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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채만식 여인전기 [중]

by 역달1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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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린 진주는 졸린 것을 억지로 억지로 참으면서 할머니와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집에 당도하던 길로 낮에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가느라고, 또 석양때부터는 동헌(東軒)에서 원이 베풀고 청하는 잔치에 나아가느라고 밤이 이윽해서야 돌아와 그제서야 비로소 모자(母子)부터 부녀( 父女) 세 가권이 단출한 한때를 가질 수가 있었다.

식혜는 역시 생강을 많이 넣고 통고추를 띄우고 하여 할머니가 손수 정성들여 담근 것이었었다.

그런 식혜를 진주를 무릎에 안고 앉아 후울훌 맛있게 몇 번 마시고 나더니

"참, 진주야?" 하고 불렀다.

"내?"

"너 주머니 하나 만든 것 있어?"

"주머니요?"

"응!"

"내!"

진주는 얼른 일어나 반닫이 앞으로 가서 주머니 하나를 찾아가지고 왔다. 옥색 관사 바탕에 자주실로 앞과 뒤에다 각각 수(壽)와 복(福)을 수놓고 남끈을 꿰고 한 귀주머니였다. 이 주머니에다가 임중위는 딸과의 사진을 넣어 품에 품고 출정을 하였던 것이요, 그것이 이영삼고지에서 우연히 내목 장군의 손에 거두어진 바 되어 친필의 서한과 함께 유족인 송심당노인 조 손에게로 보내어온 것이었었다.

"허어! 네가 벌써 이렇게 얌전하게 주머니를 만들구 수를 잘 놓구 할 줄알아? 제법이로구나, 허허허허!"

아버지는 주머니를 받아 들고 기뻐 칭찬이면서 진주의 볼에다 볼비빔을 하여 쌌다. 그 술기운에 홧홧하고 수염 거슬거슬하던 아버지의 볼비빔의 감촉을 진주는 시방도 어제런 듯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자식아? 기집아이루 솜씨가 벌써 이렇게 얌전한 건 기특하다만, 거 이왕 생겨날려거든 응? 고추를 죄끔만 달구서 생겨나겠지? 허허 허허."

그 말에 할머니는 같이 웃으면서, 그러나 "사내자 식으 루 생겨났다 너처럼 무인(武人)아니 돼, 평생을 진중 으 루만 왕래하다 말라구?"

"허허, 조옴 좋습니까 어머니?……늘 말씀이지만 첫째 왈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교가 그러섰구, 또 장부 어즈러운 세상에 났다 나라를 위해, 의를 위해 삼척 장검 비껴 들고 한번 용맹을 떨치는 것두 남아 일생의 쾌사가 아니겠 읍니까?"

"쯧, 아모리 어미라기로소니 장부의 하는 노릇을 뒷바지는 할지언정 구태어 막자 할 리야 있을꼬만서두 네 나이 어언 삼십이 넘지를 아니했나? 위 천하자( 爲天下者) 는 불고가서(不顧家事[불고가사])라니, 가사야 불고 한 다지만 후사는 돌아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서어서 사람을 맞어들여 임씨 댁 가문 이어나갈 손(孫)을 볼 염량도 해야지! 옛날 헌다헌 장수들도 평생을 전진 속에서 마쳤건만 제마다 후손은 끼치지 아니했든가?"

할머니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태연스런 음성이요 언사였으나 일변어 딘지 기색이 범키 어려운 엄엄한 것이 있었다.

5

"어머님……"

안았던 진주를 내려놓고 아버지는 식혜상 옆으로 물러앉아 무릎 꿇고 두 팔 짚고 머리를 조으면서 절절히 비는 것이었었다.

"이제야 깨우친 배는 아니올시다마는 불효한 죄가 열번 죽어 마땅합니다! 남달리 극심한 파란을 겪으시다 칠십 당년하신 어머니를 잠시 한때 편안히 뫼 시지 못하고 끝끝내 이렇게…… "

"부질없은…… 내게야 불효란 당치 아니한 말이지. 내 언제고 네가 밖에나 가서 하는 노릇을 불가하다 한 적이 있으며, 에미한테 매어 대사와 큰 뜻을 저바리라 한 적이 있든가? 오직 때가 늦어가니 후사도 유렴하도록 하란 그 말이지."

"전지에 나가는 몸이니 목숨이 온전하기를 기약하겠읍니까마는, 만일 공을 세우고 무사히 돌아오는 날이면 그때는 어김없이 어머님 말씀대로 거행 하겠 읍니다!"

그러고는 한번 더 머리를 숙이고 나서 도로 편안한 앉음을 하고 먼저처럼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였다.

"조금치두 염려하실라 마세요, 어머니. 전쟁에 나간다구 다 죽습니까 어디?"

"무사해 돌아온다면 조옴 좋 으리만 서두…… "

"그런데 어머니?"

"식혜가 식었나본데 뜨뜻한 걸루 들여오게 할까?"

"괜찮습니다……네 어머니? 거 색다른 며누리 좀 보시겠어요?"

"색다른 며누리라니?"

"허허허. 일본 며누리 말씀입니다."

"일본? 하필 그런?"

"어머니께서 불가히 여기신다면 파의를 하겠읍니다만서두 혹시…… "

"불가한 여부보다두 제일에 내가 말을 알며, 또 풍속을 알아야 그런 색다른 며누리를 맞이할 텐데 걱정이로군."

"그냥 제가 내 집 사람이 되어 들어오는 이상, 말이며 예절 풍도를 다 우리를 따라야 하겠지요. 그것보다두 어머니께서 의향이 어떠실까 해서."

"네가 가타 여겨서 하는 노릇이라면야 나는 따를 뿐이 아닌가?…… 들으니 말이 다르고 풍도가 약간 다르지 대체는 우리와 범백이 방불하다면서? 생김새가 방불하듯이."

"그러믄요! 머언 조상은 우리와 한 조상이드랍니다!"

"또오 인정은 매양 일반일 터…… 그러구 그 사람네가 여인이 남편 공경이 끔찍 아주 흠선하다구?"

"네. 확실히 조선 여인들보담 낫습니다. 본받을 구석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만 아닌가? 들어와서 남편 잘 받들고, 그러구 저것 잘 거 천해 길르구 했으면 그만이지, 내가 무슨…… "저 것이란 물론 진주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항차 내가 살아 새며누리 섬김을 받기로소니 얼마나 받을 나이라 구…… ""하옇든 이번 나갔다 돌아와 그때 다시 자상히 이쭙고 수이 구정을 짓도록 하겠읍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께서 우선 손주놈 재롱도 보시게 되실는지 모르고…… ""규수는 나이 몇인고?"

"허허허, 어머니두 온! …… 이왕 조금만 더 참으세요, 허허허."

아버지는 이렇게 웃음으로 끝을 흐려버리고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6

진주는 나이 들면서부터는 매양 그 생각이 나면 일이 못내 궁금하였고, 자연 혼자서 추측과 상상을 두루 하여보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막연히 그저 내지 여자로 아무나를 장차 택하여 가지고 그때 비로소 새로이 취실(娶室)을 할 생각이라는 의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내지 여자를 한 사람 택하여 둔 바가 있어 그를 맞아들이겠다는, 이 뜻인 것이 분명하였었다. 그날 밤 그 자리의 말 운과 내색으로 미루어 정녕 그러하였다. 한 여자가 ── 어떤 내지 여자 하나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적실한 사실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생긴? 인품은? 나이는? 근지는?

물론 쌍스런 집안은 아니었다. 버젓한 가문의 태생이었다. 한 이십 세 된…… 더도 덜도 아니요 마침 그 나이였다.

얼굴 갸름하고 눈이랑 입이랑 코랑 다 이쁘장스러웠다.

마음씨 좋고 얌전하였다. 늘 생글생글 웃으면서 허리 고붓하고 참배쪽 같이 상냥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께서 우선 손주놈 재롱도 보시게 되실는지 모르고……’

이 말이 있었다. 어린애가 있다는 말이기 근사하였다.

어린아이! 어린아이! 그럼 내 동생이렷다. 동생, 동생, 오라비동생, 꼬옥 아버지를 닮아 이쁘고도 씩씩하게 생긴 사나이. 내 동생, 오라비동생. 열한 살이나 열두 살박이, 한창 장난꾼이 선머슴동생, 귀여운 내 동생, 내 동생.

'좀 보았으면! 왜 찾아오지 않을꼬? 그 새엄마랑 함께…… 몰라서 못 오지나 않는지?’

이렇게 진주는 마지막엔 가공(架空)의 동생과 새엄마라는 이를 그리워까지 하도록 상상은 매우 골똘한 것이 있었다.

생각하면 허황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주는 구태여 그것을 허황 한 공상으로 돌려버림으로써 한 조각 해(害)없는 즐거움을 스스로 없이 하고싶지는 아니하였다.

그보다도 할머니는 생각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 진주는 늘 별러오다 오늘은 마침 또 제향날이요 해서 계제도 좋고 하여 부디 이야기를 좀 하여 보려니 하고 초저녁부터 유념을 하였었다.

"아따 저어 할머니? 그날 저녁에 아범이 이런 말 했잖었어요?……"

마악 그래서, 식혜상을 물리고 나서 이렇게 시초를 내는 참인데, 그러자 돌쇠어 멈이 자리에 당도하여 이야기는 그만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돌쇠어멈은 이 집의 오랜 계집하인으로 겸하여 고 임중위를 젖먹여 기른 유모 였었다. 시방은 속량을 받아 나가 살고 있으나 옛 은정을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그런 중에도 두 때 명절, 송심당노인의 생일날, 그리고 임 중위의 제사날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기를 궐하는 적이 없었다.

돌쇠어멈은 평일과 달라 무슨 일인지 기색이 심히 평온치 못하여가지고 오더니, 올라와서 노마나님과 아가씨한테 문안을 드린 후 자식놈의 급병으로 낮부터 오기가 늦어진 사죄를 한두 마디 하고는 인하여 놀랍달까 해괴하 달까, 하옇든 돌연한 소식을 한 가지 전하는 것이었었다.

7

"이런 분허구 참 기맥힐 데가 있사와요 글쎄!…… 들으시면 되려 심화만 더 되실 상불러 와 사뢰지 말려니 했어두 어디 또 그러와요? 몰랐으면 이어니와 쇤네 도리에…… "

돌쇠어멈은 약간 수다스런 허두에 이어 더럭 씨근거리면서 하는 말이었었 다.

"아니 글쎄, 그 댁으서 새서방님을 장갈 다시 들이시드랍니다!"

진주는 가슴이 철썩하고 와락 상기가 되었다.

송심당노인도 진주 못지 아니하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나 표면은 태연하였다.

"온 시상에 그럴 법이 어딨어와요? 쇤넨 그 말을 듣구 하두 분허구 절통 해서…… "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

잠자코 앉았다 노인이 조용히 묻는다.

"바루 쇤네 이웃에 사는 천석할아범이 그래와요. 오늘 아까 향교골 볼 일이 있어 갔다 남진사댁에 신행길이 들기에 물었으니, 그댁 새서방님이 새장 갈 드신다구 허드라구요."

"적실하겠다?"

"제 눈으루 보구 와 그랬는데와요!"

"………"

노인은 고개만 끄덱끄덱, 한참이나 또 묵묵히 앉았다 혼잣말로

"쯧! 어려두 장부여든, 장부 두 번은 말구 열 번 장간들 못 들리!"

진주는 그동안 두 차례나 시가엘 갔다 번번이 되쫓겨오고 되쫓겨오고 하였다. 가마가 대문 안에도 못 들어서게 하고, 물을 끼얹는다 불을 싸 던진다, 교군 꾼들을 작대기로 후려갈긴다 하면서 한사코 막는 바람에 하릴없이 가마 머리를 돌리고 하였었다. 그러나 진주는 단념을 아니하였고, 내일이 또 가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날이었었다. 새서방 준호와 언약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날 준호는 사약인 줄만 알고 집어다 마신 것이 실상 멀쩡한 가짜였었다. 비상도 사약도 아니요, 쓰디쓴 금계랍이었다. 그러나마 초학도 아니 떨어질 적은 분량의……그래서, 에이 내가 좀 죽어버릴걸 하고 일껏 사약을 마셨다는 것이 하나도 죽어지지는 않고, 모친 박씨부인은 옆에서 갖은 핀잔과 구박을 주어쌌고 하여 결국 망신만 톡톡히 하고 만, 그야말로 초학 방예를 한 꼴 이었었다.

진주가 두 번이나 그렇게 도로 쫓겨온 뒤로는 준호는 인제는 새댁이 영영 오지 아니하는 사람이거니 하고 낙망을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혹시…… 하는 여망에 새댁의 눈치도 볼 겸, 또 무한 그립고 한 정에 준호쯤으로는 정히 결사적이랄 모험을 감히 하여 학교에 가는 책보와 점심을 들멘 채 처가엘 달려왔었다. 그것이 바로 보름 전이었었다.

말은 아니하여도 준호의 그 속을 못 알아차릴 진주가 아니었다. 선뜻 교군을 차려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떠났을 것이로되, 동행이 되면 준호의 처가 행보를 박씨부인이 기수 챌 위험도 있고 겸해서 아버지의 제 향 이 앞으로 임박한 터라, 이왕 그러면 제향이나 보고 이튿날 어김없이 가마고 단단 언약을 한 후에 준호만 그날로 먼저 돌려보냈었다. 다만 하루라도 묵고 가게 하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나 당일로 회정을 시켜야만 일이 탄로가 아니 나겠어서 늦은 점심 대접하여 즉시 네패 교군에 태워 해전으로 향교 골육십 리를 동구 밖까지만 대도록 신칙하여 떠나보냈었다. 그러고서 지금 내 일 이면 세번째 ── 보나마나 또 쫓겨오 기십 상인 ── 길을 떠나려던 참인데 그 소식이었었다.

8

이튿날 아침.

비로소 사연을 안 양오라비 창수(昌洙)는 세 길이나 뛰면서, 인제는 더 참지 못하노라고 동네 두레꾼을 몰고 가 남가네 집을 도륙을 놓든지 당장 재판을 걸어 법을 맛보이든지 하리라고 들이 야단을 쳤다.

송심당노인은 일을 그렇게 혈기대로만 행하는 법이 아니니라고 양 손자를 진무 시킨 후 우선 사람을 놓아 사실의 진가를 확실히 알아오도록 하였다. 석양에 돌아온 회보는 지난 밤 돌쇠어멈이 전한 바와 완전히 내용이 일치 하였다.

이로부터 진주는 인생의 첫출발을 낭패당한 고민과 그리고 장차 몸을 어떻게 처하는가 하는 향방이며 결심이며 계획 같은 것을 생각하기에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미구하여 해가 바뀌었다.

드디어 진주는 인생을 새로이 출발하기로 결심을 정하였다. 당연한 결심 이었었다.

결심은 비교적 쉬웠다. 하나 그를 행하자 함에는 우선 마음부터가 이미 한번 출발하였던 인생 ── 결혼 ── 으로써 생겨진 모든 결연의 정리( 情理) 를 깨끗이 끊고 씻고 하고서라야 될 일이었다. 큰 용기와 강단이 필요하였다.

또 어떠한 방법으로써 새로이 출발하여 나아가는 방법을 삼느냐 하는 그 방법이 또한 졸연치 아니한 문제였다. 우황 향방에 이르러는 대단히 막연한것이 있었다. 만약 향방과 방법을 그르친다면, 일껏 새로운 출발도 결국 새로운 실패를 장만하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었다.

모름지기 향방과 방법을 잘 정할 수 있는 수단 즉 능력이 무엇보다도 먼저 있어야 할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 능력인즉은 학문으로부터 우러나는 식견( 識見) 이 곧 그것임도 깨달았다.

정초의 어느 날 밤, 진주는 마침내 양오라비 창수도 있고 한 자리에서 할머니한테 신학문 공부나 좀 하여볼까 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할머니와 창수는 다같이 한마디에 찬성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네가 공부를 가겠다면 학비 같은 것은 아무 염려 없도록 하리라고 하였다.

창수는 시방 즉시 서울로 공부를 떠나기보다는 얼마 동안 기초공부의 준비가 필요할 의견을 말하였다. 네 나이 열아홉. 한문 문필이야 넉넉하다 하겠지만 아이우에오도 모르지 않느냐. 그리고 서울 가서 중학 정도의 학교에는 들 기가 어려울 것. 기껏 조무래기 틈에 끼여 가나부터 배우게 될 터. 치사히 그러느니 집에서 보통학의 여선생을 데려다 기식(下宿[하숙])이라고 시키면서 한 일 년이고 이태 동안에 사 년 하는 보통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익히게 하여라. 그래가지고 비로소 서울로 간다면 이태나 삼년이라는 것은 우선 얻는 것이 아니겠느냐?

매우 지당한 의견이었다. 진주는 이 울적한 공기 속으로부터 당장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만은 미흡하였으나 할머니도 창수의 의견을 옳게 여겨 권이고 하여서 그대로 좇기로 하였다.

다섯 해의 세월이 흐르고 경신(庚申) 대정 구년(1920)이었다.

8. 危 機[위기]

1

좁다란 뜰에 이것저것 골고루 가꾼 화초 가운데 한 그루 개나리( 辛夷花[ 신 이화]) 가 노란 꽃잎을 방긋방긋 뿜기 시작하였다. 완구히 봄이었다.

곳은 북부 가회동 긴 골목을 취운정(翠雲亭) 무너져가는 문앞 가까이까지 올라가 바른편 바로 길옆으로 언덕배기에 있는 진주의 거처…… 안방과 마루와 건넌방이 있고, 반간짜리나마 부엌이 있고, 안채와의 사이를 판장으로 막고 하여 딴채같이 된 이 사랑채를 진주가 매삭 팔 원씩에 세 얻어 든 것이 그가 서울로 올라오던 해 ── 무오년(戊午年) ── 늦은 가을 이었고, 그러고서 이에 신유(辛酉 : 大正[대정] 10년 :1921) 삼월이니 어느덧 이 집에서 네번째 맞이하는 봄이었었다. 동시에 학창(學窓)을 마지막 떠나는 봄 이었다.

식구라야 잔심부름도 시키고 학교에도 간 사이에 집도 보게 하고 하느라고 시골서 데리고 와서 있는 계집아이 옥단이와 단 둘이뿐…… 그 옥 단 이마 저 오늘은 안집에서 동물원(창경원) 구경을 간다는 바람에 모처럼 따라 보내고 없고 진주 혼자 집에 있어, 지대가 또한 한적한 지대라 집 안팎은 소년같이 긴 봄날에 산이 아니라도 태고처럼 고요하였다.

한낮이 훨씬 겨운 햇볕이 툇마룻전에 맑게 드리웠다. 따사하고 그 맑은 햇볕을 쬐면서 진주는 마룻전에 걸터앉아 뜰의 개나리꽃 핀 양을 우두커니 바라다보고 있다.

스물네 살…… 일찌기 열여덟 살 적 애련튼 소부의 모습은 옛말이요, 인제는 얼굴과 몸매가 한가지로 활짝 다 피어 한 사람의 완전히 성숙한 여자 였다.

약간 나이보다 두어 살 어리어는 보였다. 또 본시 청초한 체질이어서 꽃 이 라면 바위 틈의 한 떨기 진달래꽃일지언정 모란꽃같이 푸짐하고 번 화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 윤나는 살결이며 침착한 혈색이며, 허리로부터 담쏙 부풀어 내려간 곡선 하며, 역시 숨길 수 없는 것은 제물의 성숙이었다.

학업도 예정한 대로는 아무려나 마치었다. 이태 동안 보통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익혀가지고 서울로 올라와 이내 ××여자관의 중등과에 들어 삼 년의 기한을 치른 후 한 장의 졸업증서를 받아들고 며칠 전에 교문을 나왔었다. 그리하여 비록 중등 정도에 불과한 것이기는 할값이라도 학문에서 오는 지각 또한 그의 열여덟 살 소부 적의 그것에 비길 바가 아닐 만큼 무던 하여진 것이 있었다.

이리하여 몸도 지각도 다같이 충분히 성숙이 된 진주였었다. 써 그는 일 찌기 정하였던 바에 좇아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비로소 착수할 아침을 당한것이었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 그것은 매양 새로운 결혼이어야 할 것이었다. 물론 진주는 노상 새로운 결혼으로써 그의 새로운 출발의 전제를 삼은 것이 있었 음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여자가 한번 결혼에 실패를 하고 나서 새로이 인생을 출발함에 있어 수도원의 수녀가 된다는 둥 특별한 조건 즉 독신 생활 로써 방법을 삼는 사람이면 모르되, 일반으로는 새로운 ── 또 한번의 ── 결혼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길일 것이었다.

진주도 매양 스스로가 의식하고 아니하고를 떠나 이 자연한 길을 향 하고 서서 있었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지친 일각문을 밑치면서 머리끝부터 발 부리까지 말쑥하게 새것으로 차린 청년신사 하나가 서슴지 않고 척 들어선다. 손에다는 깜장 손가방을 들고.

2

오영당(吳永逹[달])이라고 이 봄에 ××의학전문을 졸업한 햇물 의사였다.

안집 안주인의 친정 조카뻘이 되는 사람으로 자주 왕래가 있어 진주도 안면이 노상 생소치 아니하던 터인데, 그러자 한 월여 전에 진주가 가벼운 중이염( 中耳炎)을 알아 ××의전병원엘 갔더니 오영달이가 마침 마지막 실습을 그 이비인후과에서 하고 있었다.

중하나 경하나 간에 병자에게는 안면 있는 사람을 병원 안에서 만나기 같이 반갑고 안심스런 것은 없는 법이어서 진주도 깜빡 그가 반가왔었다.

오영달은 진주가 반가와하는 이상으로 반가와하였다. 평일에 마음 가운데한 점 진주를 단지 지나가는 사람으로 보고 말지 아니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오영달에게 한번 더 반갑기는, 진주의 치료가 다행히도 저에게로 돌아온것이었었다.

담임교수의 진단과 처치의 지시에 좇아 오영달은 아주 열심히 진주의 귓속을 치료하여 주었다.

사흘째 병원엘 가던 날이었다. 오영달은 배웅하는 체 복도로 따라 나와서 그리 대단한 기계나 약품이 필요한 바도 아니요 하니 날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통원을 하기가 번폐스럽겠고 무의미도 한 노릇이겠은즉, 차라리 자기가 하루 한 차례씩 오후에 들러서 치료를 하여 주도록 하마는 제언을 하였다.

진주는 남의 그러는 화락한 호의와 친절이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절을 하자니 면을 보아 차마 박절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일후 사례 나후 히 하려니 하고 응락을 하였다.

그 뒤로 오영달은 하루도 빠짐이 없이 오후면 꼬박꼬박이 와서는 치료를 하여 주곤 하였다. 덕에 진주는 날마다 몇 시간씩은 학과를 궐하여가며 통원을 한다는 손을 보지 아니할 수가 있었고, 병도 순조로이 나아 요새 몇 차례는 하루 걸러큼씩 치료를 받아오던 참이었었다. 일변 그러는 동안 둘 이의 사귐은 훨씬 가까와서 단순히 의사와 환자라는 교섭에만 머물지 않고 사이가 자못 임의로와진 것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영달은 건들건들 그렇게 인사를 하는 얼굴이 연방 싱글벙글하면서, 진주가 마주 일어서는 앞으로 와 선다.

오영달……그는 해맑고 얇은 얼굴이며 연한 표정이며가 경쾌 명랑한 재자( 才子) 는 될지언정 근량 있는 군자(君子)는 우선 아니어 보인다. 그런데 다나서 처음으로 쓴 연회색 중절모자에다 바늘 쏙 뽑은 회색 신사복과 같 은빛 같은 감의 봄외투에다 사슬도 닳지 아니한 깜장 칠피코 단화에다, 일 습을 이렇게 새것이요 새로운 몸치장을 하여가지고는 그 새롭고 화려함을 칭찬 받고 싶은 듯이 서서 제 위아래를 씻어보면서, 여자를 보면서 부절히 웃음이 흩어지는 양은 흡사히 암컷 앞에서 나래를 자장하는 공작을 연상케 하는 느낌이 없지가 못하였다. 그야 오랜 학생의 굴레를 벗고 나선 기쁨에 가사 뜻있는 여자의 앞이 아니라도 그만쯤 기분이 달떠하기야 예사요, 그다지 흉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만.

늘 그 시꺼멓고 낡아빠진 교복에다 뀌어진 사방모짜리의 오영달만 보아오던 진주는 그의 이 별안간 새롭고도 화려한 몸치장이 미상불 사람이 한결 돋보여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3

'사람은 의복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옳은가 보다!’

진주는 속으로 문득 이런 생각을 하다가

"길에서 썸뻑 만났드라믄 몰라뵐 뻔했어요!"

"허허 허허 !……마악 나서는 참인데 양복집 사람이 가지구 들오겠죠. 그래 부랴부랴 갈아 입군 시방……어떻게 촌 쟁퉁이 같지나 않습니까?"

"저야 무얼 알아요?…… 그래두 퍽 좋아뵈는데요?"

"어떤지 엉성한 것 같구 자꾸만 어색해서…… "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양복을 입은 때의 아무나 그러는 솔직한 느낌이었다.

명주털이 송알송알 그 다칠까 무섭게 연하고 보드라운 진주의 귓부리를 쥐었다 놓았다 아낌없이 주무르면서 몇 번이고 귓속을 후벼낸다.

진주는 이 남자의 향의가 심상치 아니한 것임을 진작부터 모르지 않는다. 그런 남자의 더운 입김을 바짝 볼에다 받으면서 진주는 남자와 같은 열도( 熱度) 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약간 심장의 높이 뜀이 없을 수가 없었다.

치료는 간단히 얼른 끝났으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오영달은 이내 돌아가지는 않는다.

"한번쯤 더 보아 드리면 아주 다 나으시겠읍니다."

"그동안 참 하두 수고를 해주세서!……"

둘이는 나란히 마룻전에 걸터앉아서 이야기였다.

"그렇게 수고루 여기시는 것이 전 늘 맘에 섭섭해 못하겠어요. 범연해 그 러시는 것 같아서!"

"아이 참! 치하두 못허게 허셔!"

"수고라커니 치하니 하는 것은 친분(親分)의 농도(濃度)에 반비례하는 법 이 랍니 다."

"………"

진주는 반대로 긍정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저러나 인제 낼모리 한번 더 와 치료해 드리구 나면 그땐…… 전 제일에 그 일이 섭섭해서 생각만 해두…… "

"종종 놀러두 오시구 허시지, 치료 다 끝났다구 아주 발 끊으실 생각이신 감?"

"의사 오영달이 필요하신 것이지 여니…… 무어랄까…… 친구? 동무?…… 그런 걸룬 오영달이 그대지…… "

진주는 속으로 남자답지 아니하게 변사가 있고 속이 옅다고 생각하면서 흔 연 히

"무슨 그럴 리가 있에요?"

"………"

오영달은 우두커니 발끝을 내려다보고 앉았고.

"아뭏든 인전 졸업두 허셌구 저렇게 정말 선생님이 되구 허셌으니깐 병원을 내시겠죠?"

"………"

"더 연구를 허시는지…… "

"것 보담 두 먼점 해결을 해야 할 더 급한 문제가 하나가 있답니다. 집에서는 시골루 내려와 개업이나 하라구 조르구. 전 실상 졸업이라시구 했다지만 무얼 알아요? 생사람 잡기 꼬옥 알맞죠. 그래, 동경제대 같은데라두 가 한 삼사 년 더 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인데…… "종시 발끝만 내려다보고 앉아 푸뜩푸뜩 이야기를 하던 오영달이,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그런 것은 다 둘째 세째 문 제구요…… "하더니 어느덧 상기된 두 볼, 정채 나는 눈으로 진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다본다. 바라다보다가 별안간 "진주씨!" 하면서 덥석 진주의 손길을 잡는다.

4

남자의 평소의 뜻을 짐작하는 것이 없지 않던 터라 크게 당황할 것은 없어도, 그러나 여자요, 겸하여 처음으로 당하는 노릇이어서 얼굴이 확 달고 붙잡힌 손이 떨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아이! 노세요!"

"저와 결혼해 주십시요!"

"………"

"변변치는 못한 남자올시다. 그렇지만 목숨이라도 다해서 진주씨 사랑 합니다! 그러구 진주씨 한분 고생 아니 시켜 드릴 능력은 있읍니다."

"………"

"네? 진주씨?"

"전 몰라요!"

"그럼 싫으십니까? 반대십니까?"

"이 손 노세요. 남이 보드래 두…… ""대답 해 주세요! 결혼다겠다구 대답해 주세요!"

"졸지에 대답을 어떻게 해요?"

"생각을 해보서야 하시겠어요?"

"차차 두구…… ""진주씨?"

"네?"

"믿겠읍니다. 믿구 기대리겠읍니다. 언제까지구 전 기대리겠읍니다. 전 만일 진주씨가 아니라면, 전 영영…… ""……… ""믿겠 읍니다. 꼬옥 믿구 언제까지구 전 기대리겠읍니다. 네? 진주씨."

"너무 그러실라 마세요. 사람마다 마음 쓰이는 것이 고르지 않구 또 제마다 다른 사정이랑 곡절이 있기루 마련인데, 그렇게 믿구 기대리시다 부질없이……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절대루 없읍니다. 전 믿습니다. 전 믿습니다. 믿는 것이 있어요…… 기대립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놀다 돌아가는 오영달을 문앞까지 배웅 하면서

"날새 저녁진지나 좀 잡수시게 허고 싶은데…… 날짠 다시 알려 드리겠지만 서두…… 그동안 서울 기시겠죠?"

"있구말구요!"

반가와서 선뜻 그렇게 대답을 하기는, 결혼을 승낙할 자리를 베푸는 것 이 거니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몇 끼 굶구 있다 오겠읍니다."

"어쩌나! 진지밖엔 없는데!"

"아, 밥이면 그만이죠?"

"참, 약주 잡수시든가요?"

"무언 못 먹겠읍니까? 진주가 주시는 거 라면…… ""그럼 날짠 다시 알려 드리께시니 부디 와주세요. 안채 기신 추선생두 나오시구 헐 테니깐…… ""추군요?"

물으면서 기색이 약간 시무룩하여진다. 저 하나만 청하여 저녁이라도 대접 하면서 단출히 결혼 이야기를 승낙하려는 뜻이거니 하였던 것인데, 막상 또 하나 다른 인간이 있다고 하니 실망이 될 수밖에. 항차 무엇으로 보나 와락 직성이 서로 맞지 아니하는 위인이리요. 더우기 진주를 두고 적지않이 질투까지 느껴오던 그 위인이리요.

오영달이 돌아간 지 얼마 있다 문제의 인물 추영산(秋映山)이 동저고리 풀 대님 바람에 뒷짐 지고 골통대 비뚜로 물고 어칠어칠 진주에게로 나왔다. 오영달의 친구요, 그의 반연으로 안채의 건넌방에 하숙을 하고 있으면서 대가 ××의 문하에 다니며 그림을 배우는 청년이었고, 이미 독자한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5

추영산은 오영달과는 전혀 대척적인 인물이었다. 그 넓고 두투름한 얼굴은 스물 일곱 살이라면 곧이가 아니 들릴 만큼 노티가 난다. 턱으로 볼로 수염은 닷푼씩이나 비어졌다. 머리는 참새 둥우리다. 동저고리 바람에 풀 대님 한 옷에는 손이랑 온통 물감투성이였다. 이런 차림새와 생김새가 오영달의 말쑥함에는 비길 바가 아니요, 한 사람의 탁객이 완구하였다.

추영산은 미상불 어느 의미로는 탁객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노상 그런 탁객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지저분스레 보이지 않는 것이 정녕 있었다. 다름 아닌 평상에 깊은 사색과 아름다운 감성에 잠기어 사는 천재적인 예술인 에게서만 볼 수 있는 청아한 운기(韻氣), 이것이 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은 때문일 것이었다.

진주는 이 추영산이 마치 나이 지루룸한 친 손위 오라비처럼 무관하고 좋았다. 속은 있는 대로 다 주어도 별 허물이 없고, 근심이나 어려운 일이 있다면 가 타악 들얹고 싶게 미쁘고 임의로왔다. 모델삼아 초상을 한장 그리겠노라고 청을 하였을 때에 동양화라 옷을 입은 채 포즈를 빌리시라곤 하여도 진주 같은 조심성 있는 여자로는 졸연치 아니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추 영산의 말인 고로 하여 선뜻 승낙을 하였었다. 미루어 진주의 추영산에의 신뢰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었다.

아까 오영달이 때처럼 둘이는 봄볕 따사히 드는 툇마룻전에 가 나란히 걸터 앉았다.

추영산은 불 꺼진 골통대를 씩씩 빨다가 혼잣말로

"이 놈, 이 불 아니 그어대구두 담배 먹는 기계 좀 있으면 좋겠드라!"

"그렇게 성가신 노릇, 차라리 담밸 피우지 마시죠?"

"간혹 진주씨가 손수 성냥을 그어 대주는 기회가 없었다면 아닌게 아니라…… "

진주는 웃으면서 성냥을 가져다 그어 대어준다.

"참, 그림은 하마 다 되셨죠?"

"아직두 한 이삼 일 더 있어야…… 급하십니까?"

"그림이 다 되믄 그 치하두 할 겸, 또 오영달씨가 졸업을 허셌구, 그동안 다니시 믄 서 치룔 해주시느라구 수골 허셌으니깐 그래 두 분을 청해서 저녁 진지라 두 잡숫게 허구 싶어서요."

"좋지요. 날라컨 밥보담두 막걸리를 듬씬 먹게 해주십시요."

"해필 막걸리세요?"

"가루누룩에 찹쌀루 유자랑 국화랑 넣구 빚은 진짜 약주루 밥알 동동 뜨는 전국이 아닐 바엔 막걸리가 되려 낫습넨다."

"그 술 내력만 외우재두 큰 공부겠네!"

"………"

"무얼 혼자 또 생각허시나봐?"

"거 남의 졸업축하두 좋지만, 진주씨, 여보?"

"네?"

"졸업두 했구…… 또오 올해 스물넷? 그렇지요?"

"네."

"그러니 어서어서 인제는 좋은 신랑 골라 시집을 가야 아니합니까?"

"온! 그게 그리 걱정이세요?"

"혹시 이런 추영산이라두 상관없다시면 이내 택일해서 성례 지나구요."

처음부터 끝까지 뜰앞으로 한눈을 주고 앉아서 남의 말 하듯 그러는 것 이었었다.

6

진주는 약간 볼이 화틋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웃음이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리어야 하였다.

"나는 구변두 없구, 또 그런 이야기를 잔뜩 에둘러 은근히 하기두 싫은 승 미요 해서 자연 말이 승거웠으리다만, 뜻 그만하면 내 속은 짐작 하셨을테니깐 잘 생각이나 하십시요. 아니 참고나 하십시요."

그러고는 일어서서 뒷짐 지고 어칠어칠 일각문으로 나가버린다.

미상불 수작이 싱겁기는 하였다. 그러나 진주로는 추영산의 방법이 싱거울지언정 내용조차가 싱거운 바는 아니었다. 추영산이 평소에 자기에게 향의가 골똘한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글쎄?……’

진주는 혼자 기둥에 가 지여 서서 곰곰 생각이 깊는다.

오영달이나 추영산이나 사람과 색깔은 다를지언정 한가지로 진실하게 진주를 연모하는 마음인 것은 사실이었다. 착실한 청년들이기도 하였다. 써 건실한 연애라고 하여 부족할 구석이 없었다.

진주는 막상 연애토록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사 진주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과 마주 연애를 열렬히 하며, 그러다 결혼을 하며 하기로소니 진주로 하여금 그것을 금한다거나 불순하다고 폄을 할 자는 이 천하에 없으리라.

한번 결혼이라는 걸 하기는 하였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이미 깨끗이 청산이 되었다. 민적도 도로 갈랐다. 저편에는 새사람까지 들어섰다. 아무 결련이 들 것이 없는 몸이다. 하물며 말이 결혼이었지 고스란히 처녀요, 이 에스 물네 살이라는 어리지 아니한 나이에 이르렀다. 마땅한 사람을 선택 하여 결혼을 하기에 하나도 걸릴 것도 부족할 일도 없었다.

진주는 당연히 오영달이나 추영산 두 사람 중의 하나와 결혼을 할 수가 있고, 하여야 마땅하였고, 사실로 그리할 생각이 일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영달과 추영산 두 사람의 영상이 감고 생각하는 눈앞에 나란히 나타날 때에, 그럴 때마다 멀찍이 뒤로 또 하나 의미하게 나타나는 영상…… 그것 은 소년 준호의 얼굴이었다. 꿈속같이 아련하면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프고 애달픔이 솟는 추억이었다. 소위 객관적 조건으로는 아무것도 새로운 진주의 결혼에 구속이나 구애가 될 것이 없으면서, 오직 당자 스스로가 마음 가운데 준호라는 존재를 못 잊었고, 민망한 생각이 들고 하는 이것이 거리 끼는 일이라면 유일한 거리끼는 일이었었다.

매년 여름방학이면 할머니를 위하여 고향엘 내려가곤 하였는데, 그럴 적마다 풍편에 소식은 들었었다. 그러나 그 소식이라는 것이 구구하여 잘 있다고도 하고 늘 앓는다고도 하고, 새로이 장가든 색시와는 금슬이 퍽 좋다고도 하고 소박을 해싸서 나가버리고 없다고도 하고, 서울 가서 어느 중학교에 다닌다고도 하고, 시골 어떤 농업학교에 다닌다고도 하고. 도무지 대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오영달과 추영산 누구를 택함이 가하냐를 생각하려던 것이 생각이 그만 준호에게로 번지어 가지고 진주는 얼마를 서서 그러다 문득 손가락을 꼽아 본다.

'열여덟 살…… 많이 자랐을 테지!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는지. 서울 와서 있다면 길에서라도 혹시 만났으련만. 만나니, 차라리 아니 만나기만 못한 노릇이지만……’ 여자의 소위 첫정이란 이다지 면면한 것이 있었다.

7

닷새가 지나서…… 황혼 무렵이었다.

오영달과 추영산을 대접하는 잔치도 거진 파물이 되어가는 참이었다.

실상 손들이 오기를 일찌감치 왔고 주인도 일찍 서둘러 진작 벌써 끝이 났을 판이었었다. 한 것을 원체 술을 즐기는 추영산에다 술에 들어서도 승벽을 내지 아니할 수 없는 오영달이 진주의 앞에서 맞다들린 자리였다. 식상에에 이미 취하였고 그 위에 저녁을 먹었고 그러고 나서 시방 남은 술을 마저 마시기를 겨루어하고 있던 것이었었다. 날씨가 이상히 훈훈하여 자리는 널찍한 마루에다 벌이었었고. 해서 일각대문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고 낭자한 이 좌석이 얼른 눈에 뜨이도록 되었었다.

처음에는 점잖스럽게들 천하사를 논란하고 세계대세를 말하고 하였다. 과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비판하였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토론도 하였다.

팔을 부르걷고 마루청을 치면서 무엇을 비분강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술은 취해오고 화제는 바닥이 났다. 농담과 험구가 나오는 것은 자연 한 순서였다.

"여봐라, 추가야?"

"이놈! 한 살이 위라도 연상은 연 상이어든…… "

"세상에 성이 그리두 없어서 그래 더러울추자 추가란 말이냐?"

"그 잔 먼점 비구…… ""오냐…… 또오, 이왕 성이 추가여들랑 몸채림이나 정갈히 해야지? 대체 저 무슨 탁객짓이란 말이냐…… 옜다 잔 받아라."

"네 듣거라. 옛시조에도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김생은 네야 긴가 하노라. 응?"

"그래서?"

"내 비록 외양이 탁하기로니 속조차 탁할까?"

"속이 탁하기에 그것이 밖으루 나타나 저절루 겉이 탁해지는 것이지."

"겉이나 탁한 나를 탓하느니, 병자의 고름이나 긁으면서 구복을 도모 하는 너를 한번 돌으켜볼 일이야."

"의는 인술이라니, 그 고루한 환쟁이 같으리?"

"가난한 환자가 오면 왕진 갔소 하라고 시키는 인술? 치료비가 암만이니 가 가지고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쫓는 인술?"

"일 원 가지고 오면 꼭 일 원짜리로, 백 원 가지고 오면 백 원짜리로 그림을 물감 달아 팔아먹듯 하는 너이 화쟁이는? 신성하다시는 예술을 저울 질해 팔아먹는 너이 환쟁이 말이다?"

행주치마 거뜬히, 옥단을 데리고 손님 시중에 한동안 바빴던 진주는 이윽고 한가함을 얻어 넌지시 좌석 머리로 비껴 앉아 두 사람의 허물없은 수작을 미소하며 듣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 속으로는 생각이 두루 많다.

'……저 양반한테 이 추씨의 침착하고도 대범스럼이 있다면?……’

'그렇거나 이 양반한테 저 오씨의 시원시원하고 활발스런 기상이 있거나……’

종종 되풀이하던 이런 생각도 자연 다시 또 나기도 하였다.

하여간 이 좌석이 진주는 두 사람 가운데 누구든지를 마음에 아주 작정 하여야 하는 좋은 기회였었다.

9. 義[의]

1

전등이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많은 때라 거리로 석유장수가 도부를 돈다.

땅거미가 내리려고 할 무렵, 그 황혼처럼 심란한 음성으로

"세기 사려." 하고 길게 외우면서 문앞 거리를 지나가는 석유장수 영감, 그의 무단히 심란한 '세기 사려’소리는 황혼의 구슬픈 심회를 가뜩이나 돕게 하는 것이 있어 저물녘 계동, 재동, 가회동 일판의 한 괄시 못할 거리의 정조 였다, "세기 사려."

스러질 듯 외우면서 내려오는 그 석유장수 영감과 엇갈리어 중학생 둘이 가회동 막바지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준호와 윤석이었다.

윤석은 그새 제 길로 한 길이나 자라 아주 헌다헌 장부가 되었고, 준호도 약질은 여전한 약질이었으나 나이가 역시 나이라 키도 많이 자랐고 몸피도 조금은 불고 하여 제법 인제는 멀끔하였다. 그러나 예와 다름없기는 그 침울한 기상이었다. 때마침의 황혼처럼 어둔 얼굴은 고개 푹 숙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양은 여전한 전일의 준호 그였었다.

두 소년은 작년 봄에 같이 서울로 올라와서 준호는 ××학교에 들고, 윤석은 약도 팔고 만두도 팔고 하면서 고학으로 ××학교의 야학에 다녔다. 준호의 종종 보조도 적지 아니하였다.

준호는 며칠 전에 삼청동 하숙에 들른 윤석더러, 지금 하숙집이 너무 난하고 시끄러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하니 다니면서 본 중에 조용한 염집이 있거든 천거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윤석은 그새까지는 별로 주의하여 보지 아니하였으니 앞으로 잘 유념 하여 쉬이 한 군데 물색을 해주마는 대답을 하고 돌아갔다. 그랬다가 오늘 조금 아까 일부러 와서 가회동 아무 번지요, 바로 취운정 문앞 근처인데 퍽 조용한 집 하나가 마침 방이 났다는 이야기를 동무에게 들었노라 하면서 가보지아니 하려느냐고 하였다.

준호는 선뜻 같이 나서 시방 그 가회동 아무 번지란 집을 찾아가고 있는길 이었었다.

"저게 석유장순가?"

이맛살을 다뿍 찌푸리고 준호는 지나친 석유장수 영감을 도로 돌려다 보다가 묻는다.

"응. 넌 첨 보니? 난 가끔 만난다…… 괴짜야!"

'세기 사려’하고 생각난 것처럼 또 외우며 내려가는 소리가 감감하여 진다.

"빌어먹을 놈의 장수, 청승맞기두 허네!"

준호는 곧 울상을 하면서 혼잣말로 두런거린다. 가슴 가운데 한(限)이 있는 소년 준호는 이렇게 감성(感性)이 연하였다.

집은 이내 찾았다. 처음 안채에 물었더니, 어제 벌써 작정이 되었노라면 서사랑 채에도 건넌방이 비었으니 혹시 물어보라고 하였다. 허실삼아 사랑 채의 열린 일각대문으로 들어섰다. 전등불 켜진 마루에서 주인인 듯한 동 저고리 바람에 풀대님한 사람이 양복 입은 손님과 술을 먹고 있었다.

준호가 토방 앞으로 다가가 모자를 벗으면서 학생 칠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학생 칠? 방?……"

주인(인 듯한 사람)은 혼자 그러면서 고개를 꺄웃 하더니

"얘, 옥단아?" 하고 부엌으로 대고 부른다.

주부인 듯, 그런데 장히 귀에 익은 음성이

"옥단이 심부림 갔어요." 하면서 불빛을 안고 나타났다.

"아이머니!"

"진 진주!"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 진주와 준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서로 이렇게 외친다.

2

준호의 모친 박씨부인이 그 고집 그 완고에 준호로 하여금 머리를 깎게 하고 서울로 공부를 보내고 한 것은 종시 서울 공부며 신학문이 그다지 탐 탁하 여서가 아니었다.

보면, 시골구석에서 한문이나 읽고 상투 탄탄 짜고 한 자제들은 머리 깎고 복장( 校服[ 교복]) 입고 서울 가서 신학문 하는 자제들에 비하여 무엇인지 모를 한풀 꺾이는 것이 벌써 드러나고 있음을 완구히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듣건댄 쫓은 며느리 진주가 서울 가서 신학문 공부를 한다고. 같은 사나이끼리라도 척을 진 사이에 내 자식이 저편에게 풀이 꺾인다는 것은 분할 노릇이거든 항차 박대하여 쫓은 며느리인 여자 사람한테리요. 박대 받고 쫓겨간 며느리는 신학문 서울 공부를 하고, 개명을 해서 잘 되어가지고는 천하를 거칠 것 없이 내로라고 얼굴을 들고 돌아다니는데, 내 자식은 사나이 자식이 시골 구석에 그대로 파묻히어 고루하게 명색도 성명도 없이 살면서 그 앞에 나가 고개도 들지 못할 지경이란다면 참으로 가슴을 칠 일 이었다.

서울은 돈이 많이 드는 곳이요, 사람 방탕하기 쉬운 곳이었다. 더구나 ' 그 년이’ 가서 있으니 혹시 저희끼리 만나든지 한다면 장히 위험스런 노릇 이었다. 해서 두루 주저스럽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였으나 그것보다는 저 것이 더 절박한 사정이라 마침내 손수 상투를 잘라주면서 서울 공부를 승낙 하였던 것이었었다.

준호는 그 야속한 상투를 깎는 동시에 그 가혹한 모친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소원이던 서울 공부가 무한 기뻤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다행키는 진주를 만나는 희망이었다. 아무리 넓다 하지만 같은 서울 장안 안이었다. 반드시 만나는 날이 있을 것이었었다.

'새댁! 진주! 그 이쁘고 상냥스런 새댁! 자나깨나 잊히지 않던 새댁 진주!’

이렇게 준호는 그리운 진주였었다. 마지막 갈린 뒤로 잠시 한때도 생각을 아니한 적이 없는 진주였었다.

물론 만난다 하여도 안타까운 일이었었다. 옛날처럼 나의 새댁이며 다정스런 진주며 한 그일 리가 만무하였다. 매양 슬픈 재회(再會)요 속절 없을 것 이었었다.

'만나도 옛과 같지 아니한 사람! 영원히 다시 옛 그 사람일 수 없는 사람과의 재회!’

뒤미처 나는 생각은 늘 이렇고 사무치는 한(恨)이 그것이었다. 차라리 아니 만나고 말기만 못하게 애달픔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움은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게 하였다.

일 년을 찾으면서 기다렸다. 이번 봄방학에는 진주의 본가라도 내려가 염치 불고하고 서울 처소를 물어볼까도 하였다. 언젠가 한 번 갔다가 공교 로이 문앞에서 처남을 만나(처조모였더면 막상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인데) 성미 괄괄한 사람이라 "자네 무엇하러 내 집에 오나?"하고 면박을 주어 평생 잊히지 않는 무렴을 당하고 돌아선 일이 없었다면, 아 쉰 마음에 가 물어가지고 오기라도 하였을는지 몰랐다.

아뭏든 그러던 진주를 준호는 지금 만난 것이었었다.

만나지려니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늘 한심턴 것이, 뜻밖에 꿈결 같은 만남이었었다.

3

준호의 얼굴은 빛났다. 눈에는 눈물까지 어리었다.

진주는 주르르 준호의 앞으로 달려 내려간다. 가 와락 그대로 그러안을 듯 주르르 달려 내려갔다. 진주의 눈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준호는 덤쑥 와 팔이고 손이고 부여잡을 듯이 몸이 움칫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루 위의 양복 손님과 함께 엉어주춤 일어서서 졸지의 사태를 의아한 눈과 다분히 간섭조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 동저고리 바람에 풀 대님 한 이 집 바깥주인 양반(인 것이 분명한 사람)을 힐끗 한번 올려다보고는, 그다지도 빛나던 얼굴이 찰나에 극단의 절망으로 변하면서 홱 몸을 돌이켜 반달 음질 쳐 일각대문을 나가버린다.

영리한 진주였다. 그 기수를 못 알아챌 진주가 아니었다.

"저이가 괜히!……"

어쩔 바를 몰라 그렇게 성화하다 도움을 청하는 듯 윤석을 본다.

윤석은 진주의 시선을 냉연 물리치면서 인하여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

진주는 빨리듯 그 뒤를 쫓아나갔다.

행길에서 윤석을 붙잡았다. 준호는 벌써 까맣게 멀리 가고 있었다.

"제발 좀 불르세요! 데리구 오세요!"

"내가 오라면 오나요? 어떤 고집인데!"

"그래두요! 저럭허구 가버리시믄 어떻게 해요? 어서 좀 불르세요!"

"얘, 준호여."

마지 못해 부르는 시늉만 하는 소리라 들리지도 아니하였거니와 들렸기로서니 대답을 하고 돌아서서 올 리도 없었다.

"절 어쩌믄 좋아!"

진주는 하마 발을 동동 구르다 느끼면서 행주치마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조금 감동이 되었던지 윤석은 볼먹은 소리로

"그 애가 무엇하러 와요?" 하고 지청구를 한다. 제딴에는 언중유골이었다.

"속도 모르구 괜히 그러지들 마세요!…… 하숙이 어디에요?"

"하숙요?"

조금 더 풀어진, 그래서 엔간히 계면스런 말씨요 얼굴이요 하였다.

"좀 데려다 주세요."

"욕 아니헐까?"

"지가 다 당허께요."

"약을 팔러 가얄 텐데…… "

"고학 허시는 감? 일 년치라두 다 사드리께."

"누가 삯 받쟀나요?"

"그럼 어느 동네 몇번진지 그거라 두…… ""갑시다. 따라오시우."

진주는 행주치마만은 그래도 벗어서 개켜 들 경황은 났었다.

준호는 하숙에 돌아와 있지 아니하였다.

윤석은 방만 가르쳐 주고 돌아갔다.

돌아가려면서 윤석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준호가 입밖에 내어 말은 아니하여도 그동안 얼마나 진주를 그리워하였으며,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기다렸으며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또 새로 장가 간 아낙은 준호가 불교를 하여 일 년 만에 제풀로 나가버렸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진주는 혼자 빈 방에서 준호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반 시간도 못 하여 준호는 돌아왔다.

진주는 나풋이 절을 하였다.

준호는 문치에 가 우뚝 선 채로 슬픈 것 같은 반가운 것 같은 노한 것 같은 퍽 복잡 이상한 표정으로 진주를 끄윽 바라다만 보기를 한참은 하였다. 그러는 동안 차차로 얼굴이 붉어오르고 가슴이 연해 들먹거렸다. 얼마를 그러다 별안간 좌우를 휘휘 눈에 뜨이는 대로 필통의 단도를 화닥닥 거머 쥐더니 이를 악물면서 우르르 진주에게로 달려든다.

4

준호는 꿈결같이 그렇게 진주를 만나니 생각하였던 것보다도 더 반가왔다. 어안이 벙벙하였었다.

그러나 진주는 이미 남의 사람이었었다. 동저고리 바람에 풀대님을 하고 처억 손님과 앉아서 술을 먹고 있던 그 사람, 학생 칠 방이 있느냐고 묻는말에 "학생 칠? 방?" 하면서 고개를 꺄웃 하다가

"얘, 옥단아?" 하고 부르던 태도.

"옥단이 심부림 갔어요."

그러면서 행주치마에 주인아씨 태 선연히 부엌으로부터 나오고 있던 진주 의 맵시.

거 웬 학생 아이들이며 무슨 곡절이냐는 듯이 간섭조로 엉거주춤 일어서서 내려다보고 있던 모양.

어디로 보나 그는 그 집 바깥주인이었다. 진주의 남편 바깥주인이었다.

옛날처럼 나의 새댁이요 다정스런 진주요 할 수가 없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슬픈 재회려니 하지 아니하였던 바를 아니었었다.

만나도 옛과 같지 아니한 사람이요, 영원히 옛 그 사람일 수 없는 사람과의 재회라 하여 비극일 것으로 실망할 것이 없는 바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막연히 그렇게 진주 하나만 가지고 단순하게 옛과 같지 아니할 사람이 리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가, 그래서 거기에 대한 신경은 비교적 평온하였던 것이, 막상 구체적인 사실로써 '남편 있는 장면’을 실지로 직접 당하여 보는 마당에 당하매 충격, 그러고 절망은 상상치 못한 심각함이 있었다.

'예라 다아 고만이다!’

얼른 먼저 생각나는 것이 죽음이었다. 죽음…… 반가왔다.

한강으로, 전차를 타려고 종로로 향하여 걸음을 급히 하였다. 그러나 곧장 공원 뒤까지 다다라 문득 생각하니 그냥 죽어버리기가 도무지 미진스럽다. 자꾸만 마음이 꺼림하였다. 무얼 일을 한가지 저지르고서 죽어야 죽어도 후련하지 그냐 이대로는 섭섭하여 죽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을 어떻게 저지른다는 것까지는 미처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되었던 큰일 한가지를 칵 저지르고 죽어야만 잘 죽어질 것만 같았다.

일단 발길을 하숙으로 돌이켰다. 뜻밖에 진주가 와서 있었다.

보도록에 좋고 반가운 그 모습의 진주였다. 옛 그 양자의 나의 새댁 이었다. 웃지는 아니하여도 금새 방긋이 웃을 듯 다물린 입이랑. 얌전스럽게 절을 하는 것이랑.

그러나 겉뿐이지 보매뿐이지 그는 옛 나의 새댁이 이미 아니었다. 영원히 그는 남의 새댁, 남의 아낙이었다. 영원히 나에게로는 돌아오지 아니하는 남의 것이었다. 몸부림이 나게 안타까왔다. 그러나 그래도 무가내하였다.

'이 아까운 진주에다가 그 동저고리 바람에 풀대님한 텁수룩한 작자!’

불끈 분기가 치달으면서 눈이 벌컥 뒤집히었다.

'오오 참!……’

저지를 일거리를 퍼뜩 깨우쳐내었다.

가장 속시원하고 앙칼진 일거리였다. 그래야만 마음 걸릴 것도 원통할 것도 없고 비로소 잘 죽어질 성불렀다.

5

단도라야 연필이나 깎는 두어치짜리 작고 무딘 것이었으나 아뭏든 젖가슴 정통으로 겨누기는 겨누었다.

진주는 조금도 당황치 아니하고 종용자약하였다. 손끝 하나 항거함이 없이 곱다시 당할 각오였었다.

조용히 입을 연다.

"죽여서 조끔이라도 원이 풀리신다면 죽여주세요."

"………"

"저런 당신을 잊어버리자구 마음을 돌려먹었었으니 그 죄만 해두 죽어 마땅 허겠어요."

"………"

"그렇지만 막상 아주 잊어버리지는 못했어요. 어디 잊어버려 지드라 구요."

"………"

"그리구…… 부디 오핼랑은 푸세요. 이날 이때까지 성헌 몸으루 있었어요."

"………"

"인지장사(人之將死)에 기언(其言)이 선(善)이드라구, 죽는 자리서 무엇 허러 빈말씀허겠어요?…… 아까 그이들 아무두 아니구 손님이에요. 하나는 제 초상화 그려준 안채에 하숙허구 있는 이, 하나는 제 귓병 댕기믄서 치료 해 준 이. 답례허느라구 청해다 저녁 대접허든 참이에요."

"………"

"허긴 좀더 있었으면 그중의 누구 하나한테 몸을 의탁허구 말 뻔은 했어요. 천행으루 오늘 당신을 만나 몸만은 깨끗헌 채루 당신 손에 죽는 것 이 여간 다행이 아니예요. 아슬아슬두 허지! 선영 음덕이신가바요!"

눈물이 줄기져 흐르고 목이 멘다.

준호는 차차로 전신의 맥이 풀리어오다 팔이 떨어지고 하더니 마침내 손에 쥐었던 단도마저 스르르 놓쳐버리고 만다.

진주는 여전히 그대로 말을 계속한다.

"아직 가지는 아녔다구 해두 그럴 맘을 먹었었으니 당신 앞에 무슨 얼굴을 들겠어요. 그 죄두 또 죽어 마땅할 죄!"

"………"

"제 죄루 죽으면서 누는 당신이 입어 쓰겠어요? 지가 제 손으루 죽은 양으루 글자 몇자 적어놓겠으니 지필 찾아주세요."

"………"

준호는 견디다 못해 헉 느끼면서 진주의 아랫도리에 몸을 던지고 쓰러진다. 마주 붙어안고 소리를 삼키어가면서 오래도록 둘이는 울었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들이 씻은 듯 거뜬하였다.

준호가 진주를 고쳐 치어다보다가 싱그레 웃는다. 진주가 따라 웃는다.

"지가 일러루 오까요? 짐을 참겨가지구 절러루 겉이 가시까요…… 이왕 벌여 논 살림이구 허니깐."

"글쎄……"

"정 무엇허시믄 달리 셋집을 구헐 동안 며칠만 예서 더 기시든지."

"당신 학굔? 살림할라 학교에 다닐라."

"명색이 졸업이라시구 헌걸요. 아니 했기루 또 학교 다니자구 살림 폐허 겠어요?"

준호는 몰라도 진주는 어떻게 생각하면 태도가 심히 발작적이요 부자연스런 혐의가 없지 못하였다.

6

진주로는 그러나 노상 일시의 발작적이거나 부자연스런 거조가 아니었다.

아까 처음 준호를 섬뻑 만나 그로부터 지금까지 죽 가져온 동작과 태도와 그리고 마침내 준호의 아낙으로 복귀하고 마는 사실…… 이 일련의 행동 이진주는 저절로 다 그래진 노릇이었다. 조그마한 억지와 마지못해 함이 있었거나 잠시의 주저와 상량이 있었던 바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물이 흐름과 같이 자연스런 행동이었었다.

이미 준호를 마음에서 지우기로 하였고, 영상은 희미하여졌고, 불원 하여 새로운 결혼을 할 조건이 익었고 그렇던 진주가 졸지에 무슨 연유로?

여자의 소위 첫정이란 곡진도 하려니와 또한 이론을 초월한 마술적인 힘을 가지는 자이었었다.

섬뻑 준호가 그렇게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 순간 진주는 저도 모르게 여섯 해 전 그 당시로 돌아가지고 말았던 것이었었다. 완전히 여섯 해 전 의상냥 코 다정스럽던 준호의 새댁이요, 얌전한 며느리요, 애련한 시골 소부 요한 그 당시의 진주로 요술처럼 돌아가졌었다. 그 당장에서고 평일이고, 그러려니 하고 전혀 마음 먹은 것이 있던 바도 아니었다. 그러는 것이 옳다고 여기거나, 그리하여야 하느니라고 누가 시킨 일도 없었다. 그저 제 풀로 였었다. 곧 여자의 첫정의 잠세력적(潛勢力的)인 힘의 조화였었다. 그것이 있고 그리 할 수가 있음으로써 여자는 한결 그 아름다움이 빛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 여섯 해 동안의 진주는 진주 아닌 진주, 일시 꿈속의 진주였었다. 여섯 해의 긴 꿈은 깨이고 진주는 정말 진주, 생시의 진주로 돌아간 것 이었었다.

정말 진주, 꿈을 깬 생시의 진주였으니, 그와 같이 전과 다름없은 진주 노릇을 한다는 것이야 지당한 일이며 자연스럽지, 따라서 아무런 이상함도 부자 연하거나 발작적일 며리도 없던 것이었었다.

이리하여 진주는 의(義)를 살리었다. 물론 큰 희생이었다. 장차로 헤아리기 어려운 고난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의의 가벼운 대상에 불과할 것이었다.

한편 주인을 잃어버린 두 사람의 나그네는 그만 파흥이 되어 밍밍하게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고서 며칠이 지나 종로 거리에서 두 사람이 불긴히 서로 만났다.

"그 학생이 정녕 애인이거나 그렇잖으면 새서방이지?"

오영달이 풀기 없이 묻는 말을 받아서 추영산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새서상일세. 갈렸다 다시 만난…… "

"닭 쫓든 개는 지붕이나 쳐다본다구…… 새서방 있는 진주를 캐려든 추 영산은?"

"오늘 밤 시골루 떠나네. 촌색시 얻어 인제는 자식농사나 지면서 그림이나 그리려네마는…… 지붕만 쳐다보구 섰는 오영달은 언제까지구 그 럭 허구 섰을 래서야!……"

"오늘 밤차루 동경으루 건너가게 됐네!"

둘이는 그러고 나서는 어우러져 한바탕 웃더니 손목 마주잡고 뒷골목 막걸리 집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10. 落 傷[낙상]

1

이태를 지나 계해년(癸亥年) ── 대정 십이년(大正 12年) 정월에는 진주 는 아들 철(哲)을 낳아 비로소 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고서 다시 그 이듬해 갑자년(甲子年) ── 대정 십삼년(大正 13年) 늦은 가을.

뜰에는 사년 전 진주가 준호를 고쳐 만나던 봄 그때런 듯 노란빛을 지니고한 포기의 꽃이 피어는 있었다. 그러나 꽃은 매양 꽃이요 빛은 한 빛이라도 그 꽃은 봄을 화려히 치장하던 개나리가 아니요, 조락을 말하는 가을꽃 황국( 黃菊) 이었다.

툇마루에 드리운 햇볕도 여전히 밝기는 하였으나 역시 살져가는 봄볕이 아니요 야웨빠진 가을볕이었다. 바람도 훈훈하던 대신 스산하고.

진주는, 등에 업은 철은 잠이 들었고 풍로에 약탕관을 놓고 마룻전에 앉아 약을 달이고 있다.

사 년이라는 그리 길지 아니한 세월 동안 진주는 적지 아니한 변천을 겪었다.

우선 명실 더불어 남의 안해 노릇을 하였다. 포태(胞胎)를 하여 열 달을 채워 해산을 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아기 철이 지난 정월로 첫돌이 잡히어 시방 두 살이다. 그러고 이어서 다시 또 포태를 하여 여섯 달이다.

저지난해 정월에는 친정 조모 송심당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진주에게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한 할머니였다. 피차간 이 세상에서 유일한 혈육이요, 따라서 피차간 지극히 애정이 도탑던 조손(祖孫)이었다. 그러한한 분 할머니를 여읜 진주의 슬픔은 퍽도 컸었다.

송심당노인이 별세를 하자 친정집의 경제적 몰락이 와락 표면에 드러났다. 친정 양오라비 창수가 시집을 쫓겨오던 갑인년 그 무렵부터 매갈이를 시작 하였었다. 한참 당시 잠만 깨고 세태에는 어둔 시골 소지주며 조무래기 부자 가운데 양심 있는 젊은 축들이 사업욕과 재산욕에 마음이 떠가지고 다투어 그 짓들을 하였었다.

매갈이는 매갈이 그것 자체가 다분히 투기성(投機性)을 가진 노름인데, 매갈이의 앞에는 진짜 투기업인 미두라는 것이 환히 놓여 있었다.

매갈이하는 사람으로 열에 여덜아홉까지는 기어이 미두를 하지 아니하고는 배기지를 못하였다. 창수는 그 여덜아홉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미두를 하여 끝까지 수를 본 사람은 만 명에 하나도 드물었다. 천품이 괄괄하고 마음이 크기나 할 뿐 꿈과 옥관(玉觀 : 期米時勢豫言術者[ 기미 시 세 예 언 술자]) 의 점을 믿고 미두를 하는 재주밖에 없는 창수였다. 밑지고 나가 떨어지는 구천구백 아흔 아홉 명 속에 들 것이야 당연한 노릇이었다.

빚을 고패가 넘도록 지고 전장과 심지어 집터까지 저당에 걸렸었다. 송심 당 노인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가 돌아갔으니 그것 한가지만은 팔자가 좋았다고 할 것인지. 삼년상 치르기도 전에 창수는 집도 터도 없고 말았다.

학교를 마친 뒤에도 다달이 보내주던 진주의 학비도 자연 그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진주는 그리하여 작년부터는 준호 한 사람 몫의 학비 오는 것을 가지고 새로 생겨난 철까지 세 식구의 살림을 하여야만 하였다. 옹색이 심하였다.

그러자 지나간 사월에는 또다시 준호의 학비가 끊어져버렸다.

형편이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준호의 병이었다.

2

준호는 지나간 봄방학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진주와 다시 만난 뒤로 방학이 도합 일곱 번이었는데 그해 겨울방학과 작년 봄방학에만 가서 이삼 일씩 있다 오곤 하였을 뿐이었었다.

잔뜩 벼르고 있던 박씨부인은 지나간 봄방학을 기다리다가 두 주먹을 불끈쥐고 쫓아 올라왔다. 와서 보니 과연 소문에도 듣고 짐작하던 바와 다름이 없었다.

다짜고짜로 우선 진주를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 태질을 치고 하면서 이 년 여우 같은 년, 천하 요괴 같은 년, 네가 어떤 년이길래 내 자식을 후려다놓고 이런단 말이냐고 동네가 벌컥 끓도록 한바탕 들레었다. 그러고 나서 준호의 덜미를 짚으면서 썩 내려가자고 호령하였다.

준호는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때리고 물어떼고 떠다박지르고 하여도 입 꽉 다물고 당하면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박씨부인은 분에 못이겨 세간 나부랑이를 두들겨 부순 후, 이놈 너는 오늘부터 내 자식이 아니라고, 두고 보라고 얼러메면서 하릴없이 혼자 내려가고말았다. 그러더니 사월달부터 학비를 보내지 아니하였다. 그러고는 얼마 있다 준호의 외숙을 사이에 넣고 기별이, 지금이라도 자식이나 찾고 ' 그 년’과는 갈려버린다면 전사는 다 용서하리라고 하였다. 준호는 이 '가혹한 항복 조건’을 한마디로 물리쳤다.

친가에서 생활비 오던 것이 끊기면서부터 종종 드나들던 전당국을 진주는 더 자주 드나들어야 하였다. 옥단이는 두고 부릴 필요도 반드시 없어졌었거니와 인간 하나 거처하는 비용이나마 줄이기 위하여 진작에 시골로 내려 보내고, 그 대신 건넌방에 윤석이 와 있었다. 행상을 하여서 버는 학자 라지만 영 악히 납뛰어 제가 먹는 것 이상을 물어들임으로써 지난 날에 진 의리를 갚았다. 많지는 못하나마 진주의 옹색한 살림에 퍽 요긴한 부조가 되었다.

준호가 외숙에게 기별을 하여 삼십 원씩 두 차례 빚 요량으로 돌려다 쓴것도 있었다.

삯바느질이 적지않이 보탬이 될 듯싶은데 한번 준호더러 그 말을 내었다 펄쩍 뛰는 서슬에 다시는 생의를 못하였다.

조반을 궐하고 나간 윤석이 석양에 봉지쌀을 사들고 들어오기가 예사요, 석 달 널 달 밀린 집세와 전기불세로 매일같이 졸려야 하였다.

이쯤 각다분하고 막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준호의 병만 아니면 진소위 삼순구식을 하여가면설망정 준호가 명년에 전문엘 들 어그를 마칠 동안까지 앞으로 한 사 년 죽을 셈 잡고 견디며 뒷수발을 하여 댈 신념이 없는 바가 아니었었다.

준호의 병이 표면에 드러나기는 작년 늦은봄부터였다. 오후면 오싹오싹 추워하고 구미가 떨어지고 밭은기침을 하고, 자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몸이 나른하면서 기운이 없고…… 이 증세가 나날이 더하는 줄은 몰랐어도 다달이 더하여 가는 것이 눈에 뜨이더니, 금년 가을로 접어들면서는 성한 날보다도 누웠는 날이 더 많고 그 가뜩이나 푸짐하지 못한 살이 하마 뼈와 가죽만 남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마침내 각혈까지 하고 말았다. 그것 이바로 열흘 전이었고, 그날부터 아주 자리에 누운 몸이 되었다.

3

"여보오?"

힘없는 소리로 준호가 방에서 부른다.

진주는 알아듣고도 우두커니 있다야 대답을 하면서 방으로 들어간다.

불러는 들이고도 눈두겁 푹 꺼진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보면서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시킬 일이 있어서가 아니요, 혼자서 무료하다치면 공연히 그저 그러곤 하던 것이었었다. 그랬다가 그 임시로 할 말이나 시킬 일이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입이 떨어지고 그것도 저것도 없으면 그대로 덤덤하고 말곤 하였다.

"또 약요?"

얼마만에야 그렇게 물으면서 이맛살을 찌푸린다. 별로 많이 먹은 바도 아니건만 신경이 예민하여진 탓에 약이라면 냄새도 맡기를 싫어하였다.

"지끔 대리는 것 말구 꼭 한 첩 남았어요."

"난 제발, 약 좀 고만 먹었으면…… "

"그래두 부지런히 잡숫구 어서 기운을 차리세야지 아니해요?"

의원의 말이 육미(六味)가 좋다고 하며, 그 약 한 제를 짓기에 진주는 단 한가지밖에 없는 어머니의 유품 금 국화잠을 팔았다. 혼인하던 날 할머니가 옜 다 에미가 너 시집갈 때 주어달라고 내게 맡기고 갔단다면서 손수 머리 쪽에 꽂아주신 순금 국화잠이었다. 돈으로는 값이 따져질, 따라서 아무리 큰 돈을 받고라도 팔 물건이 아니었다. 이틀 사흘씩 중난한 남편과 굶고 앉아서도 차마 전당국에나마도 가지고 가기를 꺼려하던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 것을 팔아서 지은 한 제의 육미였다. 해서 이 한 제의 육미는 돈으로 산것이라 느니보다 진주의 희생정신, 극진한 정성으로 얻어낸 약이라고 하여야 옳을 것이었다.

준호는 자초로 그런 곡절을 알 턱이 물론 없었고.

"난 그 쓰디쓴 약보담두 거저 먹구픈 것이나 맘대루 먹구 하면 차라리 병이 얼른 나을 것 같아!"

"………"

진주는 대답할 말이 없고 가슴이 아팠다. 앓는 사람이 늘 무엇이 먹고 싶네 무엇이 먹고 싶네 하건만, 열 가지에 한 가지나 두 가지도 구해다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밥에는 할 수 없이 좁쌀이 섞이고 반찬이라야 된장찌개에 콩나물이 고작이요, 고기나 생선은커녕 그 흔한 김치 깍두기도 여 일히 밥상에 올리지를 못하였다. 각혈하기 전에 진찰을 하여 준 병원 의사도 진주더러 만 조용히 이른 말이 있지 아니한가. 폐결핵이라는 병은 약이라야 신통한 것이 없느니라고. 무엇보다도 가정생활 ── 부부생활을 떠나 기후와 공기 좋은 곳으로 전지요양을 가 편안히 누워서 영양 있는 음식이나 소화가 허락하는껏 먹고 마음은 물론 안정시켜야 하고, 하기를 삼 년이고 오 년, 십 년이고 하노라면 상당히 병이 진행된 사람도 회복이 될 수가 있느니라고.

그러니 전지요양이야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루 세 때의 식사나 살로 갈 것을 먹게 하고, 먹고 싶어하는 것이나 그립지 않게 사서 대고 하여야 할 것인데, 그것조차를 못하고 있으니 딱하고 답답할 노릇이라고는 없었다. 밤저녁으로 곰곰 누워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잠이 아니 왔다. 저러다 아뿔싸 하지나 아니하나 싶은 청승맞은 생각이 들면서 앞이 깜깜 할 적도 있었다.

4

준호는 번연한 형편에 어린아이 응석 같은 소리를, 무심결에 말은 하여놓고도 그만 민망한 생각이 나 진주를 돌려다보면서 기색을 살핀다. 진주는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아니하나 꺼칠하니 윤기 없는 살결이며 홀쭉 야윈 볼이며 가 못먹으면서 심로와 과로만 하여 지친 빛인 것이 완구하였다. 더우기나 몸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깃든 사람으로.

이미 이십이 넘은 장부요, 그만 철은 난 준호였다. 진주보다 종시 여러 살 연 하임엔 갈데없으나 그렇다고 종시 열두살박이 소꿉새서방은 아니었다. 시늉이나마 가정을 이룬 일가의 주인이요,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가난과 나의 신병으로 인하여 야위고 시드는 처자를 바라보면서 책임 무긋이 어깨를 누름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남은 하마 핫것이라두 입을 양으루 헐진대 저 당목적삼이 좀 서늑거려?"

이윽고 보고 있다 준호가 걱정을 한다.

진주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이

"춥긴 벌써 추어요?"

"옷이 그렇게두 없수?"

"있어요. 있어두 안직…… "

"제일에 우리 저 철이가 애차라!……"

"애들은 함부루 길러야 헌다구 아니해요?"

"함부루 길른다는 것허구 그것허구가 같우?"

"그대루 제 걱정이나 철이 걱정일랑 허실라 마세요. 성한 사람이야 좀 아무러면 어때요?"

"………"

"전 거저 당신…… "

"여보?"

"내?"

"당신 보매 내가 곧 인제 죽는 것 같우?"

"오온, 돌아가시긴 왜 돌아가시우?"

"안 죽어요. 안 죽으께시니 걱정 말아요. 천하 없어두 안 죽으께시니…… 안 죽지. 내가 왜 죽어? 죽어서 어떡허자구 죽어?"

준호는 흥분을 한다. 붉은 볼이 더욱 붉고 마침내 기침이 나왔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진주는 그를 위로하며 진정시키기에 늘 그렇듯이 한참이나 애를 써야 하였 다.

"그러나저러나 내가 아무래두 시굴을 좀 다녀와야 할까 봐?"

진주가 마루로 나가 약을 보고 들어오기를 기다려, 전부터 혼자 유념 하던 바를 계제에 이야기를 내었다.

시골이라면 물론 본집이요 박씨부인한테란 말이겠는데, 진주는 선뜻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벌써 기동을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가신들 무슨 도리가 있을꼬마는, 더구나 저 몸을 허세가지구 먼길 가 셌다 도지기나 허시면…… "

"산 삭이 언제쯤 당허우?"

"명년 한 삼월…… "

"명년 삼월이라야 얼마 남았수? 그것두 그것이려니와 괘니 우두커니 이러구만 있단…… "

"글쎄 기동두 어려우시구, 또 가세야 별루…… "

"가면 내가 무어 어머니헌테루 가 빌붙을까? 난 죽어두 건 아니해!"

"허기야 어머님이 당신이 미워 그러시나요? 다아 제 죄루 당신알라 이렇게…… "

"가두 외삼춘 댁으로 가 눠서…… "

"그 으런인들 무슨 그리…… 그동안 두 번이나 돈을 타다 쓴 것두 있구 헌데…… "

5

준호의 외조부가 생전시에 논 일곱 마지기를 준호에게 직분시켜 준 것이 있었다. 명의까지 아주 준호의 이름으로 돌려놓았었고, 딸 박씨부인과 아들인 준호의 외숙을 불러다 앉히고 문서를 보이면서, 이 논에다는 꼭 찰벼만 심었다 우리 준호 일 년 내내 두고 떡 해주어라. 그 논을 그 해부터 지금까지 박씨부인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소유자는 하여커나 남준호가 틀림이 없었다.

준호는 이런 내력 설명을 한 후에

"그러니깐 걸 가 팔면 될 거 아뇨? 한 말지기 오십 원씩만 받어두 삼백오십 원…… 시방 우리한테 삼백오십 원이면 어데요?"

"글쎄요."

"어떻게 찻삯 마련이 안될까?"

"찻삯이야 어떻게든 변통을 해보죠만…… "

"미안한 대루 윤석이더러 좀 데려다 달라구 허구……그러구 외삼춘게루전볼 쳐 교군이나 내보내게 하면 차 타구 가기야 무어 그리 힘이 드우?"

"것두 몸 성한 사람이라야 말이지…… "

"일 없어. 괜찮아요. 당신은 조심이 너무 과해, 그래 파야!"

준호는 그러면서 짜증을 내고 돌아누웠다.

그런지 사흘째 되던 날 첫새벽 여섯시.

진주는 준호가 탄 인력거 뒤를 따라 철이는 등에다 업고 윤석과 함께 전차도 아직 다니지 아니하는 어둔 거리를 걸어 남대문 정거장으로 배웅을 나갔다.

여섯시 반의 부산행을 타고 가다 낮때쯤 대전서 내려 시간 반이나 기다려 호남선을 갈아타고 다시 반일을 가 주물역에 내려서 밤길 삼십리를 들어가야 하는 이 노정을 어제까지도 호정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병인 준호로 하여금 막상 떠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졸연한 일이 아니었다. 진주로는 두루 두루 생각 끝에 일종 비장한 결심으로써 하는 강단이요 큰 모험이었다.

준호는 말이 외숙의 집으로 가서 외조부가 따로이 물려주었다는 논을 팔아가지고 온다는 것이지만, 진주가 보기에는 전혀 호산(誤算)이요 도저히 가능성이 없었다.

남달리 극성스런 박씨부인이었다. 준호가 일껏 고향엘 내려와 가지고 바로 동네지 간에 본집으로 오지를 않고서 외숙의 집으로 가 있는 것을 문문히 그대로 버려두고 볼 박씨부인이 아니었다.

논이 이름이 제아무리 준호의 이름으로 있기로서니, 준호는 법률상으로는 아직도 미성년이었다. 친권자 박씨부인이 버젓이 있었다. 간대로 그것이 팔아질 이치가 만무하였다.

가사 또 준호가 계획하는 대로 일이 잘 되어서 논을 팔아 몇백 원의 돈이 생긴다 손 치더라도 그 몇백 원의 돈을 도득하여 오게 하기 위하여 천하에 바꿀 수 없는 준호로 하여금 중병 중에 이 어려운 행보를 떠나게 하도록 사려와 분별이 부족한 여자 진주가 아니었다.

진주로는 요량하는 바가 달리 있었다.

준호는 한번 내려간 이상 박씨부인의 손에 붙잡혀 앉히고 말 것이 첩경이요, 자연 돌아오기가 졸연치 못할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진주는 차라리 바랐다.

6

준호는 박씨부인의 손에 붙잡혀 앉히운다면 처음에는 마음은 적지 않이 상 할 것이었다. 그러나 기후 좋은 남방이요 공기 맑은 농촌이었다. 살기가 군색 치 아니한 집안이었다. 박씨부인인들 며느리가 밉고 미운 며느리에게 가있는 아들이 미웠지, 하여커나 어머니에게로 돌아온 다음에야, 항차 죽을 병이 들어가지고 돌아왔는데야 그 아들이 어떤 끔찍한 아들이라고 병구원에 등 한하거나 인색할 까닭이 없던 것이었었다. 값진 보약과 영양 있는 음식, 먹고 싶어하는 음식, 땅을 팔아서라도 여일히 먹일 것이었다. 병에 해로운줄 알면 성정을 눅여서라도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에 노력할 것이었다. 장차에 식언(食言)이 될값에 병만 나으면 네 가속(진주) 데려오도록 하마고까지라도 할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서 아뭏든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잘 먹고 좋은 보약 먹고 요양을 하는 일방 마음도 차차로 안정이 되고 하면, 의사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병은 낫는 것이요, 진주의 요량하는 바란 곧 이것이었다.

준호의 충분한 요양과 그래서 건강이 회복될 일이라면 진주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삼 년이고 오 년, 십 년이고 준호가 돌아오지를 못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어떠한 고생이 있더라도 아이들이나 기르면서 참고 견딜 결심이었다. 아닐말로 준호가 한평생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건강한 몸이 되는 것이란다면, 진주는 슬픔을 달게 삼키면서 아이들과 나 함께 세상을 살아나갈 각오였다.

차창을 열고 내어다보는 준호를 작별하면서 진주는 부디 마음 조급히 먹지말라고, 당신을 그저 당신의 병 한가지만 생각하지 처자라는 것은 한동안 잊어버리고서 그런 마음으로 범사를 처결을 하라고 함축 있는 말로써 몇번이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준호는 준호대로 죽지 아니할 테니 아무 염려 말고 있으라는 말을 거듭 하였다.

그 말이 차라리 영결인 것같이 여겨지면서 진주는 마음이 더럭 처량하여하마 준호에게 눈물을 보일 뻔하였다.

사흘이면 먼저 돌아올 윤석이 닷새가 되도록 감감소식이었다. 이왕 데리 고간 길이니 같이 회정을 하느라고 더딘 것인지, 그렇다면이거니와 혹시 내려가기에 무리를 하여 준호가 병이 더해서 혼자만 버려두고 떠나오지를 못 하는 것인지 싶어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자 이레 만에 전보환으로 돈 오십 원이 왔다. 조금 마음이 놓이는 성하였다.

열하루째 되는 날 윤석의 이름으로 한 장의 전보가 올라닿았다.

진주는 준호를 보냄에 있어서 다른 것은 다 생각을 주밀히 하였으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점을 한가지 모르고 지나쳤었다. 그는 준호의 병이 이미소 위 제삼기에 들어 심한 피로가 따르는 그와 같은 먼길의 여행과 그것만 하여도 무리가 과한데 겸하여 모친 박씨부인과의 반드시 있고라야 말 충돌로 인하여 받게 될 격렬한 흥분…… 능히 그것을 이겨낼 기력이 설마 없었다는 사실을 진주는 통히 짐작치 못하였던 것이었었다.

"준호금조별세윤석."

그 전보문이었다.

이에 한 아기를 등에 업고 한 아기를 애밴 스물일곱 살짜리 여인 하나가 세차게 달리는 기차에서 별안간 누가 칵 떠다밀기라도 한 것처럼 인간 행로의 노방에 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의지가지 전혀 없는 노방에 가.

정히 낙상(落傷)이었다.

11. 試 鍊[시련]

1

우수( 雨水) 지난 지가 여러 날이요, 이월달도 거의 다 갈 무렵이건만 날씨는 한겨울인 듯 기승스럽다.

사나운 바람이 진눈발을 몰고 와 비뚤어진 서창에다 쉴 새 없이 끼얹는다. 그럴 적마다 찬바람이 어긋난 문 틈, 찢어진 문구멍으로 방 하나 가득씩 스며든다. 낡은 반자가 심호흡을 하고 문풍지가 포효한다.

밤은 얼마나 깊었는지.

육촉 침침한 전등을 불삼아 진주는 웅숭그리고 앉아서 바느질이 혼자 바빴다. 재동 한복판의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 삭월세 이 원짜리 건넌방이었다.

방바닥은 정이 떨어지도록 차다. 삭월세 이 원짜리 그 알량한 방이 여 일히 때 기 로니 잘 더울 리도 없는 것이지만 어제 저물게 삼 전짜리 솔가지 한 단으로 조죽을 쑤느라고 이맛돌만 그슬리는 시늉만 한 채 이내 일주야가 훨씬 넘었으니 찬 것이야 지당한 말이었다.

그래도 아랫목으로 골라 앓는 철이를 뉘었다. 요라는 명색은 없고 솜 비죽 비죽 비어지는 얄따란 두폭 이불을 덮은 위에는 엄마의 치마를 벗어서 덧 덮어 주었다.

지나간 정월달로 세 돌이 잡하고 어느덧 네 살…… 병이 아니고 영양이나 웬만하여 순조로이 자랐다면 토실토실 살이 지고 한참 발랄히 뛰놀 무렵이 었다.

병의 시초는 이유(離乳)의 실패에 있었다. 일찌기는 준호의 병과 그리고 그 의 그러한 죽음과 그 뒤에 온 극도의 생활 곤란과 이런 연속하는 불행과 그 경황으로 인하여 적당한 이유기를 놓치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 삼월 아우를 보기 며칠 앞두고서야 겨우 억지로 젖을 떼었다.

이유 전에 미리미리 이유 이후의 새로운 환경에 견디어낼 만한 소화기관의 서서한 훈련이 없었다. 그러고는 졸지에 젖 대신 소화하기 어려운 성인의 음식을, 그것이나마 영양분이 빈약한 것을 겸하여 불규칙하게 들이 안겼으니, 근본이 약한 체질이 아니란다더라도 그 물같이 연한 위장이 능히 지탱 치를 못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화기관의 고장과 아울러 영양의 부족은 그 밖에 감기를 비롯하여 온갖 병에 대한 저향력을 잃게 하였다.

홍역, 백일해, 급성폐렴, 디푸테리아 따위의 어려운 병을 도맡은 듯이 차례로 앓았다. 시방은 디푸테리아를 앓고 난 끝이었다.

꼬바기 일 년을 그렇게 병하고도 어려운 병만 치르고 난 지금은 아이가 흡사히 콩나물을 한 개 뽑아가지고 보는 형용이었다. 팔과 다리는 비루 먹은 무엇처럼 배배 꼬였다. 머리통과 눈만 커다랗고 목은 새끼같이 가늘었다. 혈색은 오이꽃처럼 노랗고.

종일 울며 조르는 것이 먹을 것 타령이었다. 졸라야 이루 먹이지도 못 하지만, 먹으나 못먹으나 육장 설사가 아니면 사흘 나흘씩 변비였다.

약비한 생명이건만 잘 끈질겼다. 미루어 인간 생명의 신비성이랄까 혹은 기적이 랄 까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철이와 고무래정자로 이불자락은 걷어내차고서 네활개 쩍 벌리고 누워 자는 것이 오는 삼월로 첫돌이 잡히는 문주(紋珠) ── 준호가 끼치고 간 유복 녀 였다. 어머니 진주가 애기어머니의 몸으로 늘 굶주리는 탓에 젖이 사뭇 모자라 아이가 발육이 늦고 혈색은 파리하나, 한갓 다행은 아직 이렇다 할 병만은 없었다.

이 남매를 데리고 진주는 소일거리도 못 되는 바느질품을 팔면서 바야흐로 굶어 죽기 마침맞은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2

삯 삼십오 전을 받는 옥양목 박이적삼이었다.

똑, 똑 바늘 뽑는 소리가 야무지게 대답을 한다. 바람은 여전히 극성으로 진눈을 몰아다 창을 때린다. 방안의 추위는 갈수록 더한다.

진주는 자주자주 바늘을 놓고 언 손끝을 호호 입김으로 불어 녹인다. 바느질은 절반도 못다 되었다. 춥고 시장한 깐으로 하면 엔간히 밀어 던지기라도 하겠으나 이 밤을 새워서라도 다 마치어 밝는 아침 일찌감치 가져다 주어야만 삯 삼십오 전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야만 당장 이십전어치 좁쌀한 됫박과 오 전에 두 단 하는 솔가지를 사 두 차례의 죽거리를 마련 하고 나머지를 가지고는 철이를 위하여 약도 한 첩이고 두 첩이고 지어다 먹이고 한다. 진주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약을 먹이고 아니 먹이는 차이가 완구 히 달랐다. 해서 약만 여일히 대어 먹이면 아이는 죽이지 않고 구할 수가 있을 성불렀다. 그리하여 여일히는 생의조차 못한다지만, 이틀치 죽 거리가 생기면 하루만 먹고 하루는 굶어가면서까지 간간이 단 한두 첩씩이나마 약을 먹이기를 애써 하였다. 그러나 정성일 따름이었지 그 며칠 만에 한두 첩씩 쓰다 말다 하는 약으로 제법 현저한 효험이 보아지던 바는 물론 아니었었다.

안방 노파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더니 이어서 재털이에다 담뱃대를 뚜 드린다. 초저녁잠을 들러나 두어시가 되면 으례 그랬고, 어지빨리 시계보다도 정확하였다.

노파의 그러는 기척에 진주는 밤이 얼마 아니 남은 것을 알고 언 손끝을 불어가면서 부지런히 바늘을 놀린다.

철이가 잠이 깨어 눈만 뜨고 그대로 누운 채 기운 하나도 없는 소리로 힝 하면서 칭얼거린다.

"철아? 시야 허까?"

"히잉."

"배 아프냐?"

"밥 줘, 히잉."

"오냐, 어서 더 자거라. 자믄 엄마가 밥 해주마."

철이는 이불 속으로부터 기어나와 무릎에 가 안기면서 "빵이랑."

"오냐, 돈 남거든 빵두 한 개 사주마."

"미깡이랑."

"푸달진 것 받아가지구 쓸데구 많기두 허다!"

"히잉, 미깡이랑."

"오냐, 봐서 미깡두 사주마. 춥다, 어서 이불 덮구 더 자거라."

"문주 주지 말구 나만 먹을 테야."

"에구, 문주두 죄끔만 줘야지이!"

"죄끔만 주구…… "

"그래 문준 죄끔만 주구 철인 많이 먹구."

그렇게 달래어 도로 이불 덮어 뉘고 다독거리는 대로 잠이 든다.

잠든 얼굴을 이윽고 들여다보고 있던 진주는 눈에 눈물이 어린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타고난 팔자란 말이냐. 에미를 잘못 만난 탓이란 말이냐. 이 어린것이네 가 무슨 죄로…… 쯧쯧 가엾은!’ '살려야 할 텐데……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할 텐데.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할 텐데…… "

긴 한숨을 짓고 눈물을 닦으면서 물러나 앉는다.

물러나 앉아서 마악 바느질을 다시 잡는데, 그러자 머릿속이 별안간 팽 돌고 방바닥이 휘휘 흔들리면서 정신이 가물가물하더니, 그러다 연하여 깜빡하고 말았다.

주림과 추위로 인한 혼절이었다.

3

얼마만인지야 제풀로 정신이 들었다.

굶고 추우면 사람이 잿불 사그라지듯 죽어버린다더니 그 말이 옳은가보다 싶었다.

그새까지는 몰랐던 죽음의 시꺼먼 위협이 비로소 눈앞으로 얼찐거렸다.

더럭 겁이 났다.

'이러다 아주 죽어버리면? 이따라도 내일이나 모레라도 기도 맥도 없이 깜박 그대로 죽어버리면?’ 그러면서 진주는 눈이 저절로 잠든 어린것들에게로 옮는다.

진주 자기 자신이야 죽는다는 것이 별반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린것 들이 걱정이요 그래 겁이 나는 것이었다.

철이…… 단 하루를 부지하지 못할 것이었다. 울고 보채다 그 자리에 쓰러진 채 기진하여 그대로 절명이 되고 말 것이었다.

문주…… 울고 엄마를 찾으면서, 그러다 어느 지경에 이를 것인지를 모르겠었다. 설혹 죽지는 않는다더라도 그 죽지 않고 살아 어미닭을 잃은 한 마리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울면서 비척거리고 헤매는 정상이 어머니 된 마음에는 죽고 마느니보다 차라리 더 애처롭고 마음에 걸리었다.

자기의 죽어 발 뻗고 누웠는 시체.ฺ 한편에서 시체를 붙안고 부르며 우는 철이. 시체를 젖을 빨면서 우는 문주.

공동묘지를 향하여 실려나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주검의 행렬. 그와 반 대 방향인, 그러하되 무인지경인 사바의 길을 엄마 엄마 부르면서 비척 거리고 걸어가는 문주의 뒷모양. 이런 환상이 차례차례로 눈앞에 서언히 나타나면서 진주는 어느덧 느껴 울고 있었다.

차마 죽어서는 안되었다. 어떻게 하여서든 살아 있어야 하였다.

살아 있어야 하였고,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슨 도리든 도리가 있어 야하였다. 없으면 억지로라도 마련을 하여야 하였다. 그것도 서서히가 아니라 시급하였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참담한 비극은 목전에서 면치 못하고 마는 것이었다.

도리는 그러나 막상 졸연한 것이 없었다.

'나는 며느리니 에미니 할 것이 없이 종이나 유모인 양으로라도 상관없으니 어린것들을 데리고 가서 있게 하여 주시요. 우선 철이를 병조리를 시켜 소성이 되고 그리고 두 것들이 슬픈 배 곯지 않고 자라면 나는 그 이상 바라지 않겠소. 그렇게 해서 어린것들이 탈없이 자라 제 발로 걸어다닐 때가 되거들랑 나는 도로 쫓아내어도 한이 없겠소. 죄가 있으면 에미 애비에게 있지 자식들에게야 없는 것이니, 잘나나 못나나 남씨 집안의 둘도 없을 혈육인 것을 보아 깊이 생각하시오.’ 박씨부인에게다 이러한 교섭이랄가 청이랄까를 양오라비 창수를 시켜서 들여 보낸 일이 있었다. 창수는 하릴없이 하바꾼으로 전락하여 인천 미두장으로 와서 방퉁이꾼 노릇이나 하면서 고향과 진주에게는 종종 왕래가 있었다.

교섭을 하기는 지나간 해 가을이었는데, 백 번도 더 생각한 나머지 마지못해 한 것이었지만, 과연 발등을 찍고 싶도록 후회를 하였다.

'흥! 어느놈의 뼉다귄 줄 알아서 내가 그것들을 이 집으로 불러들여?’

이것이 박씨부인의 대답이었다. 진주는 이를 갈면서 두 번도 다시는 생각지 않기로 마음에 맹세를 하였다.

그러니 달리는 의탁을 할 만한 친지라야 없고 죽으나 사나 스스로 도리를 차려도 차려야만 하였다.

4

"늙은인 새벽잠이 없어 그래 청승맞다는 게야…… 이 방 아씬 아마 바누질루 밤을 새나보다."

안방 노파가 그런 소리를 하면서 담뱃대를 입에 물로 건너온다.

"온 조곳 보겠지. 이불자락을 죄에 차던지구. 춥지두 아년가베?"

노파는 그러면서 들어와 앉다가 질겁을 하여

"방바닥이 이리두 찬데!"

"그앤 덮어줘두 그때뿐인걸요."

"허긴 애들은 다 그런가 보아. 나두 새낄 몇 개 길러보았지만서두…… 그래 저앤 좀 으떠우?"

"늘 그 모양이죠 머."

"온 그래 으떡헌단 말요."

"허느니 걱정이랍니다."

"아니 이 방에 간밤에 불기운을 통히 아니했나 보군? 앓는 아이꺼정 데리구 으떡헌단 말요? 하루 이틀두 아니구 육장…… 그럼 엊저녁두 못해 자신 게로군?"

"………"

"난 장살 나갔다 다 저물게야 와 몰랐지. 애기 어머니가 그래 으떡허우?

…… 쯧쯧 가엾어라. 친정이구 시집이구 간으 온 그렇게두 의탁이 없수?"

"………"

"이러단 괘니 큰일나겠구랴, 큰일나겠어. 굶다 얼어죽은 사람이 달리 있수? 천하 장사라두 오래두룩 굶주리다 강추윌 만난다치면 그만 꼿꼿이 죽어 버리구 마는 거."

"………"

"여보? 애기어머니? 내가 무엇하자구 남 못헐 일 권면허겠수? 거저 별수 없으니 나 허란 대루 그렇게 허구랴. 눈 질끈 감구서, 응."

"어린것 둘을 한꺼번에 거천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그러우? 애 차란 맘에 질래 둘다 데리구 있다 성헌 놈마저 못멕이구 해서 병들어 저 꼴이 되구 나면 어떡헐려우?"

"………"

"앓으나따나 큰아인 저만침이나 자랐은깐 집이다 둬두구 나댕기면서 벌일 헐 수 있잖우? 삯빨래두 빨구, 큰일 집 가서 서두리두 허구, 그러구 삯 바느질일랑 밤저녁으루 들앉어서 해치우구. 그런다 치면야 살기가 이렇기야 허우? 넉넉힌 못 지난다지만 하루 세끼 아니 굶을 것이구, 불 뜨듯이 땔 것 이구, 저애 약은 대놓구 쓸 것이구. 저애두 따지고 보자면 못먹여 저 모양 아뇨?"

"………"

"둘 다 거느를려다 방정맞은 말루 둘 다 성치 못허기 쉬우리다."

"………"

"그 집이선 딸두 상관 없대는 거야. 남녀간으 거저 똑똑히 생기기나 헌 갯 구멍 받이가 하나 둘오기만 허면 머 금이야 옥이야 헐 판이라우. 그날 루 당장 유모 정해두구."

"………"

"그렇게 가 잘 길리우구 호강으루 자라믄서 여학생 공부허구 부자집 좋은 신랑 헌테 루 시집가구…… 조옴 좋수? 데리구 배 곯려가믄서 공부두 못 시키구, 지리리 고생시키다 시집이나 아니나 변변찮언 자리루 주구, 그러기 같아?"

"………"

5

"아, 그 댁이 집안은 또 으떤 집안인데! 바루 장동 김씨네 한파루 영감은 종로서 큰 포목점을 헙넨다. 그러구 양평땅으서 추술 천 석씩이나 받아들이구. 참 쩡쩡 울리구 사는 집안이지……그런데 글쎄 손이 없대는 구랴. 그래 손을 볼 양으루 첩을 몇씩 얻어들여두 눈먼 딸 하나 없대는군. 그런 걸 본다치면 세상은 고르지 못허기루 마련야! 남전북답으 비단대단 싸놓구 바라는 집인 가 아니 생기구서, 아니 바라구 자식 많어 성가셔 허는 집이만 들이 생기구."

"………"

진주는 여전히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듣기만 하고 노파 혼자서 이야기가 입에 침이 마른다.

"그래 그 본마나님이 나이 올에 마흔여덟인데 인전 나이루두 아일 보긴다 글렀으니 남의 자식이래두 몰래 들여미는 게 있으면 내 자식삼아 하나 길러서 재미두 보구 늙발에 몸을 의탁허구 싶대는 거래…… 아따 저 안동 별 궁 뒷담 골목으루 해 한참 올라오다 수통백이 골목으루 들어가 왼손짝 둘째 골목 막다른 집이 바루 그 댁인데 나두 두어 번이나 물감 팔러 댕 기느라 구가 보았지만 집허며 세간허며 참 으리으리헙넨다."

"………"

"쥔마나님이란 이가 척 보매두 사람 인자스럽구 얌전헌 게 얼굴에 환히 드러나구. 글쎄 하인들을 여럿을 부리믄서두 일년 삼백예순날 큰소리 한번 아니 헌 대는구 랴."

"………"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을 리야 없는 것이지만, 문주가 잠이 깨어 발딱 일어나 앉더니 엄마를 치어다보고 방긋 웃는다. 볼은 그래도 발그레붉고 하얀 아랫니가 두 대 얄밉도록 이쁘게 해끗 드러난다.

"신통해라. 깨서 울지두 않구…… 문주야?"

노파가 그러는 것을 아이는 올려다보다 말고 엄마한테로 비척거리고 걸어가면서

"맘 맘마, 맘맘마." 한다.

"밥 달란 소리구면? 온, 절 으쩌나!"

아이는 엄마한테 안기어 연해 맘맘마를 조르다 하릴없이 젖을 문다. 그러나 젖이 나는 것이 있을 턱이 없는 것. 아이는 빈젖을 빨면서 아니 난다고 옹알거려 쌌다. 필경 울고 만다.

노파가 보다 못해 혀를 차면서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반 섞이 조밥이 주발에 서너 숟갈이나 남은 것을 가지고 온다.

진주는 몇번 사양하다 치하를 한 후 간장과 숟갈을 가져다 조금씩 입으로 씹어서 먹인다.

어른 술로 치면 한술이나 먹었을까 하여서 아이는 양이 다 차는 모양, 그 알량한 걸음으로 온 방안을 돌면서 갖은 재롱 피운다.

진주는 남은 밥을 철이를 위하여 잘 아껴 둔다.

"그만허믄 족헌걸! 그 푸달진 양을 못 채워 맘마 타령이구. 쯧쯧, 가엾은 일두…… "

물끄러미 아이의 좋아하며 노는 양을 보고 앉았던 노파는 혼잣말같이 그러면서 일어서다가 진주더러 "내가 데리구 모진 고생시킬 밴 차라리 남 주어 호강시키는 것두 남의 부 모루 험직한 노릇입넨다." 하고 건너가 버린다.

한 달이 지나 서울의 꽃소식이 가까왔고 내일이면 딸 문주의 첫돌이 당하는 날, 진주는 동경서 윤석이 돈 오 원에 철이의 속옷 한 벌과 더불어 부쳐 온 문주의 첫돌 선사 양복 한 벌을 받아 앞에 놓고 느끼며 울고 있었다.

6

윤석은 작년 봄 중학을 마치고 이내 동경으로 건너가 여전히 고학을 하면서 어느 사립대학엘 다니고 있었다.

윤석은 일찌기 준호에게 진 바 조그마한 은의를 크게 무겁게 여기고 길래 저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잣몸으로 고생살이를 하는진주를 늘 찾아와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하여 주고 철이를 귀애하여 주고, 그리고 무리히 저의 용을 줄여가며 약소한 것이나마 가다오다 진주의 하루 이틀의 옹색을 펴게 하여 주곤 하였다. 그것이 진주에게는 얼마나 큰 생색이며 아울러 정신적으로 위안이었던지 모른다.

그 뒤 동경으로 건너가서도 한 달에 두 번쯤은 반드시 편지를 하고 세 번이나 네 번 만에는 으례 돈이 이삼 원씩이 같이 넣어져서 오고 하였다. 그러고 이번에는 문주의 첫돌을 잊어버리지 않고 철이의 속옷까지해서 돈을 오 원이나와 문주의 첫돌 선사거리를 정성스레 그처럼 사보낸 것이었었다.

막막한 사바에서 그렇듯 곡진한 의리가 감격하여 진주는 울지 아니치 못 하였다. 윤석이며, 자연 준호가 생각이 나 울지 아니치 못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러한 눈물보다도 보내어 온 첫돌 선사의 옷을 정작 입어 줄 딸 문 주가 이미 나의 품에 없는 슬픔으로 하여 애끊이는 눈물이 더 컸다. 거기에다 아기가 보고 싶고 그리운 어머니의 눈물이요, 자식을 생으로 없이 한 뉘우침의 눈물이었다.

"아니 난 통히 의지라군 없는 줄 알았드니, 이런 걸 다 사보내는 데가 있구랴?"

행상 나갔던 안방 노파가 돌아오다 고개를 들이밀면서 소포에서 풀어 헤쳐 논 것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진주는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나서

"이 거라 두 낼 입히라구 보냈으면…… "하고 노파의 기색을 살핀다.

"오온 그 댁에 그애 입힐 옷이 없어서?"

"거야 그렇지만서두 제 첫돌씨루 이왕 생긴 거니깐."

"거 긴치가 못해. 개구멍받이루 주구 나서 뒤루 제 부모가 자꾸만 그래 싸면 그 댁에서 좋아허우?"

"………"

"이왕 그럭헌 노릇이니, 인전 거저 잊어버리는 게 상수야, 상수."

"………"

"아니 낳든 심만 잡구서 잊어버리우."

"곧 사람이 발광이 될 것 같아요."

"잊어버릴려군 들질 아녀구서 자나깨나 그 생각만 허구쓴깐 그렇지."

"안 생각허구 견델 수 있다면야 차라리 다행이죠…… 내가 죽일 년이지. 몹쓸 에미년이지. 어떡허다 한때 고만 환장이 돼가지구…… 이렇게 앨 태우구 허믄서 죄 받아 싸지. 열 번 죽어 싸지."

듣기가 싫어서 노파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러나 양오라비 창수가 퍼뜩 당도하였다. 낡아빠진 찌부러진 모자에 빛바래 고 꿰진 겹두루막에 뒤축은 다 닳고 볼은 꿰진 구두에, 그리고 궁기 흐르는 얼굴에…… 일찌기 그 의복 호사스럽고 신수 훤하던 임창수가 과연 속절없었다.

남으로는 윤석과, 양오라빌망정 육친으로는 이 창수가 진주에게는 유일한 마음의 의지거리였고, 해서 그가 찾아옴은 슬픈 중에도 역시 반가왔다.

7

"넌 그동안 좀 나으냐?

창수는 진주가 업고 있는 철이를 들여다보면서 묻는다.

진주가 그 말을 받아

"죄 끔 낫다는 게 거저…… "

"조금씩 이라두 나어가니 다행 아닌가…… "

창수는 그러고는

"그래?……" 하면서 방안을 고쳐 둘러보다가 소포 풀어헤친 것으로부터 눈을 이윽고 진주에게로 옮긴다. 진주는 눈물 흔적을 가리지 못하였다. 써 창수는 일을 짐작 하기에 힘이 들지 아니하였다. 그는 이십여 일 전에 다니러 왔다 진주에게서 그런 상의의 말을 듣고 찬성도 반대도 잘라서 하지 못한것이 있었다.

진주는 푹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말이 없고.

창수는 담배를 붙여 물로 푸우 길게 내뿜으면서

"게 다 죄는 내 죌세. 내가 집안을 아니 망쳐놓았으면 누이가 설마 이 지경이야 됐겠나?"

"오라버니두 그런 말씀 허시지 마세요. 다, 참 제 죄요 제 팔자 소간이지 무슨…… ""면목 없네!"

창수는 눈물을 씻는다.

진주도 눈물이 새롭다.

오래도록 마주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고.

창수가 들고 온 보자기를 풀더니 어린아이들 무색 옷감과 과자봉지를 내어놓는다. 그러고 품에서는 십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어 놓는다.

"저놈 약이나 좀 지어멕이두룩 허게…… 이건 그년 첫돌을 생각허구 끊어가지구 왔 드니…… "

"……… "

창수가 없었다면 진주는 이 옷감과 윤석이 보내준 양복까지 한데 얼싸안고 몸부림을 치면서 통곡이라도 하겠었다.

"거지두 손 볼 날이 있드라구, 미두장 하바꾼두 혹시 가다 한목 일이 백원씩 생기는 수가 있느니…… 알구 보면 미두에 망한 끈터리요, 노적에 불 지르구 싸래기 주워먹기라는 걸세, 허!"

사양하는 창수를 만류해 앉히고 쌀과 나무와 반찬거리를 사다 저녁을 대접 하여 보냈다. 창수는 떠나면서, 이왕 그러한 노릇을 상심을 하니 무슨 소용이냐 고 마음을 갈앉히도록 하라고 위로가 곡진하였다.

해질 무력 ── 황혼.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패였다. 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머릿속은 열에 떠 멍하고서 사려 분별이 서지를 아니하였다. 발광할 것 같다고 하였거니와 진정이요 조금도 엄살이 아니었다. 먼빛으로나마 잠깐 보기라도 해야망정이지 그대로 견뎌 배길 수는 도저히 없었다. 철이를 들쳐 업고 나서 정신없이 달렸다.

그 집 골목에선 무수히 오락가락하면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 다그만 들켰다.

천천히 다시 골목을 들어가서 막 대문 앞까지 당도하는데, 그러자 불의에 지친 대문이 삐그덕 열리면서 문주가 나왔다. 색동저고리에 비단처네 두르고 점잖은 여인네에게 안기어 잠투정을 하는 모양, 졸린 목소리로 칭얼거리면서 문주가 나왔다.

진주는 고쳐 한번 더 보기보다도 얼굴이 화끈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반 사적으로 얼른 발길을 돌이켰다.

돌이키면서 한걸음 내어딛는데, 그때였다.

"엄마 엄마, 우리 문주, 우리 문주, 내 동생 우리 문주 저깄어, 저기!"

등에 업힌 철이가 몸을 비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기를 쓰고 외치던 것 이었었다.

진주는 다리에 맥이 풀리어 털씬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흐느껴 울었다.

8

여인은 처음엔 문득 당황하는 빛이었으나 이내 도로 기색을 다스리고, 이윽고 진주의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양을 내려다본다. 그러는 동안 철이는 연방 엄마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뒤를 돌려다보면서 우리 문주, 내 동생 우리 문주를 소리질러쌓고.

"모양이 됐소? 날 따라 들어오우그려."

여인의 입으로부터 밑도 끝도 없이 조용히 흘러져 나오는 말이었었다.

진주는 따라 들어가는 것이 떳떳치 못하냐 하는 판단이 없이 빨리듯 그대로 따라섰다.

세간도 없고 거처하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뜰아래 한 방으로 들어가 주인은 아랫목으로, 손은 문치로 각기 앉았다.

주인 여인은 곰곰이 진주를 건너다보고 앉아서 미처 말이 없고, 진주는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앉아 간간이 느끼기만 한다.

철이가 엄마의 어깨 너머로 내어다 보면서

"문주야, 이리 와. 엄마 여깄다, 엄마." 하고 손을 까분다.

문주는 잠시는 말끄러미 바라다보다가 비로소 알겠는지 안긴 처네를 비비고 몸을 빼친다. 주인 여인은 저 하는 대로 놓아둔다.

문주는 고 두 대의 하얀 이빨로 해끗해끗 웃으면서 비척거리고 걸어와 꺄웃이 들여다보더니

"엄마." 하고 부르면서 품을 파고든다.

진주는 헉 하고 높이 흐느끼면서 아이를 끌어다 아스라지도록 껴안고 젖은 볼을 비벼댄다.

엔간히 진정이 되기를 기다려 주인 여인이 종시 조용스런 음성으로 입을 연 다.

"나야 바라든 걸 얻어 길르니 좋기야 했소만, 어떡허면 자식을 남의 문전에다 내버릴 생각이 나우? 저만치나 길른 걸. 또 저렇게 이쁜 걸."

조금치도 책망이거나 불쾌한 내색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쯧, 살기가 어려웠든 모양이지. 혼자요?"

"내애, 유복녀예요."

"안됐구려 젊은이가…… 시집은?"

"시굴인데…… 있으나마 나래서…… "

"친척 집두 어렵구?"

"내애."

"………"

"이틀에 한 끼가 간데없구, 큰애 이놈이 병이 들어 죽게 되구. 그래 잘 못 허다 둘 다 죽이는가 싶어서 미련헌 생각에 고만 그랬어요. 적선 허시느라 구 절 도루 내주시면…… ""억 지루 뺏겠소마는 지끔은 무슨 도리가 있소?"

"살을 깎아 멕이드래두…… "

"……… "주인 여인은 고개를 끄 덱 끄 덱 하더니

"바느질 헐 줄 아우?"

"잘은 못해두 숭낸 다아."

"아이들 데리구, 우리 집에 있어 보려우? 마침 침모 뒷감을 구해들 이자든 참이구 허니…… 첫째 젊은이가 정상이 딱허기두 허구, 또 나는 그 새 한보름 동안에 어린것허구 정이 들어 떼치기가 섭섭해 그러우. 그렇다구 남의 자식을 영영 뺏자구 헐 며리야 없으니, 그런 염렬랑 헐라 말구서…… 있어 보겠거든 있어 보우그려. 아이들은 남 그대지 부럽진 않게 길르두룩 허께시니…… "

진주는 이런 후하고 인자스런 구원의 손길이 과연 강박한 이 사바에 있었 으리라고는 꿈밖이었었다.

9

동지날 그믐까지 여덟 달 남짓이 진주는 두 아이를 데리고 이 김씨집의 고씨라는 그 안주인의 도타운 두호 아래서 고생 없이 잘 지냈다.

고씨는 어린 문주를 물고 뜯을 듯이 이뻐하였다. 자기 친소생인들 그다지 이뻐하랴 싶을 지경이었다. 문주도 그러는 고씨를 잘 따라 잠도 더러는 고씨에게서 자곤 하였다.

고씨는 진주의 바느질 솜씨에 흠탁하였다. 바느질 외에 종종 음식을 시켜 보고는 음식솜씨 역시 얌전하고 깨끗한 데에 또한 탄복하였다. 그러고 차차로 날이 깊는 동안 구학문은 물론이요 신교육에도 무식치가 아니한 것과 언어 행동이 조백이 있는 것을 알고는 여간만 기특히 여기지를 아니하였다. 정녕 근지 있는 집에서 보고 배운 데 있이 자란 사람이거니 하고 예사 침 모 나기들한테 처럼 함부로 대접하는 법이 없었다.

주인이 그래 주는 만큼 더욱 감복하여 진주는 있는 정성과 힘과 재주를 다 하여 알뜰히 일을 하였다. 들어간 지 두 달 안에는 바느질뿐만 아니라 음식 마련까지 해서 침선 범절과 심지어 집안 소쇄에 관한 것까지 죄다 진주의 손과 그의 간여로 되게 되었었다. 가정부(家政婦) 노릇을 하는 셈이었다.

제일 누구보다도 철이가 좋았다. 의원과 의사를 대어 약을 먹이고 치료 를하고 한편으로는 영양과 소화에 좋은 음식을 충분히 먹이고 한 결과 미 구에 병줄을 놓고 무럭무럭 소성이 되었다. 봄 여름을 지나 가을철로 접어 들면서 는 아이가 딴 아이처럼 살이 오르고 원기가 발랄하여졌다. 어떻게도 반갑고 신기한지, 진주는 그렇게 충실하여진 철이를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눈물이나 도록 기뻤다.

문주는 물론 잘 먹고 잘 놀면서 잘 자랐다. 재롱은 나날이 늘고, 그럴수록 고씨의 귀염은 더하여갔다.

한번 철이에게서 실패한 전감이 있는지라 진주는 충분한 주의를 하면서 서서히 이유 준비를 하다가 시월달에는 아주 젖을 떼었다. 준비 시기가 여름철 이었고 하여서 몇 차례 배탈이 나고 하였으나 이내 낫고 하였다. 문 주의 이유에는 십분이나 성공을 하였달 편이었다.

한편 그러고 진주도 혈색이 좋아지고 원기가 회복되었다. 일이 미상불 여러 가지요 고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과로 지경은 아니어서 건강에 해를 끼칠 것은 없었다.

이렇게 진주 세 모자는 만족이요 행복이었다.

주인 고씨도 이네에 대하여 불만일 것이 없고 차라리 만족이었다. 해서 주인과 나그네가 다같이 좋았다. 소위 관무사 촌무사(官無事村無事)격이었다.

모든 것이 주인인 남(他人[타인]) 중심이요 남 표준이었다. 나( 自我[ 자아])라는 것이나 나 표준 내 맘대로라는 것이 없었다. 자연 독립성이 없고자 주적인 것이 못되는 한 소극적이요 추수적인 생활이기는 하였다. 전혀 신축성이나 비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이것이 미흡하다면 미흡이요 결함이라면 결함일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아사의 지경에서 방황하 거나 자식을 남의 집 개구멍받이로 들여보내던 생활에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달리 두르러진 묘책이 없는 이상 써 오랫동안 그대로 지탱함만 같이 못하였다.

그러나 이 아늑한 지대(地帶)도 매양 젊고 어여쁜 여자 진주를 위해 길이 안신( 安身) 할 자리는 되지를 못하였다. 생각컨댄 인간세상에서 여자의 정조처럼 말썽스런 것도 드물 것이었다.

10

바깥주인 김씨는 나이 오십이라는데 그저 사십이 좀 넘어보이는 의젓하게 생긴 양반이었다. 장동 김씨네 일파라더냐 무어라더냐 하나, 참 그런 양반보다는 역시 상고판의 돈 있는 양반 냄새가 풍기는 양반이었다. 치깎은 상고머리, 금테살 주경, 동아줄 같은 금시계줄과 사발만한 금시계, 백 금반지와 가락지만큼이나 큰 금반지…… 이런 것들이 첩경 사람 그러하여 보였다.

듣기엔 첩을 넷인가 다섯인가 얻어두고는 기생첩의 집에 가서 한 사날, 과부 첩의 집에 가서 한 나달. 시골 마름의 딸한테 첩장가 든 첩은 데리고 아기 빌러 가느라고 한 예니레. 또 무슨 생첩은 깜장 통치마에 구두 신겨 동 부인이라는 것을 하고 온천 가느라고 한 댓새…… 이렇게 윤번을 돌면서 본집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들를까말까 한다던 김씨가 하루 아침 본집에서 진주를 발견하면서부터는 본집에의 발걸음이 서서히 잦기 시작하였다.

진주는 처음엔 내외를 하였다. 그랬더니 김씨는 마누라 고씨랑 같이서, 나이로 하더라도 부모 자식 같은 사이에 내외가 무슨 내외냐고 하여 하릴없 이통 내외를 하였다.

안주인 고씨가 문주를 귀애하듯이 김씨는 철이를 대단히 귀애하였다. 오면으 례껏 철이를 불러 안고 앉아서 이야기도 시키고 약 걱정도 하고 하다가 데리고 나가 먹을 것이며 장난감을 사 들려보내곤 하였다. 한번은 금 투성이를 한 대례복을 처억 사입혀 들여보내서 진주로 하여금 기절을 할 뻔하게하였다.

마누라 고씨의 옷감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반드시 진주의 것도 가지고 들어와 직접 혹은 마누라를 시켜 전하였다. 당혜도 사주고 구두도 마춰다 주었다.

진주는 오직 친절이거니 하고 늘 미안스러워하였을 뿐이었었다.

유월 보름께. 이때는 김씨는 사흘만큼씩 나흘만큼씩 본집엘 와서 자고 조석을 먹고 하였는데, 그 이유가 매우 적절하였으니, 가로되, 우리 그 침 모 아씨의 찬수 솜씨가 썩 입맛에 맞아서라는 것이었었다.

그러자 하루는 드디어 진주의 손목을 쥐었다. 안주인 고씨는 마침 출입을 가 늦었고 진주가 저녁상을 들여갔더니, 술을 부어달라고 하였다. 술을 부어주는 것인지 부어주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와락 내키지는 아니하나, 그렇다고 못한단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술을 부어주었다. 석 잔을 받아 마시더니 턱 손목을 잡는 것이었었다.

진주는 놀랐으나 이내 당황치 아니하고 좋은 낯색으로 뿌리치고 나왔다.그 등 뒤에다 대고, 나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 영리한 그대가 자식 같이 귀여워 그랬으니 어찌 생각 말구료 하였다.

진주가 포달을 부리지 않고 좋은 낯색으로 뿌리친 것을 김씨는 잘목 해석을 하였던 모양, 그 뒤에도 큰마누라 고씨가 없는 기회면 그 수작을 내고내고 하기 사오 차나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 이번에는 마침내 진주의 침방을 엄습하였다.

준절히 한마디 꾸짖고 방을 뛰쳐나오는 진주의 옷자락을 검쳐 쥐면서

"자식 하나만 나면 이 재산이 죄다 네것인 줄 몰라?" 하였다.

12. 不 如 意[불여의

1

세월은 아뭏든 흘러 그로부터 다시 십 년이 지났다. 앞으로 일 년이면 진주의 나이 그럭저럭 사십이 차는 병자(丙子), 소화 십일년이었다.

첫여름 오월, 신록 환히 피어오르고 신선한 계절 오월 그믐의 어느 날.

양광이 차창으로 맑게 드리우는 남행열차의 한 복스를 차지하고 앉아 철과 문주 남매는 어머니에게 거느린 바 되어 시골 본가엘 내려가고 있었다.

철이 어느덧 열네 살이요, 문주가 열두 살이었다. 철은 중학교의 정복 정모에 깃에단 3자를 붙이고, 문주는 소학교 오학년이었다. 자라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다들 몰라보게 자랐다.

아이들이 그처럼 자란 반대로, 아이들을 그만큼이나 기르고 학교에도 보내고 하기에, 십 년의 고생을 또다시 치르었고 사십이 차고 하는 어머니 진주는 역시 몰라보게 바싹 늙었다.

자식 하나만 나면 이 재산이 죄다 네것이라는 소담스런 미끼를 물리치고 아이들 남매를 데리고 가두로 나섰을 때에는 지나간 고난을 생각하여 앞길이 깜깜하였다.

요행 수중에 돈이 조금 있었다. 언젠가 창수가 놓고 간 오십 원과 다달이 월급으로 받아 모은 것과, 그리고 작별하면서 고씨가 몇십 원 쥐어 준 것과도 합 일백오십 원은 되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백사지에 선 세 모자의 생명의 줄이었다.

머리 두르고 갈 곳이 없는 몸이라 전에 살던 재동 그 노파를 찾았다. 마침 건넌방이 또 비어 있어 다시 세로 얻어듦으로써 우선 거리잠을 면 하였고 일변 노파의 훈수에 좇아 물감장사를 시작하였다.

물감장사로 일 년. 한 아이 등에 업고 한 아이 손목 잡아 걸리고 문전 문전 드나들면서 물감을 팔았다. 다리가 뻣뻣하고 기진이 되도록 종일 돌아다니고 나면 이튿날 밥거리가 생기는 날도 있고 죽거리가 생기는 날도 있 고통 히 생기는 것이 없는 날도 있고 하였다. 일 년 하는 동안에 할 수 없이 밑천에서 오십 원을 갉아먹었다. 믿고 길이 할 것이 못되었다.

권하는 이도 있고, 또 보아하니 자리만 잘 잡아 앉으면 그럴 성불러 다방 골에다 골라 방 하나를 구하여 가지고 '내재봉소’를 써붙였다.

처음 한 일 년이나는 별 신통한 줄을 모르겠더니, 차차로 바느질 솜씨 곱고 얌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태째부터는 쑬쑬히 일거리가 들어왔다.

고객은 물론 태반이 기생과 여급들이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삯도 비교적 후하였다.

삼 년 되면서는 들어오는 일거리를 손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 고월 수로 재봉틀을 한 채 사놓았다. 이로부터야 겨우 모진 기한(饑寒)에 쫓기 기를 면하고 생활이랄 거의 자리(軌道)가 하여커나 섰다. 경오(庚午), 소화 오 년에는 철이, 그리고 그 다음다음해에는 문주가 각기 학교에 들었다.

겨우 굶주리지나 않던 생활에다 아이들이 소학교나마 다니게 되니 수입이 지출을 따르지 못하였다. 진주는 먹는 것을 줄이는 한편 밤을 새워 가면 서일을 더 하여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학교에 내는 월사금을 제때 제때 주어 보내지 못하고 아이들로 하여금 울고 갔다 울고 돌아오게 하는 적이 많았다.

젊고 인물 얌전한 여자가 홀몸으로 어렵게 사는 약점을 엿보고 유혹이 연방 끊이지 아니하였다.

2

그런 종류의 유혹이란 거개가 판에 박은 듯한 것이었다.

매삭 이백 원씩 대어주고 집 사주고 할 터이니, 세짼가 네째 첩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었다. 안국동 김씨처럼 재산은 많은데 자식이 없으니 남녀간 하나만 낳으면 오백 석거리를 떼어준다커니, 단박 본실로 모셔 앉힌다 커니하는 것도 있었다.

전당국장이 일흔두 살 먹은 영감으로 작년에 마누라가 죽고 자식들은 다 장남하여 따로 살고 하니 들어가 말벗이나 하면서 의복이며 음식 시중 같은것이나 착실히 보살펴 주고 하면 죽는 때 오천 원 주마는 것도 있었다.

족히 귀에 담아 들을 것도 못되는 소리들이었으나, 오직 중년 상처를 한 어떤 변호사의 후취 자리 하나만은 약간 마음이 움직인 것이 있었다. 희망이란 다 면 떳떳이 결혼 예식을 치러도 좋고, 저편에도 열살박이 전실 소생 이하나가 있으니, 이편도 딸린 것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반대치 아니할 터이요, 꼭같이 최고학부까지 공부를 시켜 줄 것이요 한다는 것이었다.

재혼일망정 정당한 결혼인데다 아이들을 마음대로 교육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여간만 솔깃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 밤이 깊도록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나란히 누워 자고 있던 두 아이를 곰곰 바라다보다가 문득 '저 것들을 데리고 남의 애비한테로 후가살이를?’

'의붓자식! 의붓아비!’ 하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점잖고 가사 눈치를 않는다 잡더라도 의붓 자식에게의 매양 의붓아비임엔 일반이었다.

'공부 한가지 잘 좀 시키자고 저것들을 의붓자식 신세를 만들어주어? 천하 치사하고 남 보매부터 추레한 의붓자식!’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오냐, 고생스러워도 참고들 견디어다오. 더는 모르되 중학 하나씩은 이를 악물어가면서라도 기어이 마치도록 하여주마.’ '의붓자식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 아래 잘 지내면서 창피한 대학 공부까지 하느니보다는 가난하나마 어미의 정성, 어미의 손에서 고생으로 중학만 마치는 것이 너희들도 행복이요 자랑이리라. 이 어미도 그것이 자랑이요 행복이겠다.’ 이렇듯 유혹을 물리치고 쓰라린 고난을 단물이 나도록 야긋야긋 씹어가면서 뜻을 꿋꿋이 지켜나갔다.

아침 일찍부터 밤이 깊도록 쉬지 않고 다르르 구르는 한 채의 재봉틀 소리…… 이 가만한 소리가 엮어내는 어머니의 정갈한 수고로 철이 우선 재작년 봄 버젓이 ××중학에 들었고, 올해 벌써 삼년급이 되었었다.

어머니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더 바라지도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고 오직 아침 일찍부터 밤 깊도록까지 다르르 구르는 재봉틀 소리 하나만으로써 두 아이가 중학을 마치는 날까지를 대어가기에 여념이 없을 참이었었다.

그러자 생각밖에 박씨부인이 병이 중하다는 것과 그리고 아이들이랑 며느리를 임종에 만나고자 한다는 기별을 가지고 죽은 준호의 외사촌이 시골 로부터 진주를 찾아 올라왔다.

만나고자 한다는 말이 없더라도 임종이라고 하니 도리에 선뜻 일어서지 아 니 할 진주가 아니었다. 좀처럼 쉬는 법이 없는 학교를 다 쉬게 하고서 아이들을 데리고 바로 이튿날인 시방, 그래서 이렇게 부랴부랴 시집 본가엘 내려가고 있는 길이었었다. 쫓기어나서 어언 이십일 년 만인 시집 본가엘.

감회 자못 무량한 길이었다.

3

그 이십일 년이라는 동안에 진주는 퍽도 많이 인생을 손을 보았다.

재혼을 뜻한 바가 있었다. 사실 그것 자체야 노상 불순하였다고 할 무엇이 없다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상대적으로는 정신적인 순결이 한귀퉁이가 이지러졌 음을 스스로 거부키 어려웠으며, 따라서 마음 가운데의 한 가시지 않는 흠집이 아닐 수 없었다.

곡절은 어떠하였던지, 또 악의로써 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하여커나 자식을 눈 번히 뜨고 남의 집 문전에다 개구멍받이로 버린 것이 있었다. 뉘우치고 곧 도로 찾고 하였다고는 하여도 이미 씻을 수 없는 오점(汚點)이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가책거리였다. 항차 도로 찾은 것이야 우연의 요행이 아니었던가. 우연의 요행으로 그렇게 도로 찾았기망정이지, 만일 찾지도 못 하였더라면 어쩔 뻔하였던가.

과실은 아니요 불가항력을 불가항력이었으나, 남편 준호를 여의고 삼십 안에 과부가 되었다. 절대로 채워지지 못하는 손실이었다.

부부의 낙이나 가정의 단란 같은 것은 미처 맛도 들이지 못한 극히 짧은 동안 이었고, 그런 것이 마악 시작되려 하자마자 이내 새파란 청상과부의 몸이 되었다. 그러고는 기한과 남의 업신여김과 동요 가운데 좋은 청춘을 다 보내었다. 하고서 이에 시드는 사십의 고개를 부질없이 넘고 있었다. 억울했다. 그런 억울한 도리가 없었다.

이렇듯 모두가 무를 수도 없고 메꾸어지지도 않고 하는 인생 손실의 연속 이었다.

작히 서러운 노릇이었다.

물론 그러한 손실이 있는 반면엔 철과 문주 남매가 눈앞에서 나란히 자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고난을 치르어 나오는 동안에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큰 자랑거리며 큰 즐거움이요,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워하여서 무방하였다.

그런 만큼 다시 없이 소중한 그들 남매이기도 하였다. 남의 열 남매 스무 남매 지지 않게 소중한 남매요, 누가 눈 한번 크게 부릅뜰까 무서운 소중한 남매 였다.

그러나 사람 따라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저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함에 있어 반드시 진주와 같이 인생을 손실하면서 하라는 법은 없었다. 아무 고난이 없이 순조로운 조건 아래서도 남들은 저마다 자녀들을 낳아 훌륭히 양육과 교육을 시켜놓지를 않던가. 순경에서 평안히 호강으로 자녀를 기르고 교육 시키고 하여 훌륭히 된 자녀라고서, 진주만큼 자기네 자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부모가 있으며,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부모가 있던가.

결국 그러므로 자녀라는 것은 부모의 고난에 대한 직접적이요 인과적인 대상인 것은 일률적으로는 아니었다.

'고생한 보람으로 자식들이 저만큼이나……’

흔히 들 이렇게 말도 하고 생각을 한다. 진주도 매양 그러하였다.

그러나 자녀는 인생을 손실한 것과는 역시 딴 것이었다. 그리고 진주도 인간의 약함을 갖추지 아니치 못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손실한 인생이 미련 겨울 적이 없을 수가 없었다. 더우기 이십 년 전 그로 하여금 인생의 손실을 출발 케 한 시초에를, 지금에 공간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날을 당하여 그런 감회, 저런 감회 두루 깊이 솟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빈 말일 것이었다.

4

그런 중에도 골똘하달까 안타깝달까 하기는, 잊어버리고 지나친 청춘 이었다. 꿈결만 같은데 어느 겨를에 온 것은 사십이라는 늙음이었다.

'허망도 하지!’

허망하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공허의 느낌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앞자리와 옆에 번연히 철과 문주가 앉아 있건만 홀로 무인지경을 가기처럼 외로왔다.

준호 그리운 생각이 불현듯 새로왔다. 등신이라도 옆에 있다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고적 해요! 슬퍼요!" 하고 하소연하면서 울고 싶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그런 가만한 혼자의 세계도 오래도록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응석받이 문주가 눈 지그시 감고 차창에 기대어 있는 어머니를 별안간 팔을 잡아 흔들면서 호들갑스럽게 부른다. 차가 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보다 맞은편 자리에서 무슨 책인지 교과서는 아닌 술 두꺼운 책을 잠 착하여 읽고 있던 철이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핀잔이었다.

"기집애아 개떡두스러이."

"피이. 기집앤 활발스러믄 못쓰나 머."

"쓸 건 어딨어?"

"왜 못써?"

"보선짝이니 쓰니?"

"하하하. 보선짝을 쓰는 사람이 어디가 있어?"

"너 겉은 기집애란다."

"오빠나 써라."

"………"

철은 더 대거리를 않고 책으로 다시 정신이 쏠리고.

문주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면서

"아따 엄마?"

"오냐."

"기집애두 활발스러예지 허지, 응?"

"그래두 너무 활발스러면 왜장녀란다."

"왜장녀? 왜장년 또 무어유?"

"게덕만 피우구 얌전치 못헌 기집아일 왜장녀라구 헌단다."

"왜장년 못쓰우?"

"못쓰구말구!"

"오라. 그럼 나두 죄끔만 활발스러예지…… 죄끔 활발스런 건 갠찮지, 엄마?"

"오냐."

어머니는 철의 벌써부터 명상적인 소곳한 이마를 곰곰이 건너다보면서 무심 중에 얼굴이 흐린다.

철은 생긴 모습부터, 성격 하며, 말이 적은 것이며, 그 밖에 모든 행동 거지 며가 고대로 준호를 본떠다 놓았었다. 집안 사람이거나 남이거나 같이 섭 쓸리 기를 즐겨 아니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도 생전의 부친 준호 였었다.

반대로 문주는 계집아이면서도 왈패스럽고 앙칼지고 한 것이 철과는 전혀 딴 판이요, 어쩌면 저의 할머니 ——— 박씨부인을 많이 탁한 것도 같았다.

'차라리 둘이 바꾸어 되었더라면!’

아무리 남자라 하더라도 박씨부인 같은 성질은 와락 추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아무리 여자라 하더라도 준호 같은 성격은 역시 박씨같이 되 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왕이면 ——— 이왕 두 아이의 성격들이 그랬을 바이면 ——— 철이 박씨부인을 탁하고 문주가 준호를 탁하고 하였던 편이 차라리 그래도 나을 뻔하였다는 것이었었다.

'사람이 한세상 살기에 무엇 한가지 뜻과 같이 되는 것이 있을꼬마는 그 중에도 가장 불여의(不如意)하기는 자식일까 보다!’ 진주는 절절히 이런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5

차는 호남선으로 갈리는 대전을 거의 바라보면서 첫여름이 선명한 언덕 기슭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고.

"철인 참, 이 세상에서 젤 존 것이 무어지?"

곰곰이 아들의 책에만 잠심하여 있는 양을 건너다보다가 밑도 끝도 없이 어머니가 그렇게 묻는다.

철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그래서 영영 대답을 않거니 한 것이 얼마만에야

"책요." 한다.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이윽고

"그건 무슨 책이냐?"

"별의 전설이라구, 저 거시키."

"별의 전설? 철이겐 안직 좀 어려운 책 같은데?"

"………"

"재미있니?"

"내."

"철이 다 보구 나서 어머니두 좀 볼까?"

"어머닌 봐야 재미 하나두 없어요. 살림만 아는…… "

어머니는 속으로, 내가 너를 지도하자면 그동안보다 더 큰 고생을 ——— 마음의 고생을 하여야 되겠구나. 그러니 에미 노릇도 이 앞으로가 더 어렵고 책임이 정말로 중하구나 싶었다. 그러나 일찌기 명심한 바도 있거니와 자녀를 지도 훈육함에 있어 결코 박씨부인과 같은 그런 방침이나 태도로는 아니 할, 시방도 생각이었다. 무릇 자식은, 불여의하다는 것은 부모의 소 주관이요, 부모에게는 불여의한 자식이라도 인간은 불여의치 않은 것이 사람 이었다. 사람만 여의하다면 부모의 소주관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식을 잘 지도 한다는 것도, 그러므로 여의한 자식을 목적이 아니라, 여의한 사람이 목적 이어야 할 것이었다.

정거장으로 내어보낸 두 채의 교군에 별러 타고 밤이 들어서야 진주는 이십일 년 만에 오는, 그리고 두 아이는 생후 처음으로 와보는 향교골 본가엘 당 도하 였다.

환히 밝힌 촛불 아래 자는 듯 눈을 감고 누웠는 박씨부인은 첫눈에 벌써 임종의 빛이 완구하였다. 그러나 그 임종의 자리는 너무도 쓸쓸하였다. 서울로 진주 모자를 데리러 왔던 준호의 외사촌 즉 박씨부인의 친정 조카, 그의 아낙이 하인 하나를 데리고 약시중을 하면서 자리에 있었다․ 준호의 외삼촌 내외는 연전에 내외가 전후하여 다 죽고 없었다.

진주는 병인이 혹시 잠이 들었나 하여 기척을 하기가 조심스러워 잠깐 그대로 서서 동정을 기다렸다.

진주 모자들을 말없이 일어서서 맞이한 준호의 외사촌댁이 그 눈치를 알아채었던지 병인의 머리맡으로 도로 앉으면서 "고모님, 서울서 동생이랑 조타들이랑 왔어요." 하였다.

박씨부인은 정녕 알아들은 듯하였으나 눈두겁만 두어 번 떨릴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실상 그는 교군이 들어올 때에 벌써 알고 있었다.

진주는 두 아이를 이끌어 함께 병인의 옆으로 가까이 꿇어앉혔다. 그러면서 조용히

"어머님, 저 왔어요. 어린것들 데리구 왔어요." 하고 음성을 내었다.

박씨부인은 그래도 이내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한참만에야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나 눈은 곧장 천장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할머니, 정신 차리셌다. 절들 허구 뵈여라."

세 모자는 절을 하였다.

박씨부인의 눈은 여전히 천장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윽고 도로 눈을 감는다. 감고는 또 한참만에 입으로부터 흘러져 나오는 말이 "무엇 허러 왔느냐, 들?"

6

박씨부인은, 말뜻인즉은 타박이요 나무람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음성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기승스럽지도 못하고 모질지도 못하였다. 괄괄하지 는 더구나 못하였다. 하되 결코 그것은 병인의 병인답게 원기가 없는 데서 오는 무기력이 아니었다. 진심(眞心) 아닌 말이요, 자신 없는 말이기 때문에, 가사 원기가 있더라도 강경하고 서슬 있고 하지가 못하여 무기력한, 그 무기력 이었다.

박씨부인은 진주 모자들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고 기다리고 하였는지 모른다.

내가 아마 소성을 못할까 보니, 자네가 가서 그것들 세 모자를 좀 내려오도록 하게. 그것들 외가편으로 수소문을 하면 서울 어디서 사는지는 곧 알게 되리. 알아가지고 가서 그것들 먼저 내려보내고 조칼랑은 이왕 서울까지 간 길이니 하루 이틀 묵어 나 죽어서 쓸 송종 물화까지 아주 하여가지고 뒤 쫓아 내려오게.

이렇게 친정 조카를 시켜 서울로 올려보내 놓고는 그날부터 기다렸다.

"아직 기별이 없느냐?"

"네. 아직 없어요."

"온, 어째 이리 더딘고."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그 애가 내가 부른다구 선뜻 내려올꺼나? 어린것들 데리구."

"아니 올 이치가 있어요."

"모르지!…… 원망이 사모쳤을 테니, 졸연 해…… "

또 조금 있다 또 그러고. 하루 종일 그랬다. 곧 숨이 질 듯 질 듯 하면서도 정신은 초랑초랑하여 가지고, 그러면서 기다렸다. 이튿날은 더하였다. 그러다 석양때 전보가 와서야 우선 오기는 온다는 안심에 초조하던 것이 조금 진정되었다.

교군을 차리라고 재촉이 불 같았다. 차리되, 팔패 교군으로 두 채를 차리라 하였다.

일변 고기를 사들이고 떡쌀을 불리고 과실을 장만하고.

교군이 나가서 극진스런 이 일행을 태워가지고 돌아오기까지 네 시간 남짓한 동안에 머리맡에서 시중하던 하인은 동구 안으로 등불이 들어오나를 보기 위하여 대문 밖을 드나들기를 무려 몇십 번인지 모른다.

이렇게 기다리던 박씨부인이었다. 진심으로 무엇하러 왔느냐는 호통이 나와질 리가 없던 것이었었다.

진주는 아직 그런 속내까지는 몰랐어도, 서울서 준호의 외사촌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고, 또 와서 언뜻 보매도 무척 온건한 표정이며, 그 슬프도록 무기력한, 무엇하러 왔느냔 말이며로 미루어, 이 시어머니가 이미 다 뉘우 치고 마음은 풀어졌으며, 지금엔 도리어 용서를 바라는 처량한 근경임을 짐작 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주는 도리를 차리었다. 먼저 빌었다.

"어머님, 동촉허세요. 전사가 다 제 잘못 제 허물인 줄을 깨달었으니, 어린것 들을 보세서 그만 동촉허세요."

"………"

아마도 오 분은 넘겨 침묵이 흘렀으리라. 박씨부인은 여지껏 그대로 감았던 눈을 어렵사리도 다시 뜨고는 진주와 철과 문주를 차례로 본다. 그러더니 눈은 처음에처럼 천장에 가 멎으면서 혼잣말로 "놈은 아범만 닮었구나. 승밀랑은 닮지 말드냐?"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손이 베개 밑을 더듬으려고 하는 것을 친정 조카 며느리가 뜻을 알아채고 얼른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손에 쥐어준다. 그것을 받아 가까스로 진주에게다 전하면서 조용히 "옜다, 다아 맡아라…… 나는 가겠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

"하나두 뜻과 같은 것이 없었고나!"

인하여 가벼운 경련과 더불어 운명이었다.

여기에도 불여의가 있었다. 불여의하고도 큰 불여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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