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1
신라 경덕왕 시절.
사월 초파일이 내일 모레. 서라벌 서울에는 석가 탄일 준비가 한창 바쁘다.
눌지왕 때부터 몰래몰래 이 나라에 스며들어 온 서천 서역국의 부처님 도( 道) 는 법흥왕 말엽 이차돈의 순교로 활짝 길이 열리고, 삼한 통일을 거쳐 성덕, 경덕에 이르자 그 찬란한 연꽃은 필 대로 피었다.
그 당시의 초파일이라면 설, 대보름, 팔월 한가위보담 더 큰 명절이었다.
파일 놀이에 첫째 가는 연등과 관등. 어느 집에서도 가지각색 등을 맨 들기에 야단법석이다. 모난 놈에 둥근 놈, 기름한 놈, 암팡진 놈, 장구 모양, 북 모양, 푸드득 나는 양의 봉황새, 엉금엉금 기는 양의 자라 남생이…….
도림의 대를 베어 곰살궂은 잔손질로 휘엉휘청 등틀을 휘어 매고, 선두리는 금당지에 은당지, 싸 바르는 종이도 오색이 영롱하다.
여느 집도 이러하거니, 하물며 부처님을 모신 절들이랴. 대천세계를 밝게 밝게 비쵤 등 준비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축하식 봉행 절차와 법연 베풀 자리며, 재 올릴 분별에 웬만한 절들은 벌써 여러 밤을 하얗게 밝히었다.
더구나 황룡사, 분황사, 백률사 같은 큰절들은 당일 거둥을 맞이할 차비에 더욱 공을 들이고 애를 켰다. 다른 절차는 다 고만두드래도 잠시 잠깐이나마 임금님 듭실 옥좌와 고관 대작을 영접할 처소를 마련하기에 쩔쩔매었다.
비지땀들을 흘리고 쩔쩔매기는 하면서도 중들은 저절로 으쓱으쓱 어깻바람이 났다. 한 번 거둥에 쌀과 금과 은과 피륙이 산더미로 쏟아지는 까닭이다. 수가 좋으면 몇십 결 보전의 시주가 나리기도 한다. 부처님이 나셨으니 좋고 임금님이 오시니 좋고 그보담 더 좋기는 생기는 것이 많은 것이요, 음식이 질번질번하고 새 옷을 갈아입게 되니 대덕 중덕의 웃두리 중은 물론 이요, 비구 사미 따위의 아랫두리까지 싱글벙글 한 시절을 만난 셈이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되 목탁과 경쇠 소리도 요새 따라 더 한층 우렁차게 활기를 띤 듯하다.
왼 서라벌이 발칵 뒤집히도록 야단법석을 하는 가운데 오직 불국사만은 다 가무러진 잿불처럼 절 안이 괴괴하다.
불국사로 말하자면 신라에 크게 불법을 일으키신 제 23대 법흥왕 시 대의 초창으로 오늘날 장안에 즐비한 808 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이 요, 초창 이후 여러 번 중창과 수리를 겪어 그 규모의 굉걸 웅장한 품도 어느 절보담 못하지 않은 대찰이다. 더구나 서라벌의 제일 명산 토함산을 등진 그 절터는 비단 서울 근교뿐 아니라, 신라 전국을 뒤져 보아도 그런 절묘한 자리를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으리라. 뒤로는 빼어난 봉우리를 느신하게 짊어지고, 좌우로는 울창한 송림을 슬며시 끌어당기며, 쪽으로 그린 듯한 호숫가에 넌지시 발을 내어 밀었는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가 훨쩍 열리어, 눈길 가는 곳 막힐 데 없으니 명찰에 절승까지 겸하였다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이만한 절이어니 파일 차림도 응당 굉장하련마는, 도모지 그런 기척을 찾으래야 찾을 수 없다.
밤이 되었건만, 다른 절처럼 이글이글 하늘을 태울 듯한 화톳불도 놓지 않았다. 펄렁거리는 횃불도 볼 수 없었다. 마지못해 단 듯한 불전의 추녀 끝에 두어 개 촛불이 가물거릴 뿐. 왼 절 안이 죽은 듯 고요한데 이윽고 ' 큰 방’에서 두런두런 인기척이 난다.
'큰방’이란 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공사하는 처소요, 또 이 절 주지 아 상( 阿湘) 노장의 거처하는 곳이다.
2
불국사 중들은 저녁 불공을 마쳤으니 제각기 제 처소로 돌아가도 좋으련마는 그들의 발길은 의논이나 한 듯이 큰방으로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풀기 하나 없는 그들은 주지 아상 노장을 중심으로 한 겹 두 겹 에 워 싸듯 둘러앉는다.
그들은 슬금슬금 노장의 기색을 살피며 무슨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듯.
그러나 아상 노장은 감중련하고 그린 듯이 앉았을 뿐이요, 이가 빠져서 합 죽하게 다문 입은 열릴 것 같지도 않다.
노장의 눈치를 보다가 지친 그들은 인제 저희들끼리 서로서로 눈치를 바라본다. 다 같이 제 흉중에 먹은 마음을 누가 활활 속 시원하게 직설거를 해줄까 하고 서로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누구인지 휘유 하고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휘유’소리가 무슨 군호 모양으로 여기 저기에서 반향이 일어나고, 어 떤 이는 제법 일장 설법이나 할 듯이 칵 하고 큰기침까지 하였다.
마츰내 말문은 터졌다.
"흥, 작년 파일도 그양 지내고……."
누구인지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작년뿐인가, 재작년 파일도 개 보름 쇠듯 안 했는가 베!"
중늙은이 중 하나가 뒤받는다. 나이는 한 오십 가량밖에 되지 않았으나 겉 늙어서 뺨은 살 하나 없이 홀쭉 빨았고, 중풍중 탓인지 또는 신경질 탓인지 뾰족 하게 내민 턱을 덜덜 떠는데 목청만을 쨍쨍하게 새되다.
"금년에는 꼭 공사를 끝내고 낙성 겸 굉장하게 파일을 지낼까 했더니, 젠장 맞을 그 원수엣 놈의 탑이……."
구레나룻 자리가 새파란 이 절의 원주(살림 맡은 중)가 불쑥 이런 말을 하다가 제 말씨가 너무 사나운데 스스로 주춤하고, 말은 중두멍이를 하였으나마 그 부리부리한 눈방울을 불평스러운 듯이 구을린다.
아상 노장은 조는 듯하던 눈을 번쩍 떴다. 침같이 숭숭한 하얗게 센 눈썹 밑에서 그 눈은 이상한 광채를 발한다. 입을 놀리던 중들은 움찔 하였으나 노장의 눈은 스르르 다시 감기고 말았다.
"그야 그렇게 말한 건 아냐. 어느 건 공든 탑이라고 그야 공이야 들지.
그렇지만 너무 오래단 말이야, 너무 오래야, 벌써 삼 년 의 세월이 걸리지안 했나. 삼 년, 삼 년이면 일 년이 삼백육십 일이라, 가만 있자 날수로 치면 천 날이 넘지 않나 베. 에이 참 날짜로 따져 보니 엄청나군, 엄청나."
'떠는턱’은 뼈만 남은 앙상한 손가락을 꼽아가며 한바탕 늘어 놓는다.
"삼 년, 흥. 몇 석 삼 년이 걸릴지……."
누구인지 곱씹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예 그런 말일랑 입밖에도 내지 말게. 삼 년, 삼 년이 셋씩 걸리면 어떡하란 말인고, 우리는 말라 죽으란 말인가."
'떠는턱’은 손을 쩔레쩔레 흔들며 펄쩍 뛴다.
"뚱뚱보는 말라깽이 되고, 말라깽이는 말라 죽고, 킥킥."
어데서인지 웃음소리가 터진다.
'떠는턱’의 옴팡한 눈엔 대번에 쌍심지가 선다. 그리고 웃음 터진 곳을 노려보며, "오 이놈, 네놈은 살푸덤이가 얼마나 붙었다고 그래 석삼 년씩 굶어 봐라. 산돼지같이 살이 더 찔 테니."
"그러구 말구. 장실 말씀이 옳다 뿐이오? 다 이를 말이오……?"
장실(丈室)이란 중들끼리 서로 위해 불르는 칭호다.
아까 말 실수로 무참했던 원주가 기회를 얻은 듯이 '떠는턱’의 역성을 드는 체하면서 쏟아 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작년만 그양 넘긴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워낙 대공이라 이태 쯤 걸리는 건 용혹무괴로되, 금년 파일까지도 끝을 못 내다니, 원 일을하는게 아니라 노라리야 노라리. 굼벵이가 쌓아도 천 날을 쌓으면 열 층탑이라도 열은 쌓았을 것 아니냐 말야……."
말씨는 점점 우락부락해 간다.
"자, 이건 역군일세 뭘세, 밥을 몇 솥을 쪄내도 금세금세 없어지고 들어오는 게 뭐 있느냐 말야. 대공을 끝내기 전이라 해서, 거둥 한 번이 계신가, 대갓집에서 어엿한 행차가 있는가. 여느 집 재 올리는 것마저 절금이니 대관절 우리네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말야."
하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나리친다.
3
화랑을 좇아다니다가 입산한 지 얼마 안 되는 '빨갱이’가 그 별명마따나 다혈질의 시뻘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자리를 헤치고 나앉는다.
말하기 전부터 목줄대에 핏대가 선다.
"우리 신라에도 사람이 없지 않은데 도대체 그런 막중 대사를 부여놈 따위에게 맡기는 게 틀렸단 말이오. 그래 우리 신라에는 석수장이가 한 놈도 없단 말이오? 아무리 한들 그래 그까짓 부여놈 재조를 못 당한단 말이오?
꾀죄죄한 잔손질은 혹 빠질는지 모르지만 큰 솜씨야 어데 어림 반푼 어치가 있단 말이오? 정말 이 서라벌 석수들이 적이 핏기나 있는 놈들 같으면 목을 따고 죽어 마땅하지, 그놈들도 다 죽었지그려. 그런 대공을 시골뜨기 석수에게 뺏기고 열손 재배하고 가만히들 있으니. 에이 못생긴 것들, 다 죽은것 들……."
팔을 부르걷고 분개한다.
"아니 여보, 그 말은 그 부여 석수장이를 욕하는 말이오? 또는 우리 신라 석수장이를 욕하는 말이오? 말이란 종을 잡을 수 있게 해야지."
본래부터 '빨갱이’의 화랑 냄새를 싫어하는 '떠는턱’이 한마디 따진다.
"누가 말시비를 캐자는 거요? 이를테면 그렇단 말이지. 그래, 신라에는 석수장이가 씨가 말랐단 말이오?"
'빨갱이’는 빨끈하며 뇌까린다.
"원, 부여는 신라 땅이 아닌가 배. 원 내가 석수장이를 맨든단 말인가.
씨가 말르고 안 말른 걸 내가 어찌 알꼬."
"이건 말책만 잡으면 제일이오? 아니 그래 그놈이 제 재조만 믿고 거드름을 피는 게 장실은 아니꼽지 않단 말이오? 능라주단으로 제 처소를 꾸미고진수 성찬에 엇들고 받드니 아주 제가 젠 체하고 이건 누구를 보고 인사 한마디를 할 줄 아나. 혹 수작을 붙여 보아도 대꾸는 않고 고개만 끄 떡 끄 떡하고 마니 그래 그놈이 벙어리란 말이요, 먹장이란 말이오? 도대체 제 명색이 뭐란 말이오? 한금해야 돌 쪼는 석수장이 아니오? 원 아니꼽살스럽게."
"그건 또 딴말이지."
"아니 그래 장실은 끝끝내 남의 비윗장만 흔들어 놓을 작정이오? 딴말이 무슨 딴말이오? 디 한말이지. 아무튼 일을 해야 공사가 끝이 나든지 재랄을 하든지 할 것 아니오? 이건 멀거니 탑 위에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탑을 쌓는 게 아니라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잡으려는 건지. 이걸 나날이 쳐다보고 오늘이나 얼마쯤 되었나, 내일이나 끝이 나려나 하는 우리 불국사 승려야말로 불쌍하지 않소? 그놈이 아마 고량진미에 배때기가 불르고 대우가 융숭하니까 제 고장에 돌아가기가 싫어서 일부러 공사를 질질 끌기만 하는 거야."
"처음 올 적에는 밥 한 그릇씩 그양 때려눕히더니만 인젠 아주 귀골이 됩셨는지 밥은 한 술밖에 안 뜨니……."
원주가 빈정거린다.
"흥, 배때기에 발기름이 오르면 고량진미도 보릿겨 떡만 못한 법이 거든."
빨갱이가 또 개탄한다.
뭇 입이 찧고 까부는 사이에 조을고만 있던 아상 노장은 아까부터 코까지 드르렁 드르렁 골다가 이 때야 그 영채 도는 눈을 번쩍 떠서 원주를 본다.
"요새도 그렇게 밥을 자시지 않느냐?"
위엄 있고도 간곡한 목소리다.
원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굽실 하며,
"예, 한술을 뜰까 말까 하오이다."
아상 노장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응, 그것 안되었구나. 저번에도 일렀지만 별좌(반찬 맡은 중)를 신칙해서 찬 같은 것 정결스럽게 하느냐?"
"예, 여러 번 신칙을 했습니다. 찬이야 있는 대로는 다 올리옵지요."
"각별 신칙하여라. 먼데 손님이 병환이나 나시면 어떡하느냐, 알아 듣느 냐?"
부드러우나마 꾸짖는 듯한 타이르는 듯한 말조다. 그리고 인제는 내 할 말을 다 했으니 너희들이야 얼마를 떠들든지 나는 자던 잠이나 자겠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빨갱이와 원주는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외우시고 입을 삐쭉한다.
4
빨갱이는 끊어진 수작의 실마리를 찾으며 원주를 보고,
"참 언젠가 장실이 얘기한 것이지만 요즈막은 밥상은 어데로 올린다누?
제 처소로 올리는가 또는 탑 위까지 모셔 올리는가?"
빨갱이는 노장을 슬슬 곁눈질하고 깍듯이 위해 올리며 빈정빈정한다.
"단층만 쌓았을 적 말이지 인제야 탑 위로는 못 올리지. 벌써 두 층이나 쌓았으니까 무슨 주제로 그 꼭대기에서야 밥상을 받겠다 하겠소. 아츰 점심은 제 방으로 가져가고 저녁은 역시 일터로 가져간다오. 대중 공양( 중들 이 한자리에 모여서 밥 먹는 것)에나 한몫 끼었으면 좋으련마는 이건 밥 먹는 자리까지 일정하질 않으니 원 성이 가시어서."
하다가 아상 노장을 꺼리어 말소리를 낮춘다.
"우리끼리 말이지만 언제든지 아츰상은 그대로 나온대. 한나절까지 뒤 어진 듯이 자빠져 있다가 오시가 훨씬 지난 뒤에야 겨우 눈을 부비고 일어나서 개울에 나가 늘어지게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제 방에 돌아와서는 점심을 뜨는 둥 만 둥 일터로 올라간대. 일터에 올라가서는 그대로 끓어 앉아서 그래도 잠이 미흡한지 꾸벅꾸벅 조을기만 하고 저녁 때가 되어도 나려 올줄을 모르니 부득이 저녁상을 일터로 가져갈 수밖에 있소? 공양을 보고도 나려오지를 않고 손짓으로 탑 아래 두라는 뜻만 보인다오. 상이 났는가 하고 몇 번을 가 보아도 상이 그대로 있다는구려. 열 나절이나 스무 나절 이 나제 한이 차야 부시시 나려와서 몇 술을 뜨고 또 올라간대. 그러니 일껏 지은 더운밥이 다 식고 국과 찬은 몬지투성이가 되고……."
"제 고장 있을 때 식은 밥 먹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 더운 밥을 먹으면 혓바닥이 부르터 오르는 게지."
빨갱이가 혀를 찬다.
"다 어두운 뒤에 또 올라가면 무슨 일을 할 거냐 말야, 흥."
원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기 말이지. 그래 탑 위에 올라가면 역시 등신같이 앉아만 있다오.
밤이 이슥하도록 나려올 생각도 않고 어느 틈에 제 방에 나려와서 자는지아 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밖에."
"그러면 언제 일은 한다는 말이오?"
'떠는턱’이 묻는다.
"글쎄 그게 별판이야. 그래도 그 잔손질 많은 다보탑을 끝내고 석가탑을 시작한 것만 별판이지.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걸려도!"
"그것 참 불가사의로군. 이녁들 말 같을 지경이면 그야말로 그 사람이 신통력을 가진 게로구려. 일하는 낌새도 없는데 세상에도 진기한 탑이 이루어지니."
'떠는턱’이 또 말에 티를 넣었다.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원주는 그 사나운 눈알을 흘긴다.
"이 좌중에 물어 보시오. 요즈막에 그 작자의 일하는 걸 본 사람이 있나 없나."
"어, 그렇게 진심을 내지 마시기오. 일하는 싹도 없는데 일이 되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베. 딴은 나도 일하는 걸 보지는 못 했으니."
"이상은 한 노릇이야. 우리도 그 석수가 탑 위에 앉고 서로 하는 건 봤지만 손대는 것은 못 보았는걸."
누가 맞장구를 친다. 좌중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들을 끄덕인다.
"저는 여러 번 봤어요."
먼발치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 하나가 말참예를 한다.
"오, 차돌이냐. 참 너는 잘 알겠구나. 그 방에서 시종을 드는 터이니깐.
그래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차돌의 말에 옳다구나 하는 듯이 반색한다.
파일을 잘못 쉬는 분풀이로 부여 석공에게 원정이 가게 되고, 원정 끝 에그 인격과 행동까지 티를 뜯고, 나종에는 애당초에 일은 손에도 대지를 않은 것처럼 비난의 화살이 날아, 말은 꼬리에 물어 밤 가는 줄도 몰랐다.
우 하고 토함산 기슭을 스쳐 나려오는 산바람은 큰방 장지를 흔들고 첫여름의 눅눅한 풀 향기를 들이친다.
우울과 불평과 원망에 어리인 방안의 무거운 공기도 이물처럼 흘러 들어오는 밤바람에 얼마쯤 완화된 듯하였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 떵그렁떵그렁 운다.
꼬끼요, 아랫 마을에서 첫 홰를 치는 닭소리가 그윽이 들려온다.
5
"그래, 차돌아,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또 한번 재촉을 한다.
차돌은 그 총기 있는 눈을 깜박거리며 여러 스님을 둘러본다. 이런 자리에 말을 하기가 주눅이 드는 듯, 그 여상진 흰 얼굴을 살짝 붉힌다.
"어서 얘기를 하려무나. 갑갑하구나. 본 대로 말을 못 해!"
원주는 벌써 호령조다.
차돌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고 어데서부터 허두를 내어야 옳을지 몰라 망설이는 듯하다가 가느나마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말을 끄집어내었다.
왼 방의 귀와 눈은 차돌의 입술로 몰리었다.
"언젠가 제가 새벽녘에 잠을 깨었지요. 그래 무심코 아랫목을 보니까, 그 어른이 누워 계시는 자리에 그 어른이 계시지를 않겠지요. 뒷간에나 가셨나하고, 그양 쓰러져 누우려다가 웬일인지 그 날은 잠이 설들어요. 암만 기다려도 그 어른은 오시지를 않고, 휘젓한 게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나요……."
하고 차돌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옳지, 그래 어린 것이 무섭기도 하겠지. 그래, 그래서?……."
'떠는턱’이 연송 재촉을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가 아마 작년 겨울인가 봐요. 눈보라가 몹시 쳐서 문풍지는 덜덜 떨고…… 잠은 점점 달아나고 무섭기는 하고, 그래 제가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옹크리고 있노라니 눈보라가 버석버석 창에 부딪치는데 어데선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요. 쩡쩡…… 그 때 ' 석’ 하시는 스님은 아직 안 나오시고 왼 절 안이 괴괴한데 이 난데없는 소리를 듣고 저는 간이 콩만 했다가 겁결에도, 오 옳지 이 어른이 이 눈 오시는 새벽에도 탑을 지으시나 부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겠지요!"
"오, 그래서?"
어느 결엔지 아상 노장이 눈을 떠서 귀여운 듯이 차돌을 바라본다.
"제가 그대로 뛰어나와 버석버석하는 눈 위로 줄달음질을 쳐서 탑 모시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지요. 새벽이라 해도 아직 날이 덜 새어서 어둑어둑했지만 눈길은 환했습니다. 올라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어른이 정을 들고 한참 바쁘게 일을 하시더군요. 제가 곁에 가도 사람 오는 줄도 모르시고 머리에 등에 눈을 뒤집어쓰신 채 정과 망치를 번개같이 놀리시겠지요. 거기가 워낙 바람모지가 되어서 저는 얼마를 서 있지를 못해 귀가 떨어져 달아날것 같고 발이 쓰리고 왼몸이 덜덜 떨려서 '에이 치워!’ 소리가 저절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제야 그 어른이 놀랜 듯이 저를 돌아보시는데 그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이……."
"그 치운데 땀이……."
누가 감탄을 한다.
"저는 숨길도 얼어붙을 것 같은데 그 어른의 비 오듯 하는 땀을 보고 정말 놀랬어요. 그 어른은 저를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치운데 왜 나왔니?
어서 들어가거라. 감기 들라.’그래도 제가 머뭇머뭇하고 섰노라니, ' 오, 네가 혼자 무서워서 나온 게로구나.’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시듯이 말씀을 하시고 저를 데리고 나려오시는데, 저는 오금이 얼어붙어 댓 자국을 못 옮기었는데 그 어른은 여상스럽게 걸어오시겠지요. 참 신통력을 가지신 어른이에요."
일좌의 얼굴에는 감동하는 빛이 흘렀다.
"그래, 그 후에도 일하는 걸 또 본 적이 있니?"
원주가 종주먹을 댈 듯이 묻는다.
"보고말고요. 낮에 틈틈이 일하시는 것도 저는 가끔 봅니다마는 사람 을기 하시는지 인기척만 나면 곧 일을 중지하시지요. 요새도 꼭 밤을 새우시 는걸요. 아침이 되어 여러 스님이 일어나실 때쯤 해야 처소로 돌아오셔요. 제 귀에는 밤중에도 정 소리가 역력히 들려 와요."
"참말 명공은 명공이야."
"천수관세음의 현신이시어."
"그런 명공을 얻은 것은 첫째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둘째 우리 절의 복이야."
"아니, 우리 신라의 복이지."
제각기 떠들 때에 차돌은 갑자기 손으로 제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들 계셔요. 자 자, 저 소리를 들어보셔요, 저 소리를."
나직하게 속살거린다.
여럿은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가 그윽이 그윽이 들려온다.
여럿은 숨소리를 죽였다. 귀가 쏠릴수록 그 소리는 더욱 또렷또렷해진다.
똑 똑, 바루 추녀 끝에서 완연히 낙수가 떨어지고 자그륵 자그륵 연잎에 급한 소나기가 지나가는 듯하다가 문득 쩡 하고 우람한 울림이 지동처럼 울려 온다.
성기고 배게, 느리고 자지러지게, 높으락낮으락 그 소리는 저절로 미묘한 곡조를 이루어 쪼는 이의 신흥을 알으켜 준다.
여럿은 말없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소리 오는 것을 눈 익혀 보려는 것처럼.
바깥은 옻빛같이 캄캄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일동은 서로 돌아보았다.
그 이튿날 뜻밖에 위로 고마우신 분부가 나리었다. 대역이 끝나기 전이니 어엿한 거둥은 못 하셔도 다른 절에서 불식을 마치신 후, 미행으로 듭신다는 분부다.
6
불국사의 저녁 나절.
연옥색 하늘을 인 토함산 꼭대기 너머로 너붓이 내다보이는 담회색 구름장은 서쪽으로 향한 송아리가 햇솜처럼 눈부시게 피어난다. 산기슭 울창한 송림은 푸른 기름이 질질 흐르는 듯.
절 앞 넓고 넓은 못은, 바람도 없건마는 제 흥에 겨운 듯이 찰랑찰랑 몰려들어와 새로 쌓아올린 석축에 부딪는다. 바그르 흰 물꽃을 날리고 갈 길을 몰라 쩔쩔매는 듯하다가 더러는 수멸수멸 뒷걸음을 쳐서 멀리 물러가고, 더러는 옆으로 빙그르 돌아 청운교 연화교 가를 더듬더니 마츰내 돌로 튼 홍예문을 찾아내어 앞을 다투며 몰켜 나가서는 어지럽다는 듯이 뱅뱅 돈다.
저 건너 언덕에는 그림배 여러 척이 매였다. 물결이 일렁대는 대로 자줏빛 남빛 누른 빛 비단 휘장이 한가롭게 펄렁펄렁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고, 뱃머리에 여의주를 문 청룡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배는 아마 임금을 모실 배이리라.
물새 몇 마리가 너울거리는 나랫자락을 적실 듯 적실 듯하며 물얼굴을 스쳐 난다.
그 긴 부리로 넝큼넝큼 송사리 따위를 잡아 삼키다가, 별안간 놀란 듯 이그 반질반질한 작은 몸을 솟구쳐서 높이높이 공중으로 사라진다.
입실(절 어구) 부근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떠들썩하게 가까워 오는 까닭 이 리라.
거둥이 듭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웃두리 중들은 영접차로, 아랫두리 중들은 구 경차 로 절을 텅 비우다시피 하고 들끓어 나왔다가 이제야 제각기 제 맡은 소임을 생각하고 줄달음질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지러운 그림자, 허둥거리는 바쁜 걸음. 종용하던 공기는 흔들렸다. 찢어질 듯이 긴장한 가운데 물 끓듯 워글 워글 한다.
미행이라 하였지만, 도리어 화려하고 가족적인 단란한 거둥이었다.
왕은 젊으신 왕비 만월 부인과 후궁 비빈을 거느리셨고, 배종하는 몇몇 대관들도 왕명을 받들어 그 부인과 딸들을 데리었다.
이번 거둥은 기실 젊으신 왕비께서 오래 불국사 구경을 못 하시어 한번 소 창을 하시자고 낙성이 되기 전이건만 왕을 조르신 까닭이다. 안압지 서출지의 뱃놀이도 좋지마는 절 안으로 저어드는 불국사의 그림배엔 버리지 못 할 풍 치가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 새로 이룩된 다보탑이 세상에도 진기하다는 소문을 들으셨음에랴.
기름 같음 물결 위에 그림배는 꼬리를 맞물고 술렁술렁 떠나간다.
배가 기우뚱기우뚱, 번쩍번쩍하는 금관이 물속에 흔들리자, 수없는 구옥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희빈들의 예쁜 얼굴들이 연꽃 숭이처럼 둥둥 떴다. 실바람에 나부끼는 구름 조각과 같이 아른아른한 깁옷자락도 흐른다. 간댕간댕 하는 황금 귀고리와 구실 목걸이가 물거품 사이로 숨기잡기를 한다.
실바람을 따라 고귀한 향기가 그윽이 풍기었다.
중류를 지나자 길게 누운 으리으리한 전각의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부서졌다.
동쪽으로 청운교 백운교, 서쪽으로 연화교 칠보교가 뚜렷이 나타난다. 불국사 자랑의 하나인 돌사다리다. 번들번들하게 대패로 밀어 놓은 듯한 충 댓 돌과 그 층층 상하에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그 머리에 구녕을 뚫어 늘어 뜨 린 은사실을 바라보고 배 안에서는 경탄의 속살거림이 일어났다.
"얘, 털아! 참 아름답기도 하고나."
꽃 같은 희빈들 중에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웬 아가씨가 맥맥히 돌 사다리를 바라보다가 제 옆에 앉은 시비에게 소곤거렸다. 그는 은실 금실로 수 놓은 끝 동 소매를 조금 치켜서 옥 같은 손으로 뱃전을 짚고 그 날씬한 허리를 반나마 배 밖으로 기울였다.
"어쩌면 돌층층대를 바루 물속에 맨들었어요? 구실 아가씨!"
털(毛兒)이란 시비는 그 동그란 눈을 더욱 동글게 뜨며 맞방망이를 친다.
"그보담도 저 웃사다리와 밑사다리 어름을 좀 봐라. 그 밑에 돌로 홍예를 튼 것이 보이지 않니? 물결이 그 조그마한 홍예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게 가지고 놀고 싶구나."
구실 아가씨란 이의 그 거슴츠레한 눈은 황홀해진다.
7
그는 이찬(伊飱) 유종(唯宗)의 딸 주만(珠曼)이었다. 흔히는 구실 아가씨라고 부른다.
"아이 야릇도 해라. 참 거기 물문이 있구먼요. 아가씨는 눈도 밝으시어."
털이는 그 동그란 눈을 이번에는 지그시 감은 듯이 하고 바라본다.
"그 물문 안으로 배를 타고 한번 돌아보았으면."
주만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그게 뭐 어려워요. 좀 돌아보자고 사공에게 그럽지요."
"글쎄, 그럼 그래 볼까?"
주만은 뛸 듯이 기뻐하며 배 안을 돌아보고,
"우리 저 물문으로 지내가 볼까요?"
하고 물었다.
"그래요, 참 그래 봐요."
"그러면 작히나 좋을까?"
몇몇 젊은 아가씨들도 손뼉을 칠 듯이 찬성을 한다.
다른 배들이 돌사다리 밑 돌기둥에 닻줄을 매려 할 때에, 주만을 실은 배만 슬쩍 뒤로 빠져 나왔다. 청운교 백운교 사이의 홍예 밑을 돌고 다시 연 화교 칠보교 물문을 접어들었다.
주만은 뱃전에 찰랑찰랑하는 물결을 손으로 움켜 보기도 하고, 물굽이를 따라 배가 뱅뱅 도는 것을 어린애같이 좋아라 한다.
배가 닿을 데 닿은 뒤에도 주만은 제가 지나온 물문을 보고 또 보며 맨 나종까지 머뭇거린다.
일행은 벌써 다 배에서 나리어 행여나 뒤질세라 하고 종종걸음들을 친다.
"어서 나립쇼. 너무 뒤에 떨어지면 어떡하실라구……."
털이는 조바심을 한다.
"뭘 그 동안이 얼마나 되겠니?"
주만은 태연하다.
그들이 배에서 나렸을 때엔, 왕을 모신 옥교는 동쪽 사다리 위에 올르시어 자하문 안으로 납시었다. 일행들은 걸어서 왕의 뒤를 모시었다.
주만은 배 안에서 머뭇거릴 때와는 딴판으로 질질 끌리는 치마 뒷자락을 돌아다 볼 생각도 않고 나는 듯이 돌사다리를 오른다. 털이는 방구리 같은 키를 꼬불거리며 아가씨의 뒷자락을 추켜 들고 쌔근쌔근 뒤를 따랐다.
자하문을 들어서자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었다. 왕은 옥교에서 나리 시어 일행을 데리시고 다보탑 앞에 걸음을 멈추신 까닭이다. 주만과 털이는 쉽사리 그 행렬에 끼일 수 있었다.
주만은 다보탑을 한번 보고 제 눈을 의심 않을 수 없었다.
저젓이 돌로 된 것일까? 저것이 단단하고 육중한 돌로 된 것일까? 돌을 어떻게 다루었으면 저다지도 어여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의젓하고 공교 롭게 지어 낼 수 있었을꼬?
네 귀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 네 마리는 당장 갈기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다. 사자등 너머로 자그마한 예쁜 돌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눈으로 더듬어 올라가면 편편한 바닥이 되는데 그 한복판에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접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들이 둘째 층 밑바닥을 고인 어름에는, 나무를 가지고도 그렇게 곱게 깎 음질을 해내기 어려울 듯한, 소로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렸다.
첫 층의 지붕엔 둘째 층의 네모 난 돌난간이 둘리어 쟁반 모양 같은 둘째 층 지붕을 받들었고, 셋째 층에는 난간이 팔모가 지고 기둥이 여덟 개가 되어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을 수놓은 역시 팔모 진 지붕을 떠 이고 있다.
주만의 눈길은 그 뛰어난 솜씨의 자국자국을 샅샅이 뒤지는 듯이 치 훑고나리 훑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흥을 자아낸다.
"절묘, 절묘."
마츰내 왕께서 먼저 절찬하였다.
"그 돌 다루는 재조는 참으로 하늘이 내신가 하옵니다."
왕의 곁에 모셨던 이찬 유종이 아뢰었다. 너그러운 뺨에 자가 넘는 흰 수염이 은사실같이 늘어졌다.
"경신읍귀의 재화라 함은 이런 재조를 이름인가 합니다."
고자처럼 노리캥캥하고 수염도 없이 맨숭맨숭한 시중(侍中) 김지( 金旨) 가 한문 문자를 써가며 맞방망이를 올린다.
"저 탑이 분명히 돌로 지은 것일까? 바루 밀가루나 떡고물 반죽이라면 몰라도."
만월 부인께서도 감탄하신다.
"마마의 비유가 그럴듯하오마는 떡가루를 가지고도 마마는 저렇게 빚어 내기 어려울 것 같소."
하고 왕은 웃으신다.
8
"모든 것이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상감마마의 원력이신 줄로 아룁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유착한 바위라도 높으신 원력 앞에는 나무보담 더 연 하옵 고물 보담 더 물른 것인가 합니다."
하고 아상 노장이 합장(合掌)을 한다.
"연전에 감역 김대성(金大城)이 천하의 명공을 얻었다 하더니 저 탑도 그 명 공이 쌓은 것인가?"
왕이 물으신다.
"분부와 같습니다. 오직 그 명공의 혼잣손으로……."
"혼잣손으로?"
왕은 놀래신다.
"과연 천하 명공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고나. 늙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이올시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
여러 사람들도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어두른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
주만도 속에 새기듯 곱삶았다.
"서라벌 사람이오?"
이번에는 이찬 유종이 묻는다.
"아닙니다. 부여에서 왔다 합니다."
"그러면 부여 사람이오?"
"부여에 유명한 부석(伕石)이란 석수의 수제자라 합니다."
"지금도 그 석수가 이 절에 있소?"
아상 노장은 다보탑 서쪽으로 여남은 간 떨어진 자리에 두 층만 쌓아 놓은 석가탑을 가리킨다. 그 탑에 걸치어 사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아직도 집채만큼씩 한 바윗덩이가 여러 개 남아 있고, 치우고 쓸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돌조각이 여기저기 떨어진 것이 아직도 공사중인 것을 알으킨다.
"이 다보탑은 작년에 끝을 내고 지금은 저 석가탑을 짓는 중입니다."
일행은 석가탑 앞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아직 완성도 되지 않았지마는 얼른 보기에 다보탑처럼 혼란한 깎음새와 새김질이 없어 다보탑에 얻은 감흥이 너무 컸던 만큼 여럿은 적이 실망을 하였다.
"제 아무리 명공이라 할지라도 다보탑에 기진역진한 게로군."
김 시중이 대번에 타박을 한다. 경솔하게 입 밖에는 내지 않았을망정 김시중과 동감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만이만 이 말에 맘속으로, ' 아니오, 아니오.’
하고 외우쳤다. 층마다 술밋한 돌병풍이 둘리고 그 병풍 네 귀에 접어 넣은듯 한 돌기둥이 한데 어우러져 탑신을 이루었는데 그 거칠 것 없이 쭉쭉 뻗은 굵은 선이 어데인지 장중하고 웅장한 풍격을 갖추어 비록 다보탑과 같이 잔재미는 적을망정 그 수법이 범상하지 않을 것을 일러준다.
"아니올시다. 공은 이 탑이 더 든다 합니다. 탑 한 층마다 온전히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지어낸다 합니다. 그러니 공사가 거창하기로는 오히려 다보탑 보담 여러 갑절이라 합니다."
아상 노장이 타일르듯 김 시중의 말을 반박하였다.
주만은 제가 바루 알아본 것이 무엇보담도 기뻤다. 그리고 속으로, ' 한층이 돌 하나로 되었다면 다보탑보담 공이 더 들고 말고.’ 혼자 뇌었다.
"딴은 공사가 거창은 하겠군. 그 우람스러운 품으로는 그럴 상도 싶소.
그러면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미인에 견줄진댄, 이 탑은 헌헌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까? 허허."
김 시중도 아까 제 말이 너무 경솔했던 것을 뉘우치고, 그 득의의 한문 문자를 휘몰아 쓰며 얼른 둘러맞춰 버리고 그 노리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 살을 편다.
"그 석수가 지금도 있다면 잠깐 불러올 수 없을까?"
하시고 왕은 아상 노장을 보신다.
왕의 이 말씀에 여럿의 귀는 번쩍 뜨이었다. 저마다 그 석수를 한번 보고싶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뛰어난 재조를 지닌 그 석수장이는 과연 어떠한 사람 일까. 여럿의 눈을 호기심에 번쩍였다.
그 중에도 주만의 눈이 더욱 빛났다.
"어려웁지 않습니다."
하고 들어가는 아상 노장의 걸음이 느린 것이 원망스러웠다.
9
얼마 만에 아상 노장을 따라 젊은 석수는 나타났다.
꾸미지 않은 옷매무새며, 오래 손질을 않은 탓으로 까치집같이 헝클어졌으되 윤 나는 검은 머리며, 두루미처럼 멀쑥하게 여윈 몸피를 얼른 보는 순간, 주만의 가슴은 웬일인지 찡하고 울린다.
그는 이런 자리는 난생 처음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먼발치에서 머뭇거릴 제 왕은 가까이 오라는 분부를 나리셨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들어 와서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는데 그 고개를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얼굴을 들어라."
젊은 석수는 한참 망설이다가 분부대로 머리를 들었다.
번듯한 이맛전, 쭉 일어선 콧대, 열에 뜬 것 같은 붉은 입술, 더구나 가을 호수를 생각키게 하는 맑고 깊숙한 눈자위, 제 아무리 천하명공이라 하더라도 한낱 시골뜨기 석수장이로 이렇게 청수한 풍채와 씩씩한 품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젊은이 축의 곁눈질하는 눈초리에는 흠모의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주만은 그의 얼굴과 풍골에 다보탑의 공교롭고 아름다운 점과 석가탑의 굵고 빼어난 맛이 쩍말없이 어우러진 듯하였다.
"어쩌면 재조도 그렇게 좋고, 인물도 저렇게 잘났을깝시오?"
멍하니 석수를 바라보던 털이는 주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재거린다.
주만은 그런 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 대꾸가 없다.
"아가씨, 구실 아가씨, 저 연연한 입술을 봅시오. 마치 연지를 찍은듯……."
주만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 가느나마 숱 많은 눈썹을 찡긴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눈치도 볼 새 없이 제 눈은 그 석수의 얼굴에서 떼지도 않으면서 노상 종알거린다.
"아이그, 가엾어라. 그 탑을 쌓노라고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기에 저렇게 말랐을까? 저 뺨에 살점이나 붙었던들 작히나 더 의젓하고 엄전할깝시오?"
주만은 털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왕은 이윽히 석수를 바라보시다가,
"얼굴도 준수하다."
칭찬하시고,
"이름은 무에냐?"
"아사달(阿斯達)이라 부릅니다."
맑고도 씩씩한 목소리다.
"부여에는 부모가 있느냐?"
"아버이와 어미가 다 없습니다."
"그러면 형제는 있느냐?"
"동기도 없삽고 스승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스승은 누구냐?"
"부석이라 합니다."
"지금도 살았느냐?"
"예, 살아 있습니다마는 벌써 칠십이 넘어 걸음도 잘 걷지 못합니다."
털이는 끝끝내 재잘거린다.
"보고 또 보아도 참 잘난 얼굴. 그 검은 머리는 옻빛 같고…… "주만은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려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털이를 돌아보며, "네 눈에도 그렇게 잘나 보이느냐?"
마지못해 대꾸를 해 준다.
"왜 쇤네 눈은 눈이 아닌갑시오? 저 목소리를 들어 봅시오, 어쩌면 저렇게 청청해요?"
"맑고 부드럽고……."
하고 주만은 속이 가득한 것을 내뿜는 듯이 숨을 크게 내쉰다.
털이는 또 말끝을 이어,
"우리 서라벌에도 저런 인물이 쉽지 않겠습지요?"
"우리 서라벌에 저런 인물이 있을 말로야."
하고 주만은 연거푸 한숨을 쉰다.
"왜 우리 서라벌에 그런 인물이 없기야 한갑시오? 첫째로 김 공자가 계신데."
김 공자란 말에 주만의 아름다운 얼굴은 별안간 흐려졌다.
김 공자라 함은 시중 김지의 아들 김성(金城)을 가리킨 것으로 주만과 혼인 말이 있는 귀공자다.
"김 공자 따위야."
"왜요? 키가 조금 작으시지만 얼굴이 희시고 싹싹하시고 재조 있으시고……."
"얘, 입 고만 놀려라. 듣기 싫다. 그 키가 작기만 한 키냐, 곱추지."
"그래도 당나라까지 가셔서 공부를 하시고 한문이라든가. 진서라든가, 그 어려운 글을 썩 잘하시고, 당나라 벼슬까지 하시고……."
"그까짓 당나라 공부가 그렇게 장하냐? 그 어수선한 글자나 잘 알면 무슨 소 용이 있을꼬?"
"김 시중 대감이 세도가 당당하시고……."
"세도가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하고 주만은 화를 버럭 낸다. 털이도 제 아가씨의 비위를 너무 거슬린 것이 죄송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10
어스레하게 땅거미가 들면서부터 절 안은 더욱 북적거렸다. 왕을 맞이 하여 저녁 재를 굉장하게 올리는 것이다.
불전마다 매어 달린 가지각색의 무수한 등들이 차차 불빛이 밝아온다. 임금님이 듭신 것을 알으키는 용무늬를 올린 청사초롱에 밀초가 부지 짓 부지 짓 타오른다.
이 불바다에 헤엄치듯 갖은 풍악이 울려온다.
두리둥둥 법고가 운다. 엎어치는 바라가 지르렁지르렁. 쾅쾅 태증이 억세게 고함을 지르는 사이로 가냘픈 호적이 껄떡이며 넘어간다.
법당 뒤 큰방에 임시로 옥좌를 베풀고 듭셨던 왕은 일행을 데리시고 법당에 납시어 예불을 마치시고 재 올리는 구경을 하셨다.
승무가 한창 자지러지는 판에 주만은 살그머니 총중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골속이 힝힝 내어둘린다. 풍악 소리도 아무 곡조도 없는 듯 잉잉하고 시끄럽게 귀를 찢어내는 것 같다. 재미있는 춤 가락도 눈에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다.
사람이 많은 푼수로 방안이 좁아서 공기가 울체한 까닭인가, 그 까닭도 있었다. 어느덧 첫여름이라 여럿의 땀내와 살내와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그 의 비위를 뒤흔든 탓인가, 그 탓도 있었다.
가마에 흔들리고 배에 흔들리고 절 음식이 맞지를 않아 저녁을 설친 때문인가, 그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원인보담도 그는 제 혼자 있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종용하고 호젓한 자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자리,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자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자리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는 오직 저 호올로 무엇을 생각하고 싶었다. 제 넋과 단 혼자 은밀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법당 문 밖을 나서니 선선한 밤바람이 그의 옷깃 속으로 처근처근하게 기어든 다.
그는 살 것같이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지향 없이 걸음을 옮기었다.
주인과 나그네가 모조리 재 올리는 데로 몰리인 듯, 밖에는 개아미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는다. 그는 불빛을 피하듯 어둑한 데로만 바라보고 발을 내어 디디었다. 얼마를 걷지 않아 광선의 테 밖에 헤어나올 수 있었다. 어슴푸레한 가운데 낮에 보던 다보탑이 저만큼 보인다.
그 탑을 바라보는 찰나 까닭 없이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졌다. 이 묵묵한 돌탑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주만이 저도 생각지 못 하였으리라.
그 탑은 부른다. 손짓하며 부른다.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 하는 듯 하다 째기 발을 디디고, 왜 늦었니, 하는 듯하다.
주만은 허정허정 재게 걸었다. 그는 한 순간이라도 빨리 그 품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까 눈으로만 더듬던 자욱자욱과 구석구석을 손으로 어루만져 보리라 하였다. 그렇듯이 고와 보이는 돌결이 얼마나 부드럽고 미끄러운가 뺨을 대고 비벼 보리라 하였다. 그 오뚝 솟은 손잡이들을 휘어잡고 그 자그마한 돌층층대를 껑충껑충 뛰어올라 가리라 하였다. 그 판판한 밑바닥에 펄쩍 주저앉아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제 넋과 은밀한 수작을 주고받아 보리라 하였다.
처음 생각엔 거기가 고대인 줄 알았더니 걸어보매 꽤 동안이 떴다. 더구나 서투른 길이요, 어두운 길이라 마음이 급할수록 발은 움펑진펑하여 하마터면 여러 번 고꾸라질 뻔하였다.
땅바닥을 보고 조심조심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언뜻 다시 고개를 들매 초생 반달이 탑 위에 걸렸다. 그 빛 물결은 마치 흰 바단 오래기 모양으로 탑몸에 휘감기어 빛과 어둠이 서로 아르롱거리며, 아름다운 탑 모양은 더욱 아름답게 떠오른다.
주만은 마치 두억시니에게나 흘린 사람 모양으로 걸어간다느니보담 차라리 끌리듯이 탑으로 한 자욱 두 자욱 다가들었다.
문득 탑에만 어리인 그의 눈앞에 난데없는 검은 그림자가 얼른하고 자나 간다.
주만은 깜짝 놀래며 몸을 소스라쳤다.
11
밝은 데서 나온 까닭으로 눈이 어둠에 채 익지를 안 했기도 하려니와 탑에만 정신이 쏠렸기 때문에 주만은 제 주위를 보살필 겨를이 없어, 아까부터 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사람을 못 보았던 것이다. 으슥한 곳에 무심한 가운 데에 불쑥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처럼 사람을 놀래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아!"
나직한 외마디 소리를 치고 주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인기척도 외마디 소리도 도모지 못 들은 양 묵묵히 탑의 둘레를 그대로 돌아간다.
주만은 아뜩한 정신을 가까스로 바루잡자 그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또한 번 놀래었다. 그에게는 이번 놀램이 아까 놀램보담 몇 곱절 더 컸다. 가슴이 두근두근 두방망이질을 한다.
그는 제 앞으로 어른거리며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야말로 다른 사람 아닌, 낮에 본 그 석수인 것을 알아보았다.
먼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진 어름, 희미한 광선이건만 그 빼어난 이마와 검고 사내다운 눈썹과 연연한 입술이 또렷또렷하게 주만의 눈 속으로, 아니 가슴 속으로 박히는 듯이 들어왔다.
주만은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에게로 와락 뛰어 달겨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든지 두 가지 방도 가운데 한 가지 방도를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까 선 그 자리에 오금이 붙어버린 듯 발꼬락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이는 제 길만 돈다. 별을 따려는 사람 모양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어느 때는 급하게 어느 때는 느리게 돌고 또 돈다. 벌써 주만의 앞을 네 차례 다섯 차례 돌아갔건마는 단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 여기 있어요.’
여섯 번째 제 앞을 지나칠 때 주만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 나’라 한들 그이가 '나’가 누구인 줄 알 것인가. '나’라는 사람이 그이와 무슨 알음알음이 있단 말인가.
회호리바람에 둥 뜨인 듯한 머리건만, 제 생각이 하도 어처구니없는 것을 깨닫고, 어둠 속에서 호젓하게 얼굴을 붉히었다.
'그런데 저이가 왜 탑의 둘레를 자꾸만 돌고 있을까?’
주만은 차차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추자 처음에는 괴이쩍은 생각이 들다가, 오 옳지, 오늘이 초파일. 그에게도 무슨 발원이 있나 부다.’ 하고 스스로 깨우쳐 내었다.
석가 탄일의 밤에 소원 성취를 빌며 탑의 주위를 도는 풍속을 주만은 이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도 저이와 같이 좀 돌아 볼까.’
이렇게 생각하매 저는 그이보담 발원할 것이 열 곱절 수무 곱절 더 많은 것 같았다.
그이가 한 번을 돌면 저는 백 번이나 천 번을 돌아도 이 크고 큰 발원에는 오히려 정성이 부족할 듯하였다.
첫째로 김 시중 집과 혼인이 되지 말기를 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굳 굳하게 끝끝내 거절해 주소서, 어머니는 언제든지 제 편을 들고 역성해 주소서, 하고 빌고 싶었다.
둘째로 지금 제가 수를 놓고 있는 수병풍이 잘 되어지이다, 그리고 당나라에 보내는 선물 가운데 첫째로 뽑혀지이다, 하고 빌고 싶었다.
셋째로 이번에 빌 것이야말로 첫째 둘째보담 더 소중하고 더 엄청나고 더 어렵고 더 간절한 발원이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발원이냐?"
누가 종주먹을 대고 물어도 주만은 꼭 집어서 무엇이라고 대답은 못 하였으리라.
남에게 대답은커녕 제 속생각에나마 분명치를 않았다. 물속에 흐르는 달빛과 같이 꼭 잡아낼 수는 없으나마, 아무튼지 안타까웁고 애닯은 발원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영롱한 무지개처럼 눈부신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넘치는 봄물결과 같이 마음 가득한 발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의 발길은 다시 가까워 온다. 달빛을 담쑥 안은 뒷머리가 검게 빛난다.
주만은 곧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내어디디려던 발은 다시 옴츠러지고 만다. 아아! 염통은 왜 뛰기만 하는고.
"에구, 아가씨, 구실 아가씨, 아가씨가 여기 계시는구먼."
등뒤에서 털이의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2
주만은 이 때처럼 털이가 반가운 때는 없었다. 백만의 응원병이나 얻은 듯이 든든하였다.
"오, 털이냐, 너 참 잘 나왔고나. 이것 봐, 오늘이 초파일 아니냐? 너와나와 이 탑을 돌아 보자. 소원성취하게."
"원 아가씨도 급하시기는. 사람이 숨이나 좀 돌려얍지요."
하고 장히 가쁜 듯이 숨을 모두꾸려 쉰다.
"누가 여기 와 계실 줄이나 알았나요? 한참 승무 구경을 하다가 아가씨를 찾아보니 어느 결엔지 게시지도 않겠지요. 왼 방안을 찾아보아도 없으시고, 그래 생각다 못하여 밖으로 나왔습지요. 미친년 뽄으로 못가엘 다 가 보고 산기 슥 도 헤매 보고 어데 계셔야지. 까막나라라 몇 번을 호방에 빠지고 참 죽을 뻔을 했답니다. 어쩌면 이년을 그렇게 속이셔. 후후, 아이 숨차."
찾기에 애쓰던 원정을 늘어놓는다.
"…….대뜸 이 탑 생각을 했더면 좋을걸. 이 원수엣년의 대강이에 어데그런 생각이 얼른 돌아야지……."
"예, 수다 작작 떨고 어서 탑이나 돌자."
주만은 벌써 한 걸음 내어디디며 털이를 재촉하였다.
털이는 막 발을 떼어놓으려다가 말고 별안간에,
"에그머니 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주만의 손에 매어달린다. 털이는 그제야 아사달의 검은 그림자를 알아보고 깜짝 놀랜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그 그게 누군갑시오?"
털이는 더욱 달라붙으며 가슴을 벌렁벌렁한다.
주만은 돌아다보며 손을 저어 아무 소리도 말라는 뜻을 보이었다.
"게 게 누군갑시오?"
어느덧 주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이번에는 주만의 귀가 간질간질 하도록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왜 그 석수 아니시냐."
주만은 성이 가시지만 가만히 일러주는 수밖에 없었다.
"네에 ─."
하고 고개를 까딱까딱 하다가,
"그럼 아가씨가 혼자가 아니시군요."
하며 살그머니 제 아가씨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알아채 렸 다는 듯이, "그럼 쇤네는 괜히 온걸입쇼."
하며 헤헤 웃는다.
주만은 눈을 흘겨 보이었다.
"아가씨는 눈을 흘기시면 더 예쁘시어…… 해해."
털이는 농치듯이 또 한 번 웃어 보인다.
털이는 주만의 유모의 딸이다. 나이도 다 같은 열여덟에 한동갑이요, 어려서 부터 같이 자라났고 시방도 밤낮으로 몸시종을 드는 터이라, 이따금 상전과 종이라는 상하 구별을 잊어버리고 꽤 버릇없이 굴었다.
주만은 털이의 말씨가 분하고 괘씸하였으나 여기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털이는 벌써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고,
"참 어서 탑을 돌아얍지요, 네 아가씨. 자 아가씨가 앞장을 서십시오."
주만을 앞으로 떠다밀다시피 하며 서둔다.
뭉실뭉실 떠도는 구름장이 그 흐늘흐늘하는 엷은 한 자락을 펼쳐서 슬쩍 달 얼굴을 가리웠다. 초생달의 약한 빛을 그나마 가리어 놓으니 사면은 어렴풋하게 조으는 듯.
네 간만큼 세 간 만큼 두 간만큼! 주만과 털이의 걸음은 차차 차차 재발라지며 가까이 가까이 아사달의 뒤를 따르며 매암을 돈다. 한 간만큼 반 간만큼! 그들의 떨어진 사이가 좁혀들었다. 앞에 가는 이의 뒤로 흔드는 손길이 뒤따르는 이의 앞으로 내미는 손길과 자칫하면 마주치게 되었다. 앞선 이의 헐레벌떡하는 숨소리가 역력히 들린다. 앞선 이의 그림자가 뒤선 이의 발끝에 밟히었다. 그 순간 그들의 거리는 다시금 멀어간다. 한 간 두 간 세 간.
동안은 자꾸 떨어져 간다.
앞선 이도 제 뒤를 밝는 자국 소리를 분명히 들으련마는 단 한 번을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호리호리한 여윈 뒷모양이 주만의 눈길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 뿐이다.
이럴 줄 알았던들 차라리 아까 모양으로 한 자리에 서 있기나 할 것을,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앞으로 지나칠 적마다 그 모습이나마 자세자세 볼 수 있었을 것을.
주만은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수해진다. 무엔지 슬프고 원망 스럽고 서운하였다. 다리는 맥이 다 풀리고 걸음걸이는 허전허전해진다.
"어쩌면 뒤 한 번을 돌아보시지 않을까?"
털이는 제 주인의 속을 데미다보듯이 혼잣말로 종알거리고, 축 늘어지는주만의 허리를 부축한다.
"아가씨, 우리 인제는 앞으로 질러가 보아요."
털이는 마츰내 묘안을 나리었다.
13
주만과 털이는 돌쳐섰다.
앞질르는 것이 과연 묘안은 묘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수월한 노릇은 아니었다. 궁금하던 그의 앞모양과 얼마든지 마주칠 수는 있었건만 딱 맞닥뜨릴 뻔하다가 슬쩍 옆으로 비킬 적마다 주만의 가슴은 못 견딜 만큼 뛰논다.
아까는 뒤밟는 동안이 떴다가 줄어들다가 하더니 이번에는 그들의 매 암도 는 둘레 사이가 벌어지고 좁아들고 하였다.
저 둘레와 이 둘레가 차차 차차 다가들어 두 둘레가 한 둘레로 어우러질 만하면 다시금 멀리멀리 갈리어 나간다.
너무 멀어지면 안타까웁고 너무 좁아들면 숨길이 막힐 듯하고…… 주만의 이마에는 구실 같은 땀방울이 맺히었다. 새빨간 뺨은 농익은 홍시처럼 아늘아늘 터질 듯하고 가쁘게 내쉬는 단 김에 호끈호끈 입술이 마른다.
곁에서 보기에는 허청허청 탑의 둘레를 도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이었지만 막상 돌아보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인제는 눈이 핑핑 내어둘리고 머리까지 어찔어찔하다.
그래도 주만은 이를 악물고 돌고 또 돌았다.
"아이 사람 죽겠네. 아이 사람 죽겠네."
털이는 쌔근쌔근 하면서도 연해 잔소리를 재우치며 땀을 빡빡이 흘린다.
달이 가리었던 구름장은 어른어른 지나간다. 가닥가닥이 풀어지고 엷어져서 마지막엔 뿌유스름한 김처럼 달얼굴에 서리었다가 이내 가뭇없이 사라졌다.
거물거물하던 그늘과 빛이 뚜렷해졌다.
탑신이 은물에 적시어 놓은 듯 불현듯 번쩍인다.
어느 결엔지 또다시 같은 둘레를 돌고 있던 아사달과 주만은 거의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의 상거는 너댓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아사달이 갑자기 무엇을 찾는 듯이 제 주위를 둘러본다.
달빛을 안고 흰 꽃숭이처럼 피어난 주만의 얼굴에 아사달의 시선은 떨어졌다.
그 찰나! 아사달의 걸음은 주춤하고 멈춰졌다. 놀램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이 한 순간 그 꿈꾸는 듯하던 눈자위에 떠올랐다. 흑! 하고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며 한 발자국 내어디디자 아사달의 눈은 불같이 빛났다. 한참 주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정신을 모으는 듯 눈을 감아 버린다.
주만도 별안간 변한 아사달의 거동에 깜짝 놀래었다. 뜨거운 저편의 눈길에 동여 매인 듯 주만이 또한 그 자리에 딱 발길을 붙인 채 손끝 하나 꼼짝 할 수 없었다. 왼몸의 피까지 돌기를 그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듯, 오 고가는 두 시선만 불꽃을 날리었다.
그 때였다. 재 올리는 구경이 한 고비가 넘었는지 법당에 몰리었던 젊은이 축들이 떼를 지어 와하고 쏟아져 나온다.
"아이 여기는 시원도 해라. 법당 속은 바루 도가니 속이야!"
"이런 줄 알았더면 진작 나올 것을."
"어디 어디를 가 볼까?"
"이 마당 끝까지 가 보지."
제각기 지껄이며 뜰을 나려온다.
"우리 저 솔숲으로 가 볼까?"
"까막나라에 뱀이나 있으면 어떡하게."
"뱀이 무슨 뱀이야."
"여길 나오니 달도 밝구먼."
"저기 다보탑이 보이네."
"저것 보아, 저 다보탑 밑에 사람 셋이 섰네."
"하나는 남자고 둘은 여자고."
"한 남자와 두 여자! 찐덥잖은 일인걸."
"하하하."
"하하하."
구실을 깨는 듯한 웃음소리가 달 그늘로 사라진다.
"달도 희고 임도 희고……."
누가 노래 웃꼭지를 딴다.
"저것 좀 봐요. 남자가 두 여자를 버리고 저리 돌아가네."
"어느 결에 안타까운 이별인가?"
"오호호."
"오호호."
웃음소리를 먼저 보내며 그들의 춤추는 듯한 달뜬 발길이 탑을 향해 걸어온다.
"참 재 올리는 구경에 팔라서 탑 도는 걸 잊었네."
"옳거니 오늘이 파일이거니, 발원(發願)을 올려야지."
"발원이면 무슨 발원?"
"나라가 태평토록."
"오곡이 풍등하게."
"성수(聖壽)가 무강하도록."
"늙으신 부모 궂기지 말게."
"효녀 충신 많으시군."
"알뜰한 내 발원은 고운 님 만나나 뵙게, 오호호."
14
아사달은 쫓기는 듯이 제 처소로 돌아왔다.
요새는 으레 탑 위에서 밤을 새는 버릇이로되 오늘밤 따라 떠들썩한 인기척이 수선스럽기도 하려니와, 어쩐지 몸과 마음이 실실이 풀리어 지렛대와 정을 들추스릴 기력조차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쓰러지는 듯이 제자리에 드러눕자 잠이 곧 올 것처럼 눈이 감기었다. 천근이나 되는 몸이 마치 큰 돌멩이가 물속으로 떨어지듯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왼몸이 으스러지게 고단하면서도 오려던 잠은 설들고 정신이 새삼스럽게 말뚱말뚱해진다.
"그 처녀가 누구일까?"
무두무미(無頭無尾)하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까 주만이와 마주치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온다.
"옷 맨드리만 보아도 귀인이 분명한데 아사녀로 속다니."
하고 아사달은 어이없이 웃었다.
아사녀(阿斯女)란 그의 안해의 이름이었다.
제 안해와 그 처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눈앞에 그려 보매, 갸름한 판국과 입 모습 언저리나 비슷하다 할까, 다른 데는 아무 데도 닮은 점이 없었다.
아사달이 주만을 보고 그렇게 놀래고 반긴 것은 한갓 제 고장에 두고 온 안해로 그릇 본 까닭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떠난 지도 어느덧 삼 년, 이 길고 긴 동안에 얼마나 안해가 아쉽고 그리웠던가. 탑 쌓는 대공에 바친 몸이요. 마음이건만, 천리를 넘나 드는 상사몽은 막을 길이 없었다.
오늘도 일터에 올라갔다가 절 안이 들레어 그대로 나려오고, 그 들레는 까닭으로 오늘이 파일인 줄 알게 되자 집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부여도 오늘은 야단이리라.
우리 집에서도 등을 맨드리라.
그 혼란한 솜씨로 내 등은 또 얼마나 훌륭하게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아사달은 안해와 같이 쇠던 지낸날의 재미나던 파일을 생각하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부여에서도 파일이 되면 식구 수효대로 등을 만들고 등마다 그 등 임자의 생년 월일을 써서 복을 빌었다.
자기도 파일을 진작 알았던들 비록 객지에서나마 장인과 안해를 위하여 등을 맨들었을 것을. 등은 못 맨들었을망정 밤에는 탑을 돌아 제 스승과 안해의 복을 빌리라 하였다.
절 안이 너무 붐비어 일은 손에 잡힐 것 같지도 않아, 낮에는 제 처소에서 누워서 보내고, 저녁이 되어 모든 사람이 재 올리는 데로 몰린 뒤에 그는 호 올로 탑을 돌러 나왔던 것이다.
한 둘레 두 둘레 돌아갈 때 나래 돋친 생각은 훨훨 고장으로 난다.
갸둥질을 쳐주는 구름자락을 마다하고 달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미끄러진다.
아사녀도 저 달을 보고 있으리라. 만일 저 달이 거울이런들 예 있는 나도 저 속에 비치고. 제 있는 저도 저 속에 비칠 것을.
달착지근한 감상(感傷)이 사라지자 집 걱정이 새록새록이 가슴을 누른다.
제일 염려는 제 스승이요. 장인인 부석의 건강이었다.
아사달이 떠나올 때에도 부석의 천촉증(喘促症)은 매우 심하였다.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그 쿨룩 소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오장육부를 쥐어 짜는듯 한 그 악착한 기침 소리, 지금도 선하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나이 벌써 칠십이 넘었으니 아무 병 없이 정정하더래도 춘한 노건( 春寒老健)을 믿을 수 없겠거든, 그런 고질까지 지녔으니 오래 부지야 어찌 바랄수 있으랴.
'만일 돌아가셨으면!’
이런 불길한 생각이 문득 일어나자 그는 몸서리를 치고 탑 도는 발을 빨리 빨리 옮기었다. 한 둘레라도 더 도는 것이 마치 제 발원을 이루는 데 큰 등별( 等別) 이 있을 것처럼.
만일 장인이 돌아가셨다면! 아사녀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자기도 혈혈단신 외톨이요, 처갓집도 어느 일가 친척 하나 들여다볼 사람이 없는 홑진 집안이다. 홀로 남은 아사녀는 어찌 되었을까. 어리고 약 한 여자의 몸으로 그런 큰일을 어떻게 겪을 것인가. 큰일을 감당하고 못 하는것은 오히려 둘째 셋째 문제다. 남 유달리 눈여린 그가 이 지극한 슬픔에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이 울고 또 울다가 그대로 자지러지지나 않았을까.
머리는 풀어 산발을 하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그대로 감아버린 아사녀의 모양이 얼찐 눈앞에 나타났다.
15
아사달은 지긋지긋한 생각을 쫓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죽기야, 설마 죽기야."
그는 제 자신이 알아듣도록 뇌이고 또 뇌이었다.
사람이란 슬프다고 간대로 죽는 것은 아니다. 설령 아버지가 죽었다 하기 로서니 딸마저 죽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돌려 생각해 보아도 그의 걱정은 놓이지 않았다. 만일 장인이 죽고 안해는 살았다 해도, 더욱 그의 애를 졸이게 하는 또 다른 켯속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도 이별하고 어버이조차 여읜 외로운 딸과 안해! 그 고단한 신세를 엿보는 이리떼 같은 부석의 제자들이 마음에 켕긴다.
그 중에도 우두머리 가는 팽개(彭介)의 모양이 언뜻 보인다. 그 후리 후리한 키와 감때사나운 상판이 엎어누를 듯이 쑥 나타난다. 그 얼굴은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그는 아사달보담 나이도 네 살이 위요, 부석의 문하에 들어오기도 아사달 보담 일년이 먼저였다. 집안이 그리 궁색하지 않은 탓으로, 제자들 가운데 차림 차림도 가장 말쑥하였고 잔돈푼도 곧잘 써서 동무들의 마음을 사 기도 하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난한 스승의 살림도 가끔 도와 주는 듯 하였다.
재조는 무디었지만 나이 값과 돈냥 덕으로 여러 동무를 휘두르고, 한 동안은 어엿한 수제자로 내남 없이 허락하였던 것이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으되, 수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어여쁜 아사녀의 신랑감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늙어 가는 스승도 든든하고 넉넉한 팽개와 같은 사위를 얻어 노경을 의탁하려 하였는지 모르리라.
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갈수록 아사달의 재조와 솜씨는 너무도 뛰어났다.
예술을 생명으로 하는 부석의 사랑은 마츰내 아사달에게 쏟아지게 되었다.
이 눈치를 챈 팽개는 푼푼한 나머지 울분한 생각을 꽃거리(花柳界)에 풀기 시작 했다. 그런 소문이 들릴수록 스승의 눈 밖에, 더군다나 장래 장인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빛나는 승리는 아사달에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뭇 제자의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눈총을 맞으면서 아름다운 아사녀의 남편이 된 것이다.
아사달이 기쁨의 절정에 올랐다면, 낙망의 구렁에 천길 만길 떨어진 것은 묻지 않아도 팽개이리라.
그러나 팽개는 그런 사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안 했다.
혼인날에도 다른 제자보담 오히려 더 일찍이 와서 모든 일을 총 찰 하였고, 모꼬지( 宴會) 자리에서도 가장 기쁜 듯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즐기었다.
아사녀를 앗기었으니 팽개는 인제 스승의 문하에 발을 끊으리라 하는 것 이 여럿의 일치된 공론이었으나 팽개는 여상스럽게 출입을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전보담도 더 성근하게 다니었다.
그의 배짱은 수수께끼였다.
하루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키다리 장달(長達)이란 제자가 그 꾸부정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았다가 팽개를 보고 무두무미하게.
"원 자네는 비윗장도 좋아."
하고 놀리는 가락으로 말을 툭 내던졌다.
"이 짜디짠 친구가 이건 또 웬 수자기야? 어째 내 비윗장이 좋단 말이냐?"
"나 같으면 벌써 발그림자도 않을 텐데…… 그래도 못 알아듣겠니? 이 될 뻔댁아!"
하고 히히 웃어 버린다.
"응, 그 말이야? 그러면 계집 뺏기고 스승마저 잃어 버리게, 허허."
하고 팽개는 아사달을 향하여 능글능글하게 웃어 보이었다.
그 능글맞은 웃음이 아사달에게는 도모지 잊혀지지를 않았다. 웬일인지 그 웃음이 무서웠다, 소름이 끼치었다.
지금도 탑을 돌며 멀리 안해의 신상을 생각할 제, 그 흉물스러운 웃음이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이놈 아사달아, 이걸 좀 봐라, 허허."
팽개는 앙탈하는 아사녀를 두리쳐 끼고 역시 그 흉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내가 왜 이런 불길한 생각만 하는고?"
아사달은 진저리를 치며, 제 앞에서 그런 환영을 떠다 박지르듯이 팔을 내 저 으 며 급히 걸어보았다. 그래도 불길한 환영들은 꼬리를 맞물고 굳이 굳이 떠나온다.
16
아사녀를 흠모하기는 결코 팽개 하나만이 아니다.
키다리 장달, 되바라진 작지, 웅성 깊은 싹불, 여낙낙한 웃보……. 어느 제자치고 아사녀를 내맡겨도 마음을 놓을 만한 위인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었다.
그들의 환영도 하나씩 둘씩 번갈아 들며 제각기 다 다른 비웃음을 던진다.
아사달은 눈을 멍하게 뜬 채로 흉측한 꿈을 꾸어 나려간다.
그 흉한들이 겹겹이 에워싼 한복판에 아사녀는 울면서 질팡질팡한다. 이 틈을 비잡아도 무쇠 같은 팔뚝들이 막고 저리로 버르집어도 그 가냘픈 몸을 빼 쳐 낼 길이 없다. 마지막엔 기진맥진하여 그대로 쓰러지매 사나운 짐승의 떼는 우 하고 달겨든다!
"무슨 그럴 리야 있을까? 저희들도 사람이거니 스승의 은혜를 생각한 들 그 외동딸에게 그런 몹쓸 짓이야……."
아사달은 지겨운 제 환상을 스스로 털었다.
집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인도 그저 생존해 계시고 아사녀도 몸 성히 잘 있을 것이다. 떠날 때보담 얼마를 더 자라나고 더 아름다웠졌는지 모르리라. 내 올 때를 손꼽아 기다리며 바시시 사립문을 열고 서 울 길을 바라보는지 모르리라. 그 갸름한 종아리에 인제는 살이 올랐는가.
아사달은 견딜 수 없었다.
부여가 그립다. 스승이 그립다. 안해가 그립다.
탑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워 버리고 지금 당장 고장으로 날아가고 싶다.
달 비추인 사자수는 금물결 은물결이 굽이굽이 넘노리라. 병상에 누웠던 스승은 얼마나 반기실까. 방싯 웃는 아사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리라.
이 먼 데를 왜 왔던고! 스승도 없고 안해도 없는 이 먼 데를 왜 왔던고.
대공을 이루리란 불 같은 정열에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허둥지둥 길을 떠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이렇게 그리웁고 마음이 졸일 줄 알았더면 아무리 스승의 명령이 엄 하더래도 한사코 좇지를 안 했을 것이다.
서울에 큰 절을 이룩하고 그 절에 탑을 모시는 데 천하의 명공을 구 한다는 방이 내어걸리기는, 그들이 혼인한 지 한 일 년 안팎이었다.
저자에 갔다가 이 방을 보고 아사달의 가슴은 뛰었던 것이다. 속에 가득 한재조와 솜씨는 쏟힐 곳을 찾지 못하여 발버둥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와서 스승에게 그 사연을 알리매 늙은 스승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소스라 치며 애들처럼 기뻐하였다.
"인제야 네 재조와 솜씨를 보일 때가 왔구나. 이런 기회란 사람의 일생에 몇 번 있는 것이 아니다. 어서 행장을 수습해라. 어디 서라벌 석수들과 좀 겨뤄 보아라."
스승은 흰 수염을 거스리며 매우 흥분된 말씨다. 그리고 이튿날로 길을 떠나라고 서둘렀다.
그는 사랑하는 제 제자의 예술적 대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빛나는 전통의 솜씨를 자랑하기 위하여, 단 하나 사위를 내놓는 헛헛함도 잊어 버린 듯 하였다. 귀여운 딸의 안타까운 이별도 돌아보지 않는 듯하였다.
아사달은 신이야 넋이야 하며 행장을 재촉하였으나 안해와 나누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뻑적지근 않을 수 없었다.
새 정이 들까 말까 한 안해! 그러하다, 그들은 아직 정조차 흐뭇하게 들지를 못하였다. 어린 안해는 언제든지 그를 부끄러워하였고, 그도 또한 무슨 깨어지기 쉬운 보물처럼 안해를 소중히 알아, 흥껏 마음껏 다루지를 못 하였다. 부부가 되기는 햇수로 따져보면 벌써 이태를 잡아들건마는 그들에게는 장가들고 시집온 지가 바루 어제런 듯하였다. 행복스러운 날은 꿀보담 더달고 번개보담 더 빠르게 지나간 것이다.
이러한 안해이러니 그와 어떻게 작별을 한 것인가. 그래도 자기는 사 내 대장부다. 대공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을 도지게 먹을 수 있었지만, 아사녀는 얼마나 슬퍼할까. 차마 그 앞에서도 갈린다는 소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내일같이 길 떠날 오늘.
그는 아사녀와 단둘이 마주치는 동안을 될 수 있는 대로 늘이려 하였다.
낮에는 이리저리 피할 수가 있었지마는 해는 어찌 그리 엉덩둥 지나가는지 어느새 저녁이 되고 말았다.
안해와 만날 시각이 자꾸자꾸 다가들자 그의 마음은 조 비비는 듯하였다.
저녁에 그를 보내는 조그마한 잔치가 벌어진 자리에서도 그는 끝까지 몸을 일으키려 들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 밤이 이슥한 뒤에야, ' 인제는 잠이 들었겠지?’
하고 아사달은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돌아왔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해는 거물거물하는 촛불 밑에 그린 듯이 앉아 있지 않은가.
17
아사달은 제 안해가 자려니 지레짐작을 하였다가 그저 앉아있는 것을 보고적이 놀래었으나, 이내 미안한 생각이 불 일듯 하였다.
안해는 자기 들어올 때를 고대고대하며 그 곤한 잠도 잊어 버리고 저렇게 단정하게 앉았는가 하매 그는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애연하였다. 그런 줄은 모르고 일부러 만날 동안을 질질 끌은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오늘 밤 내일 아침까지만 보면 몇 해를 그릴 것이 아니냐. 그 귀중한 시간을 어쭙잖은 이허로 헛되이 넘긴 것을 생각하면 뼈가 저리었다. 한 치 한 푼을 다투어도 오히려 아까울 것을.
"왜 입때 자지를 않소?"
아사달은 안해의 앞에 주저앉으며 번연히 아는 잠 안 자는 까닭을 물었다.
"고대 자요."
하고 안해는 방긋 흩지게 웃어 보인다. 그 웃음 속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듯하다.
"……"
"……."
부부는 마주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곤한데 눕구려."
"눕지요."
그러나 둘이 다 누우려는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
"……."
또 한동안 말은 끊어졌다.
"나는 내일 서라벌로 떠나가오."
한참 만에야 큰 힘을 써서 가까스로 허두를 내놓고 안해의 기색을 살피었다. 아사달은 이 말만 끄집어내면 단박에 슬픔의 회호리바람이 일어나려니하였다. 울며불며 발버둥을 치려니 하였었다.
그러나 안해는 의젓하게 도사리고 앉아 있을 뿐, 대답도 간단한 한 마디 였다.
"나도 알아요."
이 홀가분한 한 마디가 만근의 무게를 가졌다. 천 마디 만 마디의 슬픈 원정과 설운 사설보담도 몇 갑절 되는 뜻을 풍겼다.
그 자그마한 가슴에 커다란 고통을 부둥켜 안은 채로 꿀꺽꿀꺽 참고 있는 모양이 못 견디리 만큼 애처로웠다. 아사달은 제 쪽에서 엉엉 목을 놓고 울고 싶었다.
"내일은 일찌거니 길을 떠나실 텐데 정말 어서 주무셔요."
하고, 아사녀는 깔아 놓은 이부자리를 다시금 매만지다가 갸웃이 남편을 쳐다본다. 방 안은 덥지도 않은데 그 오똑한 코 끝에는 땀방울이 송송 솟아 났다. 슬픔을 누르노라고 마음속으로 무한 힘을 쓰는 까닭이리라.
아사달은 대번에 목이 꽉 잠기는 듯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어서 주무셔요."
아사녀는 또 한번 조른다.
아사달은 그대로 쓰러질 듯이 누웠다.
"이렇게 바루 누우셔요."
안해는 베개를 곤쳐 비고 이불의 접힌 자락을 펴서 따둑따둑 덮어주고 나서 물끄러미 남편의 얼굴을 나려다보다가 남편의 쳐다보는 눈길과 딱 마주치자 그 젖은 눈동자는 달아날 곳을 몰라 잠깐 허전거리는 듯하더니 어색하게 상긋 웃고 저도 따라 눕는다.
아사녀는 눕는 길로 곧 눈을 감는다.
이윽고 아사달은 고개를 쳐들어 안해의 얼굴을 자세자세 보고 또 보았다.
제 머리 속 깊이 새기어 넣으려는 것처럼.
은행 껍질 같은 눈시울이 띠룩띠룩 움직이고 남유달리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떠는 것을 보면 안해도 눈만 감았다 뿐이지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곧 알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해는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남편을 보고, "아이, 큰일 났네. 입때 안 주무시고 내일 어찌 길을 떠나시어!"
살짝 눈썹을 찡기고 제 얼굴을 치우는 듯이 돌아누우려 하였다. 마치 제 남편의 잠 안 자는 원인이, 제 얼굴이 그 눈앞에 놓여 있는 탓만 여기는 듯 하다.
아사달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돌아누우려는 안해를 끌어당기면서 그 가냘픈 몸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이런 때에도 수줍은 안해는 고개를 숙여 남편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파묻는다. 그 언저리가 뜨겁고 축축해지는 것은 안해도 인제야 소리 없이 우는 탓 이 리라.
한참 만에야 하나로 녹아드는 듯하던 두 몸은 떨어졌다.
안해는 먼길 가는 남편에게 끝끝내 요사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느 결엔 지 눈을 닦고 또 닦은 모양이었으나 아무리 해도 젖은 속눈썹은 옥 가루를 뿌린 듯 번쩍이고 발그스름해진 콧등이 더욱 안타까웠다.
18
탑을 도는 아사달의 발길은 느리게 지척거린다.
그날 밤 안해와 지내던 정경이 그림자등(影燈)에 어른거리는 환영처럼 뚜렷이 비친다.
그들은 마츰내 그날 밤을 꼬박이 밝히었다. 서로 어서 자라고 권하고 조르면서 저마다 모를 사이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이었다. 서로 외면을 하고 등을 졌다가 어느 결엔지 뚫어지게 마주보고 있는 그들이었다.
분명히 떨어져 누웠는데 언뜻 깨달으면 두 뺨을 마주 비벼대는 그 들이었다.…….
이별을 아끼는 밤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헤프다.
어느덧 아츰이 되었다. 안해는 아츰밥을 지으러, 남편은 미진한 행장을 꾸리러 이 방을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먼저 일어선 안해가 방문 앞까지 나가다가 다시 돌 쳐서 서너 걸음 도루 들어온다. 그는 작별 인사를 잊었던 것이다. 길 떠날 시각이야 아직도 얼마 남았지만 그들 단둘이 하는 작별은 이 자리가 마지막이 아닌가.
"부디 안녕히 다녀오셔요."
"부디 잘 있소 "부디 대공을 이루셔요."
"그야!"
하고 아사달의 젊은 눈동자는 자신 있게 번쩍이다가,
"장인이 저렇게 늙고 편찮으시니……."
하고 얼굴을 흐린다.
안해는 무슨 긴히 부탁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붓이 다시 앉는다.
"그런 걱정일랑 조금도 마셔요. 내가 어쩌든지 모시고 꾸려 갈 테에요.
몇 해가 걸리든지 부디 대공만 이루셔요."
하고 얼굴빛을 바루며 단단한 결심을 보이었다.
"부디 대공만 이루셔요."
나직하나 힘있던 그 말소리! 지금도 아사달의 귀를 울리고 마음을 울린다.
안타까운 이별도 애닯은 그리움도, 남편의 재조를 빛내고 이름을 이루기 위 하여 즐기어 견디려는 그 씩씩한 태도! 언제 생각해 보아도 든든하고 고마웁고 눈물겨웁다.
아직 철부지로 알았던 안해가 어느 틈에 그렇게 장남해졌을 줄이야. 물 보담 더 무른 줄 알았던 그 마음이 그렇게 여무질 줄이야.
생각할수록 새록새록이 안해가 그리웁다.
어여쁘고 의젓한 안해! 그리운 그 얼굴을 단 한번 눈 한번 깜짝일 짧고 짧은 동안에나마 보여준다면 그는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으리라.
마지막으로 안해를 보던 애틋한 정경 한 토막이 또 서언하게 나타난다 …….
여러 동무들에게 옹위되어 사립문 밖까지 나왔다. 병중의 장인도 기침을 쿨룩쿨룩 하면서도 지팽이에 몸을 버티고 지축지축 따라 나온다.
그는 재바르게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인제 아주 정말 길을 떠나는고나.’
하매, 거기까지 범연히 나온 그도 다시 한번 안해의 얼굴이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해의 얼굴은 거기 없었다. 별안간 큰 쇳덩이가 발목에 매어 달리는 듯 걸음이 내켜지지 않았으나 마음을 도지게 먹고 일부러 쾌활하게 땅을 쾅쾅 구르는 듯 걸었다.
길 모퉁이를 도는 데 왔다.
"인제 고만 들어가십시오."
아사달은 걸음을 멈추고 스승에게 더 따라나오기를 말리었다.
"응, 그래 그럼 잘 다녀오너라, 쿨룩 쿨룩. 머 먼길에 몸조심하고, 쿨룩쿨룩. 원 몹쓸 기침이……."
튀 하고 가래침을 배앝는데 그 늙은 눈에 눈물이 걸씬걸씬한 것은 한갓 기침 탓만 아니리라.
"네"
하는 아사달의 대답도 목이 메이었다.
무릎을 꿇고 마지막 작별 절을 하고 일어서면서 언뜻 제가 지금 나온 사립문을 바라보았다.
돈짝만큼씩 한 새 잎사귀가 파름파름하게 돋아나는 느티나무 밑에 안 해가 외로이 서 있지 않은가. 여럿이 우 나올 대에는 부끄러워서 같이 따라 못 나오고 뒤미처 그의 등뒤에서나마 작별을 하러 쫓아나온 것이리라.
슬쩍 한번 오고간 두 눈길!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사녀, 아사녀!"
아사달은 소리를 내어 가만히 불렀다. 그 이름이나마 입술에 올려 보고자.
발은 제 돌던 자욱을 찾아 제대로 돌아가건마는 아사달의 마음이 탑 돌기를 떠난 지는 벌써 오래다.
"아사녀, 아사녀!"
그는 또 한번 불러 보았다.
안해는 완연히 제 앞에 와 서는 듯하다.
하늘만 쳐다보던 환상에 싸인 눈을 앞으로 돌릴 제 과연 제 안해는 제 앞에 의엿이 서 있다! 일순간 꿈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는 흑 하고 놀랜 것이 다. 한 걸음 바싹 더 다가들며 똑똑히 제 안해의 얼굴을 살피매, 그는 물론 제 안해가 아니었다. 제 안해 낫세만한 다른 여인이었다.
설레는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탑 돌기를 시작하였건만, 한 번 어지러워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무엇에 쫓기는 듯이 제 처소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19
"털아, 털아, 얘 털아!"
주만은 아까부터 가쁜 듯이 털이를 깨우고 있었다. 털이는 앙바틈한 다리를 큰 대(大)자 모양으로 퍼더버리고 입 가장자리에 침을 께 흘리며 곤 하게 잔다.
"얘, 털아! 좀……."
주만은 털이의 팔뚝을 잡아 뒤흔들며 귀에다 대고 소리를 딱새같이 질렀다.
털이는 '응, 응’잠꼬대를 하고 흔들린 팔뚝으로 숭숭 맺힌 제 이마의 땀을 문지르고는 다시 돌아누워 버린다.
"얘, 얘, 좀 일어나거라. 일어나요."
깨우는 이는 바작바작 애가 마르는 듯. 자는 이는 꿈쩍꿈쩍 몸을 움직이는듯 하다가도 이내 쌕쌕 코 고는 소리를 낸다.
"얘, 어서 좀 일어나. 원 잠귀도 이렇게 어두운가? 털아, 털아!"
주만은 돌아누운 털이의 어깨를 이리로 잡아 제치며 짜증을 낸다.
"네, 네."
털이는 코로 대답만 할 뿐이요 그저도 잠을 못 깬다.
"얘, 좀 얼른 일어나라니까. 얼핏, 얼핏 좀 일어나."
이번에는 깨우는 이가 입술을 쪼무리고 옷이 수세미같이 말려 올라가서 벌겋게 드러난 자는 이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래도 못 일어날까, 이래도 못 일어날까? 털아, 털아!"
"아야! 네."
하고 털이는 별안간 나는 듯이 일어 앉는다. 그제야 자는 이는 주인이 깨우는 줄 알고 질겁을 하며 일어난 것이나 아직도 잠은 덜 깨어서 연상 조아 붙는 눈을 부빈다.
"얘, 정신을 좀 차려, 좀."
주만은 힘 없이 끄덕하는 털이의 머리를 사납게 회술레를 돌리며 재우 친 다.
털이는 또 한참 주먹으로 눈을 부비고 닦고 나더니 발그스름하게 잠발 이선 눈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얘, 무슨 잠이냐? 그래도 잠이 깨지를 않니?"
"왜, 안 깨긴요, 벌써 깬걸입시오."
"그렇게 불러도 일어나지를 않으니."
"아마 깜박 잠이 들었던가 봐요, 헤헤."
깬 이는 무안한 듯이 또 한번 웃는다.
"깜박 든 게 다 뭐야? 그렇게 사람의 애를 태워."
주만은 깨우느라고 진땀을 뺀 것이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는 듯 털이를 노려본다.
"원, 원수엣년의 잠이!"
하고 털이는 제 머리를 제 주먹으로 몇 번 쥐어지른 뒤에.
"그저 죄송합니다. 무슨 심바람을 하랍시오?"
절이라도 할 듯이 사죄를 하고 착착 부닌다.
"왜 또 알찐거리기는! 어서 옷이나 입어요."
주만은 내던지듯 명령을 나리었다.
"왜요! 왜 무슨 큰일이 났어요?"
털이는 그제야 확실히 잠이 깨며 저도 놀랜 듯이 서둔다.
"어서 옷이나 입으라니까."
털이가 발딱 일어나 부산하게 속옷의 구김살을 펴고 치마를 떼어 입고 버선을 신는다.
"누가 그 옷 말야?"
주만은 털이의 다 해진 치맛자락과 깜동 쪽제비가 된 버선목을 바라보다가, "나들이 옷을 입어요. 어디 좀 갈 데가 있으니."
다시 영을 나렸다.
"어디를 갑셔요? 벌써 날이 다 새었납시오?"
"얘 잠꼬대 작작 해라. 무슨 날이 벌써 새니? 아직 자시도 안 되었을걸."
"네! 아직 자시도 안 되었납시오? 그러기 첫잠이 깜박 들었던 거야. 첫 잠이 들면 동여가도 모른다고 하는 걸입시오."
털이는 기어코 제가 잠을 얼핏 못 깬 변명을 하고야 만다.
"어서 새 옷을 좀 갈아입어요. 제발 좀."
주만은 올 듯이 재촉을 한다.
"아니, 자시라면 한밤중 아녜요?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시랍시오?"
하고 자던 이는 그 토끼 같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수다 고만 좀 떨어요. 나 가자는 대로 가면 고만 아니야."
주만은 전에 없이 황황해 한다. 털이는 입을 아 벌린 채 수상쩍다는 듯이 제 아가씨의 기색을 살피었다. 홰를 올리고 거물거물하는 밀초 불빛에도 제 아가씨의 얼굴이 이글이글 타는 듯이 붉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새까만 눈썹 위에도 심상하지 않은 기운이 떠돈다. 더구나 그 옷 맨드리를 보고 놀래었다.
주만은 남빛 반비를 입고, 수놓은 비단 바지를 입고, 갈데없는 귀 공자로 차리지 않았는가.
20
주만의 어머니 사초(史肖)부인은 외동 자식이 딸 된 것이 원통하여 이따 금주만을 남복을 시키었다. 수놓은 통 손 바지에 남빛 반비를 떨쳐 입고 세 포복 두를 제켜 쓰고 백옥 허리띠에 구실끈을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손잡이에 금을 올린 환도를 느슨하게 차고 나서면 동뜨게 아름다운 귀공자였다. 작난 꾸러기 주만이도 남복을 좋아하고 화랑의 흉도 곧잘 내었다.
서리 같은 칼날을 뽑아들고 공릉 버선 위에 눌러 신은 목화로 터벅터벅 땅을 구르며, 그 영채 도는 눈을 제법 무섭게 부릅떠서 악 소리를 치고 달겨들면 털이는 혼뜀을 하고 사초 부인은 허리를 분질렀다.
그러나 이런 작난도 나이가 차 가자 점점 그 도수가 줄고, 이마적에는 별로 한 적이 없거늘 이 밤중에 남장을 차리고 어디를 가자는 것인가. 털이도 한옆으로 겁도 나거니와 의심증이 더럭 났다.
"아이그 아가씨, 왜 또 남복을 입으셨소? 또 쉰네를 혼을 내시려고 그럽시오?"
하며 털이는 벌써 몸단속을 마치고 일어선 주만을 보았다.
"왜 또 네 목에 칼을 겨눌까 봐 겁이 나니?"
주만은 방싯 웃고 제 손으로 허리띠를 휘 한 번 더듬어 보이며,
"이 것 봐, 어디 칼이 있니? 오늘밤에는 칼은 안 찼으니 그렇게 겁낼 건 없어. 어서 따라나서기나 해라."
하고 방문을 열고 나간다. 털이도 옷을 다 입고 뒤를 쫓아나가다가 주춤 섰 다.
"아유, 이렇게 어두우니 누가 뺨을 쳐도 알갑시오?"
"그러면 초롱 준비를 할까?"
주만은 진국으로 묻는다.
"어디를 가시기에 초롱 준비까지 하신단 말씀이에요? 방안의 촉대를 좀들고 나오랍시오?"
"촉대를 들고 갈 수야 있나?"
"그럼 어디를 멀리 가시랍시오?"
"가만 있거라."
주만은 무엇을 생각하듯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벽장에서 불이나게 초 몇 자루를 내어 털이를 준다.
"너 초롱은 어디 있는 줄 아니?"
"초롱이야 광에 들었습지요."
"광에…… 광문이 잠기지 않았을까?"
"왜 안 잠겨요. 햇구녕이 훤할 때 벌써 닫아 거는댑시오."
"그럼…… 그럼 그 열쇠는 누가 맡았을까?"
"원 아가씨도, 마님이 맡으셨지 누가 맡아요?"
"……."
주만은 잠깐 말이 없다.
"초를 몇 자루씩 내어 놓으시고 대관절 어디를 가시랍시오? 이 깊은 밤에?"
털이는 제 주인의 행동에 갈수록 불안을 품는 눈치였다.
"어머니가 맡으셨다? 어머니가……."
주만은 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글쎄, 가실 곳을 좀 말씀을 합시오. 그러면 제가 무슨 도리든지 차릴 테니."
"만일 열쇠를 찾으러 갔다가 어머니께서 잠을 깨시면……."
"어이구 또 광문이 여낙낙하기나 한뎁시오? 어떻게 빽빽한뎁시오. 한 번열자면 왈그덕달그덕 왼 집안 사람이 다 잠을 깰 텐데……."
털이는 벌써 주만의 뜻을 알아차리고, 또 광문 열 소임은 갈데없이 제 차지인 것을 깨닫자 미리 방패막이를 한 것이다.
방 한복판에서 서성서성하고 있던 주만은 펄썩 주저앉는다.
"어떠하나!"
그 소리는 벌써 울먹울먹한다.
"불국사엘 가시려고 그러시지요? 이 밤중에 안 됩니다. 안 되고 말 곱시오. 대감께서나 마님이 아셔 봅시오. 큰일 납니다, 큰일 나. 애꿎이 이 털이란 년이 물고가 나겝시오. 아유, 생각만 해도 소름이 쪽쪽 끼치는 뎁 시오. 맙시사, 맙시사."
털이는 벌써 주만의 흉중을 꿰뚫어보고,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설령 초롱을 꺼낸다손 치더래도 그 먼 데를 어떻게 걸어가십니까? 게까지가 이십 리는 잔뜩 될 걸입시오. 한낮에도 어려울 텐데 이 캄캄 칠야에 말도 안 타시고, 수레도 안 타시고 보행을 하시다니 될 뻔이나 한 말씀이에요? 자, 수레나 말을 꺼낸다고 해 보십시오. 아무리 쉬쉬한들 자연 왁자지껄해서 집안이 벌컥 뒤집힐 걸입시오. 천만다행으로 몰래몰래 안장을 짓는다 해도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내일이면 소문이 짜할 것 아닙시오……?"
"듣기 싫어!"
털이가 안 된다는 까닭을 미주알고주알 캐내서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데 주만은 참다못하여 소리를 빽 질렀다.
21
불국사에서 돌아온 날 밤을 주만은 뜬눈으로 밝히었다.
눈만 감으면 그 안타까운 석수의 모양이 선연하게 눈시울 속으로 들어선다. 처음 왕께 알현할 제 어색하던 그 모양이 떠올랐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전허전하던 그 눈매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땅바닥에 거의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광경도 우스웠다.
주만은 제 옆에 마치 그 석수나 있어서 놀려먹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어가며, "이렇게?"
하고 벼개에 제 이마를 푹 파묻어서 흉을 내보이었다.
탑을 돌 제 그 꿈꾸는 듯한 느린 걸음걸이, 회호리바람같이 달음질을 치던 그 열정 가득한 행동들이 어른어른 눈앞에 지나간다. 달빛으로 더욱 희게 드러난 코, 그 열이 오른 듯한 붉은 입술이 한량없이 그리웠다. 그 청청 한 목소리가 바루 귓가에서 나는 듯 나는 듯하다…….
첫 여름밤은 고요하다. 창 밖은 실바람도 불지 않는지 잎사귀하나 간댕하 지도 않는 듯. 찌잉 하고 귓속만 우는데 문득 사푼 하는 무슨 소리가 나는것 같다.
주만은 귀를 기울였다. 갈데없는 인기척 소리다. 그 발자욱은 가만가만히 걷는 듯 마는 듯 제 방 가까이 와서 사라진 것 같다. 몰래몰래 들어온 사람의 입김이 완연히 문풍지에 서리듯.
'그가 왔고나, 그이가 왔고나.’
머리도 없고 끝도 없이 주만의 가슴에는 이런 환상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그는 이불 자락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쏜살같이 문을 열어 젖 뜨리 다가 말고 제 생각이 너무 헛되고 어림없음을 깨닫자 춤추는 촛불 아래에서 호젓하게 혼자 웃었다.
초도 벌써 다 닳아 옥촉대 밑바닥에 촛농이 켜켜이 앉았다.
주만은 새 초를 한 자루 꺼내어 다시 붙이었다.
그도 이 밤에 잠자기는 단념한 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환상은 꼬리에 꼬리를 맞물고 한번 사로잡은 제 아름다운 포로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저와 그가 정면으로 마주칠 때 흑 하고 그가 제 앞으로 몇 걸음 다가들던 광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왜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을까? 그의 얼굴엔 반가워하는 빛이 역력 히 움직이었다. 곧 나를 부둥켜안기나 할 듯이 달겨들 제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서 버린 것은 무슨 곡절일까?
그도 분명히 나를 알아본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본 것이다. 내 속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런 놀라운 재조를 가진 그이거늘 어찌 조그마한 여자의 흉중을 살피지 못할 것이랴.
그렇다면 나를 사람으로 여겼을까. 단 한번 먼 빛으로 보고 그대로 마음을 쏟아 버린 나를 상없다고 하지나 않을까.
주만을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누가 곁에서 보기나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었다.
"아이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혼잣말로 속살거리고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러고도 미협 한 듯이 이불 속에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잠깐이다. 타오르는 정열은 걷잡을래야 걷 잡을 수 없었다.
그도 나를 생각하는지 모르리라. 그도 나를 그리며 이 밤을 꼬빡이 새우는지 모르리라. 그렇게 반가워하다가 그렇게 물러선 것은 그의 정과 의젓한것을 한꺼번에 알리는 듯도 싶었다.
왼몸이 끓고 얼굴이 확확 달아서 뒤덮었던 이불 자락을 걷어찼다.
암만해도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그립고 그리워 참을래야 참을수 없다.
주만은 마츰내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밤으로 아사달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세상없어도 만나고야 말고싶었다. 당장 이 시각에 그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벗었던 옷까지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주만은 살그머니 창문을 열었다. 제 갈 길을 미리 보아나 두려는 것처럼.
선뜩한 밤공기는 그의 불같이 타는 뺨을 씻어 준다.
벽오동의 너푼너푼한 잎사귀에 다 기울어진 조각달이 뉘엿뉘엿이 걸렸다.
주만은 이윽히 지는 달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가 저를 타이르듯이 소곤거렸다.
"내일 날이 밝거든……."
22
주만은 남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털이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돌아 누워 버렸다.
이윽고 그 어깨가 들먹들먹한다.
"아이 저를 어째? 아가씨가 우시는구먼."
털이는 딱하다는 듯이 제 혼자 종알거렸으나 무엇이라고 달래야 옳을지 몰라 매우 난처해 한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성미를 잘 안다. 싹싹할 때에는 연한 배 같지마는 한번 역정을 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일 어설피 달래었다가는 또 무슨 벼락을 만날는지 모른다. 아까만 해도 '듣기 싫다’는 불호령을 받지 않았느냐. 주만의 어깨는 갈수록 더욱 사납게 들먹거린다. 필경엔 훌쩍 훌쩍하는 울음소리를 내고야 만다.
인제 무슨 벼락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아가씨를 그양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주만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린다. 털이는 손을 들어 그 어깨를 흔들려다가말고 한숨을 휘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주만은,
"왜 이렇게 가까이 왔니? 저리 가려무나."
볼메인 소리나마 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다.
"아가씨 아가씨, 왜 우십시오? 진정을 하시고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쇤네가 죽기 한사하고 아가씨의 원을 풀어드릴 테니."
털이도 덩달아 울먹울먹하며 등뒤에 대고 간곡한 목소리를 떨었다.
"울기는 누가 울어?"
주만은 역시 돌아보지도 않고 되받았으나 울음을 끈치려고 애를 쓰면서도 말소리는 여전히 껄떡인다.
"안 우시면 왜 돌아누워 계십시오? 쇤네를 좀 보십시오. 이것 보십시오.
이 새 옷이 죄 꾸겨집니다. 자 바루 좀 누우십시오."
"그까짓 옷이야 좀 꾸겨지면 어떠냐?"
"어유 그 옷이 이만저만한 옷입니까? 한 벌 다시 장만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뎁 시오?"
"그까짓 돈 드는 걸 누가 아니? 꾸겨지면 안 입으면 고만 아니냐?"
"웬걸입쇼. 앞으로 이 옷 쓰일 때가 많을 걸입시오."
"내게 남복이 당하냐? 오늘 밤에 꼭 한 번 쓰려 하였더니만……."
"오늘 밤만 날인갑시오? 앞으로도 이런 밤이 얼마를 올 걸입시오."
털이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듯이 주만은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앉아 웃옷의 구김살을 편다.
눈물 방울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주인의 눈을 바라보며 털이는 '옳지!’하 고, 제 무릎을 제가 친다.
"쇤네가 좋은 꾀를 하나 생각해 드릴갑시오?"
"네 따위가 무슨 좋은 꾀가 있을라구?"
"왜요? 쇤네가 이래 뵈도 꾀주머니랍시오. 그만 일에 우시다니. 내일은 세상 없어도 쇤네가 불국사엘 모시고 갈 테니……."
"또 내일……."
주만은 재우쳤다. 또 내일! 과연 그에게는 여러 해포나 되는 듯싶다. 어젯밤에 그 날이 밝기를 기다린 그가 아니냐. 그러나 낮에는 더더군다나 몰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오늘 밤에는!"
그는 또다시 밤을 기다린 것이다.
단 하루 해를 보내기에 삼사월의 해가 길기도 길었지만, 그에게는 백날 천 날이 넘는 듯하였다. 그야말로 일일이 삼추 같은 이 길고 긴 해 동안에 궁리 궁리 해 낸 것이 남장을 차리고 털이를 데리고 불국사를 찾아가는 것 이었다.
밤이 든 뒤에는 또 집안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밤의 몇 시각은 낮보담도 더욱 길고 더욱 지루하였다.
남장을 갖추고 털이를 깨워 일으키고 막상 길을 떠나려 하니 어느 결에 달은 지고 캄캄 칠야에 불 없이는 댓 자국을 내어디딜 수 없었다. 이십 리나 되는 밤길을 걸어간다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이 뜻하지 않은 난관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기다렸던 오늘밤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매 참고 참았던 것이 고만 울음으로 터지고 만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자라난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그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는 줄 알았다.
"내일이라도 뭐 얼마가 남았납시오? 고대 밤이 밝을 것을."
털이는 달래기 시작한다.
"내일이면 무슨 좋은 수가 있니? 어디 말을 좀 해 보렴."
털이는 주만의 귀에 입을 대었다.
"저 내일 마님을 졸르십시오. 불국사에 불공을 올리러 가시자구요."
"기껏 좋은 꾀라는 게 그게야?"
"아닙시오. 쇤네 말대로만 하시면 꼭 됩니다. 왜 아드님이 없지 않읍시오? 이번 상감마마께서도 석불사에 공을 들여 동궁마마를 보시지 않으셨 납시오? 자꾸 동생을 하나 낳아 달라고 졸르십시오. 불국사는 새로 중수를 한 절이요, 그 부처님이 더 영검이 계시다고 졸르시면 될 것 아닙시오?"
주만은 그윽이 고개를 끄덕였다.
23
책상머리에서 조을고 있던 김성은 킹킹 콧소리를 하다가 재채기를 한 번 되게 하고 졸림 오는 눈을 떴다.
"오호호."
김성의 누이동생 아옥(娥玉)은 허리가 부러지게 웃어제친다.
"아이 우스워, 아이 우스워."
아옥은 때굴때굴 구은다.
그는 사랑에 놀러 나왔다가 제 오빠가 책상에 코방아를 찧고 있는 것을 보고 심지를 꼬아 코 안으로 비비어 넣은 것이다.
"이 대낮에 낮잠이 무슨 낮잠이에요? 고리타분하게."
"이 무슨 괴란쩍은 짓이람?"
오빠는 제법 점잔을 빼고 나무랜다.
"어이구. 그 조으시는 모양이란 꼴도 사나웁지, 이 책 속에다가 코를 비 벼 대고."
아옥은 한 팔로 제 머리를 휩싸고 펴 놓인 『시전(詩傳)』속에 제 얼굴을 뒤엎어 보인다.
오빠는 조아붙는 눈으로 삥긋이 웃는다.
"에그, 그 입 가장자리에 침이나 좀 닦아요. 어린애 모양으로 침까지 지르르 흘리고, 으흐흐."
아옥은 그 가느다란 실눈을 거의 감는 듯하며 연송 웃음을 내놓는다.
"요런 오두방정은! 지금 한창 재미난 꿈을 꾸는 판인데."
오빠는 웅얼웅얼하는 갈라진 목소리로 게두덜거리며 입가에 희게 눌어 붙은 침 자욱을 닦고 싱겁게 또 한 번 웃는다.
"꿈을 꾸었어요? 어디 재미난 꿈 얘기나 좀 해 봐요."
"애기가 무슨 얘기냐? 막 꾸려는데 네가 헤살을 놓은걸."
"그러면 채 꿈도 꾸지를 못하셨군요."
"말하자면 꿈의 서문을 초하다가 만 셈이지."
"뭐, 꿈도 서문이 있고 본문이 있나 뭐."
"그럼 꿈도 서문이 있고 말고. 본문을 지나면 발(拔)까지 있는 법이야."
"발은커녕 머리가 어때요?"
"무식쟁이란 할 수가 없군. 말까지 상스럽거든."
"왜 내가 무식쟁이예요? 『맹자』『논어』를 다 읽었는데 이까짓 ' 요조숙녀 책’ 만 보면 제일이야요?"
아옥은 책상에 놓인 『시전』을 못마땅한 듯이 손가락 끝으로 튀기었다.
"허, 성경현전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법이 아니야."
하고 김성은 펴놓은 책을 겹쳐서 한옆으로 치운다.
"입에다 대고 침을 께 흘린 제는 언제고? 오호호."
누이는 또 땍대굴 웃었다.
김성은 누이의 이번 말은 들은 체 만 체하고 아까 말만 가지고 티를 뜯는다.
"흥 '요조숙녀’책! 그러기에 무식하단 말이지. 『시전』이란 말은 못하고."
"누가 『시전』인 줄이야 모르나요? 오빠가 그 책만 펴들고 앉으면 밤낮 ' 요조숙녀’ 만 고성대독을 하니 그렇지. 남의 귀가 아프게시리."
"누가 네게 들으라고 하던?"
"그건 고만두고, 그 꿈의 머린가 발인가 얘기나 좀 해요."
"맑고 맑은 물가에 비둘기 한 쌍이 나려와서……."
"오호호, 비둘기가 왜 물가에 나려올꼬?"
"왜 '관관저구 재하지주로다’ 바루 『시전』에 있는걸."
"『시전』에만 있으면 고만이에요? 호호. 그러면 으레 ' 요조숙녀’ 가 또 뛰어나왔겠군요?"
"암 그렇지, 그야."
"그래, 그 요조숙녀가 누구입디까?"
"꿈 속에 나타난 걸 어떻게 분명히 아누?"
"모르긴 왜 몰라요. 꿈에 보고도 몰라요?"
"글쎄, 네가 잠을 깨워서 놓쳐버렸다는밖에."
"아이구, 가엾어라. 꿈에나 실컷 보시게 할 걸 갖다가……."
"그러기에 방정을 떨지 말란 말이야, 히히."
김성은 또 웃는다.
"그래, 오빠는 꿈에 본 요조숙녀를 정말 모르신단 말예요?"
"몰라, 몰라."
김성은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왜 이렇게 시침을 떼셔요? 그러면 내가 알으켜 드릴까?"
"내가 꿈을 꾼 것을 네가 어째 안단 말이냐?"
"그래도 난 오빠 속을 당경(唐鏡)보담도 더 환하게 데미다보고 있어요."
"어디 알아 맞춰 봐라."
"구실아기지 누구야?"
"아니야."
"아닌 게 뭐예요?"
"구실아기가 내 꿈 속에 나타날 까닭이 있나?"
"어느 건 오매불망이라고 꿈엔들 안 보이리."
"흥흥."
김성은 콧소리를 내고 제 아버지를 닮아서 맨숭맨숭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살이 벙글벙글 벌어진다.
24
아옥은 제 오빠가 싱글싱글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다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덩달아 웃어 버렸다.
"아이 오빠, 또 꿈에 좀 봤다고 그렇게 좋으시오? 생시에 만났으면 큰일나 겠네, 호호."
"아무렴."
김성은 역시 코로 웃는다. 그 실룩실룩하는 콧잔등엔 잔주름이 잡힌다.
"난 생시에 구실아기를 보았는데 그럴 줄 알았더면 오빠에게 좀 보여 드릴 것 갖다가."
"언제, 언제?"
김성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목이 마르게 묻는다.
"언제는, 저번 파일날 불국사 놀이에서 봤지."
"오. 옳지. 거기는 같이들 갔겠고나. 그런 줄 알았다면 나도 참예를 할 걸 그랬군."
"어규, 오빠 마음대로 갈 수는 있고요. 명부와 딸들만 데리고 오 랍 시 란분 부신데 오빠가 어떻게 참예를 해요?"
"멀리서 구경도 못 해?"
"그야 길가에는 거둥 구경꾼이 백절 치듯 했습니다."
"그것 봐. 내가 보려면 어떡하면 못 보았을라구."
"그러니 더 앵하시지. 더 기가 막히시지."
"그래, 정말 구실아기가 오기는 왔던?"
"그럼 거짓말로 왔을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네 말을 누가 믿누?"
"안 믿거든 고만두어요. 누가 믿으래요?"
"정말 구실아기가 왔으면 옷은 무슨 옷을 입었던?"
"남의 옷 입은 것까지 어찌 일일이 일러바쳐요? 입을 만치 입었지요."
"저것 봐. 무슨 옷을 입은 것도 모르니 봤다는 게 거짓말이지."
"그렇기에 고만둬요. 거짓말인 줄로만 알면 그뿐 아녜요?"
아옥은 그 실눈이 더욱 샐쭉해지고 두 볼이 보루통하게 부어 오른다. 참말을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우는 데 골딱지가 난 까닭이리라.
오라비는 그래도 나이가 세 살이나 위인지라 일부러 짓궂은 척을 하고 누이동생의 골을 슬슬 올려 가며 제 듣고 싶은 대꾸를 끌어내려 한다.
"그러면 옷은 고만두고 손목에 팔찌는 끼었던?"
"그럼 팔찌를 안 꼈을라구? 바루 번쩍번쩍하는 황금 팔찌던데."
"그래, 그 손목이 굵던 가늘던?"
"굵다면 굵고 가늘다면 가늘지."
"그리고 그 손은 어떻던? 조막손이지?"
"조막손은 왜? 손가락 끝이 갸름꺄름한 것이 천연 돋아나는 죽순 같던데."
"응, 그건 영악스럽게 보았구나. 그래 그 손가락에는 아무 것도 끼지를 안 했지?"
"아무 것도 안 끼긴! 옥가락지를 끼었던데."
"그래, 그 손을 어쩌고 있던?"
"원 내 참, 땀을 뺄 노릇일세."
하고 인제야 아옥도 제 오라비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실눈에 생글생글 웃음을 흘린다.
"손을 어쩌고 있기는! 들었던 놓았다 늘어뜨렸다 오그라뜨렸다……."
"그만하면 네가 주만을 보기는 보았구나. 그래 너를 보고 아무 말도 않던?"
"말이 무슨 말예요?"
"그래, 인사도 않더란 말이냐?"
"임금님이 계시고 어른들이 계신데 애들끼리 인사가 무슨 인사예요?"
"그렇게 너희들 사이가 데면데면하냐? 언제는 퍽 친하다고 하더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해요?"
"왜 팔월 한가위에 궁중에 들어가면 너희들끼리 베짜기 내기를 하고, 언제는 네가 져서 주만이 앞에 절까지 하고 「회소곡」을 불렀다더니."
"그야 어데 구실아기하고 나하고 단둘이 하는 게예요? 여럿이 패를 갈라가 지고 하는 노릇이지, 그럴 말로야 거기 모이는 여러 백 명도 모두 친하다고 하겠네."
"그러니 너희들은 만나도 인사를 않는단 말이냐?"
"그야 딱 마주치면 인사야 하지만,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야 좇아 다니며 알은 척할 까닭은 없지 않아요?"
김성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적이 실망을 하는 눈치였으나 또 잼처 물었다.
"불국사에는 너희들도 배를 타고 들어갔겠구나?"
"그럼."
"주만이와 한배를 탔던?"
"아녜요. 내 탄 배는 다른 배예요."
아옥은 어설피 주만의 말을 끄집어내었다가 제 오라비가 미주알고주알 캐고 파는 데 진절머리를 내고, 김성은 주만의 눈매 하나 몸짓 하나 빼어놓지 않고 알알 샅샅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데 제 누이가 말을 잡아떼려고만 하니 어디로 또 말머리를 돌려 볼까 하고 궁리궁리하였다.
25
오라비는 말허두를 어디로 돌릴까 하고 눈을 껌벅껌벅 하더니,
"배를 타고 들어가서는 너희들끼리 한자리에 모였겠구나?"
하고'그렇지?’하는 듯이 제 누이의 얼굴을 본다.
"그야 한테로 가기야 갔지요."
"나란히 서 있었지?"
"아니 멀리 떨어져 있었는 걸요."
"뭘 가까이 있고서는!"
"가까이는커녕 아주 서로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멀리멀리 있었다오."
아옥은 인제는 제 오라비의 꾀에 좀처럼 넘어가지를 않고 도리어 뱅글 뱅글 웃으며 애만 말린다.
김성은 바싹 제 누이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비대발괄을 한다.
"그러지 말고 그 날 지낸 일을 하나도 빼지 말고 죽 강을 좀 해라."
"글 배운 것도 강하기가 귀찮은데 그것까지 강을하란 말예요? 난 싫어."
"싫기는! 그럼 무슨 청이든지 들어 줄게."
"정말?"
"정말이고 말고."
"저 당서 가르치는 것 제발 고만둬 주어요. 그러고 아버지께서 잘 배우느냐 물으시거든 잘 배운다고만 해 주실 테요?"
"그래 그래, 그 청이야 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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