 뒷일 조천 낼이든지 내가 중야 로 찾아갈 게니 그때 둘이서 의논 하구…… "

하고 아주 두려울 것이 없는 듯이 강경하게 말하는 그 내면에는 무전에게 대 한 불평이 나타났다.

문자는 금시 울기라도 할 듯이

"그렇지만 저 혼자 어떻게 가 있어요? 그 크낙한 집에 가서…… 낮엔 그대로 있는 다지만 밤엔 혼자 어떻게 해요? 제 어머니가 내일이라두 오실지 모르니까 여기 며칠 더 있어 봐요…… "

"그거야 될 수가 있나. 더구나 문자 어머니가 오시면 난 무슨 면목으로 보라 구…… "

"그러면 오늘 저녁에 저하고 같이 우리 집으로 가요, 네 형식씨…… 전 죽어도 혼잔 못 가요…… "

"그래…… 그러면 난 먼첨 내 짐을 옮길 게니까 문잔 정거장에서 기다리라고…… 그러면 짐만 옮겨놓고 바로갈 게니까…… "

"그러면 그러세요."

하고 문자는 저으기 안심되는 듯이 짐을 챙겼다.

형식도 자기 방으로 가서 분주히 짐을 챙겼다.

그러자 마침 일이 공교히 되느라고 아래층에서 문자의 모친 천대부인이 층계를 쿵쿵 구르고 올라오며 아주 분개한 듯이 인사하기도 잊어버리고 "형식씨! 어제 저녁에 참 봉변을 하셨다면서요? 참 미안스럽습니다.

문자 거기 있니? 문자야…… 저앤 왜 못생기게 우니?"

하고 문자와 형식에게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말을 한참이나 주워섬겼다.

문자는 자기 모친의 목소리를 듣고 인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그의 얼굴은 눈만 감으면 송장이라고 할 만큼 변하였다.

그는 자기 모친 앞으로 나아가 미처 인사도 하려 아니하고 어린아이가 그 어머니 앞에서 매를 맞으려고 할 때에 채 맞지도 아니하고 울 듯이 ㅡ 그 아이가 우는 것이 저 매를 맞으면 아프리라는 생각으로 우는 것이 결코 아니다 ㅡ 그만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러자 자기 모친의 알 수 없는 그 말을 듣고 나오던 눈물도 간 곳이 없고 다만 벙벙히 서서 그의 모친만 바라보았다.

형식도 인제 참말 야단이 났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천대부인의 그 뜻밖의 말에 어쩔 줄을 모르고 두릿두릿 하면서

"네. 그저 무어라구 사죄를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하고 머리를 숙였다.

"아니에요. 난 지금 형식씨더러 잘못 하셨다구 그러는 게 아니에요. 글쎄 문잔 계집애라 구 사람이 아닌가요? 치우니까 남녀가 한 이불 속에 누워서 달구경을 좀 했기로 무전이가 내달아서 그 따위 난폭한 짓을 할건 무어야요 ? 몰상식한 관고니까 그러지…… 그리구 형식씬 사내답잖게 무얼 그리 근심하시우? 마땅히 갈 곳이 없거든 우리 집으로라두 갑시다. 그려…… 이애 문자야. 그리 못나게 굴지 말구 어서 짐이나 챙겨라…… "

하고 천대부인의 하는 말은 주인 무전이를 업신여기는 빛이 숨어 있었다.

천대부인은 그날 이 희극의 여주인공이 되었었다.

다름이 아니라, 천대부인은 그날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문자를 보려고 무전의 집으로 바로 왔다.

막 들어와서 겨우 인사를 마치자 무전은 경망하게도 '어제 저녁에 문자와 형식이가 한 이불 속에서 달구경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쫓아올라 가서 이리저리 하였다’ 는 말을 하였다.

무전은 자기가 문자를 맡은 책임을 다 못한 것이 미안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또 문자와 형식이 사이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말하기가 좀 무엇하여 ㅡ 문자와 형식 사이의 그 관계를 숨기려 함이 아니라 ㅡ 다만 '두 사람이 한 이불 속에서 달 구경을 하였다’고 그 사실 의미를 돌려서 말을 하였다. 무전은 그만큼만 말 하여도 천대부인이 능히 그 말에 든 의미를 짐작 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천대부인은 첩경 그 말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남녀가 한 이불 속에서 달구경을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무전이가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을 매우 불평 히 여겨 그의 머리는 갑자기 흥분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만일 천대부인이 좀더 냉정히 무전의 말을 해석하여 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사실의 전부를 알았을지도 모를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만한 평범한 사실(두 사람이 한 이불 속에서 달구경을 하였다는)을 가지고 무전이가 그러한 행동을 하였고, 또 천대부인 자기에게도 그 처럼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의 배면에 다시 더 중대한 사실이 있는 것을 깨 달았을것이다. 또한 무전이가 '어젯밤에…… 달구경……’이라고 하였으나 그때는 벌써 음력으로는 그믐이 가까웠으므로 '달구경’이란 말은 결코 합당한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을 비유한 것이다.

천대부인이 조금만 더 침착하였더라면 '달구경’이란 말 한마디만으로도 에 두른 사실의 전부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흥분된 천대부인의 머리는 그러할 기회도 없이 다른 방면으로 나가서 도리어 무전을 원망하게 된 것이다.

그래 천대부인은 무전의 말에 성이 와락 나서 무전에게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서 그러한 희극을 한바탕 연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와 형식과 천대부인이 짐을 옮겨가지고 나간 뒤에 무전의 내외는 손뼉을 치며 웃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형식과 문자는 응당 그들에게 있어야 할 간곡한 작별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그대로 헤어져버렸다.

형식은 날마다 라도 문자를 찾아가서 울적한 회포를 위로하려 하였으나 천 대부인의 눈을 꺼려 그리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만사에 아무 정신도 없고 다만 서로 만날 기회만 기다리기로 세월을 보내었다.

형식은 나흘 만이고 닷새 만이고 문자를 찾아가면 천대부인이 걸리적거려 그 나흘이나 닷새 동안 졸이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만족히 위로하기가 어려웠다.

형식은 참다 못하여 하루는 천대부인을 찾아가서 자기가 문자와 결혼 하겠다는말을 하였다.

아직 본처를 이혼도 아니한 형식이가 그것은 너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일이지만, 깊은 꿈속에서 방황하는 그는 전후를 돌아볼 여가가 도무지 생기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결코 양자는 들려고 하지 아니하므로 천대부인은 좋은 낯으로 거절을 하였다. 그리고 문자에게 엄연한 말로 '너를 계집애로 늙히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집으로 양자 들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을 시키지 아니할 것이니 그쯤 알 고 있으라’고 말을 하였다.

원래 천대부인은 예전부터, 무전의 집에서 형식을 날 알고 오던 터이다.

그러나 형식이가 본처가 있는 줄은 몰랐으므로 '비록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지만, 저만하면 문자와 자기의 한평생을 의지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었다.

형식은 그날 무르춤하고 돌아가서 그 담부터 문자를 보고 싶은 마음은 꿀안 같았으나 천대부인을 볼 낯이 없어서 다시 찾아가지를 못하였다.

문자는 그 뒤로부터 매일 자기 모친과 다투기도 하고 간청도 하였으나 도무지 들어 주지를 아니하므로 필경은 '계집애로 늙기는 고사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형식을 단념할 수는 없다’ 고 내리 버텼다.

그리고 형식이가 찾아오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스스로 형식의 하숙을 찾아가서 서로 만나보고 하였다.

천대부인은 그 기미를 알고 문자를 도무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매일 나무라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문자가 자기 모친에게 실컷 나무람을 듣고 나서 가만히 쥐잡는 약을 차잔에 가득 풀어 방금 마실 듯이 입술에다 대고 자기 모친 앞에 멀찍이 서서 "자, 어머니 전 인젠 이걸 마시구 죽어버리겠으니 어찌려십니까?……"

하고 위협하듯이 말을 하였다.

천대부인은 감짝 놀라 그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들려 하였으나 문자는 손을 내젓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가까이 오시지 마세요. 가까이 오시면 그대로 들이마셔 버릴 터이니까 요…… 자 거기서 말씀을 하세요. 제맘대로 하게 하실 터예요 아니하실 터예요?……"

하고 문자의 평소의 성격에는 맞지 아니한 당돌한 거동을 보였다.

평소에 자존심이 많은 천대부인이 이러한 일을 당하고 보니 골이 확 나서 앞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모른다 난, 이년…… 죽든 살든 네 맘대로 해라. 넌 인제 내 자식이 아니야. 지전삼랑의 자식이 아니야…… 이 집에서 당장 나가 이 년아…… "

하고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문자는 손에 들었던 독약을 내려뜨리고 오랫동안 결정을 못하여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형식을 찾아갔다.

사랑의 힘이란 그다지도 큰지 문자는 자기 집에서 형식의 하숙까지 가는 동안에 여러 번 발길을 돌리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고적히 있는 자기 모친에게 사죄를 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형식에게로 끌리는 마음이 더하여 다만 '인제 어머니도 좀 나일 자시고 성정이 눅어지시면 다 용서하시고 나를 찾으시겠지……’ 하는 억지의 위로를 하며 형식에게로 가버렸다.

천대부인은 문자가 그처럼 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었다.

그래 고적하고 섭섭한 맘을 억제치 못하여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이 죽고나니 자식까지 나를 괄시하는 구나.’'아 ! 자식도 품안엣 적에 자식이지 제 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하면 그만 남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곤경에 이르면 허망한 희망을 일으키는 것이라 '인제 나이 어리고 철을 모르니까 제가 지금 그렇지만 내 품에 벗어나서 고생을 좀 지지리 하면 저 도 맘이 돌아서겠지.’생각을 하고 외로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였다.

문자가 형식의 하숙으로 찾아가서 얼마 동안은 그대로 지냈으나 형식의 한 달 학비를 가지고 두 사람이 하숙 생활을 하기가 어렵고, 또 기왕 부부란 명색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만난 터이니까 단출한 생활을 하여 보려고 셋방을 찾아다니던것이었었다.

형식은 그동안, 상야(上野)에 있는 동안 봉우와 서로 이웃 사이에 있었으므로 봉 우는 형식과 문자 사이의 관계를 대개 형식에게 들어서 알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보아 알기도 한 터이라 그날 밤 형식과 문자가 돌아간 후에 자리에 누워서 정수에게 그 대략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11

그 이튿날 봉우와 형식의 부처는 오정쯤 하여 모두 짐을 옮겨왔다.

네 사람이 모인 이 조그만 오막살이에는 평화의 기운이 차고 넘쳤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는 생활을 하여나갔다.

아직 현실에 물들지 아니한 그들은 이상(理想)을 토론하기 아니면 모여앉아 농하고 지껄이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었다.

방은 정수와 봉우가 육조방에 있고 형식이 부부가 사조반 방에 있게 되었다.

그것도 정수는 형식이 부부에게 큰 방을 주려 하였으나 농 잘하는 봉우의 반대로 그리 못한 것이다.

그날 저녁에 네 사람은 과실을 듬뿍 사다 놓고 둘러앉아 잡담을 꺼냈다.

봉우는 복숭아 하나를 덥석 집어 껍질도 벗기지 아니하고 우둑우둑 씹어 먹으며

"여보게 정수…… 자넨 이혼 안하려나? 물론 않겠지…… 숙명이라든가 진명이라든가 어느 여학굘 졸업까지 했다니까…… 그렇지만 형식이 넌 이번 여름방학에나 가서 썩 이혼해 버리구…… 그리구 문자씨하구 정식으로 결혼할 일이야. 그리구 이애 참 형식이, 너 여기 와서두 내 앞에서 둘이서 쓸어안구 입맞추구 그러련 ? 안된다 그건…… 내가 용설 안할 테야. 문자씨두 정신을 바싹 차리시우, 공연히 큰일이 날 터이니까…… "

하고 농말을 꺼냈다.

"용서?"

하고 형식은

"네 따위가 누굴 용서하구 않구 해…… 흥, 강짤 하니? 이애 좀 봐라…… "

하고 빙글빙글 웃으며 문자를 쓸어안을 듯이 팔을 벌렸다.

그러나 문자는 형식을 쪽 흘겨보며

"어이구 왜 이러세요 !"

하고 앉은 자리에서 몸을 피하였다.

"옳지 그래야지. 문자씨가 내 말을 잘 듣는단 말야…… "

하고 봉우는 다시 정수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글쎄, 이 사람아, 자네두 이혼을 해…… 자, 우리 여기서 이혼 기성회( 期成會) 하나 모을까? 난 그 회장이 되구, 자넨(정수) 부회장이 되구…… 자넨( 형식) 내가 특별히 총무 하날 시켜 줄 게구, 문자씬 서기(書記)나 하나 하시구…… "

네 사람은 모두 재미스럽게 웃었다

봉우는 다시

"그러면 내가 자네(정수) 일을 맨먼점 주선해 줄 게니까…… 어때 ? 이혼할 테야?"

"글쎄 자네가 그처럼 내 일을 보아준다니까 고맙네만 그만두구…… 자넨 자네 일 이나 잘해 가게. 남의 일까지 참견하느라구 그러지 말구…… 하고 정수는 웃었다.

이때 문자가

"그러면 정수씨두 벌써 장갈 드셨어요?"

하고 물었다.

"네."

하고 정수는 '왜 묻느냐’는 듯이 문자를 바라보았다.

"금년에 나이 몇이신데요?"

하고 문자는 또 물었다.

"스물하나에요……"

"부인께선 ?"

"열아홉인지 스물인지…… 아마 스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수씨도 이혼을 하실 테예요?"

"네."

하고 정수는 다시 문자를 끄윽 바라보며

"그러지 마세요…… "

하고 문자는 정수의 눈을 피하려고도 아니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이혼을 하시면 그인 어쩌라구요?"

정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다가 다시 말을 하려는 것을 봉우가 내달아 막으며

"체, 남이야 죽든 살든…… 저만 좋으면 그만 아니우 이 세상엔? 아니 글쎄 그 허수아비 같은 계집 하나 때문에 젊은 놈이 그저…… 그저 그래 버리구 만담? 청춘의 불붙듯 일어나는 로맨스에 물을 끼얹어야 옳담?"

이 말에 형식이가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일으켜 봉우를 굽어다 보며

"허허 허허. 이애 봉우야…… 무어 어때? 청춘의 불붙듯 일어나는 로맨스 ? 물을 부어 ? 허허, 그야말로 참 당 구 삼 년( 堂狗三年) 이로군…… "

하고 놀렸다.

세 사람은 한참이나 재미스럽게 웃었다.

봉우도 웃으며

"어, 그 말 한마디 했다가 망신을 했군…… 하지만 사실 말이지 이혼을 하려거든 하루라두 속히 해야 해요. 그래야만 그 여자두 늙기 전에 시집을 다시 가지…… "

"시집?"

하고 형식은 다시 봉우의 말을 막으며

"시집을 가? 이애, 이혼을 하구 나서 바로 곧 다른 곳으로 시집이라두 가서 잘 살아갈 여자 같으면 이혼하기가 어려우니 어쩌니 할 것도 없단다 이애…… "

봉우는 그 말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다시

"그리구 이혼을 하구, 나 말이야, 나처럼 영순이 같은 얌전하구 예쁜 색시 한 테로 장갈 터억 간단 말이야…… 그리구 참, 우리 영순이가 성악가(聲樂家)야. 성대가 아주 썩 좋단 말이야…… 내가 경도 갔을 적에 마침 일요일에 예배당엘 가보니까 영순이가 혼자 찬밀 하는데…… 아이구 그저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서 못 보겠더라…… 이것 봐요. 난 인제 우리 영순이 하구 결혼을 한 뒤에 영순일 양장을 턱 시켜가지군 팔을 끼구 산볼 다닌단 말이야…… 삼층 양옥에 피아노 둥둥 치구 금강산 해금강에다 별장 짓구…… 흐흐…… "

하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듯이 웃었다.

"흥…… 네 꼴에 양장미인 팔 끼구 산보 다니면 자국이 아주 잘 들어맞겠다. 이애 너 이발소에 가거든 체경 앞에 가 서서 네 꼬라질 좀 보렴…… 얼굴은 니그로( 黑人[ 흑인]) 같구 몸은 삼동으로 굽구 걸음은 팔자(八字)걸음이구…… 게다가 엉덩이 춤까지 추구 아주 썩 됐는데…… 그것은 어쨌든 너 삼층 양옥에 피아노 사놓구 별장 짓구 할 돈 있니?"

"돈?"

하고 보우는 아주 쾌활스럽게

"그러니까 지금 상과대학을 다니잖니 ? 지금은 없어두 인제 장사해서 ㅡ 외국 무역이야 ㅡ 많이 모은단 말이야. 너 따위 의원(醫員)질 같은 줄 아니? 그리구여 보게 정수, 자네두 그 썩어진 문학인지 무언지 진작 집어치구 돈 모을 도리 하게 돈…… 문학잔 밥 먹잖구도 살 줄 아나? 그리구 자네 색시가 맘에 맞질 않거든 곧 이혼해 버리구…… 자네가 아직 고 짜릿짜릿한 막을 못 보았으니까 말이지…… 사랑하는 맛이란 참말 눈이 슬슬 감기구 뼈끝이 녹아나는 듯한 걸세…… "

정수는 빙긋이 웃으며

"왜? 자네가 우리 스윗 허틀 좀 보려나? 자네만 이 세상에서 그런 맛을 보는줄 아네그려?"

형식은 봉우를 또 핀잔을 주듯이

"제 따위가 맛을 보긴 무슨 맛을 봐? 이애 봉우야, 네 따위가 무슨 맛을 봤다구 그러니? 영순이 발바닥이나 혓바닥으로 핥아먹었니?

영순이 얼굴이 좀 밴 지름하니까 저 혼자 들어서 침을 게게 흘리구 다니지…… 그렇지만 영순이가 네 따윈 일없다더라, 이애…… "

하고 어떻게 하여서라도 봉우를 성화를 먹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봉우도 지지아니하고

"발바닥엔 말구 구두 바닥에라두 그때 키스나 한번 시켜 주었으면 좋겠더라…… "

하고 우스운 말을 하였다.

네 사람은 재미스럽게 웃다가 문자가 정수를 보고

"그인 누구예요?"

하고 물었다.

"인제 차차 아시지요…… "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형식은 자기 짐작이 들어맞은 것을 자랑하 듯이

"원체 그래. 정수가 없을 리가 있다구…… "

봉우는 빈정거리듯이

"있긴 무에 있어. 썩어빠진 문학자니까 가상연인(假想戀人)이나 있는 게지…… "

"그래서 이혼을 하실려구 그러시지요?" 하고 문자는 정수에게 물었다.

정수는 고개를 쌀쌀 흔들며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러세요? 전 아무래두 정수씨 속을 모르겠는데요?"

"왜 그러긴 무얼 왜 그래요? 물론 이혼은 해요. 그렇지만 다시 다른 여자 하구 결혼두 안할 테예요."

정수는 힘이 들지 않게 문자의 하는 말에 대답하였다. 그러나 문자는 자기 얼굴이 찌푸려지는 줄도 모르고 기를 쓰며 다가물었다.

"아니 글쎄…… 왜 이혼을 하시려구 그러세요?"

"이혼이요? 그건 내가 하구 싶으니까요…… 혼자 살기도 괴로운 세상에 안 해가있으면 더욱 거리끼잖겠습니까?"

"그렇지만 정수씬 그렇다구 이혼을 하시면 그인(정수의 안해) 어쩌라구요? 큰 죄악이 아니에요?"

"허허, 문자씨가 조선 여자를 보시는 범위가 너무 좁습니다. 물론 이혼을 하는것이 재미가 적은 일이지만 그래두 하는 수 있습니까? 그리구 그는(자기 안해) 소위 신여자라나요. 그래서 이혼을 하더래두 그다지 비극은 생기질 않을 터이니까 요."

"그러면 부인을 사랑치 않으세요?"

"사랑이요? 허허 사랑이 다 무업니까?"

"그러면 부인께선?"

"글쎄, 자기 말은 절 사랑한다구 하긴 해요."어요?"

"그러면 왜 애초에 장간 드셨어요?"

"흥…… 우리 어머니가 날 꽉 붙잡고 앉아 '장갈 갈테냐? 이 늙은 어미가 네 앞에서 죽는 꼴을 볼 테냐?’하시구 우리 아부지께선 '저런 죽일 놈이 있단 말이냐’ 구…… 말하자면 친권(親權)을 가지구 마구 위협을 하는데 어쩝니까?"

"장간 언제 드셨는데요?"

"작년 봄이드랍니다. 작년 봄방학에 집에서 아부지가 위태하시다구 전보가 왔어요. 그래 부리나케 집엘 돌아가 보니까 아부진 다른 동리 노인들하구 바둑을 두 시구 그전보담 기운이 더 좋겠지요. 그리구 날더러 '내가 너를 마흔여덟에 났을 적에 ㅡ 네가 열둘이면 꼭 내 환갑이다 ㅡ 꼭 내 환갑날 막내며느리를 보렸던것을 네 형들이 네 나이 너무 어리다구 해서 지금까지 밀어오긴 했지만, 인젠 네 나이 스물이야. 또 내가 인제는 죽을 날이 멀잖았으니 마지막 널 여위어 놔야 죽어두 눈을 감지 않겠니? 그래 이번에 네 혼사를 치르려구 널 속여 나오게 한 것 두 내가 네 형들을 그처럼 시킨 게다. 규수(閨秀)는 ㅡ 난 마땅치 않더라만 ㅡ 그래두 지금은 학교에 다닌 규수라야만 한다기에 이번에 서울서 무슨 여 학교까지 졸업한 규수에게로 정혼(定婚)을 해서 내일 모레가 택일한 날이니 그쯤 알아라…… 하시는데 참 기가 맥힙디다. 그래 어머니한테로 가서 짜증을 좀 대 다가 또 경을 한바탕 치르군 하는 수 없이 강제 결혼을 당한 것이랍니다."

"그러면 아부지께서 그러신 노릇이니까 어디 정수씨 맘대로 이혼 하시겠습니까?"

"금년에 일흔인제 나셨으니까 곧 돌아가시겠지요."

"그러면 그렇다구 지금 있다는 애인(愛人)은?"

"단념해 버리겠지요…… ""그것 봐요. 형식이…… "

하고 봉우는 형식이의 옆구리를 질벅 거리며

"자네두 그러지 말구 어서 이혼해. 회장의 명령이야. 흐흐…… "

"이 앤 공연히 남의 속두 모르구…… 정수두 만일 경우나 환경이 나하구 같았으면 이혼을 못한단다 이애. 정수가 왜 이혼하려구 하는 속이나 알구 넌 그러니?"

하고 형식은 정수의 의견을 묻는 듯이 정수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 같아선…… "

하고 정수는 목을 가다듬어 침착한 어조로 말을 내었다.

"물론 사람마다 개성이나 취미나 주의가 다르구, 또 더구나 환경이나 경우두 같질 않으니까 통일해서 말할 수야 없지만, 내 생각 같아선 이혼할 필요가 없을듯 해…… 가령 여기 한 사람이 있어가지구 부부간에 정이 없다든지, 혹은 공 방이든 다든지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혼을 하구 서로 갈리는 게 좋은 일이 겠지…… 그렇지만 특수한 사회, 특수한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경우나 환경이 또한 특수하잖 냔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말한 그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을 하는 데두 역시 특수한 사정이 있잖겠다구? 만일 그 사람이 이혼을 한 뒤에 그 여자가 홀로 자기의 앞길을 열어나갈 능력이 있다든지, 또는 사회에서라두 그 여잘 돌봐줄 만한 형편이 된다면 도무지 문제가 생기질 않을 게야.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생각 해 볼 것은 그 이혼을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 앞길을 열어가질 못하구 한평생 홀과수로 지내지 않으면 은근짜 집으로 팔려가거나 못된 놈의 첩이 되어 필경은 논두덕 죽음을 하게 되구…… 또 우리나라 사람이 여자의 정조에 대해서두 그런 종류의 여잘 '헌계집’이란 관념을 가지구 있으니까, 설혹 그 여자가 앞길을 열어 나가려구 해두 사회에선 그걸 용납해 주질 않으니까…… 그래서 이러한 희비극이 생긴 일두 있댔지. S라구 하는 그래두 우리나라에선 좀 뭣한 사람이 자기 본 처와 이혼을 하군 다시 다른 여자하구 결혼을 했더라나…… 그러니까 그 본 처 였던 여잔 악이 바싹나서 그 S란 사람의 집 바로 맞은바라기 집에 가 앉아 ' 술 장수하는 갈보’가 되었다나…… 그리구 일상 하는 말이 '내 한몸은 저 S란 놈이 이 지경을 만들었으니까 인젠 내 몸은 어찌 되었든 돌아볼 것 없이 무슨 짓을 해서라 두 저 S란 놈에게 끕끕수나 주겠다’구…… 그러니 저 S란 제 소위 ' 점잖은 집안 ’에서 그것이 무슨 망신이며, 또 그 여잔 그처럼 참혹하구 기막힐 일이 어디 있느냔 말이야? 그러니까 어느 편으로 보든지 그렇듯 한 안해가 ㅡ 형식이 부인이나 봉우의 예전 부인 같은 ㅡ 있는 사람은 굳이 이혼을 할려구 말구 그대로 두어 두어요. 두어두면 나이 차차 들어가구 현실생활을 하게 되면 ㅡ 공 방이니 정이 없니 이혼이니 하는 것은 모두 젊은 사람이 젊은 피로 그러는 것이니까 ㅡ 그때엔 맘이 돌아설 게니까. 우리나라에 예전 사람들을 보아두 부부간에 공 방이 들어가지구 원수 보듯이 하다가두 그것이 십 년이 가질 못해서 다시 풀리잖아? 어떠한 사람은 '공방이 들거나 정이 없는 부부가 이혼을 아니하는 것이 노예 생활 매음생활’ 이라구 주장하는 사람이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 있지만, 그 사람은 좀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겠지…… 한걸음 양보하구 그렇듯한 부부 생활 이 노예 생활 매음생활 여자에게 강제하는 것이라구 가령 하더래두…… 그러면 그렇듯 한 여잘 그 노예생활이나 매음생활에서 해방을 시키면 해방시키는 그날부터 그 여자들이 갈 곳이 어디냔 말이야? 그날부텀 그들이야말로 참 키이를 잃은 배나 진배 없지…… 그들이 그날부터 새파란 청상과부가 되기 아니면 그제는 정말 공공의 매음장으로 가질 않겠다구? 그러면 자, 어느 편이 나을까? 노예생활 매음 행활에서 해방을 한다구 일껏 하구서 도리어 그들을 공공 매음소나 새파란 과수를 만들 것하구…… 차라리 인정을 베풀어 주구 부부란 명의를 그대로 가지구 그네에게 장래의 희망두 주구 맘두 편히 먹게 하는 것이? 그네가 사실 말하자면 남편 된 사람에게 그다지 거리끼거나 그렇질 않으니까…… 그 지경 된 그들이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이 진진한 부부의 사랑이 아니야. 그러니까 인류 애( 人類愛) 로써 대접하면 그만이야. 그러구 만일 그네 스스로가 다른 곳으로 가구 싶어하거든 그때엔 얼마든지 이혼을 해주는 것이 좋구…… "

여기서 정수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세 사람은 조용히 앉아 듣고 더욱이 문자의 눈은 정수의 말하는 입에서 떠나지를 아니하였다.

정수는 마른입으로 담배를 맛있게 쭉쭉 빨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두 젊은 사람은 이성애(異性愛)가 사라지질 않을게니까 연 앤 얼마든지 해. 아무것도 거리끼지 말구…… 그렇지만 대개 애인이 생긴 뒤에 이혼 문제가 생기는 게니까. 그래 순서야 어찌 되었든 애인이 있어서 연애를 하다가 필경은 결혼문제가 생기잖겠다구? 그러면 그제는 결혼을 하지…… 민적이니 결혼식이니 그따위 것은 집어치구…… 만일 그러기가 싫거든 애인과 정을 끊지. 연앨 하다가 최후까지 못하구 중도에서 실연하는 고 쓰린 맛이나 긴장되는 맛 이 꽤 괜찮은가 보더구먼…… 인생으로 생겨나서 인생의 쓰린 맛을 좀 보는 것두 할만 한 노릇이겠지? 만일 아무래두 두 사람이 정을 끊기가 어렵거든 결혼을 해요.

그것이 물론 형식으로 보아선 소위 '첩’이란 것이겠지. 하지만 두 사람의 정이 아무래두 서로 끊질 못할 만큼이면 그렇듯한 형식에 대한 구속까지두 초월할 수가 있겠지. 아차…… 문자씨가 너무 섭섭히 생각하시겠는데?"

하고 정수는 갑자기 미안한 듯이 문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문자는 도리어 얼굴에 즐거운 빛을 띠고

"아니에요. 저두 언젠지 형식씨하구 그런 말을 했는데요."

하고, 해쭉해쭉 웃었다.

"네, 그러세요?"

하고 정수는 마음을 놓고 다시 말을 하였다.

"물론 그것이 형식상으로 보면 첩이라구 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야만 풍속의 일부다처의 것두 아니구, 못된 색마(色魔)나 부자놈들이 호사감으로 첩을 얻는것두 아니니까…… 그렇지만 사회에서 좀 말이 있겠지. 도덕이 어드러니 인격이 어드러니 하여 가며…… 그렇지만 도덕이란 무에야? 사람을 위해서의 도덕이지 도덕을 위해서의 사람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도덕이란 것두 시간이나 처소나 또는 사람의 행복이나 선(善)의 표준을 따라 달라가야 할 게 아니야?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마련해논 옛 도덕에 지금 와서 구속을 받아서 옳은 일을 굽혀서야 될수 있나. 도덕이란 그 사명이 사람을 착하게 하자는 데 있으니까, 한편으로 보면 도덕의 조건이 사람의 행복을 무시할 수 없는 경우두 있겠지? 사람이 자기의 현상에 행복을 느끼는 데서 악(惡)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부르짖는 곳에 흔히 악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리구 사회의 여론 같은 것이야 돌아볼 필요가 없잖아? 자기 양심에 부끄런 일만 없으면 말이지.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 사회의 여론이라는 게 도무지 정당한 게 되질 못해요. 가령 여기 그래두 사회에서 뭣 하다는 사람이 사랑치 않는 아낼 이혼하구 다시 결혼을 하면 사회에선 막 대구 배척이야. 또 남자뿐 아니라 이혼당한 그 불쌍한 여자까지두 짓밟아버리지. 그건 그래두 차차 나아가는 모양이지만, 가령 이제 말한 그 사람이 이혼을 않구 그 애인을 소위 '첩’을 삼아 보지? 그 사람은 그날부터 사회하군 하직이지. 물론 그것을 실행한 사람이 현재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있다 하면 말이야. 그러니까 젊은 놈들더러 늙은이 구실을 하라기두 분수가 있지 그게 무에야, 글쎄? 그러질 말구 차라리 야소굘 진실히 믿는 사람을 하나 천당으로 특파( 特派) 시켜서 하나님한테 원정을 좀 해보라지. '우리나라 젊은 사람 뱃속에서 연애성( 戀愛性) 을 좀 빼버려 달라’구…… 그러니까 우린 우리 양심에 거리끼지만 않으면 사회 여론 같은 게야 모르는 체하는 게 좋아.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 여론이 그다지 근거가 없는 것두 아니야.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우리나라 젊은애들 가운데 참말 비계나는 꼴이 있으니까. 시체 젊은 애들이 걸핏하면 이혼을 한다지…… 그래, 왜 이혼을 하려느냐'구 물으면 열이면 아홉은 '무식하구 얼굴이 미운 것’ 이 그 제일 큰 조건이라구 대답을 하지. 그러면 유식하구 얼굴 예쁜 색신 얻어 무엇 하려냐 구 물으면, '둘이서 같이 활동을 해서 벌어먹구 살려구 그런대나. 글쎄, 금시 제 여편네하구 막 좋아 지내던 게 그런단 말이야. 사실 정이 없어 그러는 것두 아니야. 그러니까 사회에선 그따위 것들을 눈감아 볼 수가 있겠다구? 만일 인류제조소(人類製造所)란 게 있다면 그 쓰레기통에다가 모두 쓸어담아서 서울 시구문 밖에다 쿵쿵 파묻어버릴 감들…… 그것들이 모두 과도기의 특산 물( 특산 물) 부스러기들이야."

정수는 밉살스럽게 말을 마치고 봉우를 흘끔 보았다.

형식은 봉우를 보고 조롱하 듯이

"그래, 이 봉우놈처럼 너두 과도기의 특산물 부스러기야."

봉우는 빈정거리듯이

"이애, 그래도 난 정정당당하게 나 할 일만 한단다. 이애 그러구 넌 지금 정수가 한 말이 귀에 솔깃하니까 좋아서 그러지? 네 맘에 맞지? 그렇지만 이제껏 정수가 한 말이 무엔지나 아니? 쓸데없는 공상이야. 문학자 뱃속에 든 공상…… "

"아주, 말을 하면 모두 말로 알구…… 넌 공상이란 말 의미나 알구서 공상 공상 하니? 정수가 맨 나중에 한 말이 귀에 좀 거슬리든 게지…… "

"하긴 그래…… "

하고 봉우는 항복하는 듯이 검은 얼굴에 하얀 이빨을 내놓고 흐흐 웃으며

"하긴 그래 정수가 날 빗대놓구 욕을 하길래 나두 그랬지, 흐흐…… 그렇지만 여보게 정수, 이상두 좋긴 하지만 내 이상은 어떤가? 세상에선 돈만 많으면 왕이니까…… 그래 난 돈을 어쨌든지 산더미만치 모아가지구 그 돈으로 다시 물 쓰듯이 쓴단 말이야…… 그러면 그 힘으로 사휠 덮어누를 수 있겠지? 난 그저 집엔 돈 하구 예쁜 색시만 있구 밖에 나가선 내 맘대로 무엇이든지 하기만 하면 만족이니까…… 어떤가? 내 이상이?"

하고 소리를 높여 웃었다.

다른 사람도 허물없이 웃고 정수는 봉우더러

"좋네 아주…… 아무리 웃음의 말이라도 지금 사회에선 적응성(適應性)이 많네…… 자네 말은 언제든지 그래…… "

"하지만 이애 형식이, 너 정수가 한 말대로 해나갈 용기 있니?"

"하긴 또 그래. 그렇게 했으면 좋긴 하겠는데, 그렇지만 그렇지만…… "

하고 형식은 얼굴에 어려운 빛을 띠고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정수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지만 자네론 실행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하나, 형식이 자네로서 실행 하기 어렵단 말두 또 괴이찮은 말일세…… 그러면 자넨 장차 어쩔 작정인가?"

"작정? 작정이 다 무어야? 작정한 게 있으면 그런 말을 했겠나? 지금 나야말로 참 가두오두 못하구 엉거주춤하구 섰는 셈이지…… 어이, 이놈의 세상을…… "

하고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나타났다.

문자도 그를 따라 근심스레 형식의 얼굴을 바라보고 정수도 참한 얼굴을 해서 무엇을 생각하였다.

방안의 공기는 자못 쓸쓸하여 졌다.

봉우는 그 거동을 보고 참다 못하여 소리를 와락 지르며

"이건 무에야 글쎄? 젊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렇게 세상을 되어가는 대로 살잖구…… "

하고 일어서서 벙실벙실 웃으며 문자의 옆으로 가서

"자, 문자씬 나하구 댄스나 한번 해봅시다. 네? 싫어요? 싫건 또 그만두시우. 나 혼자 할 게니 웃기나 하시우…… "하고 근육(筋肉)댄스의 흉내를 한바탕 야릇하게 내었다.

보는 세 사람은 아무리 하여도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봉우는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계집이 사내에게 아양을 부리듯이 형식의 얼굴을 굽어다 보며 여 청으로

"〈 린상와 아이꾜오가 다뿌리 아루와요.〉(형식씬 애교가 많아요.)"

하고 문자를 한번 흘끔 보았다.

문자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어이구 봉우씬 똑…… "

하고 가는 웃음이 떠오른 눈으로 봉우를 쪽 흘겨보았다.

정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웃기만 하였다.

형식은 한참이나 재미스러운 듯이 웃다가

"저 앤 그런 말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아…… "

문자는 형식을 잡아 흔들며

"어느 결에 또 그런 말까지 봉우씨한테 다 했구먼요? 난 몰라, 인제 울테야…… "

하고 입술을 뛰하니 내밀었으나 그의 성난 듯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 것은 더욱 귀엽게 보였다.

언젠지 형식이가 문자를 보고 농 비슷하게 '내가 어떻기에 그리 좋아 하느냐’ 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 말 대답에 문자는 '형식씬 애교가 많아요’ 라고 하였다. 봉우는 그 흉내를 낸 것이다. 정수는 그 뜻을 짐작하고 문자를 보고 "울겠거든 좀 울어 보시구려…… 사내란 대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을 보구 쾌감을 얻는 잔인성(殘忍性)이 있답니다."

"아니, 정말 그러나 봐요? 이이두(형식) 심심하면 별난 말을 다해서 절 성 활 먹이겠지요…… 그래 참다 못해서 울면 그젠 빙글빙글 웃으면서 잘못했다구 달래겠지…… 어이구 참, 여자가 그리 만만한가?"

형식은 어깨를 우쭐거리며

"딴은 그래…… 울려놓구 보는 맛이 썩 괜찮단 말이야…… 그러다가 살살 달래면 눈물은 그렁그렁해 가지구두 웃지요. 흠…… "

하고 웃었다.

"사람 죽겠다 이애…… "

하고 봉우는 소리를 와락 지르며

"그만저만 좀 해두렴…… 아이구 나두 어서 우리 영순일 좀 울려놓고 보아야겠는데…… "

"암만 그래두 난 인젠 안 울걸요." 하고 문자는 기를 쓰며 내달았다.

형식은 양양한 태도로

"흥, 안 울어? 또 좀 울려 줄까?"

"안 울어요 글쎄......"

"이 자리서 그때 그 말을 내놓아두 안 울어?"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아무렇지두 않아요."

라고 문자는 말로는 지지 않고 대답을 하였으나 뒤가 저리는 듯이 얼굴은 볼고 롬 하여졌다.

"자, 그러면 자네들 이 말 좀 들어보게…… 이 문자가, 날 보구 '사낸 모두’…… "

라고 하는 것을 문자가 와락 달려들어 손바닥으로 형식의 입을 꽉 틀어막으며

"아이구 마세요. 난 인젠 몰라요…… "

하고 펄썩 주저앉아 원망스레 형식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정말 눈물이 핑하니 돌았다.

형식은 코를 벌름거리고 어깨를 경멸하듯이 우쭐거리며

"흥, 채 말두 안해서 눈물을 흘렸으니까 말을 다 했드라면 통곡할 뻔했군…… 울잖겠다구 길 쓰더니 왜 우느냔 말이야, 글쎄?"

"그래두 그런 말까지 해서 기어이 울리랴구 할 건 무어예요? 그런 말을 하면나만 부끄런가?"

하고 좀은 성이 나는 듯이 부르대었다.

"어쨌든 울긴 울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담에 그따위로 풍을 떨지 말라구…… 그리구, 자 인젠 웃을 차례야. 그러면 내가 잘못되었으니 용설하오. 어허 허허......"

하고 너털 웃음을 쳤다.

문자는 웃지 아니하려고 입술을 다물고 앉았다가 필경 참지 못하여 픽 하니 웃어 버리고, 그래도 그는 고갯짓을 하여 가며 형식을 암상스럽게 쪽쪽 흘겨보았다.

"참말이지 재미가 그럴 듯한걸…… 여보게 봉우, 어떤가? 응?"

"말 마라 이애, 속상한다…… "

하고 봉우는 외면을 하며

"인제 보자. 나두 우리 영순이가 있으니까……

"문자는 그래도 형식이가 얄미운 듯이 봉우에게

"아따 봉우씨나 실컨 영순씨한테 그러지 마세요. 그것이 모두 못된 짓이니까…… "

"못 된 짓이건 잘된 짓이건 누구래 안다오? 그런 재미 없이 어찌 살라구요? ……"

"에그머니 저런…… 사낸 다 저러나? 네 정수씨?"

하고 문자는 정수에게 응원을 청하는 듯이 바라보았다.

정수는 피식 웃으며

"내버려 두시우. 사낸 모두 그러나 봅디다."

"그러면 정수씨두 그러세요?"

"그보담 좀 더할걸요?" 하고 정수는 내숭스럽게 미소를 하며 문자의 눈치를 보았다.

"에구머니! 인젠 나 혼자 고립 했구려…… "

하고 심상스레 웃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무렇지도 아니한 일이건만 정수까지가 그렇다는 것이 매우 섭섭한 듯하였다.

12

날씨가 차마 더워간다.

사람 살기 언짢은 동경 ㅡ 그 속에는 수백만의 생명이 더위와 먼지 속에서 허위 댔다.

사람마다 얼음 (氷水[빙수])과 부채가 아니면 잠시라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따가운 길거리에 산뜻하게 꾸며놓은 얼음집에서는 서늘한 맛이 저절로 우러나는 듯 ㅡ 혹독한 더위를 그려내는 알맞은 그림(畫[화])이 되었다.

불붙듯하는 햇볕에 시들어진 나뭇잎, 먼지 앉은 풀잎, 헐떡거리는 전차길 걷는 사람, 철둑(鐵道線路[철도선로])에서 사지를 죽은 게 발 놀리듯 하는 일꾼들 ㅡ 모두가 게으름에 싸여 맥없이 움직였다.

네 사람의 작은 오막살이는 전과 같이 다름없이 지나갔다. 일학기 시험 때가 닥쳐왔으므로 봉우는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다른 일에 정신이 없었다.

하루는 오정쯤 하여 정수가 학교에서 돌아온즉 형식은 아직 오지 아니 하고 봉 우는 책상머리에 가 끄윽 들어앉았고 문자만이 심심한 듯이 소설을 보고 있었다.

문자는 정수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반가이 자기 방으로 같이 가서 이야기를 하였다.

"문과에 다니신다지요? 문과면 무슨 문학이세요?"

하고 이 말 저 말 끝에 문자가 물었다.

"노문과(露西亞文學科)올시다."

하고 정수는 문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노문학이 썩 좋다지요?"

"네. 비교적 재미가 좀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문자씬 무슨 문학이십니까?"

"영문학인데요."

"전 몰라요. 이름만 문과지 아무것두 몰라요. 그런데 저두 노문을 해보구 싶은데요?"

"그래두 좋지요. 그렇지만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왜요?"

"문학이면 그저 문학이었지 무슨 그다지 별다른 구별이 있겠습니까? 물론 각기 나랄 따라서 조금씩 특징은 있겠지요…… 그것은 남이 끼쳐준 작품을 향락 하는 데는 필요하지만 창작하는 데는 그다지 큰 영향이야 되질 않을 게니까요. 문학은 외래(外來)의 감화보담두 내적 조건 (內的條件)인 천재의 소질이 더욱 필요 치 않습니까?……"

"그러면 정수씬 문학천재론을 주장하세요?……"

하고 머리를 들어 정수를 보려다가 정수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마주치는 눈은 다만 친한 벗이란 범위에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을 나타냈다. 그들은 얼굴이 간질간질한 듯하였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이 그것을 잘 의식치 못할 만큼 그 작용이 몽롱하기도 하였다.

"네……"

하고 정수는 곧 대답을 하였다.

"네. 전 말하자면 문학천재론입니다. 전 문학범용론(凡庸論)으론 만족 할 수가 없어요. 저두 맨처음엔 그런 줄 저런 줄 모르구 남이 좋다니까 호기심에 끌려서 문학을 지망했더니, 지금 와선 여간 고통이 아닙니다. 사실 말이지 전 천재 아니군 문학을 할 필요가 없다구 생각해요. 문예(文藝) 그 자신이 천재의 손이 아니군 생기질 못 하니까 요…… ""그렇지만, 천재두 배우지 않구 천재가 될 수 있나요? 정수씨두 지금 배우시는 중이 아니세요?"

"그거야 물론 그렇습니다. 천재두 닦아야만 그 천재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물 날 곳은 첫이월부터 알아본단’ 말처럼 천재와 범인은 첨부터 다른 것이니까 요…… 전 아주 단언(斷言)을 합니다. '제가 천재가 아닌 것’을…… "

"글 쎄올시다. 지금 이 지경으로 이상과 실제가 모순된 저로는 응당 목적을 고쳐야만 될 겐데…… 그래두 전 문학에 뭐 약간 집착(執着)이 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한층 더 고통이지요? 전 아주 이 세상에선 버린 몸이에요…… "

하고 창연히 말을 맺었다.

문자는 정수의 외면한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다만 동정하는 듯이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두 사람은 묵묵히 앉았다가 문자는 일부러 화제를 고쳐 "그인 누구에요?"

하고 물었다.

"그이라니요?"

하고 정수는 문자를 마주보고 돌쳐물었다.

문자는 왜 시치미를 뚝 떼느냐는 듯이 정수를 바라보며

"아따 저…… 애인이 계시다면서요?"

하며 의미 있게 웃었다.

"네……"

하고 정수는 고개를 끄덕 거리며

"그렇지만…… "

하고 우물우물하였다.

"그인 정수씰 퍽 사랑하시지요?"

"네…… 아마 그런 듯해요."

"또…… 정수씬?"

"저요? 글쎄요. 그저 아무렇지두 않지요."

하고 정수는 근경속 있게 문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문자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마주치는 눈은 무엇인지를 언약하는 듯, 무엇인지를 서로 바라는 듯 하였다.

정수와 문자는 의미있게 빙긋 웃고 서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말없는 이 행동에 그들의 얼굴은 은근히 간지러웠다.

이 작용에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그들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였으나, 사실 말하면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마주 앉았는 것이 아니라 마주 앉았기 위하여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쾌감을 잃지 아니하고 또 그 쾌감을 더 길러나가려는 본능에 가까운 무의식적인 것이었었다.

그러므로 그네의 하는 이야기는 그 수단으로 쓰이는 피상적인 것이었었다.

그 내면에는 그네 스스로도 아직은 잘 의식치 못하는 몽롱한 욕망과 이상스러운 호기심이 숨어 있었다.

이 뒤로부터 두 사람의 마음은 공연히 들썽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단 둘이서 마주 앉으면 마음이 어쩐지 느긋한 듯하였다.

무슨 일에든지 정수의 하는 것은 문자에게, 문자의 하는 일은 정수에게 서로 말 할 수 없이 재미가 있었다.

정수나 문자 두 사람 중에 누구나 한 사람이 그 오막살이에서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그만 아무 재미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그네 스스로도 아직은 잘 의식치 못하는 그 관계가 있다고 결코 그 오막살이의 평화로운 살림살이를 깨뜨린 것은 아니다.

형식은 정수에게 질투를 하였다. 물론 정수와 문자 사이의 그러한 관계가 있는것을 그가 알고 그러한 것은 아니다.

형식은 학교에 가서 혼자 앉았으면 정수와 문자가 힘있게 껴안고 입을 쪽쪽 맞추리라는 것을 상상하고 무의식중에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일도 있었다. 또 옆방에서 정수와 문자가 조용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금시 쫓아가서 무얼 하고있나 보고도 싶었다.

더우기 문자와 정수가 자기가 보지 않는 데서 농말을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면 그는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듯하였다. 또 혹 어느 때 정수가 집에 없는 사이 에문 자가 일이 있어 혼자 밖에를 나가는 때에는 형식은 문자와 정수가 어디선지 단둘이 조용히 만나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곧 그저 문자의 뒤를 밟아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형식은 혼자 속을 태우다가도 문자의 귀여운 말소리와 정수의 천연스럽고 다정한 얼굴을 보면 그만 마음이 더운물에 눈 녹듯이 사라 지고 자기가 그렇듯 질투를 일으킨 것을 속맘으로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형식은 예전에 상야에 있을 때에는 가끔 놀러오는 봉우에게도 그렇듯한 질투를 하였다. 그뿐 아니라 문자를 자기가 사랑하게 된 뒤로 문자와 접촉하는 모든 남자에게 그는 그렇듯한 질투를 하였다. 그러므로 형식의 질투는 결코 못된 강짜도 아니고 무서운 복수의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자를 사랑하는 맘에서 우 러 나오는 변태현상에 지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가상의 질투였었다. 그러므로 그는 문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예전보다 못하지를 아니하였다. 물론 봉우나 문자도 형식이가 그러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수만은 형식이의 그만한 심리를 관찰할 수가 있었으므로 가끔 혼자 미소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날이 갈수록 문자와 정수는 꿈 같은 호기심으로 차차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억제하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문자가 예전보다 형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었다.

정수와 문자 사이의 이상스러운 현상은 시적 색채(詩的色彩)를 띤 호기심과 육감에서 우러나온 꾀임에 지나지 못하였다. 

 

 

[상기 저작물은 저작권의 소멸 등을 이유로 저작권 보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반응형

'책읽기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정환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열면서  (0) 2022.07.28
채만식 과도기 [하]  (0) 2022.07.28
한용운 사랑  (0) 2022.07.27
함세덕 동승  (1) 2022.07.27
이명선 씹하구  (0) 2022.07.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