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劇場[자유극장] 이약이
金水山[김수산]
□ 소원(所願)
1887년붓터 1894년지 팔년간 계속된 자유극장(Theatre Libre)은 클아 ― ㅋ 말과 갓티 근대극운동(近代劇運動)에 잇서서 말틘루터의 리 포 ―메숀 과 갓흔 큰 영향, 큰 변동, 영구히 기록될 획기적 사업이엿다. 십육세기 의 종교에 대한 말틘 루터의 공적에 비하야 십구세기의 극단(劇壇)에다 가 한 안드례 안퇀의 공적은 더 보편적이고 동시에 더 자극적이엿다. 단지 연 출상의 큰 변혁 즉, 무대상의 자연주의의 확립이엿을 아니라 불란서에서 신극 작가의 발흥(勃興)은 비록 시대의 관계가 잇섯지만 전(全) 구주(歐州) 적이엿섯다. 입센이 그 극작생활의 초중기에 잇서서 기교상으로 영향을 바 덧다고 전하는 사르두 스크리 ― ㅂ 등의 가위(可謂) ‘묘하게 민 극’의 권위는 에 러지게 되고 당시 전성해 잇섯든 소설상의 자연주의의 보조 를 러가면서 새 시대, 새 정신에 왕일(汪溢)하는 신극 작가들을 여긔서 족생(簇生)하게 맨드럿다. 이 자유극장이 남겨논 공적은 말할 것 갓흐면 연 출상보다도 이 점에 잇서서 더 큰 노력을 햇다고 할 수 잇다. 이것은 내 개 인의 생각이 아니다. 연출상의 미전유(未前有)의 새로운 효과와 진보는 오히려 이 자유극장의 영향을 바더 이러난 극작가들과 이와 반수(伴隨) 되어서 극장 안으로 드러오게 된 과학적 모든 장치 기계의 사용으로써 어든 독일 근대 연출운동 ― 라인하르트를 비롯한 ― 에서 볼 수 잇다. 그러나 이 자유극장이 준 더 보편적 영향을 단지 불란서 안에만 아니라 전 구주에 전파되여서 독일에 ‘자유무대(Freie Bühne)’ , ‘신민중무대(Neue Folks Bühne)’ , 영국에 ‘독립극장(Independent Theatre)’ , ‘무대협회(Stage Society)’ 등의 왕성다단(旺盛多端)한 신운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가위 신 세기의 극작가들이 배출해 지고 미증유(未曾有)의 연극 발달을 엇게 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스타니 스라우스키의 등술좌(等術坐) (Moscow Art Theatre)가 체호프을 신작가로 어더내 지고 고르키, 안드레 ― 프 , 톨스토이(알엑시) 등의 새 천재들을 배양시킨 것보다도 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잇다.
내가 근 사십년 전의 이 날근 자유극장 이약이를 하려는 것은 전혀 이 점 에 잇서서 엇던 희망을 조선서 구하려고 하는 닭이다. 오늘 지내온 가 위 우리네 신극 운동이란 그 효과가 태무(殆無)하엿다. 재래의 신파를 질기 든 관중의게는 실망과 냉소를 주고 새로운 연극적 정열을 바라느니에게는 조소(嘲笑)와 등락(騰落)을 준 것 외에 무슨 공적이 잇섯느냐. 극작가 하나 나오지 안코 극다운 극 한 개 볼 수 업엇다. 항상 내가 말하는 ‘신신파(新 新派)’의 추태(醜態)를 아모 양심도 의식도 업시 지속해 왓다. 나는 여긔 서 새 극운동의 오늘 조선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강설(講說)할 틈이 업 다. 이 점은 내가 말 아니 해도 눈 좀 이는 다 알 테이고, 신극 운동 을 일으킬 이는 이 소수의 눈 이들의 일(一) 시작에 제일보가 잇기 문 이다. 다만 근 반세기 전 서양 구라파(歐羅巴) 한 모퉁이에셔 일어난 자유 극장의 지내온 경과를 보고 우리가 할 일에 엇더한 암시를 주는가를 차져 내느니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잇스면 나는 그이를 내 형제로 알고 내두(來頭) 일을 공론(攻論)하겟다. 엇더니는 오늘 조선서 신극 운동 일으기에 상조 (尙早)를 말하고 그 이유로 경제적, 사회적, 관헌정책(官憲政策)상으로 반 박(反駁)하느니가 잇다. 그러나 좀 통신적(通信的) 일망정 “불가능은 자전 에서 말이다”라고 해두겟다. 침령(侵令) 신극단을 일으켜 경제적, 사회적으로 실패해 지고 삼 사년 아니라 삼 사 개월에 고만 둔다고 하드 라도 극 운동상에 공적이 업다고 하는 것은 근본붓터 틀닌 수작이다. 왜 그 런고 하니 극 운동은 ‘경영상’에서는 경제적이라 할지언정 ‘극 운동’상 에서는 개혁이고 창작이기 문이다. 이 은 즉 엇던 힘 잇고 빗 잇는 새 역사를 며내쟈는 말이다. 루터의 구십개조선언(九十個條宣言)이 법왕의 묵살을 당햇다고 할지라도 루터의 새 힘과 빗이 업서질 것이 아니엿슴과 갓 티 극 운동의 경제적 유지가 불과 삼 사 개월이엿슬지라도 극 운동의 새로 운 창작은 영원히 미래의 종자(種子)가 되고 맹아(萌芽)가 된 것이 아니냐.
위선(爲先) 자유극장만 보아도 그 존재는 불과 십년 미만이엿지만 그 목적 햇든 효과가 이러나기 시작햇을 , 안퇀는 단연히 이 극단을 해산하고 자 기는 도리혀 전일의 적이든 오데옹좌(座)의 지배인으로 물너안저 버렷다.
그러나 “목적햇든 효과가 이러나기 시작햇다.” 는 말에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악도 말햇지만 경제적으로 단기일에 실패할지라도 엇던 힘과 빗 잇 는 새 역사를 며내자는 용기와 무엇보다도 경솔과 부랑(浮浪)을 버리 고 성실과 순진(純眞)으로 일을 시작해 노면 반드시 후계자가 나올 것이고 새 맹아, 새 종자가 여긔서 발견될 것이라고 밋는다. 이 점에 극 운동에 두는 이의 철저한 각오를 바랜다. 나는 경박한 호사가(好事家) 대신에 순진 하고 정열 잇는 신 안토완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고(稿)한다.
□ 무대상의 말탄 · 루터
안드레 안퇀은 1858년 리모저에서 낫키는 햇스나 어려서붓터 파리(巴里)학 교에 다엿다. 십삼세 에 상점 사무원으로 나가기 시작하야 1877년(십구 세)에는 파리 편사회사(片斯會社)의 사무원이 되엿다. 1887년 자유극장 창 설할 지 이 회사에서 근무하든 십년 동안 잠간 군대에 가 잇섯든 외에 는 항상 연극에 대한 정열을 일치 안햇섯다. 어렷슬 에도 학교에셔 낭속 (朗續)과 연출 시간에는 출석햇다. 심지어 조선서 중학교 들기보다 더 어려운 콘셀바퇄에 들냐다가는 입학시험에 실패해서 못 들고, 틈과 기회만 잇스면 소인극에 참가해서 연습을 햇다. 그리다가 세르클 · 골와라는 비직업 적 소인극 구락부에 들어 잇슬 에 그이는 시대와 문단의 기운(機運)을 통 천(洞泉)햇다. 그런데 극 구락부에서는 그 수흉자(首胸者) 크로우스라는 이 의 전통적 주의에 의하야 신작, 무명작재(無名作宰)의 작업은 당초에 상연 치 아니하고 본래의 사르두류(流)의 ‘묘하게 민 극’ 만 상연하고 잇섯다.
그럼으로 안퇀은 단연히 일어서 탈퇴해 지고 자유극장이라는 무형극단을 조직하는 동시에 1887년 삼월 삼십일 밤 미술단가(美術團街)의 부드몽 마르 틀의 한 방을 빌녀서 제일회 시연(試演)은 시작햇다. 이가 연월여(演月 餘)은
1. 두란티, 포알엑시즘 〈폼 영양(令壤)〉
2. 레옹에닉의 죨아 시작(始作) 〈쟉다물〉
3. 줄 , 삐달 〈콕카르드〉
4. 아르툴 〈태수(太守)〉
이 네 지가 다 당시 다른 극장에서는 상연의 은 지도 못할 신식각본 (新式脚本)이엿다. 그러나 이날 밤 상연은 실패이엿다 한다. 다만 〈쟉다무 ―ㄹ〉한 지만은 순실한 사실적, 여구(與舊)으로 다른 각본의 전연(全 然)한 실패를 이저버리게 하엿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아니엿드면 자유극장 은 다시 나오지도 못하엿슬지도 몰넛슬 것이다.
이 이후의 자유극장의 사업과 경과를 말하기 전에 당시의 극단, 넓게는 문 단의 정세를 불가불(不可不) 말해 두어야 하겟다. 지금지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 모든 독창적 운동의 간접한 원연지(源淵地)인 불란서에서 솔아가 나 왓다. 그러나 솔아가 과학적 자연주의의 소설을 쓰기 전에 벌써 발삭이 잇 섯슴을 이저서는 안 된다. 유고 , 대(大)듀마, 알프렛, 드 ― 비니 등류(等 類)의 낭만주의는 자연과학의 발달에 라간 일반 사회사상의 요구에 맛지 아니햇다. 공허한 신앙, 월광 갓튼 기분, 허망한 이론에 만족치 못햇다. 더 현실적으로, 더 사업과 일광에 갓가웁게, 더 실(實) 인생에 투철하게 하고 바라는 마음은 단지 문단이나 극단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부문에 충만햇 섯다. 그래서 일대의 비평가 테 ― ㄴ이 예리하게 사실을 분석하고 실증파 철학자가 교묘하게 강화(講話)를 지속(持續)할 문단 ― 소설의 들어서 거목 발삭이 나왓다. 그러나 이 발삭도 순연한 자연주의자는 아니엿다. 누 구나 다 지적하는 바와 갓티 그이는 낡은 로만티시슴과 새 나투라리슴의 과 도적 산물이엿다. 그이의게는 이 두 주의의 결점과 장점과가 다 갓히 낫하 나 잇다. 이것에 이어서 일대 거장 쏠아가 나온 것이다. 입센이 나오고 톨 스토이가 나오고 하우프트만이 나온 것이다.
그런대 극단에 잇서서는 에밀 · 오 ― 계, 小[소]듀마 앙리 벅크 등의 선구 자의 희곡이 약간 잇섯스나 여전한 스브리 ― 르, 사르두 류(流)의 각본에 다가 고전적 보드빌식(式)의 연출이 노력을 어덧섯다. 다만 극적이라는 자 미(滋味)만 엇기 위하야 표현상의 진실, 논리상의 주장, 작가의 비평을 희 생해가면서도 연출지 과장적이고 존대적이엿다. 전통과 부자연(不自然)이 가득한 극에다가 연출도 한 그랫섯다. 극단의 자연주의의 첫 종(鐘)을 울 닌 입센〈인형의 가(家)〉가 나오긴 벌서 1879년 이지만 불란서에서는 이 상연은 에도 못 고 잇섯슬 더러 일반(一般)은 그 일음도 몰으고 잇섯 다. 그러나 일반의 기운은 새로운 표현에 대한 조망(照望)에 넘치고 잇섯 다. 새벽에 오르는 동편 태양을 바라보는 맘으로 젊은 작가들은 썻스나 도모지 상연해 주지 안엿다.
이런 이런 기운을 안퇀은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감지햇다. 그래서 소설 단의 자연주의에 응하야 극단이 자연주의를 목표로 해 가지고 일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닛 안퇀은 엇던 새 기운 새 운동의 극출자(劇出者)가 아니 다. 창출자가 아닌 대신에 맨 먼쳠 착수한 압잽이엿다. 선도자(先導者)엿 다. 이 점은 안퇀 자신이 확실히 인정해 가지고 일을 햇섯고, 우리가 머 리에 너둬야 할 일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재래의 타락한 종교, 교회 내에 충만한 취악(臭惡)에 반항하야 새로운 신앙의 길을 차지려고 하든 일반의 민심에 한 폭발구(爆發口)가 된 말틴 루터의 종교적 사업 모양으로 안퇀의 자유극장도 공중에 창만(漲滿)햇든 공기를 응집하야 결정해 노은 것이엿다.
루터가 업섯고 안퇀이 업섯다고 하드래도 조만간은 그이들의 사명을 일워줄 다른 루터나 안퇀이 나왓슬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안퇀의 사업은 이 닭으 로 일시적 역사적 의의 밧게 업다해도 가(可)하다. 단지 연출상의 무대 미 술로만 보드래도 그 후에 독일, 영국, 노서아에 더 발달되고 흥미와 의미 잇는 것이 만엇다. 자연주의의 흥망(興亡)도 오늘 우리가 벌서 과거의 사실로 보고 잇는 이상 안퇀의 무대상의 자연주의를 그대로 용납할 수도 업 는 일이지만 다만 시대 민심에 감최이고 잇든 욕망을 가장 철저하게 무엇보 다도 성실 정직하게 표현해준 것은 영구희 잇지 못할 사실일 줄 안다.
□ 제일보(第一步)
기록으로 보건대 안퇀은 키 크고 등이 좀 굽은데다가 프른 적은 눈을 커다 랏케 열고 서서히 하는 힘잇는 말소리를 가젓다고 한다. 파리의 중산계급의 완직강의(頑直剛毅)한 성격을 가젓스나 그 속에 순직성실(順直誠實)한 것이 곳 대하는 이의 가슴에 와 부드친다고 한다. 결국은 솔직과 침착과 저력이 그이의 성격일 것 갓다. 자유극장 팔년 동안에 자기의 역사적 사명이 다 난 줄을 알고는 아무 미련 업시 후진에게 길을 내추고 나서는 1896년 오데 옹좌(座)의 연출자 지배인이 된 후 다시 취직햇다가 1905년 이후 오늘날 지 다시 오데옹좌의 연출자로서 건재(健在)해이니다. 공직으로는 공중교화 위원(公衆敎化委員)의 한 사람이 되여가지고 연극의 사회 사명에 힘쓰고 잇 는 중이다.
이약이는 다시 상술 제일회 시연에 계속된다. 제일회 시연에 그이는 저축 해든 월급과 약간의 소지금을 다 소비해버리렷다. 그러나 굴치 안코 다시 월급 타는 날을 두 번 지나 그 두 달 월급으로 1887년 오월 제이회의 시연 을 햇다. 상연 각본은 역시 무명한 시인 에밀 벨게라의 〈베르카메밤〉이라 는 운문 희극과 오스카 메테니예의 〈가족〉의게 라는 일막물(一幕物) 두 개이엿다. 엇던 이의 말과 갓티 “현대 극예술은 이날 밤에 탄생햇다” 고 지지 하나 무대상의 성공보다는 역사로 하는 말인 듯십다. 하여간 이날 밤 상연으로 에밀 쏠아, 알폰스 도 ― 테 등의 상당한 문인의 주의를 슬엇 다고 한다. 안˙ 퇀˙ 는 이제 새로운 열(熱)을 어더가지고 와사회사(瓦斯會社)의 직무를 사직하고 나서는 전 정력을 이 사업에 쓰기 시작햇다. 첫재로 재래 극의 인습을 안 가진 순연한 신극을 쓸 듯한 이의게 일일이 각본 제공을 청 하야 이 해 름녀에는 상당한 수를 모집해 놋케 되엿다. 다음에는 경제상 문 제다. 그이는 각본을 몬저 생각하고 경제를 내종에 궁리햇다. 그만큼이나 그이의 신 사명에 대한 열정과 동경이 잇섯다. 그러나 기왕 다른 큰 극장에 서 아모 경제적 구속 업시, 마음대로 연출할 수 잇는 대로 본래의 전통 극에만 순치(馴致)되엿든 관중을 다수히 고 잇는 이상 도저히 자기들은 그런 상업주의적 영리적 극장과는 대항해 갈 수 업고, 무엇보다도 연출 비용에 비하야 관객의 입장이 적을 줄을 알고 나서는 회원제도를 연구해냇 다. 이런 무형 극단을 창시한 것은 당시의 검열(檢閱)의 구속을 피하려 는 원인도 잇섯다. 즉 자연주의의 암흑면 묘출(描出)과 남녀간 정사의 사실 적 묘출이 반드시 관헌(官憲)의 금지에 당할 줄 알엇든 닭이다. 그래서 이 해 녀름 동안 그이는 우편료를 절약하기 위해서 일일이 호별 방문지 해 가면서 회원을 모집하엿스나 시월지 겨우 삼십오인의 예약자 밧게 못 어덧다.
그러나 이 소수의 회원을 압헤 두고 시월 십이일 회비제로서의 제일회 자 유극장 상연을 햇다. 고쿠ㄹ 형제의 소설을 극화한 자연주의극 〈Soeur Philomene〉, 빌예 드 릴 아담의 일막극 〈L'Evasion〉 평편(平篇), 십일월 에 가서는 자유극장의 성질에 가장 마젓다는 레용 엔니 ― ㅋ의 〈Esther Brandes〉, 장출얀의〈La Serenade〉.
이럿케 되자 벌서 일반은 자유극장에 대한 논전이 비상해졋다. 즉 자유극 장의 취지와 주장을 옹호하느니와 비난하느니 두 편이 절연(截然)하게 갈나 젓다. 쌀세라는 반대자는 자유극장에 상연하는 신극은 당초에 극이 아니라 고 악매(惡罵)햇다. 즉 신극은 살두 스크리 ― ㅂ 극이 아니라는 말에 불과 하다. 이런 의논 비등(沸騰)한 중에서 안퇀은 엄연히 자기의 길을 걷고 잇 섯다. “마음대로 비평하고 욕하오. 차차 보면 알 테닛.” 하는 태도로 모 진(慕進)해 갓다.
불란서 극작가의 작업 아니라 익(翊) 1888년 2월 10일에는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을 상연하야 처음으로 불란서에 이 북국 문호의 작업을 소개 햇다. 이 극의 상연에 대하야 의논이 분분햇다. 상연이 예고되자 상당한 비평가, 작가들의계서 만흔 편지와 비평이 내도(來到)햇다. 당시의 극단의 중진 중에서 에밀 오게는 말하되 “이 극은 극이란 것보다도 대화적 소설이 다. 그 길이붓허도 우리 불(佛) 극장에서 상연하기에 어렵다.” 소(小) 듀마는 “우리 불(佛) 극단으로 해서는 톨스토이극의 상연이 불가능하다.
너무나 페시미스틱하고 한 사람도 동정 어들만한 등장인물이 업다.” 살두 는 “매우 둇고, 근본적으로 진실한 극이지만 읽히기 위해 된 작업이지, 보 기 위해 된 극은 아니다. …… 무대 우에 상연식힐 만한 모든 점은 다만 그 것을 상연해서 납게 맨들 것이다.”
그러나 안퇀은 소신대로 단연(斷然)히 상연을 햇다. 상연 그것의 효과는 그다지 성공은 못 어덧스나 불란서 극단에 처음으로 갈처준 사실, 즉 본래 의 전통적 극기교로만 관객을 든 ‘묘하게 민 극’ , 혹은 플오트로만 튼 극보다도 이런 소위 ‘극적이 아닌 극’이 보다 더 진실하고 극적 긴장 이 잇서 무대상, 실상에도 의심이 업시 연출효과를 어들 수 잇다는 것을 갈 처준 것은 역사적 의미로 잊지 못할 사실이다. 이 아니라 자기들만 세 계에 자랑할 만한 라틴 문명을 가진 국민이라고 밋고 잇든 불인(佛人)의게 그네들 이외에도 훌늉한 천재와 예술이 잇다는 것을 가르처 주엇다. 즉 그 후로 자유극장은 구구한 비평을 불고하고도 스트린드베리, 입센, 뵤른손, 톨스토이 등의 북구(北歐) 극작가의 작품을 계속 상연해 주엇다. 이부터 구주(歐洲) 근대극과 가티 불란서가 보조를 내놋키 시작하엿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 분투와 종국(終局)
제 일년(一年)의 연출에서(칠회에 십칠편의 희곡) 안퇀은 소지금을 다 소 비하게 되엿다. 그러나 경험은 충만하게 사 너엇다. 그래서 제 이년에는 회 원도 상당한 수에 달한 것을 인하야 (Theatre de Menus ― Plaisirs)를 빌 녀서 상연하게 되엿다. 벌서 이 는 단순한 소인(素人) 극단이 아니고 일 정한 목표와 용기로서 새로운 극을 새롭게 연출한다는 주목할 만한 극단이 되여서 재래의 구극(舊劇)에만 수희(隨喜)하고 옹호(擁護)하고 잇든 인사들 도 만히 모이게 되엿다.
이가티 하야 1888년부터 1894년지 가장 활동과 자극이 만햇든 동안이 되 엿다. 구십여 편의 극본 중에서 대개는 불란서 신작가들의 작품이엿고, 하 우프트만, 입센, 투르게네프, 뵤른손, 스트린드베리, 톨스토이 등의 명작도 편입되엿다. 입센의 〈유령〉과 스트린드베리의 〈윤이양(孃)〉이 처음으로 상연되엿다. 유진 브류의 처녀작 〈예술가의 가족〉(Menages
D'artistes)이 상연되엿다. 브류는 불란서의 소 ― 라 일을 만코, 쇼 ― 자신에 대해서는 “입센 사후 노서아 빼놓고 구주의 최중요(最重要)한 작 가” 혹은 “몰리에 ― 르 이후의 최대 작가”라고 찬양을 밧는 이다. 이러 한 브류가 자유극장이 아니엿드면 결코 극작가가 되지 못하엿슬 것이다. 그 이가 루앙 에서 저근 신문기자로섯 잇슬 안퇀의 권유로 처음 쓴 것이 전 기(前記)의 〈예술가의 가족〉이엿다. 이것은 당시의 타락한 파리 예술가의 허위, 위선을 통매(痛罵)한 소(小) 희곡이다. 그이의 유명한 〈불안셋트〉 의 서문에서 “지금지의 자기의 극이 파리극장에서 상연은 물론 읽어 주 지도 안튼 것을 자유극장의 힘으로 처녀작이 상연되고 두 세 번 각본 지 나오게 된 것은 전혀 안퇀과 자유극장의 힘” 이라고 감사문을 썼다. 이 러한 자유극장과 브류의 관계는 체호프와 예술좌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근대 불란서 극작가로서 병리적 여성 심리의 해부와 정묘한 귀족적 심리의 삽사(揷寫)에 천재라 일음 엇는 프랑솨 드 큐렐도 자유극장의 힘으로 일홈 을 어든 이다. 안퇀이 아니엿드면 유명한 〈성녀의 반면〉(L'Envers d'une sainte)도 〈화석〉(Les Fossiles)도 안이 나와슬 것이다.
이 자유극장의 힘으로 구주대륙 근대극운동의 거봉에 한 줌의 흙이 된 이 는 이 외에도 만히 잇다. 유명한 이의 일홈만 들면 처녀작 〈프랑솨의 행 운〉(La Chance de Francois)이 자유극장에 상연되어 큰 성공을 엇고 유명 한 여우(女優) 레장 부인의 리퍼토리에 반다시 처음으로 온다고 하는 걸작 〈연인〉(Amoureuse)이 작자 조르즈 드 포르트리수(Georges de Paret Riche), 〈폴리시넬의 비밀〉(Le secret de Poli chinelle)의 작자 피엘 울 프 (Pierre Wolf), 가정에 관한 도덕관념의 정치(精緻)한 비판인 〈등화(燈 火)의 길〉(La Course do Flambeau)의 작자이며 브류와 가티 문제작가로 병 칭(幷稱)되는 파울 엘뷰(Paul Ervieu), 진애극(進愛劇)의 작가 앙리 라브당 (Henrie Lavedan), 모 ― 리스 도니(Maurice Donny), 비평가로서 더 유명한 줄 르메 ― 틀(Jules Lemaitre) 등이다.
이 외에도 만흔 신진 작가가 무대 우에 사러나게 되엿스나 매거(枚擧)할 필요는 업다. 다만 자유극장이 구구한 비평과 완고한 인습적 파리인의 냉담 을 불고(不顧)하고 시대의 길을 용기 잇게 걸어간 사실은 초삼년간 오십구 작가의 작업의 반수는 당초에 파리의 다른 극장에서 한 번도 상연된 일이 업섯든 것만 보아도 안퇀의 자신(自信)과 용기를 짐작할 수 잇다. 그래가지 고 수 년이 못가서는 안퇀의 주지(主旨)와 행동을 모방하는 소인극단이 족 생(簇生)하게 되엿다. 자유극장의 영향과 교훈을 바더서 일어난 극단 중에 유명한 것은 루녜 포에 ― 의 ‘제작좌(制作座)’ (Theatre de l'Oeuvre par Lugne ― Poe), 작 코포의 ‘콜옴비에좌’ (Theatre du Vieux ― olombier par Jascques Copeau), 자루세의 ‘미술좌’ (Theatre des Arts par Jacques Rouch'e)가 잇다. 이 중에서 ‘제작좌’ 는 오늘 세계에서 유명한 극단이다.
아불리가, 영국, 남미, 노서아, 백이미(白耳美), 독일, 셀비아 등 각국으로 순회햇고 처음으로 메텔링크를 불란서에 다음에는 세계에 소개햇섯고 처 음으로 씽을 불란서에 소개하야 ‘독일의 작난군’ 으로, 애란에도 극작가 잇는 점, 불란서처럼 소위 전통적 라틴 문명이 아니라도 다 천재와 예술 이 잇다는 것을 가르처 주엇다. ‘미술좌’ 는 거년(去年) 가을에 유명한 연 출가 피토에프의 손으로 쇼 ― 의 〈성(聖) 존〉을 상연하야 명성을 어덧 다. 부룻셀의 세계에 유명한 리퍼토라 극단인 ‘마레이좌’ 도 이 계통으로 볼 수 잇다. 명치 사십 몃 년인가. 일본의 ‘자유극장’ 도 이 영향을 바 든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자유극장이 독일에 순회 연출을 햇쓸 더러 트린 종자로 ‘자유무대(Freie Bühne)가 생기고 그 뒤를 이어서 ‘자유민중 무대’(Freie Volks Bühne), ‘아(我)자유민중무대’, 라인하르트의 극 장이 순차로 된 것, 영국서 ‘독립극장’ , ‘무대협회’ 등이 생긴 것도 다 원천을 여긔서 발한 것이다. 말할 것 갓트면 입센이 근대극의 조문(祖 文)된 것과 가티 안퇀은 근대극의 조모(祖母)라고 할 수 잇다. 입센이 작업 으로 신극을 제창할 그이는 그것을 새로운 맛으로 요리하고 새 작가 를 산출한 세음이다. 클아 ― 크 것흐니는 공순(恭順)스럽게 모든 근대극 운동을 안˙ 퇀˙ 의게 미루는 것이 너무 우상적이 아닐가 하고 주저(躊躇)하는 모양이나, 나는 이 점에 잇서서는 모든 근대극 운동에서 조모(祖母)격의 전 명(傳命)을 마추니는 안퇀이라고 보겟다. 왜 그런고니 전에도 말햇지만 그 이는 엇던 주의의 창출자는 아니엿지만 주의의 충실한 실현자, 촉진자, 산 모이엿든 점으로 보아서 입센과 자리를 좌우로 해야 할 이인 줄 밋는다. 상 기한 것과 가티 불란서의 근대 극작가의 대부분은 모두 자유극장의 밋헤서 부화(孵化)햇고 자유극장의 영향으로 생긴 자유무대와 하우프트만의 관 계, 독립극장과 쇼 ― 의 관계만 보드래도 알 것이다.
이와 가티 안토완의 사명의 실현은 발서 신 작가의 대두(擡頭), 신극단이 발흥(勃興)하기 시작할 아니라 본래의 인습적 극장(대개는 경제 기초가 단단하고 고객이 만흔)지도 지금지 도 안 엿든 신 작가들의 작업을 자기네들 무대 우에 상연하게 되엿다. 그 연출법 갓튼 것도 만흔 모방자 가 생기고 자유극장에서 단련한 신 배우들도 만히 다른 극장으로 드러가게 되엿다. 이것은 경제적 기초의 범위가 좁은 자유극장이닛 여긔서 나온 새 배우를 용납할 수 업게 되닛 다른 큰 극장으로 가서 생활비 가튼 것도 안 전한 보장을 엇게 되는 닭이다. 이런 이약이가 잇다. 안퇀은 한 편으로 아주 공중(公衆) 압헤서 북구렴타기를 여간 아니 햇다고 한다. 엇던 무 대 우에서 관객석의 수 만흔 얼굴과 눈이 무서워서 관객의게 얼굴을 안 뵈 이려고 등을 지고 서서 과백(科白)을 계속햇다. 이것은 물론 그 전의 구식 연출법에서는 아주 리든 짓이다. 그러나 무대상의 철저한 자연주의적 연 출에는 그도 그럴 듯한 당연한 액숀이다. 그래서 이것이 다른 배우들의 모 방한 바 되엿다. 우에 말한 브류의 이약이를 듯건대 전통과 인습의 전당인 ‘코메디 프랑세座[좌]’ 에서, 엇던 자유극장에서 나온 배우들이 안퇀의 비위를 맛치기 위해셔 처음붓터 지 모도 관객의게 등을 지고 서서 연출 을 한 일지 잇섯다고 한다.
싸우든 적의 그림자가 사라질 자유극장의 사명은 다 난 것이다. 왜 그런고니 새로운 건설로 드러가서는 안퇀이나 자유극장보다 더 훌늉하고 재 간 잇고 힘잇은 다른 신인들이 잇는 닭이다. 그래서 그 이는 1896년에 ‘안퇀 극장’ (Theatre Antoine)이라 개명해 가지고 라로셀(Larocheile)의 게 모든 것을 넘겨주어 버렷다. 자유극장은 팔년동안의 수명이엿지만 역사 적 사명은 다햇 닭이다. 그리고 나서는 안퇀은 1906년에 전일의 적이든 ‘오데옹좌’에 드러가서 지배인 겸 연출자가 되여 버린 것은 전술(前述)과 갓다.
□ 자유극장의 연출이론
1830년 유 ― 고 의 에드나니의 성공은 불란서 로만티시슴의 승리엿다. 이 승리에 이여서 사용극식(沙翁劇式)의 과장, 로맨틕한 황당무계, 실인생에 너무나 난 정열 중심의 월(月)세계가 극장과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게 유일무이한 표준이 되여왓다. 그러닛 연출법 갓흔 대서도 요새 우리 눈으 로도 보면 눈시게 부자연한 과백(科白) ― 예하면 한 장면 안에서 혼자 기다랏케 연설체로 짓거리는 티레 ― 드, 방백, 독백, 혹은 조선 신파극에 서 잘 하는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가튼 존대한 연기법을 보고 깃거햇다.
이런 것이 아니면 결코 구경할 만한 연극이 아니라 하고 햇다. 이 연출법을 요구하는 희곡붓허도 벌서 짐작할 수 잇지 안는가.
하여간 안퇀의 연출법의 이론은 아주 자연시럽게 진실한 인생의 단면을 무 대 우 삼벽(三壁) 안에서 뵈여 주는 점에 기초가 잇다. 자연시럽게 한 말은 본래의 전설의 모든 부자연하게 극단(極端)하게 되여 온 것에 대한 반항이 다. 진실한 인생의 단면이란 것은 실인생, 실사회의 담판(擔判)이나 해 부의 여실(如實)한 표현이다. 무대 위의 삼벽안이란 것은 그 후에 발달 한 크레 ― 그나 라인하르트의 무대와 관객석의 동화를 기초로 한 무대예술 은 아니다. 즉 우에도 말한 반동(反動)과 시대요구의 표현이기 문에 자연 시럽단 것이 너무 고담무미(枯淡無味)하게 되고, 진실한 인생의 단면이란 것이 너무 상식에만 진 신문기사식의 사실적 표현이 되여 버리고, 삼 벽(三壁)한 표현이 너무나 열정 업시 되여버린 것도 생각할 수 잇다. 아돌 포 탈아소가 자유극장의 미학을 이럿게 지도(指圖)햇다. 운동이 인생을 공 급하는 희곡 대신에 인생이 운동을 공급하는 희곡에 왓다. 복잡한 플옷트가 업서지고 단순한 이약이가 왓다. 기계(奇計)의 희곡이 업서지고 진실의 희 곡이 왓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자연적이 되고 라서 (로만틕하지 아니한) 고전적이 되엿다. 비극과 희극이 예전 모양으로 뒤범벅이 되지 아니하고 시 대란 것이 분명하게 되어 왓다. 기다랏코 변하기만 됴와하든 희곡 대신에 릅고 정징(精徵)하고 신속(迅速)한 희극이 왓다. 티레드가 업서지고 봄바 스트(과대한 과백)와 베소스(점타법(漸墮法)의 과백)가 축출을 당햇다. 그 런 류의 ‘상당하다는 근거’ 가 업서진 것이다. 사실만이 그 극의 철리(哲 理)를 설명할 수 잇다. 언제든지 단순하게 동정만 엇고 인기만 든 등장인 물의 성격도 고만 겨낫다. 작자는 다만 그 희곡의 윤리성만을 위해서 인 생의 심오한 밋흐로 드러간다. 만일 그 윤리성이 부도덕적이 되드래도 상관 업다. 그것이 인생이닛. 극장은 오락물이 되여서는 안 되고 인생의 이메 지 가 되여야 한다. 기교의 진열이 업서지는 동시에 인생의 하 ― 트는 설명 되기 위하해서 상매(商賣)적 궤계(詭計)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한다. 이래서 오늘 극장은 어제 극장에 대한 반항이 되자느면 안 된다. 다른 모든 혁명에 서도 그랫지만 극단한 것이 만히 잇슬 것도 당연하다. 왜 그러냐면 새로운 방법이란 철추(鐵搥)로써 모라낸 것이닛가. 목적을 달키 위해서는 혁명가는 제한을 넘을 필요가 잇다. 죄 잇는 것을 박멸(撲滅)키 위해서는 무죄한 것 도 용서치 못하게 된다.
(사실(事實)의 기술(記述)은 배렛트 클아 ― 크에 의함)
『개벽(開闢)』, 192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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