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새벽
1. 별명은 생철 동이라도
본시 조용하진 못한 마나님인데 겸하여 역정이 난 참이고 보니 그 야단스런 품이 미상불 생철동이를 뚜드리는 만큼이나 자못 시끄럽다.
"아니 그래…… 어떡허면 그래…… 이 내 속에서 나온 자식이!……"
동네가 벌컥 뒤집하게 목소리만 큰 것이 아니다. ' 절구통 마나님’이라고도 또한 별명하는 그 육중스런 몸집을 연해 휘둘러싸면서 푸짐한 넋두리가( 아들 준을 두고 하는 넋두리가) 한바탕 벌어지던 것이다.
"으응? 이 내 속에서 나온 자식이 그래…… 어떡허면 그래…… 고따위 루응? 고따위 루…… "
마침 메주를 쑤었다. 큰 가마솥에다 큰 대시루를 걸고 푸욱신 삶은 메주 콩을 바가지로 퍼억퍽 큰 대소쿠리에다 퍼담는다. 허연 김이 뭉게뭉게 피어 나오고 집 안팎으로 구수한 메주콩내가 흥건히 풍긴다.
마나님 ── 강부인 ── 은 일변 메주콩을 퍼 담으면서 일변 넋두리로 입은 쉴새없이 바쁘면서, 이윽고 소쿠리가 수북하게 차자 불끈 집어들고는 쭈르르 마당으로 달려나온다. 거뜬거뜬한 게 뚱뚱한 체집 보아서는 딴 사람 같다. 몸도 연가볍거니와 소쿠리 밑에서 메주물이 찌르르 함부로 쏟아지건만 그 한 방울도 치마 앞자락이나 버선등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새색시 적부터도 일솜씨 깔끔스럽기로도 고을 일판에서 소문 있던 부인이다. 나이 오십이로되 젊었을 적 솜씨가 여전하고 가시지 않는다.
마당에는 절구와 절굿대, 안반 등속 메주 찔 채비를 마침 다 차려놓았다.
"대체 어떡허다 이 내 속에서 그런 자식이 나왔드란 말인고? 으응? …… 천하 농통허구, 근경속 없구, 잔망스럽구…… "당자 준은 고사하고 옆에서 누구 한 사람(하다못해 귀덕어멈이라도) 듣고있는 이조차 없건만, 그러니 매양 강 건너 눈흘기기요 혼자의 푸념 이 건만, 그런 건 다 상관 아니었다.
들고 온 메주콩을 메 소쿠리째 절구에다 엎는다.
"제발 좀 외탁을 하겠지? 외탁을 했으면야 사람녀석이 고대두룩야 농통 스렀 으리?…… 세상 주변성 없구, 고정하기만한 즈이 으런 승미 고대루 닮어가 지구는…… 그 으런은 그래두 고집이나 없었지! 고집이나…… "좌우를 휘휘 둘러본다. 당연히 등대하고 있었을 귀덕어멈이 간 곳 없고 보이지 않는다.
"아 귀덕어머엄?"
불러도 대답하고 나오는 싹도 없다.
"방정이 그새 어디루 또 싸아나갔담?"
조금 역정이 더했고, 그 길에 절굿대를 치켜들려다가 또 생각이 나서 일단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 시루뚜껑을 덮어놓는다.
"야숙한 놈! 천하에 모질구두 매정스런 놈!…… 그놈이 비상보담두 더 독한 놈이어든!…… 제가 그러구서두 복을 받을까?"
부엌을 다녀와서는 서슴지 않고 곧 절굿대를 집어들고 메주방아를 찧기 시작한 다. 부자는 아니라도 오륙백 석 추수를 하여 쓰고 밀리는 성세요, 편안히 지내도 좋을 팔자이었지만,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 메주방아쯤 찧기를 주저 치 않는다.
젊은 장정 못지 않게 절굿대가 기운차게 오르내린다.
"싯 싯."
그리고 무딘 절구 소리가 그에 화할 뿐, 넋두리가 잠깐 끊긴다.
서향한 옆채의 처마 끝에서 수정 발을 드리운 듯 주렁주렁이 매달린 고드름이 맑은 햇빛에 영롱히 번뜩인다.
높다란 '유지저리’꼭대기에서 긴 상모가 멋들어지게 나부낀다. 상모 끝으로 팔랑개비가 모형 비행기의 프로펠러처럼 이쁘게 돈다.
"후우!"
소스라치게 외양간에서 암소가 한숨을 내쉰다.
"망헐 것!"
강부인이 돌려다보고는 핀잔을 한다.
"너두 자식 못 쓸 것 두었드냐?…… 에미 쏙 썩히는 자식 두었어? 죄 없는안해 소박하는 자식 두구?"
마악 그럴 때에 건넌방으로부터 병색과 수심을 얼굴에 드리우고, 며느리가( 방금 강부인이 하던 말로 하면 '죄 없이 소박 받는’준의 아낙이) 헝클어진 머리를 다스리면서 원기 없이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왜 나오느냐? 누었들랑 않구서!"
강부인은 걱정을 한다는 양이, 하마 잡도리를 하려 든다.
고부간(姑婦間)이라고 하지만 시어머니 강부인이 쉰둘에 며느리 ── 서씨가 열네 살 떨어지는 서른여덟이다. 서른여덟이면 낼 모레가 마흔…… 여자 나이 마흔이면 벌써 늙음줄에 들어간 나이다. 서씨는 그런데다 심화와 부실한 건강으로, 볼성없이 바스러지고 조로를 하였다. 언뜻 사십이 훨씬 넘어 보인다.
그와 반대로 시어머니 강부인은 이른바 노익장(老益壯)하여, 원 나이보다 네댓 살은 젊어보인다.
이 고부는 그래서 같이 늙어가는 터이고, 속 모르는 방물장사 붙이들이 일쑤 동서(同婿)끼리거니 하여 종종 망발을 하는 수가 있다.
사람은 저마다 제 팔자라는 것을, 즉 제 일생의 운명을 각기 제 얼굴에다 그려가지고 태어난다는 소위 상학(相學)의 주장이 일반으로는 족히 종작 할것이 못된다 치더라도 막상 이 서씨라는 여인에게만은 엔간히 들어맞았다는것을 인정치 않을 수가 없다.
노상 혼인하던 첫날밤 애기신랑에게 소박을 맞은 이래 이십 년은, 꼬박 생과부로 살아오는 여인이니라 하는 선입주견만으로가 아니다. 아무 내력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어딘지 불행하여 보인다. 추레하고 수심스러운 표정이야 그 자신의 항상 경황없고 슬픈 심정의 반영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말고도, 일종 선천적인 것으로 무엇인지 모른 불길스런 듯 박행스런 듯한 상모( 相貌) 다. 표정이 아니라 얼굴 원 바탕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물이 잘생겼다 혹은 못생겼다 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속담에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고 하거니와 지 금은 다 바스러졌을망정 일찍 인물 축에 들면 들었었지 결코 박색은 아니었다.
남의 앞에 빠지지 않을 만큼 여자다운 매력도 지녔고 겸하여 그 갸름한 얼굴 바탕에 준한 듯한 코와 길게 째진 눈초리 등 자못 범키 어려운 위엄을 갖추어, 어디로 보나 인물을 가지고 하더라도 탈잡힐 구석이 별로이 없다. 항차 그의 아름다운 심성과 현숙한 부덕(婦德)이리요. 그러기에 노오 강 부인이 '제 따위 놈이 생전 어딜 그런 가숙을 천신을 해? 과분한 줄 모르고서 !……’ 이렇게 안타까와하는 것도 한갓 입에 붙은 말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가 준이 아낙을 소박한 소연이 그 인물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심성이나 부덕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도 아니다. 또 열세 살에 든 장가라서 장성한 후 개성이 눈뜸을 좇아 자유결혼을 욕망하는 나머지 아낙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을 구실로 명령결혼(命令結婚)에 대하여 의식적인 항거를 일삼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역 아니다. 아울러 달리 침혹 한 애를 하는 ──── 이를테면 연 여자가 생겼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그와 더불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할 사정…… 이런 사정의 유무는 우선 차치하고, 근본이 그런 데서 우러난 문제인 것도 또한 아니다. 오직 한가지 특별한 사유가 따로 이있던 것이다. 하되 그것은 맹랑하기 상식을 초월한 것으로, 항용 이성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좀처럼 휘어잡기 어려운 마성(魔性)을 띠고 있는 것이다.
아뭏든 그래서 이십 전 생과부로(정히 처녀과부로) 사십고개를 넘고 있는 서씨 였다.
강부인은 또 강부인으로, 일찌기 삼십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된 이였다.
하나는 삼십과부, 하나는 처녀 적부터의 생과부…… 다같이 몸과 영혼이 한량없이 고달픈 두 여인이었다. 자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하고 의지 하여 피차간 의좋고 정다울 수가 있는 고부끼리였다.
원래가 둘이 다 선비네 가문의 태생으로, 사람들이 점잖스러웠다. 또 직성이 잘 맞았다. 같은 성격이 아니라, 다르면서도 조화가 될 수 있는 성격이어서 직성이 맞는 것이다. 거기다 겸하여 팔자가 또한 그렇듯 비슷한 팔자요 하니, 본디야 남남끼리 모여진 고부간이라지만 부모 자식이란 윤기가 떳떳하겠다, 서로간 사이가 나쁘고 싶어도 나쁘지 못할 처지였다.
미상불 남아 부러울 만큼 고부는 정이 자별했다. 그런 중에도 강부인이 며느리 서씨를 연민(憐悶)하며 자애하는 애정은 예사 자기 친소생의 자녀에게도 미치기 어려운 깊고 곡진함이 있었다. 천품이 천품이라, 그 형식이 심히 퉁명 스럽고 본치 없기는 하여도…… "왜 나와?"
강부인은 재차 이렇게 나무란다. 음성은 지금껏 혼자 넋두리를 하던대로 여전히 높은 음성이면서도, 그러나 판이하게 부드럽고 정이 듣는다. 얼굴도 그러하다.
서씨는 이 근년으로 더욱 성한 날보다 앓는 날이 많았고, 이번에도 그 새 연 사흘째 몸져 누워 앓던 참이다.
시어머니가 성화를 하는 것을, 서씨는 그저 모호하게
"네에…… "하면서 심상히 그대로 걸어오더니, 붙일성 있이 절구 옆으로 다가선다.
"어머니는 들어가세요! 지가 찌께요!"
"!……" 하도 어처구나가 없다는 듯이, 강부인은 절굿대를 올린 채 말없이 뻐언 히 며느리를 건너다보다가 버럭 "냉큼 들어가 누었지 못하느냐?" 하면서 꽝 절굿대를 내려찧는다.
"걸 어떻게 찌신다구 그러세요?"
"메주방아는 찧는 사람이 따루 있다더냐?"
경우에 따라 아무나 예사로이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는 말이다. 동시에 듣는 사람도 심상히 듣자면 심상히 듣고 말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강 부인에 있어서는 '메주 방아는 찧는 사람이 따로 있다더냐?’ 는 이 한마디로써 강부인이라는 여인의 사람 됨이랄지 생활이며 및 그 오십 평생을 잘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갓서른에, 그때 겨우 열한살난 아들 준을 데리고 혼자몸이 되었다. 손위로 어른도 다 없고 집안이 또한 몹시 고단한 집안이었다. 그 백씨를 닮아 지지리 주변성 없는 시숙 ── 준의 삼촌 숙부 ── 하나가 한 동네에서 살고있을 뿐, 젊은 홀어머니 살림을 보살펴라도 줌직한 일가라곤 시 가편으로 든 친가 편으로 든 별로이 없었다.
잘하나 못하나 강부인은 그리하여, 내 스스로의 주견과 힘으로써 모든 것을 감당해 나가야만 했다. 집안과 살림살이의 짜장 주인이 되어야만 했던것이다.
강부인은 요행으로 여장부 될 천품을 타고 났었다. 그런데다 마침 환경 이그 천품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허어! 그 젊 괏댁이!……’
사람사람이 눈을 홉뜨고 혀를 내저으면서 경탄하고 희한하여 하고 혹은 시기도 하고 하도록 강부인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그야말로 치마 꼬리에서 바람이 획획 일 만큼 눈부신 활약을 했다.
'호랑아씨’란 일찌기 이때부터 생긴 별명이다. 몸이 뚱뚱하대서 ' 절구통 마나님’ 이니, 생철동이처럼 시끄럽대서 '생철동이’니 하는 별명은 오히려 사십이 넘어 이 근년에 탄 별명이다.
준의 부친 임규선씨까지 삼대째 물려내려오는, 한 오십 두락의 전장이 있었다. 선비네 집안답게 대대로 그것을 전부 소작을 내주어 그 추수 받은 것을 가지고 근근히 일 년 계량과 가용을 대어왔었다. 속담에 제 털 뽑아 제 구멍 메우기로, 백년 가야 그 재산 그 사람이었지 밭 한뙈기 늘 법이 없었다. 소중한 선영의 유업인지라 매양 축나지 않도록 대대이 고스란히 그대로 지키 기에나 촉렴하였지 구태여 그것을 더 늘리자고, 나아가 서둘며 납 뛰고 할 물욕도 주변도 통히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을 강부인이 당가산을 하자 방침을 적극적인 것으로 일변을 하였다. 토지의 거의 전부를 소작을 떼어 자작을 했다. 머슴을 네다섯씩 두고, 고지( 雇只) 를 주고 해서, 논 오십 두락에다 이십 두락의 밭농사까지 지어 냈다. 논밭 칠십 두락의 농사 감농을 하자면 연인원(延人員) 천명 이상의 놉 을 휘잡아 부려야 한다. 천여 명의 놉을 휘잡아 부린다는 것 한가지만 하더라도 여간한 이력과 남다른 아귀힘이 없이는 제로라는 남자로도 능히 감당 치 못하는 노릇이거늘, 강부인은 버젓이 그것을 해냈다. 그러고도 소를 몇 마리씩 먹이고 도야지를 기르고 닭을 치고 양잠을 하고 할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서 안팎으로 많이 손대가 있던 것이냐 하면, 며느리 서씨에게 식사와 의복 범절을 맡기고 귀덕어멈에게 허드레 일을 맡기고 그러고는 자기 혼잣손으로 시원시원히 다 치르어냈던 것이다.
논밭 농사의 수입만 하여도 넉넉 그 전의 삼 곱이나 되었다. 별반 쓰는 데는 없는데 수입은 매년 불어가니 무럭무럭 성세가 늘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럭저럭 오륙백 석의 추수를 받는다. 원 밑천의 십 배 이상이다.
강부인은 호랑아씨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또는 치마꼬리에서 바람이 획획난 다는 조롱을 받으면서, 세상 부라퀴로 납뛰어 재산을 모으기는 하면서도 이 날 이때까지 누구를 등록을 쳐 먹는다든가 속임수를 써서 옭아맸었다든 가한 적은 없었다.
또 오푼변 돈놀이도 하지 않았고 장리도 놓지 않았다. 지주가 이삼월 한 창춘 궁 무렵에 양식 떨어진 작인들한테 벼를 풀어주었다가 그 가을 타 작 마당에서 한 섬 머리에 반 섬으로부터 한 섬까지 씩 의( 五割[ 오 할]~ 十割[ 십 할]) 의 변리를 쳐서 섬반이나 두 섬으로 받아내는 게 소위 장리라는 것이다. 시방은 물론 없어졌지만, 좀 들이껴서까지도 남방 농촌에서는 이 장리야말로 조무래기 지주들에게 아주 큰 치부러기요 부엉이집이었었다.
강부인은 임씨 집안이 선대 이래로 일찌기 장리를 놓아먹은 법이 없는 청렴한 가풍을 존중해서뿐더러 자기 자신으로도 벼 한 섬을 주었다가 다직 여섯 달 만에 섬반이나 두 섬으로 받는 그 짓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돈놀이는 그리고 더구나 인금까지 깎이는 노릇이라 하여 역시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부인의 재산은 순전히 그러므로 농사를 짓고 여러 가지 가축을 쳐서, 또는 추수를 받아서 졸략히 쓰고 그 밀린 것으로 해마다 땅을 사고 사고 한것이었다.
"내가 몇백석거리 성세를 내 손으로 장만을 했다만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나 땅을 내려다보나 털끝만치도 마음에 죄를 진 두려운 생각은 없다!"
강부인, 그래서 떳떳이 가끔 이런 큰소리도 하곤 한다.
젊은 과부댁의 손으로 그만큼이나 성세를 이루어놓게 된 데는 당초부터 얼마간의 재산적 기초가 있었던 덕분이 아님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기는 일에 대한(즉 생활에 대한) 사람 자신의 철저한 정성과 힘찬 실행력…… 이것이었다.
일에 대하여 빈틈없이 정성 있고 힘차게 실행하고, 이것이 곧 강부인의 생애요 생활 전부요 했다.
'메주방아는 찧는 사람이 따로 있다드냐?’
이 말은 그러므로 조금도 과장이거나 내용 없는 지날말인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하게 강부인 그 자신의 생태(生態)를 단적으로 설명한 말이던 것이다.
내 앞에 당한 바 생활에 정성 있고 적극적이요 한, 즉 생활에 대하여 용감스러운 강부인, 그는 '집안’을 위해서나 이윽고는 천하를 위해서나 퍽 도미 쁜 여인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하기야 강부인은 와락 '성공한 어머니’는 못될는지도 모른다. 아들 준이( 둘도 아니요 단 하나밖에 없는 그가) 심히 여의치 못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껏은 강부인으로 앉아서 보기에 준은 어머니의 뜻과 같은 아들이 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준이 뜻과 같은 아들이 아닌 것은, 소위 운명이라고도 일컫는 불가항력의 탓일지언정 강부인의 단독 책임은 노상 아니다.
가령 너무 일찍 장가를 들인 것을 강부인의 잘못 생각이었다 하여, 준이 안해를 소박하는 일을 강부인에게다 씌우기로 든다면 그야 반드시 씌우지못 할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구태여 조혼을 했다고 해서 저마다 안해 소박을 하란 법은 없는 것이다. 있는 법이라면 우리네 선대들은 맨판 내외간 공 방 투성이 였을 터인데 사실이 어디 그런가. 그이들이야 개개 열 살이 갓 넘은 소년 적에 시집 장가를 들었으면서도 요새날 연애결혼을 했다는 새시대의 부부들 못지 않이 금실이 좋지 않았던가. 또 새시대에 와서 구식의 조혼을 하고서도 금실 좋은 젊은 부부들이 조옴 많은가.
조혼을 했기 때문에 부부간에 금실이 없다든가 안해를 소박한다든 가하는것은 결국 그러므로 예외의 것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예외라는 옹이에 공교로이도 마디가 가서 닿은 것을 가지고
"어째서 일찍 장가를 들였단 말이오? 모두가 당신 책임이오!"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가혹한 책망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엄히 굴었다는 것이 한가지 있는 외에, 불가항력으로 ' 실패한 어머니’ 가 된 것은 가려서 말하지 말기로 하고, 그 늠름한 여인임을 취하여, 역시 강부인 같은 여인은(좀 시끄럽더라도) 많이 있을수록에 좋고 고마운 노릇이다.
며느리 서씨는 더 말도 붙여볼 바를 몰라하고 섰다가, 마침 눈에 뜨이는대로 안반에서 몽당주걱을 집어 든다. 메주방아를 우기기라도 하자함이다.
"들어가래두 이르는 말 듣지 않는구나?……"
강부인은 이번에는 음성마저 순순히 하여 곰살갑게 달랜다.
"실섭허구 도지면 여러 날 또 고생 않느냐 어서 들어가 누었어!"
"네에!"
"찌면 내가 얼마나 그리 찧느냐? 좀 있으면 인제 귀덕어멈이 들와서 죄에다아 할 걸 가지구…… "강 부인은 숨결이 차차로 가쁘다.
"그새 벌써 숨이 차니!……"
강부인은 혼잣말로 그러다가 후유 긴 숨을 내쉬고 나서
"인제는 속절없이 늙었다!"
"………"
서씨는 잠자코 시어머니의 머리로 눈을 돌린다. 사 년 이짝 알아보게 머리가 많이 세기도 세었지만 오늘따라 그것이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오십 바로 저짝 몇해 동안은 가끔 더러 담뱃대를 물고 잠시 한가로이 누워 며느리에게 흰머리를 뽑히곤 하기도 했었으나 이 근년 와서는 통히 없었다. 뽑을 정도의 흰머리가 이미 아니었던 것이다.
"쯧, 늙기두 할 테지! 오십이 넘었으니…… ""……… ""그러나마 맘이나 편했을새 말이지!"
"………"
"몹쓸 놈!……" 하다가 문득 며느리를 건너다보고는 성화스럽게
"어서 들어가지 않구, 그러구 섰느냐?" 한다.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서씨는 돌아서서 천천히 저리로 걸어가고 있다.
'몹쓸 놈!’
이 말은 또다시 아들에게 대한 넋두리의 시작이었다. 서씨는 언제고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기가 민망하고 속이 언짢았고, 그래서 되도록이면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강부인은 강부인대로, 며느리의 그러한 심정을 잘 헤아리는 터이라 매 양 그가 있는 데서는 입을 참았고, 정히 참을 수가 없으면 무슨 핑계를 하든지하여 쫓아버리고 했었다.
"그놈이, 꼭 그놈이 돈이 없었어야…… 꼭 돈이 없었어야만 내게 와서 항복을 할 텐데!"
강부인이 생각하기에는 준은 제 손으로 생활을 해서 제 맘대로 살아갈 주변이 없는 인물인즉 제 수중에 돈만 없고 보았으면 진작 와서 꿇어 엎드려 "어머니 잘못했읍니다! 인제부터는 가숙 소박도 않겠읍니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준은 돈을 적지 않이 가지고 있다.
준의 외가, 즉 강부인의 친정이 준의 집안 이상으로 고단하여 아무도 없고, 준의 외조모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만만히 양자할 만한 자리도 없었거니와 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외손자 준을 끔직 사랑하면서, 부디 준의 손으로 외손봉사나 받고 말겠노라고 늘 말해 왔었다.
그 마나님이 지금으로부터 다섯 해 전, 마침내 세상을 떠나려면서, 임종에 동경 있는 준을 불러내다 앉히고, 너의 대까지만 외가 제사를 모시게 하라는 유언과 더불어 수월치 않은 재산 전부를 물려주었다. 준은 그 전장을 죄다 팔아 사만여 원의 현금을 동경으로 가지고 가서 은행에 맡겨두고 공부를 다시 계속했다. 그리고 지금도 삼만 원 넘겨 남아 있다.
강부인은 이 돈과 그 사실만을 두고 하던 말이 아니었다.
준은 강부인의 "농사는 천하의 근본인즉 기위 공부를 하량이면 농사 공부라야 한다……"는 이상과 방침에 좇아, 열네 살 적 장가들던 바로 그 해에 보통학교를 마치자 곧 근처의 ××농업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것이 사실은 강 부인의 오산 제일장(誤算第一章)이었던 것이다.
열여덟에 농업학교를 졸업한 준은 스물한 살까지 꼬박 삼 년을 아뭏든 농사도 짓고 과수재배도 하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준의 체질, 성격, 취미, 재능 어디로 보든 전혀 상극진 방향이었다. 거기다 아낙 서씨와의 문제가 있고, 겸하여 모친 강부인의(준의 말을 빌면) 기승과 압박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벌역이었다.
그 벌역을 면할 겸, 오랜 경륜을 이룰 겸, 스물한 살 되던 해 봄 준은 마침내 집을 뛰쳐나가 동경으로 달리고 말았다.
강부인은 크게 노 하여
"그 놈 불효자식…… 내 자식 아니다! 나는 모른다!" 고 학비 대어주기를 거절함으로써 대항을 하러 들었다.
2. 까치가 우 짖더니
준은 그러나 조금도 곤란을 받지 않았다. 외조모가 속살로 학비를 보내주었었다.
속살로라고 해도 이내 강부인이 그 눈치를 알아채었고, 그래서 번연한 비밀 이었다.
강부인은 친정어머니와 같이 앉으면 간혹 가다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두 살뜰해서 그놈을 학비를 보내주시구 허시우? 눈물이 쑥쑥 빠지두룩 고생을 좀 허게스리, 모른 체허시들랑 않구서…… "하고 탓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런다치면 노마나님은 천 역덕스럽게
"학비는 무슨 학비어?…… 저업때 한번은 하두우 보구 싶어서, 생각난 길에 모치떡이나 사먹으라구 돈 겨우 백 냥인가 붙여준 걸!" 하고 둘러다 대는 것이었다.
그 말에 강부인은 웃으면서
"백 냥인다치면 그 녀석 자그만치 한 섬에치는 모치떡을 사먹었을 테니 외할머니 생각두 한 섬에치는 해드렸겠수!" 하고는, 그 이상 더는 알은체를 하거나 참견하려고 하지를 않았다.
노인의 귀한 외손자놈 이뻐하고 위하는 재미인 것을, 부질없이 들어서 말릴 수도 없거니와 말릴 일도 아니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잘한 노릇이었다. 요행 저의 외조모가 계셔서 얼른 나서서 가로맡아 주었기망정이지 만일 계제가 그렇지 못했더라면, 크게 노 하여 '그 놈 불효자식…… 내 자식 아니다! 나는 모른다!’ 하면서 그 대단하던 기운 다아 속절없고, 한 달이 못하여 슬며시 학비를 보내주고라야 말았을 터이니 말이다.
정녕코 부모 된 사람으로 보아 성화스런 자식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절대로 미운 자식이거나, 하찮고 마음에 범연하고 한 자식은 아니었다.
말로는 곧잘
'그 놈이 눈물이 쑥쑥 빠지도록 고생을 해야 하느니라.’ 고 큰소리를 하기는 한다. 하지만 준이 가령 어쩌다 무슨 고생이 되었던 정말로 고생을 한다고 하면, 그때에 짜장 눈물이 쑥쑥 빠질 사람은 도리어 강 부인 자기 자신이었지 별수 없었다.
실은 고생까지도 갈 것이 없고, 전자에 더 가까이서 마침 그것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놈이, 꼭 그놈이 돈이 없었어야만, 꼭 돈이 없었어야만 내게 와서 항복을…… "
장단 맞추듯 꿍꿍 절구질을 하면서 마악 또 이렇게 넋두리는데(그것이 벌써 가슴속으로부터 아들 아쉬운 정이 간절히 솟아오르고 있는 사실을 자기두 모르고 은연중 말하던 것인데) 그럴 때에 별안간, 집 뒤 울안의 쭉 나무에 선지, 끼약끼약 까치 우짖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움칫, 그 소리에 강부인은 놀라는 듯하더니 얼굴이 차차로 흐려들다가 마침내 후유 한숨을 지으면서 "아무도 반간 사람 올 사람 없다."
시름없이 목안으로 갈앉아 들어가는 음성이다.
그러고는 두어 번 그대로 절굿대를 드놓는 듯하더니 인하여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머언 하늘을 본다.
겨울 하늘은 흐리지 않았어도 어설퍼, 가뜩이나 보는 사람을 마음 막막 케한 다.
멀리다 자녀를 두고 불현듯 보고 싶은 생각이 날 때, 그 부지할 바를 모르는 정을 어머니들은 흔히 '미칠 듯 보고 싶다’는 말로써 하거니와 강 부인이 정히 지금 그런 마음이었다.
안타까이 그렇게 보고 싶은 깐으로 하면 선 자리에서 그대로 부르르 달려가기라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조동하여 자동차 ──── 버스를 타고 다시 차를 갈아타고 저물게야 당도하는 육백리 먼 길이다. 보고 싶은 그 당장에 만나 보아지지가 않는 먼 길도 먼 길이려니와, 막상 또 허위단심 가서 만난댔자, 그립던 정이나 반가움은 접어놓고 드리 단짝 "너 이놈! 죽일 놈 이놈!" 하고 사뭇 이렇게 잡도릴 테니, 그리하여 준은 모자가 오손도손 이야기 한마디 나눌 기회조차 가지기를 피할 테니, 오히려 만나러 간 것이 부질 없을 노릇 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이 번번이 그러했던 것이다.
넋을 놓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강부인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몹쓸 놈! 야숙한 놈!……"
입을 비죽비죽, 그러나 필경 끔적하는 눈에서 닭의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기쁨을 와락 그대로 기뻐하며 노함을 와락 그대로 노하되 주 저 를하 거나 참지 않음과 일반으로, 슬프면 와락 그대로 슬퍼해버렸지 꿀꺽 그것을 삼키는 성미도 체질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 저, 이 세상에 저 하나 에미 나 하나, 그러구 제 가숙…… 단 그 셋밖에 누가 또 있다구!…… 몹쓸 놈! 야숙한 놈! 비상보담두 더 독한 놈!"
천하의 여장부도, 무서운 호랑아씨도 속절없고, 연해 메주방아에다 눈물을 질 끔질 끔 떨어뜨려 제물 간을 치면서, 마침 또 보는 이 듣는 이 아무도 없겠다, 마음 턱 놓고 목멘 소리로 서러운 사설이 서리서리 풀어져 나오려던 참인데, 그러자 대문 밖에 중이 와서 동냥을 청한다.
"동냥 안 내!"
강부인은 순간에 얼굴이 험악하여지면서 버럭 쏘아버린다.
이 세상 사람 치고 강부인의 제일 좋아하는 게 무어냐 하면 어린애와 병정이요, 제일 싫어하는 게 무어냐 하면 신여성과 중이다.
중도 여느 중은 아니고, 마을로 동냥 다니는 중 가운데 젊은 중 말이다.
송충이처럼 싫어하고 척진 사이처럼 미워한다. 이유인즉은 젊으나젊은 놈이 사지육신이 멀쩡해 가지고 무얼 못해, 하필 남의 집 문전문전 돌아다니면서 비럭질을 할까보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에이 보기만 해두 숭칙해! 능글능글허구 피둥피둥허구!…… 저마안침 지나가기만 해두 무슨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 같으니!"
이렇게 일종 육체적인 불쾌를 느껴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수절과부의 관념적인 결벽(潔癖)으로부터 오는 신경성(神經性)의 것일는지도 모른다.
바깥에 온 중은 주인마나님이 그런 편성의 호랑아씨인 줄은 알 턱이 없고, 대문이야 번듯하니 크겠다.
"동냥 안 내!……"
이 소리 한번으로 곧 퇴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 이에!……"
때댕땡 꽹과리를 두드리면서 멋들어지게 한바탕 내놓는다. 싱싱한 젊은 목소리다.
"………"
강부인은 재차 무어라고 벼락령을 놓으려다 말고 문득 고개를 꺄웃 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가다가
"이 댁 자손이 부귀공명을 누리시고…… "
이런 대문도 있고, 또
"수명 장수 하시고 다 남다 자손 하시고…… "
이런 대문도 있는가 하면
"아들을 나시면 효자충신이요, 딸을 나시면 정부 열녀요…… "
이런 대문도 있고, 그러고 또
"삼 천 극락 영생불사 연화대에 오르시고…… "
이런 대문도 있고…… 아뭏든지 제일 좋은 말로써 더할 수 없이 잘 되어지이다 하는 축원이었다. 하되 이 댁 자손 이 댁 자손 그러니 준을 두고 하는 축원이요, 준이 받을 복이지 달리 있을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도 귀에 솔깃하고 마음에 안기는지! 그리고 고마운지!
물론 오늘 처음으로 이 집 문전에 중이 동냥을 오고, 염불을 외우고 하는 바는 아니었다. 종종 더러 있었고, 있었으나 강부인은 혼땜을 주어서 쫓기가 일이었지, 통히 귀담아 듣지를 않았을 따름이었다.
'어느 누가 무엇이 내켜, 내 자식 잘되라고 축원을 할까보냐? 저를 난 제에 미도 때때로 저를 원망하고 욕을 하고 하지를 않았더냐!’ '지나가는 중이 이름도 성도 모르고 아무 상관도 없고 한 내 집 문전에 발길을 멈추고 서서 내 자식 잘되라고 갖은 좋은 말로 축원을 해주니, 세상 그런 고마울 데가 있을까보냐?’ 메주방아 찧던 절굿대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으면서, 거기 있는 안반보다 별 로이 작지는 않은 뒤를 요란스럽게 내저으며 급히 달려가는 곳은 광이다.
뒤주를 열어젖히고 두 말도 넘겨 드는 옹퉁이에다 부우연 백미를 퍼 억 퍽 됫박으로 퍼담는다. 아낌없이 퍼억퍽 퍼담는다. 마음에 내키는 노릇이기도 했지만 손이 본시 그런 복성스런 손이다.
한동안 퍼담아 수북하게 쌀이 찬 옹퉁이를 불끈 치켜들고 쿵쿵 대문 밖을 향해 달려나간다. 차면 안으로 들어서던 귀덕어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이이 떡 벌어진다. 중이 동냥을 왔는데 마나님이 시주를 퍼내니 말이다.
"마님 웬일이세유?"
"내가 죽을려나보이!"
놀라하기는 귀덕어멈만이 아니다.
중이 동냥을 오면 쌀을 말쌀로 퍼내던 것은 벌써 이야기에나 남은 옛 풍속이다.
일전박이 몇푼 아니면, 기지개 쓰고 많아야 십전박이 한푼을 꽹과리 복판에다 땡그랑 떨어뜨려 주는 것이 요새날 그 공정가격보다 더 엄한 동냥 시세다. 하되 그것은 백이면 아흔아홉까지가 마음 가운데 어느 한구석 중을 ── 중이라는 것을 통해 부처님을 ── 존경할 줄 아는 신앙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가 아니요, 신앙의식은커녕 불도(佛道) 즉 종교에 대한 호의조차도 전혀 가짐이 없고, 단순히 그저 보통 걸인에게(그도 졸리기 성가시어서) 동냥을 주는 이와 추호 다름없는 뜻이요 태도요 하던 것이다.
뜻과 태도야 가령 어떠했거나, 그리고 약소야 하거나 말거나 그런 대로 동냥을 주는 집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우리 집은 예수 믿어요!"
믿지도 아니하는 예수를 꾸어다 ── 신앙을 팔아가면서 ── 그 박하고 실례스런 시주나마 내기를 피하는 부적으로 두고 쓰는 집을 왕왕이 본다.
그야 기독교의 신자의 집이란다 면
"우리 집은 예수 믿어요!" 라는 말로써 불교엣 사람인 중에게 동냥 주기를 거절하는 것도 괴이찮은 일일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유난히 배타적이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가 사교요 이단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도 기독교가 보기엔 별 수 없이 사교요 이단인 것이다.
일종의 결벽이랄까, 기독교의 이렇듯 배타적인 성격의 옳고 그른 것은 딴 문제요, 근본 성격이 그러한 이상 남을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은 피치 못 할 필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이 기독교 신자의 집 문전에 중이 와서 동냥을 청하는 마당에
"우리 집은 예수 믿어요!" 하는 것은
'우리 집은 예수를 믿는 집이라 중한테 동냥을 주지 않소.’ 이런 말이요, 그 뜻인즉 은 '예수를 믿는 우리 집에서 어찌 이단인 중에게 시주를 하며, 써 사 교인 불교에 동의를 할까보냐?’ 는 뜻이랄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착실한 기독교인이면 착실한 기독교인일수록 가장 진정에서 우러나는 가장 정직한 말일 것이다. 동시에 그에게는 동냥을 주는 돈이면 돈 쌀이면 쌀 그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이단에게 시주를 하지 않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에게 동냥을 주기가 아까와서 주지 않는것이 우선 아니다.
거기에 대하여 중은 중대로 대개 보면 떳떳하다.
'우리 집은 예수를 믿어요!’ 하게 되면 다시 두말 않고 돌아선다. 치사한 이교도의 시주를 받을 며 리도 없고, 이교도를 발원 축복할 며리도 없고 하다는, 역시 결벽이요 자존일 것이다.
개중에는 물론
'그렇다면 만날 가야 동냥 나올 싹수는 글렀다!’ 싶어 그래 얼른 단념하는 중도 없진 않으리라. 또 그런 거절을 당코도 여전 히 서서 염불을 외우며 조르는 중도 있을 것이요, 그러다가 귀찮다 못해 걸인에게 보내는 동정 셈 치고서, 그러나 모멸하면서 몇푼 던져 주는 걸 너 풋 절하며 받는 중도 또한 없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중은 어떠한 파계( 破戒)보다도 가장 부끄러운 중이요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중일 것이다.
대개는 웬만큼 중다운 중은 역시
"우리 집은 예수 믿어요!" 라는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곧 염불을 거두고 돌아선다.
이 남은 종교와 종교가 각기 순결과 존엄을 위한 신앙상의 실로 엄숙하고도 점잖은 말이요 태도요 효과요 한 것을,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야속히도 일 전박이 몇푼의 동냥 줄 돈을 아끼느라고 믿지도 듣지도 못한 예 수 이면서 "우리 집은 예수 믿어요!" 하고 표절을 하여 중을 쫓는 부적으로 이용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부처님의 이름으로 시주를 청하는 중을 예사 걸인과 한가지로 대접 하는 것이라든지 더우기 몇푼의 돈을 아끼기 위하여 그 효과적인 주문을 외어 중을 쫓는 것이라든지…… 이런 짓은 매양 좀스럽고 박절한 백성이나 할 짓이지, 어질고 좋은 백성, 그리하여 존경스럽고 복받을 백성은 결코 아니하는 짓이다.
왕왕이 일부 백성 가운데 그 정신생활상 영양불량(營養不良)한 시대를 겪은 끝이면 그렇듯 상서롭지 못한 현상이 나타나는 수가 있다.
하기야 중이 오면 흔연히 시주를 할 줄도 알고, 입으로 염불도 외우고, 절은 찾아가서 부처님을 위하여 불공을 드리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일부에서는 야소교를 믿어 기도를 올리고 찬송가를 부르며 아멘 소리를 입에 내는 사람들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백에 한두 사람을 말고는 전부가 타산적인 욕망을 이루자는 노릇이지, 진정으로 부처님이나 하나님을 위 하여 섬기는 마음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나 하나님은 아무래도 좋단다. 중에게 시주라도 하고 부처님께 불공이라도 올리고, 또는 교회당에 나아가기 도라도 드리고, 아멘과 찬송가라도 부르고, 그리함으로써 사후의 안락과 호강을 장만하면 그만인 것이다. ── 이것이 그러므로 물질 ── 돈을 들여 부처님의 환심을 사서, 혹은 하나님께 아첨을 하여 극락세계면 극락세계, 천당이면 천당을 도모하려는 실로 매수행위에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일변으로 무당 판수를 불러다가 돈과 음식을 괴어놓고 귀신을 달래어 부자 되고 벼슬하고 자식 많이 낳고 오래 살고 하게 해달라고 비선을 하는 것과도 그닥 다름없는, 천박하고 무지한 미신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커다란 마나님이 큰 옹퉁이에다 옥 같은 백미를 수북이 담아 들고, 쿵쿵 쿵내 닫는 광경을 본 중은 처음엔 놀라서 눈이 휘둥그랬고…… 그 다음엔 문득 절에서 듣던 옛이야기의 시절로 돌아간 듯 자못 감개 무량 함이 있던지, 부지중 두손 합장코 이마를 숙이면서 조용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중얼거린다.
"어느 절 시님이요?"
강부인은 쌀 옹퉁이를 내려놓고는 일변 치마끈의 귀주머니를 풀면서 묻는다.
"미륵사의 중이올습니다."
"자 옜소!"
강부인은 주머니를 뒤져 집히는 대로 두어 장의 일원 지폐를 쌀 위에다 꾹 묻어 놓아준다. 그러면서 비로소 찬찬히 중의 행색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 본다. 송낙 쓰고, 먹장삼 입고, 염주와 단주를 각기 목과 팔목에 걸고, 미투리에 누비버선을 신고, 크막한 바랑을 해서 지고, 두루 이렇게 요새날 보기 귀한 썩 중다운 중으로 차렸다.
그 중답게 차린 차림새와 겸하여 역시 중답게 겸허하고도 조용스런 언 동 이강 부인으로 하여금 재래 일반 탁발승에게 덮어놓고 느끼던 불쾌감을 저으기 잊어버리게 하던 것이다.
"바랑이나 넉넉하우?"
"네에!"
중은 바랑을 벗어 푼다.
"아따 그 나까오루래드냐 허는 벙거지에다 고동색 세루 두루마기랑 뺏 데린 시체중들은, 바랑이나 아니나 쌀 서 되두 못 받을 걸 시늉만 해서 지구 다니게 말이요!"
"………"
중은 조심히 조금 웃을 뿐 저 할 일만 한다.
"짊어지구 절까지 올라가기 무겁구 성가시다구, 저 무엇이냐 주막 집이다 주구서 막거리나 실컷 자시구 헐 테믄야 차라리 돈으루다 시줄 허구?"
"온 그럴 리가 있겠읍니까! 다아참 농사지서서 그 소출, 그 쌀루 내시는건 돈으로 시주하시느니보담 지극한 정성이신데요!…… 한 톨두 함부루 않구 이대루 올려다가 부처님께 바치겠읍니다!"
"오온 별 신통헌 시님 보겠어!"
3. 버젓한 안해가 있는 몸이
덕수궁 옆으로 서소문정 복판에 있는 ××아파트.
단층 벽돌 어두컴컴한 복도를 다 지나, 딴채를 올라가는 세 단짜리 층계 앞에 다다르면 바른편으로 매엔 끝엣방이 준의 거처다. 복도가 어두워와 서 대낮에도 성냥불이나 켜대지 않고는 제팔호실이라는 패쪽과 그 밑에다 붙여 둔 임준(林俊) 두 글자뿐의 낡은 명함을 알아볼 길이 없다. 준이 동경으로부터 돌아온 것이 그럭저럭 사오 년인데, 바로 그 해에 이방을 빌려 들면서 붙인 명함 한 장이니 엔간히 낡기도 했을 것이다.
(39~46페이지는 缺[ 결])
복도는 어두워도 방은 들어서면 남쪽과 서쪽으로 유리창이 나고, 그 밖 이 빈터요 해서 환히 밝다.
뒷벽 앞으로 침대가 놓이고, 머리맡 저편 창 아래로는 차탁자와 찻장이 놓이고 남창 밑으로는 소파가 놓이고, 소파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다 사무 탁자를 두 개의 육중한 안락의자를 곁들여 배치하고, 양복장과 책장은 드나드는 문안 좌우쪽으로 각기 벌려놓이고…… 이렇게 거기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아파트 살이의 홀아비 세간이요 그 차림새다.
세간도 그렇거니와 방안 역시 홀아비 살림답게, 책이며 옷이며 찻그릇 하며가 여기저기 함부로 흩어져 있고 구석구석이 먼지가 수북하다.
석양 무렵이었다.
준은 사무탁 앞으로 안락의자에 가 걸터앉았고, 탁자 위에는 해어져 빠진 사본( 寫本) 의 춘향전이 중간쯤 펼쳐진 채 놓여 있다. 오늘은 온종일 이 걸들이 파고 있던 차에 조금 아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손님은 소파 한편 모로 폭신 파묻혀 앉아서 한가로이 담배를 피운다. 태평( 吳太平[ 오 태평])이라고 대학 때부터 절친하던 친구다. 원은 서울 태생이었으나 영남으로 낙향을 하여 지금은 통영(統營)서 서점 하나를 차려놓고 다른 것도 하고 하면서 지내는 중이다. 그가 모처럼만에 너펄거리고 올라달았던 것이다. 대륙시찰을 가는 길이라면서. ──── 피차간 적조했던 인사를 비롯하여 이런 형편 저런 소식 진진한 이야기가 연해 풀려나왔고 하나가, 퍼뜩 어디만치선지 말이 잠깐 사이가 뜬 채 잠잠하고 있던 끝이다.
방안은 스팀이 들어오지 않아서 겨우 견딜 만큼 싸늘하다. 그런 방안을 서 편 유리창으로 여위디여윈 저녁 햇살이 가물가물 꺼질 듯 사라질 듯 을씨년스럽게 비쳐든다.
하도 그 을씨년스런 햇살에 태평이, 그러자 무심코 주의가 가서 새삼스럽게 어깨를 오싹하며 추워한다. 그러다가 눈을 스팀으로 돌리면서 "대체 아파트 명색이 이리 춥어 어찌 사노?" 한다. 억양과 말이 다 같이 영남 사투리가 제법 섞인다. 그 구수한 영남 말투가 넓죽주름하니 호인(好人)답고 야취(野趣) 있는 그의 생김새허며 표정, 음성과 꽤 잘 어울려 보인다.
이런 말하자면, 털털하고 시끄럽게 생긴 태평과는 전혀 반대로, 준은 소위 선비 타입의 맑고 가냘픈 체집이요 겸하여 명상적인 기상이어서 마주 앉았는 두 사람은 대조하기 매우 재미스럽다.
준은 빙그레 웃으면서 태평이 사투리 써서 말하는 입을 건너다보고 있더니
"자네두 인전 영남 사람이 건진 돼 가이그려?"
"허허허!…… 아무렴 영남 사람 되는 거 좋지!……"
태평은 그러고서 다시
"멋이냐 전기난로라도 하나 좀 사놓든 않고!"
"몰라서 안 사놨겠 나마는…… "
"그런데?"
"명색이 문학께나 한다시구 남 보매 핀둥핀둥 놀구 먹는 배 다름없는 사람이, 호강은 호강대루 하러 들어서야 민망한 노릇 일 뿐더러…… "
"허어! 우리 준이가 사람 된 소리 하는구나 야!"
"그런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난 도루 농부가 되러 갈까봐?"
"농부? 고향 가서? 호랑마나님한테로 가서?"
다급히 이렇게 몰아쳐 묻는 태평은,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보다도 혼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마악 또 사촌누이 나미(奈眉)의 얼굴이 몇번째 또다시 눈앞에 얼찐거렸다.
준은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가직한 안양(安養)다 밭이나 몇천 평 사가지구서…… 이런 것 저런것…… ""으응…… "태평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그럼? 살림은?…… 아무래도 가정을 가져야 않나?"
준이 막상 농부가 되겠다고 하는 데 대하여 태평으로서 응당 의견이면 의견, 비판이면 비판이 우선 없질 못했을 것이로되, 본시 좀 덤비는 사람이라, 종종 그렇게 선후나 인사를 곧잘 잊어버리곤 하던 것이다.
"가정이라?…… 쯧, 반드시 그러랄 법두 없겠지!"
한참만에야 준은 허전한 음성이면서 혼잣말같이 한다. 눈은 유리창 너머로 먼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다. 오랜 적부터 그는 무시로 하늘 바라다보는 버릇이 생겨졌었다. 담배나 그런 기호품(嗜好品)처럼 그는 하늘 바라다보기를 즐겨 한다. 심중에 번뇌가 일 때도, 막막하든지 침울한 때도, 혹은 기쁜 생각을 하는 때도, 또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때도 으례 그는 하늘을 본다. 보고 있느라면 마음은 그때그때 따라 무엇인지 모르게 차악 가라앉아지고 위안이 되던 것이다.
태평은 준이 방심해 앉았는 옆볼을 이윽고 치어다본다.
훨씬 그러다, 입을 열어 천천히, 그러나 단정적으로 "일이 미상불 계제 좋게 잘 되기는 잘됐네!…… 기회가 마침 좋네!"
"………"
"허기야 모처럼 모처럼 용기를 내노라고 낸다는 게 하필 농부가 될 궁리라니 좀 미흡하기는 미흡하지마는, 한편 또 달리 생각하면 노상 그렇지도 않아! 자네 같은 문학이나 하는 사람한테다 경세적(經世的)인 그런 패기를 기대하는 건 오히려 무리한 일이 겠으니말이지…… "
"……… "
"아뭏든 농부 해롭잖아! 불가할 거 없어!…… 또오 임준이가 어떤 고집인데, 누구라 지끔 와서 그걸 만류하기로손 썩 귀담아 듣자 할 리도 없는것…… 그러니 그걸랑 불문에 붙이기로 하고…… 그런데 말야…… 계제가 그 쯤 된 이 계제에 말이지 응?"
"………"
"좌우간 이번 기회에 가정문제도 어떻게든지 구처를 내야 할 게 아닌가?"
"막설! 막설!……"
준은 급히 손을 내저으면서
"그런 갑갑한 이야길랑 막설하구…… 자아…… "하고 벌떡 일어선다.
"방두 춥구 허니 나가세. 오래간만에 온대지방서 온 나그네를 너무 얼려 서야 도리가 되나! 나가서 저녁이나 모처럼 같이 먹구 할 겸…… "태평은 시계를 꺼내 들고 본다. 다섯시가 지났다.
"밥은 같이 묵을 시간이 없고오…… "
"왜?"
"다섯시 반에 꼬옥 만나자 한 약속이 있다…… 낼 다시 만나서 밥도 묵고 술도 묵고 하자!…… 하고오…… "
"낼은 낼이구!"
"아니다!…… 그리 말고 게 좀 앉자!"
"앉어서 이야기하는 새 나갔으면 될 거 아냐?"
"시간이 없어!…… 낼은 그러고 자네가 싫다 해도 불가불 나는 자네를 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대접을 하겠거든 낼 해주고오…… ""글쎄 낼은 또 낼 아냐?"
태평은 그러나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겅중 뛰어서 밑도 끝도 없이
"우리 냄이 알지이?" 하고 묻는다.
준은 느닷없이 그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뻐언히 태평을 건너다본다.
"우리 냄이 몰라?"
"무어? 냄이?"
"응!"
"그런데?"
"몰라?"
"누굴 가지구 그리는 거야, 대관절?"
태평은 고개를 꺄웃
"우리 냄이…… 냄이는 애명이고, 나미 말야…… 한번도 못 봤든가?"
"이런 답답!…… 덮어놓고 우리 냄이만 찾으니, 꿈에 떡 먹구서 그 떡 생시에 조르는 푼수지!……"
"으으 참 그렇든가아!……"
태평은 벌쭉 웃으면서, 그래도 고개는 한번 더 꺄웃한다.
준은 그제서야 문득, 전자에 태평에게서 냄이라든가 무어라든가 하는 이름의, 가까운 일가 누이가 있다는 것은(그것도 직접이 아니고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간접으로 말이 나와서)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었던 것같이 생각 되었다.
동시에 태평이 무슨 의사로 졸지에 그런 말을 꺼내는 뜻도 대강 짐작을 하겠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상히도, 진작에 한번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그 냄인지 나민지라는 여자, 태평의 몇촌 뻘 누이에게 대하여 더럭 흥미가 솟는 것이었었다.
전고에 없는 일이었다. 일찌기 그는 어떤 한 여자에게 대하여(모르는 여자는 고사하고 아는 여자라도) 이대도록 부전스럽고 엉뚱한 흥미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여자와의 굄이 전혀 없던 것은 물론 아니다. 누차의 전험(前驗)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흐리멍덩하고 시원스럽지가 못했었다. 매양 소 극적이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하여 늘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이질 못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다 더우기 의식적으로
'이래서는 안된다. 나는 그럴 사람, 그럴 형편이 못된다.’ 하고 마음의 조갑지를 다물어 경계하며 삼가기를 마지않았었다. 자연 연애 다운 연애랄 것이 제법 어우러질 수가 없을밖에 없었다. 그러던 사람이 친구의 누이의 이름만 듣고서 흥미가 솟아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으니 거짓말 같은 말이었다.
준은 연방 생각이었다.
퍽 총명하고 사랑스런 여자려니 싶었다.
그러나 이런 막연한 상상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떤 또렷한 모습이 욕망 되었다.
'이마가 밝고, 그 밝은 이마에 가 총명이 어리었다.’
'영롱하면서도 다분히 암상이 들어 있는 눈……’
'품격 높은 코……’
'갸름한 얼굴이 하관이 빠르고 입이 작다. 턱도 작다.’
'날씬한 체집이 중길을 벗지 않는다. 해물의 은어처럼 발랄하다.’
'스물한살 아니면 두 살……’
'한번 고집을 쓰기로 들면 지렛대로 떠밀어도 움쩍 않는다. 한번 성 깔이나면 불같이 맹렬하여 손도 댈 길이 없다. 그러나 여느때는 끔찍이 사근사근하다. 능히 사리를 밝힐 줄 안다.’ 순식간에 골고루 이렇게 성격과 용모를 자상분명히 갖추어가지고 여자가 ── 나미가 선연히 머릿속에 가 들어앉는다. 이 여자는 실상 준이 작품 가운데 항상 쓰고 싶어하던, 가장 그의 좋아하는 모습의 여자였다. 즉 창조 한 상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좋아하기는 하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수공적이어서, 인간감(人間感)과 현실감(現實感)이 없다 하여 실지로 작품의 인물은 삼기를 피했었다.
가장 이상적인, 가장 좋아하는 여자를 그런데 현실(?)에서 발견한 것이다. 여간 반갑고 즐거운 게 아니었다.
준은 그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둘이 나란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같이 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 차에서 내려서 크고 호화스런 배를 갈아탄 다.
꿈의 세계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동안이 겨우 몇 초도 못 되는 시간이었다. 준은 태평이 어깨를 눌러 의자에다 주저앉히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퍼뜩 정신이 들어가지고 보니, 준은 제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나미와( 말 하자면) 연애를 함빡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 별……’
그는 하마 이렇게 두런거릴 뻔했다.
맹랑도 분수가 있고 치기(稚氣)도 나름이 있지, 눈 멀거니 뜨고 무슨 다 의 젓지 못한 짓인가 싶었다.
그러나 일변 그러면서도 한번 일기 시작한 나미에의 흥미는 막상 갈앉지를 않는다.
머리는 나미의 생각으로 가득찼다. 두루 궁금하여 태평이 어서 더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하고 기다려진다.
"암만해도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자아 대강만 우선…… "
그러면서 태평은 도로 소파로 가서 앉는다. 대단한 열심이다. 원체가 그는 호사 객이요, 열심하기로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으음……"
태평은 어디서부터 말 허두를 낼 것인가 하여 잠깐 생각 하더니
"그 안양으로 가서 농부 노릇 한다는 거 말야…… 아주 확정한 계획은 계획이 겠다?" 하고 차근히 묻는다.
"실상 아마…… "
준의 대답이다.
"토지는 샀나?"
"거간하는 사람한테 부탁부탁 했으니깐…… 적당한 걸루 좀 사게 해달라구…… "
"밭을 살 테라고? 무얼 경영할 건데?"
"포도원을 주장으로 해가면서, 걸루다 수지나 맞혀가면서…… 한편 으루 특수 식량( 特殊食糧) 같은 걸 시험두 해보구…… ""으음…… 그런데…… 돈은? 현재로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된다?"
"한 삼만 원…… ""그 새 사오 년 동안 만 원이나 까묵었구나?"
"그런 심이지!"
"문딩이가!……"
"요샌 돈이 조옴 헤퍼야 말이지!"
"그래, 삼만 원 가지고 밑천은 자라나?"
"석수동(石水洞) 근처라면 한 오륙천 평은 살 테니깐…… ""고거 오륙천 평 가지고 무얼 하노?"
"쯧! 모자라두 할 수 없지!…… 지끔 호랑마나님더러 돈 좀 주시요 했자 주실 리 만무하고."
"영 모자란다면 내라두 조금 보태 주구?"
"무어! 영리를 바라자는 노릇이 아니니깐, 그거면 될 거야!"
"그렇다면 몰라도…… "태평은 생각생각 하면서 말을 더 느릿느릿 "아무 턴지 농사하는 속에 들어서야 학력도 있고 경험도 있고 하니, 낭패 없이 잘 해갈 게고,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런데 말야…… 여봐 준?"
"응!"
"내 말은 결국 다른 말이 아니라, 그때 가서도 종시 가정은 없을 게가 그 말야! 종시 홀애비로…… ""……… "
준은 쓴웃음을 웃을 듯하다 말고, 문득 얼굴을 흐리면서 우두커니 한눈팔이를 한다.
허왕하나따나, 또 일이 평소의 마음가짐에 비춰 떠떳하고 못한 것은 별 문제로 하고, 방금 나미라는 그 미지의 여자로 하여, 아뭏든 가슴 가운데 전에 없는 동요가 인 것만은 사실인데, 그런 상태이면서, 그것과 뗄 수 없는 관련을 가지는 과거 이래의 가정 문제를 아울러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 한 가정 문제만을 단독히 생각할 때와도 달라, 안팎 이중으로 막막하고 괴로운 노릇 이었다.
"응? 반드시 무슨 도리든지 도리가 있어야 않나?"
태평이 재촉하듯 다시 묻던 것이나 준은 여전 그대로 앉아서 유리창 너머로 머언 하늘만 바라다본다.
"여봐 준?"
"………"
준은 담배곽을 손 더듬어다 건성으로 한 개를 뽑아 물면서 그 침통한 기색과는 반대로 남의 말하듯 등한 하게 "가정이란 것이야 나한테는 일평생 거주제한구역(居住制限區域)이 아닌가?"
태평은 이 딱한 벗을 무연히 건너다보고 앉아서 잠시 말을 잊어버린다.
준은 담뱃불을 붙여 물고 푸우 연기를 내뿜는다.
"여봐 준?"
"응!"
"내 말 듣고오…… 이 기회 결혼을 하도록 하자구?"
"………"
"응? 준?"
"………"
"여러 말 할것없이 결혼하도록 해애!"
준은 천천히 태평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버젓한 안해가 있는 몸이 결혼을 하다니?"
준의 얼굴은 어쩌면 엄숙한 듯한, 어쩌면 범연 무관심한 듯한, 또 어쩌면 자포적으로 냉소를 머금은 듯한 심히 복잡하여 얼른 포착키 어려운 표정 이었다. 정히 그의 마음이 그와 같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던 것이다.
4. 사실인 것과 진실인 것과
나미는 오도카니 혼자 앉아서 팔목의 시계만 거듭 보고 보고 한다.
그새 겨우 오분이 가고 다섯 시 십 오분이다. 아직도 사촌오래비 태평 이오 마고 한 다섯시 반까지에는 십 오 분이나 남았다. 그 십 오 분 동안이 아무래도 어려울 모양 같았다.
아까 조금 전이었다. 오래비 윤평(允平)이 은행으로부터 돌아오는 기척이 더니, 마당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 아낙더러 "나미 집에 있지?" 하고 묻는 것이었었다.
나미는 건넌방에서 그 소리를 듣고도 뜨악하여 모른 체 잠자코 있었다.
여느때야 밖에서 돌아오면서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도록 긴히 누이를 찾는오래 비가 아니었다. (비단 누이만이 아니라, 물론 누구한테고 아기자기하게 굴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다 지난번에 남매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로는 윤평은 마지못해 조 석 상대 하기는 하면서도, 완구히 서먹거려 하는 기미가(방금 오늘 아침까지도) 가시지를 않았었다.
그러던 오래비가 저녁 때 들어오면서 불시로 그다지 하게 찾는 것이니 묻지 않아도 번연히 알조였다.
나미는 계제에 마침 태평이 올라오고 했으니 그와 조용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의견도 참작하여, 장차 앞으로의 태도며 거취를 작정할 생각 이었다. 그리고 작정이 그렇게 서기까지의 이 하루이틀은 그 문제를 가지 고윤 평과 더불어 이러니저러니 좌우간 말을 하기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선 당장 이 시간을 무사히 넘겨야 하겠고, 그러자면 어서 바삐 태평이 당도를 해서 종행간에 만나 저녁도 먹으며, 다른 이 야기도하고 하느라고 두루 겨를이 없어야만 할 것이었다.
옷을 갈아 입고 어쩌고 나느라면, 마악 요 때려니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님 그 방 춘데 일러루 건너오우?" 하고 올케가 부른다. 보나 안보나 오래 비가 '나미 좀 불르우.’ 하는 것을 조심성 있고 능란한 올케는 말을 그렇게 바꾸어서 전갈을 하는것이 분명했다.
"춥긴 무어가 추우?" 부질없은 줄 알면서도 나미는 한번 뭉개어 보자고 들던 것이나, 뒤미처 오래 비가 직접 "좀 건너오느라!" 하는 데는 하릴없었다.
윤평은 마고자 받쳐 솜바지저고리에 대님까지 단정히 매고 아랫목으로 앉아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기름 발라 얌전히 빗어넘긴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인들 헝클어진 법 없다.
이 사람에게서 차림새나 행동상으로 무릇 단정치 못한 것을 찾아내기는 심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말쑥한 수염 자죽이며, 이상히 그 신경적으로 정갈하고도 해사스런 인상이 의사가 아닌 다음엔 갈데없이 계(係)의 주임쯤 가는 은행원이다.
나미는 이 오래비에게서 풍기는 차가움을 오늘이야 말고 유난히 더 느끼면서, 뒷벽 앞으로 가 쪼그리고 앉는다.
"태평이 올라왔드구나?"
"내애!"
괜한 문답이었다.
"건너방이 외풍이 그리 심하드냐?"
"아뇨!"
역시 무의미한 (차라리 무성의한) 문답이었다.
그러고는 또 덤덤하고 한참은 있더니 그제서야
"그래 그동안 좀 생각해 보았드냐?"
"………"
나미는 지금까지 바로 하고 있던 고개를 약간 수그릴 뿐 아무 소리도 없다. 그러나 뺨을 붉히거나 하던 것은 아니다.
"응? 좀 생각해 보았어?"
"생각해 보나마나…… "
"그래?……"
"접때 하던 대루 그 말이지 다른 것 없어요."
고개를 다시 들고 또렷또렷한 발음이다.
윤평은 발끈 벌써 귀밑때기가 달아올라 새빨갛다. 무론 누가 되었든지 간에 무슨 말이거나 그의 뜻을 거슬려 주는 일이 있으면 금새 곧 발끈하여 귀 밑을 붉히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발끈거사’(居士)라고 그 를 별명 지어 부른다.
"장군 편에서는…… "
발끈 거사는 그 발끈 난 성미를 애써 누르느라고 이윽고 담배를 피우고 있더니 강잉하여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는 말이다.
"여러 가지루 그럴 사정이 있구 허니 불가불 이번 삼월 안으루, 늦어 두 사월 안으룬 예식을 거행해야만 하겠다는 희망야!"
"………"
나미는 들운 숭 만 숭 앉아서 앞문 문살을 속으로 센다.
"그러니 혼인을 아니할 테라면 모르겠지만 이왕 하는 바이면 가령 저 편에서 그런 희망 조건이 없다구 하드래두 수이 어서 식을 치루두룩 하는 게 옳지 않어? 응?"
"그야 그렇죠!"
나미는 여전히 무관심한 태도이면서도 선뜻 이렇게 대꾸를 한다. 의외의 대답( 긍정) 인지라 윤평은 미심스러이 나미의 옆볼을 짯짯 건너다본다.
"그런데?"
"지금 오빠 말씀 짝으루 기왕 결혼을 하는 바이면 그게 옳아요!"
"………"
속고서는 그새 조금 갈앉았던 성미가 다시 또 발끈하여 귀밑이 도로 새 빨개 오른다.
"이애?"
팽팽한 눈살로 누이를 쏘아보면서 버럭 거칠게 부른다.
"말씀허시우?"
"대관절 어떡헐 심으루, 네가 지금 이러는 거냐?"
"무얼 어떡허우?"
"장군허구 결혼 일사를 어떡헐 작정이냐?"
"안직 작정 없어요!"
"작정이 없다니?…… 그런 신의(信義)가 어디 있드냐?"
"신의라뇨?"
"그럼, 신의가 없잖구 무어란 말이냐?"
"내가 누구헌테 무슨 신의가 없우?"
"결혼하기루 약속 다 해놓구서, 지금 와서 아니하려구 드니, 그게 신의 없는 짓 아니구 무어냐?"
"결혼, 하기루?…… 약속요?"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미는 천천히 그 말을 되받아 뇌면서, 윤 평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본다.
"누가 누구허구 결혼을 하기루 약속을 허우?"
"장두식군허구 약속이지 누구허구 약속야?"
"착각하신 거 아니우?"
"사람이란 건 남녀노소를 물론하구 죽는 마당에 들어서두 신의를 지켜야 사람 값에 가는 법야!"
"아직꺼정 장두식씨한테 결혼하기루 약속은 고사허구, 그런 내색두 뵌 일이 없어요! 목이 잘러져두요!"
"일방의 당자 네가 의사표시나 공공연한 약속은 했든 아니 했든 지끔 당해 선 그런건 문제가 아니야!"
"그럼?"
"네가 그동안 장군허구 가차이 추축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
"가차이란 말은 빼시우!"
"그 사실이 장군과 너와 두 사람의 결혼 약속을 무언중에 말한 것이어든!
또 그랬기 때문에 일방의 당자 장두식군을 비롯해서 양편 가정이랄지 친구들 이 랄지 다아들 너이 둘이는 약혼을 한 것으로 인정을 하구 있는 또 한가지 사실이 엄연히 존재해 있거든! 그러니깐 과거에 네가 의식적으루 결혼 약속이나 의사를 표시하지 아니했드래두 너이 둘이는 약혼이 됐다는 게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 아니냐 그 말야?"
"듣다가 첨 듣는 논법(論法)이우마는…… 그럼 눈으루 보기엔 해가 동쪽에서 떠가지구 서쪽으루 가서 지근 하니깐 지구는 가만히 있구 태양이 지구 를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이 옳겠구료?"
"?……"
누이의 그 재치 있는 반박에 오래비는 섬뻑 대답할 바를 모른다.
"허긴 사실이 진실일 경우두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말 이우…… "
나미는 재차 이렇게 추궁을 (추궁이라기보다도 알아들으라고 설명을)한다.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이 어떻게 죄다 진실이우?"
윤평은 끝끝내 몰리고 말진 않는다.
"네가 말하는 사실과 진실의 구별은 단순한 이론이지 사람이 실제 생활 을해 가는 데 들어선 진실이야 어디루 갔든, 사실이 으뜸인 걸 어떡허니? 사실이 가찹구 사실이 고맙구 또오 사실이 무섭구, 그래서 온갖 것을 사실이 좌우 하는데야 어떡허니?"
"생활정신이 그렇게 순수하들 못하니깐 오빤 만날 은행원이죠!"
버르장머리없는 말버릇은 말버릇이었으나 무슨 적의를 머금은 독설인 것은 아니었다. 배시기 웃는다.
윤평도 고소를 다 한다.
비교적 정이 도탑진 못한 그들 남매였었고 겸해서 방금 그와 같이 서로들 성 정을 내어 말다툼을 하던 끝이요 했건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또 저절로 풀어져가지곤 흉허물없이 굴고 두루 그럴 수가 있는 것이 매양 남 아닌 동기간의 동기간다운 즐거움이리라.
험하고 서먹서먹하던 기운이 훨씬 가시고, 윤평은
"별수 없느니라!" 하면서 막상 그다지 알뜰살뜰한 구석은 없어도 안색이랄지 음성이 한결 안온하며 소탈스럽다.
"느인 아직 철이 들질 않구 세태가 무엇인지 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니깐 바루 그렇게 순수한 걸 찾구 진실을 떼메구 나서구 하지만, 너두 장차 인제네 모가치의 실제 생활을 해야 할 날이 좌우간 불원했으니 그땔 당해 보렴? 사실과 거리가 먼 진실, 사실과 타협할 수 없는 진실, 그런 진실은 다아 주체스런 꿈이란다!"
"그래두 말이우 오빠? 아직꺼정은 팔팔한 기개(氣槪)가 어디 그렇수? 순수 허구 싶은, 진실을 따르구 싶은 그런 욕심 그런 용기가 벌써버텀 없어지구 말아서야 무엇에 쓰우?"
"기집아이가…… 시집가서 살림살이허구 자식 낳구 에미 노릇허구 해야 할 사람이 기개니 용기니 다아 주저넘은 소리야!"
"온 참! 결혼생활, 어머니 생활엔 진실허구 용기 있구 허믄 못쓰란 법두 있우?"
"암만 그러구 싶어두 그래지질 않는걸! 진실 용기 기개 순수 죄다 천리 밖으로 달아나구 마는걸!"
"안될 때 안될망정이래두 지금버텀 미리서 자겁할 건 무어 있우?"
"네가 어느 정도루 총명한 것만은 나두 모르는 배야 아니다! 해두 사람이 남녀간에 총명하다는 것허구 영리하다는 것허군 판히 다른 거다! 총명하기 때문에 되려 영리하들 못해서 큰 실패나 불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있길래!……"
윤평은 잠깐 말을 끊고 유심히 누이를 건너다보다 가
"넌 더구나 승미가 유난하지 않으냐? 여자의 승미루 너무 지나치게 불같이 맹렬하단 말야! 그런 승미를 대사를 당해서 파탈이 생기지 않두룩 잘 누르구 조종허구 하자면 아무래두 너한텐 영리한 게 필요하니라! 단순한 총 명보 담두."
무심히 하는 말이요 듣는 편에서도 예사로이 귀넘겨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일후 어느 고패엔 가서 나미는 이 말이 문득 생각힐 날이 있을 것이다.
마침 밖에서 손이 찾는 소리가 들렸다.
식모가 나갔다 들어오는 기척이더니 윤평의 아낙이 윗문을 열고 고개만 들이면서 "장 두 식씨 오섰어요!" 하는 내통이다.
"응, 일러루…… "
윤평은 천연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고는 나미더러 이른다.
"좌우간 너두 좀 만나보아라!…… 아침에 당도해서 곧장 송파( 松坡) 현장 으루 갔었는데 아마 너허구두 만나기두 할 겸, 게서 유하지 않구 일단 회정 해 왔나보다."
송파의 현장이란 윤평이 경영하는 사금광을 이름이다. 경영 이짜는 그러나말 뿐이요 재력이 달리어 흐지부지하고 있는 형편인데 장두식을 출자자( 出資者) 로 끌어들이는 운동이 방금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은 바쁘다고 엄살해싸면서도 태평은 좀처럼 그 무거운 밑을 들지 않는다.
"이혼이 노상 불가능한 건 아니렷다!"
"글쎄……"
준의 덤덤한 대답이다.
"꾸준히 서둘러 오기는 서둘러 왔지!"
"………"
준은 말없이 고개만 가로 흔들고.
"그럼?"
"동경서 돌아오든 그 무렵부턴 일체…… "
"서둘지두 안했다?"
"응."
"건 어째?"
"………"
"단념인가? 영 가망이 없든가?"
"가망이 있구 없는 건 제이 문 제구…… "
그러면서 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뒷짐 지고 고개는 숙이고 오락가락 거닐기 시작한다.
태평은 끌끌 혀를 차면서 지 천하 듯
"제이 문제고, 근대 와?"
"그러잘 며리가 없어!"
"며리?"
"명색이 장갈 든답시구 남의 집 귀한 규수를 데려오지 않었나? 내 의사든 아니든 간에 나라는 인위루 해서 내 집엘 내 안해루써 그 사람은 온 것이니깐 결국 데려오기는 내가 데려온 거…… ""……… ""데려다 놓구서 손목 한번 잡은 일 없이 이십 년!…… 이십 년이요 그 사람은 낼 모리가 마흔! 곱다시 처녀루 마흔 살! 세상에 그 이상 원통할 노릇이 있을 리가 있나!"
"………"
"남을 청춘에 죽게 했다면 오히려 선량한 편이지! 산 채루 앉혀두구서 이십 년을 처녀루 늙혀 낼모리가 마흔이라니 잔인하다거나 야숙하단 말쯤 가지군 설명이 되질 않구!"
"………"
"그런 죄가 있나! 다시 없을 큰 죄지!"
준은 태평이 앉아 있는 앞에 가 바싹 발길을 멈춘다.
"내 죄가 크지?"
"크지!"
태평이 고개를 끄덕하면서 대답하던 것이나 준은 미처 기다리지도 들은 체도 않고 어느새 도로 돌아서서 뚜벅뚜벅 다시 걷고 있다.
"크구말구!…… 항차 그 죄만 해두 한량없이 크거든, 그 위에다 이혼을 하다니!……"
다시 걸으면서 혼잣말로 거기까지 말하는 것을 태평이 급하게 가로막으며 강경히 "그러니까 이혼을 해야지!"
"이십 년 소박을 하구서 처녀루 늙히구서 사십이 다 된 사람을 이혼을? 쫓기까지 해? 이중으로 죄를 져?"
"이혼을 않는 거야말로 이중의 죄가 되지, 단연!"
"단연?"
"단연!"
"………"
준은 주춤 멈춰 서서 태평의 얼굴을 똑바로 본다. 설명을 하란 뜻이다.
"자네 말 짝으로 남의 집 귀한 규수를 장가든다고 데려오지 안했나?"
"그래서?"
"손목 한번 잡지 않고 처녀로 늙히지 안했나?"
"그래서?"
"앞으로 영 그 공방이 풀릴 여망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없지?"
"없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해방을 시켜주는 게 옳지 않은가?"
"해방을?"
"시켜 주어야지!…… 그 부인도 인간 세상에 참례했다가 늦게나마 한 세상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가 그 부인한테 깊은 동정을 기울이고 있는 이상 그 부인이 인제부터라도 새 방면으로 행복을 개척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까닭이야 없겠지?"
"그야 물론!"
"그러니 해방을 시켜 주어야 할 게 아닌가?"
"이혼을 해라 그 말이었다?"
"다른 사람, 좋은 사람 만나가지고 살 게코 롬…… "준은 쓸쓸히 미소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자네 같은 사실주의(事實主義)라면…… 순수보다두 통속을 위주 한다 면…… ""와? 어째서?"
태평이 성급하게 묻는다.
준은 담배를 새로 붙여 물고 천천히
"첫째, 그런 고풍(古風)의 여자루, 이혼을 당하든지 혹은 과부가 돼가지구 쉽사리 팔잘 곤치는 예를 보았나?"
"드문 건 사실이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
"또오, 막상 팔잘 곤쳐서 새사람을 만난다 치드래두 좀처럼 행복 되기 란 어려운 것…… 첩경 남의 첩더기나 가지기루 들어가서 신세 거들내기가 마침 이구…… "
"하따 그 사람 칠월에 들온 머슴이 쥔네 아씨 베속곳 걱정하기 라드니 그 소심 머리스런 건 여전하고만? 저 천장 무너질까 버서 밤에 어찌 눈은 감고 잠 자노?"
타박을 듣고도 준은 아무렇지도 않아하면서 빙긋이 웃을 뿐.
"그러구저러구 간에 그런 사람은 우선 이혼을 당한다는 그 사실이 죽음보다 두 무엇보다두 더 두렵구 싫구 슬푸구 한 일어어든!…… 백번 팔잘 고칠수가 있구 만번 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서 호랑이 발꿈치까지 치렁치렁 늘어지는 생활을 하게 된달값이라두 역시 그런 사람은 이혼당하지 않는 편이 나은 줄 여기거든! 이십 년 소박을 맞어왔을망정 평생을 장차 그대루 마칠지언정 제발 이혼만은 당하지 말기가, 쫓겨가지 말구서 소위 그 집 귀신 노릇을 하기가 소원이어든! 그것이 차라리 행복이요 절망스런 자랑이어든!"
"우리 준이 서방님의 그 선량 하나만은 내 언제나 가상히 여기지 않는 배 아닐세! 그러나 부디 그런 공상적 독단(空想的獨斷) 켸켸묵은 인도주의 말끔 청장 내구서 어서 바삐 장가가게 해!"
"우리 집 호랑마나님 말씀따나 자네두 날더러 첩을 얻으란 말인가?"
"독신으로는 기껏 철이 나가지고 무얼 좀 해보겠다고 농부가 되네 어쩌네하는 것도 다 무의미해! 독신은 반쪽 사람인데 하기는 무얼 하노? 자네가 푸 죽은 반쪽 사람으로 언제까지고 있는 걸 보고 말 수가 없어! 단연코 용서 안 할 테야!"
"이거 큰 떼거지 만났군!"
"가장 좋은 도리는 그 부인을 모셔오는 게 가장 좋은 도리지만…… 어때? 역시 절대 불가능인가?"
"내가 발광이 돼두 상관없다면…… ""그럼 여러 잔말 말고 다시 결혼을 해!…… 결혼을 하되 이혼을 않고 하 면 이중결혼이요 첩질이니깐 우선 이혼을 하는 거야!"
"………"
"이혼이 수이 안될 눈치거들랑 연애버텀 불이 번쩍 나게시니 한바탕 하는거야!"
"………"
"연애를 해서 열이 펄펄 올라서, 둘이 못살면 죽을 지경까지 이르러봐? 당장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혼을 해치우지 않나!"
"허! 좋은 훈수 한다!"
"농담으로 알지 마라! 더구나 나이 사십이 넘은 자네더러 장난삼아 연애 유희를 하라고 권고할 법이 있는가!"
"참고루 들언 둠세!"
"좌우간……"
태평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선다.
"낼…… 으음 어디가 좋을꼬?…… 으음, 본정 셈비끼야서 열한점에 만나자!"
"아무리나!"
"우리 냄이도 데리고 같이 오께시니…… "하다가 태평은 깜박 "오 참! 여지껏 혀가 닳도록 앉아서 이혼해라 결혼해라 했다고 우리 냄 이 소개 한다는 거 혹시 어찌 생각하면 안돼."
"천하 박색을 내게다 떠안길 영으로 그런 복선공작을 했는지두 모르지!"
"허허허!…… 낼 만나보게마는 자네한테야 실상 좀 과분하느니!"
"그렇다면 삼가 나아가지 마는 거구!"
"또오 단순한 후보자로 소개하는 거지, 하필 그애를 ── 이란 뜻은 천만에 아니니, 그 점두 잘 알아두어야 하고!"
우리 집 창의 불빛
태평을 작별하고 나서……
심사가 두루 산란하여, 저녁식사도 하러 나갈 것을 잊어버리고, 고옴곰 소파에 가 지여 앉아 생각이 한만없는데, 용복어머니가 마침 왔다. 특별한 손님인 것은 아니요, 대놓고 빨래를 해다 주는 여인이었다.
소매를 스치고 지남도 전세의 인연이라고 불도에서는 이르거니와, 금년 바로 정월이었다. 아파트의 소제부로 있던 노인이, 전에 한 동네 이웃에서 살던 여인인데, 지내기가 어려워서 생활에 조금의 보탬이나마 삼을까 하여 그 런 거라도 맡아다 하고자 한단다면서, 속옷가지의 빨래를 주어 달라는 청 이었었다. 그러면서, 솜씨가 퍽 깔끔스런 이라 일은 얌전 하게 할 것이고, 또삯은 여느 세탁집보다 덜 주어도 하고, 한다는 말도 했었다.
삯 같은 것이야 어떠했던 가난한 사람이 그것으로써 생활에 보탬을 삼고자 한다는 데에 준은 두말없이 응답을 했다.
그런지 삼사일 후에 소제부 노인이 용복어머니라는 그 당자를 데리고 왔었고, 그 길에 와이샤쓰 벗은 것을 두 벌 맡아가지고 갔었다.
마흔댓이나 되었을까 말까, 의복이 초라하고 기상은 가난과 고생에 찌들고 지쳤음 일시 분명하여, 몹시 초췌한 초로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너붓하니 모나지 않고 부드러움을 간직한 얼굴은 겸하여 어딘지 모르게 품도 있어 보였다.
언어와 거동도 점잖스럽다. 나이 그만큼이나 되었으면서도 외간 남자의 앞이 조심스러 한편 옆으로 넌지시 비켜 서서 소제부 노인과 준과의 수작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준이 빨래할 것을 챙겨 내놓아서야 비로소 한마디 "고맙습니다.!" 하고 치하를 하면서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한갓 그저 빨래나 해다 주는 여인이요 아무 상관도 결연도 없는 존재 이거니 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나 준은 한 사람의 끔찍 온화하고 어질어 보이는 인물 하나를 발견한 것이, 그러고 세탁이라는 하찮은 관계를 통하여 그와 조그마한 생활의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이 실없이 마음에 즐거 웠다.
그처럼 호감을 가진 때문이라기보다도 어떠한 거래에서든 셈을 또박또박 가린다거나 또는 인색히 굴지를 않는 성미 일 뿐더러 '어려운 사람이 생활의 보탬을 삼으려고……’라 던 말이 앞을 서, 두 벌의 와이샤쓰 빨래에 이 원을 집어주었다.
처음 한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내 줄곧 그렇게 세탁집의 세탁값에 비 하여 갑절이 넘는 정도로 후히 치르곤 했다.
빨래는 그런데 아무래도 전문하는 세탁집의 세탁을 따르지 못했다. 땟 물이 곱질 못하고 다림질이 서투르고 하여, 동대문 밖 광나루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다른 것은 그다지 모르겠어도 와이샤쓰 다림질 하나만은 촌태가 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래서 일은 세탁집보다도 낫고 값은 헐하고 하다던 소제부 노인의 말과는 반대로 된 모양이었으나 그것을 탓하잔 생각은 없었다. 도시에 의복 이 랄지 신변의 범절에 대하여 세밀한 관심을 가지며 구애할 줄을 그는 몰랐 다.
이런 일도 있었다.
빨래한 것을 가지고 와 보자기를 풀어놓으면서
"저어 깃이 겉으루 해졌길래 뜯어서 뒤집어 댔는데…… "하고 잘못이나 저지른 듯이 어렵사리 말을 하는 것이었었다.
"네에, 수고하섰읍니다!"
준은 짜장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건성으로 치하를 했다.
"실두 굵은실루 수웅숭 화서 맘에 안 드시믄 어떡허나 허구…… "
용복 어머니는 거듭 이런 걱정을 하면서 돌아갔다.
가타, 와이샤쓰의 깃이 해지면 뒤집어 대는 묘법이 있음을 비로소 안 준은 혼자 미소를 했다.
준은 깃을 뜯어 뒤집어 댄 그 바느질 자죽 ——— 미싱이 아니고, 또 실이 굵어서 뽄새는 없으나 ———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문득 가족적인 알뜰스럼이 그 바느질의 코코에 면면히 얽히어 있는 것 같아 부질없이 마음이 언짢았다.
어머니란, 무섭지 않은 어머니, 부드럽고 상냥하기만한 어머니이고 싶은 생각을 우연히 한 것도 이때였다.
노크라고 하는 풍속과는 아예 친해지질 않는 용복어머니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방문 밖에서 "기세요?" 하고 찾아
"네에!" 하는 대답 소리를 들은 후 살며시 문을 벙기고 들어선다.
"수고하십니다!"
준은 일어서면서 늘 두고 하는 말로 인사를 한다.
"너무 늦어서…… "
용복 어머니는 그러면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온 빨래를 풀어 탁자 위에다 놓는다.
"기대리섰지요?"
"아뇨!"
그새 며칠 별루 허는 일두 없이 바빠서 고만
"……… "
준은 일원짜리 지폐로 얼마의 돈을 꺼내서 탁자 위에다 놓아준다.
"약소합니다!"
"번번이 이렇게 후허게 주세서 하두…… "
"별 말씀을 다아!…… 빨래는 그리구, 아직 없나 봅니다. 이댐 길에나…… "
"내 애."
돈도 내놓았고, 빨래는 아직 없다고 했고, 했건만서도 용복어머니는 전처럼 곧 물러가려 하지 않고, 추움춤 그대로 망설이고 섰다. 무엇인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그러나 섬뻑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 입술만 달막 거리다 말고 말고 한다.
준은 이내 그런 눈치를 채고
'왜?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이 정면해 바라다보면서 말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는 시선을 만나서는, 더는 머뭇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용복 어머니는 가까스로 기운을 짜 "저어, 다른 말씀이 아니구…… "하고, 겨우 운을 따놓는다.
준은 십상 아마 돈 선하를 해달라는 교섭인가 보다고 생각 하면서
"말씀 하시지요?"
"저어 좀 염치 없는 청이 있어서…… "
"……… "
"두구 그 모가치 빨래두 해다 드리께시니, 저어…… "
"네, 알았 읍니다…… "
준은 돈지갑을 다시 꺼내 들면서
"조금이 라면 지금이라두 돌려 드리죠……얼마나?……"
"한 칠 원만…… "
"칠 원요?"
막상 얼마라는 것은 짐작할 바이 없었어도 설마 돈 겨우 칠 원일 줄이야 듣고 나니 생각 밖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칠 원인 이 의외로울 아무런 큰거도 없는 일 이었다. 빨래삯으로 몇십 원이고 백 원이고 선하를 청한다면 그야말로 의외로 울 노릇 이었다. 응은 하고 아니하고는 딴 문제라 치더라도…… 돈이 모두 십원짜리뿐이었다. 준은 십원 한 장을 꺼내서 먼저와 같이 탁 자위에다 놓아준다.
용복어머니는 오늘치 빨래삯으로 처음에 내논 돈은 손을 대지 않고, 마침 그게 삼 원이었다. 나중의 십 원만 집는다.
"그럼 이걸랑 도루…… "
"그 대루 다아 가지구 가십시요!"
"칠 원 말씀을 했는데 더 주시니깐 미안해서…… "
"십 원이나 칠 원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맙기야 허시지만 갚을 일을 생각 해서…… "
"칠 원만 꼬옥 소용이 되십니까?"
"내애, 칠 원만 더 있으믄 오늘은…… "
"……… "
준은 이 여인의 차라리 그처럼 화폐의 열 단위(十單位) 미만의 단위를 가지고 그 범위 안에서 그 척도로써 빠득빠득이 생활을 자질하는 생활이야말로 오붓하니 군것의 침노할 빈틈과 딴 걸 돌아볼 여념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그 긴박(緊迫)하고 핍절스런 품이 '가장 내용이 알찐 생활’ '가장 생활적인 생활’이 아닐는지 싶었다. 더우기 화폐라는 것이 물자 소비( 物資消費) 의 매개물일진댄 물자를 헤피 할 수 없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한층 더 그러하리라 싶었다.
"그걸라컨 그럼 갚을라 마시구 댁의 애기들 무어 맛난 거래두…… "그러다가 준은 생각이 나서 묻는다.
"참 애기들은? 여럿 있으십니까?"
지날말 삼아서가 아니라 아주 긴하게 묻는다. 모친 강부인을(그 점 하나만은) 탁했든지 준도 역시 어린아이들을 매우 좋아하였다.
"지끔 둘 있답니다!"
"네에!……그럼 남맨가요오? 둘이 다아 아들애긴가요?"
"오뉘랍니다…… 토옹 셋을 두었다가 맨 큰아인 명색 출가라구 시키구…… 저 업때…… "
"혼인을 하섰어요? 그동안에?"
"내애 숭내만 냈죠!"
"온 소문두 없이!……"
준은 속으로 그런 줄 알았으면 무얼 부조라도 좀 했더라면 피차에 즐거웠을 걸 생각 하면서 "국수나 먹으러 오라구 청하시는 게 아니라!" 하고 웃는다.
웃음엣말이었지만 일변 진정이기도 했다.
지극히 가난하게 시집을 가는 그 새악시, 그는 아마 어머니를 닮아서 퍽도 유순하고 얌전스럴 것이었었다. 이쁘게 생기진 않았어도 오래비가 누이동생이 이쁜 것처럼 그렇게 마음에 이쁠 것이었었다.
그러한 그를 위하여 경사로운 혼인날에 패물이 되었던 옷감이 되었던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시집가는 그로서는 여지껏 가져보지도 못하고 가져 볼 마음도 내지 못했을 무어나 화려하고 값진 선사를 가만히 손에 들고 가서 그 를 즐겁게 해주며 행복하라고 축복을 해주고 간략하나 진심껏 권하는 두어 잔의 술과 국수를 대접받으면서 그들의 기뻐함을 함께 기뻐하고.
준은 이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할 노릇을 못하기나 한 것처럼 민망한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였다.
'……소문도 없이 그동안에 혼인을 했느냐고. 국수나 먹으러 오라고 청 할것이지 그랬느냐고……’ 이 두 마디 말의 효과는 매우 컸다.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이나 그 말로써 그동안의 서로간 '노방엣사람’인 데서 오는 등 한 감( 等閑感) 과 수스럼이 일시에 풀리면서 훨씬 의(誼) 좋아지고 무관함을 느끼겠었다.
용복어머니는 저절로 미소를 드리우면서, 그러나 쓸쓸히
"아이, 혼인이나마나 하두 참 무엇 헌…… "하다가 말끝을 흐리고 만다.
"혼인은 다 일반인데 번화하게 차리지 못했다구서 경사스럽지 말란 법이야 있읍니까?"
"쯧, 그야 그럴 테죠만!"
"신랑은? 무얼 하시는 분이죠?"
"내애…… 거저…… ""시 굴인가요?"
"아뇨, 저어…… "
용복 어머니는 차차로 더 거기에 대한 여러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 였다.
준은 막상 어떤 꺼리는 곡절이 특별히 있음인 줄은 알 바이 없고, 한갓 나의 궁졸함을 남에게 들추어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항용 가난한 사람네 들의 일반 편심이거니 할 뿐이었다.
그렇든 저렇든 구태여 남을 괴롭힐 며리가 없는 것이라 준은 이내 화제를 돌리어 "그러 구서 그 아래루 둘이 있으시군요?"
"내애."
"학교는 보내시구요?"
"안직…… 명년에 둘째년을 들여보내구 내내명년에 또 막내녀석을 들여 보내구 둘을 한꺼번에 보내야겠어서 큰 시방 걱정이랍니다! 큰아이 하나만 뚝섬 학굘 보내서 보통과 겨우 졸입시키게두 여섯 해 동안 뼈가 빠졌는데…… "
"고생 스러두 학굔 보내서야지 어떻게 합니까!"
"쯧, 그럴생각은 생각이지만 서두…… "
"지금 그러니깐 여섯 살 네 살 그런가요?"
"일곱 살 다섯 살 그렇답니다."
"한창 시방들 장난 많이 할 때루군요!"
오랜 이웃집 아주머니와 터놓고 이야기하듯 한다.
"애기들이 어머니 이른 말 잘 듣습니까?"
우스운 질문이나 저 자신의 어렸을 적을 여겨서 하던 말이었다.
준은 너무도 어머니의 이른 말을 잘 듣는 아이였었다.
어머니가 한번
'이래라!’ 하면 곧 그대로 좇았다.
어머니가 한번
거기 꿇어앉았거라!’ 한다든지 혹은
'거기 앉아서 글 읽어라!’ 한다든지 하면 밤새도록이라도 진종일이라도 꿇어앉았고 글을 읽고 했다.
어머니가 한번
'그럼 못쓰느니라!’ 하면 꿈쩍 못하고 말았고, 무슨 일이 있든지 그에 거역을 하지 못했다.
비교적 내면적이요 명랑 쾌활하질 못하고 침울한 성질은 성질이었지만 그렇더라도 한참 자랄 무렵의 어린아이임엔 다름이 없었다. 거침없이 바깥으로 싸다니고 구들장이 꺼지도록 쾅당거리며 뛰놀고 소리지르고 모든 것 을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해보고 싶어하고 이런 선머슴이긴 일반이었다.
강부인은 그런 것이 다 쌍스럽고 호로스럽다 하여 어린 준을 새색시처럼 얌전하게 어른처럼 의젓하게 버릇 가르치며 닦달하기로만 들었다.
이런 준은 사지를 결박지운 것같이 꼼짝할 수가 없고 답답했다. 늘 마음은 무겁고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키는 노릇이니 하릴없었다. 싫어서 싫어서 못견디면서도 억지로 억지로 그 영을 받들었다. 만일 일호 거역 을 하고 보면 벼락 같은 꾸중과 사정없는 달초가 내리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어머니!’
준의 어렸을 적 모친 강부인에 대한 감정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좋은 어머니, 임의롭고 정다운 어머니, 자애스런 어머니, 이러한 어머니에의 즐겁 고행 복된 기억은 별반 없었다.
장성한 후에야 준은 비로소 모친이 그와 같이 무서운 어머니로만 시종 한 연유를 이해는 할 수가 있었다.
버릇이 없다든지 불량하다든지 학업을 게을리한다든지 그 밖에 좌우간 남의 눈에 거슬리고 벗는 행동을 하여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 할 수 없다!’
'홀에미 자식은 어디가 달라도 달라!’
이런 평을 혹시라도 듣게 될까 저어해서, 그래 엄하고 준열히만 가르치며 단속을 했던 것이었다.
희미하나마 준은 부친이 작고하던 열한 살 이전과 이후의 기억을 더듬어 모친의 태도를 판단할 때에 역력히 그것을 깨우칠 수가 없었다. 부친의 생존 시절에도 부친보다는 모친이 준의 훈육과 교도를 주장하다시피 했었고 그때에도 부친에 비하여 모친이 훨씬 엄격하게 굴기는 굴었었다. 부친한테 종아리를 맞는 일은 없어도 모친한테는 가끔 있었다.
그러나 고만한 엄격쯤 부친의 별세 후로부터 시작된 엄격함에다 대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지 않은 걸로 얼마나 꾸지람을 들었으며 매를 맞고 했던고!
고옴곰 어떤 때 생각을 하노라면 한편으로는 남달리 깊은 애정이 없던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억제하면서 한갓 엄격하게만 자식을 다루어오던 당시의 모친의 태도하며 심정이 일변 동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암만 이해와 동 정은 할 수가 있어도 지금에 이르러 와락 그 모친에게 향하여 정이 솟는줄은 모르겠었다. 철도 날 대로 났고 또 남의 자식 된 윤기상(倫氣上) 마음 가운데 모친을 범연히 여긴다거나 괄대를 하던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종시 탐 탁하고 알뜰한 자식 노릇은 하여지질 않는 것이었었다.
'무서운 어머니’를 '섬기거나’했지 어리광도 응석도 부리지 못하고 자란 준은 자연 그래서 순한 여인네를 보면 ' 무섭지 않은 어머니렷다!’ "저런 어머니한테 자라는 아이들은 어떤지 몰라?" 하는 부러움과 호기심이 나곤 하던 것이었었다.
용복어머니는 준의 그런 돌연한 질문을 별로이 이상스러워하지 않고 천연 히 대답한다.
"이른 말 잘 듯는 게 다아 무업니까! 당 최…… ""더러 때려주구 하시나요?"
"어따 손 댈 데나 있어야 때려주구 말구 허죠?"
"………"
준은 이 여인다운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기집아인 둘을 다 성가시잖으게 길렀는데 끝엣것 사나이놈은 어디서 그런 별종이 생겼는지!…… 장난 심허구 고집 세구…… "
"그래두 거져 내버려두시는군요?"
"쯧, 그렇죠!"
"………"
"그러나마 즈이 아버지 되시는 이가 천하 용하디용한 양반이 돼서요…… 암만 어린놈이 말썽을 부리구 이른 말은 안 듣구 해두 죄외 받아주시지 좀초롬 이노옴 소리 한번 없답니다!"
"………"
"그러시군, 노오 말씀이, 가난을 타서 남의 앞에 나간다치면 가뜩이나 추레해 뵈구 허는데, 무슨 탁에 집안에서꺼정 자식 길 꺾어줄까 보냐구…… 아주 질끔을 하시기 때문에, 더러 따끔하게 좀 때려주구 싶어두 못 한답니다!"
"참, 바깥으런은 무얼 하시나요?"
"………"
용복어머니는 곧 대답을 않고, 방긋이 웃더니
"금점 판으 가 기신답니다!"
"금점, 요?"
"내애!"
"금광 말씀이죠?"
"내애!"
"금광을…… 걸 하시나요?"
"금광을 하기나 했으면 그래도 괜찮으라구요?"
"그럼?"
"덕대합니다!"
"덕대?"
"내애!"
금광의 덕대라면 준의 개념껏은 천하 우락부락하고, 소위 금일 충청도, 명 일 전라도의 막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방금 이야기를 듣고 얻은 상상으로 하든지, 또 그 아낙인 용복어머니의 품 있고 쌍스럽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든지, 노상 그런 사람일 것같이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길에 종살 하섰나요?"
"아뇨. 한 칠 년 되는지 마는지…… ""그 전엔?"
"이럭저럭 거저…… 장사두 허구, 더 들이껴선 월급생화루 지내기두 허구…… "
그 말에 준은
'…… 하다가, 돈이나 좀 잡아볼까 하구서?……’ 하고 묻는 대신
"금광이면 세월이 좋다지 않습니까?"
"만날 좋니 무슨 소용이 있나요?"
"?……"
"것두 내 손으루 금점을 헌다거나, 하다못해 분광이래두 헌다믄 술 바랄수두 있구 허지만…… ""……… ""우리 집 그이가 허시는 건'판띄기’ 덕대라구 일꾼들 데리구 남의 금 캐주 구서 일꾼 품삯 나오는 데서 한 깃 차례 얻어먹는 거래요!"
"………"
"세상 못해 먹을 건 금점판 판띄기 덕대라는데!……"
"………"
"행여 그러다가 누가 밑천이래두 대주면 분광이래두 한 구더기…… 존자리 눈익혀 두었다 한 구더기 파볼까 허구서…… 쯧!"
"………"
준은 속으로 역시 꿈이 있는 것이로다 하였다. 그러고 좌우간 흥미 있는 인물인 듯하니 종차 기회를 타서 한번 만나보리라 유념을 했다.
"아이, 날 좀 봐! 얌체없이 서서 얘길 늘어놓구!"
용복어머니는 그러면서 보자기와 돈을 챙겨 들고 한걸음 물러선다.
"주서서 자알 쓰겠읍니다만 이걸 갚아 드리자면…… "
"용복 아버지가 인제 금광으로 큰수 잡으시거들랑 갚으십시요그려?"
"하늘서 별 떨어지길 바라지, 어느 세월에…… "
광화문 네거리를 향하고 걸어오면서 내내 용복어머니는 그 손님, 준을 두 고 생각이다.
볼수록 얌전했다.
인정 있고……
점잖 스럽 기도 했다. 뉘 집 젊은인지 집안이 행신하는 집안인 성불렀다.
사세도 군색하지 않은 모양이고……
점순 할아버지(천거해 준 소제부노인) 말이, 대학교 출신이고 하댔으니 훌륭한 자격자일 것이다. 서른은 좀더 되어 보이는데 어째 객지에서 혼자 그렇게만 늘 지낼까.
아직 장가 전인지, 그렇잖고서야 거기 와서 있은 지가 ( ) 년이나 된다는데, 혹시 상처라도 했거나…… 여기까지 저절로 생각이 미친 용복어머니는 필경
'우리 용순이도!……’ 란 소리를, 거진 입밖에 내어 중얼거린다. 용순이란 요 전에 혼인을 했다는 맏딸이다.
이미 혼인을 하여 벌써 다 지나간 일이요, 또 그렇지 않더라도 처지가 서로 월등히 다르며 도시에 생각이나마 하는 것부터가 부질없은 노릇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꿈을 이치와 사리(事理)대로만 꾸는 것은 아니었다.
용복어머니는 비각(碑閣) 앞에 가 충그리고 서서 무한 망설여쌓다가 이윽고 일단 지나친 정류장으로 도로 가서는 황금정행의 전차를 탄다.
용순이 청진동서 살고 있었다. 잠깐 들러서 보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번번이 그래오듯이 오늘도 역시 ' 조금 더 참았다 떳떳이 시집으로 들어가거들랑……’ 이렇게 단념을 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돌려놓던 것이었다.
왕십리 종점에서 전차를 내려 성동(城東) 정거장을 바라보고 종종걸음을 친다.
전차로 곧장 동대문으로 가서, 게서 바로 광나루(廣壯里) 궤도 차( 軌道車) 를 타면 쉽고 편키는 하지만 차삯이 이십 전이 드는 대신, 왕십리와 성 동사이를 도보로 연락하면 오 전이 덜한, 십오 전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길바닥만 내려다보면서 부지런히 걷다가, 앞에서 밀고 오는 엿수레와 부딪칠 뻔했다.
몸을 비키면서 보니, 여러 가지 그득히 벌여놓은 엿들이 하도 소담 스럽고 좋았다. 목침 덩이만씩한 검은 엿, 흐벅진 땅콩범벅, 팔서리 같은 깨엿, 모두 먹음직스럽다.
노상 그 앙징한 제 팔뚝을 쥐어잡아 보이면서, 용복이가
"엄마, 나, 이마한 엿!……" 하고 조르던 생각이 문득 났다. 그러면서 조금 아까 그 손님이 ——— 준이 '…… 댁의 애기들, 무어 맛난 거나……’ 하던 말이 아울러 생각났다.
한 가락은 용복이 몫으로, 용옥이 몫도 한가락 해서 두 가락을 샀다. 이 십전을 남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차삯 오전보다 훨씬 아까운 줄을 몰랐다.
일곱시가 지나고 깜깜 어두워서야 겨우 광나루에 당도하여 집으로 향했다. 반달음질을 쳤다. 두 어린것이 어찌나 하고 있나 싶어 허둥거리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이윽고 집 뒤창이 빤히 불에 비쳐 보였다. 어떻게도 반갑고, 우선 마음 이 뇌는 지…… "용복아? 용옥아?"
거푸 부르면서, 싸리문도 없는 마당으로 들어선다.
"어머니이!"
용옥이가 앞문을 박차고 뛰어내려와서 아랫도리를 안고 늘어진다.
"무섰지?"
"응!"
"용복인?"
"어태 울다가 자!"
"절 으쩌니!"
용복이는 차디찬 방바닥에 가 새우처럼 꼬부라트리고 잠이 들었다. 눈물자 죽이 말라붙었다.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더니, 저 누웠던 자리를 휘휘 둘러보면서 "내 엿!" 하고 칭얼댄다. 꿈을 꾼 것이었다.
"이마한 내 엿! 흐응!"
"오냐 엿 여깄다!"
용복어머니는 얼른 사가지고 온 엿을 손에다 들려준다. 그러면서 무엇 이 아마 씌워대서 엿을 사게 됐던가 보다 싶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 이 가슴 뿌듯이 차올랐다.
6. 부질없은 우연
준은 약속한 시간 열한시에 태평과 나미를 만나러 마침내 셈비끼야엘 가지 않고야 말았다. 그러고서 경성역으로 달려나가 고향 내려갈 차표를 사기까지에 성공을 했다.
실로 성공이라고 함직한 것이었다. 번연히 파탈과 비극이 전제된 떳떳치못한 연애에의 모험을 탐하는 대신(그 유혹을 물리치고) 이십 년 소박하던 옛 안해를 아뭏든 찾아가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밤을 잠을 못 이루어가면서 나미와의 연애를 생각하며 지냈다. 가슴은 흡사히 이십 안팎의 어린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설레었다. 그는 나미와의 연애가 벌써 말 짜듯이 다 짜놓은 기정 사실인 것같이 여겨졌었다.
그것이 즐거우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태평에게 한 말대로
'버젓한 안해가 있는 몸이……’라는 생각이 엄연히 앞을 막곤 하던 것이었었다. 파탈이 전제된 연애, 그것은 번연히 알면서 죄와 비극을 장만함이었다. 단(甘味[감미]한) 비상을 마시기처럼 두려운 일이었다.
마시지 말잘 수도 없고, 그렇다고서 철없이 마셔버릴 수도 없고, 단 비상은 결국 슬펐다.
아침이 되자 일찌거니 일어나서 소쇄를 마치고, 아파트 식당에서 조반을 먹고, 그러고는 출입할 채비를 말끔히 차리고서, 하옇든 시간을 기다렸다. 진득이 있지를 못하여 방안을 오락가락 거닐기도 하고, 그러다간 소파에 가 잠깐 앉았는가 하면, 또 일어서서 창 앞으로 서성거리고 했다.
열시 반이 되었다.
'천천히 나가 보나?’
그러면서도 선뜻 나서진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거진거진 열한시가 되어왔다.
'가?……’
'가서……?’
'으음…… 으음……’
'필경엔 태평군 말짝으로 결혼을 아니하고는 죽을 지경까지 이르러! ……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혼을 한다!……’ '이혼? 이혼을 한다?’
준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혼토록은! 이혼토록은! 나만 지금부터 행복되자고 이혼을 하다니? 영영 막가는 길이 아닌가! 오직 한가지의 불쌍한 위안조차 뺏는 짓이 아닌가!’ 거듭 머리를 커다랗게 흔들었다.
'남의 청춘을 그대도록 야속히 짓밟아 주고서 인제 내일 모레가 사십인데!…… 사십이면, 여자로 나이 사십이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청춘은, 인생은 영구 히……’ 하다가 준은 별안간 "아!" 하고 소스라쳐 놀랐다.
안해 서씨의 나이 서른여덟에 불원 사십이요, 그리하여 속절없이 그대로 늙고 만다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알았거나 깨달은 바는 아니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태평과 더불어 그런 이야기를 했으되, 이다지는 결리며 아픈 줄을 몰랐었다.
했던 것이 오늘은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사실이 놀라왔다.
'결혼 초야에 그 못당할 욕을 보여주어…… 처녀로 이십 년을 늙혀와…… 완전히 무덤 속의 청춘이었다!’ '무덤 속에서 청춘을 보내고 나이 서른여덟…… 올과 내년이 지나면 마흔…… 마흔으로 그 사람은 인생은 그만이다!…… 무덤 속에서 살아온 청춘이 무덤 속에서 마침내 인생을 지우고 만다!’ 준은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다. 도저히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제 몸에서 무서운 불멸의 죄악이 쉴새없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방금 집이 황황 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마음 다급함과 공포에 푸르르 몸이 떨렸다.
나미도 연애도 태평도 죄다 없고
'어떻 게든 무슨 도리를 차려야!……’
이렇게 속으로 외치면서 방을 뛰쳐나왔다.
행구 하나 갖추어 들지 않고 경성역으로 달려나왔다.
열한시의 부산행(釜山行) 준급행을 행여 탈 수 있을까 했으나 많이 미급 이었다.
그 다음 열한시 이십분의 대전행(大田行)은 완행도 완행이려니와 대전서 호남선과의 연락이 더디었다. 부득불 열두시 오십분의 급행을 기다려서 타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연락은 마찹지 못했으나 급행이어서 마음 산란한 이 판에 속이라도 후련할 터이었다. 연락이 정히 불편하면 대전서 유성온천에 들러 하룻밤 유해 갈 셈치고 좌우간 이대로 떠나놓고 보는 것이라 했다.
시간이 한 시간 반 넘겨 남았는지라, 차표 사가지고 역 앞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잊었던 나미와 태평이 비로소 생각키었다.
열한시 반이 채 못되었다. 시간 에누리를 하는 줄만 알고서 아직도 까막까막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거니 하매,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는 말든, 사뭇 가보고 싶은 생각이 꿀안 같았다. 일껏 차례 돌아온 행복을 못본 체 외면을 하여 무단히 놓쳐버리기가 아까운 것도 같았다.
'가?……’
그러나 일어서지는 못했다.
마침 축음기에서 「비창교향악」이 울려나왔다.
어렴풋이 그 곡조인 것만을 분간을 하나, 음악에 비교적 귀가 무딘 그는 곡의 내용에서라느니보다도 「비창교향악」의 명칭에서 방금 저 마음의 ' 비장’을 느꼈다.
전화라도 걸고 태평에게 무어라고든 가지 못하는 발명을 할까 하였으나, 그리고 적이나 그것이 친구를 대접하는 도리일까 하였으나 그러노라면 필경 불 잡히기 가 십상일 터이니 난감스럽다.
못 받아볼 때 못 받아볼망정이라도 명함에다 간단히
"고향에서 급히 부르는 전보가 왔기로 총총히 내려가기에 언약을 지키지못하노라." 는 사연을 적어서 메신저에게 들려보내고 말았다.
찻간은 언제나 일반으로 붐벼 가까스로 한 자리를 얻어 앉았다.
차를 타고, 차가 드디어 떠나고 하니 그제서는 더럭 걱정이 솟는다.
어떻게든 무슨 도리를 차려야 하느니라고, 시방 허겁지겁 이렇게 내려는 간다지만 내려가기로소니, 가서 무슨 도리를 어떻게 차릴 것인지가 막연했다.
하기야 새로이 남편으로 돌아가 '이십 년 만에 비로소 그를 안해로써 찾는 것’이 오직 하나의 좋은 도리일 것이었다. 그렇것만 거기엔 도무지 자신이 나지가 않았다. 오히려 예의 공포증(恐怖症)이 어느새 벌써 돌지를 않는가. 보나마나 집에 당도하여 눈앞에 그가 얼찐만 하여도 가슴이 맞 방망이를 치고 사족이 떨려 똑바로 한번 치어다보지도 못하고 말 참이었다. 그러니 정히 그럴 바이면 이 행보가 아무 소용도 없는 노릇이다 싶고 후회스런 생각이 나기도 했다.
차가 수원역(水源驛)에서 잠깐 머무를새 준과 마주 앉았던 손이 내리고자 리가 비었다. 서서 가는 사람도 많아, 이내 양장으로 차린 여자가 들어 앉았다.
무심코 그를 보는 준은 깜짝 놀랐다.
어쩌면 그다지도 같은지.
후리한 몸매…… 시원하고도 총명이 어리어 있는 이마…… 영롱한 눈초리가 좀 긴 듯하다.
도고하고 다분히 고집 세어 보이는 코…… 갸름하니 하관이 빠르고 작은 입과 작은 턱…… 어제 석양에 태평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미를 두고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 이었다.
이상한 일도 있다고 신기스러워하다가 정말로 그는 놀라운 것을 보았다.
여자가 우선 들어다 놓는 조그마한 여행가방의 명함꽂이에 꽂힌 명함에가 또 렷또렷이도 '吳奈眉’(오나미)라고 박여 있지를 않는가.
태평은 준이 설마 그런 딴전을 하고 있는 줄을 알 턱이 없고 셈비 끼야에서 까맣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미도 물론 데리고 같이 왔었다.
나미는 실상 아침에 갑자기 욕지도(欲知島)에 있는 그 부친이 병이 침중 하다는 기별을 받고 열한시차로 떠나 통영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그런 것을 태평이 열한시차나 열두시 오십오분차나 저기 가서 당 도하 기는 매일반이니 한 열차 늦게 떠나고,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행구까지 다 차리게 하여 데리고 왔었던 것이다.
열한시가 그대로 지나가고 십 분 다시 이십 분 다시 삼십 분, 삼십 분이 넘도록 감감소식이 없자 태평은 기다리다 못해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방문이 잠기고 나갔다는 대답이요 몇시에 나갔느냐고 물으니 아마 열한시 전에 나간 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두 번도 오고 남았을 겐데!"
태평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도로 자리에 와 앉는다.
새로 가져다 논 아이스크림을 뜨다 말고 나미가 건너다보면서 묻는다.
"누군데 그러우, 오빠?"
"내 친 군데…… "
"꼭 만나야 할 사람이우?"
"응…… 냄이두 성명은 혹시 알걸? 임준이라 구…… "
"임준?"
"소설 쓰는…… ""오오."
"아나?"
"작품 꼭 하나 읽었는데…… 토옹해서 셋인가밖에 없대 드만 서두…… "
"어떻든 고?"
"하나만 읽구서 다안 말할 수 없지만, 예술이 그럴래선 고통이지 어디 낙( 樂) 이우?"
"흐음…… 사람은 착하고 참 좋니라!"
"………"
나미는 그저 귀넘겨 듣고 만다.
열한시 사십분이 되었다.
태평은 꺼내 보던 시계를 도로 넣으면서
"이 문딩이가 어디로 새버린 게로다…… 전차에 치어 죽었든지…… "하고 악담을 한다. 조금 짜증이 난 것이다.
그러나 곧
"그 놈의 아아를 사촌매부를 좀 삼을까 했더니…… "하면서 싱그레 웃고 나미를 넘겨다본다.
"뭐유?"
"아니다! 내 혼자 하는 말이다!"
"………"
나미는 그제서야 비로소 태평이 이러는 속을 알았다.
"가자!……"
태평은 벌떡 일어선다.
"가서 즘심이나 묵고…… 즘심 시켜 묵고 떠나자면 시간이 바쁘겠다!"
나미도 따라 일어섰다. 무엇인지 모를 조금 섭섭한 것 같았다.
둘이는 명치정의 뎀뿌라 집으로 향했다.
얼마 동안 말없이 걷다가 태평이 신칙하듯 일러들린다.
"가서 아버지 병관이나 잘해 드리고 있거라?…… 배편이 마침 없거들랑 가시 끼리라도 해달라고 해서 내일 바로 건너가게 하고?"
"내애."
"아버지 병환 좀 우선하시다고 곧 도로 올라오지 말고오?"
"왜?"
"내 한 달 예정이니 다녀올 때까지 기대리고 있어!"
"아이 갑갑해!"
"그러고오…… 장두식군은 나는 절대 반대로다!"
"………"
"그 군이 한편 생각하면 믿음직스런 위인은 위인이지만 대체로 정치쟁이( 政治家), 실업가(實業家) 들이라껀 아낙을 밥은 배불리 먹여도 맘을 질겁게 해줄 줄은 모르느니라!"
"호호호! 오빤 그 정치쟁이 실업쟁이 아니우?"
"나야 사람 됨됨이가 근복적으로 우수하지 않나! 허허허허!"
나미는 시간 빠듯이 경성역에 당도해 나오느라고 자리를 잡지 못 하고서 수원까지 선 채로 왔었다. 그러다 마침 가까이서 자리가 나는 것을 보고 와서 겨우 앉는다는 것이 하필 달아나다시피하는 사람과 무주 앉게 되었던 것이다.
준은 이건 필시 무엇이 시키는 노릇이로다 했다.
혹시 메신저에게 적어보낸 명함을 받아본 것이나 아닌지, 그러고서 넌지시 이렇게 따라보낸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가사 그 명함을 받아보았다 치더라도 태평으로 앉아서 구차히 이런 아쉰 짓은 단정코 할 까닭이 없을 터이었었다. 태평 그 자신이 쫓아왔다면 그건 또 몰라도…… 그러니 역시 우연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는데, 우연하고는 너무도 공교로운 우연이어서 '제삼의 의사’(第三意思)라는 걸 느끼지 않지 못하겠었다.
한편으로는 성명이 같은 딴 사람이나 아닌가 하는 의혹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진실로 위험한!) 가정은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짐짓 외면을 했다.
여자는 조심하며 들어오더니 외투를 우선 벗어 걸고 가방으로부터 집지를 꺼낸 후 커다란 과실 바구니서껀 선반 위에다 얹어놓고 하고는 비로소 자리에 앉는다. 앉으면서, 그러고 앉아서도 젊은 남자의 앞이라서 높이 드러나는 앞정강이를 조심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는 사이 준의 시선은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한번도 빗기지 않는다. 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노릇이라 심히 체모가 아닌 줄도 또한 의식 하지 못하던 것이다.
"시악시 보소, 어디까지 가는기요?"
나란히 앉은 노파가 묻는다. 그와 나란히는 이 노파가 앉았고 준의 옆에는 시골 영감이 앉았고 했었다.
여자는 마악 잡지를 펴려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의 대답이 준에게는 매 우기대 스럽다.
"저어 통영꺼정 가요."
통영이면 태평이 있는 곳이다. 인제는 갈데없는 '그 나미’요 성명 같은 ' 딴 나미’는 적실히 아니었다. 준은 아주 안심이 되었다.
"그럼 데구(大邱) 지나가제에?"
노파가 다시 묻는다.
"내애."
"아이고 십상 잘데었다! 데구 가거든 날로 부디 좀 일러 주소 잉?"
"내애, 알으켜 드리께요?"
고개를 까댁까댁하면서 상냥히 대답을 하는 양이 소녀같이 앳되고 어떻게도 귀엽성스런지 몰랐다.
차는 가난한 정거장을 무시하고 호기롭게 달린다.
차창 바깥으로 연방 다가오는 전야(田野)와 산이며 언덕은 아직도 이월이라 한결같이 여위고 어설프다.
스팀이 포근한 관계도 있겠지만 차창으로 쬐어드는 햇살은 그러나 어디라 없이 맑고 보드라와 조금은 봄을 느끼게 한다.
여자는 맑은 그 햇빛을 손등에 받으면서 비스듬히 창을 향해 앉아서 잡지를 읽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어찌하여 고개를 돌리다가 준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준은 여전히 그 를 '감상’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이내 잡지 위로 눈을 내렸으나 하도 위심턴 남자의 시선이 뒤미처 마음에 좀 걸리든지 곧 되짚어 눈을 든다.
여전히 보고 있었다. 그러하되 항용 남의 여자를 보고 탐내어하는 그런 불쾌함이 없고 마치 애기가 무엇에 정신이 팔렸을 때와 같은 무사심한 눈이요 얼굴이요 했다.
이상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참만에 또 보니 또 그러고 있고…… 여자는 이번엔 시선을 피하려고 않고 마주 언제까지고 눈겨룸을 한다.
그제서야 준은 저를 깨달았다. 그러나 갑자기 외면을 하여 시침을 딸 수는 없었다.
여자가 발씬 웃을 듯하더니 입이 열린다.
"아마 심심하신가 본데…… 이거 잡지 빌려 드릴까요?"
"………"
준은 말없이 미소하면서 고개만 한번 끄덕인다. 재치 ── 위트가 있고, 상당히 신랄(辛辣)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신랄했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너그럽고 일종 장난스러웠을지언정 악의는 없었다.
웬만한 여자 같으면 이런 경우를 당장 살얼음 같은 새침한 내색을 드러내면서 '별 사내도 다 보겠네!’하는 듯이 포달스럽게 홱 돌아앉아버렸을 것 이었었다.
또, 제법 당돌하다는 여자라야 고작 정면으로 대놓고 모질게
"왜 남의 여자를 체통없이 그렇게 보아쌓는 거예요!" 하고 질책을 했을 것이었었다.
나미는 그러나 처음부터 이 낯모를 남자의 퍽, 그러면서도 아무런 불순 한 티가 없어 보이는 데에 별로 불쾌한 생각이나 반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나미는 스스로가 남을 면대하여 함부로 그렇게 볼성 없이 노골한 거조를 삼가기를 잊으려고 하지 않았다. 매양 좋은 교양에서 우러나는 침착이요 여유이었을 것이다.
나미는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말끄러미 한참이나 치어다보고 있더니
' 자요?’ 하는 듯이 잡지를 내어민다.
준은 건성으로 잡지를 받으면서 목례한다.
"남을, 더구나 여자를 너무 자꾸만 보시믄 점잖으신 이가 체모가 깎인다구 허잖어요?"
"………"
준은 잡지 표제로 잠깐 내렸던 얼굴을 도로 든다. 그새보다도 피식이 더 웃는다. 그러다가 한단 소리가 "갑 재기, 통영은 어째 내려가시요?"
"내애?……"
나미는 더럭 이상해한다.
통영을 가는 줄은 방금 옆엣 노인과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 하겠지만
'갑 재기……’ 그리고, 통영은
'어째……’ 내려가느냐고 하니, 예사엣말이 아니었다.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었다.
또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보아야 배젊은 사람이, 초면에 남더러
'…… 내려가시요?’ 라니?
나미는 문득 전에 알던 사람인데 깜박 그만 몰라보았나 보다 하고, 고개를 연해 갸웃거려쌓는다.
그러나, 생김새하며 음성이며 암만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준은 그 눈치를 알아채고는, 하는 양이 재미스러서, 가만히 보고만 있다.
"누구시든가요?"
나미는 하다하다 못해 고즈너기 바로 대고 묻는다. 아는 사람을 몰라 본 소홀을 사(謝)하는 눈으로…… 준은 그 실수를 곧 사할 줄 아는 솔직함이 또한 기뻤다.
바른 대로 대답을 해 줄 것이러되 준은 조금 더 짓궂게 굴고 싶었다.
"초면입니다!"
"초면요?"
"절 아시나 본데요?"
"아마……"
"지가 누군데요?"
"………"
준은 대답을 하는 대신 턱으로 시렁을 가리킨다. 가방에 매달린 명함 꽂이가 글자는 잘아서 물론 보이지 않아도 대롱대롱 잘 눈에 뜨인다.
준의 시선을 따르던 나미는 얼른 그것을 깨닫고
"오오!……" 하다가 도로 고개를 꺄웃
"그래 두우?……" 하면서 준을 본다. 미리서 사람을 알고 있었어야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인 줄을 알아챘을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나미는 어서 그것을 설명을 하라고 눈으로 재촉을 한며 기다린다.
준은 지금 이 상태인 채 끝없이 이대로 차가 달려가기만 하는 것이란 다 면 좋겠었다.
준은 일부러 유유히 담배를 피워 문다.
나미는 기다리기가 갑갑하여 이마가 저절로 찡그려진다.
그럴수록 준은 짐짓 더 딴청을 하느라고 아까 받아놓았던 잡지를 집어 돌려주면서 "인전 심심치 않군!"
"………"
좀 밉살머리스런 모양, 잡지를 홱 채듯 받더니 되는 대로 중간을 펼쳐 눈을 까라뜨고 앉아서 읽는 시늉을 한다.
그 뾰로통한 것도 준은 보기에 또한 즐거웠다.
차는 쉴새없이 줄기차게 달린다. 잘 달리니 시원하기는 해도 시간이 그만 큼 빨리 졸아드는 일을 생각하면 속력이라는 것이 고맙지도 않았다.
"통영이면…… 어디서 갈아타지요?"
"전 몰라요?"
"몰르구 통영을 어떻게 가시요?"
"걱정 마세요!"
그러면서야, 속눈썹 새까만 눈을 치뜨고 배깃이 웃는다.
"즘심 어떡허섰오."
"………"
나미는, 점심이란 소리에 퍼뜩, 태평과 점심을 먹던 것으로부터 셈비 끼야에서 들은 말이 생각이 났다.
'혹시 이이가, 그…… 임씨라던 그인가?’
그러나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지, 비슷하게나마 그럴 듯싶은 무엇이 있 어서가 아니었다.
"식당차루 갑시다? 즘심 먹으면서 궁금증두 풀어 드리구 허께시니…… ""전 먹었어요."
"차래두?……"
"혼자 다녀오세요."
누군지 아직 알지도 못하면서, 또 가서 안 결과 별로 임의롭지도 신 신 치도 못한 면분일는지 모르는 터에, 속 차리는 여자라면 선뜻 응할 이치가 워너니 없을 것이라 하여 준은 다시 더 권하지 않았다.
시장기는 들고 그렇다고 혼자만 가자니 그동안의 시간이 아깝다.
차는 그새 벌써 평택을 지난다. 좀 있으면 천안은 정거를 하게 되니 벤또를 삼직하나 저 사람을 앞에다 앉혀놓고 그걸 쩍쩍 먹을 일이 자못 마음에 시장하다.
참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하니 재미있는 것이 있다. 시렁에 얹어둔 과실이다.
준은 한참이나 시렁을 올려다보고 나서 근 천으로
"나, 저, 과실 한 개만 주시요? 배가 고파 죽겠소!"
나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을 잔뜩 오므려뜨리고 말도 못 한다.
준은 평소엔 야속히 말주변 없고 심심하기로 호가 났으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수작이 능청스럽고 이야기도 잘 하고 하는 것인지 제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나미는 과실 바구니를 내려가지고 맨 걸 풀어서 우선 옆엣 노파와 또 시 골 영감한테 각각 권한 후에 저도 배를 한 덩이 집고는 그대로 준에게다 내 맡긴다. 향기가 물큰 떠돈다.
싸개지를 보니 본정의 어떤 상점이다. 그렇다면 태평이 사 들려주었기 가십 상일 것이었다.
준은 사과 한 알을 꺼내 들면서 묻는다.
"선사 소용인가요? 찻간에서 자실 소용인가요?"
"맘놓고 잡수세요…… 가면서 먹으라구 선사받었어요."
"아아 그렇다면 나두 단단히 한몫 권리가 있군!"
"의무(義務)루다 드리는 건 아녜요!"
"의무가 있지요!"
"어째서요?"
"우리 태평군이 사서…… "
말이 미처 맟기 전에 나미는 급히
"그럼 저, 임준씨…… "
"……… "
준은 벌씸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준다.
순간 나미는 질색해하는 소리로 그러나 낮게
"아이 어째애!" 하면서 얼굴은 그 전에 벌써 홍조가 화끈 치달았다.
가슴이 사뭇 두근거렸다. 얼굴은 건사하지 못해 잔뜩 턱을 어깨에다 오므려 뜨 리고 바로 하지 못한다.
중매장이는 어디로 빠져버리고 신랑감과(그런 줄도 모르고서) 단둘이 만나 일껏 다 맞선을 뵈고 한 모양쯤 된 것을 비로소 알고 난 누구네 집 규수( 閨秀) 와 정히 같은 꼴이었었다.
[상기 저작물은 저작권의 소멸 등을 이유로 저작권 보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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