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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소설작법

by 역달1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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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作法[소설작법]

序文[서문] 비슷한 것

우리는 매일 밥을, 세 번 평균으로 먹는다. 그러나, 누가 우리에게 갑자기 밥 먹는 법을 가르치려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치광이로 볼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喰飯法[식반법]이라 하는 것은 따로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밥을 젓가치로 먹든, 숟가락으로 먹든, 양인과 같이 鎗[쟁]과 칼로 먹든, 또는, 나이 어린 애들과 같이 손가락으로 먹든, 아무도 거기 간섭하며, 치 안법 위반이라든가 풍속 괴란으로 우리를 법률의 손에 내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식자의 버릇과 편익상, 밥을 박죽으로 퍼 먹는다 하여도 또한 괜치 않을 것으로서, 喰飯法則上[식반법칙상] 너는 젓가치로 먹었느니 안 되었 다, 나는 숟가락으로 먹었으니 되었다는 등의 헛소리는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식반법이라는 것을 온전히 가지지 못하였는가. 무론, 成文 律[성문율]은 없겠지만, 불문율로서, 우리는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은 식반 법을 가지고 있다. 즉, 젓가치로든 숟가락으로든, 혹은 몽치로든, 喰物[식 물]을 떠서, 입까지 가져간 뒤에, 입을 적도로 벌리고, 그 식물을 입 속에 잡아 넣고, 입을 다문 뒤에, 식물 운반 기구를 뽑아 내고, 이빨로 씹으며 혀로 구을려서, 목구멍 속으로 잡아넣는 것― 이것이, 우리의 불문율의 식 반법이겠다. 그 가운데 小異[소이]는 있을 테지만, 대개는, (내가 처음으로 성문율로 발표한) 이 과정을 안 지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소설작법에 대하여도 꼭같이 말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것도 일정한 작법 에 律[율]하여 쓸 수가 없는 것으로서, 내가 이러한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쓰고, 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방식으로 쓴다 할지라도, 결코 어느 것은 방식에 맞고, 어느 것은 방식에 안 맞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小說作法[소설작법]’이라는 것은, 온전히 존재치 못할 자인가.

이렇게 볼 때는, 어떤 정도까지는 소설작법의 존재라는 것을 非認[비인]할 수 없는 것이다. 構案[구안], 문장, 사상, 필치, 묘사, 기교, 권모술, 무엇 무엇 등, 어떤 정도까지는 작자의 갑을을 무론하고(음식을 어떤 운반기로 입까지 가져가서, 어떤 과정을 지나서,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과 마찬가지 의),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 있다.

내가 이제 쓰려 하는 것은 그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공예품이 아니매, 이 소설작법을 마치 가구 제작법 책과 같 이 알고, 이 소설작법만 따로 외면, 소설가가 되려니 하는 마음으로 읽어서 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이 글은 어린 씨에게 비료를 부읏는데 지나지 못하 는 것으로서, 콩알을 땅에 심은 뒤에, 아무리 비료를 잘하고 잘 가꾼다 할 지라도 그 콩알에서 복숭아나무가 날 리가 만무하다.

다만 비료― 나는 이러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려 한다.

小說[소설]의 起源[기원] 및 그 歷史[역사]

소설에 대한 강화를 쓰기 전에 우리는 잠깐 소설의 기원과 및 그 역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까지에는 그 전생에 수렁이 시대가 있었고 그 전에 는 벌레의 시대가 있었고 또 그 전에는 알의 시대가 있었음과 마찬가지로 소설이 지금의 ‘소설’까지로 발달되기까지에는 별별 도정을 다 밟았겠음 을 짐작할 수가 있다.

소설의 전신으로서 우리는 洋[양]의 동서를 무론하고 산재하여 있는 騎士 [기사]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전신은 신화이겠고 신화의 어버이인 전설이며 전설의 어버이로서 ‘실재된 사실을 좀 과장시킨 이야기’들을 또 한 소설의 발달사를 생각할 때에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겠다.

시의 기원이 반드시 成文詩[성문시]라 하며 음악의 기원을 반드시 악기의 발명 후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오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소 설의 기원을 성문소설로서 하는 사람을 또한 웃을 수가 있다. 크로스 교수 의 ‘소설의 기원도 서사시며 희곡과 같이 오랜 것이라’고 설파한 것은 이 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소설의 기원을 생각할 때에 먼저 원시시대의 사람의 단순한 살림을 생각할 수가 있다. 그 사람이 아침에 활과 살을 들고 뫼에 사냥을 갔다가 갑자기 범이나 사자를 만날 때의 일을 우리는 상상하여 보자. 맹수는 배불 리 먹은 뒤에 무성한 삼림 속에서 곤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원시인은 활을 재어 가지고 한 살로써 그 맹수를 죽였다. 그리하여 그 짐승 을 자기의 마을에 가지고 돌아온 경우에 그 원시인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까. 그가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 나 그에게 만약 천재적 상상력이 있었을 것이면 맹수는 ‘입을 벌리고 그를 물려’ 하였을 것이겠다. 그리고 ‘이빨과 발톱이 그의 옷을 찢었을 것’ 이 겠다. 그것을 그가 ‘담대히’ 활로 쏘매 그 맹수는 ‘길길이 올라뛰며’ 그 때문에 ‘산야가 진동하였을 것’이겠다. 맹수가 낮잠을 자? 그런 것은 그는 눈치도 안 채이게 하였을 것이겠다.

여기 우리는 우리 인류 문화의 자랑인 ‘소설’ 의 그 기원을 瞥見[별견]할 수가 있다.

그 뒤의 발달은 간단하다. 처음에는 사실에 근거삼은 ‘이야기’가 인지의 발달에 좇아서 온전한 무근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뒤에는 그 이야기에 더 재미스러운 점을 붙이려고 하느님과 귀신이며 독갑이를 제조하고 요술장이 며, 장수를 만들어 내며, 이렇게 차차 발달되다가 ‘글자’ 라는 것이 생긴 뒤에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야기’ 를 글로 써서 다른 사람에게 읽게 한 것― 이리하여 불문소설에서 성문소설로 그 길은 진척되었다.

서양의 성문소설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그 중 오랜 것은 에집트 의 웨스트카알 파파이러스라 한다. 그것은 지금부터 육천 년 전쯤의 것으로 서 체옵스왕의 세 아들이 아버지를 유쾌하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앞에서 한 사람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 大旨[대지]로서 그 시대 사람의 단순한 구상을 볼 수가 있다 한다.

그 다음으로 현재한 가운데 그 중 오랜 것은 오천 년쯤 전의 것으로서 「농부의 이야기」와 다음 「셰트나 황자의 이야기」며 「바타의 이야기」 등으로서 모두 에집트의 피라밋 가운데서 발견된 것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그 당시의 한가한 사람들에게 심심풀이로 보게 하기 위하여 쓸 글들로서 구상이며 묘사며 아무 점으로든 볼 것은 없다 한다(농 부의 이야기 밖에는). 모두 다 황당무계한 요술장이의 이야기로서 원시인의 '이야기'를 다만 글자로 나타낸 데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리이스로 들어오면서 얼마간 진보되었다. 아리스티데 스의 「멀레싼 이야기」며 디오제니스의 「디니아스와 덴실레스」등 그리이 스 고대 이야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戀愛物語[연애물어]를 잡아넣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에집트에서는 사람의 흥미를 끄을기 위하여, 요술장이의 이 야기를 쓴 대신 그리이스에서는 연애로서 독자를 즐겁게 하려 하였다. 이야 기는 차차 사람의 정서를 주의하였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차차 ‘소 설’로 가까와 왔다. 그 뒤 헬리오도러스ㆍ롱거스ㆍ페트로뉴스 등 허다한 사람과 허다한 세월로서 중세기의 騎士物語[기사물어]로까지 발달되었다.

기사물어의 특점은 사람의 힘을 인식한 데 있다. ‘이 세상에 존재 못할 기괴한 일’ 을 쓴 점에서는 기사물어나 고대 에집트 물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으나 고대물어에서는 그런 경우에는 마력을 비는 대신 기사물어에서는 사람의 힘으로서 모든 장애를 쳐물렸다. 그리고 설명에는 말하기를 ‘나는 그런 큰 일은 못한다. 그러나 그(기사)는 위인이다’고….

그 뒤에 惡漢物語[악한물어] 전성도 있었으나 기사물어나 악한물어나 말하 자면 경우나 사건이나뿐으로 독자의 흥미를 끄으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흥 미있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얼마밖에 안 되는 것으로써 몇 백의 작가가 수 없는 작품을 발표한 뒤에는 흥미있는 사건이며 경우라는 것도 다 종자가 말 라 버리고 말았다. ‘이야기’도 인젠 새로운 국면을 발견하기 전에는 자멸 하게 되었다. 이때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나타났다.

몇 천 년을 품고 있던 알은 종내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야기’는 종내 「돈키호테」로서 소설로 변하였다.

‘이야기’ 의 시대에 독창적 문학적 형식으로 「아마디스 어브 고올」을 세상에 내어서 ‘이야기’ 의 한 새 국면을 준 스페인국은 또한 「돈키호 테」를 내어서 ‘이야기’ 의 더욱 새로운 국면으로 ‘소설’ 을 우리에게 주 었다. 「돈키호테」는 근대소설의 祖[조]다. 아직껏 모든 작품이 다만 내용 의 사건의 흥미뿐으로 독자에게 아첨을 할 때에 ‘성격이라는 것을 붓끝으 로 나타낼 수가 있다.’ 고 우리에게 가르친 처음 작이 「돈키호테」다.

그 뒤의 소설의 발달은 눈이 뒤집힐 듯하였다. 英[영]의 리챠드슨의 「파 밀라」가 발표된 뒤에 그 감상적 작풍의 반동으로 필딩의 견실한 작풍이 생 겨나며 동시에 각국에 유ㆍ무명의 작가가 우후죽순과 같이 생겨나서 당시의 식자로써 소설의 타락을 근심케까지 하였다. 그 뒤에 골드스미스가 나타나 서 온건한 필치를 보일 때에 獨[독]의 괴테며 무세유스, 리히텔까지 그 필 치를 모방하며 그 세력이 대단히 퍼졌다.

그 다음에 생겨난 것이 루소며, 에지월트, 더 내려와서는 유고, 고골리,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뒤마, 발자크, 대커리 등으로서 이 시대부터는 소설 이라는 것은 일국적 것이 아니고 국제적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차차 저절로 파가 갈리며 수법상 여러가지의 주장이 생겨서 플로베르 같은 寫眞主義[사진주의]를 취하는 자와 모파상의 객관을 취하는 자와 제임스의 세밀한 심리 묘사, 졸라의 하류사회 묘사, 톨스토이의 사실 주의, 스티븐슨의 괴기적 물어 무엇무엇 제각금 논의하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또한 특별히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으니 십구세기 초 부터 에드가 앨런 포오를 원조로 하여 시작된 한 소설의 형식, 단편소설에 대하여서이다. 취재, 결구, 묘사, 모든 방식을 아직껏의 소설작풍의 그물에 서 벗어나서 온전한 독립적 형식으로 쓰는 이 단편소설을 단지 광범한 소설 의 한 형식으로 볼지 혹은 기사물에서 소설로 진보된 것과 마찬가지의 혁명 으로 볼지 그것은 이후에 역사뿐이 증명할 것이겠지만 포오에 연하여 도데, 모파상, 체홉 등을 지나서 지금의 국제적 소설계는 단편소설 전성임은 그저 넘기지 못할 사실이다.

소설사를 쓰려 할 때에는 동양소설사에도 언급하여야겠고 필자의 초고엔 대략의 것을 써 두었으나 역사에 피곤한 필자의 붓대로 더 쓰기가 싫다. 하 므로 그만 제지하고 이후 기회를 기다리기로 한다.

나는 이상 破天荒[파천황]으로 간단히(독자가 요해키 어렵도록) 소설사를 썼다. 상세히 기억 안하여도 괜찮은 것으로서 자백하자면 필자도 참고서가 없으면 모를 일이지만 이제 쓸 소설 강화에서는 소설 발전에 대한 개념 뿐 은 있어야겠기야 독자에게 그 개념을 주려고 잡기 싫은 붓을 들고 어려운 글을 썼다.

構想[구상]

題材[제재]─ 소설을 쓰는 방법은 다만 세 가지 밖에는 없다. 먼저 이야 기의 가음(plot)을 만들어 가지고 거기 인물을 배치하는 것이 첫째. 먼저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을 만들어 가지고 그런 성격의 사람이면 전개될 만한 사건이나 국면을 발견하는 것이 둘째. 세째는 어떤 분위기를 붙들어 가지고 그 분위기에 맞을 만한 국면이며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

이라고 한 스티븐슨의 말은 일분의 반박할 여지가 없는 옳은 말이다. 어떤 사건과 인물과 배경― 이 세 가지로서 소설이 성립되는 것이매 그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붙들고서 그 나머지의 것을 보충한다는 것은 소설작법의 그 근본일 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이 항에서 거기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여보 겠다.

事件[사건]─ 소설에서 사건, 즉 이야기의 가음은 없지 못할 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졸라의 일파는 ‘소설은 기담이 아니매 그 構實[구실]이라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였으나 또한 소설은 감상문이나 스케치가 아닌 이상 에는 어떠한(복잡한 혹은 단순한) 통일된 이야기의 구실이 있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졸라의 각 작품에서 그 정확한 묘사며 지면에서 솟아 나올 듯한 분 명한 성격을 가진 각 인물을 보면서도 하품날 듯한 冗慢[용만]을 느끼며 때 때로는 참지 못하여 몇 페이지씩 뛰어 넘으며 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졸라의 작품에서는 통일된 이야기를 볼 수가 없다는 점에 있다. 로망 롤망 의 「쟝 크리스토프」도 그러하며― 성격뿐을 주로 하고 이야기의 가음에 온전히 주의를 안한 온갖 작품은 다만 남에게 하품을 나게 하는 한 지리한 이론에 지나지 못한다.

그런지라 우리는 소설작법을 討究[토구]하렬 때에 먼저 그 構案[구안]에 대하여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 내가 먼저 예를 들고자 하는 것은 春園[춘원]의 「無情[무정]」이다.

춘원의 「무정」을 나는 다만 그 플로트에 대하여서만 좀 써 보겠다. 「무 정」을 우리는, 每頁[매혈] 자자구구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다. 혹은 서너 줄 때때로는 數頁[수혈]씩 뛰어서 읽지 않을 수 없도록, 그 가운데는 작자 의 탈선이며 불용의가 있고, 심한 것으로서는 일 인물(황주 여학생이 기차 에서 영채와 만났을 때에 동승하였던 그 여학생의 오라비동생)이 不知去處 [부지거처]로 된 곳까지 있으나, 우리는 그 「무정」을 하는수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플로트 때문이다. 열 사람에 가까 운 인물이 등장하여 장면마다 사건마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이 그 종결의 장면을 향하여 바로 향케한 곳에(군데군데 탈선이 없지는 않지 만), 작자는 확실히 그 플로트를 살게 하였다 할 수 있다.

때때로 에피소드로 볼 수 있는 것(예컨대 월화의 이야기 같은 것)도 있으 나, 그것도 본선과 합할 때에는, 그 본 플로트의 기분과 합일될― 뿐더러 오히려 원 플로트에 뜻깊은 암시를 주어서, 이것으로서 일층 더 플로트의 생명을 선명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거기는 독자의 앞에 파 놓은 커다란 권모의 구렁텅이까지 있 다. 여주인공 박영채가 자기의 양어머니에게 유서를 써 놓고 ‘長靑流[장청 류]의 대동강에 몸을 던지려’ 평양으로 향한 뒤에 작자는 영채의 그림자를 감추어 놓았다. 과연 영채는 죽었을까. 작자는 이를 슬며시 감추어 놓고 몇 십 페이지를 모른 체한다. 그것이 호를 연하여 신문에 발표될 때에 독자는 얼마나 그 운명을 알려고 애를 썼을까. 무론 아무도 영채가 죽지 않았으리 라고는 짐작한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 영채가 죽어 버리고 말면 아직껏 발 표한 「무정」은, 한낱 신문 삼면 기사에 지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사건소설의 약점을 또한 우리는 「무정」에서 볼 수 있다. 춘원은 「무정」을 처음 服案[복안]할 때에, 그 대단원을 정확히 구안하여 두지 않 았던 듯싶다. 그는 어떻게 「무정」을 맺을지 망설인 형적이 있다. 재미있 는 사건이 머리에 떠오르므로 그 단원은 똑똑히 정하여 놓지 않고 시작하여 놓으면 이러한 실책을 만나기가 쉽다. 춘원은 그 작품 속의 인물을 너무 아 꼈다. 적어도 두세 사람은 죽어 버리지 않으면 단원이 안 될 것을 춘원은 그 인물들을 너무 아꼈다. 여기 「무정」의 치명상이 있다.

여기 반하여, 菊初[국초]의 「鬼[귀]의 聲[성]」을 펴볼 것 같으면, 모든 사건, 모든 인물, 모든 국면은 「귀의 성」의 맨 마지막 구,

‘시앗시앗

시앗 되지 마라’

라는 시앗새의 애처로운 노래로 흘러내렸다. 「무정」은 한 재미있는 사건 때문에, 서두와 결말을 만들어 낸 데 반하여 「귀의 성」은 애처로운 결말 을 조상키 위하여, 서두와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 이 두 작품에게 이렇듯 차이를 생기게 한 것이다.

想涉[상섭]의 「해바라기」며 稻香[도향]의 「별은 안거든 우지나 말걸」 등을 읽고 불만을 깨닫는 것은, 모두 다 미완성의 구안으로 작품을 완결하 여 버린 데 있다.

「해바라기」를 독파한 뒤에 먼저 느끼는 것은, 여주인공 영희가 무얼 하 러 신혼 이튿날 남편을 속여 가지고, 이전 애인의 무덤까지 신혼여행이라는 가면 아래서 가서, 거기 石碑[석비]를 해 세웠는가 하는 점이다. 악의던가?

악의면은 어떤? 작자는 이를 해결하기 전에 '끝'자를 썼다. 한낱 기사면은 모르지만, 소설로서는 큰 결점이 아닐 수 없다. 작자는 다만 두 글자를 더 썼다면, 「해바라기」는 얌전한 작품으로 남았을 것을, 그는 그 두 글자를 잊어버렸다. 두 글자, 즉, '미완'이라고.

그러나 훌륭한 플로트를 가진 「鬢上雪[빈상설]」, 「永遠의 夢想[영원의 몽상」, 「再逢春[재봉춘]」, 「花의 血[화의 혈]」등 신소설들이 대단히 짧은 생명밖에는 가지지 못한 것은, 어떤 까닭일까. 이것으로 보면, 소설의 전부는 플로트가 아니다. 그러면, 그 밖에 또 무엇이 있나.

性格[성격]─ 소설의 기초로 플로트를 잊지 못할 것과 같이 또한, 인물― 즉 성격을 잊을 수가 없다. 예전의 재미있던 모든 이야기들이 지금은, 돌아 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은, 거기는 플로트는 있었으나, 인물에 성격이 없었 으므로, 그 인물이 모든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였음에 있다.

그러나, 아까도 예를 든 것과 같이, 성격뿐으로, 플로트라는 것을 온전히 생각치 않고 써 나간 졸라의 모든 작품은 한낱 인물전람회로는 볼 수 있으 나, 지리하고 용만하여 독자로써 하품을 나게 하는 것을 보면, 또 한 성격 뿐으로 플로트를 도외시할 수가 없다.

성격뿐으로, 플로트라는 것을 온전히 생각치 않고 써 나간 작자 가운데, 투르게네프와 같은 대가도 있기는 있으나, 그의 모든 作[작]도, 완결에 가 서는 어찌 완결을 맺을지 몰라서 애를 쓴 점을 감추지 못하였다. 투르게네 프만한 대가이기에, 그만큼이라도 남의 눈을 속였지 군소 작가가 그를 모방 하였더라면 그것은 아무 흥미를 끄을 수 없는 인물전람회 기록에 지나지 못 하였을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것이라도 좀 주의만 하여보면 억지로 완결을 맺은 점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것으로 끝인가” 불만족한 독자는 아마 이렇게 묻겠지. “그 뒤에 라 블레키는 어찌 되었나? 리자는 어찌 되었나?” 이렇게 묻겠지. 그러나, 아 직 살아는 있다 할 망정, 인제는 벌써 인생의 전장을 은퇴한 사람들에게 관 하여 무슨 더 할 말이 있을까. 전문에 의지하면, 라블레키는, 리자가 몸을 감추고 있는 시골 수도원을 찾아가서 리자와 만나보았다 한다. 內陣[내진] 에서 내진으로 옮겨 갈 때에, 리자는 여승복으로 평탄하고 점잖은 얌전한 걸음으로, 라블레키의 곁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에게는 곁눈질도 하지 않았 다. 다만, 그가 서 있는 편 눈의 눈썹이 약간 떨리고 여윈 얼굴이 좀 아래 로 숙여진 듯하고, 염주를 검친 합장한 손가락이 아까보다 더 힘있게 쥐어 진 것… 쯤이었었다. 둘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어떤 것을 느꼈는지, 누 가 그를 알랴, 누가 그를 말 할 수 있으랴. 다만 인생에게 이러한 때가 있 고, 이러한 감정이 있으며, 사람은 다만 그것을 지적할 수가 있을 뿐― 그 이상 추구할 것이 아니라. (투르게네프 「貴族[귀족]의 집」에서) 이것은 마치 활동사진의 ‘The End’의 바로 전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자연 단원이 아닐까. 투르게네프 자기도, 그 점은 확실히 안 듯싶다. 그렇지 않 으면

‘이것으로 끝인가 운운’

의 구는 존재할 필요며 이유가 없으니까.

그만한 부자연한 점을 이만큼이라도 감춘 것은, 투르게네프의 수완이 비상 하였기에이지, 그렇지만 않았더면 그것은 다만 한낱 인물전람회, 혹은 단편 적 사실전람회 기록에 지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雰圍氣[분위기]─ 우리는 이상에서 플로트뿐으로도 완전한 소설이 못 되는 점을 구명하였다. 성격을 주로 삼고 구상을 종으로 한다 할지라도 구상까지 완성된 뒤에 처음으로 붓을 들어야 될 것이니, 그러한 결과로서 생겨난 작 품을 들자면 알치바셰프의 「사닌」이며, 다눈치오의 「죽음의 勝利[승 리]」등이 그 부류에 속할 것이요, 구상을 주로 삼는다 할지라도 거기 맞는 성격의 인물을 붙들어서 종으로 배치를 한 뒤에야 완전한 작품을 이룰지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며, 톨스토이의 「부활」이 그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플로트와 인물뿐으로는 또한 한 전기나 인물의 사 업록에 지나지 못할 것으로서 소설이 되기 위하여는 그 전체를 포용한 분위 기라는 것이 있어야 하겠다.

역사가 ‘인생의 사진’이요, 소설이 ‘인생의 회화’라는 것을 시인하려 면 소설에는 분위기라는 것이 없지 못할 것임을 또한 非認[비인]할 수 없 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싼 커다란 분위기는 결코 네프류도프나 카츄샤 가 아니다. 「부활」은 인류 번민의 축도다.

李人稙[이인직]의 「귀의 성」을 들고 일어선 커다란 그림자는 결코 김 승 지며 그의 마누라, 혹은 춘천집과 강 동지 내외가 아니다. 「귀의 성」은 첩 때문에 온갖 비극과 파란이 일어나는 당시의 귀족 사회의 비통한 부르짖 음이다.

‘시앗시앗

시앗되지 마라’

라는 시앗새의 소리는 결코 춘천집의 원혼인 한낱 시앗새의 노래가 아니고, 당시의 샘 많은 마나님들에게 희생받은 모든 첩의 원혼의 부르짖음이다. 조 선에 처음으로 寫實小說[사실소설]을 내어놓은 이인직은 또한 우리에게 '어 떤 분위기를 붙들어 가지고 거기 적합한 인물과 사실을 만들어 낸 소설', 배경소설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상 간단하니 구상 작성의 세 가지 요소를 설명하였다. 여기는 이제 쓴 그 세 가지의 항목을 범벅으로 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보겠다.

위에 쓴 바로도 자세히 씹어 보면 요해는 하겠지만 사건, 인물, 배경, 세 가지에서 어느 점을 기점으로 삼든 그것은 관계 없으나, 그 세 가지가 화합 하여 한 완전한 소설 초안으로 되기 전에 붓을 들었다가는 완성되는 작품은 불명료하거나 불철저하거나 불완전한 것이 안 될 수가 없다. ‘한 구씩 한 구씩 복안하여 마지막의 한 구까지 암송한 뒤에야 처음으로 붓을 잡는다’ 는 만년의 톨스토이의 집필법은 반드시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일구 일구를 복안.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한낱 무서운 말일지는 모르 나 창작을 하여보려고 마음을 낸 일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이다. 온 한 편을 전부 한 구 한 구씩 복안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 강조점― 귀중한 대목뿐은 한 구 한 구씩 복안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전 어떤 작품에서 사건과 인물의 배경의 구안이 전부 끝난 뒤에 그 작의 여주인공의 자살로서 결말을 맺기로 하고 붓을 잡은 일이 있다. 어떤 잡지에 2회에 나누어 발표를 한 것인데 제1회에 벌써 여주인공의 자살과 및 그 방법이며 장소까지 암시하여 놓았다. 그러나 제2회째, 정확히 그 사건을 그려 나아가는 데 따라서 처음에 자살은 너무 잔혹치 않나 하는 생각이 났 다. 붓이 진척되자 그 생각은 차차 더하여 마침내 나는 그 주인공을 죽이지 못하였다.

또 하나 그 비슷한 경험으로― 나는 「마음이 옅은 者[자]여」의 주인공의 안해와 아들을 결코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까, 그 모자를 죽이 지 않으면 결코 단원이 되지 않는 것을. 사실 나는 그때 눈물을 머금고 그 모자를 죽였다.

작품 속에서 활약하는 인물들도, 어떤 성격과 인격을 가진 유기체이매 아 무리 그 작자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그들을 처분할 수 없다. 작품 중도에서 작자가 그 작품 내에 활약하는 인물의 의지에 반하여 제 뜻대로 붓을 돌리 면 거기서는 모순과 자가당착 밖에는 남을 것이 없다.

그런지라, 톨스토이의 말을 본받아서 두 번 세 번 사건과 인물과 배경을 결합시키고 결합시켜서 집필중에 작품 내의 인물로써 반역적 행동을 취치 않게 하는 데 구상의 필요가 있다.

플로트에 가장 귀한― 없지 못할 것은 단순화와 통일과 연락이다. 세가지 의 말(단순화, 통일, 연락)이 다 제각기 뜻이 다른 듯하지만, 추구하면 같 은 것에 지나지 못한다. 복잡한 世相[세상]에서 통일된 연락 있는 어떤 사 건을 집어 내어 소설화하는 것, 이것이 단순화이겠다. 소설은 인생의 사진 이 아니고 인생의 회화인 이상에는 세상에 존재되고 생겨나는 모든 사건(정 처 없고 연락 없이 분규한)이 그대로가 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 데서 뽑아 낸 어떤 연락 있고 통일된 한 토막의 사건뿐이 소설의 재료로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단수화라는 것은 이것을 뜻함이다. ‘소설은 인생을 단 순화한 것’이라는 것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런지라 플로트에 여러가지 쓸데없는 군티며, 에피소드 등을 가하여 소설 을 다만 길게 하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더러 나아가서는, 그 작품을 죽 이는 행동에 지나지 못한다. 목적지를 향하여 곁눈질 안하고 똑바로 나아가 는 것― 이것이 소설가로서의 가장 영리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플로트에 성공한 모든 대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각각 성격이 다른 인물 수십이 出場[출장]을 하고, 총 출장 인물 수백 명이며, 세계 최 장편소설의 명칭이 있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우리가 볼 때에 그 분규되고 얽힌 수없는 사건이 일견 매우 복잡한 듯하나 다시 한번 자세히 내용을 점검할 때에 우리는 그 너무 단순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가로 되,

“사람은 다만 떠들고 싶어서 떠든다. ‘참’이라 하는 것은 침묵과 무관 심 아래 감추어져 있느니라.”

고, 위고 「哀史[애사]」그러하매, 대커리의 「허영의 거리」그러하며, 도 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그러하며, 일견 복잡한 듯한 모든 명 작도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연락 있는 통일된 단순화한’ 인생의 일편면 에 지나지 못한다.

군소 작가의 실패는 대개 인생 그대로의 복잡한 면을 감추지 않고 나타내 려 하며, 혹은 일시의 흥미 때문에 연락 없는 행동(주인공의 것이든 누구의 것이든)을 삽입하여 플로트의 통일을 깨뜨리는 데 있다. 통일, 단순화, 연 락 이것은 소설 구안상 없지 못할 것이다.

文體[문체]

나는 이상 소설의 구상에 대하여 썼다. 그러면 구상이 끝난 뒤에 먼저 마 음에 두어야 할 문체에 대하여 좀 써야겠다.

문체를 구별하여 일원묘사체, 다원묘사체, 순객관적 묘사체, 세 종류로 나 눈다.

一元描寫[일원묘사]─ 일원묘사라 하는 것은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一元描寫式[일원묘사식]〕 〔一元描寫 B形式[일원묘사 B형식]〕 作[작 作 者자 者

│ ┌─────────────────┐

主주 主 A B C D 要요 要 ¦ ¦ ¦ ¦ 人인 人 ┌──┐ ┌──┐ ┌──┐ ┌──┐ 物 물] 物 主 B C D 主 A C D 主 A B D 主 A B C ┌─────┐ ┌───┐要 要 要 要

A B C D E F A B C D 人 人 人 人 物 物 物 物

이상한 如[여]한 자로서, 먼저 그 A형식에 대하여 설명을 가한 뒤에 B형식 을 설명하여 보려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원묘사라는 것은 경치든 정서든 심리든 작중 주요 인 물의 눈에 비친 것에 한하여 작자의 쓸 권리가 있지, ―주요 인물의 눈에 벗어난 일은 아무런 것이라도 쓸 권리가 없는― 그런 형식의 묘사이다.

예를 들자면,

사흘 뒤에 K는 成從[성종]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필자 주―이때는 K는 대 단한 고뿔로 앓고 있음)

그가 자기집까지 올 동안은 자기 의식이랄지 남의 의식이랄지 모를 의식을 가졌었다. 그는 그동안 추웠는지 더웠는지 똑똑히 알지 못하였으되, 춥다 생각은 하였다. 長箭[장전]서 칠팔십 톤 되는 조그만 증기선을 탈 때에 작 은 배로다 생각하였다. 밤 열시에 떠난다던 배가 이튿날 새벽 두시에야 떠 났다.(중략)

경원선 열차에 올랐을 때는 채찍 같은 비가 내려쏘기 시작하였다. 가뜩이 나 뫼에 둘러싸여서 어두운 데는 비로 말미암아 더 어두워져서 해금강의 그 여막보다도 못하면 못하지 나을 것은 없었다. 이때에 K는 C(동행하는 친구) 의 존재까지 잊었다. 때때로 C가 얼핏얼핏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 순서 없 이 된 것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범벅천지였다. 램프불은 어두운 가운데 벌―겋게 반득인다. K에게는 (왜인지) 그것이 별로 불쌍하고 애처롭게 보였 다. 때때로 터널도 있고, 왼편으로 보이는 시내에 비오는 것도 보이고, 유 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들리되 이것 역시 무엇인지 모를 범벅천지였었다.

맞은편 걸상에는 여행가인 듯한 서양 사람이 하나 앉아서 턱을 팔에 고이 고 정기 없는 눈을 어두운 일기 때문에 더 멀―거니 뜨고, 그 큰 동자의 창 으로 K를 들여다본다. K에게는 이것이 별로 무서웠다. 그 동자를 피하려고 머리를 돌리면 그 동자는 뺨에 와 닿는지 뺨이 근질근질하다. 같이 보면 그 서양 사람은 머리를 돌리리라 하여 마주 보면, 그는 멀―건 눈을 더 크게 뜨고 경쟁을 하자 한다. …(하략)

(東仁[동인]작 「마음이 옅은 者[자]여」에서)

이상과 같이 K와 C가 경원선 열차에 탔을 때에 K는 고뿔 때문에 정신 없이 지냈다 할지나 정신이 똑똑한 C는 모든 것을 다 의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원묘사에서는 주요 인물 이외의 인물의 눈에 혹은 마음에 비친 사물은 아 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작자는 쓸 권리가 없다. 경원선 열차에서 C가 횡사를 하였다 할지라도 K가 보지만 못하였으면 작자는 C의 횡사를 쓸 권리가 없을 지니, 「마음이 옅은 자여」에서 다시 한 군데 예를 들자면,

K는 잔교에 내려서 바다로 향하여 돌아서서 그 넓은 바다 기운을 가슴껏 들여마시면서 구부러지고 구부러져서 더 넓은 조선해와 접한 장전항을 바라 볼 때에 마음에 떠오르는 일종의 외로움과 무한 큰 상쾌를 깨달았다. K 는 C를 보았다. C도 눈에 난란한 빛을 내고 아침 빛에 반짝거리는 반사광 에 낯을 쏘이면서 퍼졌다 줄었다 하는 바다의 해와 만년의 비밀을 감추고 있노라는 바다의 속삭임을 듣고 있다.

“아아.” K는 돌아섰다.

이상과 마찬가지로, C가 아무리 그 ‘만년의 비밀을 감추고 있노라’는 바 다를 바라보았다 할지라도 K가 C를 향하지만 않았으면 작자는 그것을 쓸 권 리가 없다.

가장 쉽게 말하자면 일원묘사라는 것은 ‘나’ 라는 것을 주인공으로 삼은 일인칭 소설에 그 ‘나’ 에게 어떤 이름을 붙인 자로서 늘봄의「화수분」의 주인공인 ‘나’ 라는 사람을 ‘K’ 라든 ‘A’ 라든 이름을 급여할 것 같으면 그것이 즉 일원묘사형의 작품일 것이며, 따라서 일원묘사형 소설의 주요 인 물(「마음이 옅은 자여」의 ‘K’ 며 「약한 자의 슬픔」의 ‘엘리자베트’ 며 「暴君[폭군]」의 ‘순애’ 등)을 ‘나’ 라는 이름으로 고쳐서 일인칭 소 설을 만들 것 같으면 조금도 거트짐 없이 완전한 일인칭 소설로 될 수가 있 는 것이다.

일원묘사에서는 작자는 그 작품 중의 주요 인물인 ‘주인공’ 을 통하여서 만 모든 국면을 볼 수 있고 (도해 참조), ‘주인공’이 미처 못 본 일이든 가, 주인공 이외의 인물의 심리 등 주인공이 寸度[촌도]치 못할 사물 등은 작자 역시 촌탁할 권리가 없다.

一元描寫[일원묘사] B형식─ 가까운 예로 憑虛[빙허]의 「지새는 안개」가 있으니 즉 「지새는 안개」의 주인공은 ‘창섭’ 이라는 청년이지만, 전체의 문체를 볼 때에 아까 설명한 바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즉 B형 일 원묘사(도해 B형 참조)의 부에 들 것이니, 작품 전체를 여러 도막에 끊어서 한 도막씩 그 도판으로 설명을 하자면 1頁[혈]에서부터 14頁[혈]까지의 주 요 인물은 ‘정애’이며, 14頁[혈]서부터 21頁[혈]까지는 ‘화라’ , 21頁 [혈]부터 32頁[혈]까지는 도로 ‘정애’ , 이와 같이 절 혹은 장을 따라서 주요 인물을 바꾸어 가면서 쓰는 법이니, 최근의 서양의 장편소설은 대개 이 형식을 좇아 한다.

多元描寫[다원묘사]─ 想涉[상섭]과 稻香[도향]의 쓰는 문체가 즉 이것이 니, 작자는 때와 경우를 구별치 않고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그 작중에 나 오는 어느 인물에게든 묘사의 筆[필]을 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도해로 설 명하자면 이와같다.

<그림>

D C B A

A B C D

例[례]―

(상략)― 영희가 사끼짱이라는가 하는 계집애의 일을 이처럼 열심으로 묻 는 것이 순택의 눈에뿐 아니라 하녀가 보기에도 매우 이상하였다. 그러나 이 능구렁이 같은 주인 마누라만은 짐작할 수 있고 또 영희 앞에서는 아무 쪼록 사끼를 가엾게 생각하도록 말하는 것이 필경에 이익될 것은 없다 하더 라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순택이는 도무지 어떻게 된 까닭인지 몰라서 귀만 귀울이고(하략)

(想涉[상섭], 「해바라기」에서)

(상략) 며칠이 지났다. 양천집의 험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골서 아무 렇게나 자라난 데다가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서 배운 것이 없고 본 것이 없 어서 어른 아이 알아볼 줄을 모르고 말버릇이 없다. 거기다가 성미가 뾰롱 뾰롱하고 소갈머리가 없어서 어떤 때는 주인 안해의 눈짓하는 것도 몰라보 고 제멋대로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상을 찌푸리고 코웃음을 친다.

어떤 때는 통 내외하고 다니는 친구가 와서 보고 주인 귀에다 몰래, “내보내게. 못쓰겠네. 첫째 남 볼상이 사놔.”

하며 권고를 한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나도 아네. 하지만 온 지가 열흘도 못 된 것을 어떻게 내보내나. 차차."

하고 대답만 하여두었다. 이 눈치를 챈 주인 안해는 그 친구를 몹시 미워하 기 시작하였다.

“별 걱정을 다하네. 오지랍도 꽤 넓지. 남의 집 살림 걱정까지 하게.” 하며 옆에다 세워 놓고 욕을 할 적이 있었다. 그럴 적마다 주인은 치밀어 오는 분을 참는다. 학교 다니는 열두 살 먹은 큰아들도 걸핏하면, “찍어뱅이 애꾸눈이.”

하고 놀려 먹는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몽둥이 찜이 내린다. 그것이 도화선 이 되어 내외 쌈이 된다.(하략) (稻香[도향], 「계집하인」에서) 이상과 같이 작자는 작품 중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심리를 통관하며, 일동 일정을 다 그려 내는 것을 다원묘사라 한다. 주요 인물이 보도 듣도 못한 일이라도 그 사건에 관련되는 일일지면 작자는 쓸 권리가 있으며 심한 경우 에는 그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하게까지 불필요한 인 물의 관점이며 심리를 그려 낼 권리까지가 작자는 가졌으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며 이전의 모든 장편은 이 부류에 속한다.

純客觀的[순객관적] 描寫[묘사]─ 이것은 작자는 절대로 중립지에 서서 작 중 인물의 행동뿐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작중에 나오는 인물의 심리는 직접 묘사치 못하며, 다만 그들의 행동으로 심리를 알아 내게 하는 것이니, 근대 의 최단편소설에 이런 예가 많으며 더욱 더 체홉의 작품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방식이다.

優劣[우열]─ 이제 기록한 그 방식들의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못하다 고, 그것은 한 마디로 할 수 없는 자로서, 제각기 일득일실이 있다. 일원묘 사는 무론 간절하고 명료한 점은 다른 방식보다 낫다 할지나 주요 인물 이 외의 인물 행동이며 심리를 쓸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 행동이며 심리를 주 요 인물의 시점권 내에 끄을어들여야 하니까 저절로 얼마간의 모순이 생기 지 않을 수 없다. 그 好例[호례]로서 憑虛[빙허]의 「지새는 안개」의 150 頁[혈]부터 151頁[혈]까지를 들 수가 있으니 화라라는 계집애가 창섭이라는 청년의 정조를 빼앗기 위하여 창섭을 술에 취케 하였는데 창섭은 그만 술에 취하여서 잠이 들었다.

작자는 창섭을 주요 인물(그 절의)로 삼아서 아직껏 써 왔으니깐 이 순간 의 화라의 심리를 써 낸다 하면, 거기는 일원묘사로 거의 파탄이 생길 것이 다. 그러나 이 순간의 화라(주요 인물이 아닌)의 심리를 작자는 또한 쓰고 싶었다. 이런 경우에 어쩌나? 이런 때에 임하여 작자는 화라의 독백으로써 화라의 심리를 나타내려 하였다.

“그 새 잔담, 그 새 잔담. 이런 망할 일 좀 보아. 사람이 곧 기가 막히겠 구먼. 그러면 내 말도 도무지 아니 들은 모양이지. 공연히 술을 권해서, 공 연히 술을 권해서… 그래도 정신이 있어야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구 면.” 혼자 이런 말을 중얼 거리며 방안을 왔다갔다 한다.

화라의 이 행동은 무론 독자에게 부자연하다는 감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 나 일원묘사 형식을 써 오던 작자로서는(주요 인물인) 창섭 이외의 인물의 심리는 촌탁할 권리가 없으니깐 이런 부자연한 필법으로써라도 그때의 화라 의 심리를 나타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점이 일원묘사의 약점이고―.

다원묘사는 작중의 주요 인물이고 아니고를 불관하고, 아무의 심리든 작자 가 자유로 쓸 수 있으므로 독자로서 번잡한 감을 일으키게 하며, 나아가서 는 그 소설의 역점이 어디 있는지까지 모르게 하는 일이 생기니, 상섭이 「해바라기」를 일원묘사의 방식으로 쓰기만 하였으면 좀더 명료한 작품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탈선, 주지의 몽롱, 성격의 불명료, 이것들은 다원 묘사의 작품에서 많이 볼 것이다.

순객관적 묘사는 또한 3,4頁[혈] 이내의 단편에는 응용하여 효과를 얻는 일이 있으나 그 이상의 작품이 되려면 절대로 불가능이라 할 수가 있다.

이와같이 각 방식이 제각기 일득일실이 있으매 소설을 쓰려 하는 사람은 미리 잘 연구하고 자기의 필법, 혹은 소설의 플로트와 비교하여 가지고 자 기에게 적합한 방식을 취할 것이지, 누가 이것을 취하라 저것을 취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朝鮮文壇[조선문단]> 제7~10호, 19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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