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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문학

방정환 동생을 찾아서 [하]

by 역달1 2022.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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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야 급행 경성 발’

전보용지에 쓰인 것을 몇 번이나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창호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두근두근하면서 기차 시간표를 보고 보고 하였습니다.

경성을 떠나 중국 봉천을 향하는 급행차로는 저녁 7시 20분에 특별급행차 가 있고, 10시 50분에 떠나는 보통 급행차가 있습니다.

저녁 7시 20분과 밤 10시 50분 그때까지에는 아직도 7,8시간이나 남아 있 었으나 마음을 졸이고 있는 창호는 지금 이 길로 바로 정거장으로 나아가 지키고 있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서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첫째 그 전보지에 씌어 있는 것이 쓰레기통에서 얻은 것이니 분명히 순희를 데리고 간다는 것인지 아닌지 그것이 분명치 못한 일 이고, 기차 시간도 이따가 저녁 일곱 시인즉 지금 오정도 치기 전부터 나갈 것이 없은즉, 지금은 정거장 앞에 순사에게 주의하라고 전화로 일러두고 이 따 5시쯤 지나서 형사순사 세 사람을 내어 보내겠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창호와 창호의 아버지는 낙심이 되어서 지금부터 같이 나가 지켜 주기를 애걸애걸하였으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또 억지로 어찌하는 수도 없 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자기네들끼리만 돌아서서 정거장을 향할 때에 어린 창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여러 날의 고생과 피곤은 사실 어린 몸에 너무도 지나친 고생이었지만, 이 제 정거장에서 설사 순희를 데리고 도망하는 청국 놈들을 붙잡는다 하더라 도 어떻게 할 힘이 부족한 것을 생각할 때에 어린 창호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야속한 것을 느끼었습니다.

정거장에 이르렀습니다. 낮의 정거장은 퍽 한산하고 쓸쓸하였습니다. 창호 는 아버지와 외삼촌 두 분으로 하여금 정거장 목을 지키게 하였으나, 그러 나 모두 늙어가시는 어른들이라 미덥지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차가 떠날 때 복잡한 사람 중에서 그놈들을 만나 싸울 생각을 하니, 가슴은 점점 더 두근거려 오고 눈은 샛별같이 빛나오지만, 정작 그놈 들을 만나면 어떻게 싸워서 순희를 빼앗을까 생각할 때에 가슴이 답답하였 습니다.

사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들을 만난다 하여도 도리어 뻔히 보면서 놓쳐 버릴 염려밖에 다른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오냐, 학교로 전화를 하자!’

하고, 창호는 소리치며, 정거장 밖으로 뛰어나가 자동 전화를 찾아가서 학 교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랑해 주시는 선생님과 걱정해 주는 동무들을 만나지 못한 지 벌써 여러 날, 이제 전화로 나마 학교에 소식을 전하게 되니, 갑자기 시골에 있던 어 린 색시가 본가에 돌아온 것 같은 기쁨이 가슴을 뻐근하게 하였습니다.

"아, 최 선생님 좀 여쭈어 주세요. 급한 일입니다. 네, 네, 최 선생님이십 니까? 저는 창호올시다. 예, 창호올시다."

사랑하시는 주임 선생님은 창호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습니 다. 그리고 죽었던 동생이나 조카나 만난 것처럼 기껍고 반가워서 어쩔 줄 을 몰라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창호냐? 정말 창호냐?"

하고 되짚어 묻는 소리를 들을 때 창호의 가슴은 메어 뻐개지는 것 같고 눈 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직접 만난 것 같으면 선생님의 무릎에 얼굴을 파 묻고 소리쳐 울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학교에 못 가는 그 동안에 몇 번이나 죽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순희가 갇혀 있는 곳과 또 그놈들이 오늘 저녁 급행차로 도 망하는 걸 탐지해 알고, 지금 남대문 정거장에 나와서 지키고 있습니다. 네 네, 그런데 경찰서에서는 나오기는 나올 터인데 저녁에 나온다고 지금은 아 무도 없습니다."

허둥허둥하는 소리도 뒤끝은 거의 울음 소리였습니다. 저쪽에서도 선생님 은 몹시 걱정하시는 눈치였습니다.

"선생님, 고만 그치겠습니다. 우리 반 동무들에게도 제가 잘 살아 있다고 일러 주세요. 네,네, 안녕히 계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니 정작 하려던 말은 잊어버린 것 같았으나, 그냥 그길로 다시 정거장으로 뛰어갔습니다.

점심때의 정거장은 몹시 한산하였습니다. 푸른 모자 쓴 역부 두 사람이 대 합실에 앉아서 낮잠을 잘 뿐이고, 심심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심 때가 지나고 오후2시가 지나니까 정거장에는 차차로 사람이 모여들고 부산 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녀 학생, 갓 쓴 늙은이, 양복쟁이 신사, 촌색시, 신여성, 그런 사람들 틈에는 간간이 보기에도 징그러운 생각이 나는 청국 놈들이 누더기 잘 이은 이부자리를 짊어지고 차표를 사는 것도 보이기 시작 하였습니다.

창호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놈들이나 아닌가 하여 가슴이 성큼성큼 하였습니다.

차차로 정거장 안은 더욱 더욱 복잡하여져서, 여간 하여서는 아는 사람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수상한 놈들의 수효도 차차 늘어가기 시작하였습 니다.

창호의 가슴은 겁을 먹어 방망이질 치듯 두근거렸습니다. 그놈들 청국 놈 이 지금이라도 오는 듯 오는 듯싶은데, 이런 때 경찰서에서라도 나와 주어 야지 우리끼리만 있다가 맞닥뜨리면 어떻게 하나 하여 얼굴이 누렇게 되고 정신이 아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때 언뜻 창호의 눈에 비추인 것! 창호는,

“오!”

소리를 하면서, 그 많은 사람의 사이를 헤치고 제비같이 뛰어나갔습니다.

아아, 반가워라! 감사해라! 뜻도 하지 아니한 최 선생님이 머리 굵은 학생 10여명을 데리고 경관이나 군대의 일대(一隊)처럼 급한 걸음으로 정거장 안 을 향하여 들어오지 않습니까!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창호는 기쁜지 감사한지 어찌할 길을 모르고 그의 전신의 피가 내어 뻗쳐 나올 것 같이 끓 어오를 뿐이었습니다.

“아, 창호야!”

그를 보자마자 일제히 부르며 달려드는 그들의 창호의 예쁘던 얼굴이 몹시 상한 것을 보면서 그이 마른 손목을 잡을 때에는 모두가 손이 떨리면서 눈 물이 글썰글썽하였습니다.

“하학종을 치자마자 교장에게 이야기도 아니하고 넌즈시 왔다.” 하는 최 선생님의 말씀은 깊이 없고 한이 없는 힘과 감격을 느끼게 하였습 니다.

최 선생님은 물론이고 십여 명 추리고 추린 민활한 학생이 한 사람도 순희 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또 오기 전에 최 선생님에게 여러 가지로 탐색하는 방법까지 자상히 듣고 물 부어 샐 틈 없이 짜여 가지고 온지라, 1 조, 2조, 3조로 나뉘어 그 넓은 정거장 구석구석과 모퉁이 모퉁이를 지키고 있으면서 이상한 청국인을 주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미리 사 가지고 온 호각을 손에 쥐고, 여차할 때 불면 일시에 그리로 모여 달려들기까지 약속이 작정되었습니다.

다행! 이리하여 그 넓은 정거장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들끓어도 쥐 한마리 빠져 나갈 수 없이 거미줄이 쳐지게 되었습니다.

3, 4, 5시가 지나도록 아무런 변동이 없었으나 차차 7시가 가까워 오는지라 모든 사람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두근거리기 시작하면서 눈은 더욱 더욱 빛 나갔습니다.

그때 별안간 정거장 한 귀퉁이에서,

“호르륵!”

하고, 귀를 찌르는 호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딘가, 어딘가!”

하고, 일동은 호각 소리가 난 곳을 뛰어갔습니다. 맞닥뜨려 싸울 때가 온 것이었습니다.

때는 5시 15분!

-《어린이》 3권7호 (1925년7월호).

5시 15분!

점점 복잡해 가는 정거장 한구석에서 별안간 호각 소리가 일어나자, 모퉁 이 모퉁이에 지키고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어딘가 하고 달려들어 본즉, 곳 은 3등 대합실 옆이고 호각을 본 사람은 창호였습니다.

‘순희를 데리고 도망하던 청국 놈들이 발견되었나 보구나!’

생각하고 달려든 일동은

“어디있니? 그 놈이 어디 있어.”

하고, 숨찬 소리로 급급히 물었습니다.

그러나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몸을 움츠리고 두 눈만 무섭게 동그랗게 뜨고 숨어 있는 창호는,

“쉬!”

하고, 말리고 나서 다시 작은 소리로,

“저기 저 짐을 부치는 곳에 세 청국 놈이 있지? 저 놈들이에요. 순희를 가두고 또 나를 가두던 놈이에요!”

보니까 과연 짐 부치는 곳에 보기도 흉악하게 생긴 청국 놈 셋이서 짐을 부 치노라고 황황히 떠들고 있었습니다.

“저 무지렁이 같은 놈들이 우리 순희를 도둑질해 갔구나.”

하고 생각할 때에 학생들의 손은 주먹이 쥐어지고 가슴은 울뚝거렸습니다.

“저까짓 놈들 당장에 잡아 낚자구나!”

하며 우루루 달려가려 하였습니다. 창호와 최 선생님은 깜짝 놀라 그것을 말리면서,

“아직 미리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저놈들이 순희를 왜 감춰 가지고 가는 지 그걸 알아야지. 미리 지금부터 달려들기만 하면 정말 순희는 못 찾게 될 것 아니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일행은 단 세 사람뿐이고, 순희나 누구나 데리고 가 는 모양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쩐 일일까, 어쩐 일일까 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굴릴 때 말은 하지 아니하나 다 각기,

‘혹시 저 짐 속에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한결같이 생겼습니다.

그래 여러 사람의 주목은 자연 그놈들의 두 개의 짐짝으로 쏠리데 되었습 니다.

그리고 그 속에 혹시라도 가여운 순희가 들어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 자기 네가 갇혀 있는 것처럼 숨이 갑갑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달려들어서 저놈들의 짐짝을 빼앗아 풀어 보면 그만이지요. 저깟 놈들 두들겨 죽이면 어때요.”

학생들의 주먹은 부르르 떨렸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에도 이를 악물 고 서 있는 창호의 눈에는 눈물이 흥건하였습니다.

“싸울 때가 되면 굳세게 싸워야지. 그러나 나는 저 짐 속에 순희를 넣었 으리라는 생각지 않는다.”

최 선생님은 이렇게 급한 때에도 침착하신 어조로, 그러나 힘있게 말씀하 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손으로 들고 가는 짐이면 모르거니와 짐으로 부쳐서 곳간차에 싣고 갈 것인데, 거기다 넣었을 리가 없을 것 같다.”

하셨습니다.

딴은 그럴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짐짝에는 단념하고, 다시 아까처럼 구석 구석에 갈라서서 저들 세 놈의 거동과 그리고 새로 오는 놈들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5시 23분!

청국 놈들은 마침 가지고 있던 짐짝을 화물에 맡기고 돌아설 때에 이편의 학생 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 화살같이 날쌔게 복잡한 군중의 틈을 비집 고 대합실 옆 창호에게로 뛰어와서,

“큰일 났네, 크 큰일 났어!”

하였습니다.

“응,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지 몰라 창호도 가슴이 성큼하였습니다.

“봉천으로 간댔지? 봉천이 다 무언가? 우리가 속았네. 저놈들은 지금 인 천으로 가는 모양 일세.”

아주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그래 창호가,

“인천이 무엇인가? 내가 분명히 봉천으로 간다는 전보용지를 보았는 데…….”

“아니야. 내가 지금 일부러 가까이 가서 그 짐짝을 보았더니, 인천행이라 는 전표가 달려고 또 저놈들이 가지고 있는 차표도 인천표인데.” “그럼 큰일났네, 속았네.”

하고, 창호는 얼굴이 파래져서 급급히 호각을 불어 동무들을 모았습니다.

5시 40분에 인천행 차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므로 정거장 안은 북적북적 하는데, 창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참으면서 선생님과 아버지와 외 삼촌과 동무들과 어찌해야 좋을지를 의논하였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전보용지까지는 보았건마는, 어제 그놈 중의 세 놈이 이상 한 짐짝을 두 개나 가지고 인천으로 떠나니, 순희를 데리고 중국으로 도망 하려면 물론 봉천으로 가지마는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기도 흔한 일이 라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작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천 차는 이제 곧 떠날 것이요, 봉천 차도 얼마 후면 떠날 것이니. 인천 으로 쫓아갔다가 봉천으로 가는 것을 놓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인천 으로 떠나는 길도 안 쫓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나누지요, 두 패로 나눠서 두곳을 다 쫓아가기로 하지요.” 의논 중에 벌써 역부는 큰 소리로.

“인천 가실 이 진셍 호멘…….”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동은,

“어서 어서 차표를 먼저 사지요. 까딱하다가는 놓칩니다.”

허둥허둥하면서, 인천으로 쫓아갈 사람을 정하는 동안에 차표 다섯 장을 사 오게 하였습니다.

인천 가는 세 놈은 이미 얼굴을 알아 놓았으니 아무나 쫓아가도 관계치 않 고, 창호는 경성에 있어야 봉천으로 가는 차를 조사하겠으므로, 인천에는 최 선생님과 외삼촌 학생 세 명, 도합 다섯이 가기로 하고 급급히 쫓아 들 어가서 놈들이 탄 차에 모르는 체하고 올라탔습니다.

그 동안에라도 여기서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인천 ○○일보 자국 내 최진환 선생께로 전보를 치고, 인천에서 급할 때는 경성역 정거장 삼등 대합실 안, 김창호에게로 전보를 칠 것까지 주도히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섯 사람의 불같은 눈이 저희들의 일거 일동을 지키고 있건마는 놈들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망하는 패 쫓기는 패를 한 차 싣고 기차는 무사 히 인천 정거장에 닿았습니다.

저녁 바닷바람은 두루마기를 벗겨 갈 것 같이 들이불어오는데, 청놈 네 놈 (마중 나온 놈)은 정거장에서 찾아내 온 짐짝 두 개를 어깨에 메고 느리디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가고, 그 뒤 또 그 뒤에는 다섯 사람이 띄엄띄엄 떨어져 말없이 뒤를 밟아갔습니다.

쓸쓸하게 넓기만 하고 신작로같이 훤출한 바닷가의 거리를 지나 우중충하 고 냄새나는 언덕길로 휘어드니 묻지 않아도 인천서 유명한 청국 놈 거리였 습니다.

대낮에도 문과 들창을 걸어 잠그는 괴상한 거리가 저녁때 불 켤 때가 되니 까, 더한층 우중충하고 음침하여 마귀의 나라에라도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 다.

눈치를 챈 것 같이 놈들이 흘금흘금 뒤를 돌아다볼 때마다 가슴이 선뜻선 뜻하건마는, 그래도 꾸준히 뒤를 따라 끝까지 가노라니, 놈들은 그 거리도 다 지나서 맨 끝 산모퉁이가 맞닿은 곳에 조그마한 창고 같은 단층 벽돌집 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집은 아주 아편쟁이나 노름꾼이나 도둑놈 같 은 떼들이 옹기종기 모여 엎드려 있는 듯싶어 보이는 집이었습니다.

이제 소굴을 알아 놓았으나, 학생 한 사람은 곧 신문지국으로 전보가 오거 든 받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보내고, 네 사람은 슬금슬금 그 집 뒤로 돌아 나무숲에 몸을 가리고서서 집 속의 동정을 살피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 다.

차차 어두워 가는 밤, 캄캄한 집 속에서 가끔 사람의 소리가 들리기는 하 나,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 청국말 소리뿐이었습니다.

‘암만해도 북쪽으로 도망하는 것을 공연히 여기고 쫓아왔지…….’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별안간에 참말 별안간에 네 사람의 귀를 찢는 듯이 들려온 어 린이의 외마디 울음소리! 네 사람은 저기에 찔린 사람같이 한동안 멀건하였 습니다.

“분명히 울음 소리였지?”

“우리나라말 소리였나, 청국말 소리였나?”

“글쎄요. 별안간에들어서 몰랐는걸요.”

수군수군할 때에 또 다시,

“아야야!”

하고 악착스럽게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엉엉 소리가 나며 흑흑 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사람의 가슴은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부르르 떨리었습니다. 분명 히‘아야야!’한 것은 우리나라 소녀였습니다.

“순희다! 분명히 순희다!”

“어서 빨리 가서 서울 정거장에 창호에게 순희가 여기 있다고 전보를 쳐 라.”

학생 한 사람은 가만가만 소리없이 기어서 급히 우편국을 향햐여 달려가 고, 나머지 세 사람이 여차하면 달려 들아갈 차비를 차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곧 뛰어 들어갈 형세로 몸을 가뜬히 하고 있으나, 가슴은 세 사 람이 똑같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아야야, 아야야!”

소리가 연거푸 나면서 불쌍한 순희가 당장에 맞아죽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릴 때, 최 선생님과 삼촌과 학생 한 사람은 참지 못하고 와락 뛰어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보다 먼저 세 사람의 뒤에서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와락 와락 달려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3권9호 (1925년9월호).

인천 바닷가 산언덕의 어두운 밤!

순희인 듯싶은 소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가려는 최 선생과 외삼촌 과 학생의 세 사람에게 먼저 달려든 놈은 낌새를 채고 몰래 뒤로 돌아온 흉 악한 청국 놈들이었습니다.

마귀 같은 놈들이 쇠뭉치 같은 팔로 뒤에서 꼭 껴안고 달려들었으니, 세 사람도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으나, 그런 불쌍한 소녀의 울며 부르짖는 소 리를 들은 그들도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판이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어 쩐들 질 수가 있겠습니까?

“에잇”

소리치면서 뒤로 덤빈 놈의 팔을 낚아 앞으로 넘겨 치고 불끈 솟으며, “덤벼라!”

소리를 치는 사람은 운동으로 몸을 단련한 우리 최 선생이었습니다. 나는 새같이 몸을 빼쳤다가 번개같이 다시 달려들면서 풋볼 차던 발길로 불두덩 을 차면서 주먹으로 코와 눈을 얼러 때리는 사람은 운동 선수인 학생이었습 니다. 눈이 캄캄하여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다시 호랑이 발톱 같은 두 손을 벌리고 덤벼든 청국 놈은 학생의 가늘은 목을 한 줌에 움켜쥐려 들었 습니다. 그러나,

“아차!”

할 틈에 어느 틈에 몸을 빼친 학생은 다시 한번 아랫배를 퍽 들이지르자, 뒤로 비틀비틀 하는 놈을 발로 딴 쪽을 걸어 잡아당기면서 두 주먹으로 가 슴을 질러 그냥 깔고 엎드러졌습니다. 엎치락뒤치락 위로 가고 아래로 가고 한참이나 끼고 뒹굴더니, 청국 놈은 학생의 목을 휘어잡고 학생은 그놈의 멱줄띠를 잡고, 한 손으로 그놈의 얼굴을 들이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최 선생은 벌써 한 놈을 깔아 누이고 한 발로 그놈의 목을 짓밟고 서 서 보니까, 저 쪽 컴컴한 나무 밑에서 끼룩끼룩 신음하는 소리가 나는데, 흰옷 입은 이가 밑에 눌린 것을 보니 창호의 외삼촌이 청국 놈에게 죽게 된 모양이리라,

“음!”

소리를 지르면서 맹호와 같이 뛰어가서 외삼촌을 깔고 앉은 청국 놈을 끌어 당겼습니다. 어떻게 몹시 맞았는지 창호의 외삼촌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 냥 끼륵끼륵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에게서 최 선생에게로 옮겨 붙은 청국 놈은 힘이 세었습니다.

서로 맞붙들고 차고 때리고 밀고 끌고 한참이나 겨루다가 별안간, “엥!”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놈을 안고 넘어진 최 선생이 드러누운 채로 청국 놈 을 저 밖으로 차던지고, 후다닥 번개같이 날아서 자빠진 청국 놈의 배 위에 올라앉았습니다.

아아! 그러나 수효가 부족하였습니다. 형세가 위태한 것을 보고 집을 지키 고 있던 두 놈까지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나오더니 먼저 학생의 어깨를 두 들겼습니다. 그것을 보고 거의 눈 뒤집힌 최 선생이

“에랏!”

하고, 달려들어 그놈의 몽둥이를 빼앗았으나, 바로 그때 칼을 든 놈이 최 선생의 가슴을 겨냥하고 들이덤비었습니다.

“악!”

소리가 나자 칼을 막으려던 최 선생의 왼팔이 시퍼런 칼에 푹 찔렸습니다.

아아, 불행! 절망! 세 사람도 기어코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맞고 채고 찔리고 송장같이 늘어진 세 사람이 굴속 같은 벽돌집으로 끌려 들어간 후에, 그 동안에 그렇게 무서운 전쟁이 있었던 줄은 모르고, 우편국 에 갔던 학생과 신문 지국에 갔던 학생이 길에서 만나서 함께 돌아왔습니 다. 숨소리도 안 내고 쥐를 노리는 고양이 걸음처럼 사뿐사뿐 기어 걸어서 집 뒤 나무숲에 와 보니까,

“아! 아무도 없다!”

“웬일인가?”

벌써 가슴이 뛰노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귀를 기울이니까, 그때 집 속에 서 여러 사람이 끼룩끼룩 앓는 소리, 이놈 저놈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 었습니다.

“모두 붙잡혔구나!”

두 사람이 똑같이 생각할 때 가슴이 덜컥하였습니다. 그래 두 학생은 나무 숲 저 뒤로 깊숙이 물러서서 속살속살 공론을 하였습니다.

“큰일 났으니, 네가 여기서 망을 보고 있거라. 내가 서울 창호에게 또 전 보 놓고 신문 지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서울패가 오거든 데리고 올 것 이니…….”

“그래. 여기는 내가 지킬 터이니 얼른 갔다 오너라. 올 때에는 경찰서도 들려 오너라.”

“오냐, 잘 지키고 있거라.”

한 사람이 족제비같이 달음질하여 가고 한 사람만 남아서 무서운 줄도 모르 고 나무숲에서 별 같은 눈을 뜨고 마귀 같은 그 집의 동정을 살피로 있었습 니다.

무서운 밤이 차차로 깊어가는데, 어느 틈엔지 둥근 달이 꽤 높이 솟았습니 다. 한참이나 아무 일이 없더니, 8시 6분!

그때 난데없는 자동차 한 대가 조용히 굴러 오더니 ‘뚜루루루’ 마귀의 집 앞에 와서 우뚝 서자, 안에서 청국 놈들이 다섯 놈이 나와서 사방을 휘 휘 둘러보더니 커다란 보퉁이를 받쳐 들고 올라탔습니다.

그 집에 있기가 위태한 것을 알고 놈들이 소녀를 데리고 넌지시 도망을 가 는 것이었습니다.

“큰일 났구나! 아주 놓치는구나!”

나무숲에서 샛별 같은 눈을 굴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나오던 학생 은 자동차가 뚜루루루 굴러 나갈 때,

“에라, 나 혼자라도 쫓아가자.”

하고, 화닥닥 뛰어서 푸른 연기를 뿜고 달아나는 차 뒤에 다람쥐같이 매달 렸습니다.

달 밝은 밤, 바닷가의 행인 없는 신작로도 자동차는 총알같이 달음질쳤습 니다. 시가를 꿰뚫고 신작로 고개를 지나 철로 둑을 넘어서 초가집 많은 동 네로 들어가더니, 목욕탕 같은 높은 굴뚝이 있는 뒷집 역시 야트막한 벽돌 집 앞에 우뚝 서자, 놈들은 수군수군하며 내려서 그 집으로 기어 들어가 버 렸습니다.

들킬까 겁나서 숨을 죽이고 차 뒤에 매달렸던 학생은 놈들이 다 들어간 후 에 잠깐 내려서서, 자동차 운수도 모르게 그 집 모양을 똑똑히 둘러보고 다 시 돌아오는 차에 매달렸습니다.

점점 밝아가는 달밤에 자동차는 오던 길을 그대로 돌아 달아나는데, 학생 은 청국 놈 시가 근처에서 휘딱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차가 하도 속히 가는 바람에 떨어져서도 한참이나 데굴데굴 굴러갔 습니다.

얼떨떨한 정신을 한참이나 후에 수습해가지고 부스스 일어나서, “에에, 엔간히 아프군!”

하면서 아픈 어깨와 궁둥이를 주무를 때, 그때! 저쪽 길에서 화살같이 달려 오는 자동차 한대! 학생의 옆에까지 오더니, 차 속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 며, 차가 우뚝 섰습니다. 학생은,

“어!”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습니다.

아아, 화살같이 달려온 그 자동차에는 창호와 동무 학생들이 가득 타고 있 지 아니합니까?

반갑다는 말도 못하고 놀랍다는 말도 못하고 또 한 번 두 손을 들고 ‘ 어!’하고 소리쳤습니다.

창호와 그 일행은 경성역에서 8시 5분전에 전보를 받고 8시 35분 차를 기 다릴 새 없어서 자동차를 빌려 타고 한숨에 인천까지 달려와서, ○○신문 지국에 들려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의 안내로 지금 달려드는 판이었 습니다.

“어서 올라타게, 어서 가세. 선생님도 붙들려 갇혔다니?”

“응, 그런데, 또 큰일 났네. 그 동안에 그놈들이 자동차에 순희를 태워 가지고 딴 곳으로 도망을 하…….”

헐떡헐떡하는 말이 채 그치기도 전에,

“어디로? 어디로?”

하고, 재차 물었습니다.

“큰일이 났네 그려, 놓쳤으면…….”

“아니, 내가 그 자동차에 달려서 거기까지 쫓아갔단 온 길이야!” 듣고 있던 일동은 춤을 출 듯이 기뻐하면서,

‘응, 그럼 선생님들은 나중에 구원해도……, 그놈들은 또 다른 데로 도망 하기 전에 그리로 먼저 가세."

학생이 궁둥이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휘딱 올라타자 자동차는 지시하는 신 작로로 총알같이 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자동차에는 열매 열리듯 옹기종기 매달려 탄 일행이 창호와 창호의 아버지 와 학생까지 총11명, 흥분된 기운이 하늘이라도 찌를 것처럼 뻗쳐났습니다.

아까처럼 시가를 꿰뚫고 고개를 지나 철로 둑을 넘어 초가집 동네의 굴뚝 집 뒤에 이르러, 와르르 내리는 길로 가지고 온 아령 방망이들을 들고 벽돌 집 대문을 두드리니, 벌써 청국 놈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왔 습니다.

“오냐, 덤벼라”

좁은 문으로 나오는 놈마다 방망이로 두들겨대니, 놈들도 얼떨떨하여 한풀 꺾이고 덤비었습니다.

접전! 대접전! 차고 때리고 깔고 안고 머리가 깨지고 쓰러지고 부르짖 고……. 달밤의 싸움이 피 속에 엉클어졌습니다.

그때! 창호는 약삭빠르게 자동차 운전수에게 자동차를 가지고 골목밖에서 기다리라고 이르고 제비같이 날아서 벽돌집 뒤로 돌아 뒷밭으로 뚫린 유리 창을 깨뜨리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모두 싸움하러 대문 밖에서 나간 틈이라 집 속은 텅 빈 것 같았습니다. 어 둠침침한 집 속에 방은 어찌 그리 많은지 갈피를 찾기 어려운지라 여기저기 허둥지둥 들여다보며,

“순희야, 순희야!”

소리를 질러 자꾸 불렀습니다.

“예, 여기 있…….”

두근거리는 가슴에 언뜻 듣고 모기 소리같이 나는 방으로 문을 차고 뛰어 들어가니까, 아아, 거기는 광 속 같은 거기에 두 발 두 손을 묶인 순희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무섭고 겁나는 중에도 오랜간만에 순희를 보는 창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 하였습니다.

오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와락 달려들어 순희의 손발 묶인 것을 풀어 주 는 때, 아차 큰일 났습니다. 어디서 낌새를 챘었는지 급히 뛰어 들어오는 무서운 청국 놈!

창호는 벌떡 일어서서, 방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방 안으로 들어 온 청국 놈이 순희를 잡아 안으려 할 때 창호는 약삭빠르게 그 옆에 있는 도끼를 번쩍 들어,

“엥!”

하고, 놈의 머리를 기운을 다하여 후려 때렸습니다.

“끽!”

외마다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청국 놈을 본 체 만 체하고 순희의 묶인 것 을 마저 끊어 가지고, 급급히 참말 급급히 다시 뒤 들창을 넘어 나왔습니 다.

청국놈 여덟 놈, 이편이 열 사람 아직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이 한창인 틈 을 타서, 순희를 데리고 창호는 밭고랑으로 엎드려 기어서 골목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 앉아 차가 달아나기 시작한 후에야 이제야 숨을 휘 둘러 쉬었습니다.

자동차는 총알 총알 총알같이 달려서 인천의 자동차부에 가서 알아 가지고 즉시 ○○정(동)에 있는 소년 회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그곳 소년회에 서는 그 밤에 동화회가 있어 소년 회원들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300여 명 소년이 모여 있었습니다.

창호의 급급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동화회는 중지되고, 소년회 간부와 회원 중의 큰 사람20여 명이 죽 나섰습니다. 한 패는 창호가 타고 온 차로, 또 한 패는 새로 부른 자동차로 구원의 길을 떠났습니다. 구원병인 소년대와 합하여 30여명 조선 학생의 손에 9명의 중국 놈은 차곡차곡 묶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년 회원의 전화를 받고 인천 경찰서에서는 자동차 두 대로 청국 놈들을 담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반가운 일은 소년 회원들이 굴뚝집 뒤의 벽돌집을 수색한 결과, 순희처럼 잡혀 와서 갇형 있던 다른 소녀(9살 한 사람, 11살 한 사 람) 두 사람까지 찾아내 온 것이었습니다.

달 밝은 밤이었습니다. 무섭게 시꺼멓던 구름이 활짝 벗겨지고 평화한 둥 근 둥근 달이 시원하게 아름답게 빛나는 밤이었습니다.

10시 40분! 인천 정거장을 떠나는 경성행 막차에는 창호와 순희와 피묻고 갈갈이 찢긴 옷에 머리를 싸맨 최 선생과 외삼촌 이하 여러 학생들이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기쁨을 참지 못하여 벙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경성역에 내릴 제, 그 할머니, 어머니와 친척들이 얼마나 즐거워할 는지, 그것은 여러분의 짐작에 맡겨두기로 하고 이 차가 경성역에 닿아서 가족과 친척들이 순희를 껴안고 춤추게 될 시간은 11시 40분인 것만 말씀해 두지요.

기차가 ‘뛰’ 소리를 지르고 천천히 인천 정거장을 떠나기 시작할 때 정거 장 밖에는 300여 명 소년 회원이 기쁨을 다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천천히 떠 났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기쁨의 만세 소리! 둥근 달이 낮같이 밝았습니다.

-《어린이》 3권10호 (1925년10월호, 북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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