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하늘
1
때는 단군 기원 4240년(서기 1907년) 몇 해 어느 달, 어느 날이던가, 땅은 서울 이던가, 해외 어디던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데, 이 몸은 어디로 해서 왔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크나큰 무궁화 몇만 길 되는 가지 위 넓기가 큰 방만한 꽃 송이에 앉았더라.
별안간 하늘 한복판이 딱 갈라지며 그 속에서 불그레한 광선이 뻗쳐 나오더니 하늘에 테를 지어 두르고 그 위에 뭉글뭉글한 고운 구름으로 갓을 쓰고 그 광선 보다 더 고운 빛으로 두루마기를 지어 입은 한 천관(天官)이 앉아 오른손으로 번 개 칼을 휘두르며 우레 같은 소리로 말하여 가로되,
“인간에게는 싸움뿐이니라. 싸움에 이기면 살고 지면 죽나니 신의 명령이 이러 하니라.”
그 소리가 딱 그치며, 광선도 천관도 다 간 곳이 없고 햇살이 탁 퍼지며 온 바 닥이 반듯하더니 이제는 사람 소리가 시작된다. 동편으로 닷 동달이 갖춘 빛에 둥근 테를 두른 오원기(五員旗)가 뜨며 그 기 밑에 사람이 덮여 오는데 머리에 쓴 것과 몸에 장속(裝束)한 것이 모두 이상하나 말소리를 들으니 분명한 우리나 라 사람이요, 다만 신체의 장건(壯健)과 위풍의 늠름함이 전에 보지 못한 이들이 다.
또 서편으로 좌룡우봉(左龍右鳳) 그린 그 밑에 수백만 군사가 몰려 오는데 뿔 돋친 놈, 꼬리 돋친 놈, 목 없는 놈, 팔 없는 몸, 처음 보는 괴상한 물건들이 달 려들고 그 뒤에는 찬바람이 탁탁 치더라.
이때에 한놈이 송구한 마음이 없지 않으나 뜨는 호기심이 버럭 나이 몸이 곧 무 궁화 가지 아래로 내려가 구경코자 했더니, 꽃송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너는 여기 앉았거라. 이곳을 떠나면 천지가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보이리라.” 하거늘 듣던 궁둥이를 다시 붙이고 앉으니, 난데없는 구름장이 어디서 떠 들어와 햇빛을 가리우며, 소낙비가 놀란 듯 퍼부어 평지가 바다가 되었는데, 한편으로 으르르 꽝꽝 소리가 나며 거의 ‘모질’다는 두 자로만 형용하기 어려운 큰 바람 이 일어, 나무를 치면 나무가 꺾어지고 돌을 치면 돌이 날고, 집이나 산이나 닥 치는 대로 부수는 그 기세로 바다를 건드리니, 바람도 크지만 바다도 큰 물이라.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바람이 물을 치면 물도 바람을 쳐 바람과 물이 반 공중에서 접견할새 용이 우는 듯 고래가 뛰는 듯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달리는 듯, 바람이 클수록 물결이 높아 온 지구가 들먹들먹하더라.
“바람이 불거나 물결이 치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싸워 보자.”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보던 동편의 오원기와 서편의 용봉기 밑에 있는 장졸 들이 눈들을 부릅뜨고 서로 죽이려 달려드니 바다에는 바람과 물의 싸움이요, 물 위에는 두 편 장졸들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동양 역사나 서양 역사에서나 보던 싸움은 아니더라. 싸우는 사람들이 손에는 아무 연장도 가지지 않고 오직 입을 딱딱 벌리며 목구멍에서 불 도 나오며, 물도 나오며, 칼도 나오며 화살도 나와 칼과 칼이 싸우며 활이 활과 싸우며 불과 불이 서로 치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맞히니, 이 맞은 사람은 목이 떨 어지면 팔로 싸우며 팔이 떨어지면 또 다리로 싸우다가 끝끝내 살이 다 떨어지고 뼈가 하나도 없이 부서져야 그만두는 싸움이라. 몇 시 몇 분이 못 되어 주검이 천리나 덮이고 비린내 땅에 코를 돌릴 수 없으며, 피를 하도 뿌려 하늘까지 빨갛 게 물들였도다. 한놈이 이를 보고 우주가 이같이 참혹한 마당일까 하여 차마 보 지 못해 눈을 감으니, 꽃송이가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한놈아, 눈을 떠라! 네 이다지 약하냐? 이것이 우주의 진면목이니라. 네가 안 왔으면 하릴없지만 이미 온 바에는 싸움에 참가하여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도 리어 너의 책임만 방기함이니라 한놈아, 눈을 빨리 떠라.”
하거늘 한놈이 하릴없이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 눈을 들어 살피니 그 사이에 벌 써 싸움이 끝났는지 천지가 괴괴하게 풍우도 또한 멀리 간지라, 해는 발끈 들어 온 바닥이 따뜻한데 깊은 구름을 헤치고 신선의 풍류 소리가 내려오니 이제부터 참혹한 소리는 물러가고 평화의 소리가 대신함인가 보더라.
이 소리 밑에 나오는 사람들은 곧 별사람들이 아니라 아까 오원기를 받들고 동 편 진에 섰던 장졸들이니, 대개 서편 진을 깨쳐 수백만 적병을 씨 없이 죽이고 전승고를 울리며 돌아옴이라.
일원대장(一員大將)이 앞장에서 인도하는데 금화절풍건(金花折風巾)을 쓰고 어 깨엔 어린장(魚鱗章)이며 몸엔 조의를 입었더라. 그 얼굴이 맑은 듯 위엄 있고 매운 듯 인자하여, 얼른 보면 부처 같고 일변으로는 범 같아 보기에 사랑도 스럽 고 무섭기도 하더라.
그가 한놈이 앉은 무궁화나무로 향하여 오더니 문득 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허허, 무궁화가 피었구나.”
하더니 장렬한 음조로 노래를 한 장(章)한다.
이 꽃이 무슨 꽃이냐.
희어스름한 백두산의 얼이요
불그스름한 고운 조선의 빛이로다.
이 꽃을 북돋우려면
비도 맞고 바람도 맞고 핏물만 뿌려 주면
그 꽃이 잘 자라리.
옛날 우리 전성한 때에
이 꽃을 구경하니 꽃송이 크기도 하더라.
한 잎은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고
또 한 잎은 만주를 지나 우수리에 늘어졌더니
어이해 오늘날은
이 꽃이 이다지 야위었느냐.
이 몸도 일찍 당시의 살수 평양 모든 싸움에
팔뚝으로 빗장삼고 가슴이 방패 되어
꽃밭에 울타리 노릇 해
서방의 더러운 물이
조선의 봄빛에 물들지 못하도록
젖 먹은 힘까지 들였도다.
이 꽃이 어이해
오늘은 이 꼴이 되었느냐.
한 장 노래를 다 마치지 못한 모양이나 목이 메어 더 하지 못하고 눈물에 젖으 니 무궁화 송이도 그 노래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같이 눈물을 흘리며 맑은 노 래로 화답하는데,
봄비슴의 고운 치마 임이 내게 주시도다.
임의 은덕 갚으려 하여
내 얼굴을 쓰다듬고 비바람과 싸우면서
조선의 아름다움 쉬임없이 자랑하려고 나도 이리 파리하다.
영웅의 시원한 눈물
열사의 매운 핏물
사발로 바가지로 동이로 가져오너라.
내 너무 목마르다.
그 소리 더욱 아프고 저리어 완악한 돌이나 나무들도 모두 일어나 슬픔으로 서 로 화답하는 듯하더라 꽃송이 . 위에 앉았던 한놈은 두 노래 끝에 크게 느끼어 땅 에 엎드러져 울며 일어나지 못하니 꽃송이가 또 가만히,
“한놈아.”
부르며 꾸짖되,
“울음을 썩 그쳐라. 세상 일은 슬퍼한다고 잊는 것이 아니니라.” 하거늘 한놈이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피니 아까 노래하던 대장이 곧 앞에 섰더 라. 그 얼굴은 자세히 뜯어보니 마치 언제 뵈온 어른 같다. 한참 서성이다가, “아,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눈매와 이맛살과 채수염이며, 또 단장한 것을 두루 본즉 일찍 평안도 안주 남문 밖 비석에 새겨 있는 조각상과 같으니 내가 꿈에라 도 한번 보면 하던 을지문덕이신저.”
하고 곧 일어나 절하며 무슨 말을 물으려 하나 무엇이라고 칭호할는지 몰라 다시 서성이니 이상하다. 을지문덕 그이는 단군 2000년(서기전 333년)경의 어른이요, 한놈은 단군 4241년(서기 1908년)에 난 아기라 그 어간이 이천 년이나 되는데 이 천 년 전의 어른으로 이천 년 뒤의 아기를 만나 자애스런 품이 마치 친구나 집안 같다. 그이가 곧 한놈을 향하여 웃으시며,
“그대가 나의 칭호에 서성이느냐. 곧 선배라 부름이 가하니라. 대개 단군이 태 백산에 내리어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위해 삼경오부(三京五部)를 베풀고 이를 만세 자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려 하실새 삼부오계(三部五戒)로 윤리를 세우시 며 삼랑오가(三郞五加)로 교육을 맡게 하시니 이것이 우리나라 종교적 무사혼(武 士魂)이 발생한 처음이니라. 이 혼이 삼국시대에 와서는 드디어 꽃 피듯 불 붙는 듯하여 사람마다 무사를 높이어 절하고 서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자랑할새 신 라는 소년의 무사를 사랑하여 도령이라 아름하니, 『삼국사기』에 적힌 선랑(仙 郞)이 그 뜻 번역이요, 백제는 장년의 무사를 사랑하여 수두라 이름하니, 삼국사 기에 적힌 바 소도(蘇塗)가 그 음 번역이요, 고구려는 군자스러운 무사를 사랑하 여 선배라 이름하니,『삼국사기』에 적힌 바 선인이 그 음과 뜻을 아울러 한 번 역이라. 이제 나는 고구려의 사람이니 그대가 나를 선배라 부르면 가하리라.” 한놈이 이에 다시 고구려의 절로 한 무릎은 세우고 한 무릎은 꿇어 공손히 절한 뒤에,
“선배님이시여, 아까 동편 서편에 갈라서서 싸우던 두 진이 다 어느 나라의 진 입니까?”
물은데 선배님이 대답하되,
“동편은 우리 고구려의 진이요, 서편은 수나라의 진이니라.”
한놈이 놀라며 의심스런 빛으로 앞에 나아가 가로되,
“한놈은 듣자오니 사람이 죽으면 착한 이의 넋은 천당으로 가며 진 이의 넋은 지옥으로 간다더니 이제 그 말이 다 거짓말입니까? 그러면 영계(靈界)는 육계(肉 界)와 같아 항상 칼로 찌르며 총으로 서로 죽이는 참상이 있습니까” 선배님이 허허 탄식하여 하시는 말이,
“그러하니라. 영계는 육계의 영상이니 육계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날에는 영계 의 싸움도 그치지 않느니라. 대저 종교가의 시조인 석가나 예수가 천당이니 지옥 이니 한 말은 별도로 유의한 뜻이 있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말을 집어먹고 소화가 못 되어 망국 멸족 모든 병을 앓는도다. 그대는 부디 내 말을 새겨들을 지어다. 소가 개를 낳지 못하고 복숭아나무에 오얏열매가 맺지 못하니 육계의 싸 움이 어찌 영계의 평화를 낳으리요? 그러므로 육계의 아이는 영계에 가서도 아이 요, 육계의 어른은 영계에 가셔도 어른이요, 육계의 상전은 영계에 가서도 상전 이요, 육계의 종은 영계에 가서도 종이니, 영계에서 높다, 낮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도깨비들이 모두 육계에서 받던 꼴과 한가지다. 나로 말하더라도 일찍 살수 싸움의 승리자이므로 오늘 영계에서도 항상 승리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저 수주 (隨主) 양광(楊廣)은 그때에 전패자이므로 오늘도 이같이 패하여 군사를 이백만 이나 죽이고 슬피 돌아감이어늘 이제 망한 나라의 종자로서 혹 부처에게 빌며 상 제께 기도하며 죽은 뒤에 천당을 구하려 하니 어찌 눈을 감고 해를 보려 함과 다 르리요.”
을지 선배의 이 말이 그치자마자 하늘에 붉은 구름이 일어나 스스로 글씨가 되 어 씌었으되, ‘옳다, 옳다, 을지문덕의 말이 참 옳다. 육계나 영계나 모두 승리 자의 판이니 천당이란 것은 오직 주먹 큰 자가 차지하는 집이요, 주먹이 약하면 지옥으로 쫓기어 가느니라’ 하였었더라.
2
1) 왼몸이 오른몸과 싸우다.
2) 살수싸움의 정형이 이러하다.
3) 을지문덕도 암살당을 조직하였더라.
4) 사법명이 그름을 타고 지나가다.
한놈이 일찍 내 나라 역사에 눈이 뜨자 을지문덕을 숭배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그에 대한 전기를 짓고 싶은 마음이 바빠 미처 모든 글월에 고구(考究)하지 못하 고 다만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적힌 바에 의거하여 필경 전기도 아니요, 논 문도 아닌 『사천년 제일대위인 을지문덕(四千年弟一大偉人乙支文德)』이라 한 조그마한 책자를 지어 세상에 발표한 일이 있었더라.
한놈은 대개 처음 이 누리에 내려올 때에 정과 한의 뭉텅이를 가지고 온 놈이라 나면 갈 곳이 없으며, 들면 잘 곳이 없고, 울면 믿을 만한 이가 없으며, 굴면 사 랑할 만한 이가 없어 한놈으로 와, 한놈으로 가는 한놈이라. 사람이 고되면 근본 을 생각한다더니 한놈도 그러함인지 하도 의지할 곳이 없으며 생각나는 것은 조 상의 일뿐이더라. 동명성왕의 귀가 얼마나 길던가, 진흥대왕의 눈이 얼마나 크던 가, 낙화암에 떨어지던 미인이 몇이던가, 수양제를 쏘던 장사가 누구던가, 동명 성왕의 임유각의 높이가 백 길이 못 되던가, 진평왕의 성제대(聖帝帶)가 열 발이 더 되던가. 동묘〔東牟〕의 높은 산에 대조영 내조의 자취를 조상하며, 웅진(熊 津)의 가는 물에 계백 장군의 대움을 눈물하고, 소나무를 보면 솔거의 그림을 본 듯하며, 새 소리를 들으면 옥보고의 노래를 듣는 듯하여 몇 치 못 되는 골이 기 나긴 오천 년 시간 속으로 오락가락하여 꿈에라도 우리 조상의 큰 사람을 만나고 자 그리던 마음으로 이제 크나큰 을지문덕을 만난 판이니, 묻고 싶은 말이며 하 고 싶은 말이 어찌 하나 둘뿐이리요마는 이상하다. 그의 영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골이 펄떡펄떡하고 가슴이 어근버근하여 아무 말도 물을 경황이 없고 의 심과 무서움이 오월 하늘에 구름 모이듯 하더니 드디어 심신에 이상한 작용이 인 다.
오른손이 저릿저릿하더니 차차 커져 어디까지 뻗쳤는지 그 끝을 볼 수 없고 손 가락 다섯이 모두 손 하나씩 되어 길길이 길어지며 그 손 끝에 다시 손가락이 나 며, 그 손가락 끝에 다시 손이 되며 아들이 손자를 낳고, 손자가 증손을 낳으니 한 손이 몇만 손이 되고, 왼손도 여봐란 듯이 오른손대로 되어 도 몇만 손이 되 더니, 오른손에 달린 손들이 낱낱이 푸른 기를 들고 왼손에 딸린 손들은 낱낱이 검은 기를 들고 두 편을 갈라 싸움을 시작하는데 푸른 기 밑에 모인 손들이 일제 히 범이 되며 아가리를 딱딱 벌리며 달려드니, 붉은 기 밑에 보인 손들은 노루가 되어 달아나더라.
달아나다가 큰 물이 앞에 꽉 막히어 하릴없는 지경이 되니 노루가 일제히 고기 가 되어 물 속으로 들어간다. 범들이 뱀이 되어 쫒으니 고기들은 껄껄 푸드득 꿩 이 되어 물 밖으로 향하여 날더라.
뱀들이 다시 매가 되어 쫓은즉 꿩들이 넓은 들에 가 내려앉아 큰 매가 되니 뱀 들이 아예 불덩이가 되어 매에 대고 탁 튀어, 매는 쪼각쪼각 부서지고 온 바닥이 불빛이더라. 부서진 매조각이 하늘로 날아가며 구름이 되어 비를 퍽퍽 주니 불은 꺼지고 바람이 일어 구름을 헤치려고 천지를 뒤집는다. 이 싸움이 한놈의 손 끝 에서 난 싸움이지만 한놈의 손 끝으로 말릴 도리는 아주 없다. 구경이나 하자고 눈을 비비더니 앉은 밑의 무궁화 송이가 혀를 치며 하는 말이, “애닯다! 무슨 일이냐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단 말이냐?” 한놈이 그 말씀에 소름이 몸에 꽉 끼치며 입이 벙벙하니 앉았다가, “무슨 말씀입니까? 언제는 싸우라 하시더니 이제는 싸우지 말라 하십니까?” 하며 돌려 물으니 꽃송이가 예쁜 소리로 대답하되,
“싸우거든 내가 남하고 싸워야 싸움이지, 내가 나하고 싸우면 이는 자살이요 싸움이 아니니라.”
한놈이 바싹 달려들며 묻되,
“내란 말은 무엇을 가르치시는 말입니까? 눈을 크게 뜨면 우주가 모두 내 몸이 요, 적게 뜨면 오른팔이 왼팔더러 남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꽃송이가 날카롭게 깨우쳐 가로되,
“나란 범위는 시대를 따라 줄고 느나니 가족주의의 시대에는 가족이 ‘나’요 국가주의의 시대에는 국가가 ‘나’라, 만일 시대를 앞서 가다가는 발이 찢어지 고 시대를 뒤져 오다가는 머리가 부러지나니 네가 오늘 무슨 시대인지 아느냐 희랍은 지방열로 강국의 자격을 잃고 인도는 부락사상으로 망국의 화를 얻으니 라.”
한놈이 이 말에 크게 느끼어 감사한 눈물을 뿌리고 인해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 지니 다시 전날의 오른손이요,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니 또한 전날의 왼손이더 라. 곁에는 을지문덕이 햇빛을 안고 앉다.
우리나라는 저울과 같다.
부소(扶蘇) 서울은 저울 몸이요,
백아(百牙) 서울은 저울 머리요,
오덕(五德) 서울은 저울추로다.
모든 대적을 하루에 깨쳐 세 곳에
나누어 서울을 하니,
기울임 없이 나라 되리니,
셋에 하나도 잃지 말아라.
를 외우더니 한놈을 돌아보며 가로되,
“그대가 이 글을 아는가?”
한놈이,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속에서 보았나이다.”
하니 을지문덕이 가로되,
“그러하니라. 옛적에 단군이 모든 적국을 깨치고 그 땅을 나누어 세 서울을, 세울새, 첫 서울은 태백산 동남 조선땅에 두니 가로되 ‘부소’요, 다음 서울은 태백산 동북 만주 밑 연해주땅에 두니 가로되 ‘오덕’이라.
이 세 서울을 하나만 잃으면 후세자손이 쇠약하리라고 하사 그 예언을 적어 신 지에게 주신 바이어늘 오늘에 그 서울들이 어디인지 아는 이가 없을뿐더러 이 글 까지 잊었도다 정인지가 . 『고려사』에 이를 쓰기는 하였으나 술사(術士)의 말로 들렸으니 그 잘못함이 하나요, 고려의 지리지를 좇아 단군의 삼경(三京)도 모두 대동강 이내로 말하였으니 그 잘못함이 둘이라.”
한놈이,
“이 세 서울을 잃은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으니 을지문덕이 가로되,
“아까 권력이 천당으로 가는 사다리란 말을 잊지 안하였는가? 우리 조선 사람 들은 이 뜻을 아는 이 적은 고로 중국 이십일 대사 가운데 대(代)마다 조선 열전 이 있으며 조선 열전 가운데마다 조선인의 천성이 인후하다 하였으니, 이 ‘仁 厚’ 두 자가 우리를 쇠하게 한 원인이라. 동족에 대한 인후는 홍하는 원인도 되 거니와 적국에 대한 인후는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될 뿐이니라……” 3
……(원문 탈락) 한참 재미있게 을지문덕은 이야기하매 한놈은 듣는 판에 벌건 동편 하늘이 딱 갈라지며 그 속에서 불칼, 불활, 불들, 불총, 불대포, 불화로, 불솥, 불범, 불사자, 불개, 불고양이떼 들이 쏟아져 나오니 을지문덕이 깜짝 놀 라며,
“저것이 웬일이냐?”
하더니 무지개를 타고 빨리 그 속으로 향하여 가더라.
4
가는 선배님을 붙들지도 못하며 내 몸으로 쫓아가려고 해도 쫓지 못하여 먹먹하 게 앉은 한놈이,
“나는 어데로 가리요?”
한데, 주인으로 있는 꽃송이가 고운 목소리로,
“네가 모르느냐? 신과 마(魔)의 싸움이 일어 을지 선배님이 가시는 길이다.” 한놈이 깜짝 기꺼하며,
“나도 가게 하시옵소서.”
한데, 꽃송이가,
“암, 그럼 가야지, 우리나라 사람이 다 가는 싸움이다.”
물은데, 꽃송이가,
“날개를 주마.”
하므로 한놈이 겨드랑이 밑을 만져 보니 문득 날개 둘이 달렸더라. 꽃송이가 또, “친구와 함께 가거라.”
하거늘, 울어도 홀로 울고 웃어도 홀로 웃어 사십 평생에 친구 하나 없이 자라난 한놈이 이 말을 들으매 스스로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한데,
“네 하늘에 향하여 한놈을 부르라.”
하거늘, 한놈이 힘을 다하여 머리를 들고 한놈을 부르니 하늘에서 “간다.”
대답하고 한놈 같은 한놈이 내려오더라. 또,
“네가 땅에 향하여 한놈을 부르라.”
하거늘 한놈이 또 힘을 다하여 머리를 숙이고 한놈을 부르니 땅 속에서, “간다.”
대답하고 한놈 같은 한놈이 솟아나더라. 꽃송이 시키는 대로 동편에 불러 한놈을 얻고 서편에 불러 한놈을 얻고 남편, 북편에서도 각기 다 한놈을 얻은지라 세어 본즉 원래 있던 한놈이 와 불려 나온 여섯 놈이니 합이 일곱 한놈이더라.
낯도 같고 꼴도 같고 목적도 같지만 이름이 같으면 서로 분간할 수 없을까 하여 차례로 이름을 지어 한놈, 둣놈, 셋놈, 넷놈, 닷째놈, 엿째놈, 일곱째놈이라 하 다.
“싸움터가 어데냐?”
외치니,
“이리 오너라.”
하고 동편에서 소리가 나거늘,
“앞으로 갓!”
한마디에 그곳으로 향하더니 꽃송이가 ‘칼부림’이란 노래를 한다.
내가 나니 저도 나고
저가 나니 나의 대적이다
내가 살면 대적이 죽고
대적이 살면 내가 죽나니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대적아 대적아
네 칼이 세던가 내 칼이 센가 싸워를 보자
앓다 죽은 넋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싸우다 죽은 넋은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이 멀다 마라
이 길로 가면 한 뼘뿐이니라
하늘이 가깝다 마라
땅 길로 가면 만만 리가 된다
아가 아가 한놈 둣놈 우리 아가 우리 대적이 저기 있다
해 늦었다 눕지 말며
밤 늦었다 자지 마라
이 칼이 성공하기 전에는
우리 너희 쉴 짬이 없다
그 소리 비장강개하여 울 만도 하며 뛸 만도 하더라.
한놈은 일곱 사람의 대표로 ‘내 친구’란 노래로 대답하였는데 왼머리는 다 잊 어 이 책에 쓸 수 없고 오직 첫 마디의,
“내가 나자 칼이 나고 칼이 나니 내 친구다.”
단 한 구절만 생각난다.
답가를 마치고 일곱 사람이 서로 손목을 잡고 동편을 바라보고 가니 날도 좋고 곳곳이 꽃 향기, 새 소리로 우리를 위로하더라.
몇 걸음 못 나아가 하늘이 캄캄하고 찬 비가 쏟아진다. 일곱 사람이 한결같이, “찬 비가 오거나 더운 비가 오거나 우리는 간다.”
하고 앞길만 찾더니 또 바람이 모질게 불어 흙과 모래가 섞이어 나니 눈을 뜰 수 없다.
“눈을 뜰 수 없어도 가자.”
하고 자꾸 가니 몇 걸음 못 나가서 가시밭이 있거늘,
“오냐, 가시발길이라도 우리가 가면 길 된다.”
하고 눌러 걷더니 또 걸음 못 나가서 땅에다 시퍼런 칼 같은 것을 모로 세워 밟 는 대로 발이 찢어져 피 발이 된다.
“피 발이 되어도 간다.”
하고 서로 붙들고 가더니 무엇이 머리를 꽉 눌러 허리도 펼 수 없고 한 발씩이 나 되는 주둥이가 살을 꽉꽉 물어 떼여 아프고 가려워 견딜 수 없고 머리털 타는 듯 고추 타는 듯한 냄새가 나 코를 들 수 없고 앞뒤로 불덩이가 날아와 살이 모 두 데이니 일곱째놈이 딱 자빠지며,
“애고, 나는 못 가겠다.”
한놈과 및 다섯 친구들이 억지로 끌어 일으키나 아니 들으며,
“여기 누우니 아픈 데가 없다.”
하거늘 한놈이,
“싸움에 가는 놈이 편함을 구하느냐?”
꾸짖고 할 수 없이 일곱 친구에 하나를 버리나 여섯 사람뿐이다.
“우리는 적과 못 견디지 말자.”
하고 서로 권면하나 길이 어둡고 몸이 저려 기다, 걷다, 구르다, 뛰다 온갖 짓을 다 하며 나가는데 웬 할미가 앞에 지나가거늘 일제히 소리를 쳐, “할멈, 싸움터를 어디로 가오”
하니 지팡이를 들어,
“이리 가라.”
하고 가리키는데 지팡이 끝에 환한 광선이 비치더라,
“이곳이 어데요?”
물은데,
“고됨 벌이라.”
하더라.
광선을 따라 나아가니 눈앞이 환하고 갈 길이 탁 트인다. 일변으로는 반갑기도 하지만 일변으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살거든 같이 살고 죽거든 같이 죽자고 옷고름 맺고 맹세하며 같이 오던 일곱 사람에 일곱째놈 하나만 버리고 우리 여섯은 다 오는구나.
일곱째놈아, 네 조금만 견디었으면 우리같이 이 구경을 할 걸 네 너무도 참지 못하여 우리는 오고 너는 갔고나. 그러므로 마지막 씨름에 잘 하여야 한단 말도 있고 최후 오 분간을 잘 지내란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쓸데 있나, 이 뒤에 우리 여섯이나 조심하자.”
하고 받고 차며 이야기하며 가더니 이것이 어디기에 이다지 좋은가, 나무 그늘 가득한 곳에 금잔디는 땅에 깔리고 꽃은 피어 뒤덮였는데 새들은 제 세상인 듯이 짹짹이고 범이 오락가락하나 사람 보고 물지 않고 온갖 풀이 모두 향내를 피우며 길은 옥으로 깔렸는데 얼른얼른하여 그 속에 한놈의 무리 여섯이 비치어 있고 금 강산의 만물상같이 이름 짓는 대로 보이는 것도 많으며 평양 모란봉처럼 우뚝 솟 아 그린 듯한 빼어난 뫼며, 남한산의 꽃버들이며, 북한산의 단풍이며, 경주의 삼 기팔괴(三奇八怪)며, 원산의 명사십리 해당화며, 호호 탕탕 한강물에 뛰노는 잉 어며, 천안 삼거리 늘어진 버들이며, 송도 박연에 구슬 뿜듯 헤치는 폭포며, 순 창 옷과 대발이며, 온갖 풍경이 갖추어 있어 한놈의 친구 여섯 사람으로 하여금 ‘아픈 벌’에서 받던 고통은 씻은 듯 간 데 없다. 몸이 거뜬하고 시원함을 이기 지 못하여 서로 돌아보며,
“이곳이 어데인가? 님의 나라인가? 님의 나라야 싸움터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 느새 왔을 수 있나?”
하며 올 것이 가는 판이러니 별안간 사람의 눈을 부시게 빛이 찬란한 산이 멀리 보이는데 그 위에 붉은 글씨로 ‘황금산’이라 새기었더라. 앞에 다다라 보니 순 금으로 쌓은 몇만 길 되는 산이요, 한 쌍 옥동자가 그 산이마에 앉아 노래를 한 다.
난 사람이 그 누구냐
내 이 산을 내어 주리라
이 산만 가지면
옷도 있고 밥도 있고
고대광실 높은 집에
한평생을 잘살리라
이 산만 가지면
맏아들은 황제 되고
둘째 아들은 제후 되고
셋째 아들은 파초선 받고
넷째 아들은 쌍가마 타고
네 앞에 절하리라
이 산을 가지려거든
단군을 버리고 나를 할아비 하며
진단(震檀)을 던지고 내 집에서 네 살림 하여라
이 산만 차지하면
금강석으로 네 갓 하고
진주 구슬로 네 목도리 하고
홍보석으로 네 옷 말아주마
난 사람이 그 누구냐
너희들도 어리석다
싸움에 다다르면 네 목은 칼밥이요
네 눈은 활 과녁이요
네 몸은 탄알밥이라
인생이 얼마라고 호강을 싫다 하고
아픈 길로 드느냐
어리석다 불쌍하다 너희들……
노래 소리 맑고 고와 듣는 사람의 귀를 콕 찌르니 엿째놈이 그 앞에 턱 엎드러 지며,
“애고, 나는 못 가겠소. 형들이나 가시오.”
한놈의 친구가 또 하나 없어진다. 기가 막혀 꼬이고 꾸짖으며, 때리며 끌며 하 나 엿째놈이 그 산에 딱 들어붙어 이어나지 않더라.
하릴없이 한놈이 인제 네 친구만 데리고 가더니 큰 냇물이 앞에 나서거늘 한놈 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이 내가 무슨 내인가?”
하며 그 이름을 몰라 갑갑한 말을 한즉 냇물에서 무엇이 대답하되, “내 이름은 새암이라.”
“새암이란 무슨 말이냐?”
한데,
생암은 재주 없는 놈이 재주 있는 놈을 미워하며, 공 없는 놈이 공 있는 놈을 싫어하여 죽이려 함이 새암이니라.”
“그러며 네 이름이 새암이니 남의 집과 남의 나라도 많이 망쳤겠구나.” “암, 그럼. 단군 때에는 비록 마음이 있었으나 도덕의 아래라 감히 행세치 못 하다가 부여의 말년부터 내 이름이 비로소 나타날새, 금와(金蛙)의 아들들이 내 맛을 보고는 동명왕을 죽이려 했고, 비류(比流)란 사람이 내 맛을 보고는 온조왕 과 갈라지고, 수성왕(遂成王)이 내 맛을 보고는 국조(國祖)으 부자(父子)를 죽이 며, 봉상왕(烽上王)이 내 맛을 보고는 달가(達賈) 같은 공신을 베고, 백제의 신 하인 백가(苩加)가 동성왕을 죽이며 패업(霸業)을 꺾음도 나의 꾀임이며, 좌가려 (左可慮)가 고국천왕(故國川王)을 싫어하며 연나(椽那)에 반(叛)함도 나의 홀림 이라 나의 물결이 가는 곳이면 반드시 화한(禍患)을 내어 삼국의 강성이 더 늘지 못함이 내 솜씨에 말미암음이라고도 할지나 그러나 이때는 오히려 정도 (正道)가 세고 내가 약하여 크게 횡행치 못하더니 세강속 말하여 삼국의 말엽이 되매 내가 간 곳마다 성공하며, 백제에 들매 의지왕의 군신이 서로 새암하여 성충(成忠)이 며, 흥수(興首)며, 계백(階伯)이 같은 현상맹장(賢相猛將)을 멀리하여 망함에 이 르며, 고구려에 들매 남생(男生)의 형제가 서로 새암하여 평양이며, 국내성이며, 개모성 같은 명성을 적국에 바쳐 비운에 빠지고 복신(福信)은 만고의 명장으로 풍왕(豊王)의 새암에 장심(掌心) 꾀이는 악형을 받아 중흥의 사업이 꿈결로 돌아 가고 검모잠(劍牟岑)은 개세의 열장부로 안승왕(安勝王)의 새암에 흉참(凶慘)한 주검이 되어 다물(多勿)의 장지(壯志)가 이슬같이 사라지고 이 뒤부터는 더욱 내 판이라.
고려 왕씨조나 조선 이씨조는 모두 내 손에 공기 노는 듯하여 군신이 의심하며, 상하가 미워하며 문무가 , 싸우며, 사색(四色)이 서로 잡아먹으며, 이백만 홍건적 을 쳐몰린 정세운(鄭世雲)도 죽이며, 수십년 해륙전에 드날리던 최영(崔瑩)도 베 며, 팔 년 왜란에 바다를 진정하여 해왕의 웅명(雄名)을 가지던 이순신(李舜臣) 도 가두며, 일개 서생으로 왜장 청정(淸正)을 부수고 함경도를 찾던 정문부(鄭文 孚)도 죽이어 드디어 금수강산이 비린내가 나도록 하였노라.”
한놈이 그 말을 듣고는 몸에 소름이 끼쳐 친구를 돌아보며,
“이 물이야 건널 수 있느냐?”
하니 넷놈 닷놈이 웃으며,
“그것이 무슨 말이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탐천물을 마시면 그 마음이 흐릴 까요.”
하더니 벗고 들어서거늘 한놈, 둣놈, 셋놈, 세 사람도 용기를 내어 뒤에 따라 서 며 도통사 최영이 지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둘소냐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한 시조를 읊으며 건너니라.
저편 언덕에 다다라서는 서로서로 냇물을 돌아보며,
“요만 물에 어찌 장부의 마음을 변할쏘냐? 우리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국사에 힘써 화랑의 교훈을 받은 이도 있으며 혹 한학에 소양이 있어 공자, 맹자의 도덕 에 젖은 이도 있으며, 혹 불교를 연구하여 석가의 도를 들은 이도 있으며, 혹 예 배당에 출입하여 양부자(洋夫子)의 신약도 공부한 이 있나니 어찌 접싯물에 빠져 형제가 새로 새암하리요.”
하고 더욱 씩씩한 꼴을 보이며 길에 오르니라.
싸움터가 가까워 온다. 임나라가 가까워 온다. 깃발이 보인다. 북소리가 들린 다. 어서 가자 재촉할새 가장 날래게 앞서 뛰는 놈은 셋놈이더라.
넷놈이 따르려 하여도 따르지 못하여 허덕허덕하며 매우 좋지 못한 낯을 갖더 니,
“저기 적진이 보인다.”
하고 실탄 박은 총으로 쏜다는 것이 적진을 쏘지 않고 셋놈을 쏘았더라.
어화 일곱 사람이 오던 길에 한 사람은 고통에 못 이기어 떨어지고 또 한 사람 은 황금에 마음이 바뀌어 떨어졌으나 오늘같이 서로 죽이기는 처음이구나!
새암의 화가 참말 독하다.
죽은 놈은 할 수 없거니와 죽인 놈도 그저 둘 수 없다 하여 곧 넷 놈을 잡아 태 워 죽이고, 한놈, 둣놈, 닷놈 무릇 세 사람이 동행하니라.
인간에서 알기는 도깨비가 임에게 대하여 만나면 으레 항복하고 싸우면 으레 진 다 하더니 싸움터에 와보니 이렇게 쉽게는 말할 수 없더라.
임의 키가 열 길이 되더니 도깨비의 키도 열 길이 되고, 임의 손이 다섯 발이 되더니 도깨비의 손도 다섯 발이 되고, 임의 눈에 번개가 치면 도깨비의 눈에도 번개가 치고, 임의 입에 우뢰가 울며 임이 날면 도깨비도 날며, 임이 뛰면 도깨 비도 뛰며, 임의 군사가 구구는 팔십일만 명(九九=八十一萬名)인데 도깨비의 군 사도 꼭 그 수효이더라.
『고구려사』에 보면 동천왕이 위장(魏將) 모구검(母丘儉)을 처음에 이기고 웃 어 가로되,
“이같이 썩은 대적을 치는 데 어찌 큰 군사를 쓰리요.”
하고 정병은 다 뒤에 앉아 있게 하고 다만 오천 명으로써 적의 수만 명과 결전하 다가 도리어 큰 위험을 겪은 일이 있더니 임나라에소도 이런 짓이 있도다.
싸움이 시작되자 임이 영(令)을 내리시되,
“오늘은 전군이 다 나갈 것 없이 다만 9분의 1 곧 1999만 명만 나서며 또 연장 은 가지지 말고 맨손으로 싸워 도깨비의 무리가 우리 재주에 놀라 다시 덤비지 못하게 하여라.”
하니 좌우는 안 될 것이라고 간하나 임이 안 들으신다.
진이 사괴매 임의 군사가 비록 날쌔나 어찌 연장 가진 군사와 겨루리요. 칼이 며, 총이며, 불이며, 물이며, 온갖 것을 다하여 임의 군사를 치는데 슬프다.
임의 군사는 빈 주먹이 칼에 부서지고, 흰 가슴이 총에 꿰뚫리며, 뛰다가 불에 타며, 기다가 물에 빠져 살 길이 아득하다. 입으로는,
“우리는 정의의 아들이다. 악이 아무리 강한들 어찌 우리를 이기리요.” 하고 부르짖으나 강적 밑에서야 정의의 할아비인들 쓸데 있느냐? 죽는 이 임의 군사요. 엎치는 이 임의 군사더라.
넓고 넓은 큰 벌판에 정의의 주검이 널리었으나 강적의 칼은 그치지 않는다.
한놈의 동행인 닷놈이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되,
“이제는 임의 나라가 고만이로구나, 나는 어디로 가노”
하더니 청산 백운 간에 사슴의 친구나 찾아간다고 봇짐을 싸며, 셋놈은 왈칵 나 서며,
“장부가 어찌 이렇게 적막히 살 수야 있나, 종살이라도 하며 세상에서 어정거 림이 옳다.”
하고 적진으로 향하니라.
이때 한놈은 어찌할까 한놈은 한놈의 짐을 지고 왔으며 너희들은 각기 저희들의 짐을 지고 왔나니 짐 벗어 던지고 달아나는 너희들을 따라가는 한놈이 아니요, 가는 놈들은 가거라 나는 나대로 , 하리라 함이 정당한 일인 듯하나, 그러나 너는 내 손목을 잡고 나는 네 손목을 잡아, 죽으나 사나 같이 가자 하던 일곱 사람에 단 셋이 남아 나밖에는 네 형이 없고 너밖에는 내 아우 없다 하던 너희들을 또 버리고 나 홀로 돌아섬도 또한 한놈이 아니도다.
한놈이 이에 오도가도 못 하고 길 곁에 주저앉아 홀로,
“세상이 원래 이런 세상인가? 한놈이 친구를 못 얻음인가? 말짱하게 맹세하고 오던 놈들이 고되다고 달아난 놈도 있고, 할 수 없다고 달아난 놈도 있어 일곱 놈에 나 한놈만 남았구나.”
탄식하니 해는 서산에 너울너울 넘어가 사람의 사정을 돌보지 않더라. 이러나저 러나 갈 판이라고 두 주먹을 부르쥐고 달리더니 난데없는 구름이 모여들어 하늘 이 캄캄해지며 범과 이리와 사자와 온갖 짐승이 꽉 가로막아 뒤로 물러갈 길은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더라.
할 수 없이 다시 오던 길을 찾아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뺀 칼을 다시 박으랴!”
소리를 지르고 앞을 헤치고 나아가니 임의 형상은 보이지 않으나 임의 발소리가 귀에 들린다.
“네 오느냐? 너 홀로 오느냐?”
하시거늘 한놈이 고되고 외로워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인자하신 말씀에 느낌을 받아 눈에 눈물이 핑 돌며 목이 탁 메여 겨우 대답하되
“예, 홀로 옵니다.”
“오냐, 슬퍼 말라. 옳은 사람은 매양 무척 고생을 받고야 동무를 얻나니라.” 하시더니 칼을 하나 던지시며,
“이 칼은 3925년(서기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 대장 정기룡(鄭起龍)이 쓰던 삼인검(三寅劍)이다. 네 이것을 가지고 적진을 쳐라!”
하시더라. 한놈이 칼을 받아 들고 나서니 하늘이 개며 해도 다시 나와 범과 사자 들은 모두 달아나 앞길이 탁 트이더라.
몸에 임의 명령을 띠고 손에 임이 주신 칼을 들었으니 무엇이 무서우리요. 적진 이 여우 고개에 있단 소문을 듣고 그리로 향하여 가는데 칼이 번쩍번쩍하더니 찬 바람 치며 비린애가 코를 찌르거늘,
‘애쿠, 적진이 당도하였구나.”
하고 칼을 저으며 들어가니 수십만 적병이 물결 갈라지듯 하는지라.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간즉 어떤 얼굴 괴악한 적장이 궤에 기대어 임진 전사를 보는데 한놈의 손에 든 칼이 부르르 떨어 그 적장을 가리키며 소리치되,
“저놈이 곧 임진왜란 때에 조선을 더럽히려던 일본 관백(關白) 풍신수길(豊臣 秀吉)이라.”
하거늘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한놈이 어찌 용서가 있으리요. 두 눈에 쌍 심지가 오르며 분기가 정수리를 쿡 찔러 곧 한칼에 이놈을 고깃장을 만들리라 하 여 힘껏 겨누며 치려 한즉 풍신수길이 썩 쳐다보며 빙그레 웃더니 그 괴악한 얼 굴은 어디 가고 일대 미인이 되어 앉았는데 꽃 본 나비인 듯, 물 찬 제비인 듯, 솟아오르는 반월인 듯…….
한놈이 그것을 보고 팔이 찌르르해지며 차마 치지 못하고 칼이 땅에 덜렁 내려 지거늘 한놈이 칼을 집으려 하여 몸을 굽힌 새 벌써 그 미인이 변하여 개가 되어 컹컹 짖으며 물려고 드나 한놈이 칼을 잡지 못하여 맨손으로 어쩔 수 없어 삼십 육계의 상책을 찾으려다가 발이 쭉 미끄러지며,
“아차!”
한마디에 어디로 떨어져 내려가는지 한참 만에 평지를 얻은지라. 골이 깨어지지 나 않았는가 하고 손으로 만져 보니 깨어지지는 않았으나 무엇이 쇠뭉치로 뒤통 수를 딱딱 때려 아파 견딜 수 없고 또 쇠사슬이 어디서 오더니 두 손을 꽉 묶으 며 온몸을 굴신할 수 없게 얽어 매고 불침, 불칼이 머리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쑤시는도다.
한놈이 깜짝 놀라,
“아이고, 내가 지옥에 들어왔구나. 그러나 내가 무슨 죄로 여기를 왔나?” 하고 땅에 떨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아는 대로 무릇 삼십여 년 사이의 일을 세어 보나 무슨 죄인지 모르겠더라. 좌우를 돌아보니 한놈과 같이 형구를 가지고 앉은 이가 몇몇 있거늘,
“내가 무슨 왔느냐?”
물은즉 잘 모른다 하며,
“너희들은 무슨 죄로 왔느냐?”
하여도 모른다 하더라.
한놈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이 어찌 아무 죄로 왔는지도 모르고 이 속에 갇혔으리요”?
하니. 대답하되,
“얼마 안 되어 순옥사자(巡獄使者)가 오신다니 그에게 물어보라.” 하더라.
[상기 저작물은 저작권의 소멸 등을 이유로 저작권 보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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